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누가 그들을 거래의 대상으로, 간첩으로, 도구로 만드는가
‘북한이탈주민’ ‘탈북민’ ‘귀순용사’ ‘통일의 마중물’ 그리고 잠재적 ‘간첩’……
누군가의 필요에 따라 이름이 바뀌는 망명자들의 목소리
누가 그들을 도구로 만드는가
남과 북이 정전협정을 맺은 지가 벌써 70년이 가깝다. 그래서인지 누군가에게 분단 체제라는 현실은 구체적인 삶의 모습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그만큼 한국 사회는 그에 무관심하기도 하다. 하지만 이 분단 체제라는 현실이 삶 가장 가까이에 붙어 있는 한국 사회의 구성원들이 있다. 바로 탈북민들이다. 상황에 따라 ‘낯선 우리’가 되기도, ‘익숙한 남’이 되기도 하는 사람들. 그들은 남북의 체제 경쟁이 심할 때는 국가유공자에 준하는 ‘귀순용사’로 대접받기도 했고, 최근에는 ‘통일의 마중물’ ‘먼저 온 통일’이라는 외교적 수사로 불리기도 한다. 하지만 순식간에 ‘잠재적 간첩’으로 지목되기도 한다.
먹고살 길을 찾아, 혹은 남한 사회를 동경해 탈북한 이들에게 ‘또 하나의 조국’인 이곳은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까. 이 책, 《탈북 마케팅》이 드러내는 한국 사회의 얼굴은 잔인하고 처참하다. 탈북의 순간부터 한국에 발을 디디고 한국 사회에 정착한 뒤에도, 전반적인 무관심 속에서 이용 가치에 따라 마치 도구처럼 탈북민을 이용하고 외면한다. 한국의 정부, 검찰, 사법부, 국가기관(국정원), 언론부터 사회 전반에 깔린 배제와 차별까지, 한국 사회에서 탈북민이라는 존재들은 동포는커녕 인권을 가진 한 사람, 동등한 시민으로조차 취급되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 특히 국정원의 묵인 속에서 브로커를 통해 한국으로 들어오는 북한 주민들, ‘간첩 제조 공장’이라는 끔찍한 별명으로 불리기도 했던 국정원의 중앙합동신문센터(합신센터, 현 ‘북한이탈주민보호센터’)의 간첩 조작 피해자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노라면 탈북민을 그저 필요에 따라 이용하는, 거래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의심스럽다.
“그들은 북한을 떠나오는 순간 국가라는 안전망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망명자가 되는데, 또 하나의 조국이 되어야 할 대한민국은 그들을 탈북 마케팅에 이용하는 소모품으로 취급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9쪽)
탈북민을 언제든 필요에 따라 도구처럼 활용하는 태도의 정점에 바로 탈북민 간첩 조작 사건들이 있다. 서울시 공무원 간첩 조작 사건의 피해자인 유우성 씨의 사건을 취재해 《간첩의 탄생》이라는 책을 출간했던 저자 문영심은 국가폭력 피해자 지원 단체 ‘민들레: 국가폭력 피해자와 함께하는 사람들’의 의뢰로 유우성 씨를 포함해 심각한 인권 침해를 당하며 간첩 혐의를 받았던 탈북민들을 인터뷰했고, 그를 바탕으로 이 책을 집필했다. 간첩 혐의를 받았던 사람들뿐만 아니라 탈북민 전체가 경험한 석연치 않은 탈북 경로와 탈북 과정에서 일어나는 인권 침해를 기록했다. 한국행을 결심하는 그 순간부터 국정원과 브로커의 긴밀한 네트워크 속에서 탈북민이 어떻게 거래의 대상이 되는지, 한국에 들어온 탈북민을 이 사회가 필요에 따라 어떻게 이용하는지, 이런 구조 속에서 탈북민들이 한국에서 정착하는 데 어떤 어려움을 겪는지를 국정원 합신센터에서 간첩으로 조작된 탈북민들의 목소리를 중심으로 낱낱이, 그리고 생생하게 드러냈다.
‘또 하나의 조국’으로 오는 길
탈북민의 숫자가 많아졌다고 해도 북한에서 한국으로 들어오는 길은 여전히 누구에게도 쉽지 않다. 한국으로 오는 대부분의 탈북민은 중국으로 넘어가 제3국(주로 태국)을 거쳐 한국으로 들어오는데, 중국에서 넘어간 제3국의 난민수용소에서 지내는 기간만 대부분 한 달 전후다. 중국으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중국 공안에 붙잡히면 중국 정부가 탈북민을 한국으로 보내지 않고 북한으로 송환하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안전한 탈북을 위해 탈북 브로커에게 큰돈을 지불해야 한다.
그런데 이런 천신만고 끝에 ‘또 하나의 조국’에 도착한 이들은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망명자’가 되어 국가정보기관인 국정원 산하의 합신센터의 조사를 받게 된다. 간첩 혐의라도 받게 되면 독방에 가두고 최장 6개월까지도 감금될 수 있었다. 무죄 추정의 원칙 같은 것은 적용되지 않았다. 얼떨떨한 상태로 남한 사회에 대한 정보도 충분하지 않은 상태에서 최소한의 방어권도 없이 자신의 신상을 낱낱이 털어놓아야 한다. 놀랍게도 허위자백을 강요받아 간첩으로 실형을 살다온 탈북민들이 실재한다. 심지어 이들 가운데에는 국정원이 정보원으로 이용하던 사람들도 있다. 국가보안법이 존속하는 분단 체제 속에서 불안정한 지위를 지닌 탈북민을 국가 없는 망명자로 만들고 덫을 놓아 간첩으로 조작을 하는 일이 21세기에 벌어지는 것이다. 국정원은 필요에 따라 탈북민을 북한 사정을 캐내는 정보원으로 쓰다가, 금세 간첩이 필요해지면 그들을 간첩으로 만든다. 사람을 도구처럼 필요할 때 이용하고 버리는 셈이다.
이 책의 인터뷰 대상자 9명 가운데 7명이 간첩 조작 사건의 피해자들이다. 서울시 공무원으로 일하던 유우성 씨가 강압에 의한 동생의 허위자백으로 간첩으로 조작되고, 홍강철 씨가 북한 보위사령부에서 직파된 남파간첩이라고 허위자백을 강요받아 간첩으로 몰린 것이 고작 2013년의 일이다. 현재 유우성, 홍강철 씨 모두 최종적으로 무죄판결을 받았으나 유우성 씨는 이후 외국환거래법, 북한이탈주민법 위반, 공무집행방해죄 등으로 기소되었는데, 이는 ‘보복성’ 기소로 볼 여지가 크다. 국제영화제에서 많은 주목을 받았던 다큐멘터리 영화 <마담B>(2016)의 주인공인 배지윤 씨는 합신센터에서 간첩으로 조작될 뻔하다 하나원으로 넘어갔지만, 간첩 조작에 실패한 것에 대한 보복인 듯 정착지원을 받기 위한 보호처분을 받지 못하게 되어 탈북민이 받을 수 있는 지원을 일절 받지 못해 어려움을 겪고 있다. 1974년에 탈북한 김관섭 씨는 남한에서 ‘멸북’을 외치며 안보 강연, 반북 강연으로 생활해왔다. 허나 귀순 당시에 당했던 모진 고문과 국가폭력에 대한 보상을 요구하고 증언을 이어가고 있다. 합신센터에서의 집요한 허위자백 강요를 받아 결국 간첩이라고 억지로 인정하며 실형까지 살았던 이혜련 씨와 김정애 씨(가명) 강압적 조사 과정에서 몸과 마음을 크게 다쳤고, 한국에서 정착해 잘 지내고 있다가 간첩 혐의를 받아 실형까지 살고 나온 김덕일 씨의 경우는 자신이 남과 북 모두에게 버림받았다고 생각하며 살아가고 있다.
합신센터를 나와 하나원을 거쳐 한국 사회에 정착하더라도 탈북민들은 스스로를 자조 섞인 목소리로 ‘한국인, 조선족에 이은 3등 국민’이라 칭할 정도로 차별과 배제를 경험하게 된다. 탈북민의 자살률은 한국 평균 자살률에 비해 3배 이상 높다는 결과도 있으며(2018년 탈북민의 자살률은 약 15퍼센트였다), 안정된 직업을 얻기도 힘들다. 통일부 실태 조사에 따르면 탈북민 가운데 절반에 가까운 사람들이 실업 상태에 있다. 2019년에는 탈북민 모자가 생활고에 시달려 사망한 사건도 있었다.
이 사회의 무관심과 의심 사이에서 탈북민들은 한국 사회에서 먹고살 길을 찾아 ‘극우 시위꾼’이 되거나 남과 북이 공식적으로 합의한 내용마저 무시하고 대북전단을 뿌려대며 자신들의 존재를 어필하고, 북한과 관련된 가짜뉴스를 생산하며 한국의 극우 세력에게 러브콜을 보내거나 세계적인 ‘북한인권운동가’가 되기도 한다. 교회에 나가 ‘신앙 간증’을 하기도 한다. 방송에 나가 각본에 따라 증언을 하기도 한다. 돈이 되기 때문이고, 이 사회에 섞여 구성원으로 살아 남기 위한 방법이기도 한 셈이다. ‘나는 간첩이 아니다’라는 것을 어필하기 위해 어떤 탈북민이 간첩으로 지목되면 그를 처벌하라고 목소리를 높이는 아이러니한 장면이 연출되기도 한다.
탈북을 둘러싼 반인권적 장사, 탈북 마케팅
이 책에 따르면 간첩 혐의를 받지 않은 탈북민이라 하더라도, 그 자체가 일종의 ‘장사’가 된 지 오래인 탈북 과정을 대다수 경험한다. 탈북의 경로, 탈북민을 둘러싼 과정은 그 자체가 이미 반인권적이다. 저자는 이런 경로와 과정을 ‘탈북 마케팅’이라고 명명한다.
“‘또 하나의 조국’이라고 믿고 한국행을 선택한 탈북민들은 왜 하나같이 자신들이 받아야 할 정착금을 빼앗아가는 ‘브로커’에 의존해야 하는가? 국정원은 왜 브로커를 묵인하고 이용해서 탈북민들을 한국으로 데려오는 데 개입하는가? 국정원에서 이런 비정상적이고 불법적인 방식으로 북한 주민들을 데려오는 것을 알면서 통일부는 왜 묵인하는가? 나는 브로커가 개입하고 돈이 오간다는 점에서 국정원이 하는 탈북민 사업을 ‘탈북 마케팅’이라고 부르기로 했다.”(11쪽)
이 땅에 살고 있는 탈북민은 약 3만여 명으로 추정된다. 이들이 북한에서 한국으로 오는 길은 예외 없이 험난한데, 이 과정에서부터 탈북민은 어떤 거래의 대상이 된다. 중국에서 지내며 한국으로 오고자 하는 북한사람이든, 북한에서 한국행을 결심한 북한사람이든 대부분 그들이 한국으로 오는 길에는 브로커가 필요하다. 고난의 행군 이후 중국으로 나오는 탈북민 숫자가 늘어나면서 1990년대 말부터 브로커를 통한 한국행이 거의 공식처럼 굳어진 것이다. 중국 공안에게 잡히면 다시 북한으로 송환되기 때문에 다른 방도가 없다.
탈북을 해서 한국까지 오는 데 1,000만 원에서 1,200만 원 정도의 비용이 들고, 브로커 비용의 상당 부분을 한국에 도착해서 받게 되는 정착지원금으로 충당한다. 그런데 이 정착지원금은 세금에서 나오는 비용이기도 할뿐더러, 무엇보다 탈북민들이 한국 사회에 정착하는 데 꼭 필요한 비용이다. 이런 돈이 브로커들에게 흘러가는 것이 뻔한데도, 탈북민을 안전하게 수용하는 방법을 찾는 대신 한국 정부와 정보기관은 이를 묵인하고 있다. 국정원과 통일부는 브로커의 존재를 정확히 알고 있고 탈북민들이 그들에게 정착지원금의 상당 부분을 빼앗긴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탈북민들은 한국 사회에 정착한 이후에도 북에 있는 가족들과 통화를 하거나 가족들에게 송금하기 위해 또 브로커를 통해야 하며, 그 과정에서 수수료를 지불해야 한다. 심지어 이는 국가보안법 위반이 될 수도 안 될 수도 있어, 후에 탈북민들의 약점이 되기도 한다. 여러모로 기형적 구조다.
“인신매매나 다름없는 이런 거래를 통해서 탈북민들은 한국 정부에서 주는 정착금의 상당 부분을 브로커에게 빼앗겨야 한다. 이런 기형적인 구조를 한국 정부에서 알면서도 묵인하고 있다는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중략) 한국 정부는 중국 국경을 넘은 탈북민들이 정착금을 빼앗기지 않고 인권 침해 없이 안전하게 한국으로 올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것일가? 아니면 고의적으로 이런 비정상적인 탈북 네트워크를 방치하고 이용하는 것일까?”(80쪽)
국가 정보기관인 국정원은 브로커의 존재를 인지하는 정도가 아니라 주로 탈북 브로커들을 정보원으로 활용하기까지 한다. 브로커가 국정원에 탈북 의사가 있는 사람을 미리 말해서 허락을 받아야 탈북이 가능하다는 정황도 있다. 탈북 브로커들은 탈북하고자 하는 사람들을 통해 돈을 벌기 때문에 탈북 의사가 없는 사람을 한국에서 몇 년 일하면 큰돈을 벌 수 있다는 식으로 부추기기도 한다. 그리고 이 브로커의 대다수가 탈북민들이다. 결국 탈북민이 더 많은 탈북민을 유인하는 구조이고, 이 구조를 만드는 데 국정원이 판을 깐 셈이다. 국정원은 한국에 정착한 탈북민에게 접근해 그들을 정보원으로 이용하기도 한다. 브로커와 국정원의 네트워크 속에서 탈북을 둘러싼 장사, 즉 탈북 마케팅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다가도 국정원은 필요에 따라 탈북민을 간첩으로 몰아 북풍공작을 하는 데 이용한다.
“국정원은 탈북민을 브로커와 정보원으로 이용하면서 탈북 마케팅을 하고 있다. 탈북민이 더 많은 탈북민을 유인하는 구조다. 그 와중에 탈북민은 브로커 비용으로 정착금을 빼앗기고 다시 정보원으로 이용당하기도 한다.”(93쪽)
“당신들은 대한민국 국민도,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에 인권을 존중해줄 필요가 없다”
탈북민을 대상으로 하는 장사는 단순히 돈벌이뿐만이 아니라는 것이다. 오랜 기간 한국 사회는 탈북민을 필요에 따라 손쉽게 ‘우리’로 만들기도 ‘남’으로 만들기도 했다. 남북의 체제 경쟁이 심했던 때에는 그들을 ‘귀순용사’로 대접하며 체제 선전에 이용했다(하지만 영부인 육영수가 피격된 직후 탈북을 했던 이 책의 인터뷰이 중 한 명인 김관섭 씨는 시기를 잘못 선택한 바람에, 일곱 시간을 헤엄쳐 한국에 도착했지만 간첩으로 몰리며 중앙정보부에서 45일간 모진 고문을 당했으며, 간첩 혐의가 풀린 뒤에도 대성공사에서 3년 반을 생활했다. 여기에는 어떤 법적 근거도 없다). 반북 강연, 안보 강연의 연사로 그들을 활용하기도 했다(그런데 평생을 안보 강연으로 생활해온 김관섭 씨의 증언에 따르면 국정원 직원들은 그 강연비의 절반을 가로채기까지 했다).
탈북의 시작에서부터 한국 정부과 정보기관의 묵인 혹은 적극적 협력 아래 거래의 대상이 된 탈북민들은 한국에 도착하면 국정원 산하의 합신센터에서 조사를 받아야 한다. 2018년 관련 법 개정 전에는 최대 180일, 즉 반년까지도 합신센터에서 탈북민을 조사할 수 있었으며, 그 과정에서 탈북민 인권 침해에 대한 문제 제기가 지속적으로 이루어졌다.
“탈북민은 한국에 들어오는 순간 잠재적인 간첩으로 취급되면서 국정원 합신센터에서 조사를 받으며 자신의 신상을 낱낱이 털어놓게 된다. 한국 사회에 대한 사전 지식이 없고 한국 법률에 대한 상식도 전혀 없는 탈북민들은 합신센터에서 심각한 인권침해를 당한다. 그들은 합신센터의 조사 과정이 한국인이 되기 위한 당연한 절차라고 받아들이고, 방어권이라는 개념도 모르는 채 국정원 조사관들에게 인권 침해를 고스란히 당하고 있다.”(93쪽)
수사가 아니라 행정조사의 과정임에도 불구하고 수사기관의 수사보다 더 혹독한 경우가 많았다. 간첩 혐의가 있는 경우 CCTV가 설치된 독방에 가두고, 고문에 가까운 반복적인 자서전 쓰기를 강요하며 그것을 빌미로 약점을 잡는다. 홍강철, 김정애, 배지윤 씨는 손가락 모양이 변형될 정도로 진술서를 많이 썼다고 한다. 이 책에 등장하는 김정애 씨(가명)의 경우는 자신의 키 높이만큼의 진술서를 썼다고 말하기도 한다. 이 진술서를 기반으로 약점을 잡는데, 이때 원래 국정원에 정보를 준 사람들을 이중간첩으로 몰아간다. 심지어 김정애 씨는 ‘안기부’가 ‘국정원’으로 바뀐 것도 몰랐던 데다가, 북한의 핵심계층 출신이라 국정원에서 정보원으로 이용하기도 했는데 그를 이중간첩으로 몰아가기도 한다. 회유와 협박을 번갈아 한다. KAL기 폭파범 김현희가 사람을 그렇게 많이 죽였지만 자백했기 때문에 남한에서 잘살고 있다는 식으로 기사를 보여주기도 한다. 시나리오를 짜서 힌트를 던져주는 것도 예삿일이다. 자신을 함부로 대한 조사관이 괘씸해 자신이 간첩이고, 북한에서 남파되며 거짓말탐지기를 통과할 수 있는 밴드를 붙이고 왔다는 이혜련 씨의 황당한 거짓말은 아무런 물증도 없이 법정에서 증거로 인정되기도 했는데, “이혜련 씨는 자신이 아이디어를 내고 조사관들이 거기에 내용을 더 보충해주었다”라고 했다(이혜련 씨 사건은 sbs의 <그것이 알고 싶다>에도 방영이 된 적이 있다).
심지어 이들이 남한의 법을 전혀 모른다는 것을 악용해 구치소에 가고 재판을 받아야 한다는 것을 알려주지도 않는다. 조사관들이 요구하는 대로 간첩이라고 인정만 하면 하나원으로 보내준다고 알고 있었다는 증언들이 일치한다. “간첩 혐의를 받는 탈북민들은 기소가 된 것도 아니고 구속이 된 것도 아닌 상태에서 무죄 추정의 원칙이 지켜지지 않은 채 범죄자 취급을 받는 조사 과정을 거쳐 만신창이가”(152쪽) 되고, 불안하고 혼란스러운 상태로 한국에 도착한 탈북민들이 독방에 갇혀 강압적 조사를 받다보면 정상적 판단 능력을 잃게 되는 경우도 많다.
거짓말탐지기를 동원해 위압감을 조성해 허위자백을 유도하기도 하고, 마치 가스라이팅을 하듯 탈북민을 길들이고 지배한다. 조사관들은 “자신들이 요구하는 자백이 별것 아닌 것처럼 이야기하고 자백하면 많은 보상이 따를 것”(240쪽)이라고 회유한다. 홍강철 씨의 경우는 담배를 피우지 못해 금단증상에 시달렸는데 담배를 준 조사관에서 보답을 하려고 보위부 정보원 노릇을 했다는 최초의 거짓진술을 하게 됐다. 유우성 씨의 동생 유가려 씨는 자신을 큰삼촌이라고 부르게 하거나 자신을 돌아가신 엄마처럼 생각하라고도 하는 조사관들에게 둘러싸여 친오빠인 유우성 씨가 간첩이라고 허위증언을 하도록 몰아갔다. 조사관들은 심지어 감옥에 있는 탈북민에게 영치금을 넣어주고 살 집을 마련해주기도 한다. 낯선 환경에 처한 그들이 출소한 후에도 자신의 지배력 아래 두고 이용하려는 속셈이다. 저자는 “탈북민들의 진술을 들으면서 피해자가 가해자에게 심리적으로 지배당하고 의존하는 관계를 맺고 거기서 잘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확인했다”(241쪽).
게다가 탈북민을 간첩으로 모는 것에서 끝나는 것도 아니다. 이 과정에서 가까운 사람과 이간질을 한다. 어떤 탈북민을 간첩으로 조작하는 데 또 다른 탈북민의 허위증언을 이용하기도 한다. 피해자가 어쩌다 한번 본 사람일 수도, 피해자와 아주 가까운 사람일 수도 있다. 탈북민은 다른 탈북민이 간첩이라는 것을 증언하는 데도 동원된다. 그렇다고 증언하는 탈북민을 보호하는 것도 아니다. “국정원은 필요할 때마다 탈북민을 이용한다. 간첩 사건에서 핵심 증인으로 등장하는 것은 언제나 탈북민이다. 언론은 국정원이 주는 정보를 확인도 하지 않고 그대로 베껴 쓰고 국정원이 하라는 대로 탈북민을 인터뷰한다. 국정원은 이렇게 탈북민을 이용하면서도 탈북민이나 그의 가족의 신변을 보호하는 데는 관심을 갖지 않는다.”(252쪽) 그리고 이 과정에서 상처를 받는 것은 탈북민들뿐이다. 국정원의 사주로 허위증언을 한 탈북민도 보호받지 못하며, 특히 가까운 사람들이 자신에 대해 허위증언을 했다는 사실은 간첩 조작 사건의 탈북민 피해자들에게 깊은 상처가 된다. 김덕일 씨의 경우는 가깝게 지냈던 후배가 자신이 간첩이라는 허위증언을 했다는 사실에 깊은 배신감을 느꼈고, 유우성 씨의 경우도 자신이 잘 아는 지인이나 자신이 도움을 주었던 탈북민 청년들이 자신에게 불리한 증언을 하거나 침묵했다는 사실에 크게 상처를 받았다. 배지윤 씨도 간첩 혐의를 벗고 하나원에 들어갔을 때 간첩 혐의를 받았다는 사실 때문에 하나원 안에서 탈북민들에게 왕따를 당했고, 그 이후 사회로 나와서도 탈북민들과는 만나지 않는다고 했다. 탈북민을 한 사회의 시민으로, 인권을 가진 개인으로 존중한다면 가능하지 않은 일이다.
“합신센터에서 간첩 혐의를 받고 강압적이고 폭력적인 조사를 받던 한 탈북민은 “한국은 자유민주주의라면서 우리는 인권도 없습니까?”라고 항의하자 국정원 조사관이 “당신들은 대한민국 국민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에 인권을 존중해줄 필요가 없다. 당신이 여기서 죽어 나가도 아무도 상관하지 않는다”라고 대답했다고 증언하면서 눈물을 흘렸다.”(12쪽)
무관심과 의심 사이에서 살아남기
우리 사회에서 가시화된 탈북민은 대부분 반북, 극우적 행보를 보이게 마련이었다. 대북전단 살포부터 북한에 대한 가짜뉴스까지 퍼뜨리며 반북을 외치고, 친미를 외친다. 분단 체제 속에서 경계적 존재로 살아가는 이들에게 어쩌면 그것은 생존의 전략일지 모른다. 반북을 외치면 돈을 벌 수 있고, 남한 사회에서 의심받지 않고 살아갈 수 있다. 심지어 간첩이 아닌데도 자신이 간첩이라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언론에도 꽤 크게 보도되었던 원정화라는 사람은 자신이 보위부 남파 간첩이라고 주장하던 사람인데, 나중에는 아니라고 하다가 나중에는 다시 자신이 간첩이 맞다고 하며 종편 방송이나 유튜브 방송 등에 출연한다. 스스로 만들어낸 허구를 진실로 믿고 있을지도 모르고, 돈을 벌기 위해 세간의 관심을 끌 필요가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김미화라는 사람은 자신이 간첩이고 자신의 오빠가 거물 간첩이라고 고백을 했는데 국정원은 2년여간 5,800만 원의 활동비를 그에게 지급했다. 그 거물 간첩이라는 오빠는 찾을 길은 없었다. 그의 말이 진실일 가능성은 극히 낮아 보이는데, 그런 그는 현재 어버이연합과 힘을 합쳐 탈북자 단체의 대표를 맡아 반북 활동을 이어나가는 중이다.
“지금까지 우리 사회에서 목소리를 내는 탈북민들의 활동은 ‘극우세력’에 동조하는 ‘반북’의 프레임 안에 있었다. 표현의 자유를 내세우며 대북전단 살포를 강행하려는 박상학 씨나 국제적 북한 인권 활동가라는 타이틀을 두르고 북한 체제를 비방하는 데 앞장서는 박연미 씨 같은 사람들이 유명세를 탔다. 북한을 적으로 규정하고 적극적으로 부정하지 않으면 한국의 적이라고 의심받기 일쑤인 분단 체제 속에서 탈북민들은 스스로를 ‘극우’와 ‘반북’이라는 자리에 놓는 것이 안전하다고 느껴왔다. 국가보안법이 시퍼렇게 살아 있는 한국 사회에서 한국인들조차 자기 검열을 하면서 몸을 사려야 할 때가 있는데 한국 사회가 자신을 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을까 불안한 탈북민이 자기 검열을 하는 것은 당연하다.”(284쪽)
하지만 북한은 탈북민에게 고향이자 조국이다. 반북 성향의 탈북 단체들이 시위에서 성조기를 펄럭이는 장면은 실은 가슴 아픈 장면일 수 있다. 자신이 떠나온 조국에 침을 뱉어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는 생존의 전략을 학습하게 한 것은, 자신이 나고 자란 곳이자 가족과 친구들이 있을 그곳을 부정하도록 만든 것은 과연 누구일까.
“미국의 후원금이 주 수입원인 그들에게는 ‘친미=애국=극우’의 등식이 성립하기 때문이다. 자신이 떠나온 ‘조국’에 침을 뱉어야 생존할 수 있는 반북 단체의 탈북민들은 그 ‘조국’에서 사는 동안 내내 타도 대상으로 증오심을 키워온 ‘미국’을 떠받들어야 살아남을 수 있게 된 것이다.”(234쪽)
같은 탈북민들이 북한을 함부로 말하는 것이 거북한 이들도 있을 수밖에 없고, 북한 사회를 그리워하는 부분도 당연히 있을 수밖에 없다. 재입북한 탈북민들도 존재한다. 한국에 정착했다가 한국 사회의 탈북민 차별로 인해 다른 나라로 떠난 탈북민들도 많다. 특정한 정체성을 갖고 있다고 해서 모두가 같은 사람일 수 없고, 탈북민들 역시 균질하고 추상적인 존재가 아니라 구체적인 개인들이다. 간첩 조작 사건의 피해자이자 최종적으로 무죄선고를 받은 홍강철 씨의 경우는 유튜브 채널을 통해 반북 활동이 아닌 다른 목소리를 내며 북한 사회의 현실을 알리고 있다.
하지만 통일부 산하의 하나원(현 ‘북한이탈주민정착지원사무소’) 같은 탈북민 초기 교육기관 같은 경우에도 북한에서 살아온 이들에 대한 배려나 이해가 부족하고, 탈북민을 어린아이처럼 취급하기도 한다. 한국 사회는 전반적으로 탈북민(혹은 여타의 이주자들)에게 일방적 동화를 강요할 뿐 그들의 사회와 문화를 이해하려 노력한다고 말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국정원 같은 특정 기관으로부터의 ‘투명한’ 폭력뿐 아니라 한국 사회 전반에 깔린 탈북민에 대한 무관심과 일방적 동화에 대한 강요, 차별 역시 우리 모두가 한 번쯤 되돌아봐야 할 문제가 아닐까.
작가 소개
문영심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를 졸업했고 27년간 방송 다큐멘터리 작가로 활동했다. 간첩 조작 사건을 취재하며 탈북민 문제에 관심을 두게 되었고, 이후 탈북민들의 삶과 그들을 존중하지 않는 한국 사회의 구조적 문제를 더 깊이 있게 바라보게 되었다. 지은 책으로 《간첩의 탄생: 서울시 공무원 간첩 조작 사건의 진실》 《바람 없는 천지에 꽃이 피겠나: 김재규 평전》 《이카로스의 감옥: 이석기 내란음모 사건의 진실》, 《문작가의 제작노트: 애국자게임2-지록위마》 등이 있다.
목 차
머리말
인물 소개
1. 귀순용사 시대의 인권 침해
2. 고난의 행군과 북한이탈주민
3. 탈북민 3만 명 시대
4. 브로커.국정원의 탈북 네트워크
5. 스스로 판 함정에 빠지다
6. 통일사업과 이중간첩
7. 북한이탈주민법의 위헌성
8. 내가 왜 국가보안법 위반인가
9. 비보호 처분
10. 동원: 정보 조작과 여론몰이
11. 길들이기와 지배하기
12. 우리는 도구가 아니다
맺음말
참고자료
재화 등의 배송방법에 관한 정보 | 상품 상세설명페이지 참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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