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 왜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는 공정 담론의 전쟁터가 되었는가?
- 공정의 시대에 대한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진단과 대안
근래 들어 평등은 첨예한 정치적 사안이 되었다. 성평등 혹은 교육과 취업의 기회균등 같은 문제를 논의하려고 하면, 도처에서 ‘불공정 논란’이 벌어지고 각자의 이해관계를 둘러싼 심각한 사회 갈등이 시작된다. 우리 사회에서 공정과 평등은 분명 민주주의 사회의 기본 원칙이지만, 때로는 남들의 이른바 ‘무임승차’를 저지하는 명분이자 소수자를 공격하는 무기로 활용되기도 한다. 이렇듯 평등은 오늘날 두 얼굴을 가지고 있다.
이 책 『토크빌과 평등의 역설』(베스텐트 한국판 7호)은 어째서 정치적 평등을 달성한 현대 민주주의 사회에서 공정을 둘러싼 싸움이 벌어지게 되는지 그 근본 이유를 밝힌다. 19세기 프랑스 정치사상가 알렉시 드 토크빌은 민주적 평등 사회의 어두운 면모를 최초로 포착해낸 바 있으며, 이 책의 저자들은 토크빌과의 심도 깊은 대화 속에서 현대 민주주의 사회가 빠져들기 쉬운 ‘평등의 덫’을 구체적으로 분석해낸다.
다수의 여론이 소수의 이성적 판단을 억압하는 ‘다수의 압제’ 현상,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을 아래로 끌어내리고자 하는 왜곡된 평등의 집착 등과 같은 민주 사회의 병리 현상들은 평등을 지향하는 민주주의가 오히려 혐오와 우울을 불러올 수도 있다는 역설을 보여준다. 이 책은 민주주의 사회의 평등 딜레마를 세밀히 관찰하고 낱낱이 해부할 뿐 아니라 그 대안을 모색할 수 있는 가능성도 함께 짚어보고 있다.
■ 평등의 두 얼굴을 해부하다
현대 민주주의 사회에서 평등은 단지 하나의 원칙일 뿐 아니라 우리 삶 속에 자리 잡은 정치적 감정이기도 하다. 사회 각층에서 불공정성을 두고 끊임없는 논란이 벌어지는 것은 역으로 우리가 그만큼 민주적 평등 원칙을 깊숙이 체화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특히 민주화 이후 민주주의 사회에서 태어난 새로운 밀레니얼 세대들이 더욱 빈번하게 ‘공정하지 않다’는 문제제기를 하는 것 또한 그러한 연유에서다.
그러나 토크빌에 따르면 평등에 대한 열망에는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더 강하고 높은 서열에 있는 사람들처럼 되고자 하는 열망이고, 다른 하나는 반대로 더 나은 위치에 있는 사람들을 자신이 있는 곳으로 끌어내리고자 하는 열망이다. 전자와 같은 열망은 우리 모두를 위로 끌어올리는 진보적 동력이 될 수 있지만, 반대로 후자와 같이 아래를 향한 균등화를 통해 차이를 만회하려는 감정은 선망 혹은 질투를 낳는다. 이 경우 평등에 대한 열망은 기계적 평등에 대한 강박적 집착으로 변질되고, 자신에게 불리한 방향으로 작용하는 모든 종류의 불평등에 대한 혐오와 우울로 귀결된다.
이 책 『토크빌과 평등의 역설』(베스텐트 한국판 7호)은 이와 같은 평등의 두 얼굴을 철저히 해부하고 있다. 특히 저자 가운데 한 사람인 미국학 교수 요하네스 뵐츠는 “평등 딜레마”를 다음과 같이 간명하게 제시한다.
“토크빌에 따르면 이것은 일종의 평등 딜레마이다. 조건의 평등이 가장 현저한 차이를 평평하게 만들기 때문에 사람들은 작은 차이를 더욱더 명확하게 인지하게 된다. 완벽한 평등이 도달될 수 없다면, 그와 동시에 가장 작은 차이에 대한 의식이 점점 더 갈수록 높아진다면, 아래를 향한 균등화는 평등에 대한 소망을 점점 더 부채질함으로써 끝없는 절망을 낳게 된다. 토크빌이 말하듯이 “평등이 크게 증가하면 할수록 그에 대한 소망은 더욱더 충족될 줄 모른다.”(135쪽)
이렇듯 모두가 평등하다는 조건은 사회적 연대의식과 협력이라는 바탕이 없다면 고립 속의 무한경쟁을 낳기 쉽다. 이로 인해 사람들은 아주 작은 차이들에 대한 첨예한 의식을 갖게 되어 우울감에 빠지며, 자신의 자리를 위협하는 소수자에 대한 혐오와 음모론으로까지 나아가게 된다. 이때 일부 사람들이 ‘공정’을 옹호하는 것은 평등 그 자체를 사랑해서가 아니라 자신에게 불리한 방향의 불평등을 막기 위해서일 뿐이다. 근래의 공정 담론이 언제나 선별적이며 자기중심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토크빌의 말처럼 “그들은 평등을 실제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그들에겐 평등을 내세우는 것 외에 달리 방도가 없을 뿐이다.”(133쪽)
■ 평등의 역설들은 어떻게 작동하는가?
이 책의 1부에서는 여섯 명의 학자들이 평등의 다양한 역설들을 상이한 관점에서 조명한다. 먼저 정치철학자 클로드 르포르는 「사유를 압박하는 위협」에서 토크빌의 생각을 이어받아 ‘여론’이 개인의 이성적 판단을 억압하고 생각의 자유를 위협하는 하나의 권력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다수의 대중이 독자적 판단력을 동등하게 갖고 있다는 믿음으로부터 여론의 동질성이 보증되고 이것이 다시 소수의 이성적 판단을 억압하는 메커니즘이 있다는 것이다. 르포르는 탈권위 시대의 평등이 이성 없이 관철될 때 생겨나는 여론에서 ‘다수의 압제’ 현상을 본다.
정치학자 유디트 모어만은 「총성 이후의 적막: 혁명적 해방의 역설들」에서 토크빌과 마이클 왈저가 해방의 역설에 대해 정의내린 것을 비교하여 읽으며 어떻게 혁명을 거스르는 신념들이 다름 아닌 혁명을 통해 힘을 얻을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여기서 모어만은 단순한 역설에 그치지 않고, 민주주의라는 형식이 어떻게 스스로 개선될 수 있는 역동적 여지를 가지고 있는지를 제시한다.
사회철학자 율리아네 레벤티슈와 펠릭스 트라우트만은 「평등의 일그러진 모습들: 토크빌 이후의 민주주의와 대중문화」에서 평등이라는 가치의 뒤틀린 이미지들이 민주주의를 위협하고 있다는 토크빌의 진단을 뒤쫓는다. 평등 원칙이 관철된 민주주의 사회에서 왜 이성적 숙고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가? 저자들이 토크빌 읽기를 통해 찾아낸 원인은 정치의 차원에서 관철된 평등의 원칙이 문화의 차원에서 창출한 과도한 동질성과 획일화에 있다.
정치이론가 나디아 어비네이티는 「민주주의적 개인주의」에서 민주주의의 평등이 실현되는 조건 아래서 어떻게 무관심이나 이기심 또는 외로움의 문제를 소홀히 하지 않고 개인의 자유를 생각할 수 있는지 묻는다. 토크빌은 이성이 작동하지 않는 개인주의가 결국 이기주의로 귀착하고 만다고 진단한다. 이러한 개인주의는 토크빌이 보기에 정치에 참여할 적극적 자유에는 무관심한, 온순하고 평준화에 순응하는, 결국 서로 고립되어 있을 뿐인 한 무리의 동질적 시민을 산출할 뿐이다. 저자는 토크빌의 판단에 동조하면서도 그 대안을 모색하고 있다.
미국학자 요하네스 뵐츠는 「선망의 전환들: 민주적 열정의 역설에 대하여」에서 부러움(선망, 질투)의 사회적 동학에 비추어 토크빌과 에머슨을 비교하여 읽으며 민주주의의 평등이 실현되는 조건 아래서 평등의 열정이 낳는 역설적 효과에 대해 이야기한다. 여기서 평등에 대한 열망이 점점 더 평등에 대한 집착이 되어가는 구조가 명쾌히 통찰된다. 결국 평등에의 열정과 불평등에 대한 혐오는 신분질서의 철폐 후 “모두에게 개방된 경쟁의 무한한 싸움터”에서 자신에게 불리한 방향의 불평등을 막기 위한 것으로 드러난다.
■ 한국문학과 ‘공통적인 것’
이 책의 2부에서는 오늘날 사회의 모순들을 세밀히 다루는 두 논문이 제시된다. 교육학자 마이케 조피아 바더는 「소아성애: 1970년대 학문적 담론에서 아동과 성」에서 어떻게 68혁명 이후의 학문적 담론이 소아성애를 정당화할 수 있었는지를 면밀히 추적하면서 새로운 관점에서 성의 역사를 그려내고 있다. 정치학자 윌리엄 슈어먼은 「디지털 불복종과 법」에서 어나니머스와 위키리크스, 에드워드 스노든의 내부고발 등과 같은 디지털 불법 행위들이 일방적인 관점에서 범죄로 간주되고 있음을 지적하면서, 이를 오히려 시민 불복종과 연결시킬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한국판 특집인 3부에서는 한국문학과 ‘공통적인 것’의 문제를 다루는 3편의 글을 모았다. 토크빌은 신자유주의적 세계 속의 시민들이 경쟁 속에서 타인에 대한 우위를 확보하고자 작은 차이에 집착하는 ‘평등’한 개인들일 것임을 이미 예견했지만, 공통적 감응에 의해 기존의 문학장 안팎이 직접 연결되면서 나타나는 것은 새로운 종류의 ‘평등’이다.
문학평론가 최진석은 「감응과 커먼즈」에서 현재 한국문학이 문학 ‘바깥’의 영역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쓰기의 범람을 경험하는 중이라면서, 문학비평이 문학을 공통적인 것으로 더욱 활성화하기 위해 감응의 ‘공-동성’(共-動性)을 만들어내는 데 기여해야 한다고 논한다. 김대현은 「커먼즈로서의 문학과 유지장치로써 문학장」에서 한국 문학장이 제도화되는 과정에서 독자를 배제해왔다면서, 작가와 비평이 구성한 위계로부터 해방된 독자가 문학의 공통성에 적극적으로 개입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김지윤은 「노동의 변화 속 공통성을 생산하는 ‘일×노동×문학’」에서 전통적 의미의 노동, 예술과 대립적으로 파악되는 노동을 넘어, ‘공통적인 것’을 생산하는 노동, 시장가치와 같은 외부의 척도를 뛰어넘는 자생적 원천을 공동으로 생산하는 노동의 형태를 독려하고 표현하는 새로운 노동문학의 가능성을 모색한다.
※ ‘베스텐트 한국판’ 시리즈 소개
현대사회 비판의 모든 것
프랑크푸르트학파 공식 저널 『베스텐트』
비판적 사회이론의 최전선을 읽는다
비판적 사회이론으로 20세기 사상운동의 한 축을 이끈 프랑크푸르트학파는 세계적으로 영향력 있는 비판적 철학자, 사회학자들의 모임이다. 막스 호르크하이머, 테오도어 아도르노, 발터 벤야민, 헤르베르트 마르쿠제, 에리히 프롬 같은 저명한 20세기 사상가들은 물론, 의사소통 이론으로 유명한 위르겐 하버마스와 인정투쟁 이론으로 새로운 사유 지평을 보여준 악셀 호네트 등의 뛰어난 동시대 학자들 역시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일원이다. 이러한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산실인 프랑크푸르트 사회연구소에서 펴내는 공식 저널이 바로 『베스텐트』(WestEnd)다.
『베스텐트』 시리즈는 1932년부터 간행된 『사회연구지』에서 시작하여 2004년부터 지금의 이름으로 연 2회 간행 체제를 확립하며 출간되고 있다. 잡지명인 ‘WestEnd’는 사회연구소가 속해 있는 지역 이름에서 따온 것으로 ‘서구의 종말’이라는 뜻을 갖고 있다. 이는 서구 자본주의 사회의 한계를 비판하고 그 대안을 모색하는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색깔을 뚜렷이 드러내는 것이다.
‘베스텐트 한국판’은 현대 사회의 가장 첨예한 이슈들에 대한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심도 깊은 사회철학적 논의들을 번역 소개하는 한편, 독자적 편집권을 갖고서 한국 연구자들의 글도 함께 싣고 있다. 세계적으로도 선례를 찾기 힘든 이 국제적 공동 작업은 현재 사회연구소 소장인 악셀 호네트가 말하듯이 프랑크푸르트학파의 “낡은 유럽적 뿌리에서 벗어나” 비판적 사회이론의 새로운 흐름을 만드는 계기로 평가받고 있다.
‘베스텐트 한국판’은 2012년부터 연간지로 발행되고 있다. 시리즈 첫 권인 『선물과 사회통합』(베스텐트 한국판 2012)에서 시작하여 『디지털 자아』(베스텐트 한국판 2013) 『현대의 규범적 역설』(베스텐트 한국판 2014) 『저항과 시위』(베스텐트 한국판 2015)를 출간하였으며, 이후 호수 체제로 바꾸어 『대탈주』(베스텐트 한국판 5호) 『호모포비아』(베스텐트 한국판 6호), 그리고 2020년에는 『토크빌과 평등의 역설』(베스텐트 한국판 7호)을 출간하였다.
작가 소개
2006년에 발족한 비판적 연구자들의 모임으로 철학자, 사회학자, 정신분석학자, 문화예술이론 연구자들이 참여하고 있다. 이 모임은 특히 현대사회 비판과 대안 모색을 위한 이론적 자원을 집대성하고 이를 토대로 한국사회 분석을 시도한다는 장기 프로젝트를 갖고 있다. 이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베스텐트 한국판을 기획했으며, 사회비판총서 등을 통해 비판적 사회이론을 소개하고 대중화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목 차
서문: 평등의 역설 - 어떤 평등이어야 하는가?
1부 / 토크빌과 평등의 역설들 (악셀 호네트 외)
사유를 압박하는 위협 (클로드 르포르)
총성 이후의 적막: 혁명적 해방의 역설들 (유디트 모어만)
평등의 일그러진 모습들: 토크빌 이후의 민주주의 (율리아네 레벤티슈 외)
민주주의적 개인주의 (나디아 어비네이티)
선망의 전환들: 민주적 열정의 역설에 대하여 (요하네스 뵐츠)
2부 / 오늘날 사회의 모순들
소아성애 (마이케 조피아 바더)
디지털 불복종과 법 (윌리엄 슈어먼)
3부 / 한국문학과 ‘공통적인 것’
서문: 한국문학과 ‘공통적인 것’, 그 현재와 전망 (이성혁)
감응과 커먼즈: 비평의 아방가르드를 위한 시론 (최진석)
커먼즈로서의 문학과 유지장치로써 문학장 (김대현)
노동의 변화 속 공통성을 생산하는 ‘일×노동×문학’ (김지윤)
베스텐트 독일판 차례
저역자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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