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 제11회 가이코다케시 논픽션상 수상작 ★
이 책은 자신 앞에 놓인 미지의 세상에 압도당하면서도 그 아름다움과 참혹함을 당당히 마주한 한 여행자의 기행문이다. 폭풍우 속에 뛰어들어 바람에 휩쓸리면서 써 내려간 르포가 아니라 폭풍우가 지나간 후 파도가 잠잠해진 해변에 나뒹구는 나무토막을 하나하나 주우며 적어나간 여행자의 기록. 현재에 새겨진 과거의 잔해를 응시하며 폭풍우가 얼마나 무섭게 휘몰아쳤는지 상상하면서 뒤늦게 사건을 쫓는다. 무엇이 과거가 되었고 무엇은 과거가 되지 못했는가? 이를 해부하는 눈, 그 눈이 무척이나 예리하면서도 부드럽다.
― 〈바닷마을 다이어리〉 〈어느 가족〉 영화감독 고레에다 히로카즈
학대당하다 죽은 아이들의 이야기가 연일 뉴스에 오르내린다. 가해자를 향한 사회적 분노가 들끓고 재판 과정에 스포트라이트가 쏟아지며 어떤 아이는 무참하게도 법의 이름으로 남는다. 하지만 한 번쯤 떠올려본 적이 있던가. 뉴스가 되지 못한, 살해당하지 않고 살아남은 아이들은 어디서, 어떻게 지내고 있는가를.
이 책은 엄마의 보이지 않는 학대를 겪고 자란 뒤 두 아이를 키우는 싱글 맘으로 생활하며, 가족 살인과 아동 학대에 관심을 기울여온 작가 구로카와 쇼코가 생존자 아이들의 ‘그 후’를 정성스럽게 따라간 르포르타주이다. 패밀리홈, 유아원, 아동 양호 시설, 폐쇄 병동 등 아이들이 머무는 공간으로 찾아가 말을 건네고, 그들을 보살피는 위탁 부모, 시설 교사, 아동 복지사 등의 구체적 면면을 꼼꼼히 취재한 기록이다. 차분한 필치와 섬세한 묘사로 그려낸 여정 속 구로카와가 마주친 아이들은 학대 후유증에 괴로워하면서도 스물네 시간 곁에서 자신을 지지해주는 어른들 그리고 비슷한 모양의 고통을 겪는 또래와 살아가며, 웃는 법을 배우고 새로이 자라나는 시간을 보낸다. 현실을 정면으로 마주하는 이 장절한 논픽션은 아이가 버텨온 시간들을 가늠케 해 읽는 이를 비탄에 빠뜨리기도 하지만, 아동 학대 대응 현황과 복지 제도 등을 충실히 소개하여 양육자가 책임을 저버린 아이들을 길러내기 위해 이 사회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실마리를 제공한다.
살아남은 아이들의 ‘그 후’를 만나는 여행
2010년 어느 여름날, 구로카와는 아동 학대 전문의 스기야마 도시로에게 대리 뮌하우젠증후군으로 친자식 셋을 죽음으로 내몬 충격적 사건과 관련해 의견을 구하고자 소아 전문 종합병원 아이치소아센터로 향한다. 스기야마를 따라 심리 치료과 32병동에 들어선 그의 눈엔 환자복 대신 일상복 차림의 아이들이 편히 쉬는 모습이 포착됐다. 그런데 가만, 무언가 낯설다. 그곳은 ID카드를 가진 사람만 출입 가능한 폐쇄 병동이었다. 소아과에 폐쇄 병동이라니?
피학대 아동이 원가정에서 분리되기만 한다면 모든 문제가 깨끗이 해결되리라 여겼던 저자는 자신의 무지에 대한 부끄러움과 혼돈에 휩싸여 서둘러 병원을 빠져나오고, 이듬해 2월, 다시 센터를 찾아 폐쇄 병동의 존재 이유에 대한 답을 듣는다. 학대당한 아이들은 안전하다고 여기는 장소에 이르면 분노와 공포 등 봉인되었던 다양한 감정이 풀려나와 다른 아이에게 폭력을 행사하기도 하고, 성적 학대를 당한 아이는 고스란히 성화 행동을 한다는 것이었다. 이날 맞닥뜨린 아득한 진실 앞에 구로카와는 학대가 아이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고 무엇을 앗아가는지, 직접 피학대 아이들의 ‘그 후’를 만나는 여행을 떠나자고 결심한다.
사회적 양호의 현장을 찾아가다
패밀리홈, 새로운 가족의 탄생
이 여정의 행선지는 유아원, 아동 양호 시설, 정서 장애아 단기 치료 시설 등으로 다양하다. 구로카와의 발자취를 따라가다 보면 일본의 사회적 양호 시스템이 어떻게 구성되었는지를 엿볼 수 있으며, 한국의 상황과 개선점은 무엇인지 돌아볼 계기를 얻는다. 크게는 위탁 부모 등이 맡아 키우는 가정 양호, 유아원과 아동 양호 시설 등 시설 양호, 지역 소규모 아동 양호 시설과 소규모 그룹 케어 등 가정적 양호 세 종류로 나뉜다. 유아원은 신생아부터 1세 미만인 아기의 양육이 주를 이루며, 보통 3세부터 아동 양호 시설로 옮긴다. 정서 장애아 단기 치료 시설은 경증의 정서 장애를 지닌 아동을 대상으로 한 시설로 1명 이상의 의사와 대체로 아동 10명당 1명 이상의 심리 치료 담당 직원을 배치하여 아이의 심리 케어를 돕는다.
저자가 가장 중점적으로 취재한 곳은 가정 양호 형태에 속하는 ‘패밀리홈’(한국에서는 공동생활 가정 또는 그룹홈이라 부른다)이다. 패밀리홈은 2009년부터 시행된 제도로 정식 명칭은 ‘소규모 주거형 아동 양육 사업’이다. 양육자의 ‘집’에서 5∼6명의 보호 아동을 돌보는 사업으로 위탁 부모 경험 등 일정 요건을 갖춘 사람이 양육자가 된다. 아동 양호 시설이 지닌 폐해를 극복하고, 가능한 한 가정처럼 안온한 환경에서 양육이 이뤄지게끔 하려는 정부 방침의 일환이다.
구로카와는 저마다의 방식으로 아이를 품어내는 요코야마홈, 사와이홈, 희망의 집, 가와모토홈 네 곳을 방문한다. 자립해 집을 떠나도 언제든 돌아갈 수 있는 ‘본가’처럼 패밀리홈 사람들도 하나의 ‘가족’으로서 부모-자식이라는 관계를 형성한다. 더불어 아이들은 거울처럼 같은 상처를 지닌 형제자매와 연대하며 함께 성장해간다. 집 밖에서는 부모가 없다는 이유로, 시설 출신의 아이라는 이유 등으로 괴롭힘과 놀림을 당하는 경우가 허다했지만, 적어도 패밀리홈 안에서만큼은 유별나지 않은 보통 아이가 된다. 저자는 가족들과 둘러앉아 식사하고 집안일을 돕고 잠을 청하거나 차를 마시며 자연스레 그 집 속에 녹아든다. 르포르타주임에도 불구하고 에세이처럼 술술 읽히며 글 행간마다 따스함이 배어나는 까닭은, 밤낮으로 배경도 성별도 연령도 다양한 아이들의 갖가지 사연을 듣고, 이들을 보듬는 어른들의 마음과 고뇌에 깊이 공감한 태도에서 비롯한다.
미유가 아주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여기 우리 집 아닌데.” (…)
새 친구가 와서 신이 나 들뜬 요코야마홈 아이들은 그 말을 놓치지 않았다. 먼저 가오루가 소리쳤다. “무슨 소리야. 나도 원래는 여기 안 살아. 다른 집이 있는데 야마무라(아동 복지사 이름)가 날 여기로 데려왔어. 모두 같이 밥 먹고 놀고 자니까 여기가 이젠 우리 집이고 우리 가족이야. 이 집에 오면 모두 이 집의 아이야.” (…)
놀란 미유에게 사키도 신이 나서 소리쳤다. “나도 옛날엔 다른 데 살았어. 멀리서 왔는데 이젠 여기가 우리 집이야.” ― 「미유 ― 벽이 된 아이」, 45쪽.
피학대 아이의 몸과 마음에 새겨진 후유증
아동 학대라는 ‘제4의 발달 장애’
학대 환경과 양상 등에 관해서는 비교적 자주 접하지만, 정작 아이가 학대 이후에 커다랗고도 짙은 후유증을 안고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이는 피부에 남겨진 담뱃불로 지진 흉터 차원에 그치지 않는다. 구로카와는 전문의 스기야마의 입을 빌려 아이가 ‘제4의 발달 장애’를 겪는다고 밝힌다. 태생적 발달 장애가 아니라 학대가 낳은 발달 장애이다.
태어나면서부터 공포, 긴장 속에 지낸 아이는 밤에 공격당할까 잠들지 못한 채 늘 과각성과 예민 상태에 놓인다. 학대자의 분노를 사지 않기 위해 감정 스위치를 끄는 데 익숙해지면서 기쁨과 슬픔 따위의 감정을 알지 못하는 감정의 빈곤 상태에 빠지거나, 과잉 행동, 충동성, 욕구불만에 따른 자제 불능, 인내력과 집중력 저하로 생기는 학습 장애 등과 같은 애착 장애 증상도 발생하며, ADHD를 갖게 되기도 한다.
“너 같은 애는 불행해져야 해”라는 생모의 환청과 싸우고 갑자기 얼어붙고 자신이 한 행동을 기억하지 못하는 해리 증상을 겪는 미유, 밤이면 알아듣지 못할 괴성을 내지르고 커튼 뒤에 숨어 팔딱거리는 도미를 얼굴 앞에 치켜든 채 꼼짝 않고 쳐다보는 마사토, 선천적 지적 장애가 아님에도 전쟁터와 같은 시설에서 살아남기 위해 늘 경계하느라 머리에 구름이 낀 듯 학습 능력이 저하된 다쿠미. 학대가 할퀴고 간 흔적은 이 아이들 모두의 뇌 깊숙한 곳에 선명히 각인된다.
“살아 있어서 다행이야”라고
말할 수 있는 사회를 위하여
학대는 인간의 근간을 뒤흔들고 갈기갈기 찢어놓는다. 존재를 부정당하며 환대받지 못한 아이들은 갓 지은 밥과 된장국의 냄새를 맡아본 적이 없었다. 먹어보지 못한 식재료가 많기에 하나하나 골라냈다. 볼일 보고 뒤처리하는 법, 머리 감는 법, 속옷 갈아입는 법을 몰랐다. 구로카와는 이런 아이들의 모습을 통해 자연히 습득하는 줄로 알아온 위생 관념과 기본 감각 경험들이 사실은 당연한 것이 아니며, 모두 하나하나 어른이 가르쳐주어야 할 돌봄의 영역에 속하는 것임을 역설한다. 나아가 학대당한 아이를 보호 조치한 데에서 상황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제부터가 시작임을, 아이를 온전한 한 인간으로서 길러내는 데 얼마만큼 긴 시간과 절실한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지를 명징하게 드러낸다.
“난 지금 학대받다 죽은 아이가 부럽다.” 자신을 학대하던 생모를 죽여 법정에 선 20대 후반 청년의 외침이다. 어린 시절의 학대 경험은 이토록 깊고 참혹하며 평생 떨쳐낼 수 없는 것이다. 그리하여 구로카와는 아동 학대의 현실을 직시하자고, 또한 우리 어른이, 우리 사회가 생존자 아이들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지 고민하며 아이들에게 든든한 손길을 내밀자고 말한다. 살아 있어서 다행이라고, 그리고 훗날 잘 살아왔다고 아이가 스스로를 자랑스럽게 여길 수 있도록.
작가 소개
지은이 : 구로카와 쇼코
도쿄여자대학 졸업 후 변호사 비서, 요구르트 판매원, 데생 모델, 잡지기자 등을 거쳐 지금은 전업 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주로 가족 문제를 다루며, 가족이라는 세계에서 일어나는 병리와 아동 학대에 관심을 쏟아왔다. 이 책은 학대당한 아이들이 살고 있는 현장으로 들어가 의연하고 따듯하게 사람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지켜본 기록으로, 2013년 제11회 가이코다케시 논픽션상을 수상했다. 쓴 책으로 『마음의 제염이라는 허구 — 후쿠시마현 제염 선진 도시는 왜 제염을 멈췄을까』, 『공립 고등학교의 재도전』, 『자궁 경부암 백신 부작용과 싸우는 소녀와 그들의 엄마』, 『싱글 맘, 그 후』 등이 있다.
옮긴이 : 양지연
책이 나를 바꾸는 시간이 좋아 늘 책 주변을 서성거린다. “번역은 어떤 것을 읽는 가장 심오하고 친밀한 방법”이라는 말을 좋아한다. 좋은 책을 발견하는 기쁨과 그 기쁨을 함께 나누는 설렘이 좋아 번역가로 활동 중이다. 옮긴 책으로 『맨발로 도망치다』, 『보통이 아닌 날들』 『왜 전쟁까지』, 『채플린과 히틀러의 세계대전』, 『정원 잡초와 사귀는 법』, 『나무의 마음에 귀 기울이다』, 『이게 정말 마음일까?』, 『추억 수리 공장』 등이 있다.
목 차
머리말
제1장. 미유 ― 벽이 된 아이
제2장. 마사토 ― 커튼 방
제3장. 다쿠미 ― 어른이 된다는 건 괴로운 일이잖아
제4장. 아스카 ― 노예가 되어도 좋으니 돌아가고 싶어
제5장. 사오리 ― 아무 조건 없이 사랑할 수 있나요
맺음말
문고본을 내며 ― 뿌리내릴 수 있는 곳을 찾은 지 3년이 지난 지금
참고 문헌
옮긴이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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