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네트워크 속에서 견해차를 지식으로 변환하는 체제는 인류가 인지적 오류를 극복한 혁신적 해결책이다
이 책은 부족중심주의와 편향이라는 인지적 오류를 인간 본성의 중요한 일부로 인정하는 데서 출발한다. 불확실하고 복잡한 세상에서 개개인이 어느 방향으로 갈지를 가늠하는 지름길이 편향이라면, ‘나’가 아닌 ‘우리’의 편향을 공유하는 게 가장 안전하기 때문에 부족중심주의가 유지되어왔다. 수십만 년간 인간은 내가 속한 부족과 좋은 평판을 유지하도록 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믿어버리는 연습을 해온 셈이다.
신념이 집단을 정의하고 결합하는 기능을 수행한다면, 그것은 집단 구성원들에게 신성한 믿음이나 종교적 신앙의 사회적 역할을 한다. 따라서 사실이 신념에 도전한다면, 신도들은 그 사실을 부인하고 자기편과 연대를 증명하고 적들을 향한 반감을 공표하려 들 것이다. 정치적 스펙트럼의 양극단에 있는 집단들이 사이비 종교 광신도와 흡사한 양상을 띠는 건 그 때문이다. 역사에서 크고 작은 신조 전쟁이 수세기 동안 맹위를 떨친 이유이기도 하다. 그러나 인류는 자멸하지 않았다. 바로 ‘지식의 헌법’ 덕분이다.
그렇다면 ‘지식의 헌법’이란 무엇인가? 한마디로 ‘견해차를 지식으로 변환하는 사회 체제’다. 여기에는 과학을 비롯한 학문의 세계, 저널리즘, 정부 기관 및 법률 등의 제도, 진실성과 팩트 체크 같은 밀도 높은 규범 및 원칙의 네트워크, 동료 평가자와 전문가들의 전문 지식, 소셜 미디어 플랫폼 같은 시스템이 모두 포함된다. 또한 이 체제 전체는 지식을 만드는 방식에 옳고 그른 게 있다는 공동의 이해에 의존한다. 이러한 가치·규칙·제도를 통틀어 ‘지식의 헌법’이라 한다.
조너선 라우시는 이 책 전반부의 상당 부분을 17~18세기로 거슬러 올라가 현대의 인식론적 질서가 어떻게 구축되었는지 차근차근 맥을 짚는 데 할애한다. 근대 자유주의의 3인방이라 일컫는 존 로크, 애덤 스미스, 제임스 매디슨을 필두로 여러 세대의 천재 사상가 및 과학자들이 등장하고, 경제적·정치적·인식론적으로 기존의 생각을 뒤집는 일대 혁신들 가운데 지금의 ‘지식의 헌법’이 잉태됐다. 지식은 개인이나 집단적 노력의 산물이 아니라, 사회적 네트워크에서 벌어지는 상호 작용의 창발성으로 새롭게 정의되었다.
하지만 이 체제는 힘겹게 싸운 전투와 힘들게 얻어낸 규범 및 제도의 산물이고, 그 과정에서 많은 사람이 고통받고 피를 흘렸다. ‘지식의 헌법’은 결코 저절로 유지되지 않았으며, 끊임없는 도전과 위협이 닥쳤을 때마다 그것을 다시 이해하고 옹호하고 수호하려는 사람들에 의해 현재에 이르렀다. 그리고 지금 그 바통은 우리 세대에 넘겨졌다.
인터넷의 선동가·사기꾼·사이코패스들에게, 공동체의 강압적 동조에 휘둘리지 않을 수 있을까
전반부에서 역사와 이론적 배경에 중점을 두었다면 후반부에서는 현 시대의 미국 사회에 날카로운 메스를 들이댄다. 먼저 트위터 창립자가 고백했듯이, 오늘날 디지털 생태계를 태동시킨 미국의 상업적 인터넷은 애초부터 인식론적 결함에서 출발했다. 광고를 비즈니스 모델로 삼은 탓에 주목성이 최우선이 됐고, 의미나 가치가 아니라 조회 수와 팔로워 수에 따라 컴퓨터 엔진이 작동했다. 그 결과, 대화와 지식보다는 바이럴이 분노와 허위 정보에 안성맞춤인 시스템으로 자리 잡았다. 디지털 미디어는 ‘지식의 헌법’과 정반대 방향을 향했다.
여기서 조너선 라우시는 트롤링(6장)과 취소 문화(7장)에 특히 주목한다. 전자는 허위 정보와 대체(가짜) 현실을 전파시키고, 후자는 강압적 동조와 이념적 블랙리스트를 확산시킨다. 전자는 미국에서 주로 포퓰리스트 정치인과 우파 세력이, 후자는 엘리트주의 정치인과 진보임을 자처하는 좌파 세력이 애용하는 전략이다. 그러나 두 진영은 결과적으로 서로를 강화시켜주는 묘한 공생 관계를 이룬다. 알고 보면 그들은 목표도 같다. 정치적(또는 경제적 또는 평판상) 이익을 위한 사회 및 미디어 환경의 조작이다.
이 책의 트롤링 사례들은 기가 막히다. 기발하고 정교해서가 아니라 허접하고 아무런 증거 없이 일단 우기고 보기 때문이다. 하지만 보기와 달리 트롤러들은 인간의 인지적·감정적 취약성을 치밀하게 서서히 파고드는 프로파간다 선수들이다. 심지어 이제는 조직적이기까지 하다. 트롤링은 더 이상 유명해지고 싶은 소위 관심종자나 정치에 대한 국민들의 정치 염증을 유발하려는 극우 정치인들만 하는 짓이 아니다. 러시아 정보국, 댓글 알바 부대에 검색 봇과 알고리즘도 합세했다. 미국의 보수 저널리즘 생태계도 전무후무한 규모의 허위 정보를 들이대며 죽자 사자 뛰어들었다. 실로 하이테크 정보 전쟁이다.
그런가 하면 취소 문화는 구성원들에게 동조를 강제함으로써 ‘지식의 헌법’을 지탱하는 현실 기반 공동체 내부에 균열을 낸다. 트위터에 무심코 남긴 한마디 때문에 하루아침에 생계와 평판과 사회적 인맥을 모두 잃은 직장인과 자영업자만 취소 문화의 희생자가 아니다. 라우시는 동급생의 따돌림이 무서워 혹은 학생들의 평가가 겁나서 인종·젠더·계층 같은 특정 주제를 캠퍼스에서 아예 언급조차 하지 않는다는 대학생들과 교수들을 인터뷰한다. 그들처럼 집단 내의 지배적 견해와 다른 의견을 개진하는 순간 취소당할 것이 두려워 자기 검열을 통해 입을 다무는 많은 이들 역시 희생자다.
하지만 이 지배적 견해도 다수인양 조작된 소수의 횡포일 때가 많다. 온라인 선전가들은 알고리즘 증폭과 허구의 인물을 활용해, 가령 백신 접종 거부자 같은 소집단을 그럴싸한 대규모 학파처럼 보이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주변 신호를 따라가는 사람들은 이런 가짜 여론 분포를 잘못 해석해 자신이 고립되어 있다고 추정하고, 급기야 자신의 생각을 숨기고 지배적 견해에 동조하(는 척하)는 쪽을 택할 수 있다. 이렇게 되면 공동체는 인식론적 버블로 전락한다. 버블 안의 사람들은 자신이 활발한 논쟁과 비판에 참여한다고 믿지만, 실제로는 공통의 편향을 확인하고 재확인하는 작업만 반복할 뿐이다.
그러나 조너선 라우시는 이 와중에 낙관론을 내놓는다. 근거는? 디지털 미디어 세상이 허위 정보의 공격을 이겨낼 수 있도록 이미 인상적인 공약과 혁신이 투입되고 있다는 것이다. 책에서 제시한 많은 사례 중에는 이 위기의 주범으로 많은 비난을 받는 세계적 플랫폼 회사들이 있다. 취소 문화의 타깃이 된 직원을 바로 해고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지원책을 고민하는 기업, 진리 추구라는 본연의 임무를 되찾자며 정치적 탈양극화와 열린 논쟁 운동을 벌이는 대학, 소셜 미디어의 집단 테러로 모든 걸 잃고 삶의 벼랑 끝에 섰던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조직한 단체 등. 핵심은 집단은 집단으로, 무가치와 무구조는 철저한 제품 설계와 정책 설계로 맞설 수 있다는 것이다.
자유주의의 인식론적 질서는 언제나 앞으로 나아갈 길을 찾아왔다는 저자의 믿음은 결코 탁상공론이 아니라 평생을 저널리스트이자 성소수자 활동가로서 치열하게 살아온 삶의 경험에서 체득한 것이기에 마음을 움직인다. 반대 의견을 묵살하고 억압하는 게 아니라 존중하고 마주하자, 틀린 생각과 잘못된 정보를 가진 헤이터(hater)일지라도 경청하자는 그의 주장이야말로 바로 ‘지식의 헌법’을 지탱해온 대들보일지 모른다. 이 책을 읽고 가슴 한쪽이 따듯해지는 것을 느낀다면 당신도 ‘지식의 헌법’의 수호자임이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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