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 출판사서평
대중문화라는 소망의 거울에서 정치적 무의식 들여다보기
청소년 하위문화를 파헤친 책 『18세상』을 펴내 화제를 불러온 저자 김성윤의 신작이다. 이 책은 일반적인 문화비평서와는 달리, 대중문화와 현실이 맺는 관계를 정치적 무의식이라는 일관된 관점으로 서술한 매우 희귀한 시도를 담고 있다. 걸그룹에 내심 하앍하앍대면서도 사회적 참여를 시도하는 삼촌팬에서부터 「무한도전」의 시대사적 의미를 캐내는 무도빠에 이르기까지 우리 대중문화에 숨겨진 정치적 무의식을 밝혀낸 역작이다.
대중문화는 아마 우리 주변에서 가장 흔하게 소비되는 상품일 것이다. 「응답하라 1988」을 한 회라도 놓치면 어딘가 허전하고 「K팝스타」나 「무한도전」을 보지 않고는 세상에 나가서 대화가 통하지 않는다. 소녀들은 남성 아이돌을 주인공으로 팬픽을 쓰고 삼촌팬들은 남몰래 여성 아이돌을 훔쳐보기 일쑤다. 이렇게 우리 가까이에서 모든 일상에 스며들어온 대중문화지만, 정작 사람들은 그것이 우리의 현실과 어떤 관계를 맺는지에 대해서는 큰 관심이 없다. 그것은 대중문화란 우리 현실과 동떨어진 어떤 판타지에 속하며, 그저 소비되기 위해서만 존재한다는 막연한 생각 때문일 것이다.
현실에서 달아나고자 하는 소망의 재현
그러나 『덕후감』의 저자 김성윤의 생각은 다르다. 사회학자로서 오랫동안 대중문화를 연구해온 저자는 대중문화는 결코 현실에서 떨어져 존재하는 판타지가 아니며, 어떤 방식으로든 우리의 정치와 경제, 사회와 관련을 맺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렇다고 그 관계가 마치 토대와 상부구조라는 관념처럼 일대일로 대응하는 것은 아니다. 저자는 대중문화는 현실을 그대로 재현하지 않으며, 오히려 현실에서 달아나려는 소망을 재현한다고 말한다. 그 과정은 마치 꿈을 꾸는 것과 같다. 우리가 현실에서 피하고자 하는 것이 흔히 꿈에 나타나듯이, 대중문화는 현실에서 일어나지 말았으면 하는 것들을 자주 재현한다.
가령 막장 드라마가 그렇다. 누구도 남편에게 버림받고 친구에게 배신당한 채 시어머니에게 내쫓김을 당하고 싶지는 않을 것이다. 또한 그런 일이 현실에서 벌어질 가능성은 아주 낮다. 그러나 이런 악몽 같은 상황은 우리의 불안심리를 끊임없이 자극하여 TV 앞을 떠나지 못하게 한다. 말하자면 한 사회에 쉽사리 해결될 수 없는 모순이 있을 때, 대중문화는 그러한 모순을 ‘불안’과 같은 왜곡된 상징을 동원해서라도 드러내고야 만다. 이 책의 목적은 대중문화라는 집단적 욕망/불안 안에 감춰진 정치경제적 요인을 파헤치는 데 있다.
팬덤은 그렇듯 억눌린 욕망을 표출한 대표적인 사례다. 1990년대 중반 H.O.T.의 데뷔를 기점으로 우리 소녀팬들의 성적 지향은 ‘응팔 세대’의 하이틴 로맨스 수준을 훨씬 넘어선다. 남성 아이돌끼리의 동성애를 묘사하는 팬픽이 등장하며, 이는 남성의 몸을 시각적으로 소비하는 팬아트로 진화하더니 급기야 여자 아이돌에게 성애적으로 열광하는 걸크러쉬 현상으로까지 나아간다. 80년대의 시각으로 보면 지극히 불온한 이런 시도들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저자는 소녀들의 팬덤이 전통적인 성적 구도와 시선에 내포된 권력관계를 전복한 중대한 사건이라고 분석한다. 이들의 팬덤은 섹슈얼리티에 대한 우리들의 상식을 무너뜨리고, 사랑이라는 감정이 우리 사회에서 얼마나 억압돼왔는지를 역설적으로 보여준다(1장). 이렇듯 권위주의적 남성성에 기댄 섹슈얼리티가 무너지는 현상은 비단 여성팬덤만의 일이 아니다. 2008년 무렵 원더걸스, 소녀시대, 카라의 등장으로 새롭게 형성된 30대 중후반 남성팬을 일컬어 ‘삼촌팬’이라 부른다. 이 삼촌팬 현상을 두고 그간 경제위기에 따른 퇴행이라느니 어린 소녀들에 하앍대는 중년 남성에 불과하다느니 하는 비판이 잇따랐다. 그러나 삼촌팬 현상은 ‘엄숙한 삶이 행복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은’ 세대가 비로소 친밀성을 회복하고 탈권위적 남성성으로 나아간 보기 드문 경우에 속한다고 저자는 주장한다(2장).
그렇다면 잊을 만하면 터지는 연예인 관련 사건들은 어떤 집단적 무의식을 숨기고 있는 것일까? 2009년 한창 잘나가던 2PM의 리더 박재범이 한국인 비하 발언 때문에 순식간에 퇴출당한 사건을 바라보며 저자는 ‘평등에 대한 요구’를 읽어낸다. 이런 사건이 터질 때마다 사람들은 ‘애국주의’를 내세우며 연예인을 몰아세우지만, 결국 그 이면에는 이 사회의 불평등에 대한 강한 불만이 내재돼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평등에 대한 요구가 매번 협소한 애국주의로 빠지는 현상은 우리의 인식 가운데 여전한 정치사회적 한계를 반증한다(5장).
신자유주의의 내면화와 정치적 저항
이 책의 한축이 사회정치적 문제에 닿아 있다면, 다른 한축은 경제에 닿아 있다. 특히 신자유주의를 뚫고 나가면서 대중문화가 어떤 심리적 상태를 내면화했는가 하는 문제들이 집중적으로 다뤄진다. 「사랑이 꽃피는 나무」에서 시작돼 「논스톱」 시리즈까지 이어진 ‘캠퍼스 드라마’는 현실과 동떨어진 설정으로 대학문화를 왜곡시켜왔다. 그러나 이런 왜곡보다 더 무서운 것은 내면화다. 가령 대학생활의 치열한 경쟁체제를 재현한 드라마 「카이스트」는 ‘노오력’하는 세계관으로 재무장한 대학생활을 정당화했다고 저자는 주장한다(9장). 1995년에 나온 일본 애니메이션 「공각기동대」는 기업 네트워크가 어느 때보다도 발달했지만 아직 국가와 민족 같은 관념이 해체되지 않은 신자유주의적 미래를 예견했으며, 배트맨이 민중봉기를 때려잡는 사설용역으로 등장한 「다크 나이트 라이즈」는 공적인 것이 점점 사라지는 민영화된 세계의 상징으로 읽힌다. 한편 「아이언맨」은 무능력한 국가를 대신하여 이른바 사회적 책임을 수행하는 CEO가 새로운 영웅 대열에 합류하며, 「어벤져스」 같은 영화는 이 모든 영웅(어번져)들이 합세해 구축된 반(半)국가화된 거버넌스를 웅변한다(10장).
반면 「K팝스타」 「슈퍼스타K」 같은 스펙터클 리얼리티 쇼 프로그램은 시청자들로 하여금 선택하고 판단하게 하는 민주주의 요소를 도입한다. 특정한 목적을 강요하지 않는 쿨한 여백으로 재미와 감동을 주는 「무한도전」은 형식과 권위를 무너뜨리면서도 정치적 위트를 놓치지 않는 포스트모더니즘의 덕목을 갖추고 있다. 가령 10주년 특집으로 방영된 무인도 특집은 ‘차가운 4월의 바다’를 건넌다는 설정으로 세월호 참사의 잔상을 끼워넣기도 했는데, 이런 시도들은 정치적으로 무한증폭이 가능한 이 프로그램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다만 대중문화의 도전에 신경질적 반응(경고조치)을 보이는 기관에 대해 그저 도덕성으로 맞서는 대중들의 반응은 여전히 정치적 순진함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저자는 비판한다(11장).
문화와 관련된 사회학적 분석이 돋보이는 글들도 있다. 하인스 워드 신드롬을 바라보며 다문화주의의 도래와 그 한계를 지적한 글(8장), 소비문화를 통해 계급문화와 공공성이 재구성된 면면을 밝혀낸 글(3·4장), 이른바 있어 보이는 영화에 숨겨진 대중문화의 판타지를 분석한 글(6장), 민족주의가 시효를 다해가는 가운데 이를 대체할 사회보장체제가 나타나지 않음으로써 일어난 비극으로서의 숭례문 방화사건을 다룬 글(7장) 등도 경청할 만한 논의를 담고 있다.
▣ 작가 소개
저 : 김성윤
생물학적 성장에 비해 사회적 성장 속도가 더디다. 그래서인지 ‘문화의 시대’라 일컬어졌던 옛날 옛적과 작별하지 못하고 이렇게 대중문화 비평집을 내놓고 있다. ‘덕후감’이란 제목을 달긴 했지만 흔한 오타쿠 비평이나 문화주의적 비평은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덕분에 의도치 않게 학문적 고독감(?)을 느끼는 중이다.
원래 영문학을 전공했지만, 대중문화에 관심이 더 많았다. 대중문화의 의미가 텍스트에만 있지 않고 독자, 관객, 시청자들의 해석 행위에도 있다는 걸 알게 되면서 자연히 관심이 텍스트에서 콘텍스트로, 그리고 사람으로 옮겨갔다. 대학원에 진학하면서부터는 전공을 사회학으로 바꿨다.
현재는 중앙대 사회학과 박사과정에서 ‘사회적인 것’을 주제로 학위논문을 쓰고 있으며 올 여름 전에는 기필코 완성할 계획이다. 문화사회연구소에서 연구원 겸 소장으로 활동중이다. 저서로 『18세상』 등이 있다.
▣ 주요 목차
들어가며: 덕후감, 소망의 거울, 정치적 무의식
I. 새로운 대중들: 팬덤의 사회학
01 소녀들의 성적 판타지: 팬픽, 팬아트, 멤버놀이, 걸크러쉬
02 ‘삼촌’이라는 특이한 발명품: 피터팬 또는 롤리타?
더 읽을거리: EXO, 아이돌 4세대 출현?!
II. 우리가 알던 세계의 종언
03 계급투쟁은 없다?: 명품과 짝퉁의 사회학
04 상품으로만 가능한 공동체: 포스트모던 기념일
더 읽을거리: ‘좋은 시절’의 배제 논리
III. 사회를 유지시키는 마술
05 21세기 대중문화의 생리: 박재범 사태 다시보기
06 어른들을 위한 판타지: 「써니」 「건축학개론」 그리고 「미생」
더 읽을거리: 괴담에서 팩트-주의까지
IV. 이데올로기의 귀환
07 민족주의와의 작별: 숭례문 방화사건의 재구성
08 다문화주의라는 이데올로기적 보충물:
하인스 워드 신드롬이 의미했던 것
더 읽을거리: 민족주의에서 국제주의로?: 「비정상회담」의 세계 감각
V. 정치의 소실점으로서 신자유주의적 윤리
09 무장해제된 대학생들: 캠퍼스 드라마의 계보
10 신자유주의 스토리: 「공각기동대」에서 「어벤져스」까지
더 읽을거리: 「귀여운 여인」의 전혀 귀엽지 않은 이야기
VI. 정치의 표류: 스펙터클 또는 유령의 정치
11 ‘연예 민주주의’의 탄생: 서바이벌 오디션의 ‘무한도전’
12 박정희의 유령, 노무현의 유령:
「국제시장」과 「변호인」을 둘러싼 ‘해석 전쟁’
더 읽을거리: 「개그콘서트」 ‘민상토론’이 말하는 정치
나가며: 지금 이 세계도 리셋이 되나요?
대중문화라는 소망의 거울에서 정치적 무의식 들여다보기
청소년 하위문화를 파헤친 책 『18세상』을 펴내 화제를 불러온 저자 김성윤의 신작이다. 이 책은 일반적인 문화비평서와는 달리, 대중문화와 현실이 맺는 관계를 정치적 무의식이라는 일관된 관점으로 서술한 매우 희귀한 시도를 담고 있다. 걸그룹에 내심 하앍하앍대면서도 사회적 참여를 시도하는 삼촌팬에서부터 「무한도전」의 시대사적 의미를 캐내는 무도빠에 이르기까지 우리 대중문화에 숨겨진 정치적 무의식을 밝혀낸 역작이다.
대중문화는 아마 우리 주변에서 가장 흔하게 소비되는 상품일 것이다. 「응답하라 1988」을 한 회라도 놓치면 어딘가 허전하고 「K팝스타」나 「무한도전」을 보지 않고는 세상에 나가서 대화가 통하지 않는다. 소녀들은 남성 아이돌을 주인공으로 팬픽을 쓰고 삼촌팬들은 남몰래 여성 아이돌을 훔쳐보기 일쑤다. 이렇게 우리 가까이에서 모든 일상에 스며들어온 대중문화지만, 정작 사람들은 그것이 우리의 현실과 어떤 관계를 맺는지에 대해서는 큰 관심이 없다. 그것은 대중문화란 우리 현실과 동떨어진 어떤 판타지에 속하며, 그저 소비되기 위해서만 존재한다는 막연한 생각 때문일 것이다.
현실에서 달아나고자 하는 소망의 재현
그러나 『덕후감』의 저자 김성윤의 생각은 다르다. 사회학자로서 오랫동안 대중문화를 연구해온 저자는 대중문화는 결코 현실에서 떨어져 존재하는 판타지가 아니며, 어떤 방식으로든 우리의 정치와 경제, 사회와 관련을 맺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렇다고 그 관계가 마치 토대와 상부구조라는 관념처럼 일대일로 대응하는 것은 아니다. 저자는 대중문화는 현실을 그대로 재현하지 않으며, 오히려 현실에서 달아나려는 소망을 재현한다고 말한다. 그 과정은 마치 꿈을 꾸는 것과 같다. 우리가 현실에서 피하고자 하는 것이 흔히 꿈에 나타나듯이, 대중문화는 현실에서 일어나지 말았으면 하는 것들을 자주 재현한다.
가령 막장 드라마가 그렇다. 누구도 남편에게 버림받고 친구에게 배신당한 채 시어머니에게 내쫓김을 당하고 싶지는 않을 것이다. 또한 그런 일이 현실에서 벌어질 가능성은 아주 낮다. 그러나 이런 악몽 같은 상황은 우리의 불안심리를 끊임없이 자극하여 TV 앞을 떠나지 못하게 한다. 말하자면 한 사회에 쉽사리 해결될 수 없는 모순이 있을 때, 대중문화는 그러한 모순을 ‘불안’과 같은 왜곡된 상징을 동원해서라도 드러내고야 만다. 이 책의 목적은 대중문화라는 집단적 욕망/불안 안에 감춰진 정치경제적 요인을 파헤치는 데 있다.
팬덤은 그렇듯 억눌린 욕망을 표출한 대표적인 사례다. 1990년대 중반 H.O.T.의 데뷔를 기점으로 우리 소녀팬들의 성적 지향은 ‘응팔 세대’의 하이틴 로맨스 수준을 훨씬 넘어선다. 남성 아이돌끼리의 동성애를 묘사하는 팬픽이 등장하며, 이는 남성의 몸을 시각적으로 소비하는 팬아트로 진화하더니 급기야 여자 아이돌에게 성애적으로 열광하는 걸크러쉬 현상으로까지 나아간다. 80년대의 시각으로 보면 지극히 불온한 이런 시도들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저자는 소녀들의 팬덤이 전통적인 성적 구도와 시선에 내포된 권력관계를 전복한 중대한 사건이라고 분석한다. 이들의 팬덤은 섹슈얼리티에 대한 우리들의 상식을 무너뜨리고, 사랑이라는 감정이 우리 사회에서 얼마나 억압돼왔는지를 역설적으로 보여준다(1장). 이렇듯 권위주의적 남성성에 기댄 섹슈얼리티가 무너지는 현상은 비단 여성팬덤만의 일이 아니다. 2008년 무렵 원더걸스, 소녀시대, 카라의 등장으로 새롭게 형성된 30대 중후반 남성팬을 일컬어 ‘삼촌팬’이라 부른다. 이 삼촌팬 현상을 두고 그간 경제위기에 따른 퇴행이라느니 어린 소녀들에 하앍대는 중년 남성에 불과하다느니 하는 비판이 잇따랐다. 그러나 삼촌팬 현상은 ‘엄숙한 삶이 행복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은’ 세대가 비로소 친밀성을 회복하고 탈권위적 남성성으로 나아간 보기 드문 경우에 속한다고 저자는 주장한다(2장).
그렇다면 잊을 만하면 터지는 연예인 관련 사건들은 어떤 집단적 무의식을 숨기고 있는 것일까? 2009년 한창 잘나가던 2PM의 리더 박재범이 한국인 비하 발언 때문에 순식간에 퇴출당한 사건을 바라보며 저자는 ‘평등에 대한 요구’를 읽어낸다. 이런 사건이 터질 때마다 사람들은 ‘애국주의’를 내세우며 연예인을 몰아세우지만, 결국 그 이면에는 이 사회의 불평등에 대한 강한 불만이 내재돼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평등에 대한 요구가 매번 협소한 애국주의로 빠지는 현상은 우리의 인식 가운데 여전한 정치사회적 한계를 반증한다(5장).
신자유주의의 내면화와 정치적 저항
이 책의 한축이 사회정치적 문제에 닿아 있다면, 다른 한축은 경제에 닿아 있다. 특히 신자유주의를 뚫고 나가면서 대중문화가 어떤 심리적 상태를 내면화했는가 하는 문제들이 집중적으로 다뤄진다. 「사랑이 꽃피는 나무」에서 시작돼 「논스톱」 시리즈까지 이어진 ‘캠퍼스 드라마’는 현실과 동떨어진 설정으로 대학문화를 왜곡시켜왔다. 그러나 이런 왜곡보다 더 무서운 것은 내면화다. 가령 대학생활의 치열한 경쟁체제를 재현한 드라마 「카이스트」는 ‘노오력’하는 세계관으로 재무장한 대학생활을 정당화했다고 저자는 주장한다(9장). 1995년에 나온 일본 애니메이션 「공각기동대」는 기업 네트워크가 어느 때보다도 발달했지만 아직 국가와 민족 같은 관념이 해체되지 않은 신자유주의적 미래를 예견했으며, 배트맨이 민중봉기를 때려잡는 사설용역으로 등장한 「다크 나이트 라이즈」는 공적인 것이 점점 사라지는 민영화된 세계의 상징으로 읽힌다. 한편 「아이언맨」은 무능력한 국가를 대신하여 이른바 사회적 책임을 수행하는 CEO가 새로운 영웅 대열에 합류하며, 「어벤져스」 같은 영화는 이 모든 영웅(어번져)들이 합세해 구축된 반(半)국가화된 거버넌스를 웅변한다(10장).
반면 「K팝스타」 「슈퍼스타K」 같은 스펙터클 리얼리티 쇼 프로그램은 시청자들로 하여금 선택하고 판단하게 하는 민주주의 요소를 도입한다. 특정한 목적을 강요하지 않는 쿨한 여백으로 재미와 감동을 주는 「무한도전」은 형식과 권위를 무너뜨리면서도 정치적 위트를 놓치지 않는 포스트모더니즘의 덕목을 갖추고 있다. 가령 10주년 특집으로 방영된 무인도 특집은 ‘차가운 4월의 바다’를 건넌다는 설정으로 세월호 참사의 잔상을 끼워넣기도 했는데, 이런 시도들은 정치적으로 무한증폭이 가능한 이 프로그램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다만 대중문화의 도전에 신경질적 반응(경고조치)을 보이는 기관에 대해 그저 도덕성으로 맞서는 대중들의 반응은 여전히 정치적 순진함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저자는 비판한다(11장).
문화와 관련된 사회학적 분석이 돋보이는 글들도 있다. 하인스 워드 신드롬을 바라보며 다문화주의의 도래와 그 한계를 지적한 글(8장), 소비문화를 통해 계급문화와 공공성이 재구성된 면면을 밝혀낸 글(3·4장), 이른바 있어 보이는 영화에 숨겨진 대중문화의 판타지를 분석한 글(6장), 민족주의가 시효를 다해가는 가운데 이를 대체할 사회보장체제가 나타나지 않음으로써 일어난 비극으로서의 숭례문 방화사건을 다룬 글(7장) 등도 경청할 만한 논의를 담고 있다.
▣ 작가 소개
저 : 김성윤
생물학적 성장에 비해 사회적 성장 속도가 더디다. 그래서인지 ‘문화의 시대’라 일컬어졌던 옛날 옛적과 작별하지 못하고 이렇게 대중문화 비평집을 내놓고 있다. ‘덕후감’이란 제목을 달긴 했지만 흔한 오타쿠 비평이나 문화주의적 비평은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덕분에 의도치 않게 학문적 고독감(?)을 느끼는 중이다.
원래 영문학을 전공했지만, 대중문화에 관심이 더 많았다. 대중문화의 의미가 텍스트에만 있지 않고 독자, 관객, 시청자들의 해석 행위에도 있다는 걸 알게 되면서 자연히 관심이 텍스트에서 콘텍스트로, 그리고 사람으로 옮겨갔다. 대학원에 진학하면서부터는 전공을 사회학으로 바꿨다.
현재는 중앙대 사회학과 박사과정에서 ‘사회적인 것’을 주제로 학위논문을 쓰고 있으며 올 여름 전에는 기필코 완성할 계획이다. 문화사회연구소에서 연구원 겸 소장으로 활동중이다. 저서로 『18세상』 등이 있다.
▣ 주요 목차
들어가며: 덕후감, 소망의 거울, 정치적 무의식
I. 새로운 대중들: 팬덤의 사회학
01 소녀들의 성적 판타지: 팬픽, 팬아트, 멤버놀이, 걸크러쉬
02 ‘삼촌’이라는 특이한 발명품: 피터팬 또는 롤리타?
더 읽을거리: EXO, 아이돌 4세대 출현?!
II. 우리가 알던 세계의 종언
03 계급투쟁은 없다?: 명품과 짝퉁의 사회학
04 상품으로만 가능한 공동체: 포스트모던 기념일
더 읽을거리: ‘좋은 시절’의 배제 논리
III. 사회를 유지시키는 마술
05 21세기 대중문화의 생리: 박재범 사태 다시보기
06 어른들을 위한 판타지: 「써니」 「건축학개론」 그리고 「미생」
더 읽을거리: 괴담에서 팩트-주의까지
IV. 이데올로기의 귀환
07 민족주의와의 작별: 숭례문 방화사건의 재구성
08 다문화주의라는 이데올로기적 보충물:
하인스 워드 신드롬이 의미했던 것
더 읽을거리: 민족주의에서 국제주의로?: 「비정상회담」의 세계 감각
V. 정치의 소실점으로서 신자유주의적 윤리
09 무장해제된 대학생들: 캠퍼스 드라마의 계보
10 신자유주의 스토리: 「공각기동대」에서 「어벤져스」까지
더 읽을거리: 「귀여운 여인」의 전혀 귀엽지 않은 이야기
VI. 정치의 표류: 스펙터클 또는 유령의 정치
11 ‘연예 민주주의’의 탄생: 서바이벌 오디션의 ‘무한도전’
12 박정희의 유령, 노무현의 유령:
「국제시장」과 「변호인」을 둘러싼 ‘해석 전쟁’
더 읽을거리: 「개그콘서트」 ‘민상토론’이 말하는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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