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광장의 노래를 들어라!
“노래는 왜 대중을 뜨겁게 하는가?”
“우리는 왜 광장에서 민주주의를 외치는가?”
광장은 민주주의의 상징이다. 박정희가 삼권분립이나 국민의 기본권 등을 무참하게 짓밟은 1972년 10월 유신을 선포하자, 전국에서 학생과 시민들이 광장에 모여 독재 타도를 외쳤다. 1980년 서울의 봄, 1987년 6월 항쟁, 2016년 촛불혁명까지 대중은 광장에 모여 ‘민주화의 봄’을 요구했다. 그렇게 광장은 민주주의를 외칠 수 있는 자유로운 공간이었고, 대중은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다, 거짓은 참을 이길 수 없다, 진실은 침몰하지 않는다, 우리는 포기하지 않는다”라며, 민주주의를 포기하지 않았다. 이승만 정권의 독재를 끝낸 4·19혁명에서는 〈애국가〉, 〈삼일절 노래〉, 〈광복절 노래〉 등 다양한 노래가 불렸다. 1980년 서울과 광주 금남로에서 대중은 가장 쉽게 따라 부를 수 있는 〈훌라송〉을 부르며, 정권 타도를 외쳤다. “우리들은 정의파다 훌라 훌라, 같이 죽고 같이 산다 훌라 훌라, 무릎 꿇고 살기보다 서서 죽길 원한다, 우리들은 정의파다.” 2016년 겨울 박근혜·최순실 국정농단이 터졌을 때 대중은 광장에 모여 〈하야가〉를 불렀다. “순실이를 옆에 끼고 말아먹은 박근혜야, 거짓사과 오리발로 제 아무리 버텨도, 동네방네 일어서는 국민들을 이길소냐, 내려와라 당장 하야하라 당장, 국민들의 목소리를 들려나 주세”라며, 대통령 박근혜의 하야를 요구했다. 대한민국의 역사가 바뀔 때마다 대중은 노래를 부르며 가슴이 울컥거리는 경험을 했다. 그렇게 노래는 대중을 뜨겁게 했다.
2016년 늦가을부터 2017년 봄까지, 추운 겨울을 뜨겁게 달군 광화문 광장의 촛불혁명의 힘은 대단했다. 사람들은 광장에 나와 민주주의를 외쳤고, 박근혜의 하야와 적폐청산을 부르짖었다. 아이부터 부모까지, 조부모에서 어린 손녀까지 모두 민주주의를 경험한 것이다. 그렇게 2017년 봄, 광화문 시대가 열렸다. 대통령 선거가 예정되어 있던 12월보다 무려 7개월이나 이른 5월, 이른바 ‘장미 대선’으로 선출된 문재인 대통령이 광화문에서 집무를 하겠다고 선언했다. ‘광화문1번가’를 설치해 국민들에게서 정책 제안을 받기도 했다. 광화문은 시쳇말로 가장 ‘핫한’ 공간이 되었다.
광화문 광장은 수직으로 켜켜이 쌓인 역사의 산물이다. 그 모습은 대중예술사 속에서도 확인된다. 조선시대 정도전의 〈신도가〉가 가장 아래층에, 고종 집권 초기에 나온 경기민요인 〈경복궁 타령〉은 중상층에, 1950년대에 발표된 〈아리랑 목동〉은 표층에 뒤얽혀 있다. 영화와 소설과 드라마에서도 광화문은 나타났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광장의 노래는 세상을 어떻게 바꾸는가』에서는 광화문 광장이 대중의 삶과 감수성 속에서 면면히 살아 있었다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다.
대중은 광장에서 〈하야가〉를 불렀다
2016년 겨울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터졌을 때 사람들은 광화문 광장에 모여 〈하야가〉를 불렀는데, 이 노래는 〈아리랑 목동〉의 개사곡이다. 아마 〈하야가〉를 불러본 사람이라면 ‘노래가 어쩌면 이렇게 입에 착착 붙냐’ 하는 생각을 했을 것이다. 원곡의 가사가 입에 착착 붙도록 만들어졌는데, 원래 가사를 충분히 살려 입에 착착 붙는 재미를 유지한 것이다. 최소의 것을 바꾸어 최대의 효과를 거둔 패러디 노래의 수작이다.〈아리랑 목동〉이 〈하야가〉로 재탄생한 것은 큰 반전이긴 하지만, 그리 놀랄 만한 일도 아니다. 집단적으로 부르는 노래가 필요해질 때마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문화사적 경험 속에서 적절한 노래를 호출해 새롭게 가공해서 부르기 마련이다. 대중의 입에 익숙하게 오르내렸던 대중가요가 함께 부르는 응원가가 되고, 다시 시위용 노래가 되는 것은 별로 이상한 일이 아닌 것이다.
2008년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촛불집회에서는 여고생들이 주축이 되어 ‘미친 소 미친 교육 아웃’, ‘미친 소 너나 처드삼’ 등의 발랄한 구호를 외쳤다. 이들은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대한민국의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라는 〈헌법 제1조〉를 불렀다. 이 노래는 대한민국 헌법 제1조를 반복하는 가사에 악곡도 아주 단순하게 붙였다. 첫째 소절에서 둘째 소절로, 둘째 소절에서 셋째 소절로 넘어갈 때마다 선율의 첫 시작 음이 하나씩 올라간다. 이런 점층적인 선율은 자연스럽게 감정을 끌어올린다. 호소력과 중독성을 확보한 계산된 히트곡이었다.
세월호 참사 이후 광화문 광장은 더욱 뜨거워졌다. 박근혜 정권이 집요하게 덮어버리려고 했던 세월호 참사를 대중은 광화문 광장에 모여 그 진실을 규명하라고 절규했다. 이렇게 안간힘을 다하고 광화문 천막에서 2년 반을 목숨 걸고 버텼기에 2016년 겨울 광화문의 촛불은 다시 타오를 수 있었다. 이때도 사람들은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다, 거짓은 참을 이길 수 없다, 진실은 침몰하지 않는다, 우리는 포기하지 않는다”라는 〈진실은 침몰하지 않는다〉를 불렀다. 이 노래는 어둠과 빛, 거짓과 참의 선명한 대비, 여기에 ‘침몰’이라는 단어가 던지는 너무도 선명한 세월호 이미지가 절정부에 배치되어 있다. 그리고 마지막 소절처럼 ‘우리는 포기’할 수 없었다. 이 기막힌 죽음 앞에서 우리가 어떻게 포기할 수 있겠는가? 2016년 겨울 광화문 광장에서 ‘송박영신(送朴迎新)’의 송년회를 한 기억이 새롭다. 우리는 이제 어떤 노래를 부를 것인가?
광장, 민주주의를 외치다
1971년 박정희는 삼선개헌을 밀어붙여 세 번째 대통령 선거를 치르게 되는데, 이때 젊은 야당후보 김대중에게 겨우겨우 이겼다. 박정희는 대통령 직선제와 최소한의 민주적인 헌법으로는 장기집권을 하기 힘들겠다고 판단했는지 아예 대한민국 헌법의 근간을 허물어버렸다. 1972년 10월 유신으로 전국에 계엄령을 선포해서 민주주의를 퇴보시켰다. 대통령 간선제로 종신집권이 가능하도록 만든 희한한 헌법이었다. 이에 반대하는 대학생 조직인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을 잡으려고 ‘맞춤법령’인 긴급조치 4호를 발효해 주동자 8명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1975년에는 이 흐름의 끝장판인 긴급조치 9호가 발효되어 학내 집회의 전면 금지와 총학생회 해체가 단행되었다. 이때부터 이른바 살벌한 ‘긴조시대’, ‘유신 말기’의 세상이 펼쳐지게 되었다.
대중이 광화문 광장에 처음으로 모인 때는 박정희 정권이 끝난 직후인 1980년 ‘민주화의 봄’이었다. 1980년 3월 대학 총학생회가 부활되고 봄이 무르익으면서 교내 집회를 거쳐 시내 한복판의 가두시위로 이어졌다. 광화문 네거리에 시위대가 진출한 것은 5월 13일이었다. 그리고 1980년 5월 15일 서울역 광장에는 10만 명의 학생이 모여 ‘계엄 철폐’를 요구했다.
광화문 광장에 사람들이 다시 모인 시기는 7년 뒤인 1987년 6월 항쟁이었다. 박종철에서 이한열로 젊디젊은 죽음이 이어진 이때, 가장 안전한 공간은 명동성당을 비롯한 기독교권의 공간이었다. 그래서 명동이나 종로5가 기독교회관 부근에서 출발해 서울시청 앞과 종로·무교동을 거쳐 광화문 네거리로 향하는 것이 이 시기 대부분의 시위 행로였다. 6월 10일 시위대는 광화문 네거리를 어렵사리 뚫었고 시위는 승기를 잡았다. 6월 29일, 호헌의 입장을 철회하고 개헌을 약속한다는 노태우 당시 집권당 대통령 후보의 6·29선언이 나왔다.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쟁취한 것이다.
6월 항쟁 이후 몇 년 동안 시위는 그저 늘 있는 사회현상이 되었고, 세종로에서도 가끔 자잘한 시위가 이어졌다. 이 흐름은 1991년 봄, 시위 진압 경찰에게 쫓기다 숨진 명지대학교 1학년 학생 강경대의 기나긴 장례 투쟁을 마지막으로 끝이 난다. 그리고 2002년 한일월드컵으로 뜨거운 여름을 보낸 그해 11월에 미군 장갑차에 치여 사망한 두 여중생을 추모하는 촛불집회가 열렸고, 2004년 노무현 대통령 탄핵 무효 촛불집회와 2005년 이라크 파병 반대 촛불집회와 2008년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촛불집회가 열렸다. 2016년 겨울에는 촛불항쟁이 일어나 박근혜 대통령의 하야를 요구했고, 2017년 3월 헌법재판소는 “피청구인 대통령 박근혜를 파면한다”고 결정했다.
광장, 역사를 품다
광화문 광장은 역사가 쌓인 공간이다. 공간뿐 아니라 모든 문화는 오랜 시간 사람들의 흔적이 켜켜이 쌓인 결과다. 2008년 광화문 광장 조성을 위해 세종로 이순신 장군 동상 뒤편을 파헤쳤을 때 탄탄한 콘크리트 밑에 묻혀 있던 육조거리가 나타났다. 콘크리트 포장을 한 표층부터 자연이 만들어놓은 밑바닥의 지층까지 무려 8미터였다. 자연층 위에는 조선 건국 초기부터 임진왜란 시기, 경복궁 중건 시기, 20세기 이후까지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조선시대 육조거리의 흔적부터 1968년에 사라진 전찻길의 흔적까지 나타났다. 광화문 광장의 역사는 고스란히 한반도의 역사를 보여준다. 이 긴 세월의 역사가 광화문 광장의 땅 아래에 쌓여 있었던 것이다.
광화문 광장은 노래·영화·소설 등 대중예술사에서 큰 공간을 차지한다. 대중예술에 광화문이 어떻게 나타나는지 살펴보는 일은 꽤나 흥미로운 작업이다. 1960년대는 영화에 광화문이 많이 등장하는 시대다. 이런 변화는 1960년대에 들어서서 사람들이 근대적인 도시화와 산업화, 경제발전에 대한 희망을 갖기 시작했다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 다시 말해 한국 사회에 ‘잘 살아보세’의 새로운 희망이 부추겨지고 있던 시대였다. 영화 〈마부〉에서 가족들은 눈 쌓인 중앙청 앞문에 붙인 사법고시 합격자 명단에서 장남의 이름을 발견하고, 기쁨의 눈물을 흘리며 얼싸안는다. 위기의 늪에 빠졌던 가족이 바로 중앙청 앞 세종로에서 ‘근대적이고 능력 있는 청년 남자’에 대한 믿음으로 희망 찬 ‘재건(再建)’의 첫 걸음을 내딛게 된 것이다. 영화 〈맨발의 청춘〉에서도 젊은 연인은 세종로를 무대로 연애를 한다. 세종로는 1961년에 완공된 미국대외원조기관과 경제기획원 등 당시로서는 최첨단의 건물이 있던 세련된 거리였다.
그러나 1960년대 말부터 1970년대 전반기까지 영화 속의 세종로는 다른 모습으로 등장한다. 짓밟힘의 공포가 엄습하는 공간으로 나타난다. 영화 〈대괴수 용가리〉는 중앙청과 서울시민회관 등 서울의 도심을 파괴하는 장면으로 유명한데, 그런 점에서 용가리의 침략은 북한 침공의 메타포로 읽히기에 충분했다. 이렇게 영화에서 짓밟히는 세종로를 그려내며 안보 위기가 부추겨질 때, 박정희는 광화문을 복원한다. 일본과 북한에 의해 훼손된 광화문을 복원해 중앙청 앞에 세워놓은 것이다. 그렇게 ‘콘크리트조 광화문’은 복원되었고, ‘중앙청 대문’이 되었다. 그러나 광화문은 ‘높은 분’이 중앙청으로 들어가는 자동차 전용 통로였다. 박정희야말로 그 통로를 가장 많이 이용한 사람이었다. 더구나 광화문의 콘크리트 서까래 아래에는 박정희의 글씨로 한글 현판이 걸렸다. 이 문의 주인이 누구인지 증명이라도 하듯 말이다.
1978년 4월 세종로 한복판에 세종문화회관이 들어섰다. 그런데 세종문화회관은 돌기둥을 늘어세운 열주와 돌계단을 배치해 함부로 가까이 할 수 없을 듯한 권위와 엄숙함을 풍겼다. 그래서 오랫동안 대중음악인들을 받아주지 않는 권위적인 공연장이 되었다. 하지만 1987년 6월 항쟁을 거치면서 세종문화회관에서는 트로트가 울려 퍼졌다. 1989년 패티김을 시작으로 남진, 심수봉 등 트로트 가수들이 세종문화회관에서 공연을 했다. 1994년에는 동학농민전쟁 100주년을 기념해 가극 〈금강〉, 민주노총 건설이라는 기치를 내건 노래판굿 꽃다지의 〈모여드세〉가 공연되는 파격이 이루어졌다. 그후 세종문화회관은 시민 중심의 문화 공간으로 전환되었고, 세종문화회관의 바깥인 광화문 광장은 누구나 편하게 앉아 쉬는 쉼터나 모임 장소, 온갖 피켓으로 바글거리는 집회 장소가 되었다.
2000년대 이후 영화와 드라마에서는 세종로가 ‘대한민국 서울의 연인들’이 만나는 장소로 자주 등장한다. 영화 〈내 여자친구를 소개합니다〉에서 경찰관 경진이 자신의 검거작전에 휘말려 죽은 애인 명우를 꿈속에서 다시 만나는 장소가 바로 광화문 네거리다. 드라마 〈도깨비〉에서 김신과 지은탁이 ‘단풍국’ 캐나다에서 공간을 뛰어넘어 광화문에서 만나는데, 이곳이 대한민국이라는 것을 보여주기에 가장 적합하고 멋진 장소였기 때문이다. 드라마 〈시카고 타자기〉에서도 1930년대에 죽어 타자기 유령이 되어버린 유진오가 가장 와보고 싶어 한 곳이 조선총독부가 사라진 광화문 앞이다. 1930년대의 청춘 3명이 2010년대에 환생해 광화문을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찍는다. 이제 광화문은 서울 관광의 가장 중요한 장소가 되었다. 광화문 바로 앞을 드나들며 궁궐을 즐기는 사람부터 광화문 네거리 부근의 이순신 동상 앞까지 늘 사람들로 가득하다. ‘드라마 한류’ 바람을 타고 한국 관광을 선택한 외국 젊은이들은 드라마 속에서나 나올 법한 화려한 퓨전 한복을 빌려 입고 광화문을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찍는다. 광화문은 한류 관광의 ‘포토존’이 되었다.
작가 소개
저 : 이영미
대중 예술 평론과 한국 대중 예술사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고 있는 작가로 1961년 서울의 동대문 밖에서 태어나 죽 서울에서만 자란 서울내기이다. 어쩌다가 집에서 먼 ‘국민학교’를 다닌 덕분에 신설동에서 을지로 6가까지 서울 거리를 눈 감고도 오갈 수 있을 정도로 누비고 살았다고 한다. 그녀는 아기 때부터 텔레비전 앞을 떠날 줄 몰랐던 ‘텔레비전 키드’로, 방송극과 「쇼쇼쇼」 같은 오락 프로그램에 열중했던 ‘조기교육’으로 인해 지금의 전공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고 이야기한다.
고려대학교와 같은 대학원에서 국문학을 전공했으나 남들은 별로 관심 갖지 않는 연극이나 대중 예술에 관심을 가진 좀 별난 학생이었고, 1984년부터 본격적으로 평론 활동을 시작하게 되었다. 서른 즈음에 한국 대중 예술의 흐름과 대중성의 실체에 대한 궁금증이 자신의 화두임을 깨달았고, 대중 예술에 대한 연구를 본격화 남들이 잘 하지 않는 연구만 골라서 하면서 혼자 뛰면 늘 1등을 할 수 있다고 믿는 무모함으로, 오늘도 옛날 방송극 자료 더미에 묻혀 끙끙거리며 연구중이다.
저서로는 『한국 대중 가요사』, 『한국인의 자화상, 드라마』, 『대학로 시대의 극작가들』, 『마당극 양식의 원리와 특성』, 『마당극 리얼리즘 민족극』, 『이강백 희곡의 세계』, 『흥남부두의 금순이는 어디로 갔을까』, 『세시봉, 서태지와 트로트를 부르다』, 『광화문 연가』, 『노래이야기주머니』, 『재미있는 연극 길라잡이』, 『민족 예술 운동의 역사와 이론』, 『서태지와 꽃다지』 등이 있다.
목 차
머리말 _ 광장에서 혁명을 보다 · 5
제1장 _ 광장에 촛불이 타오르다
〈아리랑 목동〉이 촛불로 부활하다 · 15 | 노래는 왜 대중을 뜨겁게 하는가? · 20 | 희망과 고달픔이 녹아 있는 〈경복궁 타령〉 · 24 | ‘새 도읍의 지형이 뛰어나도다’ · 26 | 역사적으로 힘이 축적된 광화문 광장 · 29
제2장 _ 울어라 은방울아, 세종로가 여기다
조선총독부에서 국립중앙박물관까지 · 35 | ‘총후’란 말을 아시나요? · 37 | ‘독립의 종소리는 언제 우느냐’ · 40 | ‘아세아의 바람아 서울의 꿈을 깨라’ · 43 | 〈울어라 은방울〉에는 광화문이 없다 · 47
제3장 _ 대통령 찬가에서 독립행진곡까지
박목월의 ‘이승만 찬가’ · 53 | 이승만의 탄신 행사 · 58 | 좌우합작의 〈해방가〉만 겨우 살아남았다 · 61 | 4·19혁명에서 왜 〈삼일절 노래〉를 불렀을까? · 65 | 대중이 악보 없이 ‘떼창’할 수 있었던 이유 · 67
제4장 _ 세종로가 희망으로 눈을 뜨다
‘잘 살아보세’라는 새로운 희망을 부추기다 · 71 | ‘근대적이고 능력 있는 청년 남자’가 탄생하다 · 75 | 모던한 서울시청과 화려한 동화백화점 · 79 | ‘거리의 자식’이 세종로에서 연애를 하다 · 82 | 현대적이고 잘사는 삶을 욕망했던 한국인들 · 85
제5장 _ 서울시민회관, 대중문화를 품다
우남회관에서 세종문화회관까지 · 91 | 대중예술로 채워진 서울시민회관 · 94 | 패티김의 ‘바이바이쇼’와 김시스터즈의 내한 공연 · 97 | 한국 록 역사에 기록될 만한 ‘광란의 공연장’ · 99 | 대중예술의 전당이 사라지다 · 102
제6장 _ 공포와 불안감을 조성한 반공주의의 무대
〈홍길동〉과 〈대괴수 용가리〉 · 109 | 일본의 ‘고질라’를 본뜬 ‘대괴수 용가리’ · 111 | 용가리의 침략은 북한 침공의 메타포 · 115 | 반공영화와 국책영화의 시대가 열리다 · 119 | 콘크리트조 광화문과 목조건물 광화문 · 123
제7장 _ 영자의 뼈아픈 질문
‘옆집에 오신 손님 간첩인가 다시 보자’ · 129 | 성매매 여성 영자, 광화문 앞을 거닐다 · 131 | 이태원 캐피탈호텔과 여의도 국회의사당 · 136 | 창경궁과 숭례문에 대한 연민과 존경 · 140 | 고궁의 울부짖음이 들린다 · 142
제8장 _ 그들은 자유에 미쳤다
청년문화를 향유한 ‘새 나라의 어린이들’ · 151 | 중산층 청소년들의 근거지는 종로였다 · 154 | 고교 평준화와 재수생들 · 159 | 문어처럼 먹물을 뿜어 하얀 순수를 빼앗는 사람들 · 162 | 광화문은 추억으로만 ‘아직 남아 있다’ · 165
제9장 _ 세종문화회관에 트로트의 자리는 없었다
이름도 거룩한 ‘세종’문화회관 · 171 | 공연장도 방송사도 신전이었다 · 173 | 대중가요는 감히 들어올 수 없었다 · 177 | 세종문화회관에서 노동가요가 울려 퍼지다 · 180 | 공공극장은 시민들의 것이다 · 184
제10장 _ ‘구리 이순신’과 ‘도깨비’
김지하와 ‘구리 이순신’ · 189 | 이순신은 왜 무시무시하고 골이 잔뜩 난 모습일까? · 192 | ‘사방이 차도로 막힌 섬’ · 193 | 김신과 지은탁은 왜 광화문에서 만났을까? · 198 | 광화문은 한류 관광의 ‘포토존’이 되었다 · 201
제11장 _ 대통령은 왜 금기였는가?
“잘 돼갑니다” · 205 | 감히 대통령을 똑바로 보지 못하는 카메라 · 207 | 〈잘 돼갑니다〉가 개봉되지 못했던 이유 · 209 | 영화와 드라마에서 대통령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 214 | 악한 대통령이 등장했다 · 219 | “오늘 따라 저 기왓장이 더 파랗게 보인다” · 225
제12장 _ 그해 겨울, 광장은 뜨거웠다
뭇사람의 입은 하늘도 움직인다 · 231 | 넥타이 부대의 등장과 〈아침이슬〉 · 237 | 광화문 광장이 열리다 · 240 | 여중생들의 촛불과 ‘헌법 제1조’ · 243 | 진실은 침몰하지 않는다 · 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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