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량 정치 -우리가 정치에 대해 말하지 않은 24가지- (20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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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노정태
출판사항인물과사상사, 발행일:2021/08/06
형태사항p.346 A5판:21
매장위치사회과학부(B1) , 재고문의 : 051-816-9500
ISBN9788959066117 [소득공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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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

386세대와 조국, 이준석과 윤여정, 소득주도성장과 문재인,
K-방역과 탈원전, 박정희와 진보정당 등
한국 사회를 뜨겁게 달구었던 24가지 이슈를 해부하다


세계가치관조사에 따르면 한국 민주주의의 근간은 위태로워 보인다. 한국인의 30퍼센트가 ‘의회와 정당이 중심이 되는 민주주의’에 대해 부정적인 응답을 했다. 블라디미르 푸틴이 종신 집권을 꾀하고 있는 러시아에서조차 부정적인 응답이 채 20퍼센트가 되지 않았다. 이 조사에서는 ‘의회와 정당이 중심이 되는 민주주의’에 대한 반감이 극히 큰 나라로 한국과 이라크를 지목했다. 미국이 사담 후세인 정권을 무너뜨린 후 지금까지 혼돈의 늪에 빠져 있는 이라크가 민주주의라는 지표에서 한국과 비교 대상에 올라 있는 셈이다. 민주주의는 대통령을 선거로 뽑는다고 완성되지 않는다. 의회와 정당이 중심에 서야 온전한 민주주의다. 그런데 대한민국은 정반대의 길로 가고 있다.
문재인 정권의 지난 4년은 ‘불량 정치’의 시대였다. ‘우리 이니 하고 싶은 대로 해’라고 외치는 한 줌의 극성 지지층만을 바라보는 정치, 정치인의 언어라고 믿기 힘든 ‘말’이 난무하는 정치, 북한을 향한 맹목적 애정 표현 외에는 아무런 계획이나 대안도 없는 정치, 온 나라를 민둥산으로 만들고 태양광 패널을 덮으며 탄소를 뿜어내는 기후 악당 정치, 소득주도성장이라는 미명하에 성장 잠재력을 깎아먹으면서도 그 책임자를 문책하는 대신 영전시키는 무책임의 정치, 180석의 힘을 믿고 기상천외한 법을 하루아침에 뚝딱 만들어 제대로 된 논의 없이 통과시키는 떼법 정치. 이렇게 한국의 정치는 불량해졌다. 무뢰한들이 정치를 하는 것만 같다. 불량 정치에 끌려다니다 보니 한국의 민주주의, 법치주의, 자본주의가 통째로 불량품이 되어간다.
2017년 박근혜 대통령을 탄핵하고 새 대통령을 뽑을 때 국민들이 기대했던 것은 이런 게 아니었다. 우리는 좀더 투명하고, 정직하고, 책임지는 정치를 원했다. 정치가 정치다운 모습을 보이기를 희망했고, 온 국민이 자신의 삶을 스스로 개척하고 일궈나가는 데 든든한 동반자가 되기를 희망했다. 2021년 현재 그런 기대는 온데간데없다. 우리에게 남은 것은 그저 이런 질문뿐이다. ‘문재인 정권은 왜 이러는 걸까?’ ‘어쩌다 이렇게 되어버렸을까?’ 이미 한국의 정치는 여러 곳에서 위험 신호가 울려 퍼지고 있다. 이대로 가면 대한민국의 미래는 매우 어둡다.
『불량 정치』는 우리의 정치·사회·문화를 불량하게 만드는 원인을 파헤친다. 30대 청년 진보 논객인 저자는 민주주의, 반민주주의, 민주화 세대, 조국, 공정, 여성 혐오, 페미니즘, 이루다, 거짓말, 표현의 자유, 팬덤, 부족주의, 소득주도성장, 문재인, 가덕도 신공항, 아파트, 원자력, 탈원전, K-방역, 프라이버시, 박정희, 진보정당, 북한, 김정은 등 한국 사회를 뜨겁게 달구었던 24가지 이슈를 해부한다. 저자는 한국 사회에 도발적인 질문을 던진다. ‘386세대는 민주화 세대인가?’ ‘K-방역은 성공했는가?’ ‘능력주의는 공정한가?’ ‘기본소득은 가능한가?’ ‘박정희는 보수인가, 진보인가?’


386세대와 조국


386세대는 주류 의식으로 가득 차 있다. 이들은 오직 자신들의 힘만으로 민주화를 이룬 것처럼 역사를 해석한다. 이들을 정치권에서 소환한 방식 자체가 그 세대의 비대한 자의식을 더욱 부추겼다. 학생운동 좀 하다가 야인으로 떠돌았는데 불현듯 ‘민주화 운동가’라는 훈장을 달게 되었으니 말이다. 그래서 이 나라의 의사결정과 여론을 자신들이 쥐락펴락할 것이라고 믿는다. 그들은 민주화 세대가 아니라 반미(反美)의 세례를 강하게 받은 세대로 호명되어야 한다. 반미주의는 386세대의 의식 세계를 지배하는 가장 강력한 이데올로기다. 그들이 민주화 세대로 불리는 것은 대한민국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상징조작’이자 ‘프로파간다 행위’다. 민주화는 386세대가 독점할 수 없다.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당연하게 여기며, 호감형의 외모를 지닌 고학력 중년 남성. 공기처럼 우아하고 거룩한 오만을 둘러친 강남 좌파. 이것이 전 법무부 장관 조국의 이미지다. 그리하여 김어준은 “자신이 가진 자산 때문에 대중 일반에게 야기할 수밖에 없는 모종의 박탈감”을 선사하는 “재수 없을 수 있”는 사람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멀끔한 외모에 SNS를 통해 입바른 소리를 내놓는 ‘고매한 선비’ 조국의 이미지는 산산이 부서졌다. 조국이 SNS에 써댔던 온갖 입바른 소리, 이른바 ‘조만대장경’은 현재 자신의 모든 행태를 반박하고 있다. 조국은 한낱 조롱감이자 ‘밈(meme)’으로 전락한 지 오래다. 그러나 정작 그는 스스로 일말의 부끄러움을 느끼는 기색 없이 꿋꿋하게 오늘도 SNS를 누비며 ‘정의롭고 멋진 나’라는 자의식을 뽐내고 있다.
2019년 10월, 아직 그가 법무부 장관이었고 검찰 수사가 한창 진행 중일 때, 조국은 법무부 장관 신분으로 검찰 수사를 받는 초유의 상황에 처했다. 그러면서도 딸의 생일 케이크를 사들고 가는 그의 뒷모습을 자신의 SNS 프로필 사진으로 설정했다. 이것은 연예인병이라고 보기도 어렵다. 연예인들은 여론의 동향에 민감하기 때문에 여차하면 재빨리 ‘잠수’한다. 그보다는 상상의 독립운동을 하고 있는 애국지사병이라고 보는 게 낫겠다. 어째서 조국의 우주는 예나 지금이나 한결같이 ‘조국’을 중심으로 돌고 있는 것일까? 지구가 태양 둘레를 도는 게 아니라 온 우주가 조국 자신을 중심으로 돌고 있는 경험은 그리 특별한 일이 아닐 것이다. 말하자면 자칭 민주개혁 세력의 ‘자발적 복종’ 혹은 ‘맹목적 보호’가 만들어낸 거품 속에 조국이라는 한 개인의 세계관이 갇혀 있는 셈이다.


이준석과 윤여정


국민의힘 당대표인 이준석은 자신이 거둔 모든 성취가 온전히 자신의 능력과 노력에 의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다른 능력주의자들과는 달리 입에 발린 겸양의 발언 같은 것을 내뱉지 않는다. 더구나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기회를 당연한 것으로 여긴다. 그래서 결론은 ‘내가 잘났다, 내가 노력했다’로 마무리된다. 이준석은 자신이 이긴 경쟁을 두고 ‘완벽하게 공정한 경쟁’이라고 말하면서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는다. “저를 ‘엘리트주의’라고 비난한다고 해도 기꺼이 감수하겠습니다.” 그가 빛나는 재능과 좋은 여건에도 지역구(서울 노원구)에서는 세 번 연속 낙선한 ‘0선 중진’에 머물러 있는 이유를 왠지 알 것 같지 않은가?
공정성을 앞세운 능력주의 담론은 현 체제 속에서 경쟁에 이긴 사람이 자신을 정당화하기 위한 담론으로 악용될 수 있다. 그러나 이준석은 자신이 언제나 공정하게 경쟁하고 있으며, 자신의 능력으로 이긴다고 생각한다. 약자와 패배자에 대한 공감과 자비심은 찾아보기 어렵다. 공정의 깃발을 높이 들고 여성 할당제 폐지 등 반(反)페미니즘을 주장하는 이준석 체제는 과연 국민의힘이 다가올 2022년 대선에서 승리하는 데 도움이 될까? 이준석의 노골적인 반여성주의 발언은 득보다는 독이 될 가능성이 적지 않다. 특히 젊은 여성들의 반감을 부추기는 식으로 이대남(20대 남성) 표를 긁어와 지지세를 확보한 이준석의 존재는 적지 않은 부담이 될 수밖에 없다.
윤여정은 한국 사회의 험난한 가시밭길을 통과했다. 그것은 가부장제와 보수적 성역할과 여성 혐오였다. 설령 윤여정이 오스카상을 받지 못했더라도, ‘유별난 여자’를 향한 한국 사회의 공격성을 온전히 받아내고 극복했다는 것만으로 박수받아 마땅하다. 윤여정은 여성에게 강요하는 평면적인 역할을 영화나 드라마 속 캐릭터로도 그랬고, 현실 속의 한 인간으로도 극복해나갔다. 콧대 높은 여자, 똑똑한 여자, 한마디도 지지 않는 여자,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따지고 드는 여자가 망하는 모습을 보고 싶어 혈안이 된 한국 사회의 편견과 증오를 딛고 일어섰다. 윤여정은 한국 사회가 여성에게 강요하는 고답적이고 인습적인 여성상을 온전히 배반했다. 윤여정이 여성 혐오의 ‘생존자’라는 점만큼은 분명하다.


소득주도성장과 문재인


문재인 정권과 숫자의 악연은 2018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소득주도성장의 유효성과 성패에 대해 논란이 커졌다. 최저임금 인상을 통해 경기를 부양한다는 발상은 극히 실험적인 생각이며, 아직까지 현실에서 검증된 바 없다. 그 결과는 실패였다. 적어도 소득주도성장이 성공했다고 보기는 어려웠다. 그렇다면 실험적 정책을 입안하고 집행한 주역들이 책임을 져야 한다. 불똥은 엉뚱한 곳으로 튀었다. 목이 잘린 사람은 당시 청와대 정책실장인 장하성이 아닌 통계청장이었다. 문재인 정권과 숫자의 전쟁은 부동산 문제를 놓고 또 불거졌다. 자고 일어나면 새로운 ‘핀셋 규제’를 해가며 집값을 잡겠다고 했지만, 공급을 틀어막고 수요만 억누르려 하니 집값이 잡힐 리 없었다. 청와대는 자신들의 정책이 옳았음을 숫자로 확인하고 싶었다. 당연히 그런 일은 불가능했다. 정부의 온갖 대책은 집값을 낮추기는커녕 높이는 방향으로 작동했다. 문재인 정권은 지표가 나쁘게 나올 것 같으면 통계 자체를 없애는 선택을 하고 있지 않느냐는 의혹이 생긴다.
문재인 정권의 임기가 채 1년도 남지 않았다. 우리 사회에 대단히 깊고 심각한 상처를 남겼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해 보인다. 문재인 정권 4년을 겪으며, 우리는 ‘대통령이 하는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수 없는 세상’에 살게 되었으니 말이다. 문재인은 2017년 6월 19일 경북 월성고리 1호기 영구 정지 행사에 참석해 “일본 후쿠시마 원전 사고로 2016년 3월 기준으로 총 1,368명이 사망했다”고 말했다. 그런데 실제로는 2명이 사망했다. 사망자마저도 방사능이 아니라 지진과 해일로 인해 목숨을 잃었다. 이 말은 결국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 사고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퍼뜨리고, 거짓에 기반한 방사능 공포를 들쑤셔 탈원전 정책을 밀어붙이는 밑거름이 되었다. 문재인이 보여준 언어 구사 행태는 ‘선의의 거짓말’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 오히려 ‘악의의 거짓말’에 가깝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문재인이 대통령에 취임한 이후 대통령의 말에는 공신력이 사라졌다.
문재인 정권의 가장 큰 약점은 바로 진실의 결여에 있다. 정권 비리를 수사하는 검찰 수사팀을 뿔뿔이 찢어 사방팔방 좌천시켰다. 적폐 청산 수사를 진두지휘해 검찰총장까지 수직상승했지만, 문재인과 갈등하다 사퇴한 윤석열 전 검찰총장은 대선 출마를 선언했다. 말끝마다 검찰 개혁을 들먹이며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법’을 통과시켜놓더니, 야당이 협조하지 않자 이제는 야당을 완전히 배제한 채 공수처장을 임명할 수 있도록 법을 바꾸었다. 집권 여당은 국회 상임위원회 위원장 자리를 모두 독식했다. 1987년 직선제 개헌 이후 전례가 없던 일이다. 입맛에 맞지 않는 뉴스를 ‘가짜뉴스’로 낙인찍고 처벌하겠다는 어엿한 독재 법안까지 들먹이고 있다.


K-방역과 탈원전


우리가 K-방역에 대한 자화자찬에 취해 놓쳐버린 것은 무엇인가? K-방역의 구성 요소는 두 가지였다. 첫째는 의료진의 헌신이다. 둘째는 카드 사용 내역을 비롯한 개인 정보를 아무렇지 않게 들여다보는 국가다. 하지만 한국, 일본, 중국, 베트남 등 동아시아 국가를 제외하면 그런 방법을 택한 나라는 그리 많지 않다. 인권, 특히 프라이버시에 대한 민감도가 달랐기 때문이다. 서구의 방역 당국도 동아시아 국가들처럼 사생활 침해를 감수하면서까지 검사-추적을 할 수 있기를 원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미 지역사회 감염이 만연한 상태에서 많은 자원을 투입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또 프라이버시를 중시하는 자국민들의 여론을 무시할 수도 없다. 결국 각국은 자신들에게 맞는 최적의 방안을 택했을 뿐이다. 세계는 K-방역에 열광하지 않았다.
2020년 3월 5일 발행된 『이코노미스트』는 한국을 비롯한 동아시아권의 ‘검사-추적’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다. “한국의 권력은 시민의 사생활에 아주 작은 비중을 둔다. 한국의 대응 중 일부는 다른 민주국가에 적용되기 어려울 것이다.” 한국의 방역 관행에 열렬한 박수를 보내기는커녕 우려를 표한 것이다. 더구나 문재인 정부는 의료진의 희생을 쥐어짰고, 국민의 고통 분담을 당연한 것인 양 만끽하면서 ‘덕분에 캠페인’을 벌이며 공공의대 설립에 반대하는 의사들을 적폐로 몰아갔다. 지금도 소상공인과 자영업자들에게 길고 고통스러운 시절을 강요하고 있다. ‘방역의 정치화’를 가장 심하게 했고 지금도 하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문재인 정권이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사반세기 전 원자력 발전소에 대한 관리, 감독, 규제를 강화해야 한다고 목청을 높였지만, 지금은 차세대 원자력 기술 개발을 위해 총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2020년 대선 공약이기도 했다. 조 바이든의 원자력 포용 정책은 단지 한 대통령의 태도 변화가 아니다. 50여 년간 지속되어온 미국 민주당의 원자력 에너지에 대한 반대가 찬성으로 돌아섰다는 것을 뜻한다. 초강대국 미국이 거대한 방향 전환을 시작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미국의 정책 전환은 중동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 직접 군사 개입을 하는 ‘세계의 경찰’ 역할을 줄이고, 원자력으로 값싸고 안정적인 에너지를 공급해 산업 경쟁력을 회복하며, 중국이나 인도 등 경제적 잠재력을 지닌 인구 대국에 탄소 배출 절감을 요구하며 압력을 넣기 위한 다목적 포석으로 보아야 한다.
문재인 정권이 야심차게 추진 중인 탈원전과 태양광 발전 확대에 대해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2015~2020년 산지 태양광 시설을 설치하기 위해 벌목된 나무는 307만여 그루다. 그중 문재인 정권 출범 이후인 2017년부터 베어진 나무가 81.3퍼센트를 차지한다. ‘나무를 심는다’는 행위를 지표로 놓고 본다면 문재인 정권은 박정희 시대는 고사하고 태평양전쟁 이전인 일본의 조선총독부 시대와 비교해도 미흡하다. 국토에 대한 장기적인 안목과 책임 의식을 보여주지 않고 있다. 나무를 심는 정권이냐, 나무를 뽑는 정권이냐, 그 하나의 기준을 놓고 보자면 이러한 부정적 평가를 피할 수 없다. 이제는 망국적 탈원전을 멈춰야 한다.


박정희와 진보정당


박정희는 보수인가, 진보인가? 이 질문은 도발적이다. 박정희는 독재자였다. 이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다. 박정희는 권력을 잡고 강화하기 위해 민주화 운동을 탄압했다. 박정희의 철권통치와 군사독재에 맞서 싸운 수많은 사람이 고통을 겪었다. 박정희는 조국 근대화를 위해 수많은 것을 희생시켰고, 온 국민을 일종의 전시체제로 몰아넣었다. 그러나 박정희가 권력을 잡던 시절, 그의 정치는 국민들이 잘살고 싶은 열망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전근대적인 잔재를 일소하고 근대적인 합리성을 장착해 가난을 극복하고 잘살아보자는 에너지가 사회 전반에 넘치고 있었다. ‘잘살아보세’라는 박정희 정권의 모티프는 경제 번영을 향한 열망을 자극했지만, 동시에 ‘살아남아야 한다’는 절박한 생존 본능을 자극했다. 박정희 시대의 의의와 유산에 대해서는 다양한 방향에서 역사적 논의가 진행 중이다. 사실 지금도 끝나지 않은 ‘현재사’라고 보는 편이 더 타당할 것이다.
박정희 시대는 박정희 혼자만의 것이 아니다. 박정희가 대통령이 되도록 만든 에너지가 있고, 박정희가 대통령으로서 만들어낸 결과가 있다. 박정희는 젊은이들에게 합리적이고 근대적인 삶을 살 수 있으리라는 꿈과 희망을 주었다. 1960년대의 국민들이 박정희를 지지한 까닭은 누구라도 재벌이 될 수 있는 기회를 나누어주었기 때문이다. 5·16에는 밥도 있었지만, 시도 있었다. 5·16은 가치중립적인 의미에서 정신사적 사건이기도 했다. 그 의미를 새기고, 배울 것은 배우되 반성할 것은 반성해야 보수 진영, 더 나아가 진보 진영과 대한민국에 미래가 있다. 현재 보수 정치는 과연 국민들에게 그런 꿈을 꾸게 하는가? 지금 한국에는 올바른 시장경제와 합리적인 법치주의를 목표로 삼는 정당이 필요하다.
2020년 4․7 재보궐선거는 여당의 패배, 야당의 압승이었다. 하지만 4·7 재보궐선거의 의의는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 진보 정치의 몰락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진보 정치는 무너졌다. 과연 부활할 수 있을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폭삭 망해버리고 말았다. 4·7 재보궐선거는 진보정당에 불리한 선거가 아니었다. 충청남도, 부산시, 서울시 모두 성폭력과 성추행 등을 이유로 재보궐선거를 치렀다. 더구나 부동산 등 정책 실패가 도드라지는 상황에서 여당에 대한 심판 성격으로 치러지는 선거였다. 서울시장 선거에서 허경영이 3위를 기록한 것은 허경영의 승리가 아니다. 진보 진영 전반의 몰락이다. 여당인 민주당이 혹독한 심판을 당했다면, 그 밖의 진보정당은 아예 대중의 뇌리에서 지워졌다.
한국의 진보 진영은 어째서 허경영보다 못한 처지가 되었을까? 그 이유는 크게 세 가지다. 첫째는 현실 감각의 부재다. 둘째는 핵심 의제의 부재다. 셋째는 권력 의지의 부재다. 4·7 재보궐선거는 가히 ‘기본소득 선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지경이었다. 범진보 진영 후보들이 그렇다. 진보 정치 세력은 ‘기본소득이면 다 해결된다’는 식의 허황된 소리를 그만두어야 한다. 기본소득이라는 단어가 등장하기 전부터 허경영이 그런 소리를 해온 탓에 유권자들이 집단 면역에 도달해 있었으니 말이다. 그 대신 오늘날의 경제적·사회적·문화적 상황에 맞는 핵심 의제를 찾아야 한다. 그것을 대중에게 알리고 대중을 설득하기 위해 꾸준히 선거에 나오고 유권자와 접촉하며 정치적 입지를 확보해나가야 한다.
한국의 정치는 고장이 났다. 거기에 민주주의도 망가졌다. 문재인 정권은 양심의 자유와 표현의 자유를 근간으로 삼는 자유민주주의의 등에 칼을 꽂았다. 문재인 정권 4년 동안 부동산 가격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경제는 위태로워졌고, 남북 관계는 개선될 여지가 없고, 한일 관계는 급격히 악화되었다. 그렇다면, 올바른 정치를 되찾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다양한 세력을 규합하고 의제를 파악하며 담론을 형성하고 대중을 견인하는 등 여러 과정이 필요할 테다. 지금처럼 두 거대 정당이 일관된 방향도 이념도 정책도 없이 여론조사에 따라 춤을 추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이러한 정치 풍조는 시민들의 ‘정치 효능감’을 떨어뜨린다. 정치를 참여하는 것이 아닌 구경하는 것으로 만든다. 진정한 시민 참여가 이루어지는 정당 민주주의의 꿈을 이루기 위해서라도 극성 지지층의 행태는 제지될 필요가 있다. 그러면서 좀더 상식적이고 건설적인 시민 참여의 방식을 고민해야 하겠다. 그것이야말로 정치개혁의 첫걸음이다. 

작가 소개

노정태
자유기고가·번역가. 고려대학교 법학과를 졸업하고 서강대학교 대학원 철학과에서 칸트 철학을 전공해 석사학위를 받았다. 2007년부터 2008년까지 시사·정치 전문지 『포린폴리시』 한국어판 편집장을 역임했으며, 『경향신문』·『주간경향』·『프레시안』·『GQ』 등에 기고했다. 현재 『조선일보』와 『신동아』에 칼럼을 쓰고 있고, 경제사회연구원 전문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탄탈로스의 신화』, 『논객시대』 등이 있다. 『지구를 위한다는 착각』, 『그들은 왜 나보다 덜 내는가』, 『실전 격투』, 『정념과 이해관계』, 『밀레니얼 선언』, 『기적을 이룬 나라 기쁨을 잃은 나라』, 『아웃라이어』 등을 우리말로 옮겼다.

목 차

책머리에 ․ 4

제1장 민주주의와 반민주주의

 한국인들은 왜 민주주의에 반감을 가질까?
민주주의에 대한 균열 15 | 한국은 정치 후진국 18 | 공수처와 가짜뉴스 22 | 의회와 정당이 중심이 되는 민주주의 23
민주주의는 어떻게 위기에 빠지는가?
위기의 민주주의 26 | 할리우드는 왜 찬사를 보냈을까? 29 | 민주화는 386세대가 독점할 수 없다 31 | 브라만 좌파와 강남 좌파 34

제2장 민주화 세대와 조국

 민주화 세대는 없다
386세대는 민주화 세대가 아니다 41 | 민주화 세대라는 훈장 45 | 민주화 세대는 누구인가? 48 | 386세대를 지배하는 반미 이데올로기 50 | 학생 운동권의 ‘존재의 이유’ 54
조국의 애국지사병
“너는 대체 어떤 종류의 사람이니” 58 | 모든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강남 좌파 61 | 검찰개혁과 촛불시민 64 | 독립운동가의 자의식 66 | 내가 세상의 주인공이다, 덤벼라 운명아! 69

제3장 공정과 여성 혐오

 완벽한 공정과 능력주의 사회
 성취와 능력만 부각하는 세계관 77 | 청년 정치 사다리 걷어차기 81 | 엘리트주의를 감수하겠다 83 | 약자와 패배자에 대한 공감과 자비심 85
우리는 박수 칠 자격이 없다
 악녀 장희빈과 이유 없는 적개심 90 | 가시밭길의 이름, 가부장제 93 | “엄마처럼 살지 마라” 95 | 여성 혐오의 생존자 98

제4장 페미니즘과 이루다

 비정상적인 메갈리아 찾기 편집증
 숨은 그림 찾기와 어떤 게임 103 | 어떤 사악한 세력이 숨겨놓은 신호가 있다 107 | 언론의 실패이자 정치의 실패 109 | 병적인 집착과 모욕 111
인공지능 이루다와 남성들의 성폭력
 블랙핑크를 좋아하는 여대생 114 | “저에게는 성별이 없답니다” 118 | 이루다는 ‘싫다’고 하지 못한다 121 | 피와 살과 영혼을 지닌 인격체 124

제5장 거짓말과 표현의 자유

 거짓은 진실을 이길 수 없다
 나는 당신의 말에 동의하지 않지만 129 | 양심의 자유와 표현의 자유 133 | 자유민주주의의 등에 칼을 꽂다 135 | 진실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138
누가 국민의 입을 막는가?
파시즘의 논리와 지식인의 죽음 142 | 북조선의 개와 부시의 푸들 145 | 남북 관계에 찬물을 끼얹지 마라 148 | 삶은 소대가리와 미국산 앵무새 150

제6장 팬덤과 부족주의

 팬덤 정치 잔혹사
 극성 친문의 문자 폭탄 157 | 부자 노인들의 정당 161 | 정당보다 사람 163 | 참여하는 민심, 책임지는 당심 165
부족주의 시대의 정치
 느슨한 애착에서 완전한 몰입까지 170 | 우리는 ‘부족의 시대’에 살고 있다 174 | 바보 노무현에서 친박연대까지 177 | 우리 편과 남의 편을 나누다 180

제7장 소득주도성장과 문재인

 통계는 틀리지 않았다
 정조의 안목과 정약용의 탁월성 185 | 통계청장과 소득주도성장 188 | 주먹구구식 통계 191 | 근대 국가의 민주주의는 정보의 민주주의 194
대통령의 말에 공신력이 사라졌다
 대통령의 말을 믿을 수 없는 세상 197 | 1,368명이 사망했을까? 199 | 탈원전 정책의 밑거름으로 삼다 201 | 선의의 거짓말과 악의의 거짓말 203

제8장 가덕도 신공항과 아파트

 케인스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폐광에 왜 돈을 파묻으라고 했을까? 209 | 풍자를 진지한 조언으로 받아들이다 213 | 정부가 헛돈을 쓰면 경제성장에 도움이 된다 216 | 케인스주의와 페론주의 218
아파트는 빵이 아니다
 푸줏간 주인, 양조업자, 빵집 주인의 이기심 221 | 시장은 사람을 사람답게 만든다 225 | 걸인도 시장의 구성원이다 227 | 인간적 삶의 부정 230

제9장 원자력과 탈원전

 탈원전을 멈춰라
 원자력 반대에서 원자력 찬성으로 235 | 반핵·반전주의자 지미 카터 239 | 기후변화와 셰일 혁명 241 | “원자력, 갑시다” 244
탈원전을 위해 나무를 뽑다
 도쿠가와 막부의 산림 관리 247 | 일본이 길가에 소나무를 심은 이유 250 | “산이 푸르게 변할 때까지 유럽에 안 가겠다” 253 | 나무를 뽑는 정권 256

제10장 K-방역과 프라이버시

 코로나19와 프라이버시
 코로나로 죽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것만큼 어렵다 261 | 세계는 K-방역에 열광하지 않았다 265 | K-방역 예찬론에 취해 놓친 것 268 | 방역의 정치화와 착한 국민 271
코로나19와 가정의례
 의례준칙에서 가정의례에 관한 법률까지 274 | 1920년대 식민지 조선인들도 알았다 277 | 도시의 삶과 전통의 위축 280 | 만들어진 전통과 시월드 282

제11장 박정희와 진보정당

 보수 박정희와 진보 박정희
5·16에는 밥도 있었지만, 시도 있었다 289 | 박정희는 보수인가, 진보인가? 293 | 잘살고 있는 사람들만 잘사는 나라 295 | 보수정당은 왜 ‘늙은 기득권 정당’이 되었는가? 298
진보정당이 허경영에게 패배한 이유
 진보 진영의 몰락 302 | 현실 감각의 부재 306 | 소수자의 정체성 정치 308 | 정의당은 왜 선거를 포기했을까? 310

제12장 북한과 김정은

 북한 판타지의 기원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317 | 우리에게 힘이 되는 존재 321 | 우리의 소원은 전쟁 324 | 덜 군국주의적이며 더 휴머니즘적인 서사 328
남한은 북한의 조력자인가?
‘북한을 이긴다’와 ‘잘살아보세’ 332 | 기아와 영양실조의 땅 335 | 낭만적 대북관과 구차한 대일관 338 | 반인륜적 만행까지 저지르는 나쁜 친척 340

참고문헌 ․ 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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