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 출판사서평
국민은 자신들이 자유롭다고 생각하는데, 이들은 잘못 생각해도 한참 잘못 생각하는 것이다. 이들이 자유로울 수 있는 건 단지 의회 구성원을 뽑는 선거 기간뿐이다. 일단 의원이 선출되는 즉시 국민은 노예가 되어버린다.
- 장자크 루소, 본문 중에서
전 세계를 덮친 민주주의 피로감 증후군
사람들은 왜 민주주의에 열광하면서도 그것을 불신하는 것일까?
국회의원 예비후보 3명이 선거구 획정 문제를 놓고 국회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았다며 서울 행정법원에 소송을 내는 사태가 벌어졌다. 국회가 피고 신분으로 재판을 받게 된 것은 1965년 한일협정 비준 동의를 무효로 해달라는 사건 이후 51년 만에 처음이다. 그동안 선거구 획정 문제를 놓고 여야 국회의원들이 자신들의 기득권을 저울질하는 모습을 보며 많은 사람들이 씁쓸해했다. 말로는 서민을 위한다지만 이들은 정말로 국민을 위하는가? 사실은 당리당략과 공천권을 놓고 다투는 것이 아니라? 소란스러운 국회를 보고 ‘다음 선거만 생각하는 정치꾼’들이라면서 고개를 돌려버리는 사람들은 점점 늘어만 가고 있다.
이런 정치에 대한 불신감은 우리나라만의 일이 아니다. 다비트 판 레이브라우크는 민주주의 피로감 증후군이 전 세계를 잠식해가고 있다고 말한다. 민주주의가 나라를 통치하는 데 적합한 방식이라는 점에는 동의하지만, 정당, 정부, 의회, 언론 등 실제 민주제도에 대한 신뢰도는 눈에 띄게 감소하고 있다. 민주주의가 다른 제도에 비해 그나마 덜 나쁜 통치형태로 여겨졌던 것은 정당성과 효율성 사이에서 건강한 균형을 유지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투표율이 떨어지고 각종 정치 기구에 가입하는 사람들도 줄어들면서 정당성에 문제가 생겼다. 의회는 산적한 문제를 처리하지 못하고, 내각을 제대로 구성하지 못하는 나라들이 속출하면서 효율성에도 문제가 생겼다. 정당성과 효율성이 모두 흔들리는 지금, 민주정치는 위기를 맞았다고 보아야 한다. 도대체 무엇이 문제일까?
민주주의에 대한 불신으로 촉발된 정치 위기의 진단과 처방
원인은 선거만이 민주주의라는 발상 자체에 있다
민주정치가 위기를 맞은 데 대한 진단과 처방은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 1) 정치인들 탓이니 포퓰리즘이 필요하다. 고학력의 전문 정치인이 의회를 차지한 탓에 보통 사람들을 제대로 대변하지 못하므로 포퓰리즘적인 정치인들로 의회를 대거 물갈이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사람만 바뀐다고 해서 정치가 더 효율적이 되리라는 보장은 없다. 2) 민주주의 탓이니 관료주의를 도입해야 한다. 여러 사람에게 의견을 묻기보다는 각종 전문가들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더 효율적이라는 입장이다. 하지만 이래서는 정당성에 문제가 생긴다. 3) 대의 민주주의 탓이니 직접 민주주의를 해야 한다. 이러한 주장은 특히 “월 스트리트를 점령하라” 운동에서 터져 나왔다. 그러나 이는 대의 민주주의에 대한 불편함을 드러내는 데 그쳤을 뿐, 현실을 바꾸는 대안이 되지는 못했다. 이처럼 정치 위기에 대한 진단과 처방은 각각 한계를 갖고 있다. 여기에서 저자는 진짜 원인이 선거를 통한 대의 민주주의에 있다는 새로운 진단을 내린다.
우리는 선거가 민의를 충분히 반영한다고 굳게 믿지만, 사실 선거는 소수 엘리트들의 정치적 입지를 제도적으로 보장해주기 위해 도입된 장치다. 미국과 프랑스혁명의 주도자들은 민중에게 권력을 맡기면 나라가 엉망이 되므로 똑똑하고 선택받은 소수가 권력을 쥐어야 한다고 생각해서 선거를 도입했다. 그로부터 200여 년이 지난 지금, 선거는 민주주의와 동의어가 되었다.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 몽테스키외, 장자크 루소 등은 선거는 소수특권적이고 오로지 제비뽑기만이 민주적이라고 주장했다. 대부분의 관직을 제비뽑기로 뽑은 고대 그리스 아테네, 나라를 이끌 지도자를 뽑을 때 제비뽑기를 활용한 르네상스 시대 유럽 도시공화국들처럼, 제비뽑기를 이용한 임의적 대의 민주주의는 통치자와 피통치자의 구분 없이 모든 시민을 정치에 참여하게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정치체제의 정당성과 효율성을 담보할 수 있었다. 저자는 지금 같은 소수 엘리트 집단의 권력 독점과 대중의 정치적 무관심을 타파하기 위해 제비뽑기를 부활시켜야 한다고 말한다.
선거와 제비뽑기의 결합, 고정관념을 깨야 대안이 보인다
보통 사람들의 참여가 정치를 위기에서 구한다
현재 제비뽑기는 미국, 영국, 캐나다 등에서 운영하는 사법 배심제에서나 겨우 명맥을 잇고 있다. 그렇지만 제비뽑기를 통해 시민들을 모아 선거제도 개혁이나 헌법 개정 등을 맡긴 캐나다, 네덜란드, 아일랜드, 아이슬란드의 예처럼 민주주의를 혁신하기 위한 시도들이 나타나고 있다. 학계에서는 대의제의 한계를 보완하기 위해 제비뽑기로 뽑힌 시민들로 의회의 원을 구성하여 법안 제정이나 검토 등을 맡기자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저자가 특히 전도유망한 대안으로 제시하는 테릴 버리셔스의 안은 제비뽑기로 6개의 기관을 구성할 것을 제안한다. 첫 단계인 의제 결정 기관에서 지원자들 가운데 제비뽑기로 뽑힌 150~400명의 시민이 법제정이 필요한 의제를 제시하고, 그 의제와 관련된 시민이 이익집단 대표 기관에 자원하여 관련법 제정을 제안한다. 도로 안전이 의제에 올라 있다고 가정할 경우, 지역 기반 단체들, 사이클 연합, 버스 운전기사들, 교통 분야 관련 인사들, 교통사고 피해자 학부모들, 자동차연맹 등이 개입하는 식이다. 그런 다음 지원자들 가운데 제비뽑기로 뽑힌 150명이 검토기관에서 전문가들이 제출한 사항을 토대로 법률안을 제시한다. 정책 심사 기관은 모든 성인을 대상으로 제비뽑기를 하여 400명의 시민을 뽑은 후 의무적으로 참여케 하여 법률안에 대해 찬반 투표를 한다. 지원자들 가운데 제비뽑기로 뽑힌 50명의 시민은 규정 심의 기관에서 입법 활동과 관련한 절차와 규정을 결정한다. 마지막으로 지원자들 가운데 제비뽑기로 뽑힌 20명의 시민으로 구성된 감독기관은 입법 절차가 원활히 진행되도록 관리한다. 이 안에 따르면 권력의 독점과 엘리트주의를 방지하고, 이익집단의 로비도 통하지 않으며 공정하면서 효율적인 정치가 가능하다. 저자는 모든 시민은 적어도 자기 삶에 있어서만큼은 전문가들이며, 유능한 법률가로 구성된 의회라도 우리가 매일 먹는 빵 값을 모른다면 무슨 소용이냐고 묻는다. 그러니 선거만이 민주주의의 성배인 양 매달리지 말고 그런 고정관념을 깨라고 말한다. 선거와 제비뽑기를 함께 병행함으로써 부자나 학벌 좋은 엘리트, 유명인사만이 아니라 노동자, 농민, 전업주부 같은 보통 사람들을 의회로 보낼 수 있고 의회는 전체 국민의 구성과 근접하게 구성된다. 또한 제비뽑기는 선거 자금과 무관한 시스템이기 때문에 금권정치와 부패를 해결하고, 재선을 금지하여 광범위한 국민 참여를 가능케 한다. 제비뽑기의 가능성은 무궁무진하며 이로 인해 민주주의는 더 원활하게 작동할 것이다.
민주주의는 가장 우수한 사람이 지배하는 체제가 아니라 사람들의 제각기 다른 목소리를 반영하여 공동의 번영을 꾀하는 체제다. 그러므로 정치란 우리 삶의 일부분이며 정치를 혐오하고 별세계의 일로 치부하는 것은 자기 삶의 일부를 포기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저자는 지금처럼 시민을 정치에서 멀찍이 떨어트려 놓으면 민주주의 체제는 유지될 수 없다고 말한다. 선거만이 최선이 아니라는 도발적인 문제제기에서 시작해 사람들이 정치에서 멀어지게 된 근본적 원인을 분석하고 제비뽑기와 선거의 결합이라는 유효적절한 해결책을 제시하는 저자의 통찰력 넘치는 제안에 귀 기울여야 하는 이유다.
▣ 작가 소개
저자 : 다비트 판 레이브라우크
1971년 벨기에 브뤼헤에서 태어났다. 루벵 가톨릭 대학교에서 고고학과 철학을 공부하고 영국 케임브리지대학교에서 석사, 네덜란드 레이던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문화사학자, 고고학자, 작가다. 2010년 수년에 걸쳐 아프리카를 여행한 끝에 집필한 『콩고』를 출판했다. 노예제와 식민주의 속에서 사람들의 저항과 생존을 묘사한 이 책은 여러 언어로 번역 출간되었고, 네덜란드에서 아코 문학상(2010), 프랑스에서 그랑프리 메디치(2012)를 수상했다. 2011년에 벨기에에서 열린 더 나은 민주주의를 만들기 위한 시민 정상회담인 G1000 창립에 참여하고 활동했다.
역자 : 양영란
서울대학교 불어불문학과와 동대학원을 졸업하고, 프랑스 파리 3대학에서 불문학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코리아헤럴드》 기자와 《시사저널》 파리 통신원을 지냈다. 옮긴 책으로 『만화로 읽는 부자들의 사회학』 『엄지세대, 두 개의 뇌로 만들 미래』 『왜 검은 돈은 스위스로 몰리는가』 『굶주리는 세계, 어떻게 구할 것인가』 『탐욕의 시대』 『빼앗긴 대지의 꿈』 『공간의 생산』 『그리스인 이야기』 『물의 미래』 『위기 그리고 그 이후』 『빈곤한 만찬』 『현장에서 만난 20thC: 매그넘 1947~2006』 『미래의 물결』 『식물의 역사와 신화』 『잠수복과 나비』 등이 있으며, 김훈의 『칼의 노래』를 프랑스어로 옮겨 갈리마르사에서 출간했다.
▣ 주요 목차
역자서문: 우리는 왜 선거를 통해서만 민주주의가 가능하다고 생각할까?
1장 정치를 위협하는 민주주의 피로감 증후군
열광과 불신, 민주주의에 대한 엇갈린 시선
정당성의 위기: 조각난 지지율, 알 수 없는 유권자의 표심
내각을 구성하지 못하는 나라들
2장 왜 정치는 위협받고 있는가?
정치인들 탓이라는 진단 : 처방은 포퓰리즘?
민주주의 탓이라는 진단 : 처방은 관료주의?
대의 민주주의 탓이라는 진단 : 처방은 직접 민주주의?
선거를 통한 대의 민주주의 탓이라는 완전히 새로운 진단
3장 민주주의의 작은 역사, 선거로 축소된 민주주의
고대와 르네상스의 민주적 절차, 제비뽑기
18세기, 소수 특권층을 위해 고안된 선거
19?20세기, 선거가 민주주의와 동의어가 되다
4장 제비뽑기, 새로운 민주주의의 가능성
민중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다
현실 정치에서 부활한 민주주의 혁신 프로젝트들
제비뽑기로 구성된 의회는 어떻게 운영될까?
새로운 정치의 밑그림을 그리다
선거와 제비뽑기의 결합, 언제까지 변화를 망설일 것인가?
결론 민주주의를 민주화하라
감사의 말
추천의 말: 선거에 대한 고정관념을 깨는 해머|김종배
참고문헌
주
국민은 자신들이 자유롭다고 생각하는데, 이들은 잘못 생각해도 한참 잘못 생각하는 것이다. 이들이 자유로울 수 있는 건 단지 의회 구성원을 뽑는 선거 기간뿐이다. 일단 의원이 선출되는 즉시 국민은 노예가 되어버린다.
- 장자크 루소, 본문 중에서
전 세계를 덮친 민주주의 피로감 증후군
사람들은 왜 민주주의에 열광하면서도 그것을 불신하는 것일까?
국회의원 예비후보 3명이 선거구 획정 문제를 놓고 국회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았다며 서울 행정법원에 소송을 내는 사태가 벌어졌다. 국회가 피고 신분으로 재판을 받게 된 것은 1965년 한일협정 비준 동의를 무효로 해달라는 사건 이후 51년 만에 처음이다. 그동안 선거구 획정 문제를 놓고 여야 국회의원들이 자신들의 기득권을 저울질하는 모습을 보며 많은 사람들이 씁쓸해했다. 말로는 서민을 위한다지만 이들은 정말로 국민을 위하는가? 사실은 당리당략과 공천권을 놓고 다투는 것이 아니라? 소란스러운 국회를 보고 ‘다음 선거만 생각하는 정치꾼’들이라면서 고개를 돌려버리는 사람들은 점점 늘어만 가고 있다.
이런 정치에 대한 불신감은 우리나라만의 일이 아니다. 다비트 판 레이브라우크는 민주주의 피로감 증후군이 전 세계를 잠식해가고 있다고 말한다. 민주주의가 나라를 통치하는 데 적합한 방식이라는 점에는 동의하지만, 정당, 정부, 의회, 언론 등 실제 민주제도에 대한 신뢰도는 눈에 띄게 감소하고 있다. 민주주의가 다른 제도에 비해 그나마 덜 나쁜 통치형태로 여겨졌던 것은 정당성과 효율성 사이에서 건강한 균형을 유지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투표율이 떨어지고 각종 정치 기구에 가입하는 사람들도 줄어들면서 정당성에 문제가 생겼다. 의회는 산적한 문제를 처리하지 못하고, 내각을 제대로 구성하지 못하는 나라들이 속출하면서 효율성에도 문제가 생겼다. 정당성과 효율성이 모두 흔들리는 지금, 민주정치는 위기를 맞았다고 보아야 한다. 도대체 무엇이 문제일까?
민주주의에 대한 불신으로 촉발된 정치 위기의 진단과 처방
원인은 선거만이 민주주의라는 발상 자체에 있다
민주정치가 위기를 맞은 데 대한 진단과 처방은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 1) 정치인들 탓이니 포퓰리즘이 필요하다. 고학력의 전문 정치인이 의회를 차지한 탓에 보통 사람들을 제대로 대변하지 못하므로 포퓰리즘적인 정치인들로 의회를 대거 물갈이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사람만 바뀐다고 해서 정치가 더 효율적이 되리라는 보장은 없다. 2) 민주주의 탓이니 관료주의를 도입해야 한다. 여러 사람에게 의견을 묻기보다는 각종 전문가들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더 효율적이라는 입장이다. 하지만 이래서는 정당성에 문제가 생긴다. 3) 대의 민주주의 탓이니 직접 민주주의를 해야 한다. 이러한 주장은 특히 “월 스트리트를 점령하라” 운동에서 터져 나왔다. 그러나 이는 대의 민주주의에 대한 불편함을 드러내는 데 그쳤을 뿐, 현실을 바꾸는 대안이 되지는 못했다. 이처럼 정치 위기에 대한 진단과 처방은 각각 한계를 갖고 있다. 여기에서 저자는 진짜 원인이 선거를 통한 대의 민주주의에 있다는 새로운 진단을 내린다.
우리는 선거가 민의를 충분히 반영한다고 굳게 믿지만, 사실 선거는 소수 엘리트들의 정치적 입지를 제도적으로 보장해주기 위해 도입된 장치다. 미국과 프랑스혁명의 주도자들은 민중에게 권력을 맡기면 나라가 엉망이 되므로 똑똑하고 선택받은 소수가 권력을 쥐어야 한다고 생각해서 선거를 도입했다. 그로부터 200여 년이 지난 지금, 선거는 민주주의와 동의어가 되었다.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 몽테스키외, 장자크 루소 등은 선거는 소수특권적이고 오로지 제비뽑기만이 민주적이라고 주장했다. 대부분의 관직을 제비뽑기로 뽑은 고대 그리스 아테네, 나라를 이끌 지도자를 뽑을 때 제비뽑기를 활용한 르네상스 시대 유럽 도시공화국들처럼, 제비뽑기를 이용한 임의적 대의 민주주의는 통치자와 피통치자의 구분 없이 모든 시민을 정치에 참여하게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정치체제의 정당성과 효율성을 담보할 수 있었다. 저자는 지금 같은 소수 엘리트 집단의 권력 독점과 대중의 정치적 무관심을 타파하기 위해 제비뽑기를 부활시켜야 한다고 말한다.
선거와 제비뽑기의 결합, 고정관념을 깨야 대안이 보인다
보통 사람들의 참여가 정치를 위기에서 구한다
현재 제비뽑기는 미국, 영국, 캐나다 등에서 운영하는 사법 배심제에서나 겨우 명맥을 잇고 있다. 그렇지만 제비뽑기를 통해 시민들을 모아 선거제도 개혁이나 헌법 개정 등을 맡긴 캐나다, 네덜란드, 아일랜드, 아이슬란드의 예처럼 민주주의를 혁신하기 위한 시도들이 나타나고 있다. 학계에서는 대의제의 한계를 보완하기 위해 제비뽑기로 뽑힌 시민들로 의회의 원을 구성하여 법안 제정이나 검토 등을 맡기자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저자가 특히 전도유망한 대안으로 제시하는 테릴 버리셔스의 안은 제비뽑기로 6개의 기관을 구성할 것을 제안한다. 첫 단계인 의제 결정 기관에서 지원자들 가운데 제비뽑기로 뽑힌 150~400명의 시민이 법제정이 필요한 의제를 제시하고, 그 의제와 관련된 시민이 이익집단 대표 기관에 자원하여 관련법 제정을 제안한다. 도로 안전이 의제에 올라 있다고 가정할 경우, 지역 기반 단체들, 사이클 연합, 버스 운전기사들, 교통 분야 관련 인사들, 교통사고 피해자 학부모들, 자동차연맹 등이 개입하는 식이다. 그런 다음 지원자들 가운데 제비뽑기로 뽑힌 150명이 검토기관에서 전문가들이 제출한 사항을 토대로 법률안을 제시한다. 정책 심사 기관은 모든 성인을 대상으로 제비뽑기를 하여 400명의 시민을 뽑은 후 의무적으로 참여케 하여 법률안에 대해 찬반 투표를 한다. 지원자들 가운데 제비뽑기로 뽑힌 50명의 시민은 규정 심의 기관에서 입법 활동과 관련한 절차와 규정을 결정한다. 마지막으로 지원자들 가운데 제비뽑기로 뽑힌 20명의 시민으로 구성된 감독기관은 입법 절차가 원활히 진행되도록 관리한다. 이 안에 따르면 권력의 독점과 엘리트주의를 방지하고, 이익집단의 로비도 통하지 않으며 공정하면서 효율적인 정치가 가능하다. 저자는 모든 시민은 적어도 자기 삶에 있어서만큼은 전문가들이며, 유능한 법률가로 구성된 의회라도 우리가 매일 먹는 빵 값을 모른다면 무슨 소용이냐고 묻는다. 그러니 선거만이 민주주의의 성배인 양 매달리지 말고 그런 고정관념을 깨라고 말한다. 선거와 제비뽑기를 함께 병행함으로써 부자나 학벌 좋은 엘리트, 유명인사만이 아니라 노동자, 농민, 전업주부 같은 보통 사람들을 의회로 보낼 수 있고 의회는 전체 국민의 구성과 근접하게 구성된다. 또한 제비뽑기는 선거 자금과 무관한 시스템이기 때문에 금권정치와 부패를 해결하고, 재선을 금지하여 광범위한 국민 참여를 가능케 한다. 제비뽑기의 가능성은 무궁무진하며 이로 인해 민주주의는 더 원활하게 작동할 것이다.
민주주의는 가장 우수한 사람이 지배하는 체제가 아니라 사람들의 제각기 다른 목소리를 반영하여 공동의 번영을 꾀하는 체제다. 그러므로 정치란 우리 삶의 일부분이며 정치를 혐오하고 별세계의 일로 치부하는 것은 자기 삶의 일부를 포기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저자는 지금처럼 시민을 정치에서 멀찍이 떨어트려 놓으면 민주주의 체제는 유지될 수 없다고 말한다. 선거만이 최선이 아니라는 도발적인 문제제기에서 시작해 사람들이 정치에서 멀어지게 된 근본적 원인을 분석하고 제비뽑기와 선거의 결합이라는 유효적절한 해결책을 제시하는 저자의 통찰력 넘치는 제안에 귀 기울여야 하는 이유다.
▣ 작가 소개
저자 : 다비트 판 레이브라우크
1971년 벨기에 브뤼헤에서 태어났다. 루벵 가톨릭 대학교에서 고고학과 철학을 공부하고 영국 케임브리지대학교에서 석사, 네덜란드 레이던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문화사학자, 고고학자, 작가다. 2010년 수년에 걸쳐 아프리카를 여행한 끝에 집필한 『콩고』를 출판했다. 노예제와 식민주의 속에서 사람들의 저항과 생존을 묘사한 이 책은 여러 언어로 번역 출간되었고, 네덜란드에서 아코 문학상(2010), 프랑스에서 그랑프리 메디치(2012)를 수상했다. 2011년에 벨기에에서 열린 더 나은 민주주의를 만들기 위한 시민 정상회담인 G1000 창립에 참여하고 활동했다.
역자 : 양영란
서울대학교 불어불문학과와 동대학원을 졸업하고, 프랑스 파리 3대학에서 불문학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코리아헤럴드》 기자와 《시사저널》 파리 통신원을 지냈다. 옮긴 책으로 『만화로 읽는 부자들의 사회학』 『엄지세대, 두 개의 뇌로 만들 미래』 『왜 검은 돈은 스위스로 몰리는가』 『굶주리는 세계, 어떻게 구할 것인가』 『탐욕의 시대』 『빼앗긴 대지의 꿈』 『공간의 생산』 『그리스인 이야기』 『물의 미래』 『위기 그리고 그 이후』 『빈곤한 만찬』 『현장에서 만난 20thC: 매그넘 1947~2006』 『미래의 물결』 『식물의 역사와 신화』 『잠수복과 나비』 등이 있으며, 김훈의 『칼의 노래』를 프랑스어로 옮겨 갈리마르사에서 출간했다.
▣ 주요 목차
역자서문: 우리는 왜 선거를 통해서만 민주주의가 가능하다고 생각할까?
1장 정치를 위협하는 민주주의 피로감 증후군
열광과 불신, 민주주의에 대한 엇갈린 시선
정당성의 위기: 조각난 지지율, 알 수 없는 유권자의 표심
내각을 구성하지 못하는 나라들
2장 왜 정치는 위협받고 있는가?
정치인들 탓이라는 진단 : 처방은 포퓰리즘?
민주주의 탓이라는 진단 : 처방은 관료주의?
대의 민주주의 탓이라는 진단 : 처방은 직접 민주주의?
선거를 통한 대의 민주주의 탓이라는 완전히 새로운 진단
3장 민주주의의 작은 역사, 선거로 축소된 민주주의
고대와 르네상스의 민주적 절차, 제비뽑기
18세기, 소수 특권층을 위해 고안된 선거
19?20세기, 선거가 민주주의와 동의어가 되다
4장 제비뽑기, 새로운 민주주의의 가능성
민중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다
현실 정치에서 부활한 민주주의 혁신 프로젝트들
제비뽑기로 구성된 의회는 어떻게 운영될까?
새로운 정치의 밑그림을 그리다
선거와 제비뽑기의 결합, 언제까지 변화를 망설일 것인가?
결론 민주주의를 민주화하라
감사의 말
추천의 말: 선거에 대한 고정관념을 깨는 해머|김종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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