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매체가 우리의 상황을 결정한다”
총체적 인간이라는 개념을 완전히 해체하는 매체유물론
수많은 “키틀러리안”을 양산해낸 문제의 책!
“디지털 시대의 데리다” “매체 이론의 푸코”라 불리며 매체에 대한 독창적인 패러다임을 제시한 독일 매체이론가 프리드리히 키틀러의 대표작 『축음기, 영화, 타자기』가 출간되었다. 이 책에서 키틀러는 최초의 아날로그 기술 매체들의 태동기였던 1900년대를 집중적으로 분석하며 새로운 기술 매체들이 가져온 혁명적 변화를 서술한다. 축음기, 영화, 타자기로 대표되는 기술 매체들은 단지 경이로운 발명품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문자가 독점하던 시대의 종말과 새로운 기록 체계의 개막을 알리는 것이었다. 이와 함께 총체적 인간이라는 관념도 해체되기 시작했다. 더없이 전복적인 방식으로 역사를 매체사로 다시 기술한 이 책은, 여러 언어로 번역되어 키틀러에게 세계적인 명성을 안겨주었다. 비교적 쉽게 쓰여져, 난해하기로 소문난 키틀러의 매체론을 대중적으로 알리는 데 기여하기도 했다.
문자 독점의 종말과 새로운 기록 체계의 등장
키틀러는 매체를 서술할 때 “문자”를 기준으로 그 전후를 대비시키는 다른 매체이론가들과는 달리 “문자”를 최초의 매체로 상정한다. 키틀러는 매체 개념을 “정보의 저장과 전달, 재현의 방식”으로 정의하는데, 따라서 저장이 불가능한, 문자 이전의 인간의 “언어” 혹은 “음성”은 매체에서 제외된다. 키틀러가 자주 사용하는 “문자의 독점”이라는 말은 이러한 맥락에 바탕을 둔 것이다. 문자 독점 체제가 가장 꽃을 피운 시기는 키틀러가 “기록 체계 1800”이라 부르는 1800년대 전후의 낭만주의 문학 시대였다. 하지만 문자의 독점 체계는 20세기 초 아날로그 기술 매체의 등장으로 순식간에 와해된다.
키틀러는 “매체가 우리의 상황을 결정한다”는 문장으로 책을 시작함으로써, 그의 관심이 물질적 토대로서의 매체이며, 매체기술의 변화와 발전 과정에서 주체는 이제 인간이 아닌 기술 그 자체임을 분명히 한다. “기술 매체가 인간 중추신경계의 외화”라는 키틀러의 진단은 마셜 매클루언과 공통된 것이지만, 매클루언이 인간 중심적으로 매체를 바라보는 데 반해, 키틀러는 이를 탈인간화의 근거로 삼고 있다는 점에서 매클루언과 구분된다. 그는 역사 전체를 “정보의 저장, 전달, 처리 과정”으로 사유한다. 인간이 매체를 창조하고 이용한다는 환상은 여지없이 무너진다. 키틀러 이론의 이러한 과격성은 열렬한 “키틀러리안”을 양산해내는 동시에, 디스토피아적인 “키틀러 제국”에 대한 강한 반감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축음기, 영화, 타자기: 새로운 기술 매체의 트리아데
키틀러는 문자의 독점을 무너뜨린 기술 매체들, 즉 축음기, 영화, 타자기가 등장함으로써, 이전까지 문자를 통해서만 저장할 수 있었던 음향과 광학, 텍스트 정보를 최초로 분리시켜 저장할 수 있게 되었다고 말한다. 영화는 이미지 정보를, 축음기는 청각 정보를, 타자기는 문자 정보를 저장하고 처리한다. 새로운 역사를 진행시킨 것은 다름 아닌 “데이터 프로세싱 기술”이었다.
축음기의 발명자 에디슨은 자신의 발명품에 “안녕Hello”이라는 최초의 기록을 남긴다. 그에 따르면, “말이 영원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영원하게 된 것은 말뿐이 아니었다. 이전까지 기록될 수 없었던 온갖 소음들, 우리가 소리로 인식조차 하지 못하던 무의미한 소리들을 그 자체로 저장하고 재현할 수 있게 되었다. 그동안 인간의 의식이라는 필터를 통과한 소리만이 문자나 악보 등을 통해 기표로 남겨질 자격을 얻었다면, 축음기의 등장으로 청각 데이터라는 무의식의 대륙이 인류의 역사에 등장하게 된다.
뒤이어 영화가 등장한다. 지금까지 인식의 대상이 되지 못하던 실재의 이미지를 새롭게 드러내줄 것 같던 영화는 축음기와 다른 길을 걷는다. 영화는 1초에 24번 스틸컷을 제시하면서 여러 착시 효과를 통해 그것이 실재처럼 보이도록 “조작”한다. 우리의 눈은 환영 속에서 실제로는 움직이지 않고 분절되어 있는 컷들에 연속성을 부여한다. 영화는 실재적인 것을 상상적인 것으로 대체하는 기제가 된다. 과거의 독자들이 문학작품을 읽으며 영혼 깊숙한 곳에서 상영하던 내면의 영상은 이제 기술적 트릭을 통해 스크린 위에서 실현된다.
마지막으로 타자기가 등장함으로써 문자의 기록 방식은 커다란 전환을 맞이하게 된다. 우선 글 쓰는 이의 성별이 뒤바뀐다. 여성 타자수의 등장과 함께 거의 대부분 남성 작가로만 이루어져 있던 문자의 세계가 전복된다. 또한 개인의 내면적 특성이 외면화되는 개성적인 필사 방식과는 달리 타자기는 모든 것이 규격화된 기록 방식을 제시한다. 분절된 알파벳을 불연속적으로 기입하는 타자기로 글을 쓰면서 개인은 익명화된 존재로 해체되고, 담론은 부차적인 것이 된다.
키틀러의 기술 결정론
키틀러는 아날로그 기술 매체의 가장 큰 특징으로 정보의 조작 가능성을 지적한다. 아날로그 매체가 열어젖힌 조작의 가능성은 디지털 매체에 와서 완성되는데, 아날로그 매체 간에는 호환이 어려웠던 반면, 컴퓨터에서는 모든 것이 호환 가능해지며 각각의 매체를 구분해주던 최소한의 봉합선조차 사라진 것이다. 인간 역시 중앙신경 체계로 분화되어 연구되기 시작하면서, 굳건했던 “총체적 인간”이라는 개념은 더 이상 작동하지 않게 된다. 인간은 이러한 상황을 통제하는 것은 고사하고, 상황 인식조차 불가능해진다.
키틀러는 니체, 카프카, 릴케, 브램 스토커, 코난 도일 같은 문학적 기록뿐 아니라, 비틀즈, 지미 헨드릭스, 핑크 플로이드의 노랫말까지 20세기 전후의 수많은 텍스트들을 그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증인으로 호출해낸다. 아이러니하게도, “문자 매체를 증인 삼아 문자 매체의 죽음을 언도”하는 것이다.
이 책의 번역은 1990년대 중반에서 2000년대 중반까지 지속된 소위 “키틀러 시대”에 키틀러가 가르치던 훔볼트 대학에서 공부했던 유현주, 김남시 교수가 함께 맡았다. 역자들은 상이한 담론들을 과감하게 접속시키며 이야기를 펼쳐나가는 키틀러의 복잡한 논의뿐 아니라, 다양한 조어와 중의적이고 수수께끼 같은 표현들, 그리고 그 특유의 아이러니까지 악명 높은 “키틀러 독일어”의 뉘앙스를 가능한 충실히 전달하려고 노력했다.
특히 키틀러에게 직접 수학한 유현주 교수는 「해제」에서 키틀러 매체 이론의 핵심을 정리하고, “매체 결정론” “반휴머니즘” “젠더” 문제 등 키틀러와 관련된 주요 비판적 쟁점들도 소개한다. 또한 키틀러가 이러한 비판에 어떠한 태도를 취했는지, 그의 강의실 풍경은 어떠했는지에 대해서도 흥미로운 이야기를 전해준다. 이 책을 통해 키틀러 이론의 정수를 경험하고, 더 나아가 그의 실험적 사유가 피어났던 베를린 소피엔슈트라세 22번가에 울려 펴졌던 다양한 “소음들”까지 느껴볼 수 있는 기회가 되기를 바란다.
작가 소개
지은이 : 프리드리히 키틀러
1943년 독일 동부 작센 주 로흘리츠에서 태어나, 1958년 서독 국경지역 라르로 이주한다. 1963년 프라이부르크 대학에 입학해 독일어문학, 로망어문헌학, 철학을 공부하며 하이데거, 니체와 더불어 라캉, 데리다, 푸코 등 동시대 프랑스 이론을 흡수한다. 1976 년 스위스 작가 콘라트 페르디난트 마이어에 관한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는다. 1982 년에 독일문학사 전공 교수자격취득 논문으로 독일문학사를 정보시스템의 변천이라는 관점에서 재구성한 『기록시스템 1800·1900』을 제출하여 파란을 일으킨다. 2년 가까이 심사가 계속되고 심사위원이 열세 명으로 늘어난 끝에 논문이 통과된다. 그사이 키틀러는 캘리포니아 대학 버클리 캠퍼스와 스탠퍼드 대학 등의 방문교수 자격으로 미국에 머물며, 당시 급성장하던 컴퓨터 문화를 접하고 군산복합체와 미디어 기술의 역사에 몰두하기 시작한다. 1986년에 미디어 기술의 실증적 역사에 대한 추가 연구를 바탕으로 『기록시스템 1800·1900』의 1900년경 파트를 확대·재구성한 『축음기 영화 타자기』를 출간하면서, 독창적인 미디어학자로 입지를 넓힌다.
1987년에 독일 보훔 대학 현대독일문학 교수로 부임한 그는 20세기 미국에서 형성된 새로운 기술의 전개 방향에 주목하는 한편, 정보이론의 관점에서 유럽 문명의 밤과 어둠, 그 한계와 전망에 대한 성찰을 지속해나간다. 1990년에 『기록시스템 1800·1900』의 영역판이 출간되면서 국제적으로 명성을 얻었으며, 1993년 베를린 훔볼트 대학 매체사 및 미학 교수로 취임한다. 1999년 『축음기 영화 타자기』의 영역판이 출간되면서 “미디어가 우리의 상황을 결정한다”라는 기술결정론적 테제가 키틀러의 유명세를 견인하게 된다. 하지만 이 무렵 키틀러는 이미 기술 자체에 열중했던 시기를 지나 유럽 문명의 과거로부터 평행우주적 가능성을 모색하기 시작한다. 그 결과, 2005년과 2009년에 고대 그리스를 다시 시작점으로 두고 유럽 문명의 비전을 새롭게 그리는 장기 프로젝트의 첫 성과로 『음악과 수학 I. 헬라스 1: 아프로디테』와 『음악과 수학 I. 헬라스 1: 에로스』를 발표한다. 그러나 전체 프로젝트는 2011년 키틀러가 지병으로 세상을 떠나면서 중단된다.
키틀러가 생전에 펴낸 그 밖의 주요 저서로는 『시인, 어머니, 어린이』(1991), 『 드라큘라의 유산. 기술적 글쓰기』(1993), 『헤벨의 상상력. 어두운 자연』(1999), 『문화학의 문화사』(2000), 『광학적 미디어』(2001), 『그리스로부터』(2001), 『잡음과 계시 사이. 목소리의 문화사와 매체사』(2002), 『불멸하는 것. 부고, 기억, 유령의 말』(2004) 등이 있다. 그의 원고들과 자료들은 마르바흐 독일어문학 문서고에 보관되어 있다.
옮긴이 : 유현주
연세대학교 독문학과와 같은 과 대학원을 졸업한 뒤, 독일 훔볼트 대학 독문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연세대학교 독문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지은 책으로 『프리드리히 키틀러』(공저) 『텍스트, 하이퍼텍스트, 하이퍼미디어』 『하이퍼텍스트 : 디지털 미학의 키워드』 등이, 옮긴 책으로 『보이지 않는 것의 경제』 『예술·매개·미학』(공역) 등이 있다.
옮긴이 : 김남시
서울대학교 미학과와 같은 과 대학원을 졸업한 뒤, 독일 훔볼트 대학 문화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이화여자대학교 조형예술대학 교수로 재직 중이다.
지은 책으로 『프리드리히 키틀러』(공저) 『광기, 예술, 글쓰기』 『본다는 것』 등이, 옮긴 책으로 『새로움에 대하여』 『권력이란 무엇인가』 『모스크바 일기』 『한 신경병자의 회상록』 등이 있다.
목 차
머리말
서문
케이블화 | 매체연합 체계 | 축음기와 영화 | 타자기 | 컴퓨터화
축음기
발명의 역사 | 영혼의 자연과학 | 장-마리 귀요, 「기억과 포노그래프」(1880) | 기계의 기억과 사운드 조작 | 신경 궤도로서의 소리 홈 | 라이너 마리아 릴케, 「근원-소음」(1919) | 실재계 내의 소음 | 모리스 르나르, 「한 남자와 조가비」(1907) | 그라모폰과 전화기 | 살로모 프리들랜더, 「괴테가 축음기에 대고 말하다」(1916) | 사체 파편과 인공 언어 | 서정시에서 유행가로 | 음향적 흔적보존 | 정신분석과 포노그래프 | 세계대전의 사운드 | 록 음악, 군대 장비의 남용
영화
역사의 편집으로서의 영화 | 눈의 착각과 자동 무기 | 영화의 제1차 세계대전과 윙거 소위 | 살로모 프리들랜더, 「신기루 기계」(1920년경) | 정신병원과 정신분석에서의 영화 | 도플갱어: 영화화의 영화화 | 뮌스터베르크의 영화-정신공학 | 구스타프 마이링크, 『골렘』 | 라캉의 트릭 영화 | 매체연합 접속: 광학, 음향학, 기계적 글쓰기 | 리하르트 A. 베어만, 『서정시와 타자기』(1913)
타자기
남성의 손에서 여성 기계로 | 마르틴 하이데거, 「손과 타자기에 대하여」(1942~43) | 니체의 볼 타자기와 그의 여비서들 | 책상에 앉은 현대의 남녀 파트너 | 카를 슈미트, 「부리분켄, 역사철학 시론」(1918) | 참호/전격전/별-데이터/주소/명령 | 에니그마를 잡은 콜로서스
주석
참고문헌
찾아보기
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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