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에이즈 운동이 써내려간 퀴어 정치학의 역사
『애도와 투쟁: 에이즈와 퀴어 정치학에 관한 에세이들』은 미술비평가이자 퀴어 운동가인 더글러스 크림프가 1987년부터 1995년까지 쓴 16편의 글을 모은 책 Melancholia and Moralism: Essays on AIDS and Queer Politics (2002)를 우리말로 옮긴 것이다. 이 책에 묶인 크림프의 글들은 미국 에이즈 운동에 대한 비판적 연대기 역할을 할 뿐 아니라, 에이즈 위기에 대한 대응과 반응 속에서 부상한 ‘퀴어’와 관련하여 이론과 운동을 이어주는 연결점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에이즈 아카이브의 중요한 위치를 점한다. 이 책에서 크림프는 미술작품과 영상, 사진, 도서 등 여러 매체의 에이즈 재현을 비판적으로 살피며 에이즈와 남성 동성애자에 대한 사회 주류의 비난과 에이즈 희생자에 대한 애도와 투쟁이 쇠퇴하고 동성결혼을 위한 운동을 중심에 두며 주류 도덕을 내면화한 퀴어 정치학을 동시에 비판한다.
이 책이 한국에 소개되는 현 시점은 에이즈가 발견된 지 40년이 지난 때로, 에이즈 치료제에 접근할 수 있는 이들에 한해서는 에이즈 위기가 사그라진 때이다. 그러나 지금도 여전히 에이즈는 남성 동성애자를 도덕적으로 비난하는 수단으로 활용되고 있다. 이 책이 현재 한국의 에이즈 감염인들과 에이즈 활동가, 퀴어 활동가 및 연구자들에게 도움이 되는 담론을 제공하고, 동시대 한국의 문화 지형을 성찰하는 계기를 마련하기를 기대한다. 권말에는 상세한 옮긴이 해설을 실어 에이즈 위기의 타임라인을 제공하고, 에이즈 운동과 퀴어 정치학의 관계를 그려주며, 각기 다른 시기에 쓰인 각 장의 의미를 서로 꿰어준다.
크림프는 자신이 공동편집장으로 있던 미술저널 《옥토버》의 1987년 겨울호를 에이즈 특집호 ‘에이즈: 문화적 분석/문화적 행동주의’로 기획하고 편집하면서 에이즈 운동에 발을 디뎠다. 이 에이즈 특집호에 실린 글들은 에이즈 위기와 에이즈 운동을 비판적으로 분석하고 이론화한 가장 초기의 작업에 해당한다. 에이즈 담론에 대한 초기 연구자인 폴라 트라이클러, 사이먼 와트니 등이 글을 실었고, 이론가 리오 버사니의 유명한 논문 「항문은 무덤인가?」가 발표된 지면 역시 이 특집호다. 이 책 『애도와 투쟁』의 2장 「에이즈: 문화적 분석/문화적 행동주의」와 3장 「감염병의 시대에 우리의 문란한 사랑을 계속하는 법」도 이 특집호에 실렸던 글이다.
저자가 서론 격의 1장 「우울과 도덕주의: 여는 글」에서 밝히는바, 이 책 『애도와 투쟁』에 실린 글들은 대부분 에이즈에 대한 동성애혐오적인 재현과 그런 재현이 공중보건에 미친 재앙적인 결과를 분석한다. 첫째, ‘나쁜 게이들’에 대한 재현(3장 「감염병의 시대에 우리의 문란한 사랑을 계속하는 법」, 6장 「에이즈의 초발환자 서사 ‘페이션트 제로’」, 10장 「당신에게 동의해요, 걸프렌드!」, 17장 「‘섹스와 감성’부터 ‘이성과 섹슈얼리티’까지」). 둘째, ‘좋은 이성애자들’ 또는 ‘별로 게이스럽지 않아서 좋은 게이들’에 대한 재현(12장 「매직 존슨을 받아들이기」, 15장 「운동의 절망을 재현하기」). 셋째, 동성애자의 섹스를 은폐하는 재현(4장 「감염인의 재현」, 8장 「내 침실의 남자들」, 11장 「애도의 스펙터클」, 13장 「군대니까 말하지도 말라고?」, 14장 「로자의 쾌락」, 16장 「고통스러운 사진들」).
감염병 위기의 시대, 국가의 총체적 침묵 속에서
‘세이프섹스’와 ‘문란’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다
오늘날 콘돔을 사용하는 ‘세이프섹스’는 우리에게 매우 익숙하지만, 그것을 남성 동성애자들이 발명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1983년, 아직 에이즈의 원인이 밝혀지지 않았던 시기, 두 동성애자 남성 리처드 버코위츠(Richard Berkowitz)와 마이클 캘런(Michael Callen)이 콘돔 사용을 에이즈 예방법으로 제안하는 최초의 세이프섹스 자료인 『감염병의 시대에 섹스하는 법(How to Have Sex in an Epidemic)』이라는 책자를 펴냈고, 정부와 정치인, 의료인, 주류 언론 등의 총체적 침묵 속에서 동성애자 공동체는 자체적으로 세이프섹스 교육을 시작했다.
『애도와 투쟁』에서 저자는 에이즈가 개념화된 질병이라고 말한다. 남성 동성애자들 사이에서 알 수 없는 폐렴이 발생했다는 최초의 에이즈 보고인 미국 질병통제예방센터의 《질병과 사망 주간보고》가 발표된 이후, “에이즈는 동성애혐오에 기반한 낙인의 질병이 되었다”(89쪽). 동성애자들이 세이프섹스를 발명했는데도 당시 미국 사회는 이를 참조하기는커녕 동성애자들이 이 예방법을 다른 이들에게 알리는 것마저 방해했다.
크림프는 무책임하고 위험한 것으로 비난받던 남성 동성애자의 ‘문란(promiscuity)’을 삶을 위협하는 요소가 아닌 삶을 구하는 자원으로 재의미화한다. 남성 동성애자들이 세이프섹스를 발명할 수 있었던 것은 고도로 발달한 성적 문화를 통해 성적 쾌락이 다양한 형태를 띨 수 있음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남성 동성애자들은 자신들이 맺고 있는 쾌락과 친밀감의 관계들을 경로로 서로에게 세이프섹스를 가르쳐주고 서로에게 세이프섹스를 배울 수 있었다. 옮긴이의 말처럼 “크림프는 ‘문란’을 감염의 원천이 아니라 보호와 돌봄의 자원으로, 무책임의 양식이 아니라 책임의 양식으로, 개인의 자기파괴가 아니라 공동체의 성취로 다시 읽는다. 우리는 ‘문란’의 기호를 통해 이성애규범성의 폭력적 헤게모니에 복무하지 않는 다양한 형태의 쾌락, 친밀성, 공동체를 경축할 수 있다. 그것은 다자간 난교의 형태를 띨 수도 있고, 낭만적 관계를 특권화하지 않는 우정의 형태를 띨 수도 있으며, 무성애나 폴리아모리의 형태를 띨 수도 있다.”(428쪽) 저자가 “우리의 문란이 우리를 구원할 것이다”(96쪽)라고 쓴 것은 바로 이런 맥락에서다.
운동의 우울과 도덕주의, 그리고 퀴어 멜랑콜리아
에이즈 위기와의 긴밀한 관계에서 등장한 ‘퀴어’
1980년대 미국 동성애자 운동은 백인 남성 동성애자 중심의 분리주의와 자유주의 속에서 다른 급진적인 힘들과 연대하지 못했고, 또 운동 내부의 차이를 인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에이즈와 싸우기 위해서 운동은 기존의 게이, 레즈비언 등의 고정되고 본질주의적인 정체성에서 벗어나 연대와 연합에 기반한 새로운 교차적 정체성으로 옮겨가야만 했다. 크림프는 바로 이런 국면 속에서 새로운 정치적 정체성들을 지시하는 용어로 ‘퀴어’가 부상하게 되었다고 쓴다(261쪽). 옮긴이 역시 에이즈 위기와 그것이 극대화한 동성애혐오는 당시의 운동과 이론으로 하여금 정체성, 권력, 지식에 대한 기존의 관념들을 급진적으로 재수정하게 했고 “이 과정은 ‘퀴어’라는 새로운 정치적 정체성이 벼려지는 중요한 배경이 되었다”(425쪽)고 짚는다.
급진적이었던 1980년대의 미국 에이즈 운동은 1990년대로 넘어가면서 동성애규범성에 복무하는 방향으로 돌아섰다. 저자는 그 장본을 우울이 생산하는 도덕주의에서 찾았다. 게이 네오콘들뿐 아니라 ‘문란한’ 남성 동성애자 공동체를 비난하는 일부 에이즈 운동가들 또한 동성애혐오에 가담했고, 한편으로는 에이즈 위기를 끝내기 위해 힘든 싸움에 참여했던 이들이 누적된 상실의 고통으로부터 자기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상실의 경험을 부인하면서 우울과 도덕주의에 빠지게 되었다. 상실을 애도할 수 없기에 우울에 빠진 활동가들은 감당할 수 없는 고통으로부터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에이즈 운동으로부터 점점 멀어져갔고, 에이즈라는 죽음의 문제 대신 동성결혼과 동성애자 군 복무라는 삶의 문제로 관심을 돌렸다. 많은 활동가들이 애도의 과정을 미심쩍어했으며, 슬픔에 빠져 분노를 투쟁의 형식으로 표현하지 못하는 이들을 행동하지 않는다고 꾸짖었다. 이러한 운동의 도덕주의는 다시 운동 내부의 분열과 적대로 이어졌다.
‘그의 장례식에서 우리는 슬픔을 억압해야만 했다’
불가능한 애도 앞에서 퀴어의 애도는 투쟁이 된다
크림프는 많은 퀴어들이 친구나 파트너, 동료의 장례식장에서 충분히 애도할 수 없었던 경험을 공유한다고 말한다. 그곳에서 그들은 퀴어에 대한 이 사회의 공격을 떠올리며 분노하면서 애도를 할 수 없도록 방해받는다. 그렇게 에이즈 위기의 많은 활동가들은 애도를 “자기만족적이고, 감상적이며, 패배주의적”(188쪽)인 것으로 의심했다. 그러나 투쟁을 향한 의지 아래에는 여전히 해소되지 않은 고통스러운 감정들이 도사리고 있다.
7장 「애도와 투쟁」에서 크림프는 애도와 투쟁이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짚어낸다. 불만과 분개와 분노와 격노뿐 아니라 “불안과 두려움과 공포, 수치심과 죄책감, 슬픔과 절망”(210쪽)과 같은 다양한 슬픔의 정동 역시 투쟁의 정동임을 인식하고 그것들에 귀를 기울이는 것 자체도 중요한 정치적 실천이라고 말한다. 크림프는 프로이트가 병리적으로 보았던 우울의 개념을 다시 정립해 우울을 퀴어 정치학을 구성하는 조건으로 정치화한다. 크림프는 우리가 상실한 대상에 대한 기억 속에서 그것을 붙들고 있는 상태에서 살아남은 것들과 교감을 유지할 때 진정한 윤리와 책임감이 발생한다고 본다. 크림프는 “이 진정한 책임감을 퀴어한 것”(30쪽)이라고 부른다.
저자는 “투쟁은 마땅히 중요한 것이지만, 애도 또한 중요하다”(215쪽)고 쓴다. 퀴어에게 투쟁은 정의를 이루려는 의식적인 반응이기도 하지만, 위로받을 수 없는 고통에 대한 정동적 반응이기도 한 것이다. 크림프는 투쟁이 외부 세계를 바꾸는 일에만 몰두하느라 이런 해결되지 않은 내면의 감정들을 돌보지 않을 때, 그 투쟁은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거대한 상실을 부인하는 위험한 기제가 될 수 있다고 경고한다.
“지금까지 우리는 사랑하는 친구들을 지지하고 애도하는 법을 배워왔다. 지금까지 우리는 공포, 혐오, 억압, 방관과 투쟁해왔다. 지금까지 우리는 우리 자신과 친구들을 보호하기 위해 우리의 성적인 삶을 기꺼이 바꾸어왔다. 이제 되찾을 때가 왔다. 우리의 주체성과 우리의 공동체와 우리의 문화를. 그리고 그 무엇보다도 섹스에 대한 우리의 문란한 사랑을.”(117쪽)
작가 소개
지은이 : 더글러스 크림프
미국의 미술평론가, 미술이론가, 에이즈 활동가. 포스트모더니즘 미술이론, 시각문화 연구, 에이즈에 대한 문화적 분석에 크게 기여했다고 평가받는다. 미술저널 《옥토버》의 공동편집자로 일했고, 〈픽처스〉 같은 역사적인 전시를 기획했으며, 셰리 레빈, 신디 셔먼 등 새로운 세대의 중요한 작가들을 발굴하고 지원했다. 1987년 《옥토버》 ‘에이즈 특집호’를 기획하고 당시 막 설립되었던 액트업에 가입하면서 에이즈 운동에 발을 디뎠다. 해당 특집호에 실린 글들은 에이즈, 에이즈 위기, 에이즈 운동을 비판적으로 분석하고 이론화한 가장 초기의 작업에 해당한다. 그로부터 약 10년에 걸쳐 에이즈에 관해 글을 썼고, 그 글들을 모은 이 책 『애도와 투쟁(원제: Melancholia and Moralism)』은 오랜 세월 에이즈 아카이브의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옥토버》에서 나와 세라로런스대학을 거쳐 1992년 로체스터대학교 미술사학과에 자리를 잡은 이후에도 퀴어와 예술의 교차점에서 시각문화를 연구하며 현실에 직접 개입하는 작업을 하고자 했다. 모더니즘 및 포스트모더니즘 댄스에 관한 책을 준비하던 중 2019년 다발성 골수종으로 사망했다. 저서로 『에이즈: 문화적 분석/문화적 행동주의』, 『에이즈 데모 그래픽스』, 『미술관의 폐허 위에서』, 『애도와 투쟁』, 『앤디 워홀의 영화들』, 『픽처스 이전의 시대』, 『댄스 댄스 영화 에세이』가 있다.
옮긴이 : 김수연
퀴어의 번역과 번역의 퀴어링에 관심이 많다. 수년간 평일에는 글을 옮기고 주말에는 이태원과 종로에서 대안적 친밀감의 세계를 배회하는 삶을 살았다. 퀴어한 삶을 사는 이들에게 도움이 되는 일을 할 수 없을까 궁리하다가 더글러스 크림프의 책을 번역했다. 종종 한겨레신문의 슬라보이 지제크 칼럼을 번역한다.
목 차
추천의 말
1 우울과 도덕주의: 여는 글
2 에이즈: 문화적 분석/문화적 행동주의
3 감염병의 시대에 우리의 문란한 사랑을 계속하는 법
4 감염인의 재현
5 에이즈, 미술, 행동주의
6 에이즈의 초발환자 서사 ‘페이션트 제로’
7 애도와 투쟁
8 내 침실의 남자들
9 거트루드 스타인 없는 하루
10 당신에게 동의해요, 걸프렌드!
11 애도의 스펙터클
12 매직 존슨을 받아들이기
13 군대니까 말하지도 말라고?
14 로자의 쾌락
15 운동의 절망을 재현하기
16 고통스러운 사진들
17 ‘섹스와 감성’부터 ‘이성과 섹슈얼리티’까지
감사의 글
옮긴이 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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