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부자가 존재하려면
더 많은 빈민이 필요하다는,
이 기이한 역설 혹은 운명에 관하여
이번 책은 자본의 왕국, 자본의 주권 아래서
노동자계급이 어떤 운명에 처하는지를 다룹니다.
노동자의 운명에 대한 비탄이 책 전체에 흐르지만,
그 슬픈 노래의 끝에는 늙은 군주인 자본의 운명에 대한 저주와
새로운 공화국에 대한 염원이 실려 있습니다.
칼을 들고 채찍을 휘두르는 자는
죽을 때까지 그것을 놓지 못한 채
도망치듯 죽음을 향해 뛰어가는 법입니다.
<북클럽『자본』>이란?
천년의상상 출판사는 철학자 고병권이 ‘독자들과 함께’ 마르크스의 『자본』을 읽어나가는 대형 프로젝트를 기획했습니다. 그간 ‘난공불락의 텍스트’로 여겨지며 수많은 독자들을 중도 포기하게 만든, 그래서 늘 미련이 남는 책 마르크스의 『자본』을 철학자 고병권의 오프라인 강의와 더불어 더 쉽게 더 제대로 읽어나가려는 기획입니다. 2018년 8월부터 2년여 동안 격월간으로 『자본』을 더 깊이 해석한 단행본이 먼저 출간되고, 책 출간 다음 달에는 오프라인 강의가 진행됩니다(이 강의는 온라인으로도 제공). 자세한 출간 일정은 책 속의 ‘일러두기’에 있습니다.
1. ‘자본’의 축적 원리가 곧 ‘프롤레타리아트’의 증식 원리
― 마르크스, ‘자본주의 축적의 일반법칙’을 밝히다
철학자 고병권과 함께하는 <북클럽『자본』> 시리즈의 열한 번째 책 『노동자의 운명』이 출간되었다. 이번 책에서는 카를 마르크스의 『자본』 I권 제7편 제23장 “자본주의적 축적의 일반법칙”을 읽는다. ‘자본의 생산’을 다루는 책인 『자본』 I권의 공부가 이제 그 막바지에 다다르고 있다.
『자본』은 기본적으로 ‘자본의 운동’을 논리적으로 펼치는 책이다. 이 운동에서는 노동조차 자본의 한 형태인 ‘가변자본’으로, 그리고 노동자는 노동력이라는 상품을 담은 용기로 취급된다. 그런데 『자본』에서 마르크스가 상품을 담은 그릇으로만 취급되던 노동자를 ‘목소리를 가진 존재’로 피력하는 장이 세 곳 있다. 하나는 ‘노동일’에 관한 장, 또 하나는 ‘기계제 대공업’을 말하는 장, 마지막으로 하나는 바로 여기 ‘자본축적의 일반법칙’을 다루는 제23장에서다. 이 장에서 마르크스는 노동자가 ‘자본’의 기획과 통치 아래서 실제로 어떻게 다루어지는지를 꼼꼼히 분석하는 동시에 그들의 목소리를 직접적으로 들려준다.
『자본』 제23장을 시작하며 마르크스는 자본의 유기적 구성 변화에 따른 자본축적의 일반법칙을 설명하는데, 저자 고병권에 따르면 그 내용은 곧 ‘노동자계급의 운명’과 직결된다. 자본의 유기적 구성은 자본관계(계급으로서 자본가와 노동자가 맺는 관계)를 표현하기 때문이다. 자본의 유기적 구성이란 ‘생산수단에 결합하는 노동력의 양’을 나타내며, 이 노동력의 양이란 ‘자본관계 안으로’ 들어가는 사람들의 양이다. 결국 자본의 유기적 구성은 생산수단의 양과 인간재료의 양적 비율, 다시 말해 자본의 착취 재료가 된 인간의 상대적 비율을 보여준다 하겠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어떤 방식으로 착취의 재료가 되는가. 얼마나 많은 사람이 어떤 방식으로 이런 운명에 빠져드는가. 이번 책이 다루는 주제다.
우선, 자본이 늘어나면 노동력도 늘어난다. 이를테면 17세기 말부터 18세기 전반기 영국의 자본은 엄청난 팽창 국면을 맞아 그야말로 ‘자본’의 시대가 열렸다. ‘카피탈리스트’ 곧 ‘자본가’라는 말도 이때 출현했으며, 축적의 지렛대 역할을 하는 각종 신용제도(은행과 채권, 주식 등)가 이때 만들어졌다. 그런데 이렇게 커진 자본이 생산에 투자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당장은 노동력 부족 현상이 나타난다. 그리하여 노동력이라는 상품(임금노동자)이 출현한다. 자본의 축적, 즉 자본의 확대재생산이 이루어지려면 노동력의 확대재생산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노동력의 재생산이 자본 재생산의 필수적 계기라는 이야기다. 이는 바꿔 말해, 자본의 확대재생산을 위해서는 자본관계에 예속되는 노동인구가 계속해서 늘어나야 한다는 의미가 된다. 결국 자본의 증식이란 프롤레타리아트의 증식과 같다.
그러나 나는 ‘프롤레타리아트의 증식’을 곧바로 ‘임금노동자의 증식’과 동일시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해 ‘프롤레타리아트’와 ‘임금노동자’ 사이에 약간의 간극을 두고 싶습니다(부록노트를 참조하세요). […] 여기서 나는, 노동력이라는 상품의 출현(노동력 판매자로서 노동자의 등장)에 대해 마르크스가 언급한 내용을 환기하고 싶습니다. 마르크스는 이때 ‘이중의 자유’에 대해 말했는데요. 한편으로 신분해방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했습니다. 자유로운 인격체로서 자기 능력을 상품으로 처분할 수 있어야 한다고요. 다른 한편으로는 다수의 인구가 생산수단을 상실(생산수단으로부터의 자유)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자기 몸뚱이, 다시 말해 자신의 생체 능력을 내다 팔지 않고서는 살길이 없어야 한다고요. - 본문 44쪽, <2장 “빈민의 노동은 부자의 보물광산”>에서
저자 고병권은 노동자의 ‘예속된’ 운명과 관련하여, 마르크스가 언급한 고대 로마의 ‘페쿨리움’(Peculium) 노예 사례를 소개한다. 페쿨리움이란 노예가 소유할 수 있도록 주인이 허락한 재산이다. 정확히 말하면 주인이 허락하는 한에서만 가질 수 있는 재산이다. 따라서 페쿨리움은 “노예해방의 징표가 아니라 노예의 징표”라는 것이다. 마르크스는 노동자에 대한 이른바 ‘처우 개선’도 크게 다를 바 없다고 보았으며, “더 나은 의복과 음식, 처우, 더 많은 페쿨리움이 노예의 예속과 착취를 폐지시키지 못하는 것처럼 임금노동자의 예속과 착취도 그렇다”라고 했다.
즉, 노동력이 아주 많이 필요한 상황이 온다 할지라도 ‘노동가격의 상승’에는 아주 분명한 천장이 있다. 자본주의체제 아래에서는 노동가격이 ‘자본주의 체계의 토대’를 건드릴 정도로 상승할 수 없다. ‘자본의 재생산’은 언제나 보장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적 축적은 본성상 자본관계의 재생산(확대재생산)을 위협할 정도로 노동착취도(잉여가치율)가 떨어지거나 노동가격이 오르는 것을 배제한다.
결국 자본주의 세계에서 ‘노동하는 인간’은 자기 운명의 독립변수가 아니라는 것이 저자의 통찰이다. 만약 물질적 부가 노동하는 인간의 발전을 위해 존재하는 사회라면 어땠을까? 상황은 아마도 정반대로 나아갔을 것이다. 인간이 자신의 필요와 욕구에 따라 어떤 것을 어떤 방식으로 얼마만큼 생산할지를, 자본에 맡기는 것이 아니라 제 스스로 결정할 테니까 말이다. 그러나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에서는 독립변수와 종속변수가 거꾸로 서 있다. 따라서 인간이 산출한 부, 즉 자본의 축적에 따라 인간의 운명이 규정된다.
2. 자본이 ‘축적’되는데도 왜 노동자는 ‘축출’되는가
― 맬서스 『인구론』의 오류와 ‘산업예비군’이 양산되는 이유
『자본』에는 눈앞의 이익만 쫓는 (인격화된) ‘자본’이 등장한다. 그리고 이들은 그 눈앞의 이익이 크고 선명해 보일수록 전체에 대해서는 맹목이 된다. 자신들의 행동으로 사회가 어디로 가게 되는지는 알지도 못하고 애초 관심도 없다. 자본주의의 법칙, 자본주의의 운명은 이런 맹목과 무책임 속에서 관철된다. 더욱이 자본은 자신의 필요에 따라 노동력을 늘리기도 하고 줄이기도 하는데, 이렇게 필요 노동력을 흡수하고 불필요한 노동력을 내뱉기 위해서는 하나의 전제가 필요하다. 저수지의 물처럼 노동인구가 충분히 고여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인구 대다수가 언제든 노동 가능한 집단 즉 노동인구로 이미 편성되어 있어야만 한다는 뜻이다. 노동인구의 규모가 취업인구(임금노동자) 규모보다 훨씬 커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처럼 노동인구가 취업인구보다 많은 상황을 마르크스는 상대적 과잉인구(과잉 노동인구)라는 말로 설명했다.
‘자본주의’는 이 같은 노동인구의 과잉 상태를 늘 필요로 하며, 마르크스의 통찰에 따르면 이 상황은 자본축적과 함께 만들어졌다. 자본주의는 자본의 기술적 구성을 고도화하는 쪽으로 발전하는데 이것이 ‘상대적 과잉인구’의 규모를 키운다는 것이다. 한편으로는 자본구성의 고도화에 따라 취업 상태에 있던 노동자를 축출하는 방식으로(노골적 추방), 다른 한편으로는 추가 노동력(신규 취업자)을 흡수하는 통로를 줄이는 방식으로(은밀한 추방) 그렇게 만든다.
자본구성의 이러한 고도화로 인해 추방되는 인구는 점점 더 많아진다. 노동인구 중 임금노동자보다 잉여노동자가 더 빨리 늘어나는 것이다. 일자리가 늘어나는 속도보다 인구가 늘어나는 속도가 더 빠르다. 그래서 사람들 눈에는 인구 증가 속도가 먹을 것의 증가 속도보다 더 빠른 것처럼 보인다. 그리하여 맬서스 같은 사람은 “키울 능력도 없는” 가난한 사람들이 아이를 너무 많이 낳았기 때문에 인구가 많아졌고 인구가 너무 많아졌기 때문에 식량이 부족해져 빈민 또한 늘어났다는 황당한 주장(『인구론』)을 펼치기도 했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맬서스가 지적한 ‘과잉인구’ 현상은 절대적인 게 아니라 상대적인 것, 즉 이 과잉인구는 상대적 과잉인구임을 지적한다. 저자의 부연 설명에 따르면, 가난한 노동자들은 맬서스가 말한 것처럼 노동력의 ‘과잉/과소’ 공급 결정의 주체가 아니다. 그들은 단지 자본의 축적 상황에 따라 때로는 적어 보이고 때로는 많아 보일 뿐이다. 전반적으로 보면 자본의 축적과 더불어 노동자들이 점차 불필요한 존재, 잉여의 존재, 상대적 과잉인 존재로 ‘나타나는’ 경향이 있다. 마르크스에 따르면, 맬서스의 『인구론』이 실상 하고자 했던 일은 ‘평등주의 비판’이었다.
마르크스는 맬서스가 말한 과잉인구, 즉 잉여노동자 인구를 ‘산업예비군’이라고 바꿔 불렀다. 취업 상태의 임금노동자를 정규군으로, 잉여노동자들을 예비군으로 나눈 것이다. 이 산업예비군(잉여노동자)은 독특한 지위를 갖고 있다. 한편으로는 필요가 없어서 공장에서 추방되거나 거부된 존재들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자본주의 생산에 꼭 필요한 존재들이다. 그래서 허먼 메리베일 같은 정치경제학자는 ‘노동이민’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내면서, 공황기에 발생한 잉여노동자(과잉 노동인구)가 나라 밖으로 떠나면 경기가 회복되었을 때 노동력 기근이 생겨날 테니 노동자들을 공장 밖으로는 몰아내되 나라 밖으로는 몰아내면 안 된다고 주장했다.
저자는 묻는다. 그렇다면 잉여노동자들은 대체 어디에 있어야 하는 것인가. 해고자나 미취업자들의 자리는 어디인가. 내부도 아니고 외부도 아닌 곳, 바로 주변이다. 추방은 했지만 언제든 다시 붙들어둘 수 있는 곳에 그들이 있어야 한다고, 자본과 자본주의 그리고 자본가계급은 주장한다는 것이다. “잉여노동자들 즉 산업예비군은 거기 주둔해야 합니다. 공장 주변에서 공장만 바라보고 있어야지요. 언제든 손쉽게 가져다 쓸 수 있도록 말입니다.”
자본축적이 효과적으로 이루어지려면 자본의 입장에선 노동력의 공급도 탄력적이고 유연해야 한다. 언제든 해고 가능하고 언제든 채용 가능한 상태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인구 증가와 상관없이 언제든 노동력을 공급받을 수 있어야 하고, 필요 없는 노동력은 쉽게 내보낼 수도 있어야 한다. 산업예비군의 존재는 자본축적을 가능케 하고 원활히 한다. 또한 산업예비군은 정규군의 노동강도를 조절하는 장치로도 기능한다. 적은 노동자로 동일한 노동량을, 혹은 동일한 규모의 노동자로 더 많은 노동을 뽑아낼 수 있다면 산업예비군이 늘어날 것이고, 이렇게 늘어난 산업예비군은 정규군을 압박하는 환경으로 다시 작용한다. ‘너 말고도 일할 사람 많아!’ 효과를 내는 것이다.
저자 고병권은 바로 이것이 자본주의 시대의 인구법칙이며, 이러한 인구의 운동이 자본의 운동과 결부되어 있다고 강조한다. 자본주의 시대의 ‘과잉인구’는 일자리보다 인구가 많은 것, 즉 노동인구의 상대적 과잉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이들 인구는 고용되지 못한 채로 먹을 것을 구하러 다니는 빈민의 형상을 하고 있다. 그러나 이 과잉인구 현상은 맬서스의 말처럼 생물학적 출산으로 인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산업적 출산”에 기인한 것이다.
3. 자본의 왕국에서, 자본이 통치한다
― 노동의 수요공급법칙과 ‘자본의 전제정’
마르크스는 ‘산업예비군’을 자본축적을 위한 조절 장치이자 착취의 장치일 뿐 아니라 자본의 지배 장치이자 통제 장치로도 본다. 산업예비군의 존재가 노동자들의 임금만 낮추는 게 아니라 목소리까지 낮추게 한다는 것이다. 마르크스의 표현을 그대로 옮기자면, 불황기에는 “압박을 가하고”, 호황기에는 “권리 요구에 재갈을 물”린다. 노동일이 늘어나고 노동강도가 높아지고 임금삭감이 이뤄져도, 또 부당한 업무 지시를 내려도 이에 맞서 자신의 권리를 강하게 주장하기가 어렵게 된다.
왜 그러한가. 자본가와 노동자의 계약이 어떤 배경에서 이루어지는지 떠올려보면 이유를 찾을 수 있다. 둘은 노동력의 판매자와 구매자로서 법적으로 또 권리상으로 대등한 관계다. 하지만 이것은 이익이 걸려 있는 자와 생존이 걸려 있는 자의 거래다. 임금노동자는 이런 거래에 참여해 가까스로 노동력 판매에 성공한 사람들이다. 그런데 이들 주변에는 노동력을 판매하지 못한, 혹은 불완전한 형태로만 판매한 사람들이 여전히 많다. 실업자와 미취업자로 이루어진 노동력의 거대한 저수지가 해자처럼 이들 임금노동자를 둘러싸고 있는 것이다. 자본은 그저 수문만 열었다 닫으면 된다. 언제든 추가 노동력을 들여올 수 있고 언제든 잉여노동력을 빼낼 수 있다. 노동자들은 이런 상황에서 계약을 맺고 노동을 한다. 노동력 판매 외에는 살길이 없다는, 노동자들의 생존조건을 환기시키는 산업예비군에 둘러싸인 채 말이다.
앞서 자본축적과 더불어 노동자들의 축출 내지 추방이 일어난다고 했는데, 저자는 이 추방이 자본관계가 일반화된 뒤 이루어졌다는 점을 상기시킨다. 즉 대다수 사람이 자본관계 안에서만 생존할 수 있는 역사적 상황이 만들어진 뒤 기술적 구성의 변화와 함께 추방 내지 축출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노동자는 비록 일터에선 추방되어도 자본관계를 떠나서는 살 수가 없다. ‘내부에서 가장 바깥’으로 밀려날 수는 있어도 외부로 나갈 수는 없고, 내부로 들어갈 수 없다 해도 ‘외부에서 가장 안쪽’으로 필사적으로 매달리게 될 수밖에 없다.
한편 자본이 통치하는 세계에선 노동력 판매에 성공한 임금노동자의 삶도 팍팍하기는 마찬가지다. 그들 또한 언제든 잉여노동자가 될 수 있다는 가능성 속에서 임금노동자로 살고 있기 때문이다. 이 가능성이 임금노동자의 힘을 약화한다. 고용관계는 법률상으로는 대등해 보이는 계약이지만 실제로는 ‘갑을 관계’다. 임금노동자들이 자본가에 대해 ‘을’의 위치에 설 수밖에 없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 곁에 ‘병’이 있기 때문이다. 임금노동자는 언제든 계약 바깥의 존재 ‘병’이 될 가능성을 품고 있기에 자본가와 대등한 ‘갑’이 될 수 없다.
즉 그 거래 현장은 “완전히 기울어진 운동장”이다. 수요공급법칙은 노동의 수요량과 공급량만 고려할 뿐 수요와 공급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는 말해주지 않는다. 노동의 수요자인 자본은 노동의 수급을 조절하는 아주 효과적인 장치(산업예비군)를 가지고 있어 공급에도 관여한다는 비밀을 말해주지 않는다. 더 근본적으로는 계급 간 권력의 비대칭성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말해주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법칙의 실현이 곧 이익의 실현이 된다. 수요공급법칙이 자본의 이익 실현 법칙이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자본이 구축한 ‘자본의 전제정’으로서, 자본주의 축적의 일반법칙으로 작동한다. 이 법칙은 “헤파이스토스의 쐐기가 프로메테우스를 바위에 결박한 것보다 더 단단히 노동자를 자본에 결박”하기 때문에 자본주의가 존속하는 한 노동자는 이 운명에서 도무지 벗어날 수가 없다.
4. 거대한 자본이 쌓여 있는데도 왜 사람들은 여전히 가난한가
― 부의 축적이 곧 빈곤의 축적인 현실에 관한 증언
1846년, 마르크스에 따르면 이해는 아주 상징적인 해다. 마르크스의 표현을 빌리자면 “자유무역이라는 천년왕국”이 도래한 때로, 그는 이 시기를 “영국 경제사의 시대적 전환점”이라 불렀다. 자유무역을 신봉하는 정치경제학자들은 자본가만이 아니라 노동자 역시 큰 혜택을 입을 것이라고 공언했다. 과연 그 후로 20년이 지났을 때 모든 사람에게 천년왕국이 도래했을까. 자본축적을 위한 이상적 조건이 형성된 덕분에, 부의 증가가 그 부를 생산한 노동자계급의 삶도 개선시켰을까.
마르크스는 1843년 필 정부에서 무역 담당 각료로 참여했고 1868년 총리가 된 유력 정치인 윌리엄 글래드스턴의 연설을 인용하며 현실을 일깨워준다. 글래드스턴은 말했다. 20년이 지난 후 절대적 가난은 감소했는지 몰라도 상대적 가난은 더 증대했다고. 계급 간 양극화는 더욱 심해졌다는 것이다. 요컨대 천년왕국이 도래한 것은 맞지만, 그것은 그저 자본가들의 천년왕국이었을 뿐, 노동자들은 상대적으로 더 가난해졌고 극빈층은 전혀 줄지 않은 것이 현실이라는 이야기다. 자본이 쌓이는 동안 빈곤도 극심해졌다.
『자본』 제23장 후반부에서 마르크스는 노동자계급을 산업 프롤레타리아트와 농업 프롤레타리아트 두 부류로 나누어, 자본축적의 결과 그들의 현실이 실제로 어떠한지를 고찰한다. 마르크스는 〈공중위생 보고서〉 등의 공식 자료에 근거해 ‘자본의 축적’에도 불구하고 전혀 나아진 것 없는 노동자들의 삶을 구체적으로 담는다. 이들은 제대로 먹지 못해 최저 기준 영양 상태에도 못 미쳤다. 먹을 게 부족한 노동자들은 어김없이 의복도 연료도 부족했다. “여기서 말하는 빈곤이 나태가 초래한 마땅한 빈곤이 아니라는 점을 생각하면 너무 가슴이 아프다. 이 모든 사례는 일하고 있는 사람들(working populations)의 빈곤이다. 도시 노동자들이 얼마 안 되는 음식을 얻기 위해 해야 하는 노동은 대부분 지나치게 장시간이다.”
또한 마르크스는 자본의 축적이 가속화된 고도성장기에 도시 노동자들의 주거지가 어떻게 형성되는지도 보여준다. 그는 특히 도시 (재)개발과 부동산 가격의 상승이 노동자들의 주거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분석한다. 일자리를 찾아 도시로 온 노동자들의 삶은 어떠했는가. 저임금 노동자들은 공장만이 아니라 주거지에서도 착취를 당했다. 집주인들은 좁은 방에 많은 노동자를 집어넣고 터무니없이 높은 집세를 받았다. 집세가 오르면 가난한 노동자들은 버틸 수가 없다. 이들은 집세가 싼 곳을 찾아 모여든다. 그렇게 ‘도시 빈민촌’이 형성된다. 그러다 재개발이 이루어지면 부동산 가격이 폭등한다. 주거 환경은 개선되겠지만 정작 거기 살던 가난한 주민들은 쫓겨난다. 저자는 이 모든 일이 사회적 부가 감소할 때가 아니라 ‘믿기 어려울 정도로’ 축적될 때 일어났음을 주지시킨다.
자본축적이 진행될수록 농업에서도 과잉 노동인구가 발생한다. 차지농장들이 집중되고, 경작지들이 목초지화되며, 기계가 도입되고, 경작지 안의 주택들이 파괴되고 농민들이 추방되면서 농촌에서도 ‘과잉인구’ 현상이 나타나는 것이다. 생산에 필요한 농업노동자 수가 줄어든 데다 거주 지역과 생계 수단이 부족해지면서 상대적으로 농촌의 인구가 많아 보인다. 소위 개방촌 같은 마을이나 농촌 인근 도시에는 ‘인간 밀집’ 현상이 나타난다. 일자리도 없고 주택도 없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그런데 앞서도 언급했듯, 이러한 과잉인구 현상은 인구의 자연증가 탓이 아니다. 농업에서 일어난 자본축적의 결과, 더 좁혀서 말하면 농업의 기계화와 농토에서의 주민 추방의 결과다.
저자 고병권은 마르크스의 비판이 최근 전 지구적으로 나타나는 도시의 슬럼화와 관련해서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강조한다. 우리는 『자본』에서 도시 빈민촌 형성의 두 가지 원리를 볼 수 있는데, 하나는 산업화가 도시화를 낳는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농촌에서 인구를 밀어낸다는 것이다. 자본축적은 양쪽 모두에 영향을 끼친다.
마르크스는 자본축적이 빈곤을 늘린 사례 중 하나로 마지막에 아일랜드를 언급한다. 잉글랜드에서 일어난 일은 아일랜드에서 훨씬 악화된 형태로 반복되었다. 상대적 과잉인구 현상, 즉 일자리나 주거지에 비해 사람들이 너무 ‘많아 보이는’ 현상이 인구가 ‘크게 감소한’ 아일랜드에서 나타난 것이다. 차이가 있다면 ‘공업국’인 잉글랜드에서는 잉여노동자들이 일거리를 찾아 주로 공장 주변을 기웃거리는 ‘산업예비군’으로 나타나지만 ‘농업국’인 아일랜드에서는 주로 농장 주변을 기웃거리는 ‘농업예비군’으로 나타났다는 점뿐이다.
맬서스는 인구가 ‘본래’, ‘자연적으로’ 식량에 비해 빠른 속도로 늘어나는 경향이 있고, 이런 인구 증가가 빈곤의 원인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인구가 크게 줄어든 아일랜드는 왜 가난하며, 왜 과잉인구 현상이 나타났던 것인가. 이는 인구를 줄여야 부가 늘어난다는 맬서스의 인구법칙이 아니라, 자본축적이 상대적 과잉인구를 낳는다는, 마르크스가 말한 ‘자본주의 인구법칙’을 확인해준다. 자본주의에서는 부의 축적이 빈곤의 축적을 낳고 잉여노동자, 잉여인간의 축적을 낳는다는 것 말이다.
시리즈의 11권인 이번 책에서 우리는 노동자계급의 운명을 다루었는데요. 마르크스가 말한 이 운명의 주인공들은 산업예비군, 잉여노동자, 식민지인입니다. 모두가 자본관계의 내부가 아니라 주변에 있는 존재들이지요. 자본관계에 귀속되어 있지만 내부에 존재하지는 않는 사람들입니다. 마르크스가 노동자계급의 운명을 이들에게서 확인하는 것은 조만간 노동자계급 다수의 운명이 이들처럼 될 것이라는 생각 때문일 수도 있지만, 그보다는 이들이야말로 자본주의에서 노동자계급의 운명이 어떤지를 가장 선명하게 보여주는 존재이기 때문일 겁니다. 즉 미래에 대한 예측이라기보다 현재에 대한 규정으로서 이들이 중요하다는 것이지요. 우리는 어떤 것을 규정하거나 정의할 때 중심 내지 내부에 주목하는데요. 실제로 규정이 선명한 곳은 중심이 아니라 경계, 한계, 주변입니다. - 본문 220쪽, <7장 “자본의 죄와 자본가계급의 운명”>에서
작가 소개
서울대에서 화학을 공부했고 같은 학교 대학원에서 사회학을 공부했다. 책읽기를 좋아하고 사회사상과 사회운동에 늘 관심을 기울이며 살아왔다. 오랫동안 연구공동체 ‘수유너머’에서 생활했고 지금은 노들장애학궁리소 회원이다. 그동안 『화폐, 마법의 사중주』, 『언더그라운드 니체』, 『다이너마이트 니체』, 『생각한다는 것』, 『점거, 새로운 거번먼트』 등 여러 권의 책을 썼다. 그는 마르크스의 『자본』을 1991년에 처음 우리말 번역본으로 읽었다. 그 시절 한국은 민주주의 열망이 불붙던 시기다. 어느덧 30여 년이 지나 많은 것이 달라졌다. 그러나 아직 달라지지 않은 것이 있으며, ‘그 달라지지 않은 것’을 사유하고자 다시 『자본』을 읽어야 하는 시대라 믿는다.
목 차
저자의 말 ― 운명의 저주
1 노동자계급의 운명
○역사유물론자가 ‘운명’을 말하는 방식 ○자본의 구성-가치구성, 기술적 구성, 유기적 구성 ○자본의 ‘유기적 구성’을 말하는 이유
2 빈민의 노동은 부자의 보물광산
○자본의 축적은 프롤레타리아트의 증식이다 ○가난이 부를 생산한다 ○황금사슬에 묶였다고 노예가 아닌 것은 아니다 ○자본축적에 따른 임금의 변동-독립변수와 종속변수
3 자본구성의 변화와 노동자의 축출
○자본주의 체계의 일반적 토대가 자리를 잡고 나면 ○노동생산성의 증대와 기술적 구성의 변동 ○거대한 노동생산력을 발휘하는 데 필요한 것 ○자본의 ‘축적’과 ‘집적’ 그리고 자본의 ‘집중’ ○‘자본의 집중’을 가능케 하는 두 개의 지렛대 ○자본의 축적에 따른 노동의 절약-임금노동자가 되지 못한 노동인구 ○자본구성의 변동은 부르주아지의 운명도 재촉한다
4 자본주의 시대의 인구법칙과 잉여노동자
○마르크스가 말하는 자본주의 시대의 ‘인구론’ ○맬서스의 『인구론』은 ‘인구론’인가 ‘빈민론’인가 ○마르크스의 특별한 주석-너무나 반혁명적인 맬서스에 관하여 ○‘잉여노동자’ 곧 과잉 노동인구는 꼭 필요한 ‘산업예비군’ ○자본축적에 이바지하는 산업예비군의 세 가지 ‘조절’ 기능
5 자본의 왕국
○자본 왕국의 지배 법칙은 ‘방치를 통한 포획’ ○운동장은 기울어져 있고 주사위는 위조되었다 ○‘자본’이라는 전제군주 ○자본권력 아래서 잉여노동자들은 어떤 형태로 존재하는가 ○자본에 결박된 노동자계급의 운명 ○부의 축적과 빈곤의 축적
6 자본축적의 일반법칙이 지배하는 현실
○부의 축적이 곧 빈곤의 축적인 현실에 대한 증언 ○자본가들을 위한 천년왕국은 도래했다 ○자본은 거대해졌으나 ‘극단의 빈곤층’은 줄지 않았다 ○자본의 왕국에서 산업 프롤레타리아트는 어떻게 사는가 ○자본주의가 농업과 농민을 장악하면 무슨 일이 벌어지는가
7 자본의 죄와 자본가계급의 운명
○아일랜드에서 더 악화된 형태로 반복된 자본축적의 법칙 ○혁명의 지렛대 ○페니언주의는 무엇이 다른가 ○자본의 죄명은 ‘혈육 살해’
부록노트
Ⅰ―‘정직하고 머리 좋은’ 맨더빌
II―임금노동자는 프롤레타리아트인가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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