책 소개
▣ 출판사서평
북핵 문제를 둘러싼 동북아 외교 전쟁의 실상
살아 있는 한반도 외교 현재사(現在史)
이 책은 북한 핵과 관련한 한반도 외교의 중요한 순간마다 자리를 지키며 큰 그림을 그려온 저자 송민순의 기록이다. 송민순이라는 인물이 지나온 역사는 한반도 외교의 가장 핵심적인 증언이기도 하다. 그런 면에서 이 기록은 단순한 회고록에 그치지 않고 정치·외교 분야의 현재사(現在史)로서 의미가 깊다.
판문점 도끼사건 당시 외교관 2년차로서 분단 상황을 직시한 저자는, 또다른 분단 현장인 서베를린의 부영사로 일하며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사회의 민낯을 목격했다. 이후 북한보다 20여년 앞서 위성로켓을 발사했던 인도와 강대국 정치 수난의 역사를 지닌 폴란드 대사관 생활을 통해 20세기에서 건너온 핵과 냉전이 21세기 국제정치에 얼마나 큰 위력을 떨치고 있는지 체험했다. 외교부 안보과장·북미국장으로서 주한미군지위협정(SOFA) 1·2차 개정을 이끌어내며 한·미동맹 자체를 목표로 하기보다 한반도 미래를 정상화하는 동력으로 삼는 전략을 구상하기 시작했다. 또한 제네바 4자 평화회담에 차석대표로 참여하며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을 북·미가 아닌 남북 중심으로 끌어오는 데 주안점을 두면서, 이를 위해 남·북·미와 주변국들이 동석하는 다자간 협상 테이블을 만들 필요를 실감하게 되었다. 1975년 외교부에 들어가 2008년 장관 퇴임을 하기까지 저자는 한국이 한반도 문제의 당사자로서 동북아 정치 주체로 설 방안을 고심해왔다. 2005년 9·19공동성명은 이런 저자의 이력과 떼어놓고 설명할 수 없다.
4개의 부로 구성된 이 책은 개인의 자취와 국제 정세를 촘촘하게 엮으며 북핵 문제를 둘러싼 동북아 외교 전쟁의 실상을 보여준다.
베트남전의 여파가 채 가시지 않은 1976년 8월 18일, 공동경비구역에서 유엔군과 북한군 사이에 벌어진 판문점 도끼사건은 한반도의 휴전이 얼마나 취약한 상태인지를 전세계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당시 북한은 군사력 열세를 보완하고 전력수요를 충당하는 한편 정권의 위상을 세우기 위해 소련의 힘을 빌려 원자력발전소 건설과 핵무기 개발에 매달리고 있었다. 1989년 영변 핵시설이 관측위성에 포착되면서 북한 핵문제는 드디어 수면 위로 떠올랐다. 한반도 비핵화 논의의 시작을 알리는 사건이었다.
IAEA의 북한 핵시설 사찰 요구와 이를 거부한 북한의 NPT 탈퇴 및 IAEA 안전조치 협정 파기 선언, 북·미의 벼랑 끝 협상을 통한 제네바 합의(1994), 한반도 평화체제 수립을 위한 제네바 4자회담(1997), 북한의 미사일 개발 중지와 북·미관계 정상화를 축으로 하는 ‘페리 프로세스’, 남북 정상회담(2000)과 짧은 해빙기를 거쳐 9·11테러 이후 미국이 북한을 ‘핵 위협 국가’에 포함시키기까지, 이 시기 북·미관계는 여러 부침을 겪었으며 한반도 비핵화 논의에서 한국 외교는 아직 북·미관계의 주변에 머무는 실정이었다. 제네바 4자회담 당시 저자는 ‘진전이 없는 것 아니냐’는 언론의 질문에, “회담이 빙하의 움직임과 같다”고 답변했다(53면). 당장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몇년이 지나고 나면 변화를 감지할 수 있게 되는 것이 바로 외교의 결과임을 알려주는 대목이다.
제네바 합의가 북·미 양자 구도, 제네바 평화회담이 남·북·미·중 4자 구도였다면, 부시 행정부의 대북 강경책이 고조된 와중에 출범한 노무현 정부는 한반도 문제의 관련국을 남·북·미·중·일·러 6자로 확대하는 데 동의하며 충돌의 위기를 외교의 기회로 전환했다. ‘김정힐’이라는 말까지 들을 만큼 일본과 네오콘의 견제를 받은 미국 대표 크리스토퍼 힐, 만나면 담배부터 권하는 호방한 스타일의 중국 대표 우 다웨이, 일본인 납치 문제를 수시로 꺼내드는 일본 대표 사사에 겐이치로, 늘 한발 물러나 어떤 이익이 돌아올지 관망하는 러시아 대표 알렉산드르 알렉세예프, 그리고 ‘도살장에 들어온 느낌’이라며 복잡한 심경을 내비치는 북한 대표 김계관 등 자국의 이익과 개인적 입장 사이에서 고뇌하는 4차 6자회담 주역들의 모습이 실감 나게 묘사된다.
물론 각국의 이해관계가 다른 상황에서 합의를 도출하기는 쉽지 않았다. 특히 ‘완전한 비핵화’를 요구하는 미국과 ‘완전한 북·미관계 정상화’를 요구하는 북한은 평행선을 달리고 있었고, 경수로 사업과 관련해 북한의 ‘평화적 핵 이용 권리’를 합의문에 포함할 것인가를 둘러싼 진통이 이어졌다. 이 과정에서 저자는 한·미·일 공조에만 매달리던 관행에서 벗어나 한·중 조율을 통해 북한을 설득하는 전략을 취했다. 노무현 대통령은 외교관들이 모인 자리에서 ‘한·미·일’ 대 ‘북·중·러’ 대립구도에 집중하는 경향을 지적하기도 했는데, 저자가 꼭 그렇지만은 않다는 의미로 고개를 ‘절레절레’하는 장면이 카메라에 잡힌 해프닝도 있었다(101면).
53일간의 밀고 당기기 끝에 6자는 9·19공동성명으로 “불가능하다고 믿었던 합의”에 도달했다. 저자는 이를 한국이 외교의 중심에 서서 한·미 공조, 한·중 조율, 남북 소통이라는 삼박자를 가동하며 한반도 비핵화를 위한 ‘거대한 첫걸음’을 뗀 사건으로 평가한다. 2011년 미·중 정상회담, 2016년 유엔안보리 결의에서도 9·19공동성명의 의의는 거듭 강조되었다. 그러나 성명 직후 북한이 마카오 BDA 은행에서 불법자금을 세탁한 의혹을 받으며 미국의 금융제재 압박이 가해졌고, 성명 이행은 교착상태에 빠지고 말았다. 설상가상으로 2006년 북한이 첫 핵실험을 감행하면서 다시금 한반도에는 긴장감이 감돌았다.
“제재는 게으른 사람들의 외교정책 수단”이라는 말을 상기하며 저자는 6자회담(Six Party Talks)과 송민순 이름의 머리글자를 딴 이른바 ‘에스 플랜’(S-Plan)에 시동을 걸었다. 북한의 6자회담 복귀와 핵 폐기, 미국의 BDA 문제 해결과 북·미관계 정상화 등을 앞에 내걸고 이것이 모두 실패할 경우 중국까지 동참하는 강력한 대북제재를 가동하자는 전략이었다. 북한의 첫 핵실험이 있고 나서 한달 뒤 외교부장관으로 부임한 저자는 9·19공동성명 이행을 위한 시공계획서 격인 2·13합의를 이끌어냈다. 단계적으로 북한이 핵 불능화, 핵 폐기를 시행하는 동안 나머지 5개국은 중유 100만 톤을 북한에 제공하는 등의 내용을 골자로 하는 것이었다.
북한 핵실험과 사드 배치,
오늘에 읽어야 할 한반도 외교 지침서
9·19공동성명은 한반도 비핵화와 평화체제 구축, 나아가 통일을 위한 동북아 외교의 이정표로 남아 있다. 그러나 11년이 지난 지금, ‘북한의 모든 핵무기와 핵계획 포기’ ‘동북아의 항구적 평화와 안정을 위한 공동 노력’ 같은 합의 내용은 고장 난 자동차처럼 방치되어 있다. 2016년 1월 이후 북한의 4차 핵실험과 장거리 미사일 실험, 한국과 미국의 사드 배치 결정, 9월 북한의 5차 핵실험에 이르는 일련의 사태로 한반도를 둘러싼 안보 환경은 또다시 위험 수위에 도달했다. 저자는 “실제 사드를 배치하고 나면 한·미는 물론 중국도 북한의 핵과 미사일 개발을 억제할 수단을 갖지 못한다”라고 지적한다(5면).
앞서 2008년 들어선 이명박 정부는 “부시보다 더 강한 어조로” 대북 제재에 대한 의지를 보였다. 이전 정부에서 물려받은 9·19공동성명의 후속 조치들이 작동하고 있었기에 당시 많은 문제가 순조롭게 흘러가는 것처럼 보였다. “사람들은 그러한 안정적 상태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안정을 위해서 치른 비용에만 초점을 맞추는 경향이 있다. 퍼주기로 평화를 샀고 그런 평화는 지속 가능하지 않다고
비판했다.”(465면) 하지만 북핵 문제를 다룰 때 북한의 명료한 태도, 확실한 핵 신고라든지 핵 폐기만을 최우선으로 삼는다면 협상 자체가 되지 않는다. 저자는 이때 ‘건설적 모호성’이 필요하다고 본다. 한반도 비핵화를 최우선으로 삼는다면, ‘북한의 핵 신고 후 내용을 검증한 다음, 제재를 해제하고 핵 폐기에 진입’하는 방안보다는 ‘핵 신고 후 제재를 해제한 다음, 우선 폐기 단계에 진입하여 검증을 병행’하는 방안이 현실적이라는 것이다.
이런 상황이 지속되며 오늘날 한국에서는 북핵 문제만 해결되면 무엇을 하겠다거나, 한반도 문제가 해결되면 북핵 문제가 해결된다는 식의 공허한 주장만 되풀이되고 있다. 미국에서는 협상파, 강경파 할 것 없이 북핵 문제를 해결하려는 의욕이 증발되고 있다. 저자는 9·19공동성명이 성실히 이행되었다면 천안함 사건이나 연평도 포격 사건이 일어났을 가능성이 낮았거나, 일어났더라도 위기관리가 용이했을 것이라고 본다.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정치의 시계는 서울의 시간표에 맞추어 돌아가지 않는다.”(465면) 그렇다고 해서 국제정치의 시계에 맞춰 서울의 시간표를 매번 새로 짠다면 늘 한발 늦게 되고, 서울의 시간표만을 고집한다면 국제정치에서 고립을 자초하게 된다. 그 사이에서 타이밍을 잡는 것이 바로 외교의 일임을 이 책은 말해준다.
▣ 작가 소개
저자 : 송민순
경남 진주에서 태어나 마산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에서 독어독문학을 공부했다. 1975년 외교부에 들어가 33년간 주로 국가안보와 통일외교 업무를 맡았다.
북한 핵 문제 해결을 위한 베이징 6자회담의 수석대표로서 2005년 9·19공동성명을 도출하는 데 역할을 했고, 1999년 제네바 4자 평화회담 대표로 참가했다. 주한미군지위협정(SOFA) 개정, 방위비 분담협정 체결, 한·미 미사일 합의 개정을 통해 한·미동맹을 미래형으로 발전시키고자 했다. 1979년 동서 분단의 현장이었던 서베를린 부영사로 시작해 인도, 미국, 싱가포르 대사관을 거쳐 강대국 정치 수난의 역사를 지닌 폴란드 주재 대사를 지냈다. 외교부 안보과장, 북미국장, 기획관리실장, 차관보로 일했다. 김영삼 대통령의 국제안보 비서관, 김대중 대통령의 외교 비서관, 노무현 대통령의 통일외교안보 정책실장을 거쳐 제34대 외교통상부장관을 역임했다. 제18대 국회의원(비례대표)을 지낸 후 현재 북한대학원대학교 총장으로 있다.
▣ 주요 목차
머리말 미래를 움직이는 바람
프롤로그 역사는 우리 손으로
제1부
제1장 북한 핵과 한반도 문제
판문점 도끼사건 / 카프카가 안겨준 숙제 / 분단의 현장, 베를린 / 구룡강변의 가구공장 / 영변 약산의 진달래꽃 / 지상으로 올라온 핵
제2장 1차 핵 위기
북한의 위기의식 / 제네바 합의의 명암 / 급변사태에 대비하라 / 한반도 평화 4자회담
제3장 한·미 정부의 박자 조율: 김대중 정부의 외교
햇볕정책, 대포동1호, 금창리 / 페리 프로세스 / 2000년 남북 정상회담 / 북·미관계, 짧은 해빙과 긴 겨울 / 과거 정책 뒤집기
제2부
제4장 2차 핵 위기
양자에서 4자로, 4자에서 6자로 / 1차 회담: 너무 먼 거리, 헛도는 바퀴 / 2차와 3차 회담: 완전한 비핵화 vs 완전한 관계 정상화 / 노무현과 부시 / 4차 6자회담의 주역들 / 4차 6자회담의 개막 / 창안클럽의 탐색
제5장 9·19공동성명
6자의 최대공약수 / 비핵화의 쟁점: 한반도 비핵화와 경수로 / 남·북·미 회동, 내가 왜 중매꾼이냐 / 북한의 카드 / 일본을 먼저 움직이다 / 기회의 창을 열어두다 / 한국과 미국, 정면 대좌하다 / 북한의 우라늄농축 계획, 있다 없다 / 남북 상호사찰하자 / 평화체제 수립하자 / 북·미관계 정상화하자 / 불가능하다고 믿었던 합의
제6장 공동성명 이행의 난관
철 이른 계획 / 5차 회담, 예견된 난관들 / 방코델타아시아(BDA) 은행의 덫
제3부
제7장 북한 핵과 한·미동맹의 저울
같은 목표, 다른 속도 / “안보실장 잘못 뽑았네요” / 한국의 시차 접근 구상과 미국의 포괄적 구상 / 작지만 큰 BDA의 돈, 크지만 취약한 6자의 배 / 에스 플랜
제8장 공동의 포괄적 접근
왜 대통령을 이기려 드느냐 / 2+2로 만나자 / 공동의 포괄적 접근 방안(CBA) / 노무현과 부시, 10개월 만에 마주 웃다 / 유엔사무총장과 라이스 플랜 / 북한 핵의 시계는 똑딱거리는데
제9장 북한의 1차 핵실험
베이징에서 날아온 다급한 목소리 / 확장된 공동의 포괄적 접근 방안 / “경수로 뺏어오고 핵실험 내주었다” / 언론보도의 역풍: ‘미국은 전쟁광’의 진위 / PSI 참여가 한·미 공조의 척도로 / 다시 수면 위로 떠오른 한반도 평화체제
제10장 2·13합의로 가는 길
외교장관으로서의 첫발 / 5차 6자회담의 재개 / 미·북 베를린 접촉 / 2·13합의 / ‘한반도 대설계’ / ‘역사상 가장 악명 높은 2,500만 달러’ / 동북아시아 안보대화를 위한 발판 / 한·미·일 공조와 한·중·일 3자 협의체 발족
제4부
제11장 북한 핵과 남북 정상회담
아프간 인질 사건 / 남북 정상회담 추진 / 가팔라지는 언덕과 6자 외교장관 회담 / 비핵화, 종전선언, 평화체제 / 2007년 남북 정상회담 / 한국과 미국, 임기 말의 욕구 / 시리아의 경우와 한반도 군사행동 시나리오 / 소고기 협상, 같은 말 다른 해석
제12장 시작만 있고 끝은 없는 대북정책
북한 인권, 흔들린 원칙 / 미국, 북한 군수공장에 / 한·미는 머리를 맞대는데 한국의 신·구 정부는 / 이명박 정부, 배를 돌리다 / 잃어버린 카드
제13장 한반도의 운전대: 군사작전권
3년이라는 시간이 무한의 시간으로 / 군사적 판단과 정치적 이유 / 작전권과 북한 핵 / 미사일방어망(MD), 사드(THAAD) 그리고 미국 군수산업
제14장 핵을 넘어 통일로 가는 길
정치적 이해관계와 선악 개념의 결합 / 일말의 희망, 이란과 북한 / 북핵 문제 해결, ‘가능성의 예술’
에필로그
좌절이 주는 교훈 / 통일은 당위가 아니라 힘을 요구한다 / 비핵화와 평화체제, 하나의 선로에 올리자
부록 제4차 6자회담 공동성명(9·19공동성명) 국문 및 영문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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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의 말
북핵 문제를 둘러싼 동북아 외교 전쟁의 실상
살아 있는 한반도 외교 현재사(現在史)
이 책은 북한 핵과 관련한 한반도 외교의 중요한 순간마다 자리를 지키며 큰 그림을 그려온 저자 송민순의 기록이다. 송민순이라는 인물이 지나온 역사는 한반도 외교의 가장 핵심적인 증언이기도 하다. 그런 면에서 이 기록은 단순한 회고록에 그치지 않고 정치·외교 분야의 현재사(現在史)로서 의미가 깊다.
판문점 도끼사건 당시 외교관 2년차로서 분단 상황을 직시한 저자는, 또다른 분단 현장인 서베를린의 부영사로 일하며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사회의 민낯을 목격했다. 이후 북한보다 20여년 앞서 위성로켓을 발사했던 인도와 강대국 정치 수난의 역사를 지닌 폴란드 대사관 생활을 통해 20세기에서 건너온 핵과 냉전이 21세기 국제정치에 얼마나 큰 위력을 떨치고 있는지 체험했다. 외교부 안보과장·북미국장으로서 주한미군지위협정(SOFA) 1·2차 개정을 이끌어내며 한·미동맹 자체를 목표로 하기보다 한반도 미래를 정상화하는 동력으로 삼는 전략을 구상하기 시작했다. 또한 제네바 4자 평화회담에 차석대표로 참여하며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을 북·미가 아닌 남북 중심으로 끌어오는 데 주안점을 두면서, 이를 위해 남·북·미와 주변국들이 동석하는 다자간 협상 테이블을 만들 필요를 실감하게 되었다. 1975년 외교부에 들어가 2008년 장관 퇴임을 하기까지 저자는 한국이 한반도 문제의 당사자로서 동북아 정치 주체로 설 방안을 고심해왔다. 2005년 9·19공동성명은 이런 저자의 이력과 떼어놓고 설명할 수 없다.
4개의 부로 구성된 이 책은 개인의 자취와 국제 정세를 촘촘하게 엮으며 북핵 문제를 둘러싼 동북아 외교 전쟁의 실상을 보여준다.
베트남전의 여파가 채 가시지 않은 1976년 8월 18일, 공동경비구역에서 유엔군과 북한군 사이에 벌어진 판문점 도끼사건은 한반도의 휴전이 얼마나 취약한 상태인지를 전세계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당시 북한은 군사력 열세를 보완하고 전력수요를 충당하는 한편 정권의 위상을 세우기 위해 소련의 힘을 빌려 원자력발전소 건설과 핵무기 개발에 매달리고 있었다. 1989년 영변 핵시설이 관측위성에 포착되면서 북한 핵문제는 드디어 수면 위로 떠올랐다. 한반도 비핵화 논의의 시작을 알리는 사건이었다.
IAEA의 북한 핵시설 사찰 요구와 이를 거부한 북한의 NPT 탈퇴 및 IAEA 안전조치 협정 파기 선언, 북·미의 벼랑 끝 협상을 통한 제네바 합의(1994), 한반도 평화체제 수립을 위한 제네바 4자회담(1997), 북한의 미사일 개발 중지와 북·미관계 정상화를 축으로 하는 ‘페리 프로세스’, 남북 정상회담(2000)과 짧은 해빙기를 거쳐 9·11테러 이후 미국이 북한을 ‘핵 위협 국가’에 포함시키기까지, 이 시기 북·미관계는 여러 부침을 겪었으며 한반도 비핵화 논의에서 한국 외교는 아직 북·미관계의 주변에 머무는 실정이었다. 제네바 4자회담 당시 저자는 ‘진전이 없는 것 아니냐’는 언론의 질문에, “회담이 빙하의 움직임과 같다”고 답변했다(53면). 당장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몇년이 지나고 나면 변화를 감지할 수 있게 되는 것이 바로 외교의 결과임을 알려주는 대목이다.
제네바 합의가 북·미 양자 구도, 제네바 평화회담이 남·북·미·중 4자 구도였다면, 부시 행정부의 대북 강경책이 고조된 와중에 출범한 노무현 정부는 한반도 문제의 관련국을 남·북·미·중·일·러 6자로 확대하는 데 동의하며 충돌의 위기를 외교의 기회로 전환했다. ‘김정힐’이라는 말까지 들을 만큼 일본과 네오콘의 견제를 받은 미국 대표 크리스토퍼 힐, 만나면 담배부터 권하는 호방한 스타일의 중국 대표 우 다웨이, 일본인 납치 문제를 수시로 꺼내드는 일본 대표 사사에 겐이치로, 늘 한발 물러나 어떤 이익이 돌아올지 관망하는 러시아 대표 알렉산드르 알렉세예프, 그리고 ‘도살장에 들어온 느낌’이라며 복잡한 심경을 내비치는 북한 대표 김계관 등 자국의 이익과 개인적 입장 사이에서 고뇌하는 4차 6자회담 주역들의 모습이 실감 나게 묘사된다.
물론 각국의 이해관계가 다른 상황에서 합의를 도출하기는 쉽지 않았다. 특히 ‘완전한 비핵화’를 요구하는 미국과 ‘완전한 북·미관계 정상화’를 요구하는 북한은 평행선을 달리고 있었고, 경수로 사업과 관련해 북한의 ‘평화적 핵 이용 권리’를 합의문에 포함할 것인가를 둘러싼 진통이 이어졌다. 이 과정에서 저자는 한·미·일 공조에만 매달리던 관행에서 벗어나 한·중 조율을 통해 북한을 설득하는 전략을 취했다. 노무현 대통령은 외교관들이 모인 자리에서 ‘한·미·일’ 대 ‘북·중·러’ 대립구도에 집중하는 경향을 지적하기도 했는데, 저자가 꼭 그렇지만은 않다는 의미로 고개를 ‘절레절레’하는 장면이 카메라에 잡힌 해프닝도 있었다(101면).
53일간의 밀고 당기기 끝에 6자는 9·19공동성명으로 “불가능하다고 믿었던 합의”에 도달했다. 저자는 이를 한국이 외교의 중심에 서서 한·미 공조, 한·중 조율, 남북 소통이라는 삼박자를 가동하며 한반도 비핵화를 위한 ‘거대한 첫걸음’을 뗀 사건으로 평가한다. 2011년 미·중 정상회담, 2016년 유엔안보리 결의에서도 9·19공동성명의 의의는 거듭 강조되었다. 그러나 성명 직후 북한이 마카오 BDA 은행에서 불법자금을 세탁한 의혹을 받으며 미국의 금융제재 압박이 가해졌고, 성명 이행은 교착상태에 빠지고 말았다. 설상가상으로 2006년 북한이 첫 핵실험을 감행하면서 다시금 한반도에는 긴장감이 감돌았다.
“제재는 게으른 사람들의 외교정책 수단”이라는 말을 상기하며 저자는 6자회담(Six Party Talks)과 송민순 이름의 머리글자를 딴 이른바 ‘에스 플랜’(S-Plan)에 시동을 걸었다. 북한의 6자회담 복귀와 핵 폐기, 미국의 BDA 문제 해결과 북·미관계 정상화 등을 앞에 내걸고 이것이 모두 실패할 경우 중국까지 동참하는 강력한 대북제재를 가동하자는 전략이었다. 북한의 첫 핵실험이 있고 나서 한달 뒤 외교부장관으로 부임한 저자는 9·19공동성명 이행을 위한 시공계획서 격인 2·13합의를 이끌어냈다. 단계적으로 북한이 핵 불능화, 핵 폐기를 시행하는 동안 나머지 5개국은 중유 100만 톤을 북한에 제공하는 등의 내용을 골자로 하는 것이었다.
북한 핵실험과 사드 배치,
오늘에 읽어야 할 한반도 외교 지침서
9·19공동성명은 한반도 비핵화와 평화체제 구축, 나아가 통일을 위한 동북아 외교의 이정표로 남아 있다. 그러나 11년이 지난 지금, ‘북한의 모든 핵무기와 핵계획 포기’ ‘동북아의 항구적 평화와 안정을 위한 공동 노력’ 같은 합의 내용은 고장 난 자동차처럼 방치되어 있다. 2016년 1월 이후 북한의 4차 핵실험과 장거리 미사일 실험, 한국과 미국의 사드 배치 결정, 9월 북한의 5차 핵실험에 이르는 일련의 사태로 한반도를 둘러싼 안보 환경은 또다시 위험 수위에 도달했다. 저자는 “실제 사드를 배치하고 나면 한·미는 물론 중국도 북한의 핵과 미사일 개발을 억제할 수단을 갖지 못한다”라고 지적한다(5면).
앞서 2008년 들어선 이명박 정부는 “부시보다 더 강한 어조로” 대북 제재에 대한 의지를 보였다. 이전 정부에서 물려받은 9·19공동성명의 후속 조치들이 작동하고 있었기에 당시 많은 문제가 순조롭게 흘러가는 것처럼 보였다. “사람들은 그러한 안정적 상태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안정을 위해서 치른 비용에만 초점을 맞추는 경향이 있다. 퍼주기로 평화를 샀고 그런 평화는 지속 가능하지 않다고
비판했다.”(465면) 하지만 북핵 문제를 다룰 때 북한의 명료한 태도, 확실한 핵 신고라든지 핵 폐기만을 최우선으로 삼는다면 협상 자체가 되지 않는다. 저자는 이때 ‘건설적 모호성’이 필요하다고 본다. 한반도 비핵화를 최우선으로 삼는다면, ‘북한의 핵 신고 후 내용을 검증한 다음, 제재를 해제하고 핵 폐기에 진입’하는 방안보다는 ‘핵 신고 후 제재를 해제한 다음, 우선 폐기 단계에 진입하여 검증을 병행’하는 방안이 현실적이라는 것이다.
이런 상황이 지속되며 오늘날 한국에서는 북핵 문제만 해결되면 무엇을 하겠다거나, 한반도 문제가 해결되면 북핵 문제가 해결된다는 식의 공허한 주장만 되풀이되고 있다. 미국에서는 협상파, 강경파 할 것 없이 북핵 문제를 해결하려는 의욕이 증발되고 있다. 저자는 9·19공동성명이 성실히 이행되었다면 천안함 사건이나 연평도 포격 사건이 일어났을 가능성이 낮았거나, 일어났더라도 위기관리가 용이했을 것이라고 본다.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정치의 시계는 서울의 시간표에 맞추어 돌아가지 않는다.”(465면) 그렇다고 해서 국제정치의 시계에 맞춰 서울의 시간표를 매번 새로 짠다면 늘 한발 늦게 되고, 서울의 시간표만을 고집한다면 국제정치에서 고립을 자초하게 된다. 그 사이에서 타이밍을 잡는 것이 바로 외교의 일임을 이 책은 말해준다.
▣ 작가 소개
저자 : 송민순
경남 진주에서 태어나 마산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에서 독어독문학을 공부했다. 1975년 외교부에 들어가 33년간 주로 국가안보와 통일외교 업무를 맡았다.
북한 핵 문제 해결을 위한 베이징 6자회담의 수석대표로서 2005년 9·19공동성명을 도출하는 데 역할을 했고, 1999년 제네바 4자 평화회담 대표로 참가했다. 주한미군지위협정(SOFA) 개정, 방위비 분담협정 체결, 한·미 미사일 합의 개정을 통해 한·미동맹을 미래형으로 발전시키고자 했다. 1979년 동서 분단의 현장이었던 서베를린 부영사로 시작해 인도, 미국, 싱가포르 대사관을 거쳐 강대국 정치 수난의 역사를 지닌 폴란드 주재 대사를 지냈다. 외교부 안보과장, 북미국장, 기획관리실장, 차관보로 일했다. 김영삼 대통령의 국제안보 비서관, 김대중 대통령의 외교 비서관, 노무현 대통령의 통일외교안보 정책실장을 거쳐 제34대 외교통상부장관을 역임했다. 제18대 국회의원(비례대표)을 지낸 후 현재 북한대학원대학교 총장으로 있다.
▣ 주요 목차
머리말 미래를 움직이는 바람
프롤로그 역사는 우리 손으로
제1부
제1장 북한 핵과 한반도 문제
판문점 도끼사건 / 카프카가 안겨준 숙제 / 분단의 현장, 베를린 / 구룡강변의 가구공장 / 영변 약산의 진달래꽃 / 지상으로 올라온 핵
제2장 1차 핵 위기
북한의 위기의식 / 제네바 합의의 명암 / 급변사태에 대비하라 / 한반도 평화 4자회담
제3장 한·미 정부의 박자 조율: 김대중 정부의 외교
햇볕정책, 대포동1호, 금창리 / 페리 프로세스 / 2000년 남북 정상회담 / 북·미관계, 짧은 해빙과 긴 겨울 / 과거 정책 뒤집기
제2부
제4장 2차 핵 위기
양자에서 4자로, 4자에서 6자로 / 1차 회담: 너무 먼 거리, 헛도는 바퀴 / 2차와 3차 회담: 완전한 비핵화 vs 완전한 관계 정상화 / 노무현과 부시 / 4차 6자회담의 주역들 / 4차 6자회담의 개막 / 창안클럽의 탐색
제5장 9·19공동성명
6자의 최대공약수 / 비핵화의 쟁점: 한반도 비핵화와 경수로 / 남·북·미 회동, 내가 왜 중매꾼이냐 / 북한의 카드 / 일본을 먼저 움직이다 / 기회의 창을 열어두다 / 한국과 미국, 정면 대좌하다 / 북한의 우라늄농축 계획, 있다 없다 / 남북 상호사찰하자 / 평화체제 수립하자 / 북·미관계 정상화하자 / 불가능하다고 믿었던 합의
제6장 공동성명 이행의 난관
철 이른 계획 / 5차 회담, 예견된 난관들 / 방코델타아시아(BDA) 은행의 덫
제3부
제7장 북한 핵과 한·미동맹의 저울
같은 목표, 다른 속도 / “안보실장 잘못 뽑았네요” / 한국의 시차 접근 구상과 미국의 포괄적 구상 / 작지만 큰 BDA의 돈, 크지만 취약한 6자의 배 / 에스 플랜
제8장 공동의 포괄적 접근
왜 대통령을 이기려 드느냐 / 2+2로 만나자 / 공동의 포괄적 접근 방안(CBA) / 노무현과 부시, 10개월 만에 마주 웃다 / 유엔사무총장과 라이스 플랜 / 북한 핵의 시계는 똑딱거리는데
제9장 북한의 1차 핵실험
베이징에서 날아온 다급한 목소리 / 확장된 공동의 포괄적 접근 방안 / “경수로 뺏어오고 핵실험 내주었다” / 언론보도의 역풍: ‘미국은 전쟁광’의 진위 / PSI 참여가 한·미 공조의 척도로 / 다시 수면 위로 떠오른 한반도 평화체제
제10장 2·13합의로 가는 길
외교장관으로서의 첫발 / 5차 6자회담의 재개 / 미·북 베를린 접촉 / 2·13합의 / ‘한반도 대설계’ / ‘역사상 가장 악명 높은 2,500만 달러’ / 동북아시아 안보대화를 위한 발판 / 한·미·일 공조와 한·중·일 3자 협의체 발족
제4부
제11장 북한 핵과 남북 정상회담
아프간 인질 사건 / 남북 정상회담 추진 / 가팔라지는 언덕과 6자 외교장관 회담 / 비핵화, 종전선언, 평화체제 / 2007년 남북 정상회담 / 한국과 미국, 임기 말의 욕구 / 시리아의 경우와 한반도 군사행동 시나리오 / 소고기 협상, 같은 말 다른 해석
제12장 시작만 있고 끝은 없는 대북정책
북한 인권, 흔들린 원칙 / 미국, 북한 군수공장에 / 한·미는 머리를 맞대는데 한국의 신·구 정부는 / 이명박 정부, 배를 돌리다 / 잃어버린 카드
제13장 한반도의 운전대: 군사작전권
3년이라는 시간이 무한의 시간으로 / 군사적 판단과 정치적 이유 / 작전권과 북한 핵 / 미사일방어망(MD), 사드(THAAD) 그리고 미국 군수산업
제14장 핵을 넘어 통일로 가는 길
정치적 이해관계와 선악 개념의 결합 / 일말의 희망, 이란과 북한 / 북핵 문제 해결, ‘가능성의 예술’
에필로그
좌절이 주는 교훈 / 통일은 당위가 아니라 힘을 요구한다 / 비핵화와 평화체제, 하나의 선로에 올리자
부록 제4차 6자회담 공동성명(9·19공동성명) 국문 및 영문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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