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 출판사서평
“매일 새벽, 우리는 죽음에서 깨어난다.”
“매일 아침은 우리의 삶에서 가장 놀라운 사건이다.”
새벽에 대한 의미에서 저자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그것이 매일 매일 새로 태어나는 경험이라는 것이다. 저자는 이를 단순한 비유로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몸의 신체적이고 생체적인 활동에 대한 과학적 정보, 그리고 인공적인 빛이 발견되기 이전까지 인류 역사상 밤과 어둠이 어떤 의미였는지에 대한 정보, 또 다양한 문화권이나 언어권에서 이런 새벽의 의미를 어떻게 의례화 혹은 언어화해왔는지 꼼꼼하게 알려준다. 인간의 선조들이 동이 트기를 기다리며 느꼈을 공포감, 그렇게 무력하고도 막막한 상태로 망상에 시달리며 여덟 시간 동안 누워서 끝없이 불러일으켰을 용기를 생생하게 공감하게 만든다.
새벽을 맞는 와중에도 익숙한 일상과 근심걱정이 몰려들며 자기 좀 보라고 떠들긴 하지만. 깨어나는 동안 우리는 몽롱한 상태와 명료(이 말에도 빛[明]이 들어 있다.)한 상태를 오간다. 아침마다 이 문턱을 넘으면서, 우리는 세상 사이를 넘나든다. 정신의 절반은 안을 향해 있고 나머지 절반은 점점 밖으로 하며 깨어난다.
새벽은 언제나 반갑다. 이 세상에 심리적으로나 물리적으로나 똑같은 새벽을 경험하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 적도 위에서는 새벽이 몇 분 만에 지나간다. 극지에서는 몇 시간 동안 느릿느릿 펼쳐지기도 한다. 새벽의 마지막 단계가 되어야 비로소 해가 떠오른다.
아침 일찍, 우리는 죽음을 떨치고 깨어났으며, 간밤의 습기와 혼란스러운 몽환은 떠오르는 햇빛 속에서 단단히 구워지리라는 믿음을 품고 일어난다. 영어에서 wake(깨어나다)라는 단어는 여러 가지 상황에 쓰인다. 잠에서 깨기, 죽은 사람 곁에서 밤을 새우기, 배가 지나간 뒤에 생긴 항적, 어떤 일의 여파 혹은 결과. 이 뜻들의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상상하기 힘든 오랜 옛날에 “얼음의 갈라진 틈”이라는 뜻으로 쓰인 고대 노르웨이어 vaka까지 간다. 얼음 틈에서 낚시와 사냥, 여행을 할 수 있고 배 수리에 쓸 부목을 구할 수도 있다. 또 자살을 할 수도 있고 기나긴 겨울의 감옥에서 탈출할 수도 있다.
스와힐리어에서 잘 자라고 하는 인사를 말 그대로 해석하면 “살아서 깨어나라”는 뜻이다. 음산한 유머다. 어떤 면에서 깨어나는 것은 작은 죽음을 이겨내는 것이다. 꽤 긴 삶의 과정에서 대략 열여섯 시간에 한 번씩 띄엄띄엄 찾아오는 3만 1025차례의 죽음 가운데 하나. 아이들이 무서운 꿈을 꾸고 두려워할 만도 하다. 특히 자기 전에 죽음이 코앞에 있다고 암시하는 기도를 드렸다면 더욱 그럴 것이다. “만약 깨어나기 전에 세상을 뜬다면 하느님이 내 영혼을 거둬주시길 빕니다.” 영어에서 나쁜 꿈을 nightmare라고 하는데, 고삐가 풀려 날뛰는 암말(mare)이나 달의 곰보자국 같은 분화구(mare)를 떠올리게 하는 말이니 그럴싸하다. 그렇지만 멋진 꿈, 달콤한 꿈, 평화로운 꿈을 가리키는 말은 따로 없다. 반투어에서는 행복한 꿈을 빌리타 음파시(bilita mpatshi)라고 부른다. 영어에는 인도네시아어의 케카우(Kekau)라고 하는 단어에 해당하는 말도 없는데, 끔찍한 악몽에서 깨어날 때의 느낌, 아직 약간 불안정하지만 다시 물 밖으로 나와 기뻐하는 느낌을 가리키는 말이다.
벌새들은 비행에 필요한 에너지를 얻기 위해 꽃들 사이를 초고속으로 돌아다니며 고열량 꿀을 먹는다. 조그만 심장을 1분에 500박이나 두근거리면서 맹렬한 속도로 삶을 불태우기 때문에 15분에 한 번씩은 먹어야만 한다. 그러다 보면 위험할 정도로 지쳐서, 하루가 저물 때면 신진대사가 늦춰져 숨은 얕아지고 심장박동도 느려진다. 추운 새벽에 경주용 엔진을 다시 가동하기는 얼마나 힘겨울까. 잠에서 깨어나는 것이 죽음과 싸우는 일이 된다. 그렇지만 대부분은, 내 창가에 찾아온 붉은 목도리를 두른 수컷처럼 무사히 깨어난다.
우리들 중에도 자면서 죽음을 맞는 사람이 많다. 그러면 하루가 열리는 대신 모든 날이 닫히는 것이다. 왜 새벽은 이토록 위험할까? 몸이 잠에서 깨어나도록 혈압이 올라가는데 아침에는 혈관의 탄력성이 낮다. 그래서 약한 혈관이 늘어나다가 터질 위험이 있다. 잠에서 깨어나며 우리는 잠과 의식 사이에서 외줄타기를 한다. 꿈의 구름을 헤치고 나와야 하고, 몸은 스트레스 호르몬인 코티졸이 급증하여 자극된 상태다. 한참 동안 멍한 상태로 있다가 온몸의 감각을 일으켜 다시 살아가려면 정말 엄청난 충격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코티졸과 다른 호르몬이 ‘새벽 현상’을 유발한다. 혈당 수치가 새벽4시에서 11시 사이에 상승하는데, 보통 사람들한테는 힘차게 하루를 시작하기에 도움이 되지만 당뇨병 환자들에게는 좋지 않은 현상이다.
티베트 사원에서는 새벽에 ‘죽음의 명상’ 수련을 한다. 잠에서 깨자마자 일어나서 다른 사람들과 같이 명상을 하거나 잡일을 하는 대신 눈을 감은 채로 잠자리에 누워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이다. 나는 오늘밤 죽을 것이다. 남은 하루에 나는 무엇을 해야 할까? 이런 명상을 평소에는 여유롭게 살다가 가끔 한 번씩만 하면 되는 게 아니라, 몇달, 몇 해 동안 꾸준히 규칙적으로 해야 한다. 왜냐하면 어느 날 실제로 일어날 수 있는 일이고 언젠가는 반드시 그러할 것이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사람과 꼭 끌어안을까? 우리 어머니 사진을 볼까? 거리를 걸어가며 살아서 움직이는 감동을 느낄까? 해뜰녘부터 해질녘까지 자연 세계의 아름다움을 느끼며 경탄할까? 시를 쓸까? 사랑하는 사람, 지구에 남아 있는 다른 사람들을 위해 좋은 일을 할까? 그러다 보면 남은 시간을 소중히 여기고 가장 중요한 것에 시간을 할애하게 된다. 깨어 있는 동안 이 활력소를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시간을 무얼 하며 보낼까? 이 질문이 고통스러울 정도로 뒤늦게 찾아오는 일이 많고, 죽음을 목전에 두었을 때에야 떠오르는 사람도 있다. 나 같은 사람에게는, 한동안은 꾸준히 찾아오더라도 물리칠 수 있다가(특히 한창 자녀를 키우고 있을 때는) 나중에는 도저히 미루기 힘들게 닥치기도 한다. 마음을 달래는 방법이 그럴 때는 달라진다. 나는 잠을 깊이 자지 못하고 꿈속에서 자주 깼다가 다시 죽음을 부인하는 잠 속으로 빠져들곤 한다.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배우자가 죽음에 다가가고 있고, 나보다 젊은 친구들을 먼저 보내고도 깊은 잠을 자기는 쉽지 않다. 나는 잠에서 깨어나고, 그럴 때면 세상의 아름다움이, 아무리 순간적인 것이라 할지라도, 내 혈관 깊숙이 흘러들어 가는 더할 나위 없는 기쁨으로 나를 가득 채운다. 그냥 몸을 열고 받아들이기만 하면 된다. 빛의 세상에 태어났으니 내 감각은 성숙하고 또 쇠락하리라. 그러나 쇠락하는 날까지는 감각들이 내가 사는 신비한 왕국, 차마 상상해보지 못
한 곳, 희망과 영광만으로 가득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아름다운 곳으로 가는 관문이 되어줄 것이다.
우리는 허깨비, 괴물, 기적, 혹은 하나의 온전한 테마파크로 존재하고, 결국은 다른 사람에게뿐 아니라 우리 자신에게도 대체로 알 수 없는 존재다. 나는 가끔 자기 모습을 거울을 통해 포착해보려 하면서 벌이는 숨바꼭질을 생각한다. 어느 날은 자기가 사람들에게 칭찬받는 존재인 것 같다가, 다른 날에는 죄다 사기인 듯하고, 한순간은 스치듯 지나가고, 다른 순간은 절절하게 삶의 대위법 푸가의 일부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단어는 손안에 놓인 조약돌 같아서, 성가시면서도 마음을 달래주는 염주 같으면서도 무언가를 떠올리게 해주는 것이다. 이 순간만의 바로 그러함을 대신할 것은 없다. 존재는 늘 선물, 저절로 주어졌고 포장을 뜯는 도중이고 탐구되기를 기다리는 선물이다.
그저 살아 나타나라. 그러기만 하면 된다. 내가 지금 바로 여기에 완전히 존재할 때, 그래서 좋건 나쁘건, 일이건 휴식이건 생각하지 않을 때 내가 하는 일이 바로 그것이다. 동이 터올 때 잠자던 사람은 깨어나서 하늘의 마법에 의해 침대 밖으로 끌려 나온다. 잘 보낸 시간.
우리는 모두 하나이자 여럿인 존재
풍요로운 삶, 잘 보낸 시간을 위한 생물학적 전제
새벽의 의미(하루의 의미, 삶의 의미)를 최대한으로 만끽하기 위해 시작한 사색은 늘 자연 속에서 자연의 변화와 움직임을 느끼는 활동으로 이어진다. ‘자연결핍장애’를 앓고 있는 대다수 현대인들에게는 독특하게 생각되는 지점이지만 저자에게는 너무나 당연한(자연스러운) 연결이다. 이러한 공감이야말로 삶을 지속하고 매일 새벽 깨어나기 위해 인류가 지녀야 할 최소한의 생존전략이기 때문이다. 내가 무수한 작은 세포들로 이루어진 큰 덩어리라는 인식과, 동시에 내가 해바라기 꽃 안의 수많은 작은 꽃들처럼, 옆 비둘기의 움직임을 거의 미리 알고 따라 움직일 수 있는 비둘기처럼 거대한 한 덩어리의 일부라는 인식은 우리 삶을 처음부터 끝까지 이끌어가는 데 가장 기본적이고 근본적인 전제이다.
맑은 날이면 나는 끝없는 파란 하늘을 올려다보며 마음의 눈으로 하늘이 끝나고 우주가 시작되는 곳을 더듬더듬 찾는다. 그러고는 조용히, 변함없는 경외감을 느끼며, 마치 처음으로 이런 생각이 떠오르기라도 한 것처럼 말한다. 우리는 행성에 살고, 행성은 우주 안에, 무수히 많은 다른 행성과 항성에 둘러싸여 있지. 그리고 이 행성에서 수십억 년 전에 우연히 생명체가 탄생했고. 그러고 나서 온갖 생명체의 행렬을 그려본다. 애벌레같이 생긴 박테리아와 청록색 바닷말 덩어리에서부터 희한한 포유류를 거쳐 사람까지. 양복과 구두를 신고, 철갑을 몰고 다니고, 전자 귀에 대고 말을 하고, 같이 저녁을 먹고, 예술품을 만들어내고, 사랑을 갈구하고, 대궐 같은 오두막에 사는 사람들.
새벽녘에 자연 속에 있으면 늘 마음이 편해진다. 사실 이 말은 좀 줄여서 한 말일 수밖에 없다. 개념이 뒤죽박죽 엉켰기 때문이다. 나는 정말 자연 속에 있으면 편안하다. 그렇지만 우리가 자연인데 어떻게 자연 속에 있을 수가 있나? 우리 존재, 체액, 살, 영혼 모두 자연의 일부다. 자연은 우리를 둘러싸고 우리에게 스며들고 우리에게서 흘러넘치고 우리를 포함한다. 우리 삶이 끝나면 자연은 우리가 지하실에 처박아놓은 낡은 장난감이나 되는 것처럼 우리를 흩뜨리고 분해한다. 한때 살아 있던 존재가 생명 없는 원소로 돌아가지만 그래도 영원히 자연의 일부로 남는다.
이렇게 삶은 계속된다. 각 세대는 다른 우주에서, 별개의 시간과 공간, 역사, 관습, 공기의 질, 유행, 지방색의 교차점에서 태어난다. 우리 피부 세포가 2주마다 한 번씩 벗어져 교체되듯이, 우리가 사는 지구도 끝없이 새로운 새[鳥]로, 새로운 사람으로 채워진다. 어린 자손들이 자라나 영향을 미칠 세계는 예측할 수도 헤아릴 수도 없는 우연과 정황의 독특한 조합으로 만들어진다. 부모들도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어떻게 자식들이 대비하게 만들 수 있겠는가. 우리는 모두 저마다의 시간 속에서 살다가 만난다. 미끄러지다가 이따금 부딪히는 유리판처럼. 우리가 이만큼 사이좋게 지내는 것도 정말 놀라운 일이다. 공감 덕분에 가능한 일이고, 사랑이야말로 이를 가치 있게 만든다.
정원은 무척 친밀하고 개인적인 데가 있다. 무언가를 소중히 여겨 관심을 기울이면, 특징이나 병증이 눈에 들어오고 각 식물이 같은 종에 속하는 다른 개체와 닮았으면서도 어떤 면에서 다르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아마 그래서 정원이 그토록 강력한 은유로 사용되는 것이리라. 자연의 근본 힘을 구현하고, 개체와 집단, 하나이자 다수를 모두 포함하고, 삶의 여러 면들, 복잡다단한 관계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꽃에서는 향기가 뿜어 나와 벌나비를 끌어들이고, 꽃은 벌나비가 씁쓸한 맛을 띠게 해서 포식자를 피할 수 있게 하여 더오래 살 수 있게 해주고, 대신 벌나비는 더 멀리 여행해서 꽃가루를 퍼뜨릴 수 있다. 나는 나무에 물을 주고, 나무뿌리는 토양에서 수은을 흡수하고 잎사귀는 공기에서 이산화탄소를 흡수하고 생명을 주는 산소를 내놓는다. 또 이로운 곤충들도 우리집 마당으로 불러 온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우리는 식물과 동물의 오래된 교환, 재화와 용역의 교환관계 안에 있다.
대신 풀밭에 앉아 박각시나방이나 서양톱풀을 구경하고, 조용히 돌아다니면서 자연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보고, 생각들이 솟아나오게 한다. 그러려면 데이터에서 자유로운 시간, 그러니까 시계, 이메일, 휴대전화, 컴퓨터, 신문, 텔레비전, 라디오처럼 우리를 서로 연결하면서 닫아버리는 정보 전달자들에게서 벗어나 있는 시간이 필요하다. 머릿속에는 정말 짐이 많다. 일부를 잠깐 동안이라도 내려놓고 자연의 경이 속에서 뒹굴다 보면 어릴 적에도 그랬지만 지금도 참 많은 것을 얻는다. 그래서 나는 붓꽃 꽃술의 생
김새나 촉감에 홀딱 빠지거나 새들이 오가는 모습을 구경하거나 가을에 떠가는 나뭇잎들의 찰나의 모습을 보며 기억 속의 장면에 새로운 장면을 덧씌운다.
나무, 가로등, 귀에 꼬리표를 단 암사슴, 집, 짝짓기를 하러 내려온 벌레들……. 얼마나 이상한가, 이 야단법석의 일부라는 게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생명을 탄생시킨 이 조그만 행성에서. 나는 하루에 열 번이라도 하던 말이나 하던 일을 멈추고 설명할 수 없는 드라마가 펼쳐지는 인간들의 세계라는 장려한 광경을 바라보고 싶어진다. 한 걸음 물러서서, 생명이 어떻게 진화했는지, 어떤 형태와 전략을 따랐는지 감탄하고, 어떻게 사람들이 정신을 흩뜨리는 온갖 것들과 일상의 곤궁 속에서도 자발적으로 삶에 몰두하며 삶의 끝까지 달려가는지 깨닫고 경탄한다.
생명은 익명이고 대체 가능하며 바글거리는 것이다. 어떤 종교에서는 자아에서 벗어나라, 살면서 죽음을 경험하는 것이 정체성의 번민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래도 나는 두렵다. 사람은 누구나 이런 급작스런 쇠락을 받아들이기에는 너무 젊고 준비되지 않았고 너무 위엄 있는 존재다. 이 꿈속에서는 해가 지평선을 금빛으로 아롱지게 하고 밤과 낮은 상실의 영역에서 만나고 정적이 뒤덮는다. 두툼한 흰 담요가 저 아래 깔리고 층운이 아침의 문을 연다. 곧 빙하 위의 정오처럼, 온 세상이 하얗고 황량한 화이트아웃 상태에 빠질 것이다. 마침내, 긴 잿빛 혼수상태 같은 구름을 뚫고 우리는 내려온다.
나는 원자가 된 어머니를 다시 일깨우고 밤나무를 백금빛으로 물들이는 새벽 속에서 어머니를 느낀다. 우리가 더 친밀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더라면, 내가 어머니의 꿈과 슬픔을 더 잘 알았더라면, 어머니를 더 잘 이해했다면, 어머니가 내가 당신을 이해한다고 느끼셨더라면 하고 생각한다. 놓쳐버린 가능성을 두고 안타까워해봐야 소용없다. 진정한 평화는 자기 운명을 그냥 받아들이는 정도가 아니라 사랑할 때 온다고 한다. 삶은 그냥 삶일 뿐이고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따라 행복을 느낄 수도 불만을 느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운명을 바로잡으려 하지 않고 사랑하고, 우주가 달라지기를 요구하지 않는다.’ 말이 쉽지 진정 그렇게 느끼기란 쉽지 않고 단지 그럴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부피로는 물론 공기 중의 물이 바다와 비교도 되지 않게 많지만 호수와 강, 샘, 우물, 60억 인간을 포함한 무수히 많은 생명체에는 녹은 눈과 비가 물을 채운다. ‘사람이 걷는다.’고 말하고 그렇게 생각하긴 하지만 사실 사람은 흐른다고 할 수 있다. 수준기(水準器)처럼 우리가 누우면 우리의 물도 평평해지겠지만 그래도 물은 계속 움직이고 미끄러지고 흐르고 새로워진다. 움직이지 않는 사람이라도 몸 안의 수로와 배편들 덕에 여행을 한다. 물을 마시고 먹고 배출하고 생각하는 몸의 조직은 습지이자 강어귀이고, 기관들은 섬이고, 혈류는 실개천과 여러 수원이 있는 긴 강이다. 움직이며 화학물질을 튀기고 여러 구멍을 통해 물을 배출하지만 우리 피, 피부, 땀, 눈물 안에는 늘 짠 바다가 있다. 생리주기는 조수를 닮았다. 관절에 기름칠을 하고 음식을 소화하고 우리 치아에 반짝이는 법랑질을 덮는 데도 물이 필요하다. 우리는 물이 이루어내는 생명을 반영해 보여준다.
아이들은 언제나 실내와 실외로 이루어진 마음의 풍경 안에서 논다. 그래서 때로 실내에서 놀면서 집밖을 상상하기도 한다. 우리는 타고나는 꿈꾸는 성향 때문에, 어쩌면 삶의 마지막 숨을 내쉴 때까지, 놀면서 우리를 가다듬는 덕에 또 다른 괴물, 또 다른 고초를 이겨나갈 수 있다. 우리는 배우고, 사랑하고, 자라고, 살아남기 위해, 재미있거나 반드시 필요하지 않다고 하더라도 놀아야 한다. 이는 다행히도 가장 엄밀하고 세세하게 따져보아도 재미있고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아주 오랜 세월 동안 아이들은 자연에서 놀았다. 들에는 실내가 없고, 실내(움막, 동굴)는 비좁았기 때문이다. 더욱 중요한 까닭은 자연과 자기 자신이 구분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자기가 아닌 무언가 다른 것, 다른 사람인 척하면서 놀았다. 양 가죽 옷을 입고, 절반은 양, 아니 매 하는 울음소리로 가득한 네발짐승 자체가 되었다. 무생물인 척하는 놀이도 했을 것이다. 산이나 물, 달이나 나무.
여러 가지 이유로, 특히 안전과 마케팅 따위의 이유로 요즘 아이들은 집 안에서 혼자 전자제품을 가지고 노는 일이 점점 많아진다. 장난감 가게에서는 조그만 ATM 기계 장난감까지 판다. 오즈의 나라 어린 시절을 그냥 건너뛰어 썩지도 않고 무릎이 까질 일도 없는 놀잇감들의 경주 속에 휘말린 게 아닐까 싶다. 이런 장난감들이 손ㆍ눈 협응력을 기른다고들 하지만, 순간적으로 집중하게 할지는 몰라도 중요한 순간에 차분하고 끈기 있게 삶에 관심을 기울이는 소중한 능력을 기르는 데는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 “자연결핍장애”라는 말을 만들어낸 『자연에서 멀어진 아이들(Last Child in the Woods)』의 저자 리처드 루브(Richard Louv)에게 샌디에이고에 사는 4학년 아이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실내에서 노는 게 더 좋아요. 전기코드 꽂는 데가 있으니까요.”
미국 전역에서 새벽이 시작되면 해바라기들이 동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해를 향해 절을 한다. 꽃줄기의 그늘 쪽이 햇빛을 받는 쪽보다 빨리 자라기 때문에 꽃 얼굴들이 빛 쪽을 향하게 된다. 해바라기는 흔들리지 않는 믿음으로 종일 해를 쫓으며 동쪽에서 서쪽으로 돌아간다. 꽃봉오리 아래쪽 목 부분이 유연해서 머리가 돌아갈 수 있다. 꽃이 활짝 피어 밝은 노란색으로 초원을 뒤덮은 다음에는 목이 단단하게 굳어져 더 이상 돌아가지 않고 변함없는 충절로 굳는다. 동쪽을 향한 상태로 멈출 때가 많다. 그냥 ‘꽃’이라고 하지 않고 ‘얼굴들’이라고 한 까닭은, 해바라기는 한 송이가 아니라 작은 통꽃들이 모여 있는 무리이기 때문이다. 바깥쪽 꽃잎 부분은 모두 중성이고 안쪽 ‘해바라기 씨’ 부분은 가능성으로 가득한 개체들이 모여 있는 것이다. 군집의 지혜는 자연의 모든 단계에서 번성한다. 우리 사회와 몸도 마찬가지다. 행성들은 서로를, 그리고 태양과 서로 끌어당기고, 태양은 은하의 다른 별들과 서로 끌어당기면서 모양과 갈 길을 만들어 나간다. 모든 사물은 특성들의 집합체이자 우리가 느끼는 감각들의 총체다. 우리는 온몸으로 사물을 만난다. 사물 가운데에는 몸도 포함되고. 우리 세포 하나하나가 결합해 의식, 기관, 사지를 이루고 날마다 새벽이면 각각 힘을 모아 자아감을 다시 일깨운다. 우리 뉴런 하나하나, 피부 조직 하나하나가 단세포 조상을 닮았다. 우리 세포들은 가족이라기보다는 군집에 가깝고, 때로는 사이좋은 동지들, 잘 모르는 벗들, 비밀스러운 공모자들이다. 우리는 사실 여러 과업들의 복합체다. 숨쉬기, 먹기, 유지 보수, 이동, 계획, 성숙 등. 몸마다 수백만 개의 조그만 공장이 함께 돌아가며 합쳐져 자아를 이루고, ‘나’를 이룬다. 스스로를 총체적인 존재로 느끼거나 때로는 독특한 존재로 때로는 혼자인 것처럼 느끼기도 하는 자아가 된다. 하나의 생명이 생겨난다. 그렇지만 ‘나’라고 하는 것은 사실상 ‘우리’, 복수의 존재다. 우리는 타협하고 협력하고 때로는 스스로와 싸움을 벌인다. 다른 동물들도 대부분 마찬가지다.
물론, 다른 사람의 주관적 경험에 완전히 스스로를 투사할 수도 없는데, 다른 감각과 본능을 지닌 다른 종에 그렇게 하기란 말할 것도 없이 어렵다. 다른 종의 하루는, 구름을 뚫고 비추는 어스름 햇빛 말고 다른 데서 시작할 수도 있는 것이다. 도마뱀처럼 땅에 달라붙어서, 혹은 땅 아래에서 시작될 수도 있다. 그렇지만 자기 자신을 잠시 잊고 자연과 뒤섞이는 순간의 황홀함은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다 보면 내 몸 안의 세포가 전에는 다른 곳에 쓰였을 수도 있고, 갑오징어나 점균류였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어쩐지 겸허해지는 생각이다. 우리는 인간의 주관적 실재가 다른 생물류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한다. 그렇지 않다면 다른 생명체, 가장 하등한 생명체와도 유대감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지능이 있고, 개성도 있고, 학습 능력도 있고, (뇌는 없지만) 의식은 없어도 재주가 있는 점균류를 한 번 생각해보라. 그것들은 저마다 반은 식물 반은 동물이고 채워지지 않는 굶주림을 지닌 단세포 군집을 형성한다. 단일 연대처럼 자족적이지만, 그러다가 문득 설명할 수도 떨쳐버릴 수도 없는 강렬한 열망을 느낀다. 그럴 때면 땅을 기어 다른 점균류가 야영하는 곳으로 간다. 장벽을 모두 내리고, 내 정체성을 버리고, 그것에 내 작은 사회를 더해서, 하나의 굶주림, 뇌라고 할 것은 없지만 영리하고 잔꾀 많고, 숭고할 정도로 일시적인 초유기체(superorganism)가 될 것이다. 위풍당당한 하나의 세포 덩어리라는 존재로.
감각적이고 신체적인 공부의 새로운 계보
저자가 이 책에서 호출하는 사색가들, 예술가들, 기록자들, 인문주의자들은 언뜻 보면 전혀 공통점이 없다. 그러나 저자의 호명을 통해 이들은 세상에서 가장 신체적인 지식, 감각적인 인문주의 계보를 만든다. 태양신을 온갖 방법으로 숭배해 새벽빛을 받게 설계된 알렉산드리아도서관을 만든 프톨레마이오스 2세부터, 농부 출신으로 최초의 눈 결정 사진을 생각해내고 사진집을 만들어냈지만, 눈 결정 사진을 찍기 위해 심한 눈보라를 헤치고 집으로 돌아오다 폐렴에 걸려 사망한 ‘눈송이 사나이’ 윌슨 A 벤틀리, 이동 가능한 틀로 된 벌집을 발명해 양봉 생산량을 획기적으로 늘리고, 극심한 신경증으로 고통받으면서도 매일 매일 벌과 벌집에 대한 기록을 멈추지 않아 [벌집과 꿀벌]이라는 고전을 남긴, 미국 양봉의 아버지 L. L. 랭스트로스, 새벽의 매 순간 변하는 이미지를 포착하려 했던 모네, [미쿠라노소시(베갯머리 서책)]라는 고전을 남긴 새벽의 기록자 쇼나곤, “일흔 살 이전에 그린 작품 가운데 정말 중요한 것은 하나도 없다. 일흔 두 살이 되자 비로소 새, 짐승, 곤충, 물고기의 진짜 특성, 풀과 나무의 중요한 본질을 조금 이해하기 시작했다. 그러니 여든 살이 되어야 조금 발전할 것이고 아흔 살이 되면 사물의 깊은 의미를 더욱 깊이 통찰할 테고 100살이 되면 정말 위대해질 것이고 백열 살이 되면 점 하나, 선 하나가 독자적인 생명력을 갖게 될 것이다.”라고 말했던 화가 호쿠사이 등등.
이들의 관찰과 기록과 사색과 공부는 마치 함께 날아갈 때 평소의 반응속도보다 더 빠르게 한몸인 듯이 방향을 전환할 수 있는 비둘기 무리들의 창발성처럼, 새벽 공기를 가르고 고향으로 날아가기 위해 자기 몸에 난 모든 털 하나하나를 다 느낄 수 있는 두루미들의 지식처럼, 안다는 것이 얼마나 정신적인 동시에 육체적인 일인지, 사고와 감각과 정서가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 지극히 명료하고 아름답게 보여주는 책이다.
뇌가 한번 무언가를 알아차리면 다음에는 더 빨리 인식할 수 있도록 머리가 익어 얼른 알아볼 수 있고, 이런 일이 되풀이되면 자세히 들여다볼 필요도 없게 된다. 어떤 곳에 방문한 사람들 눈에는 거기에 사는 사람들이 놓치는 것들이 들어온다. 특히 휴가 중이라 오로지 보고 세세히 살피고 기억하는 것만을 염두에 둔 사람들 눈에는 더욱 그렇다. 아기들, 초보자들, 새로 온 사람들, 화가들, 신비주의자들의 공통점이 이거다. 신선한 시각. 그래서 화가들은 스스로를 아웃사이더처럼 느낄 때가 많을 것이다. 어떤 면에서 보나 화가들은 영원한 여행객이다. 우리의 지각은 늘 레이다망을 피해 다니다가 모네 같은 화가가 우리를 툭 치며 외칠 때에야 깨어난다. 잘 좀 봐! 모든 순간의 속절없는 아름다움을 보여줄게. 이게 물결이야. 이게 비야.
모네가 기록한 것처럼 바로 지금만큼 생생한 시간은 없다. 지금 현재의 진실만은 영원하다. 우리의 시간 감각은 자라면서 변한다. 어릴 때는 하루가 긴 것 같더니 늙으면 한 해 한 해가 순식간에 지나간다. 우리는 다른 시간대를 지난다. 아이들은 어른보다 더 많은 정보를 더 빨리 받아들인다. 모든 게 새로운 데다 대부분 순간적으로 지나가 버리기 때문에 처리해야 할 양이 많다. 그래서 시간이 천천히 흐르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노인들은 느린 신진대사를 통해 세상을 감각하고 놀랄 일도 거의 없기 때문에 삶이 물 흐르듯 스쳐 지나가는 것만 같다. 충격 등을 주어 신진대사를 빠르게 하면 아드레날린이 쏟아져 나와 비상 상태에 대처한다. 그러면 뇌가 정보를 빠른 속도로 처리한다. 세부 사항 하나하나가 중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럴 때는 시간이 느려진다. 이는 포식자와 피식자의 세계이기도 하다. 동물들이 저마다 다른 시간대에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 이상하게 여겨지지만 나는 아마 그러하리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무엇에 주의를 기울이느냐, 바로 이것이 우리를 정의한다.
▣ 작가 소개
저자 : 다이앤 애커먼(Diane Ackerman)
교육자이자 시인이며 수필가인 다이앤 애커먼은 펜실베이니아 주립대학을 졸업 후 코넬 대학에서 MFA(미술 전문 석사 학위), 영문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존 버로즈 자연문학상과 라반 문학상 등 많은 상을 수상하였으며 《뉴요커》의 필진이기도 하다. 국립예술기금, 록펠러재단 기금, 국립인문학기금을 받았으며 뉴욕 대학, 리치먼드 대학, 컬럼비아 대학, 코넬 대학에서 영문학과 인문사회학을 가르쳤다. 지은 책으로 『천 개의 사랑』, 『감각의 박물학』, 『미친 별 아래의 집』, 『뇌의 문화지도』, 『나는 작은 우주를 가꾼다』, 『내가 만난 희귀동물』 등이 있다.
역자 : 홍한별
연세대학교 영어영문학과와 같은 학교 대학원을 졸업한 뒤, 번역가로 활동하고 있다. 『민주주의는 가능한가』, 『가르친다는 것』, 『타블로이드 전쟁』, 『권력과 테러』, 『자라지 않는 아이』, 『위대한 생존』, 『오카방고의 숲속 학교』, 『나는 그림으로 생각한다』, 『페이퍼 엘레지』 등 다양한 문학 작품과 인문, 사회과학 도서들을 우리말로 옮겼다. 지은 책으로는 『다시 동화를 읽는다면』(공저)가 있다.
▣ 주요 목차
프롤로그: 떠오르는 기쁨
새벽 어머니
봄
비둘기 무리의 창발성
비 한 자락
두루미의 위기
잃어버린 밤하늘
떨어지는 아기 새
은유가 필요한 이유
금성을 관찰하다
모네의 마음속
새벽의 갠지스
새가 내는 모든 소리
친구의 죽음
붉은색과 푸른색
시간의 굴레
여름
가장 위험한 시간
세이 쇼나곤의 마음속
정원에서 우주적 생각에 잠기다
다리가 둘 혹은 넷인 이웃과 함께하는 아침기도
하지와 동지의 새
호쿠사이의 마음속
마음을 흔드는 연꽃
달팽이와 거미의 매력
한 해 중 최고의 때
딱따구리
구름에 열광하는 사람들
가을
벌들의 붕붕거림
벌집 만들기
아르키메데스를 바라보는 시각
프톨레마이오스 2세와 알렉산드리아 도서관
우리는 모두 하나이자 여럿인 존재
황도광
어머니 생각
동물생약학
찌르레기의 영리함과 현명함
부엉이가 된다면
겨울
파란 계절
사방에 물
결정
못된 수탉 한 마리가 농장을 망친다
일과를 마치고
그곳에 없으며 그곳에 있는 침묵
잘 보낸 시간
옮긴이 후기: 세상에서 가장 낭만적인 지식
“매일 새벽, 우리는 죽음에서 깨어난다.”
“매일 아침은 우리의 삶에서 가장 놀라운 사건이다.”
새벽에 대한 의미에서 저자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그것이 매일 매일 새로 태어나는 경험이라는 것이다. 저자는 이를 단순한 비유로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몸의 신체적이고 생체적인 활동에 대한 과학적 정보, 그리고 인공적인 빛이 발견되기 이전까지 인류 역사상 밤과 어둠이 어떤 의미였는지에 대한 정보, 또 다양한 문화권이나 언어권에서 이런 새벽의 의미를 어떻게 의례화 혹은 언어화해왔는지 꼼꼼하게 알려준다. 인간의 선조들이 동이 트기를 기다리며 느꼈을 공포감, 그렇게 무력하고도 막막한 상태로 망상에 시달리며 여덟 시간 동안 누워서 끝없이 불러일으켰을 용기를 생생하게 공감하게 만든다.
새벽을 맞는 와중에도 익숙한 일상과 근심걱정이 몰려들며 자기 좀 보라고 떠들긴 하지만. 깨어나는 동안 우리는 몽롱한 상태와 명료(이 말에도 빛[明]이 들어 있다.)한 상태를 오간다. 아침마다 이 문턱을 넘으면서, 우리는 세상 사이를 넘나든다. 정신의 절반은 안을 향해 있고 나머지 절반은 점점 밖으로 하며 깨어난다.
새벽은 언제나 반갑다. 이 세상에 심리적으로나 물리적으로나 똑같은 새벽을 경험하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 적도 위에서는 새벽이 몇 분 만에 지나간다. 극지에서는 몇 시간 동안 느릿느릿 펼쳐지기도 한다. 새벽의 마지막 단계가 되어야 비로소 해가 떠오른다.
아침 일찍, 우리는 죽음을 떨치고 깨어났으며, 간밤의 습기와 혼란스러운 몽환은 떠오르는 햇빛 속에서 단단히 구워지리라는 믿음을 품고 일어난다. 영어에서 wake(깨어나다)라는 단어는 여러 가지 상황에 쓰인다. 잠에서 깨기, 죽은 사람 곁에서 밤을 새우기, 배가 지나간 뒤에 생긴 항적, 어떤 일의 여파 혹은 결과. 이 뜻들의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상상하기 힘든 오랜 옛날에 “얼음의 갈라진 틈”이라는 뜻으로 쓰인 고대 노르웨이어 vaka까지 간다. 얼음 틈에서 낚시와 사냥, 여행을 할 수 있고 배 수리에 쓸 부목을 구할 수도 있다. 또 자살을 할 수도 있고 기나긴 겨울의 감옥에서 탈출할 수도 있다.
스와힐리어에서 잘 자라고 하는 인사를 말 그대로 해석하면 “살아서 깨어나라”는 뜻이다. 음산한 유머다. 어떤 면에서 깨어나는 것은 작은 죽음을 이겨내는 것이다. 꽤 긴 삶의 과정에서 대략 열여섯 시간에 한 번씩 띄엄띄엄 찾아오는 3만 1025차례의 죽음 가운데 하나. 아이들이 무서운 꿈을 꾸고 두려워할 만도 하다. 특히 자기 전에 죽음이 코앞에 있다고 암시하는 기도를 드렸다면 더욱 그럴 것이다. “만약 깨어나기 전에 세상을 뜬다면 하느님이 내 영혼을 거둬주시길 빕니다.” 영어에서 나쁜 꿈을 nightmare라고 하는데, 고삐가 풀려 날뛰는 암말(mare)이나 달의 곰보자국 같은 분화구(mare)를 떠올리게 하는 말이니 그럴싸하다. 그렇지만 멋진 꿈, 달콤한 꿈, 평화로운 꿈을 가리키는 말은 따로 없다. 반투어에서는 행복한 꿈을 빌리타 음파시(bilita mpatshi)라고 부른다. 영어에는 인도네시아어의 케카우(Kekau)라고 하는 단어에 해당하는 말도 없는데, 끔찍한 악몽에서 깨어날 때의 느낌, 아직 약간 불안정하지만 다시 물 밖으로 나와 기뻐하는 느낌을 가리키는 말이다.
벌새들은 비행에 필요한 에너지를 얻기 위해 꽃들 사이를 초고속으로 돌아다니며 고열량 꿀을 먹는다. 조그만 심장을 1분에 500박이나 두근거리면서 맹렬한 속도로 삶을 불태우기 때문에 15분에 한 번씩은 먹어야만 한다. 그러다 보면 위험할 정도로 지쳐서, 하루가 저물 때면 신진대사가 늦춰져 숨은 얕아지고 심장박동도 느려진다. 추운 새벽에 경주용 엔진을 다시 가동하기는 얼마나 힘겨울까. 잠에서 깨어나는 것이 죽음과 싸우는 일이 된다. 그렇지만 대부분은, 내 창가에 찾아온 붉은 목도리를 두른 수컷처럼 무사히 깨어난다.
우리들 중에도 자면서 죽음을 맞는 사람이 많다. 그러면 하루가 열리는 대신 모든 날이 닫히는 것이다. 왜 새벽은 이토록 위험할까? 몸이 잠에서 깨어나도록 혈압이 올라가는데 아침에는 혈관의 탄력성이 낮다. 그래서 약한 혈관이 늘어나다가 터질 위험이 있다. 잠에서 깨어나며 우리는 잠과 의식 사이에서 외줄타기를 한다. 꿈의 구름을 헤치고 나와야 하고, 몸은 스트레스 호르몬인 코티졸이 급증하여 자극된 상태다. 한참 동안 멍한 상태로 있다가 온몸의 감각을 일으켜 다시 살아가려면 정말 엄청난 충격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코티졸과 다른 호르몬이 ‘새벽 현상’을 유발한다. 혈당 수치가 새벽4시에서 11시 사이에 상승하는데, 보통 사람들한테는 힘차게 하루를 시작하기에 도움이 되지만 당뇨병 환자들에게는 좋지 않은 현상이다.
티베트 사원에서는 새벽에 ‘죽음의 명상’ 수련을 한다. 잠에서 깨자마자 일어나서 다른 사람들과 같이 명상을 하거나 잡일을 하는 대신 눈을 감은 채로 잠자리에 누워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이다. 나는 오늘밤 죽을 것이다. 남은 하루에 나는 무엇을 해야 할까? 이런 명상을 평소에는 여유롭게 살다가 가끔 한 번씩만 하면 되는 게 아니라, 몇달, 몇 해 동안 꾸준히 규칙적으로 해야 한다. 왜냐하면 어느 날 실제로 일어날 수 있는 일이고 언젠가는 반드시 그러할 것이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사람과 꼭 끌어안을까? 우리 어머니 사진을 볼까? 거리를 걸어가며 살아서 움직이는 감동을 느낄까? 해뜰녘부터 해질녘까지 자연 세계의 아름다움을 느끼며 경탄할까? 시를 쓸까? 사랑하는 사람, 지구에 남아 있는 다른 사람들을 위해 좋은 일을 할까? 그러다 보면 남은 시간을 소중히 여기고 가장 중요한 것에 시간을 할애하게 된다. 깨어 있는 동안 이 활력소를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시간을 무얼 하며 보낼까? 이 질문이 고통스러울 정도로 뒤늦게 찾아오는 일이 많고, 죽음을 목전에 두었을 때에야 떠오르는 사람도 있다. 나 같은 사람에게는, 한동안은 꾸준히 찾아오더라도 물리칠 수 있다가(특히 한창 자녀를 키우고 있을 때는) 나중에는 도저히 미루기 힘들게 닥치기도 한다. 마음을 달래는 방법이 그럴 때는 달라진다. 나는 잠을 깊이 자지 못하고 꿈속에서 자주 깼다가 다시 죽음을 부인하는 잠 속으로 빠져들곤 한다.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배우자가 죽음에 다가가고 있고, 나보다 젊은 친구들을 먼저 보내고도 깊은 잠을 자기는 쉽지 않다. 나는 잠에서 깨어나고, 그럴 때면 세상의 아름다움이, 아무리 순간적인 것이라 할지라도, 내 혈관 깊숙이 흘러들어 가는 더할 나위 없는 기쁨으로 나를 가득 채운다. 그냥 몸을 열고 받아들이기만 하면 된다. 빛의 세상에 태어났으니 내 감각은 성숙하고 또 쇠락하리라. 그러나 쇠락하는 날까지는 감각들이 내가 사는 신비한 왕국, 차마 상상해보지 못
한 곳, 희망과 영광만으로 가득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아름다운 곳으로 가는 관문이 되어줄 것이다.
우리는 허깨비, 괴물, 기적, 혹은 하나의 온전한 테마파크로 존재하고, 결국은 다른 사람에게뿐 아니라 우리 자신에게도 대체로 알 수 없는 존재다. 나는 가끔 자기 모습을 거울을 통해 포착해보려 하면서 벌이는 숨바꼭질을 생각한다. 어느 날은 자기가 사람들에게 칭찬받는 존재인 것 같다가, 다른 날에는 죄다 사기인 듯하고, 한순간은 스치듯 지나가고, 다른 순간은 절절하게 삶의 대위법 푸가의 일부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단어는 손안에 놓인 조약돌 같아서, 성가시면서도 마음을 달래주는 염주 같으면서도 무언가를 떠올리게 해주는 것이다. 이 순간만의 바로 그러함을 대신할 것은 없다. 존재는 늘 선물, 저절로 주어졌고 포장을 뜯는 도중이고 탐구되기를 기다리는 선물이다.
그저 살아 나타나라. 그러기만 하면 된다. 내가 지금 바로 여기에 완전히 존재할 때, 그래서 좋건 나쁘건, 일이건 휴식이건 생각하지 않을 때 내가 하는 일이 바로 그것이다. 동이 터올 때 잠자던 사람은 깨어나서 하늘의 마법에 의해 침대 밖으로 끌려 나온다. 잘 보낸 시간.
우리는 모두 하나이자 여럿인 존재
풍요로운 삶, 잘 보낸 시간을 위한 생물학적 전제
새벽의 의미(하루의 의미, 삶의 의미)를 최대한으로 만끽하기 위해 시작한 사색은 늘 자연 속에서 자연의 변화와 움직임을 느끼는 활동으로 이어진다. ‘자연결핍장애’를 앓고 있는 대다수 현대인들에게는 독특하게 생각되는 지점이지만 저자에게는 너무나 당연한(자연스러운) 연결이다. 이러한 공감이야말로 삶을 지속하고 매일 새벽 깨어나기 위해 인류가 지녀야 할 최소한의 생존전략이기 때문이다. 내가 무수한 작은 세포들로 이루어진 큰 덩어리라는 인식과, 동시에 내가 해바라기 꽃 안의 수많은 작은 꽃들처럼, 옆 비둘기의 움직임을 거의 미리 알고 따라 움직일 수 있는 비둘기처럼 거대한 한 덩어리의 일부라는 인식은 우리 삶을 처음부터 끝까지 이끌어가는 데 가장 기본적이고 근본적인 전제이다.
맑은 날이면 나는 끝없는 파란 하늘을 올려다보며 마음의 눈으로 하늘이 끝나고 우주가 시작되는 곳을 더듬더듬 찾는다. 그러고는 조용히, 변함없는 경외감을 느끼며, 마치 처음으로 이런 생각이 떠오르기라도 한 것처럼 말한다. 우리는 행성에 살고, 행성은 우주 안에, 무수히 많은 다른 행성과 항성에 둘러싸여 있지. 그리고 이 행성에서 수십억 년 전에 우연히 생명체가 탄생했고. 그러고 나서 온갖 생명체의 행렬을 그려본다. 애벌레같이 생긴 박테리아와 청록색 바닷말 덩어리에서부터 희한한 포유류를 거쳐 사람까지. 양복과 구두를 신고, 철갑을 몰고 다니고, 전자 귀에 대고 말을 하고, 같이 저녁을 먹고, 예술품을 만들어내고, 사랑을 갈구하고, 대궐 같은 오두막에 사는 사람들.
새벽녘에 자연 속에 있으면 늘 마음이 편해진다. 사실 이 말은 좀 줄여서 한 말일 수밖에 없다. 개념이 뒤죽박죽 엉켰기 때문이다. 나는 정말 자연 속에 있으면 편안하다. 그렇지만 우리가 자연인데 어떻게 자연 속에 있을 수가 있나? 우리 존재, 체액, 살, 영혼 모두 자연의 일부다. 자연은 우리를 둘러싸고 우리에게 스며들고 우리에게서 흘러넘치고 우리를 포함한다. 우리 삶이 끝나면 자연은 우리가 지하실에 처박아놓은 낡은 장난감이나 되는 것처럼 우리를 흩뜨리고 분해한다. 한때 살아 있던 존재가 생명 없는 원소로 돌아가지만 그래도 영원히 자연의 일부로 남는다.
이렇게 삶은 계속된다. 각 세대는 다른 우주에서, 별개의 시간과 공간, 역사, 관습, 공기의 질, 유행, 지방색의 교차점에서 태어난다. 우리 피부 세포가 2주마다 한 번씩 벗어져 교체되듯이, 우리가 사는 지구도 끝없이 새로운 새[鳥]로, 새로운 사람으로 채워진다. 어린 자손들이 자라나 영향을 미칠 세계는 예측할 수도 헤아릴 수도 없는 우연과 정황의 독특한 조합으로 만들어진다. 부모들도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어떻게 자식들이 대비하게 만들 수 있겠는가. 우리는 모두 저마다의 시간 속에서 살다가 만난다. 미끄러지다가 이따금 부딪히는 유리판처럼. 우리가 이만큼 사이좋게 지내는 것도 정말 놀라운 일이다. 공감 덕분에 가능한 일이고, 사랑이야말로 이를 가치 있게 만든다.
정원은 무척 친밀하고 개인적인 데가 있다. 무언가를 소중히 여겨 관심을 기울이면, 특징이나 병증이 눈에 들어오고 각 식물이 같은 종에 속하는 다른 개체와 닮았으면서도 어떤 면에서 다르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아마 그래서 정원이 그토록 강력한 은유로 사용되는 것이리라. 자연의 근본 힘을 구현하고, 개체와 집단, 하나이자 다수를 모두 포함하고, 삶의 여러 면들, 복잡다단한 관계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꽃에서는 향기가 뿜어 나와 벌나비를 끌어들이고, 꽃은 벌나비가 씁쓸한 맛을 띠게 해서 포식자를 피할 수 있게 하여 더오래 살 수 있게 해주고, 대신 벌나비는 더 멀리 여행해서 꽃가루를 퍼뜨릴 수 있다. 나는 나무에 물을 주고, 나무뿌리는 토양에서 수은을 흡수하고 잎사귀는 공기에서 이산화탄소를 흡수하고 생명을 주는 산소를 내놓는다. 또 이로운 곤충들도 우리집 마당으로 불러 온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우리는 식물과 동물의 오래된 교환, 재화와 용역의 교환관계 안에 있다.
대신 풀밭에 앉아 박각시나방이나 서양톱풀을 구경하고, 조용히 돌아다니면서 자연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보고, 생각들이 솟아나오게 한다. 그러려면 데이터에서 자유로운 시간, 그러니까 시계, 이메일, 휴대전화, 컴퓨터, 신문, 텔레비전, 라디오처럼 우리를 서로 연결하면서 닫아버리는 정보 전달자들에게서 벗어나 있는 시간이 필요하다. 머릿속에는 정말 짐이 많다. 일부를 잠깐 동안이라도 내려놓고 자연의 경이 속에서 뒹굴다 보면 어릴 적에도 그랬지만 지금도 참 많은 것을 얻는다. 그래서 나는 붓꽃 꽃술의 생
김새나 촉감에 홀딱 빠지거나 새들이 오가는 모습을 구경하거나 가을에 떠가는 나뭇잎들의 찰나의 모습을 보며 기억 속의 장면에 새로운 장면을 덧씌운다.
나무, 가로등, 귀에 꼬리표를 단 암사슴, 집, 짝짓기를 하러 내려온 벌레들……. 얼마나 이상한가, 이 야단법석의 일부라는 게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생명을 탄생시킨 이 조그만 행성에서. 나는 하루에 열 번이라도 하던 말이나 하던 일을 멈추고 설명할 수 없는 드라마가 펼쳐지는 인간들의 세계라는 장려한 광경을 바라보고 싶어진다. 한 걸음 물러서서, 생명이 어떻게 진화했는지, 어떤 형태와 전략을 따랐는지 감탄하고, 어떻게 사람들이 정신을 흩뜨리는 온갖 것들과 일상의 곤궁 속에서도 자발적으로 삶에 몰두하며 삶의 끝까지 달려가는지 깨닫고 경탄한다.
생명은 익명이고 대체 가능하며 바글거리는 것이다. 어떤 종교에서는 자아에서 벗어나라, 살면서 죽음을 경험하는 것이 정체성의 번민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래도 나는 두렵다. 사람은 누구나 이런 급작스런 쇠락을 받아들이기에는 너무 젊고 준비되지 않았고 너무 위엄 있는 존재다. 이 꿈속에서는 해가 지평선을 금빛으로 아롱지게 하고 밤과 낮은 상실의 영역에서 만나고 정적이 뒤덮는다. 두툼한 흰 담요가 저 아래 깔리고 층운이 아침의 문을 연다. 곧 빙하 위의 정오처럼, 온 세상이 하얗고 황량한 화이트아웃 상태에 빠질 것이다. 마침내, 긴 잿빛 혼수상태 같은 구름을 뚫고 우리는 내려온다.
나는 원자가 된 어머니를 다시 일깨우고 밤나무를 백금빛으로 물들이는 새벽 속에서 어머니를 느낀다. 우리가 더 친밀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더라면, 내가 어머니의 꿈과 슬픔을 더 잘 알았더라면, 어머니를 더 잘 이해했다면, 어머니가 내가 당신을 이해한다고 느끼셨더라면 하고 생각한다. 놓쳐버린 가능성을 두고 안타까워해봐야 소용없다. 진정한 평화는 자기 운명을 그냥 받아들이는 정도가 아니라 사랑할 때 온다고 한다. 삶은 그냥 삶일 뿐이고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따라 행복을 느낄 수도 불만을 느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운명을 바로잡으려 하지 않고 사랑하고, 우주가 달라지기를 요구하지 않는다.’ 말이 쉽지 진정 그렇게 느끼기란 쉽지 않고 단지 그럴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부피로는 물론 공기 중의 물이 바다와 비교도 되지 않게 많지만 호수와 강, 샘, 우물, 60억 인간을 포함한 무수히 많은 생명체에는 녹은 눈과 비가 물을 채운다. ‘사람이 걷는다.’고 말하고 그렇게 생각하긴 하지만 사실 사람은 흐른다고 할 수 있다. 수준기(水準器)처럼 우리가 누우면 우리의 물도 평평해지겠지만 그래도 물은 계속 움직이고 미끄러지고 흐르고 새로워진다. 움직이지 않는 사람이라도 몸 안의 수로와 배편들 덕에 여행을 한다. 물을 마시고 먹고 배출하고 생각하는 몸의 조직은 습지이자 강어귀이고, 기관들은 섬이고, 혈류는 실개천과 여러 수원이 있는 긴 강이다. 움직이며 화학물질을 튀기고 여러 구멍을 통해 물을 배출하지만 우리 피, 피부, 땀, 눈물 안에는 늘 짠 바다가 있다. 생리주기는 조수를 닮았다. 관절에 기름칠을 하고 음식을 소화하고 우리 치아에 반짝이는 법랑질을 덮는 데도 물이 필요하다. 우리는 물이 이루어내는 생명을 반영해 보여준다.
아이들은 언제나 실내와 실외로 이루어진 마음의 풍경 안에서 논다. 그래서 때로 실내에서 놀면서 집밖을 상상하기도 한다. 우리는 타고나는 꿈꾸는 성향 때문에, 어쩌면 삶의 마지막 숨을 내쉴 때까지, 놀면서 우리를 가다듬는 덕에 또 다른 괴물, 또 다른 고초를 이겨나갈 수 있다. 우리는 배우고, 사랑하고, 자라고, 살아남기 위해, 재미있거나 반드시 필요하지 않다고 하더라도 놀아야 한다. 이는 다행히도 가장 엄밀하고 세세하게 따져보아도 재미있고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아주 오랜 세월 동안 아이들은 자연에서 놀았다. 들에는 실내가 없고, 실내(움막, 동굴)는 비좁았기 때문이다. 더욱 중요한 까닭은 자연과 자기 자신이 구분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자기가 아닌 무언가 다른 것, 다른 사람인 척하면서 놀았다. 양 가죽 옷을 입고, 절반은 양, 아니 매 하는 울음소리로 가득한 네발짐승 자체가 되었다. 무생물인 척하는 놀이도 했을 것이다. 산이나 물, 달이나 나무.
여러 가지 이유로, 특히 안전과 마케팅 따위의 이유로 요즘 아이들은 집 안에서 혼자 전자제품을 가지고 노는 일이 점점 많아진다. 장난감 가게에서는 조그만 ATM 기계 장난감까지 판다. 오즈의 나라 어린 시절을 그냥 건너뛰어 썩지도 않고 무릎이 까질 일도 없는 놀잇감들의 경주 속에 휘말린 게 아닐까 싶다. 이런 장난감들이 손ㆍ눈 협응력을 기른다고들 하지만, 순간적으로 집중하게 할지는 몰라도 중요한 순간에 차분하고 끈기 있게 삶에 관심을 기울이는 소중한 능력을 기르는 데는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 “자연결핍장애”라는 말을 만들어낸 『자연에서 멀어진 아이들(Last Child in the Woods)』의 저자 리처드 루브(Richard Louv)에게 샌디에이고에 사는 4학년 아이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실내에서 노는 게 더 좋아요. 전기코드 꽂는 데가 있으니까요.”
미국 전역에서 새벽이 시작되면 해바라기들이 동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해를 향해 절을 한다. 꽃줄기의 그늘 쪽이 햇빛을 받는 쪽보다 빨리 자라기 때문에 꽃 얼굴들이 빛 쪽을 향하게 된다. 해바라기는 흔들리지 않는 믿음으로 종일 해를 쫓으며 동쪽에서 서쪽으로 돌아간다. 꽃봉오리 아래쪽 목 부분이 유연해서 머리가 돌아갈 수 있다. 꽃이 활짝 피어 밝은 노란색으로 초원을 뒤덮은 다음에는 목이 단단하게 굳어져 더 이상 돌아가지 않고 변함없는 충절로 굳는다. 동쪽을 향한 상태로 멈출 때가 많다. 그냥 ‘꽃’이라고 하지 않고 ‘얼굴들’이라고 한 까닭은, 해바라기는 한 송이가 아니라 작은 통꽃들이 모여 있는 무리이기 때문이다. 바깥쪽 꽃잎 부분은 모두 중성이고 안쪽 ‘해바라기 씨’ 부분은 가능성으로 가득한 개체들이 모여 있는 것이다. 군집의 지혜는 자연의 모든 단계에서 번성한다. 우리 사회와 몸도 마찬가지다. 행성들은 서로를, 그리고 태양과 서로 끌어당기고, 태양은 은하의 다른 별들과 서로 끌어당기면서 모양과 갈 길을 만들어 나간다. 모든 사물은 특성들의 집합체이자 우리가 느끼는 감각들의 총체다. 우리는 온몸으로 사물을 만난다. 사물 가운데에는 몸도 포함되고. 우리 세포 하나하나가 결합해 의식, 기관, 사지를 이루고 날마다 새벽이면 각각 힘을 모아 자아감을 다시 일깨운다. 우리 뉴런 하나하나, 피부 조직 하나하나가 단세포 조상을 닮았다. 우리 세포들은 가족이라기보다는 군집에 가깝고, 때로는 사이좋은 동지들, 잘 모르는 벗들, 비밀스러운 공모자들이다. 우리는 사실 여러 과업들의 복합체다. 숨쉬기, 먹기, 유지 보수, 이동, 계획, 성숙 등. 몸마다 수백만 개의 조그만 공장이 함께 돌아가며 합쳐져 자아를 이루고, ‘나’를 이룬다. 스스로를 총체적인 존재로 느끼거나 때로는 독특한 존재로 때로는 혼자인 것처럼 느끼기도 하는 자아가 된다. 하나의 생명이 생겨난다. 그렇지만 ‘나’라고 하는 것은 사실상 ‘우리’, 복수의 존재다. 우리는 타협하고 협력하고 때로는 스스로와 싸움을 벌인다. 다른 동물들도 대부분 마찬가지다.
물론, 다른 사람의 주관적 경험에 완전히 스스로를 투사할 수도 없는데, 다른 감각과 본능을 지닌 다른 종에 그렇게 하기란 말할 것도 없이 어렵다. 다른 종의 하루는, 구름을 뚫고 비추는 어스름 햇빛 말고 다른 데서 시작할 수도 있는 것이다. 도마뱀처럼 땅에 달라붙어서, 혹은 땅 아래에서 시작될 수도 있다. 그렇지만 자기 자신을 잠시 잊고 자연과 뒤섞이는 순간의 황홀함은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다 보면 내 몸 안의 세포가 전에는 다른 곳에 쓰였을 수도 있고, 갑오징어나 점균류였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어쩐지 겸허해지는 생각이다. 우리는 인간의 주관적 실재가 다른 생물류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한다. 그렇지 않다면 다른 생명체, 가장 하등한 생명체와도 유대감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지능이 있고, 개성도 있고, 학습 능력도 있고, (뇌는 없지만) 의식은 없어도 재주가 있는 점균류를 한 번 생각해보라. 그것들은 저마다 반은 식물 반은 동물이고 채워지지 않는 굶주림을 지닌 단세포 군집을 형성한다. 단일 연대처럼 자족적이지만, 그러다가 문득 설명할 수도 떨쳐버릴 수도 없는 강렬한 열망을 느낀다. 그럴 때면 땅을 기어 다른 점균류가 야영하는 곳으로 간다. 장벽을 모두 내리고, 내 정체성을 버리고, 그것에 내 작은 사회를 더해서, 하나의 굶주림, 뇌라고 할 것은 없지만 영리하고 잔꾀 많고, 숭고할 정도로 일시적인 초유기체(superorganism)가 될 것이다. 위풍당당한 하나의 세포 덩어리라는 존재로.
감각적이고 신체적인 공부의 새로운 계보
저자가 이 책에서 호출하는 사색가들, 예술가들, 기록자들, 인문주의자들은 언뜻 보면 전혀 공통점이 없다. 그러나 저자의 호명을 통해 이들은 세상에서 가장 신체적인 지식, 감각적인 인문주의 계보를 만든다. 태양신을 온갖 방법으로 숭배해 새벽빛을 받게 설계된 알렉산드리아도서관을 만든 프톨레마이오스 2세부터, 농부 출신으로 최초의 눈 결정 사진을 생각해내고 사진집을 만들어냈지만, 눈 결정 사진을 찍기 위해 심한 눈보라를 헤치고 집으로 돌아오다 폐렴에 걸려 사망한 ‘눈송이 사나이’ 윌슨 A 벤틀리, 이동 가능한 틀로 된 벌집을 발명해 양봉 생산량을 획기적으로 늘리고, 극심한 신경증으로 고통받으면서도 매일 매일 벌과 벌집에 대한 기록을 멈추지 않아 [벌집과 꿀벌]이라는 고전을 남긴, 미국 양봉의 아버지 L. L. 랭스트로스, 새벽의 매 순간 변하는 이미지를 포착하려 했던 모네, [미쿠라노소시(베갯머리 서책)]라는 고전을 남긴 새벽의 기록자 쇼나곤, “일흔 살 이전에 그린 작품 가운데 정말 중요한 것은 하나도 없다. 일흔 두 살이 되자 비로소 새, 짐승, 곤충, 물고기의 진짜 특성, 풀과 나무의 중요한 본질을 조금 이해하기 시작했다. 그러니 여든 살이 되어야 조금 발전할 것이고 아흔 살이 되면 사물의 깊은 의미를 더욱 깊이 통찰할 테고 100살이 되면 정말 위대해질 것이고 백열 살이 되면 점 하나, 선 하나가 독자적인 생명력을 갖게 될 것이다.”라고 말했던 화가 호쿠사이 등등.
이들의 관찰과 기록과 사색과 공부는 마치 함께 날아갈 때 평소의 반응속도보다 더 빠르게 한몸인 듯이 방향을 전환할 수 있는 비둘기 무리들의 창발성처럼, 새벽 공기를 가르고 고향으로 날아가기 위해 자기 몸에 난 모든 털 하나하나를 다 느낄 수 있는 두루미들의 지식처럼, 안다는 것이 얼마나 정신적인 동시에 육체적인 일인지, 사고와 감각과 정서가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 지극히 명료하고 아름답게 보여주는 책이다.
뇌가 한번 무언가를 알아차리면 다음에는 더 빨리 인식할 수 있도록 머리가 익어 얼른 알아볼 수 있고, 이런 일이 되풀이되면 자세히 들여다볼 필요도 없게 된다. 어떤 곳에 방문한 사람들 눈에는 거기에 사는 사람들이 놓치는 것들이 들어온다. 특히 휴가 중이라 오로지 보고 세세히 살피고 기억하는 것만을 염두에 둔 사람들 눈에는 더욱 그렇다. 아기들, 초보자들, 새로 온 사람들, 화가들, 신비주의자들의 공통점이 이거다. 신선한 시각. 그래서 화가들은 스스로를 아웃사이더처럼 느낄 때가 많을 것이다. 어떤 면에서 보나 화가들은 영원한 여행객이다. 우리의 지각은 늘 레이다망을 피해 다니다가 모네 같은 화가가 우리를 툭 치며 외칠 때에야 깨어난다. 잘 좀 봐! 모든 순간의 속절없는 아름다움을 보여줄게. 이게 물결이야. 이게 비야.
모네가 기록한 것처럼 바로 지금만큼 생생한 시간은 없다. 지금 현재의 진실만은 영원하다. 우리의 시간 감각은 자라면서 변한다. 어릴 때는 하루가 긴 것 같더니 늙으면 한 해 한 해가 순식간에 지나간다. 우리는 다른 시간대를 지난다. 아이들은 어른보다 더 많은 정보를 더 빨리 받아들인다. 모든 게 새로운 데다 대부분 순간적으로 지나가 버리기 때문에 처리해야 할 양이 많다. 그래서 시간이 천천히 흐르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노인들은 느린 신진대사를 통해 세상을 감각하고 놀랄 일도 거의 없기 때문에 삶이 물 흐르듯 스쳐 지나가는 것만 같다. 충격 등을 주어 신진대사를 빠르게 하면 아드레날린이 쏟아져 나와 비상 상태에 대처한다. 그러면 뇌가 정보를 빠른 속도로 처리한다. 세부 사항 하나하나가 중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럴 때는 시간이 느려진다. 이는 포식자와 피식자의 세계이기도 하다. 동물들이 저마다 다른 시간대에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 이상하게 여겨지지만 나는 아마 그러하리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무엇에 주의를 기울이느냐, 바로 이것이 우리를 정의한다.
▣ 작가 소개
저자 : 다이앤 애커먼(Diane Ackerman)
교육자이자 시인이며 수필가인 다이앤 애커먼은 펜실베이니아 주립대학을 졸업 후 코넬 대학에서 MFA(미술 전문 석사 학위), 영문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존 버로즈 자연문학상과 라반 문학상 등 많은 상을 수상하였으며 《뉴요커》의 필진이기도 하다. 국립예술기금, 록펠러재단 기금, 국립인문학기금을 받았으며 뉴욕 대학, 리치먼드 대학, 컬럼비아 대학, 코넬 대학에서 영문학과 인문사회학을 가르쳤다. 지은 책으로 『천 개의 사랑』, 『감각의 박물학』, 『미친 별 아래의 집』, 『뇌의 문화지도』, 『나는 작은 우주를 가꾼다』, 『내가 만난 희귀동물』 등이 있다.
역자 : 홍한별
연세대학교 영어영문학과와 같은 학교 대학원을 졸업한 뒤, 번역가로 활동하고 있다. 『민주주의는 가능한가』, 『가르친다는 것』, 『타블로이드 전쟁』, 『권력과 테러』, 『자라지 않는 아이』, 『위대한 생존』, 『오카방고의 숲속 학교』, 『나는 그림으로 생각한다』, 『페이퍼 엘레지』 등 다양한 문학 작품과 인문, 사회과학 도서들을 우리말로 옮겼다. 지은 책으로는 『다시 동화를 읽는다면』(공저)가 있다.
▣ 주요 목차
프롤로그: 떠오르는 기쁨
새벽 어머니
봄
비둘기 무리의 창발성
비 한 자락
두루미의 위기
잃어버린 밤하늘
떨어지는 아기 새
은유가 필요한 이유
금성을 관찰하다
모네의 마음속
새벽의 갠지스
새가 내는 모든 소리
친구의 죽음
붉은색과 푸른색
시간의 굴레
여름
가장 위험한 시간
세이 쇼나곤의 마음속
정원에서 우주적 생각에 잠기다
다리가 둘 혹은 넷인 이웃과 함께하는 아침기도
하지와 동지의 새
호쿠사이의 마음속
마음을 흔드는 연꽃
달팽이와 거미의 매력
한 해 중 최고의 때
딱따구리
구름에 열광하는 사람들
가을
벌들의 붕붕거림
벌집 만들기
아르키메데스를 바라보는 시각
프톨레마이오스 2세와 알렉산드리아 도서관
우리는 모두 하나이자 여럿인 존재
황도광
어머니 생각
동물생약학
찌르레기의 영리함과 현명함
부엉이가 된다면
겨울
파란 계절
사방에 물
결정
못된 수탉 한 마리가 농장을 망친다
일과를 마치고
그곳에 없으며 그곳에 있는 침묵
잘 보낸 시간
옮긴이 후기: 세상에서 가장 낭만적인 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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