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기업 인문학은 기업의 이익에 복무한다
기업 인문학은 기업의 이익과 자기계발에 복무하는 인문학이다. 다시 말해 하나의 수단, 즉 생존, 출세, 성공, 경제적 이익에 복무한다. 대표적인 게 스티브 잡스의 ‘아이폰 인문학’이다. 2011년 3월 스티브 잡스는 아이패드2 제품 발표회에서 이렇게 말했다. “인문학과 기술의 교차로입니다. 애플은 언제나 이 둘이 만나는 지점에 존재해왔지요. 우리가 아이패드를 만든 것은 애플이 항상 기술과 인문학의 갈림길에서 고민해왔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사람들은 기술을 따라잡으려 애썼지만 사실은 반대로 기술이 사람을 찾아와야 합니다.” 애플의 상업적 성공이 인문학과 기술의 결합에 있었다는 고백이다. 그렇게 ‘아이폰 인문학’이 탄생했고, ‘아이폰 인문학’은 기업 인문학의 전범이 되었다.
스티브 잡스로 대변되는 ‘융합형 인재’는 박학다식한 사람을 뜻하는 말이 아니다. 지식을 이용해 상품과 서비스를 개발하고, 시장 점유율을 높이고, 이윤을 올리는 인재다. 즉, ‘자본 증식에 기여하는 인간’, 거기에 융합형 인재의 핵심이 있다. 인문학적 상상력은 과학기술과의 결합, 그중에서도 IT와의 결합에서 큰 파괴력을 갖는다. 마크 저커버그는 ‘지구상의 모든 사람을 연결한다’는 인문학적 상상력으로 페이스북을 개발했다고 한다. 그러나 IT와 인문학의 결합이 경제적 성공을 담보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인문적 소양이 높으면 경제적으로 성공하기 힘들 수도 있다. 페이스북, 네이버, 구글, 마이크로소프트 같은 플랫폼 기업들의 성공은 인문학적 상상력 때문이라기보다는 시장 독과점과 그것을 가능케 하는 제도를 마련하는 정치적 역량에 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신자유주의 시대, 자본은 끊임없이 인문학의 유용성을 묻는다. 그것은 사실상 자본의 증식에 기여할 수 있는지를 묻는 것이고, 그에 복무하라는 요구다. 인문학이 해야 할 일은 이에 대해 ‘기여할 수 있다’, ‘없다’ 혹은 ‘어떻게 기여한다’, ‘안 한다’를 답하는 것이 아니다. 그에 답하는 순간, 기업 인문학의 프레임에 걸려드는 것이다. 인문학은 그에 답하는 대신, ‘그렇게 묻는 의도가 무엇인지’를 되물어야 한다. 틀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성찰과 탐구, 비판과 질문은 인문학의 생명과도 같다.
빅 히스토리는 글로벌 자본가들의 적극적인 호응과 지원 속에서 성장하고 있다. 특히 빌 게이츠는 아예 발 벗고 지원하고 있다. 그는 “다른 어느 분야보다 포괄적이며, 우리가 자연과학, 역사학, 경제학에서 배우는 모든 것을 융합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빅 히스토리는 다른 모든 학문을 포괄하는 학문이며 어떤 사람도, 어떤 학문도, 어떤 세계도 빠져나갈 수 없는 ‘거대한 틀’을 구축하려 한다. 빌 게이츠가 빅 히스토리를 지원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는 빅 히스토리를 모든 학문을 통솔하고 재편하는 모(母)학문으로 만드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빅 히스토리는 자연과학과 인문학의 융합학문이라고 규정되지만, 실은 자연과학을 비롯한 과학기술의 비중이 압도적이다. 전체 학문체계를 기업 중심으로 재편하고 통제하는 데 매우 효과적인 수단이다.
좌파 지식인들은 왜 기업 인문학에 타협?투항했는가?
신영복은 성공회대학교 인문학습원에 ‘CEO를 위한 인문학 과정’을 개설하고 강의했다. 여기서 배운 사람들로는 삼성전자 고문 이학수, 한화그룹 부회장 김연배, 넥솔 회장 김태구, 샘표식품 사장 박진선, LG인화원 원장 이병남, 하나금융지부 부사장 조봉한, 경동제약 고문 박종식, SK에너지 부회장 신헌철, SK에너지 해외사업담당 사장 유정준, 동원건설 사장 송재엽, SK그룹 회장 최태원의 부인이자 아트센터 나비 관장인 노소영 등이 있었다. 한국 굴지의 재벌기업 회장이나 임원들이 대거 포진해 있었다. 이 프로그램 강사들 중에는 진보적 인사로 알려져 있는 진중권, 강헌, 임헌영, 유홍준도 있었다. 진중권 같은 사람에게 인문학을 배우겠다고 ‘삼성 2인자’ 이학수 같은 사람이 앉아 있는 풍경을 상상할 수 있겠는가? 그런 풍경을 가능케 한 것이 기업 인문학이다. 기업 인문학은 자본가와 좌파 지식인 사이의 가교 역할을 한다.
신영복은 2014년 10월 삼성 사장단 회의에서 강의한 적도 있다. 사실 삼성 사장단의 부름에 응해 강연한 좌파 지식인은 신영복만이 아니다. 김상조, 김호기, 정승일 등도 강연했다. 이런 현상을 어떻게 봐야 할까? 좌파의 외연 확장으로 볼 수 있을까? 기업으로서는 기업 이미지 제고에 효과적이다. 언론에 홍보 자료를 뿌리고 기사화되면, 삼성의 기업문화가 얼마나 혁신적이고 포용적인지를 과시하는 기회로 삼을 수 있다. 이런 점들을 감안하면, 진보 지식인의 기업 인문학 참여는 ‘진보의 외연 확장’이 아니라, ‘자본권력의 영토 확장’으로 보는 것이 옳다. 결국 변하는 것은 자본가나 자본권력이 아니라, 좌파 지식인이나 정통 인문학이다. 그래서 기업 인문학에 뛰어드는 좌파 인문학자들은 자기 파괴에 일조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인문학은 점진적으로 기업의 식민지가 된다.
인문학은 기업 광고에 동원되기도 한다. 기업 이미지 광고는 기업의 대표적인 의식 조작 활동이다. 삼성 하면 떠오르는 “또 하나의 가족”이나 두산 하면 떠오르는 “사람이 미래다” 같은 광고 말이다. 기업 이미지 광고의 목적은 기업이 단지 자본 축적만을 추구하는 곳이 아니라 사회 전체에 공헌하는 곳이라는 것을 널리 알리는 데 있다. 박웅현은 삼섬그룹 계열 광고기획사인 제일기획 출신의 광고인이다. 그는 SK텔레콤 광고 ‘기술은 사람을 향합니다’ 시리즈 등 성공적인 광고를 많이 만들어냈다. “주소록을 없애주세요 / 사랑하는 친구의 번호쯤은 외울 수 있도록 / 카메라를 없애주세요 / 사랑하는 아이의 얼굴을 두 눈에 담도록 / 문자기능을 없애주세요 / 사랑하는 사람들이 다시 긴 연애편지를 쓰도록 / 기술은 언제나 사람에게 지고 맙니다 / 사람을 향합니다.” ‘기술은 사람을 향합니다’ 시리즈 중 ‘없애주세요’라는 이 광고는 첨단 기술로 인한 문제들에서 기업을 면책시킬 뿐만 아니라, 그 문제들로 고통 받는 사람들의 마음을 이해하고 위로하는 입장으로 기업의 위치를 재설정한다. 지능적인 유체이탈 화법이다. “기술은 언제나 사람에게 지고 맙니다”라는 말 역시 사실 왜곡이다. 현실은 그 반대다.
유시민이 주장하는 사회투자론은 신자유주의 시대에 필요한 경쟁력 있는 인적 자원 양성을 위한 복지 지출을 핵심으로 한다. 국민은 물론이고 정부의 정책까지 모두 경제적 이익에 복속시키는 논리다. 사회투자론의 목적은 국민의 존엄성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 뒤에 있는 자본-국가의 경제적 이득을 도모하는 데 있다. 결국 사회투자정책은 국민을 국가의 채무노예로 만든다. 그것도 국민의 세금으로, 복지의 이름으로 국민을 채무자로 만든다. 또 사회투자론은 투자 이념에 맞지 않는 복지는 제거하고 생산성에 큰 도움을 주지 않는 빈곤층 성인에 대한 정부 지출을 줄인다. 그 결과 광범위한 ‘탈복지화’를 유발한다. 유시민은 왜 사회투자정책이 인간다운 생활을 구현하기 위해서 ‘훨씬 적극적으로 건설적인 정책’이라고 말한 것일까?
기업 인문학이 지배하는 지옥 혹은 감옥
기업 인문학은 인간의 의식을 통제하고 국가-자본에 복무하게 한다. 인간과 사회를 통치하려는 전략이다. 그래서 무기력한 인간과 자본 파시즘의 도래를 예견한다. 지금은 대기업과 초국적 자본이 지배하는 신자유주의 시대다. 박애 자본주의, 거버넌스, 빅 히스토리, 빅데이터, 제4차 산업혁명 등이 모두 신자유주의 안착에 복무한다. 기업 인문학은 기업 운영의 원칙이 되는 경쟁력, 경제성, 효율성 등을 강조하면서 사회를 지옥과 같은 기업사회로 만들고 있다. IT 분야가 인문학을 중시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무엇보다 IT 분야는 유저들에 대한 데이터를 광범위하게 수집하는 통로이면서, 한편으로는 국가-자본이 생산한 지식과 정보, 감수성을 대중에게 유포·내면화할 수 있는 통로이기도 하다. 더구나 빅데이터는 소수의 글로벌 ICT 기업에 축적된다. 인간의 의식을 통제하는 통로가 될 수 있다는 말이다.
대학도 ‘기업의 사내 훈련원’으로 전락했다. 이것은 대학이 기업의 하청 업무를 보고 있는 꼴이다. 이러한 흐름들은 ‘대학의 민영화’나 ‘대학 주식회사’라는 말로도 부족하다. 왜냐하면 이 말들은 여전히 ‘학문 탐구의 전당’이라는 대학의 위상을 실체로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대학의 민영화’는 대학의 실체적 위상이 존재하고, 거기에 민영화의 요소들이 침투해 들어오는 것, ‘대학 주식회사’ 역시 대학의 실체적 위상이 있고 거기에 수익을 추구하는 기업 마인드가 점령해 들어오는 것을 상상케 한다. 그러나 현실은 대학 자체의 소멸이다.
인문학이 우민화의 도구로 이용될 수 있을까? 그럴 수 있다. 기업 인문학이 그것을 잘 보여준다. 우민화는 두 방향으로 진행된다. 하나는 우리가 처한 현실에 대해 잘 모르게 하는 것이다. 또 하나는 대중을 친기업적 사고로 무장시키는 것이다. 이 두 가지를 관철시키기 위한 도구로 자본은 인문학을 이용한다. 현재 유행하는 인문학은 ‘정통 인문학’이 아니라, 자본권력이 추동한 ‘기업 인문학’이다. 인문학이 특정 프레임, 즉 ‘인문학도 이윤 창출에 복무해야 한다’ 같은 자본의 명령에 포박되면, 그 폐해는 인문학자나 인문학도에 그치지 않는다. 기업 인문학은 중세의 스콜라철학이 철학을 종교의 하위 개념으로 전락시킨 것처럼, 인류의 지적 발전을 정체 혹은 퇴보시킬 것이다.
작가 소개
저 : 박민영
인문, 사회, 문화 관련 글을 쓰고 있는 작가이자 문화평론가. 인간과 세계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을 주제로 하는 책에 관심이 많으며, 글로써 자신과 세계를 개선할 수 있다는 확신을 마음에 품고 꾸준히 글을 쓰는 작가다. 해마다 100권이 넘는 책을 읽어 온 경험과 지식을 바탕으로, 청소년 및 일반인을 위한 사회 비평, 문화 비평, 에세이 등 여러 장르의 글을 쓰고 있다.
저서로는 『그러니까 이게, 사회라고요?』, 『인문 내공』, 『책 읽는 책』, 『인문학, 세상을 읽다』, 『이즘』, 『즐거움의 가치사전』, 『논어는 진보다』, 『공자 속의 붓다, 붓다 속의 공자』 등이 있다. 현재 월간 《인물과 사상》에 문화 비평을 쓰고, 한겨레문화센터에서 인문학 관련 강의를 하고 있다. 블로그 ‘깊은샘물의 서정 카페’(http://blog.naver.com/fwriters)를 운영하며 독자들과 만나고 있다.
목 차
프롤로그 _ 그리고 기업 인문학이 있었다_ 5
제1장 _ 정통 인문학 죽이기
학제 개편으로 인문학 파괴하기_ 23
경제적으로 학대당하는 인문학자들_ 39
정부 지원이라는 이름의 인문학 죽이기_ 53
제2장 _ 기업 인문학의 탄생
기업 인문학은 학문 융합을 필요로 한다_ 69
아이폰 인문학의 탄생_ 83
좌파 지식인의 타협과 투항_ 97
의식 조작 수단으로서의 기업 인문학_ 111
인문적 상상력이 인문학을 살린다고?_ 125
제3장 _ 기업 인문학의 소실 매개자
클레멘트 인문학은 정말 착한 인문학이었을까?_ 141
평생학습, 기업 주도의 국민교육_ 155
사회인문학, 투쟁과 투항 사이_ 169
제4장 _ 기업 인문학의 경제 담론
사회적 시장경제, 자본의 방패이자 창_ 185
사회투자론, 유시민의 위험한 신념_ 199
제5장 _ 기업 인문학의 정치 담론
박애 자본주의, 경영이 된 자선_ 215
기업의 사회적 책임, 자본 파시즘의 징후_ 229
거버넌스, 선거 없는 정치권력 잠식_ 242
사회적 자본, 사회적 관계를 자본화하다_ 256
자본주의4.0, 자본의 영원회귀_ 269
제6장 _ 기업 인문학의 과학 담론
빌 게이츠는 왜 빅 히스토리를 지원할까?_ 285
빅 히스토리, 글로벌 자본의 이데올로기_ 299
제4차 산업혁명론의 허상_ 313
제4차 산업혁명론의 기만과 덫_ 328
에필로그 _ 기업사회, 지옥으로 변해가는 세계_ 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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