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 출판사서평
현대 일본의 대표적인 지성, 우치다 타츠루가 말하는 문제적 세상에서 살아남는 방법
세계적인 불황 속에서 한정된 자원으로 사회 구성원들에게 효율적으로 자원을 배분하는 문제가 도마 위에 오르고, 갈수록 험악해지는 사회 분위기로 데이트 폭력, 강남역 묻지 마 살인, IS 테러에 대한 공포 등이 날로 커지고 있다. 언제 어디서 어떤 위기 상황이 닥칠지 알 수 없는 불투명한 시대, 잘 살아남기 위해 현대인들에게 필요한 무기는 무엇일까? 우치다 타츠루의 『사악한 것을 물리치는 법』은 이런 문제의식에서 출발한다.
우치다 타츠루에 따르면 풍족한 사회에서 안전 불감증에 걸린 현대인들은 자신이 알지 못하는 것, 현대과학으로 풀 수 없는 것, 자신이 어찌해볼 수 없는 자연재해 등 인간적 척도를 넘어서는 일들에 눈을 감아버리고 존재하지 않는 것, 혹은 생각하기 싫은 것으로 구석에 치워버렸다. ‘불가해한 것에 맞닥트렸을 때 인간이 얼마나 무력한가’를 보여준 영화 〈곡성〉은 어쩌면 이러한 현실에 대한 알레고리인지 모른다.
책은 우치다 타츠루가 2005년에서 2009년까지 자신의 블로그에 올린 글들 중 ‘저주’를 키워드로 한 글들을 엮은 것이다. 저자는 현재 리스크 사회에서 ‘사악한 것을 물리치는 일’이 시급한 문제임을 인식하고 매뉴얼이 없는 상황에서도 해결 방법을 찾아내는 앎, 즉 ‘선구적 앎’이야말로 지성이 추구해야 할 일이라고 말한다. 모방 범죄가 내포한 섬뜩한 덫, 거울뉴런과 유체이탈, 피해자의 저주, 영적 체험의 수용 방법에서 초식계 남자 문제 그리고 『1Q84』의 서사 구조에 이르기까지, 우치다 타츠루는 다양한 주제를 다룬 46편의 글에 리스크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한 생존 전략을 담았다.
타츠루가 생각하는 ‘사악한 것’의 의미
여기서 ‘사악한 것’이란 무엇일까. 이는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다. 즉 악마라든가 흡혈귀, 혹은 좀비 같은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저자가 말하는 ‘사악한 것’은 다음 두 가지 요건을 충족시켜야 한다. 첫째, 관계를 맺을 때 상식적인 판단이나 일상적인 윤리가 소용없어지는 것, 즉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는 것이다. 둘째, 그렇다고 손 놓고 있으면 반드시 ‘재액’을 당하는 것이다.
사악한 것의 핵심에는 현실적으로 무수하게 존재하는 ‘알 수 없는 것’ 또는 우리의 이성과 인식을 벗어난 초월적인 것이 자리 잡고 있다. 상상조차 못한 처참한 일, 인간의 힘으로는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는 자연의 괴력에서부터 아무리 노력해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타자’들만 여기에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타츠루는 관점을 바꾸면 ‘아버지’, ‘가족’처럼 늘 무심히 눈앞에 보고 있는 존재까지 ‘사악한 것’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사악한 것’은 악마나 인간이 어찌할 도리가 없다고 느끼는 자연재해 등만이 아니라 부권제 이데올로기나 역사를 관통하는 절대정신, 시스템 등의 얼굴로 나타나기도 하기 때문이다.
타츠루가 말하는 사악한 것은 라틴어 ‘sacer’와 가깝다. ‘sacer’에는 ‘신성한’과 ‘저주받은’이라는 반대 말뜻이 포함되어 있다. 성스러운 것과 사악한 것은 의미가 정해지지 않은 상태로 세상에 온다. 인간을 압도하는 무언가가 결과적으로 인간을 지성적이고 감성적인 성숙의 길로 이끌어준다면 사후적으로 신성한 것으로 불릴 것이고, 인간의 생명력을 말살하거나 살아갈 지혜를 흐린다면 사악한 것이라 불릴 것이다. 어떤 종류의 화학 변화를 ‘부패’라 부르기도 하고 ‘발효’라 부르기도 하는 것처럼, 이는 어디까지나 인간 중심적인 척도에 따른 것이다. 저자에 따르면, 성스러운 것과 사악한 것의 본질은 같다. 따라서 인간에게 충분한 영적 준비가 되어 있다면, 사악한 것은 성스러운 것으로 바뀔 수 있다.
그렇다면 사악한 것과 조우했을 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저자가 찾아낸 답은 이렇다. ‘겸허함’, ‘고도의 신체 감각’, ‘열린 마음’.
다시 생각하는 인간의 조건, 고베 대지진이 우리에게 남긴 교훈
타츠루는 실제 1995년 고베 대지진 현장에 있었던 산증인이다. 당시 고베 한 대학에서 강사로 일했던 저자는 자신이 머문 집이 지진으로 반쯤 무너져 내리고 다음날 학교 연구실을 찾을 때까지만 해도 지진으로 인한 피해의 규모를 전혀 알지 못했다. 연구실에 떨어진 파편을 줍고 굴러 떨어진 책을 책장에 꽂아놓고 교정을 거닐다 순간 충격에 휩싸인다. 저자는 당시 사고회로의 한 선이 뚜둑 끊어져버린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고 회고한다. 그로부터 약 한 달간 그는 옷도 갈아입지 않고 목욕도 못한 채 사고 현장에 뛰어들었다. 복구 기간만 3년 넘게 걸린 사태였지만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유리창 파편을 줍는 일이 고작이었다. 우선 눈앞의 일부터 치우자고 마음먹었다.
대지진을 통해 타츠루는 몇 가지 가르침을 얻는다. 매뉴얼이 없는 극한 상황에서도 적절한 행위를 무의식중에 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다. 복구 사업 중에 ‘여기 누가 와 주었으면……’ 하고 있을 때 마침 찾아와 도움을 주었던 사람들이다. 저자에 따르면 이는 일종의 ‘신체 감각’ 같은 것이다. “때로는 전모를 다 파악해 가장 적절한 답만 내놓으려는 스마트함을 단념하지 않으면 신체가 움직이지 않는 국면이 있다는 것”, “어디에서 누가 자신을 필요로 하는지 직감하는 힘, 기댈 수 있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을 식별하는 감수성이 이런 상황에서는 예민해진다는 것”을 대지진의 경험으로부터 배웠다.
“누구를 죽이든 상관없었다” , 기호로 전락한 인간
저자는 ‘연쇄살인 사건이나 묻지 마 살인 사건’을 통해 그것이 지닌 사악함의 심오함을 지적한다. 산술적으로 많이 죽일수록 사악하다는 것이 아니다. “연쇄살인자의 사악함은 피해자의 유일무이함을 손상시킨다는 데 있다. 곧 피해자를 살아 있는 인간이 아니라 ‘기호’로 바꾸어버리는 점이야말로 연쇄 살인자의 본래적인 사악함이다.” 아키하바라에서 트럭으로 일곱 명을 죽인 ‘묻지 마 살인 사건’도 마찬가지다. 용의자가 “누구를 죽이든 상관없었다”고 말하는 것에서 알 수 있듯, 문제는 그저 숫자일 뿐이다. 이때 피해자들은 용의자가 무언가 메시지를 발신하기 위한 도구적 존재, 즉 기호의 차원으로 전락하고 만다. 이 사건을 언급하는 누구라도 이 표현을 되풀이하는 한 그들을 도구적이고 기호적으로 ‘이용’한 용의자의 편을 들어주는 셈이 된다. 타츠루는 사회 전체를 공범관계로 끌어들였다는 데 이 사건의 사악함을 본다.
용의자 입장에선 자신의 범죄가 인구에 회자되면 회자될수록 오랫동안 자기 이름을 언급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모방 범죄자들은 기호적으로 피해자를 다루면 다룰수록 자신을 영원한 존재로 만들 수 있다.
그렇다면 이런 사건에 대해 우리는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이런 사건의 재발을 막기 위한 수단은 무엇인가? 우선 유효한 대책으로는 사건 자체에 대해 될수록 언급을 하지 않는 것이다. 둘째, 범죄자들의 범행 동기가 얼마나 보잘것없고 비합리적인지 진저리를 치는 일이다. 자신을 대단한 사람으로 보이고 싶거나 주목을 받고 싶어 안달이 난 이들의 논리에 맞장구를 쳐주지 않고 그들의 보잘것없음을 공통된 이해로 삼음으로써 사건의 재발 막기 위한 통찰이 어느 정도 가능하다고 보는 것이다.
스스로 다시 서는 인간을 생각한다
저성장, 불황, 고용 불안정이 만연한 오늘날 같은 시기에는 공동체에서 이탈자가 나오지 않도록 약자를 우선적으로 배려해야 하기 마련이다. 타츠루는 이런 시기에도 위기의식은커녕 작은 이익을 위해 위험을 무릅쓰는 인간들에게서 ‘사악한 것’을 본다. 이들은 얼마 안 되는 이익을 위해 인생을 망치는 리스크를 감수한다. 이를테면 내부 정보를 통해 주식 거래를 한 혐의로 검찰 조사를 받은 NHK 기자들, 정치 자금 횡령으로 정치 인생을 마감하는 정치인이 그런 예이다. 이들은 얼마 안 되는 이익을 위해 치명적인 위험을 무릅쓰고, 그것은 결국 ‘자기 소멸’을 원하는 저주가 되어 자신에게 돌아온다. 저자는 세상엔 다양한 종류의 저주가 있지만, 스스로에게 건 저주는 누구도 해제할 수 없음을 강조한다.
타츠루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1Q84』에서 ‘사악하고 강대한 아버지’라는 표상 자체를 무효화하고 아버지의 지배(아버지의 저주)로부터 벗어나는 서사의 원형을 읽으며, ‘세계의 의미를 담보하는 자’ ‘세계의 질서를 정하고 모든 의미를 확정하는 최종 심급’으로서의 아버지를 벗어나려면 ‘지금과 같은 인간이 된 데 누구한테도 책임을 묻지 않겠다’는 태도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즉 아버지를 통해 자신을 설명하는 것을 멈추고, 더 이상 자신의 존재를 타자를 통해 설명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있는 인간에게만 ‘아버지의 지배’로부터 벗어날 기회가 찾아온다는 것이다.
인간적 척도를 넘어선 것을 대하는 자세
우치다 타츠루에 따르면, 현대인들에게 가장 필요한 덕목은 위기 감지 능력, 촉, 해답을 알지 못하지만 왠지 해결할 수 있을 것만 같은 그런 직관적인 앎이다. 말하자면 동물적인 감각을 다시 예리하게 갈고 닦아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우리가 알지 못하는 자연 현상이나 영적인 체험, 종교적 현상 등에 대해서도 미신으로 치부할 것이 아니라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일 마음의 자세를 가져야 한다. 여기엔 설명할 수 없는 것은 설명하지 않는다는 절도의 감각과 영적 체험을 단순한 서사의 틀로 회수하지 않는 겸허함이 요구된다. 언제 사고가 터져도 바로 “이쪽!”이라며 사고를 피해갈 수 있는 그런 신체 감각을 키울 것, 인간의 힘으로 제어할 수 없는 힘에 대해 자만하지 말고 알려고 노력하는 겸허함, 언제든 내가 모르는 것을 확장된 인식의 틀로 담아보겠다는 열린 마음 등이 시대적 요청이라는 것이 타츠루가 이 책을 통해 말하고자 한 핵심이다.
일본의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 사고는 인간적 척도를 넘어선 무언가가 몰아닥친 대표적인 사례다. 저자는 “인간이 제어할 수 없는 힘에 대한 순수한 외경심, 즉 겸허함이 있었다면 처음부터 원자력 발전 같은 위험한 기술에는 손을 대지 않았을 거”라고 말한다. 손을 댔더라도 “신을 숭배하듯 최대한 주의를 기울여 조심스럽게 다가갔을 거”라고.
타츠루는 이런 능력들의 함양을 통해 “판단이 공정하고 신체 감수성이 높고 상상력의 발동을 아끼지 않는 사람들로 구성된 공동체가 형성된다면 집단과 그 주변에는 국소적으로 ‘질서 같은 것’이 ‘무질서’를 상대적으로 제어할 것”이라고 말한다. 인간이 제어할 수 없는 거대한 힘이 ‘사악한 것’으로 작용해버린 것은 모두 인간의 잘못이다. 우리가 열린 마음으로 겸허하게 국소적인 ‘질서 같은 것’을 추구해나간다면 사악한 것은 얼마든지 성스러운 것이 될 수 있다. 문제를 해결책으로 바꾸는, 즉 카테고리를 변환시키는 지혜가 필요하다.
▣ 작가 소개
저 : 우치다 타츠루
1950년 일본 도쿄에서 태어났다. 도쿄대학 문학부 불문과를 졸업하고 도쿄도립대학 대학원 인문과학연구과 박사과정을 중퇴했다. 전문 분야는 주로 프랑스 현대 사상, 영화론, 교육론, 무도론(武道論) 등이다. 고베여학원대학 문학부 종합문화학과 교수직을 퇴직한 뒤 같은 대학 명예교수로 재직 중이다. 2011년 고베 시에 무도와 철학을 위한 배움터 ‘개풍관(凱風館)’을 열어, 문무를 함께 단련하고 있다. 문학, 철학, 정치, 문화, 교육 등 다양한 분야의 50여 권이 넘는 저서를 통해 비판적 지성을 보여 주고 있는 일본의 대표적인 사상가, 교육가, 문화 평론가이다.
『레비나스와 사랑의 현상학』은 저자 자신이 평생의 스승으로 삼은 레비나스의 난해한 철학을 레비나스의 논리 체계 안에서 수월하게 풀어내고 있다. 지은 책으로 『영화는 죽었다』(공저) 『현대 사상의 퍼포먼스』(공저) 『망설임의 윤리학』 『아저씨적인 사고』 『죽음과 신체』 『타자와 죽은 자』 등이 있으며, 에마뉘엘 레비나스의 『곤란한 자유』등을 일본어로 옮겼다. 2007년 『유대문화론』으로 고바야시 히데오 상을, 2010년 『일본변경론』으로 신서대상을 수상했다. 국내에 출간된 저서로는『하류지향』,『푸코, 바르트, 레비스트로스, 라캉 쉽게 읽기』,『청년이여, 마르크스를 읽자』,『일본변경론』,『절망의 시대를 건너는 법』(공저),『혼자 못 사는 것도 재주』,『하루키 씨를 조심하세요』등이 있다.
역 : 김경원
1964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서울대 국문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 대학원에서 문학박사학위를 받았다. 일본 홋카이도 대학에서 객원 연구원으로 지냈으며, 인하대학교 한국학연구소 전임연구원, 한양대 비교역사연구소 전임연구원을 역임하였다. 근대문학이나 인문학과 관련하여 한국어를 살펴보거나 소설 작품에 대해 자신만의 비평과 해석을 가하는 글쓰기에 시간을 할애하고 있다. 한국문학과 일본문학을 넘나드는 연구에 힘을 쏟는 한편, 『동서문학』 평론부문 신인상을 수상한 이후 여러 문예지에서 문학평론가로 활동하였다. 기획과 편집 등의 출판 관련 작업에도 줄곧 참여하고 있다.
저서로 『국어실력이 밥 먹여준다』(공저)가 있고, 일어 및 영어 번역가로 활동하고 있다. 역서로는 『토토의 눈물』, 『폴 오스터』, 『마르크스 그 가능성의 중심』, 『우리 안의 과거』, 『불황의 메커니즘』『확률의 경제학』『세계화의 원근법』, 『모래성』, 『가난뱅이의 역습』, 『르네상스 문학의 세 얼굴』,『가난뱅이 난장쇼』,『경계에 선 여인들』,『기다린다는 것』 등이 있다.
▣ 주요 목차
한국어판 저자 서문
머리말
1. 이야기를 향해-사악한 것의 코스몰로지
2. 사악한 것을 물리치는 법-저주와 축복
3. 제정신과 광기 사이-영적 감수성의 복권
4. 우선 손쉬운 일부터 시작하자-실천적 예언집
5. 애신애린-공생의 시대를 향해
맺음말
문고본 후기
해설
현대 일본의 대표적인 지성, 우치다 타츠루가 말하는 문제적 세상에서 살아남는 방법
세계적인 불황 속에서 한정된 자원으로 사회 구성원들에게 효율적으로 자원을 배분하는 문제가 도마 위에 오르고, 갈수록 험악해지는 사회 분위기로 데이트 폭력, 강남역 묻지 마 살인, IS 테러에 대한 공포 등이 날로 커지고 있다. 언제 어디서 어떤 위기 상황이 닥칠지 알 수 없는 불투명한 시대, 잘 살아남기 위해 현대인들에게 필요한 무기는 무엇일까? 우치다 타츠루의 『사악한 것을 물리치는 법』은 이런 문제의식에서 출발한다.
우치다 타츠루에 따르면 풍족한 사회에서 안전 불감증에 걸린 현대인들은 자신이 알지 못하는 것, 현대과학으로 풀 수 없는 것, 자신이 어찌해볼 수 없는 자연재해 등 인간적 척도를 넘어서는 일들에 눈을 감아버리고 존재하지 않는 것, 혹은 생각하기 싫은 것으로 구석에 치워버렸다. ‘불가해한 것에 맞닥트렸을 때 인간이 얼마나 무력한가’를 보여준 영화 〈곡성〉은 어쩌면 이러한 현실에 대한 알레고리인지 모른다.
책은 우치다 타츠루가 2005년에서 2009년까지 자신의 블로그에 올린 글들 중 ‘저주’를 키워드로 한 글들을 엮은 것이다. 저자는 현재 리스크 사회에서 ‘사악한 것을 물리치는 일’이 시급한 문제임을 인식하고 매뉴얼이 없는 상황에서도 해결 방법을 찾아내는 앎, 즉 ‘선구적 앎’이야말로 지성이 추구해야 할 일이라고 말한다. 모방 범죄가 내포한 섬뜩한 덫, 거울뉴런과 유체이탈, 피해자의 저주, 영적 체험의 수용 방법에서 초식계 남자 문제 그리고 『1Q84』의 서사 구조에 이르기까지, 우치다 타츠루는 다양한 주제를 다룬 46편의 글에 리스크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한 생존 전략을 담았다.
타츠루가 생각하는 ‘사악한 것’의 의미
여기서 ‘사악한 것’이란 무엇일까. 이는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다. 즉 악마라든가 흡혈귀, 혹은 좀비 같은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저자가 말하는 ‘사악한 것’은 다음 두 가지 요건을 충족시켜야 한다. 첫째, 관계를 맺을 때 상식적인 판단이나 일상적인 윤리가 소용없어지는 것, 즉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는 것이다. 둘째, 그렇다고 손 놓고 있으면 반드시 ‘재액’을 당하는 것이다.
사악한 것의 핵심에는 현실적으로 무수하게 존재하는 ‘알 수 없는 것’ 또는 우리의 이성과 인식을 벗어난 초월적인 것이 자리 잡고 있다. 상상조차 못한 처참한 일, 인간의 힘으로는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는 자연의 괴력에서부터 아무리 노력해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타자’들만 여기에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타츠루는 관점을 바꾸면 ‘아버지’, ‘가족’처럼 늘 무심히 눈앞에 보고 있는 존재까지 ‘사악한 것’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사악한 것’은 악마나 인간이 어찌할 도리가 없다고 느끼는 자연재해 등만이 아니라 부권제 이데올로기나 역사를 관통하는 절대정신, 시스템 등의 얼굴로 나타나기도 하기 때문이다.
타츠루가 말하는 사악한 것은 라틴어 ‘sacer’와 가깝다. ‘sacer’에는 ‘신성한’과 ‘저주받은’이라는 반대 말뜻이 포함되어 있다. 성스러운 것과 사악한 것은 의미가 정해지지 않은 상태로 세상에 온다. 인간을 압도하는 무언가가 결과적으로 인간을 지성적이고 감성적인 성숙의 길로 이끌어준다면 사후적으로 신성한 것으로 불릴 것이고, 인간의 생명력을 말살하거나 살아갈 지혜를 흐린다면 사악한 것이라 불릴 것이다. 어떤 종류의 화학 변화를 ‘부패’라 부르기도 하고 ‘발효’라 부르기도 하는 것처럼, 이는 어디까지나 인간 중심적인 척도에 따른 것이다. 저자에 따르면, 성스러운 것과 사악한 것의 본질은 같다. 따라서 인간에게 충분한 영적 준비가 되어 있다면, 사악한 것은 성스러운 것으로 바뀔 수 있다.
그렇다면 사악한 것과 조우했을 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저자가 찾아낸 답은 이렇다. ‘겸허함’, ‘고도의 신체 감각’, ‘열린 마음’.
다시 생각하는 인간의 조건, 고베 대지진이 우리에게 남긴 교훈
타츠루는 실제 1995년 고베 대지진 현장에 있었던 산증인이다. 당시 고베 한 대학에서 강사로 일했던 저자는 자신이 머문 집이 지진으로 반쯤 무너져 내리고 다음날 학교 연구실을 찾을 때까지만 해도 지진으로 인한 피해의 규모를 전혀 알지 못했다. 연구실에 떨어진 파편을 줍고 굴러 떨어진 책을 책장에 꽂아놓고 교정을 거닐다 순간 충격에 휩싸인다. 저자는 당시 사고회로의 한 선이 뚜둑 끊어져버린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고 회고한다. 그로부터 약 한 달간 그는 옷도 갈아입지 않고 목욕도 못한 채 사고 현장에 뛰어들었다. 복구 기간만 3년 넘게 걸린 사태였지만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유리창 파편을 줍는 일이 고작이었다. 우선 눈앞의 일부터 치우자고 마음먹었다.
대지진을 통해 타츠루는 몇 가지 가르침을 얻는다. 매뉴얼이 없는 극한 상황에서도 적절한 행위를 무의식중에 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다. 복구 사업 중에 ‘여기 누가 와 주었으면……’ 하고 있을 때 마침 찾아와 도움을 주었던 사람들이다. 저자에 따르면 이는 일종의 ‘신체 감각’ 같은 것이다. “때로는 전모를 다 파악해 가장 적절한 답만 내놓으려는 스마트함을 단념하지 않으면 신체가 움직이지 않는 국면이 있다는 것”, “어디에서 누가 자신을 필요로 하는지 직감하는 힘, 기댈 수 있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을 식별하는 감수성이 이런 상황에서는 예민해진다는 것”을 대지진의 경험으로부터 배웠다.
“누구를 죽이든 상관없었다” , 기호로 전락한 인간
저자는 ‘연쇄살인 사건이나 묻지 마 살인 사건’을 통해 그것이 지닌 사악함의 심오함을 지적한다. 산술적으로 많이 죽일수록 사악하다는 것이 아니다. “연쇄살인자의 사악함은 피해자의 유일무이함을 손상시킨다는 데 있다. 곧 피해자를 살아 있는 인간이 아니라 ‘기호’로 바꾸어버리는 점이야말로 연쇄 살인자의 본래적인 사악함이다.” 아키하바라에서 트럭으로 일곱 명을 죽인 ‘묻지 마 살인 사건’도 마찬가지다. 용의자가 “누구를 죽이든 상관없었다”고 말하는 것에서 알 수 있듯, 문제는 그저 숫자일 뿐이다. 이때 피해자들은 용의자가 무언가 메시지를 발신하기 위한 도구적 존재, 즉 기호의 차원으로 전락하고 만다. 이 사건을 언급하는 누구라도 이 표현을 되풀이하는 한 그들을 도구적이고 기호적으로 ‘이용’한 용의자의 편을 들어주는 셈이 된다. 타츠루는 사회 전체를 공범관계로 끌어들였다는 데 이 사건의 사악함을 본다.
용의자 입장에선 자신의 범죄가 인구에 회자되면 회자될수록 오랫동안 자기 이름을 언급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모방 범죄자들은 기호적으로 피해자를 다루면 다룰수록 자신을 영원한 존재로 만들 수 있다.
그렇다면 이런 사건에 대해 우리는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이런 사건의 재발을 막기 위한 수단은 무엇인가? 우선 유효한 대책으로는 사건 자체에 대해 될수록 언급을 하지 않는 것이다. 둘째, 범죄자들의 범행 동기가 얼마나 보잘것없고 비합리적인지 진저리를 치는 일이다. 자신을 대단한 사람으로 보이고 싶거나 주목을 받고 싶어 안달이 난 이들의 논리에 맞장구를 쳐주지 않고 그들의 보잘것없음을 공통된 이해로 삼음으로써 사건의 재발 막기 위한 통찰이 어느 정도 가능하다고 보는 것이다.
스스로 다시 서는 인간을 생각한다
저성장, 불황, 고용 불안정이 만연한 오늘날 같은 시기에는 공동체에서 이탈자가 나오지 않도록 약자를 우선적으로 배려해야 하기 마련이다. 타츠루는 이런 시기에도 위기의식은커녕 작은 이익을 위해 위험을 무릅쓰는 인간들에게서 ‘사악한 것’을 본다. 이들은 얼마 안 되는 이익을 위해 인생을 망치는 리스크를 감수한다. 이를테면 내부 정보를 통해 주식 거래를 한 혐의로 검찰 조사를 받은 NHK 기자들, 정치 자금 횡령으로 정치 인생을 마감하는 정치인이 그런 예이다. 이들은 얼마 안 되는 이익을 위해 치명적인 위험을 무릅쓰고, 그것은 결국 ‘자기 소멸’을 원하는 저주가 되어 자신에게 돌아온다. 저자는 세상엔 다양한 종류의 저주가 있지만, 스스로에게 건 저주는 누구도 해제할 수 없음을 강조한다.
타츠루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1Q84』에서 ‘사악하고 강대한 아버지’라는 표상 자체를 무효화하고 아버지의 지배(아버지의 저주)로부터 벗어나는 서사의 원형을 읽으며, ‘세계의 의미를 담보하는 자’ ‘세계의 질서를 정하고 모든 의미를 확정하는 최종 심급’으로서의 아버지를 벗어나려면 ‘지금과 같은 인간이 된 데 누구한테도 책임을 묻지 않겠다’는 태도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즉 아버지를 통해 자신을 설명하는 것을 멈추고, 더 이상 자신의 존재를 타자를 통해 설명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있는 인간에게만 ‘아버지의 지배’로부터 벗어날 기회가 찾아온다는 것이다.
인간적 척도를 넘어선 것을 대하는 자세
우치다 타츠루에 따르면, 현대인들에게 가장 필요한 덕목은 위기 감지 능력, 촉, 해답을 알지 못하지만 왠지 해결할 수 있을 것만 같은 그런 직관적인 앎이다. 말하자면 동물적인 감각을 다시 예리하게 갈고 닦아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우리가 알지 못하는 자연 현상이나 영적인 체험, 종교적 현상 등에 대해서도 미신으로 치부할 것이 아니라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일 마음의 자세를 가져야 한다. 여기엔 설명할 수 없는 것은 설명하지 않는다는 절도의 감각과 영적 체험을 단순한 서사의 틀로 회수하지 않는 겸허함이 요구된다. 언제 사고가 터져도 바로 “이쪽!”이라며 사고를 피해갈 수 있는 그런 신체 감각을 키울 것, 인간의 힘으로 제어할 수 없는 힘에 대해 자만하지 말고 알려고 노력하는 겸허함, 언제든 내가 모르는 것을 확장된 인식의 틀로 담아보겠다는 열린 마음 등이 시대적 요청이라는 것이 타츠루가 이 책을 통해 말하고자 한 핵심이다.
일본의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 사고는 인간적 척도를 넘어선 무언가가 몰아닥친 대표적인 사례다. 저자는 “인간이 제어할 수 없는 힘에 대한 순수한 외경심, 즉 겸허함이 있었다면 처음부터 원자력 발전 같은 위험한 기술에는 손을 대지 않았을 거”라고 말한다. 손을 댔더라도 “신을 숭배하듯 최대한 주의를 기울여 조심스럽게 다가갔을 거”라고.
타츠루는 이런 능력들의 함양을 통해 “판단이 공정하고 신체 감수성이 높고 상상력의 발동을 아끼지 않는 사람들로 구성된 공동체가 형성된다면 집단과 그 주변에는 국소적으로 ‘질서 같은 것’이 ‘무질서’를 상대적으로 제어할 것”이라고 말한다. 인간이 제어할 수 없는 거대한 힘이 ‘사악한 것’으로 작용해버린 것은 모두 인간의 잘못이다. 우리가 열린 마음으로 겸허하게 국소적인 ‘질서 같은 것’을 추구해나간다면 사악한 것은 얼마든지 성스러운 것이 될 수 있다. 문제를 해결책으로 바꾸는, 즉 카테고리를 변환시키는 지혜가 필요하다.
▣ 작가 소개
저 : 우치다 타츠루
1950년 일본 도쿄에서 태어났다. 도쿄대학 문학부 불문과를 졸업하고 도쿄도립대학 대학원 인문과학연구과 박사과정을 중퇴했다. 전문 분야는 주로 프랑스 현대 사상, 영화론, 교육론, 무도론(武道論) 등이다. 고베여학원대학 문학부 종합문화학과 교수직을 퇴직한 뒤 같은 대학 명예교수로 재직 중이다. 2011년 고베 시에 무도와 철학을 위한 배움터 ‘개풍관(凱風館)’을 열어, 문무를 함께 단련하고 있다. 문학, 철학, 정치, 문화, 교육 등 다양한 분야의 50여 권이 넘는 저서를 통해 비판적 지성을 보여 주고 있는 일본의 대표적인 사상가, 교육가, 문화 평론가이다.
『레비나스와 사랑의 현상학』은 저자 자신이 평생의 스승으로 삼은 레비나스의 난해한 철학을 레비나스의 논리 체계 안에서 수월하게 풀어내고 있다. 지은 책으로 『영화는 죽었다』(공저) 『현대 사상의 퍼포먼스』(공저) 『망설임의 윤리학』 『아저씨적인 사고』 『죽음과 신체』 『타자와 죽은 자』 등이 있으며, 에마뉘엘 레비나스의 『곤란한 자유』등을 일본어로 옮겼다. 2007년 『유대문화론』으로 고바야시 히데오 상을, 2010년 『일본변경론』으로 신서대상을 수상했다. 국내에 출간된 저서로는『하류지향』,『푸코, 바르트, 레비스트로스, 라캉 쉽게 읽기』,『청년이여, 마르크스를 읽자』,『일본변경론』,『절망의 시대를 건너는 법』(공저),『혼자 못 사는 것도 재주』,『하루키 씨를 조심하세요』등이 있다.
역 : 김경원
1964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서울대 국문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 대학원에서 문학박사학위를 받았다. 일본 홋카이도 대학에서 객원 연구원으로 지냈으며, 인하대학교 한국학연구소 전임연구원, 한양대 비교역사연구소 전임연구원을 역임하였다. 근대문학이나 인문학과 관련하여 한국어를 살펴보거나 소설 작품에 대해 자신만의 비평과 해석을 가하는 글쓰기에 시간을 할애하고 있다. 한국문학과 일본문학을 넘나드는 연구에 힘을 쏟는 한편, 『동서문학』 평론부문 신인상을 수상한 이후 여러 문예지에서 문학평론가로 활동하였다. 기획과 편집 등의 출판 관련 작업에도 줄곧 참여하고 있다.
저서로 『국어실력이 밥 먹여준다』(공저)가 있고, 일어 및 영어 번역가로 활동하고 있다. 역서로는 『토토의 눈물』, 『폴 오스터』, 『마르크스 그 가능성의 중심』, 『우리 안의 과거』, 『불황의 메커니즘』『확률의 경제학』『세계화의 원근법』, 『모래성』, 『가난뱅이의 역습』, 『르네상스 문학의 세 얼굴』,『가난뱅이 난장쇼』,『경계에 선 여인들』,『기다린다는 것』 등이 있다.
▣ 주요 목차
한국어판 저자 서문
머리말
1. 이야기를 향해-사악한 것의 코스몰로지
2. 사악한 것을 물리치는 법-저주와 축복
3. 제정신과 광기 사이-영적 감수성의 복권
4. 우선 손쉬운 일부터 시작하자-실천적 예언집
5. 애신애린-공생의 시대를 향해
맺음말
문고본 후기
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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