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 출판사서평
현대 자본주의와 관료제의 밀월,
공사(公私) 영역을 초월한 관료화의 진행
많은 이들이 ‘시장’은 마치 국가의 권력에서 동떨어진 자유로운 영역에서 생겨났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저자는 시장이 본래 국가 정책에 의해 비롯된 것으로, 주로 군부대의 이동이나 도시 약탈, 공물 탈취 그리고 전리품의 처리에 따른 부산물이었음을 밝힌다. 그리고 자유로운 영역으로서의 시장에 대한 생각은 19세기 이후로 우리의 머릿속에 새겨진 일종의 환상 같은 것임을 지적한다.
절대왕정의 붕괴와 더불어, ‘시장’은 국가 권력의 그 어떤 제재 없이도 자체적인 문제해결법을 갖추고 있다고 믿는 ‘시장 해법’ 개념이 대두했다. 즉 시장에 대한 자유방임 경제정책이 시행되면 규제와 관료주의를 상징하는 모든 것들은 쓸모없는 존재로 전락해 금세 사라질 것 같았다. 하지만 알다시피 현실은 이와 달랐다. 시장은 자체적인 문제해결능력을 갖추지 못했고, 심지어 시장경제를 제대로 유지하기 위해 절대왕정 때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엄청난 규제와 규칙들 그리고 이에 대한 처리 업무와 관련된 수많은 관료들이 필요해졌다.
특히 현대 자본주의 사회와 관료제가 만나자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의 구분 없이 사회의 모든 영역에 걸쳐 관료화가 진행되었다. 그 결과 이윤의 형태로 ‘부(富)’를 뽑아내기 위해 공적인 힘과 사적인 힘이 의기투합해 온갖 종류의 규칙과 규제들을 마구 생산해 내게 되었다. 이런 과정에서 소시민들의 삶은 점점 더 규제와 규칙에 얽매이게 되었다. 이제 우리는 고작 인터넷 카페 회원 가입을 위해서도 이해할 수 없는 깨알 같은 글씨들이 빼곡한 약관에 동의해야만 한다. 특정 직업을 얻기 위해 요구되는 학위나 자격증은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세분되고 다양화되었을 뿐만 아니라, 취득을 위한 비용도 만만치 않다. 이자나 수수료라는 명목으로 우리의 수입 일부는 일상적으로 금융권에 당연히 헌납되고 있는 것 또한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관료주의를 뒷받침하는
폭력, 기술, 가치의 메커니즘
이 책의 저자이자 인류학자인 데이비드 그레이버는 현대 자본주의와 관료제 사이의 끈끈한 밀월관계와 이로 인해 파생된 여러 가지 문제점들을 낱낱이 파헤친다. 또한 우리가 불만 속에서도 관료주의 체제에 속수무책으로 사로잡혀 있을 수밖에 없는 온갖 종류의 속임수나 덫들에 관해 조명하고, 우리가 자발적으로 거기에서 벗어나기 위한 진지한 고민을 시작하게 해준다.
많은 사람들이 폭력을 앞세운 문제해결 방식에 대해 전근대적이라는 사고방식을 갖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저자는 1장에서 폭력이야말로 관료주의를 움직이고 유지하는 막강한 힘임을 강조한다. 즉 추상화된 관념들로 포장된 폭력이 아닌 일종의 공권력으로 불릴 수 있는 구조적인 폭력이 지배하는 사회다. 그러한 구조적인 폭력은 때때로 우리의 상상력마저 마비시킨다. 저자는 폭력이 어떻게 사회 곳곳에서 우리의 행동 전반을 암묵적으로 통제하는지에 관한 메커니즘을 파헤친다.
2장에서는 한때 우리 모두를 설레게 했던 미래의 청사진(순간이동 장치, 날아다니는 자동차와 스케이트보드, 불로장생약 등등)이 왜 현실화되지 못했는가에 대해서도 날카롭게 분석한다. 즉 관료제는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상상력 넘치는 기술들을 왜 외면했는지, 그러한 기술에 대한 집착은 어째서 유치한 망상으로 치부되고 있는지를 말이다. 또한 자본은 기술의 어떤 분야로 집중되었고, 그런 분야에서 이룩한 찬란한 성과라는 게 고작 어떤 것들인지에 관해서도 파헤친다. 현대의 과학기술이 우리의 삶을 더욱 옥죄는 수단이 된 메커니즘에 관해서도 차근차근 설명해준다.
3장에서는 우리가 관료주의에 대해 불평하면서도 마음 한구석은 거기에 매료되어 체제가 유지되도록 기꺼이 동조하게 되는 이유에 대해서도 저자는 놓치지 않는다. 놀이와 게임 등의 예시를 통해 관료주의의 대안을 상상조차 하지 못하게 된 우리의 현실을 날카롭게 꼬집는다.
마지막으로 덧붙이는 글에서, 저자는 영화 ?배트맨?을 통해 법의 이름으로 국민의 목소리를 억압하는 공권력을 예리하게 통찰한다. ?배트맨?에는 거리를 점거하는 군중이 테러리스트처럼 묘사된다. 저자는 이 영화의 제작진이 월가점령시위의 평화시위 군중을 폭력집단으로 묘사했다고 지적한다. 배트맨은 폭력집단을 물리치는 슈퍼 영웅으로 그려지지만, 실은 공권력이라는 합법적인 폭력을 행사하는 집행자가 아니냐는 것이다.
규제철폐는
언제나 옳다!?
오늘날 정치판에서 자주 거론되는 말 중 ‘규제철폐(deregulation)’가 있다. 얼핏 보기에 이 말은 관료주의적 간섭을 덜어냄으로써 혁신을 끌어내고, 각종 규칙과 규제를 줄여주는 의미로 다가온다. 따라서 이에 반대하면 마치 규칙과 규제를 늘려야 한다는 주장으로 받아들여질 정도다.
하지만 생각해보자. 과연 ‘규제철폐’라는 게 온전히 규제를 없애 버린다는 의미일까? 안타깝게도 그 말은 각 이익단체나 의사결정권을 가진 이들이 ‘자기 입맛에 맞는 방식’으로 규제의 구조를 바꾸는 것을 의미한다. 사회 곳곳에서 규제철폐라는 이름을 앞세워 서로 자신에게 유리한 규제로 바꾸려는 시도가 이어졌고, 그 결과 극소수 거대 자본의 완벽한 지배를 받는 현재의 사회구도가 만들어졌다.
규칙을 자신들에게 유리한 쪽으로 바꾸고 싶을 때마다 규제철폐라는 이름을 앞세워 마치 관료주의를 줄이고, 개인에게 주도권을 돌리는 방법인 양 눈속임을 하는 가운데 규칙은 점점 더 복잡하고 치밀해졌다. 나아가 그 규칙을 관리하는 관료들의 수는 눈덩이처럼 불어났고, 개인의 자유는 그만큼 줄어들었으며, 처리해야 할 서류들은 나날이 늘어가고 있다.
놀이에 대한 공포,
규칙의 공정성이
자유를 줄 거라는 순진한 착각
그런데 기묘하게도 우리는 ‘전면적 관료주의화’의 희생양인 동시에 관료주의에 매료되고, 나아가 동조하는 조력자들이기도 하다. 우리가 느끼는 관료주의의 매력 뒤에 숨어 있는 것은 결국 ‘놀이’에 대한 공포다. 놀이란 무엇인가? 놀이는 규칙 없는 자유로움의 상징이다. 놀이와 비슷한 듯 다른 것이 시합이다. 예컨대 모든 종류의 스포츠 시합에는 규칙이 존재한다. 그리고 우리는 그 규칙 덕분에 공정함이 담보된다고 생각한다. 이는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도 규칙이 존재해야 공평하고 그 안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생각으로 이어진다.
현대사회는 어느 순간부터 독창적인 사고방식을 경계해왔다. 학자나 의사, 교수들조차 연구에 몰입하는 이상으로 행정 업무에 시간을 쏟아부어야 한다. 말로는 창의성을 부추기지만, 실상은 온갖 종류의 잣대를 마련해놓고 거기에만 맞출 것을 강요하는 개성 없고 획일화된 시스템이 구축되고 있다. 아인슈타인이 현대 사회에 살아온다면, 연구 개발비를 타내는 문제나 논문 통과조차 수월치 않았을 거라는 지적은 관료주의 사회가 얼마나 개인의 창의성을 말살하는지, 또한 온갖 종류의 규제와 규칙들이 개인의 삶을 얼마나 제한하는지 돌아보게 해준다.
우리 자신을 위해서라도
더 나은 세상을 상상할 필요가 있다
저자는 인류의 위대한 성취는 항상 돈키호테 같은 엉뚱한 환상 추구의 결과였음을 지적한다. 하지만 현대사회는 그러한 환상이 오히려 더욱 독단적인 권력창출로 이어졌고, 결국 규칙 속에 질식당하는 현실이 만들어지고 말았다. 이에 우리는 더 나은 뭔가가 존재할 수 있다는 가정조차 하지 못한 채 불만을 참고 현실에 수긍한다. 우리는 지금 이 현실이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라고 여기지만, 저자는 이 책을 통해 이 모든 것은 우리 스스로가 만들어 낸 것임을 깨닫게 해준다. 그리고 우리가 무엇이 문제인지 제대로 말할 수 있으려면, 우선 관료주의의 다양한 측면에 관해 진솔한 대화를 나눌 필요가 있음을 언급한다. 다른 상상을 해야 한다.
▣ 작가 소개
저 : 데이비드 그레이버
David Graeber
뉴욕주립대를 1984년 졸업하고 시카고 대학에서 석사와 박사 학위를 받았다. 2007년까지 예일대학의 교수였으며, 이후 런던 대학교 골드스미스 칼리지에서 사회인류학과 교수로 활동하고 있다. 마다가스카르 지역 현장 연구를 수행했으며 지구적 민중행동(People’s Global Action) 및 세계산업노동자조합(Industrial Workers of the World) 같은 급진적 사회운동 단체에서 활발한 활동을 펼쳐 왔다.
저작으로는 『아나키스트 인류학을 위한 단상들』(Fragments of an Anarchist Anthropology), 『가능성들: 위계, 반역, 욕망에 관한 에세이』(Possibilities: Essays on Hierarchy, Rebellion, and Desire), 『사라진 사람들: 마다가스카르의 마법과 노예제의 유증』(Lost People: Magic and the Legacy of Slavery in Madagascar), 『직접행동연대: 민족지학』(Direct Action: An Ethnography) 등이 있다.
역 : 김영배
1993년 고려대 경제학과를 졸업한 뒤 내외경제신문사(지금의 헤럴드경제신문)에서 기자생활을 시작해 한국은행, 재정경제원(지금의 기획재정부), 금융감독위원회(지금의 금융위원회) 등을 출입했으며. 산업 현장 취재 경험도 아울러 쌓았다. 2000년 6월부터 한겨레신문사로 옮겨 경제부·정치부 기자,「한겨레21」 경제팀장을 거쳐 지금은「한겨레신문」 재정금융팀장으로 일하고 있다. 옮긴 책으로 『온라인에서 팔아라』(2008), 『민스키의 눈으로 본 금융위기의 기원』(2009), 『휴버먼의 자본론』(2011), 『누가 우리를 무능하게 만드는가』(2014) 등이 있다. 「한겨레」 경제부 동료 기자들과 『한 줄의 경제학』(2011)을 공동 집필했다.
▣ 주요 목차
옮긴이의 글
[서문] 우리는 왜 신청서와 결재서류에 파묻히게 되었나
1 상상력의 질식: 사소한 위반에 대한 엄중한 복수
2 과학기술의 정체(停滯): 중요한 발전을 저해하는 절차들
3 개인들의 협조: 인간성 상실과 익명성에의 탐닉
[덧붙이는 글] ‘배트맨’ 다시 읽기: 국민주권을 제한하는 슈퍼 히어로
주석
현대 자본주의와 관료제의 밀월,
공사(公私) 영역을 초월한 관료화의 진행
많은 이들이 ‘시장’은 마치 국가의 권력에서 동떨어진 자유로운 영역에서 생겨났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저자는 시장이 본래 국가 정책에 의해 비롯된 것으로, 주로 군부대의 이동이나 도시 약탈, 공물 탈취 그리고 전리품의 처리에 따른 부산물이었음을 밝힌다. 그리고 자유로운 영역으로서의 시장에 대한 생각은 19세기 이후로 우리의 머릿속에 새겨진 일종의 환상 같은 것임을 지적한다.
절대왕정의 붕괴와 더불어, ‘시장’은 국가 권력의 그 어떤 제재 없이도 자체적인 문제해결법을 갖추고 있다고 믿는 ‘시장 해법’ 개념이 대두했다. 즉 시장에 대한 자유방임 경제정책이 시행되면 규제와 관료주의를 상징하는 모든 것들은 쓸모없는 존재로 전락해 금세 사라질 것 같았다. 하지만 알다시피 현실은 이와 달랐다. 시장은 자체적인 문제해결능력을 갖추지 못했고, 심지어 시장경제를 제대로 유지하기 위해 절대왕정 때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엄청난 규제와 규칙들 그리고 이에 대한 처리 업무와 관련된 수많은 관료들이 필요해졌다.
특히 현대 자본주의 사회와 관료제가 만나자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의 구분 없이 사회의 모든 영역에 걸쳐 관료화가 진행되었다. 그 결과 이윤의 형태로 ‘부(富)’를 뽑아내기 위해 공적인 힘과 사적인 힘이 의기투합해 온갖 종류의 규칙과 규제들을 마구 생산해 내게 되었다. 이런 과정에서 소시민들의 삶은 점점 더 규제와 규칙에 얽매이게 되었다. 이제 우리는 고작 인터넷 카페 회원 가입을 위해서도 이해할 수 없는 깨알 같은 글씨들이 빼곡한 약관에 동의해야만 한다. 특정 직업을 얻기 위해 요구되는 학위나 자격증은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세분되고 다양화되었을 뿐만 아니라, 취득을 위한 비용도 만만치 않다. 이자나 수수료라는 명목으로 우리의 수입 일부는 일상적으로 금융권에 당연히 헌납되고 있는 것 또한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관료주의를 뒷받침하는
폭력, 기술, 가치의 메커니즘
이 책의 저자이자 인류학자인 데이비드 그레이버는 현대 자본주의와 관료제 사이의 끈끈한 밀월관계와 이로 인해 파생된 여러 가지 문제점들을 낱낱이 파헤친다. 또한 우리가 불만 속에서도 관료주의 체제에 속수무책으로 사로잡혀 있을 수밖에 없는 온갖 종류의 속임수나 덫들에 관해 조명하고, 우리가 자발적으로 거기에서 벗어나기 위한 진지한 고민을 시작하게 해준다.
많은 사람들이 폭력을 앞세운 문제해결 방식에 대해 전근대적이라는 사고방식을 갖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저자는 1장에서 폭력이야말로 관료주의를 움직이고 유지하는 막강한 힘임을 강조한다. 즉 추상화된 관념들로 포장된 폭력이 아닌 일종의 공권력으로 불릴 수 있는 구조적인 폭력이 지배하는 사회다. 그러한 구조적인 폭력은 때때로 우리의 상상력마저 마비시킨다. 저자는 폭력이 어떻게 사회 곳곳에서 우리의 행동 전반을 암묵적으로 통제하는지에 관한 메커니즘을 파헤친다.
2장에서는 한때 우리 모두를 설레게 했던 미래의 청사진(순간이동 장치, 날아다니는 자동차와 스케이트보드, 불로장생약 등등)이 왜 현실화되지 못했는가에 대해서도 날카롭게 분석한다. 즉 관료제는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상상력 넘치는 기술들을 왜 외면했는지, 그러한 기술에 대한 집착은 어째서 유치한 망상으로 치부되고 있는지를 말이다. 또한 자본은 기술의 어떤 분야로 집중되었고, 그런 분야에서 이룩한 찬란한 성과라는 게 고작 어떤 것들인지에 관해서도 파헤친다. 현대의 과학기술이 우리의 삶을 더욱 옥죄는 수단이 된 메커니즘에 관해서도 차근차근 설명해준다.
3장에서는 우리가 관료주의에 대해 불평하면서도 마음 한구석은 거기에 매료되어 체제가 유지되도록 기꺼이 동조하게 되는 이유에 대해서도 저자는 놓치지 않는다. 놀이와 게임 등의 예시를 통해 관료주의의 대안을 상상조차 하지 못하게 된 우리의 현실을 날카롭게 꼬집는다.
마지막으로 덧붙이는 글에서, 저자는 영화 ?배트맨?을 통해 법의 이름으로 국민의 목소리를 억압하는 공권력을 예리하게 통찰한다. ?배트맨?에는 거리를 점거하는 군중이 테러리스트처럼 묘사된다. 저자는 이 영화의 제작진이 월가점령시위의 평화시위 군중을 폭력집단으로 묘사했다고 지적한다. 배트맨은 폭력집단을 물리치는 슈퍼 영웅으로 그려지지만, 실은 공권력이라는 합법적인 폭력을 행사하는 집행자가 아니냐는 것이다.
규제철폐는
언제나 옳다!?
오늘날 정치판에서 자주 거론되는 말 중 ‘규제철폐(deregulation)’가 있다. 얼핏 보기에 이 말은 관료주의적 간섭을 덜어냄으로써 혁신을 끌어내고, 각종 규칙과 규제를 줄여주는 의미로 다가온다. 따라서 이에 반대하면 마치 규칙과 규제를 늘려야 한다는 주장으로 받아들여질 정도다.
하지만 생각해보자. 과연 ‘규제철폐’라는 게 온전히 규제를 없애 버린다는 의미일까? 안타깝게도 그 말은 각 이익단체나 의사결정권을 가진 이들이 ‘자기 입맛에 맞는 방식’으로 규제의 구조를 바꾸는 것을 의미한다. 사회 곳곳에서 규제철폐라는 이름을 앞세워 서로 자신에게 유리한 규제로 바꾸려는 시도가 이어졌고, 그 결과 극소수 거대 자본의 완벽한 지배를 받는 현재의 사회구도가 만들어졌다.
규칙을 자신들에게 유리한 쪽으로 바꾸고 싶을 때마다 규제철폐라는 이름을 앞세워 마치 관료주의를 줄이고, 개인에게 주도권을 돌리는 방법인 양 눈속임을 하는 가운데 규칙은 점점 더 복잡하고 치밀해졌다. 나아가 그 규칙을 관리하는 관료들의 수는 눈덩이처럼 불어났고, 개인의 자유는 그만큼 줄어들었으며, 처리해야 할 서류들은 나날이 늘어가고 있다.
놀이에 대한 공포,
규칙의 공정성이
자유를 줄 거라는 순진한 착각
그런데 기묘하게도 우리는 ‘전면적 관료주의화’의 희생양인 동시에 관료주의에 매료되고, 나아가 동조하는 조력자들이기도 하다. 우리가 느끼는 관료주의의 매력 뒤에 숨어 있는 것은 결국 ‘놀이’에 대한 공포다. 놀이란 무엇인가? 놀이는 규칙 없는 자유로움의 상징이다. 놀이와 비슷한 듯 다른 것이 시합이다. 예컨대 모든 종류의 스포츠 시합에는 규칙이 존재한다. 그리고 우리는 그 규칙 덕분에 공정함이 담보된다고 생각한다. 이는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도 규칙이 존재해야 공평하고 그 안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생각으로 이어진다.
현대사회는 어느 순간부터 독창적인 사고방식을 경계해왔다. 학자나 의사, 교수들조차 연구에 몰입하는 이상으로 행정 업무에 시간을 쏟아부어야 한다. 말로는 창의성을 부추기지만, 실상은 온갖 종류의 잣대를 마련해놓고 거기에만 맞출 것을 강요하는 개성 없고 획일화된 시스템이 구축되고 있다. 아인슈타인이 현대 사회에 살아온다면, 연구 개발비를 타내는 문제나 논문 통과조차 수월치 않았을 거라는 지적은 관료주의 사회가 얼마나 개인의 창의성을 말살하는지, 또한 온갖 종류의 규제와 규칙들이 개인의 삶을 얼마나 제한하는지 돌아보게 해준다.
우리 자신을 위해서라도
더 나은 세상을 상상할 필요가 있다
저자는 인류의 위대한 성취는 항상 돈키호테 같은 엉뚱한 환상 추구의 결과였음을 지적한다. 하지만 현대사회는 그러한 환상이 오히려 더욱 독단적인 권력창출로 이어졌고, 결국 규칙 속에 질식당하는 현실이 만들어지고 말았다. 이에 우리는 더 나은 뭔가가 존재할 수 있다는 가정조차 하지 못한 채 불만을 참고 현실에 수긍한다. 우리는 지금 이 현실이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라고 여기지만, 저자는 이 책을 통해 이 모든 것은 우리 스스로가 만들어 낸 것임을 깨닫게 해준다. 그리고 우리가 무엇이 문제인지 제대로 말할 수 있으려면, 우선 관료주의의 다양한 측면에 관해 진솔한 대화를 나눌 필요가 있음을 언급한다. 다른 상상을 해야 한다.
▣ 작가 소개
저 : 데이비드 그레이버
David Graeber
뉴욕주립대를 1984년 졸업하고 시카고 대학에서 석사와 박사 학위를 받았다. 2007년까지 예일대학의 교수였으며, 이후 런던 대학교 골드스미스 칼리지에서 사회인류학과 교수로 활동하고 있다. 마다가스카르 지역 현장 연구를 수행했으며 지구적 민중행동(People’s Global Action) 및 세계산업노동자조합(Industrial Workers of the World) 같은 급진적 사회운동 단체에서 활발한 활동을 펼쳐 왔다.
저작으로는 『아나키스트 인류학을 위한 단상들』(Fragments of an Anarchist Anthropology), 『가능성들: 위계, 반역, 욕망에 관한 에세이』(Possibilities: Essays on Hierarchy, Rebellion, and Desire), 『사라진 사람들: 마다가스카르의 마법과 노예제의 유증』(Lost People: Magic and the Legacy of Slavery in Madagascar), 『직접행동연대: 민족지학』(Direct Action: An Ethnography) 등이 있다.
역 : 김영배
1993년 고려대 경제학과를 졸업한 뒤 내외경제신문사(지금의 헤럴드경제신문)에서 기자생활을 시작해 한국은행, 재정경제원(지금의 기획재정부), 금융감독위원회(지금의 금융위원회) 등을 출입했으며. 산업 현장 취재 경험도 아울러 쌓았다. 2000년 6월부터 한겨레신문사로 옮겨 경제부·정치부 기자,「한겨레21」 경제팀장을 거쳐 지금은「한겨레신문」 재정금융팀장으로 일하고 있다. 옮긴 책으로 『온라인에서 팔아라』(2008), 『민스키의 눈으로 본 금융위기의 기원』(2009), 『휴버먼의 자본론』(2011), 『누가 우리를 무능하게 만드는가』(2014) 등이 있다. 「한겨레」 경제부 동료 기자들과 『한 줄의 경제학』(2011)을 공동 집필했다.
▣ 주요 목차
옮긴이의 글
[서문] 우리는 왜 신청서와 결재서류에 파묻히게 되었나
1 상상력의 질식: 사소한 위반에 대한 엄중한 복수
2 과학기술의 정체(停滯): 중요한 발전을 저해하는 절차들
3 개인들의 협조: 인간성 상실과 익명성에의 탐닉
[덧붙이는 글] ‘배트맨’ 다시 읽기: 국민주권을 제한하는 슈퍼 히어로
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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