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모든 것을 퀴어하게 착즙하는 괴상한 세계와
그 안의 욕망들에 대하여
알페스, 퀴어가 기본값인 세계
2021년 1월 국민의힘 하태경 의원은 RPS(알페스) 제작 및 유포자를 처벌하는 법안을 발의했다. 그는 알페스를 ‘제2의 n번방’으로 지칭하며, 알페스를 여성에 의해 이루어지는 ‘남성에 대한 성착취물’로 만들기 위해 시도했다. 최근 한 대학에서도 남성들의 디지털 성범죄 사건을 남성 아이돌 알페스로 ‘물타기’하려는 시도가 있었다고 한다. 알페스를 성착취로 놓고 보는 시각이 왜 적절치 않은지, 그것이 백래시의 하나인지 아닌지를 따지는 문제와는 별개로, 하태경 의원의 ‘알페스 때리기’ 이후 아이돌 팬덤 하위문화로 오래도록 존재해왔던 알페스가 갑작스레 공론장 위로 잠시간 올라왔고, 그 이후로도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곤 하는 듯하다.
알페스란 리얼 퍼슨 슬래시(Real Person Slash)의 약자인 ‘RPS’를 부르는 말로(서구권에서는 커플링십을 ‘슬래시(/)’로 표현한다), 팬덤이나 2차 창작계에서 창작되는 실존 인물이 등장하는 팬픽션(팬들이 창작하는 허구적 이야기)을 주로 일컫는다. 특히 한국에서는 케이팝 아이돌의 등장과 팬픽 문화가 함께 시작되었다는 특징이 있고, 이 팬픽은 주로 실존 인물(예를 들면, 케이팝 아이돌)들의 동성 간 성애를 실천하는 서사로 구성되어 있다. 또한 쓰는 사람의 욕망에 충실한 글이다. 팔기 위해 쓰는 글, 독자를 만족시키고자 쓰는 글이 아니고 자기가 보고 싶어서 쓰는 글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알페스라는 세계는 동성애가 기본값인 곳으로, 이성애가 기본값인 현실 세계와는 딴판인 세상이며, 만드는 자의 욕망이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를 넘나드는 너무도 퀴어한 세계인 셈이다.
일곱 번째 오봄문고로 선보이는 《알페스×퀴어》는 이 괴상하고 즐거운 퀴어한 욕망이 득시글대는 알페스라는 세계를 중심으로 퀴어와 퀴어함을 둘러싼 여러 질문을 담아냈다. 오랜 알페스물의 ‘소비러’(누군가 창작한 알페스물을 향유하는 사람)였으며, ‘연성러’(알페스물을 생산하는 사람)이기도 한 저자는 모든 것을 퀴어하게 ‘착즙’할 수 있는 이 괴상한 알페스라는 세계의 욕망들과 그 욕망들이 충돌하고 각축하는 장면들을 다각적으로 포착해낸다. 그리고 그 장면들을 통해 팬픽과 퀴어의 관계성, 팬픽의 퀴어한 가능성, 남성 아이돌 알페스가 어떻게 비남성과 여성의 것이 되는지, 이 모든 것을 퀴어하게 착즙하는 것이 얼마나 즐겁고 괴상한 일인지를 풀었다.
팬픽으로 퀴어 배우기
1세대 케이팝 아이돌 H.O.T.의 등장 이후 팬픽이 유행하면서 남성 아이돌 멤버 간의 동성애를 주제로 한 팬픽을 창작하고 소비하며, 스스로 그러한 팬픽과 유사한 동성애적 실천을 하는 여성 청소년들은 ‘팬픽이반’이라고 불렸다. 이들은 동성애혐오의 맥락 속에서 주류 사회질서의 문젯거리로 여겨졌는데, 흥미로운 것은 그와 동시에 ‘팬픽을 흉내 내는 가짜 레즈비언’이라는 이유로 당시 레즈비언 커뮤니티에서도 배척을 당했다는 점이다. 이와 흡사하게 최근에도 “팬픽으로 퀴어를 배우면 안 된다”라는 퀴어 당사자들의 목소리가 들린다. 이는 주로 팬픽 때문에 비퀴어(주로 시스젠더 이성애자 여성)들이 실제 퀴어의 삶을 왜곡해서 인식한다는 불만이다. 하지만 역시 퀴어 당사자인 저자는 되묻는다. “왜 팬픽으로 퀴어를 배우면 안 되지?” 팬픽이 실제 퀴어의 삶을 왜곡한다는 인식은 그만큼 우리가 가장 흔히 접할 수 있는 동성애 혹은 퀴어 서사물이 팬픽이라는 방증이며, 오히려 보고 배울 퀴어 서사 자체가 드문 사회에서 처음 접한 퀴어적 콘텐츠가 팬픽인, 팬픽으로 퀴어를 배운 퀴어는 실재한다. 게다가 퀴어가 기본값인 알페스라는 세계, 퀴어/퀴어함과의 긴밀한 관계성을 지닌 케이팝과 그것을 둘러싼 세계에서 벌어지는 ‘사건’과 현상들은 그 사건이 퀴어 내에서 실재하는 갈등과 혐오, 하나로 수렴될 수 없는 욕망을 드러내는 것일지라도, 퀴어와 퀴어함을 질문하고 배우기에 너무나 적절하다.
이상한 욕망과 경계를 질문하는 퀴어의 눈
이 책은 알페스와 케이팝과 퀴어함의 접점을 찾는 작업이면서, 알페스와 케이팝을 통해 마이너리티와 주변부이기에 오히려 수면 위에서 말해지지 않았던 그 안의 문제들을 직시하고, 성별이분법과 정상성으로 포획되지 않는 이상한 욕망들을 변론하며, 명확해 보이는 경계를 질문하고 흐리는 퀴어한 렌즈를 쓰고 세상을 퀴어링하려는 작업이기도 하다.
레즈비언이 남자 아이돌에게서 부치를 착즙해 알페스를 하는 욕망의 자연스러움을 말하고, 남자 아이돌의 ‘비게퍼(비즈니스 게이 퍼포먼스의 약자, 동성애적으로 해석되는 아이돌의 발언·행동으로 퀴어를 재현하는 듯한 행위를 내비치며 시청자의 관심을 낚는 퀴어베이팅의 하나로도 취급된다)’에 열광하면서도 그것을 비난하는 양상이 어째서 동성애에 대한 협소한 이해와 동성애혐오적 태도를 드러내는 것인지, 퀴어베이팅이 기만적이라는 비판이 어째서 퀴어혐오적 태도일 수 있는지를 짚어낸다. 동성애뿐 아니라 더 다양하고 더 퀴어한 커플링 놀이와 해석이 들어간 변종적 알페스인 ‘퀴어페스(퀴어+알페스)’에 가해진 비난에도 주목한다. 그러한 비난들에는 시스젠더 헤테로적인 인물들이 동성 간 케미를 보이는 것은 즐기지만 동성애가 아닌 ‘더 퀴어한’ 커플링 놀이는 보고 싶어하지 않는 기묘한 퀴어혐오적 경향(“어떻게 우리 오빠를 트랜스젠더로 쓸 수 있냐”)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어떤 시스젠더 레즈비언들은 퀴어페스를 두고 “남자 아이돌을 레즈비언으로 재해석하는 건, 여성사사를 빼앗는 것”이라며 비난했고, 어떤 트랜스젠더 당사자들은 “트랜스 남성을 퀴어하고 귀엽다며 대상화하거나 페티시화하는 것”이라며 비난했다. 저자는 이 속에서 특히 우리에게 허용되는 욕망과 그렇지 않은 욕망의 기준이 무엇인지, ‘당사자’가 언짢은 모든 행위는 ‘가해’이자 ‘혐오’가 되는 것인지를 묻는다.
헤녀(헤테로 여성)나 일스(일반 스타일)를 선망하고 티부(티 나는 부치)를 혐오하는 것이 레즈비언의 일반적 욕망인 것처럼 보편화하려는 어떤 레즈비언들의 시도를 정상성 선망으로 분석해내기도 하고 상대적으로 덜 주목된 레즈비언 펨이라는 존재에 주목하기도 한다. 주변부의 이야기이기에 더욱 민감하고 첨예한 질문과 문제들이 쉴 새 없이 던져지고, 주변부 안에서도 덜 조망되었던 존재와 목소리와 욕망을 길어내 수면 위로 올려둔다.
더 다정한 퀴어 커뮤니티라는 ‘실패할 혁명’을 꿈꾸며
당연한 말이지만 세상에 ‘같은 퀴어’는 없다. “성적 지향이나 성적 정체성이 정상성에서 미끄러진다는 거대한 공통점만 있을 뿐 엄격하게 말해서 ‘퀴어는 거의 모두 다르다’”. 한 사회에서 차별받는 소수자성을 지닌 사람들이 있다고 할 때, 그 소수자성을 지닌 이들은 그 소수자 정체성으로 묶이지만 개별적으로 모두 다른 이들이며 다른 욕망을 지녔다. 이 책에서 드러내는 여러 장면은 ‘외부에서는 솔직히 잘 구분하지도 못하는’ 차이를 두고 미움 가득한 말로 비난을 일삼는 ‘주변부’ 내의 갈등, 자신과 비슷한 약점이 있는 존재를 혐오하는 ‘소수자’의 모습들이며, 그리하여 ‘무지개 깃발 아래 하나되는 퀴어’는 판타지일 수밖에 없으며 (어떤 사랑은 퀴어를 아프게 하고 어떤 사랑은 퀴어에게 비난받으며 어떤 사랑은 사랑이 아니라고 하기에) ‘사랑이 혐오를 이긴다’라는 구호는 거짓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이 미움과 무정함까지도 말해야만 우리의 정체성이란 단일하지 않고 모호하다는 것을 말할 수 있고, 공통된 정체성을 지녔다고 해서 모두가 같은 피해와 삶을 경험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랬을 때 “비퀴어중심 사회에서 퀴어들이 당하고 있는 배제와 포함의 규칙”(71쪽)을 퀴어들이 반복하지 않고 그 규칙을 부수기 시작할 수 있을지 모른다. 모든 퀴어는 다 다르다는 이야기를 시작함으로써 우리는 “어떤 면에서는 퀴어이고, 퀴어하지만, 어떤 면으로는 모두 비퀴어인”(77쪽) 존재이며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도 그러하다는 것을 말할 수 있고, 그랬을 때 퀴어적 상상력이 확장되고 더 퀴어하게 미쳐 돌아가는 세상을 기대해볼 수 있지 않을까.
결국 저자는 더 다정한 세계를 꿈꾸는 것이다. “그들이 퀴어이기 때문에, 퀴어하기 때문에, 그래서 그들을 사랑한다. 나에게 ‘퀴어함’을 사랑하는 것은 퀴어한 나 자신을 사랑하는 것에서부터 이어져가는 그런 것”(77쪽)이므로 사랑이 혐오를 이긴다는 것이 거짓일 수 있다는 걸 알면서도 사랑이 혐오를 이긴다는 구호를 외치겠다고 다짐한다. ‘주변부’ 안에서 누가 ‘진정한’ 피해자이고 누구의 불행이 더 진정한 것인지 겨루듯 말하는 것을 그만하고, 더 퀴어한 세상을 상상하자고 제안한다. 정상성에서 미끄러진 애매하고 불명확한 존재들이 서로 다정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우리가 우리를 서로 엿먹이는 것이 어쩌면 우리다운, 자연스러운 것일지도 모른다고도 생각한다. 하지만 우리는 노력을 할 수 있을 것이다. …… 퀴어 커뮤니티를 다정하게 만드는 것은 결국 실패할 혁명이 될 것 같다. 하지만 나는 그런 것을 좋아한다. 이미 실패할 혁명을 하기 위해 비퀴어들 사이에서 나와 퀴어들 사이로 숨어들었으므로, 이제는 퀴어들의 사회를 교란하고 또 실패하고 싶다.”(180-181쪽)
작가 소개
권지미
대학에서 아동학과 청소년학을 전공했다. 대학 내 성소수자 동아리에서 활동했고, 성소수자·여성 인권 단체, 위기청소년 지원 센터 등에서 상근자로 일하며 인권 상담 활동 등을 했다. 퀴어 문화 전반에 관심이 많은데, 2018년부터 케이팝 아이돌 팬덤과 퀴어 운동을 결합하는 작업을 진행해왔으며, 케이팝과 퀴어의 접점에 관한 글을 간간이 써오고 있다. 함께 지은 책으로 《퀴어돌로지》(2021)가 있다.
목 차
들어가는 글: 나의 이야기
1부 케이팝, 팬덤, 알페스, 그리고 퀴어
팬픽으로 퀴어를 배우는 건 안 되는 걸까: 팬픽과 퀴어의 관계성 탐구
나는 왜 퀴어페스를 썼나: 당사자 혹은 러버의 고백
남성 아이돌 알페스와 ‘여성서사’ 논란에 대하여
케이팝의 퀴어베이팅, ‘비게퍼’, ‘퀴어착즙’
2부 말해지지 않았던 욕망들
‘레즈비언 정상성’에 집착하는 이들에 대하여
레즈비언과 ‘소년애’
펨이란 무엇인가
나가는 글: 퀴어들에게
참고문헌
역자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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