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현대 도시가 탄생한 시대,
도시 산책자에 대한 최초의 관찰 기록
감각, 인식, 사유까지 모든 것이 급변하던 시기
저널리스트의 눈으로 본 파리 산책자들의 인간 군상
인간은 산책하는 동물이다
19세기 파리에 도래한 산책자들의 시대
“인간은 곧 산책자다.”
이 책의 저자인 풍자 저널리스트 루이 후아르트는 인간이 다른 동물보다 우위에 있다면, 그 이유는 산책할 줄 알기 때문이라고 짚었다. 그가 살아간 19세기 중반은 대도시에서의 산책이 탄생한 시대였다. 산업과 자본주의가 급속히 발달하면서 세계 곳곳에서는 대도시들이 등장했다. 그리고 대도시라는 무대를 활보하는 신인류가 탄생했다. 이들이 바로 플라뇌르flaneur, 우리말로 산책자다. ‘정해진 방향이나 목표 없이 천천히 거닌다’는 뜻의 프랑스어 동사 ‘플라네flaner’에서 나온 말이다.
후아르트가 살고 있던 파리는 플라뇌르의 도시로 유명했다. 개선문이 있는 에투알 광장부터 샹젤리제 거리, 불로뉴 숲, 튈르리 공원까지 파리의 명소들은 산책자들로 북적였다. 이들은 도시를 어슬렁거리며 도시 곳곳을 열정적으로 관찰했다. 화려한 도시 공간은 산책자들의 감각을 교란하며 그들의 인식과 사유까지 바꿔놓았다. 산책자들은 물신의 숭배자가 되어버렸다. 그렇기에 문학 평론가 발터 벤야민은 도시 산책자를 현대 도시의 관찰자이자 탐색자, 현대 도시의 소비주의를 드러내는 존재로 봤다. 『산책자 생리학』은 바로 이 시대를 풍자한 세태 비평이자, 현대 도시의 산책자에 대한 최초의 관찰 기록이다. 과거를 탐구하는 고고학이 아니라 현재를 관찰하는 고현학(考現學)이라고 할 수 있다.
산책자를 향한 유쾌한 듯 쓰디쓴 풍자
좀스럽지만 어쩐지 친근한 모습들
저자는 당시에 유행했던 풍자 문학 장르인 ‘생리학Physiologie’의 틀을 빌려 당시 파리의 산책자 군상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동식물을 분류하고 그 생태를 분석하듯이, 당시의 다양한 인물상을 각각의 인물 유형으로 분류하고 분석하는 것이 생리학 장르의 특징이었다. 과학 연구의 탈을 썼지만 실은 풍자적이고 유머러스한 어조의 풍속 연구였다. 해부대 위의 동물이 메스를 피하지 못하듯, 기자부터 의사, 공무원, 부르주아까지 누구도 날카로운 풍자의 칼날을 피해 가지 못했다.
산책자들도 예외가 될 수는 없다. 인간이 동물보다 우월한 이유는 산책이라더니, 바로 다음 문단에서 저자는 태도를 바꾼다. 산책은 자신의 시간과 청춘을 자발적으로 잃어버리는 행위라고. 도시의 산책자와 숲속의 원숭이의 차이는 지팡이의 유무뿐이란다. 이렇게 산책자를 향한 유쾌한 듯 쓰디쓴 풍자와 예찬의 탈을 쓴 조롱은 마지막 페이지까지 계속된다.
책 속 파리 산책자들의 천태만상을 살펴보자. 너무 잘 먹어 비만해진 산책자는 겨우 몇백 보 걷고 지쳐서 헉헉대며 가까운 카페로 들어가 쉰다. 말이나 마차를 타고 다니는 부유한 산책자들은 양옆으로 펼쳐지는 아름다운 공원 풍경을 감상하지 않고 그저 스쳐 지나가 버린다. 딱히 살 것도 없으면서 진열장에 있는 물건은 하나도 빠짐없이 살펴보는 산책자들도 있다. 일요일이 되면 오락거리가 없는 가족들이 산책을 나와 지난주와 똑같은 풍경을 바라보고 또 바라본다. 교통수단이 말이나 마차에서 자동차, 지하철로 바뀐 것만 제외하면 21세기 대도시의 산책자들과 다를 것이 없는 모습이다. 좀스럽지만 어쩐지 친근하지 않은가.
완벽한 산책이 불가능해진 시대
진정한 산책자가 되는 법
어떤 것이 완벽한 산책일까? 천천히 걸으면서 자신을 완전히 비우고 분주한 삶에 여백을 만들어내는 것이 완벽한 산책일 것이다. 불행히도 그런 산책은 『산책자 생리학』 속 산책자들에게나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나 허용되지 않는다. 그때나 지금이나 대도시를 산책하는 사람들의 눈과 귀에 상품과 이미지가 홍수처럼 쏟아지기 때문이다. 산책을 나왔다 눈에 띄는 물건에 혹해 목적이 산책에서 쇼핑으로 바뀌어 버린 사람, 상품을 욕망하지만 살 돈이 없으니 그저 주위를 맴도는 사람, 물건 하나를 보고 온갖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사람까지, 누구도 현대 대도시의 자본주의적인 삶에서 벗어날 수 없다.
후아르트는 말한다. 진정한 산책자는 외국어나 수학, 과학은 몰라도 되지만 어떤 모자 가게에서 예쁜 모자를 파는지, 어떤 정육점에서 맛있는 고기를 파는지, 어떤 카페에서 맛있는 레모네이드를 파는지는 알아야 한다고. 생각은 많이 하고 말은 적게 하고, 혼자서도 잘 놀면 된다. 피곤할 때는 쉬어 갈 줄 아는 사람이면 된다. 그렇게 어려운 조건들은 아니지 않은가!
당신의 산책은 어떠한가? 건강을 위해 만보기 앱을 확인하거나 스포츠맨처럼 늘 강박적으로 걷지는 않는가. 저자는 다음과 같은 자질을 소유하지 않은 자는 산책자라는 아름다운 이름을 소유할 수 없다고 단언한다.
어떤 경우에나 명랑할 것
필요할 때는 성찰할 것
항상 관찰 정신을 지닐 것.
책을 읽다 보면 19세기 산책자들과 함께 파리 곳곳을 어슬렁거리며 걸어 다니는 듯한 착각에 빠지게 된다. 파리 산책자들의 모습을 유쾌하게 스케치한 삽화와 당시 파리의 시대상을 꼼꼼히 설명해 주는 각주도 놓치지 마시라!
진창길에서의 피난처가 되어준 인도들과 산책자들, 모두에게 은총 가득하시길. 내 금발 청춘 시절의 가장 행복했던 순간은 길 위에서 흘러갔다. 포석, 화강암, 타르, 아스팔트, 그 어떤 포장도로든!
나는 정말 오랫동안 산책했고, 앞으로도 정말 오랫동안 산책하기를 희망한다.
- 본문 129쪽, 「산책의 작은 행복들」 중에서
작가 소개
지은이 : 루이 후아르트
고등학교 졸업 이후 파리에서 법학을 공부한 그가 저널리스트로 이름을 알린 건 세계 최초의 풍자 일간지 『르 샤리바리Le Charivari』의 편집자로 일하면서부터였다. 그는 동시대에 활동한 언론, 문학, 미술계의 여러 유명 인사를 날카로운 지성과 탁월한 유머 감각으로 풍자했지만, 그 어떤 지면에서도 상대를 공격적으로 비난하려 들지 않았다. 이런 그가 1841년, 파리에서 대성행한 ‘생리학’이라는 기묘한 문학 장르를 연이어 출간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그가 생리학 시리즈로 성공을 거둔 건 일간지에서 작업한 전설적인 판화가 그랑빌과 탁월한 풍자화가 도미에 같은 작가와의 협업 덕분이었다. 저널리스트이자 작가, 연극감독으로도 활동한 그는 친구들 사이에서 늘 정직하고 신중한 사람으로 여겨졌으며 그 이면에는 시대와 사람을 읽어내는 날카로운 통찰력을 겸비했었다고 한다.
이 책, 『산책자 생리학』은 19세기 중후반 파리의 도시 풍경이 급변하던 시기에 새로이 등장한 인간 군상인 산책자를 그리고 있다. 그들은 겉보기엔 한가해 보이지만 모든 것이 상품화되어 가는 도시 공간 속에서 대도시가 주는 충격을 온몸으로 받아내며 살아갔던 사람들이다. 후아르트는 도시 공간을 채운 모든 것이 산책자들의 감각뿐만 아니라 인식, 사유까지 바꾸었던 시대, 산책자들이 새로운 신으로 도취한 물신의 숭배자가 되었던 시대를, 반어와 조롱을 섞어 신랄하게 풍자하고 있다.
옮긴이 : 류재화
고려대학교 불어불문학과를 졸업하고 파리 소르본누벨 대학에서 파스칼 키냐르 연구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고려대학교, 한국외국어대학교 통번역대학원, 철학아카데미 등에서 프랑스 문학 및 역사와 문화, 번역학 등을 강의하고 있다. 옮긴 책으로 파스칼 키냐르의 『심연들』, 『세상의 모든 아침』, 클로드 레비스트로스의 『달의 이면』, 『오늘날의 토테미즘』, 『레비스트로스의 인류학 강의』, 『보다 듣다 읽다』, 발자크의 『공무원 생리학』 『기자 생리학』 등이 있다.
목 차
들어가며 오! 비움이여, 산책이여
-완벽한 산책이 불가능해진 현대인을 위한 씁쓸한 위로 7
제1장 인간의 새로운 정의 27
제2장 누구나 다 산책할 수 있는가 35
제3장 자칭 산책자이지만 영 산책자가 아닌 자들 45
제4장 산책자보다 더 도덕적인 자가 있을까 57
제5장 무위도식자 67
제6장 외지 구경꾼 77
제7장 부랑자 87
제8장 완벽한 산책자 99
제9장 군인 산책자 109
제10장 파리의 양아치들 119
제11장 산책의 작은 행복들 129
제12장 산책의 작은 불행들 141
제13장 파리의 파사주 155
제14장 센 강변, 튈르리 공원, 샹젤리제 167
제15장 산책 초심자들을 위한 조언 187
역자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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