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 미디어는 소수자를 어떻게 묘사하는가?
서울중심주의, 에이지즘, 인종, 젠더, 장애, 노동, 퀴어
7가지 주제로 살펴보는 대중문화 콘텐츠 속 소수자 이야기
상상해보자. 새로 나온 영화가 있다. 대한민국에서 사는 평범한 주인공 A의 시시콜콜한 일상을 보여준다고 한다. 주인공은 대도시에 살며 대중교통으로 이동하고, 동료들과 의견을 나누며 일을 한다. 이성 친구, 혹은 배우자를 비롯한 가족들과 여가도 즐긴다. 조금 더 시각적으로 상상해보기로 한다. 검은 머리의 성인 남자가 세미 정장을 입고 도시의 어느 버스 정류장에 서 있는 모습이 떠오른다. 여기까지 상상하는데 별다른 위화감이 없다.
대중문화에서 숱하게 묘사되는 이른바 ‘보통’ 사람의 모습도 크게 다르지 않다. A는 대대로 한반도에서 살아온 청·장년층 한국 사람이다. 그는 비장애인이고 서울에 산다. 이성애자이며 대학교를 졸업한 정규직 남성이다. 각자의 상황에 따라 떠오르는 조건이 조금씩 차이는 있겠지만, 우리 상상 속의 보통사람 A가 위 묘사와 아예 동떨어진 경우는 흔치 않을 것 같다. 이런 인물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대중문화 콘텐츠는 셀 수 없을 정도로 많다. 평범한 주인공으로 묘사되는 영화 속 A는 이른바 ‘주류’라고 불러도 무방했다.
A와 조건이 사뭇 다른 사람들을 대중문화 콘텐츠에서 찾으려면 생각할 시간이 조금 더 필요하다. 머리에 떠오른 주연급 캐릭터가 있을까? 조선족 B는 어떻게 묘사될까? 발달장애인 C는 어떤 이미지일까? 동성애자 D는? 미성년 노동자 E는? A와 사뭇 다른 이들은 대한민국 사회의 ‘비주류’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의 구체적 삶은 우리 사회 주류인 A, A-1, A-2 등의 정치적 의견에 좌우되기 쉽다. 직접 알거나 한 다리만 건너면 알 수 있는 A들과는 달리, B·C·D·E를 모두 개인적으로 알고 지내기는 쉽지 않다. 그래서 대중문화가 반복적으로 만들어내는 이들의 이미지는 사람들의 뇌리에 쉽게 각인된다.
“한국 사회에서 자신이 가장 평범한 사람이라고 주장하는 아무개 씨는 대중문화 콘텐츠를 보면서 웬만해선 불편함을 느끼지 않습니다. 대중문화 콘텐츠는 주류인 아무개 씨와 같은 시선으로 세상을 묘사하기 때문입니다. 조금만 삐딱하게 생각하면 영화나 드라마가 얼마나 무신경하게 주류의 시선으로 비주류를 재단하거나 아예 거들떠보지도 않는지 알 수 있습니다. 이 책에는 지배자의 논리가 된 대중문화의 안일한 시각에 미세한 균열을 내는 작은 생채기들이 모여 있습니다.” - 저자 인터뷰 中
<오징어 게임>, <지옥>, <지금 우리 학교는> 등 K-콘텐츠는 전 세계적으로 뻗어나가고 있다. 하지만 <오징어 게임>의 흥행과 함께 논란이 되었던 노인, 여성, 외국인 근로자에 대한 편견과 혐오를 돌이켜보면, 자극적인 소재와 흥미로운 스토리, 빠른 전개에 초점을 맞추느라 우리가 무엇을 놓쳤는지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 대중문화 콘텐츠가 소수자를 어떻게 묘사하고 소비하는지에 대한 진지한 반성과 성찰 없이는, K-콘텐츠의 엄청난 인기와 위상은 언제든 무너져내릴 수 있다.
우리가 아무렇지 않게 소비하는 대중문화 콘텐츠 속에는 의외로 많은 차별과 혐오 표현, 그리고 이에 기반한 말과 행동 등이 녹아 있다. 저자는 대중문화 콘텐츠에 등장하는 소수자 유형을 크게 7가지로 분류했다. 주제로 나누면 서울중심주의, 에이지즘, 인종, 젠더, 장애, 노동, 퀴어이다. 저자는 소수자에 대한 천편일률적인 편견을 드러내는 가공의 인물 ‘아무개 씨’를 설정해 각 장을 하나로 묶어 이야기한다.
• 미디어에서 납작하고 투명하게 묘사되는 소수자의 모습을
법조인의 시각에서 바라보다
저자 백세희는 『선녀와 인어공주가 변호사를 만난다면』(호밀밭, 2021)을 쓴 작가이자 현재 법률사무소에 몸담고 있는 변호사다. 전작에서 문화예술 법 이야기를 들려준 저자가 이번에 주목한 건 미디어가 묘사하는 우리 사회 속 소수자들의 모습이다. 평소 대중문화의 여러 현상에 관심이 많았던 저자는 사람들이 쉽고 편하게 즐기는 대중문화 콘텐츠를 법조인의 시각에서 바라보고 분석한다.
“자주 얼굴을 보는 주변 사람들에게 ‘노인이 주인공인 드라마 본 적 있냐’ , ‘동성애자 캐릭터가 등장하는 영화를 아는 대로 다 말해봐라’ 등등 귀찮은 부탁을 계속했고, SNS로만 알고 지내는 지인들에게까지 여러 번 의견을 묻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모은 콘텐츠 목록에서 고르고 골라 개별 작품을 처음부터 끝까지 시청했는데 생각보다 많은 시간이 걸렸습니다. 웹툰 보느라 돈도 꽤 썼습니다. 과거에 이미 본 콘텐츠도 있지만 제 기억이 왜곡되어 있을 수도 있으니 결국엔 다시 보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온갖 OTT에 회원가입을 하기도 했죠.” - 저자 인터뷰 中
저자는 집필 초기에는 어떤 주장도 없이 그저 논란이 있는 이슈를 소개하기만 하려 했지만, 관심을 가지고 자료 연구를 하다 보니 생각이 달라졌다고 고백한다. 콘텐츠를 찾고 분석하는 과정에서 저자는 대중문화 콘텐츠가 묘사하는 ‘보통 사람’이 한쪽으로 치우쳐져 있음을 인식한다. ‘보통 사람’은 드라마나 영화를 보면서 웬만해선 불편함을 느끼지 않는다. 대중문화 콘텐츠는 주류인 ‘보통 사람’과 같은 시선으로 세상을 묘사하기 때문이다. 저자는 관련 서적을 탐독하다 보니 논란이 되는 이슈를 가볍게 건드리고 넘어가는 글을 쓰려던 당초의 계획은 까맣게 잊고 도대체 독자들을 어떻게 설득해야 하나 머리를 싸매고 있는 스스로를 발견한다.
“흠 있는 작품이라 비난하려고 콘텐츠를 인용한 것은 아니라는 점도 미리 밝힌다. 모든 면에서 완벽한 작품을 찾기란 정말 어려운 일이다. 재미와 연출, 메시지 전달 면에서 훌륭한 평가를 받는 작품도 소수자 관점에서 보면 허점이 있을 수 있다는 걸 환기했다고 여겨주신다면 감사할 따름이다.” - 들어가는 말 中
• 대중문화 콘텐츠와 차별금지법을 연결하는 새로운 시선
하루아침에 장애가 생겨 휠체어로 지하철을 타야 하는 상황에 맞닥뜨리거나 어느 날 아버지가 갑자기 커밍아웃하는 식의 경험을 직접 하지 않는 이상, 주류에 속하는 ‘평범한’ 사람들이 미디어라는 간접 경험을 통해 소수자 문제를 깊게 이해하는 일은 저절로 일어나지 않는다. 주류에 편승하는 미디어는 본디 입체적인 존재인 소수자 개개인을 같은 성향의 단일 집단으로 ‘납작하게’ 묘사하는 편리한 방식을 선택하고, 때로는 그들의 존재를 ‘투명하게’ 지워버리기 때문이다. 대중문화 콘텐츠 속에서 그들은 납작하고 투명한 사람이 되기 일쑤다.
모든 면에서 완전히 주류인 사람의 숫자가 적은 것처럼 모든 면에서 전부 비주류인 사람도 드물다. 남성 장애인은 비장애인과의 관계에서 소수자이지만 여성 장애인과의 관계에서는 젠더적으로 주류에 해당한다. 여성 장애인에 고유한 문제 제기가 조금씩 터져 나오는 이유이기도 하다. 소수자를 단 하나의 카테고리로 묶어 납작하게 낙인찍어 버리는 건 인간이라는 존재를 자세히 들여다보는 걸 포기하는 일이다. 소수자 개념은 이렇게 상대적이고 가변적이다. 하지만 혐오와 차별이 하나의 ‘문화’가 되어 버린다면 그 변화의 속도는 더딜 수밖에 없다. 평생을 낙인찍힌 채로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이 생기는 셈이다. 저자는 그 문화도 결국에는 바뀔 수 있다며, 균열은 바로 독자들로부터 시작하는 거라고 이야기한다.
“차별금지법을 은근히 지지하는 태도로 글을 썼습니다. 은근하다고 말하는 이유는 제가 차별금지법에 대해 깊게 개입하여 연구한 성과가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큰 목소리를 낼 자격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변호사의 관점에서 볼 때 터무니없는 선동으로 법 내용을 왜곡하는 일만큼은 두고 보기 힘들었습니다. 많은 이들이 찬반을 정하기에 앞서 일단 색안경은 벗겨줘야겠다는 생각이었습니다. 적극적으로 설득하기보다는 오해를 풀어 자연스럽게 다시 생각하게 만드는 게 목적인데, 실제로 그런 역할을 할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 저자 인터뷰 中
저자는 서울중심주의부터 시작해 에이지즘, 인종, 젠더, 장애, 노동, 퀴어를 주제로 납작하게 묘사된 소수자들을 분석하며, ‘포괄적 차별금지법에 대한 오해와 진실’이라는 글로 책을 마무리한다. 저자는 법이 제정되면 고용, 교육, 행정 등에서 자유롭게 행하던 차별행위를 계속하고자 하는 이들은 상당한 불편을 겪을 것이라며, 이런 불편이 평등한 사회를 위한 대가라면 기꺼이 치를 필요가 있다고 이야기한다. 차별금지법은 ‘단죄’하기 위한 법이 아닌 평등을 제도적으로 권장하는 법이며, 평등이 보장되는 세상에서는 우리 모두가 지금보다 더 안전하고 자유로워질 수 있다고 저자는 덧붙인다.
[편집후기]
차별금지법을 주제로 다음 책을 써보면 어떻겠냐고 작가님께 처음 제안할 때, 가장 큰 걱정은 콘텐츠의 차별성이었다. 혐오와 차별을 다룬 책, 차별금지법의 필요성에 대해 다룬 책은 이미 많이 나와 있었고, 소수자 인권과 관련한 사회 담론도 많이 형성되어 있었다. 하지만 우리가 일상에서 접하는 콘텐츠는 이러한 흐름과는 사뭇 다르게 다가왔다. 전 세계적인 인기를 얻은 한국 드라마에는 소수자에 대한 혐오 표현이 녹아 있었고, 인기 웹툰에는 10대 남성 청소년들의 싸움 이야기로 가득했다. 또한 여성을 성적대상화하거나 성공의 상징으로 묘사하는 힙합 가사, 우스꽝스러운 복장과 말투, 행동으로 트랜스젠더를 희화화하는 영화 등이 아무렇지 않게 소비되고 있었다. 이러한 현실에서 우리가 주목한 건 소수자 인권에 대한 담론이 일상과 어떻게 맞닿아있는가였다.
책에 필요한 자료를 찾는 행위는 소수자 인권이 과거에 비해 많이 개선되었다는 인식이 얼마나 편협하고 오만한 생각이었는지 깨닫는 과정이기도 했다. 10~20년 전 나온 콘텐츠를 보면서 느낀 불편함은 최근에 나오는 콘텐츠에서도 고스란히 느껴졌다. 오히려 과거에는 투박하고 노골적인 느낌이라면, 최근에는 좀 더 교묘한 방식으로 소수자에 대한 편견과 혐오를 재생산하고 있었다. 언제나 세상은, 우리가 생각하는 만큼 빠르게 바뀌지 않았다. 모두가 소수자 인권에 관심을 기울이고 소수자의 모습을 왜곡하는 콘텐츠가 나오지 않는다면, 이러한 책은 세상에 나올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만하면 괜찮은 세상’으로 나아가는 여정은 여전히 험난해 보인다.
작가 소개
백세희
이화여자대학교 법학과 졸업. 2008년 제50회 사법시험에 합격, 사법연수원을 제40기로 수료했다. 강남의 대형 로펌에 입사해 변호사로서의 경력을 이어오다 어느 날 문득 알람시계 없이 아침을 맞이하는 생활을 하고 싶어 퇴사를 감행했다. 지금은 직접 지은 시골집에 살고 있다. 최근 다시 강남에 사무실을 차리긴 했지만 다행히 알람시계 없는 삶을 유지 중이다. 현재 디케이엘파트너스 법률사무소에 몸담고 있다. 문화예술과 법의 관계에 대한 이해를 돕는 대중적인 글도 꾸준히 쓰고 있다.
목 차
들어가는 말
1장 - 아무개 씨는 서울에 삽니다
사투리: 대한민국 비주류 언어
힐링과 피난처로서의 시골
승리자의 서울, 패배자의 지방
2장 - 아무개 씨는 젊은 성인입니다
어린이는 단지 ‘내일’의 주인공?
일진이 점령한 청소년 세상
노인: 우스꽝스럽거나 꼰대거나 귀엽거나
3장 - 아무개 씨는 대대로 한국 사람입니다
조선족: 단군의 2등 자손
인구 절벽의 해결사 결혼이주여성
외국인노동자, 불법체류자, 그리고 아이들
4장 - 아무개 씨는 남성입니다
지겹고도 지겨운 꽃뱀 서사
‘여적여’만으로 여성 사회를 설명할 순 없어
여성이 재산이었던 가부장제의 흔적들
5장 - 아무개 씨는 비장애인입니다
순수한 동네 바보형일까 하늘이 내린 천재일까
사람입니다, 시한폭탄 아닙니다
길에서도 미디어에서도 존재가 지워진 장애인
6장 - 아무개 씨는 정규직 근로자입니다
대한민국의 비정규직 만능 머슴: 경비원
하녀, 식모, 파출부, 가사도우미… 이름도 많은 그녀들
딸배 아닙니다, 배달노동자입니다
7장 - 아무개 씨는 이성애자입니다
짙은 화장과 하이힐이 그들의 전부는 아니다
동시대 최고의 PC 격전지 동성애
포괄적 차별금지법에 대한 오해와 진실
나가는 말
참고문헌
역자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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