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미국의 가장 영향력 있는 정치사상가 마크 릴라 교수가
진보 지지자들에게 보내는 긴급 메시지
현실 정치의 커다란 실패는 때로 훌륭한 정치적 통찰을 불러온다. 마키아벨리의 군주론과 막스 베버의 소명으로서의 정치, 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론. 이 고전들은 저자들이 정치 참여에 실패하고 쓴 저작이다. 최근에 나온 조지 레이코프의 코끼리는 생각하지마는 2004년 미국 민주당의 대선 패배 이후에 쓰인 문제작이다. 마크 릴라의 더 나은 진보를 상상하라 역시 2016년 대선에서 미국 민주당이 트럼프에게 믿기지 않는 참패를 당한 이후 나온 가장 탁월한 성찰이다.
마크 릴라는 2016년 11월 뉴욕타임스에 힐러리의 패배를 분석한 ‘정체성 정치의 종말’이라는 칼럼을 기고하여 큰 반향을 일으켰다. 정체성 정치를 비판한 마크 릴라의 글은 프린스턴대 정치학 교수 앤 메리 슬로터의 말대로 진보 진영의 “많은 사람들을 화나게” 했지만, 분열되는 진보의 위기를 극복하고 미래 비전을 계획하는 데 “매우 유익”한 메시지를 남겼다. 그 칼럼을 토대로 2017년에 출간된 더 나은 진보를 상상하라는 미국의 진보가 어떻게 위기를 타개할 수 있을지 처방전을 제시하고 있다. 마크 릴라의 진단은 비단 미국뿐 아니라 페미니즘, LGBT 등 정체성 정치 이슈가 점차 부상하고 있는 우리나라의 정치 담론에도 중대한 시사점을 제공한다.
이런 진보는 사양합니다: 정체성 정치의 함정
마크 릴라는 진보가 패배한 주된 원인을 분석하기 위해 루스벨트부터 레이건까지 20세기 미국 정치 체제의 변화를 살핀다. 그는 미국 정치사를 뉴딜 시대부터 1970년대까지의 루스벨트 통치 체제(dispensations), 1980년대 이후의 레이건 통치 체제로 구분한다. 루스벨트 체제의 민주당은 시민이 위험과 곤경으로부터 서로를 보호하고 기본권의 부정에 맞서는 활동에 함께 참여하는 나라를 그렸고, “연대, 기회, 공적 의무”를 표어로 내세운 국가적 비전을 제시했다. 그러나 60년대 후반 유럽의 신좌파 운동에 영향을 받은 미국 진보세력은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이라는 슬로건을 앞세운 정체성 정치를 내세우며 점차 공동체의 가치에서 멀어졌다.
인종, 성별, 성적지향 등 개인의 특정한 정체성을 바탕으로 정치 세력을 구성해 그들의 이익과 관점을 대변하는 정체성 정치는 소외받는 흑인, 여성, 성소수자의 권리를 옹호했다. 원래는 민중 계층을 위한 것이었던 정체성 정치는 1980년대 즈음에 점점 더 협소하고 배타적으로 자신을 정의하는 사이비정치에 자리를 내주었다. 그 결과 전통적 진보에서 중추 역할을 하던 남성 노동자 계급이 이탈하게 된다. 이즈음 향후 미국 정치를 40년간 지배할 레이건 체제가 등장한다. 레이건은 국가의 속박에서 벗어난 가정과 소규모 공동체, 기업이 번창하는 더 개인주의적인 미국을 그렸다. “작은 정부, 낮은 세금, 자립적 개인주의”로 요약되는 레이건의 비전은 미국의 지배 이데올로기가 되었고, 이후 클린턴, 오바마로 민주당이 집권에 성공했지만, 진보 진영은 레이건의 반정치적 비전을 넘어서는 경쟁력 있는 비전을 제시하지 못했다.
소수자를 돕는 유일한 길을 막는 소수파 진보의 사이비정치
레이건의 이념이 지배하는 동안 민주당은 그에 상응하는 확신을 주는 비전을 제시하기는커녕, 오히려 ‘너’와 ‘나’의 차이를 강조하면서 ‘더 작은’ 진보를 추구하는 정체성 정치에 몰두해왔다. 다수파를 만들어서 선거 승리로 권력을 잡으려는 노력은 지극히 민주주의적인 사고인데도 정체성 정치는 다수파 진보가 아닌 소수파 진보를 지향한다. 소수파 진보는 자신이 타인보다 더 진보적이라는 차별성을 적극적으로 추구하며, 그들에게 진보란 세상을 바꾸기 위한 수단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자기만족을 위한 수단이다. 이들은 선거에서 승리하고 정권을 장악하고 법령을 바꾸어 현실적 변화를 꾀하는 정당 정치를 불신하고, 대학의 워크숍과 세미나, 항의 시위와 퍼포먼스 같은 운동 정치에 몰두한다는 점에서 사이비정치라고 마크 릴라는 비판한다. 소수자의 권익을 진정으로 향상시키는 유일한 길은 선거에 승리해서 지방정부와 연방정부에서 권력을 행사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선 끈기 있게 선거운동을 벌이고 법안을 만들고 협상을 통해 법안을 통과시키고 관료들을 감독하면서 법이 집행되는지 감시하는 제도권 정치가들과 공직자들을 필요로 한다. 하지만, 클린턴과 오바마가 대통령으로 있던 민주당 집권 시절에도 사람들의 삶에 직접 영향을 행사하는 지방정부에서 연방 법원까지 현실 정치 영역은 공화당에게 빼앗겼다. 극우적 세력이 점령한 일부 지방정부는 연방법과 헌법적 보호장치조차 사문화시키고 말았다. 결국 이런 정치 혐오적인 소수파 진보로는 진보의 가치와 신념을 사회에서 실현하지 못한다.
트럼프가 준 기회: 개인주의 시대 진보가 나아갈 길
마크 릴라는 정체성 정치를 비판하지만, 억압 받는 소수자 집단을 대변하는 일 자체를 문제 삼는 것은 아니다. 정체성 정치가 공동선 추구를 제쳐두고 민중을 편 가르고 자극하여 진보진영을 고립시킨다는 데서 문제를 제기한 것이다. 정체성 정치가 트럼프의 당선을 불러왔지만 마크 릴라는 미래를 낙관한다. 그의 견해에 따르면 트럼프의 등장은 레이건 체제의 종말을 의미한다. 레이건의 비전이 사라지자 공화당은 트럼프에게 안방을 허용했고, 트럼프는 권력 공백 상태에서의 과도기 대통령인 셈이다. 트럼프로 인해 공화당이 수십 년간 구축한 시스템은 엉망으로 흐트러졌고 반면 트럼프에 자극 받은 진보주의자들은 비축된 에너지를 방출하고 있다. 그는 이 기회를 긍정적인 변화로 전환시켜 ‘더 나은 진보‘로 나아간다면 진보적인 미국이 탄생할 것으로 생각한다. 마크 릴라는 정체성 정치가 등한시했던 시스템 안에 자리 잡은 민주 정치의 요구와 제약들을 다시 익히고, 모두가 공유했던 ‘시민의 지위(citizenship)’를 바탕으로 새로운 비전을 개발할 것을 제언한다. 그것은 진정으로 진보적 가치관에서 유래한 것이지만 모든 시민이 시민으로서 호응하는 미국의 비전이다. 그리고 그런 비전의 개발은 무엇보다도 정체성의 시대를 과거로 만드는 것을 의미한다.
지금 우리가 마크 릴라의 책을 읽어야 하는 이유
박근혜 정권의 국정농단 사태로 붕괴된 보수진영이 갈피를 못 잡는 한국의 정치 상황에서는 진보의 실패가 먼 나라의 이야기처럼 들린다. 하지만 마크 릴라의 메시지는 최근 페미니즘, LGBT(성소수자) 등의 정체성 정치의 의제들이 점차 부상하고 있는 한국 사회에도 중요한 시사점을 던진다. 가뜩이나 대화와 타협에 미숙한 우리 사회 진보 세력의 어깨에 극단적 정체정 정치의 짐 하나를 더 짊어지게 된 상황은 진보의 미래에 커다란 도전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진보 진영이 집권을 이어나가기 위해서는 에드워드 케네디 상원의원의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노동에 관심을 기울이는 정당과 노동당은 다르다는 점을 이해해야 한다. 여성에 관심을 기울이는 정당과 여성당도 다르다. 우리는 소수 정당이 되지 않으면서도 소수자들에 관심을 기울이는 정당일 수 있으며 그런 정당이어야 한다. 우리는 우선 시민이다.”
작가 소개
저 : 마크 릴라
Mark Lilla
미국 컬럼비아 대학교 인문학 교수이며, 서구 사상사, 특히 정치와 종교의 관계, 근대 서구 계몽주의에 대해 주로 연구하는 세계적인 정치철학자이다. 1978년 경제학과 정치학 전공으로 미시건 대학교를 졸업하고, 1980년 하버드 대학교 존 F. 케네디 공공정책 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이후 계간 《공공정책The Public Interest》의 편집자로 활동하다 1985년 하버드 대학교에 돌아와 1990년에 《비코에 붙이는 서문: 회의론, 정치학, 신정론》으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 논문으로 한 해에 발표된 박사학위 논문 중 가장 뛰어난 논문에 주는 미국 정치학회의 레오 스트라우스 상을 받았다.
시카고 대학교 사회사상위원회 교수를 지냈으며, 《유럽정치학European Journal of Political Theory》의 편집위원으로 있으면서 《뉴욕 타임스》 《뉴욕 리뷰 오브 북스》 등에 정기적으로 글을 기고하고 있다. 이스라엘에서 바이츠만 추모 강연을 하기도 했고,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칼라일 강연을 진행하기도 했다. 저서로는 《분별 없는 열정》《비코: 반근대인의 형성》《이사야 벌린의 유산》 등이 있다. 이 책 《사산된 신》은 2003년 옥스퍼드 대학교가 주최하는 칼라일 강연에서 발표한 내용을 바탕으로 쓴 책이며, 2007년 《뉴욕 타임스》와 《퍼블리셔스 위클리》가 “올해의 책”으로 각각 선정했다.
역 : 전대호
경기도 수원에서 태어나 서울대학교 물리학과와 동 대학원 철학과에서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독일 쾰른 대학교에서 철학을 공부했다. 1993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에 당선되어 등단했으며, 현재는 과학 및 철학 분야의 전문번역가로 활동 중이다. 저서로는『가끔 중세를 꿈꾼다』『성찰』등이 있으며, 번역서로는『로지코믹스』『위대한 설계』『스티븐 호킹의 청소년을 위한 시간의 역사』『기억을 찾아서』『생명이란 무엇인가』『수학의 언어』『산을 오른 조개껍질』『아인슈타인의 베일』『푸앵카레의 추측』『초월적 관념론 체계』『시인을 위한 양자물리학』『우주는 수학이다』 『뇌의 가장 깊숙한 곳』『숫자의 문화사』『데미안』『물리학 시트콤』『세상이 가둔 천재 페렐만』『질문?!』 『물리와 세상』『나, 스티븐 호킹의 역사』등이 있다.
목 차
제1장 반정치
맑스가 남긴 한마디
기본입자들
해돋이
해넘이
제2장 사이비정치
정체성의 형태들
우리에서 나로
사이비정치의 기초
맑스가 남긴 또 다른 한마디
제3장 정치
리셋
시위 참가자와 시장
민주주의에서 민중과 민주당에서 민중
시민으로 하나 되기
진보주의자들의 교육
감사의 말
해설: 트럼프 패러독스_유창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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