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 출판사서평
‘한국의 유마’ 백봉 거사의 생생한 언행 기록한 선어록
8년 여의 자료조사와 인터뷰로 되살아난 스승의 가르침
백봉 김기추(白峰 金基秋, 1908~1985) 거사는 20세기 ‘한국의 유마 거사’로 추앙받는 불교계의 큰 산맥이다. 그는 50세를 훌쩍 넘겨 불교에 입문했지만 용맹정진으로 단기간에 큰 깨달음을 얻었고, 이후 20여 년간을 속가(俗家)에 머물면서 거사풍(居士風) 불교로 후학지도와 중생교화에 힘쓴 탁월한 선지식이다. 많은 지식인들이 그를 따랐으며, 그의 자비심에 넘치는 열정적인 설법은 많은 사람에게 인생의 존엄성을 알게 하였다. 그리하여 닫혀있던 좁은 마음의 문이 열리고 눈에서는 시비ㆍ분별의 비늘이 떨어졌으며 집착과 망상을 내려놓아 참다운 자유와 안심을 얻은 제자들이 적지 않았다.
백봉 거사는 《금강경강송》, 《유마경 대강론》, 《벽오동》, 《절대성과 상대성》, 그리고 15권의 《선문염송요론》 등 많은 저술을 남겼다. 그분의 설법을 녹음한 테이프가 300여 개나 되고 제자들은 그 테이프에서 추출한 내용으로 《도솔천에서 만납시다》와 《허공법문》이라는 책을 출판하기도 했다. 그래서 그분의 가르침이 무엇인지는 책에 자세히, 반복해서 설명되어 있다. 그러나 그분을 만나지 못한 사람들은 그분의 발 아래서 공부한 사람을 부러워하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분이 어떻게 제자를 지도하셨는지, 어떤 행동을 하시고 어떤 수행을 하셨는지, 그리고 하루를 어떻게 보내셨는지 등등을 궁금해 한다.
왜 우리는 큰 스승의 삶에 대해 알고 싶어하는 것일까? 석가모니 부처님은 연꽃을 들어 보임으로써 실상(實相)을 전하셨다. 유마 거사는 입을 열지 않으시고 둘이 아님의 법문을 하셨다. 이처럼 연꽃을 들어 보이거나 침묵으로써 법을 보일 수 있다면, 그분들의 행위는 그저 단순한 행위가 아니다. 법을 보이는 것이며 실상을 전하는 것이다. 아침에 일어나 세수를 하시는 것, 옷을 갖춰 입으시는 것, 음식을 드시는 것, 걸음을 걸으시는 것, 글을 쓰시는 것, 일을 하시는 것 등 모든 행위가 모두 그 자리를 드러내는 소식이며 부처의 지혜가 드러나는 순간이다. 그러니 스승과 일상을 함께하거나 스승의 일상에 대해 듣는 것이 바로 수행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백봉 거사를 모시고 공부한 제자들이 이 책을 기획했다. 그리고 저자인 운초 최명돈 거사가 이 일을 주관하게 되었다. 이 책에는 백봉 거사님께 직접 지도를 받은 열한 명 제자들이 스승을 모시고 수행한 이야기가 담겨있다. 물론 열한 명이라는 것에 특별한 의미는 없다. 당초 책으로 내기에는 열 명 정도가 좋다고 보았는데 진행을 하면서 한 명이 더 늘어난 것뿐이다. 또 이 책에 나온 열한 명이 문도를 대표한다거나, 또는 가장 뛰어난 제자라는 상상은 적절하지 않다. 백봉 거사에게 인가를 받은 제자가 30인 가까이 되지만 이미 세상을 떠난 분들도 많다. 이 책이 좀 더 일찍 기획되었다면 새로운 인물이 많이 포함되어 있었을 것이다.
이 책이 나오기 까지 가장 큰 역할을 한 사람은 보림선원 서울선원장으로 있는 청봉 전근홍 거사이다. 그는 2005년에 뜻을 세우고 도반들에게 각자의 수행기를 쓰도록 요청했다. 그 때 쓴 수행기를 바탕으로 저자는 인터뷰를 구상하고 진행했다. 인터뷰 여행에 동참한 대도성 김정애 보살은 녹취를, 명각 이민형 거사는 비디오 촬영과 편집을 담당했다. 인터뷰에는 1년 반이 걸렸지만, 자료 조사 기간까지 포함하면 무려 8년간의 깊은 신심과 원력으로 세상에 빛을 보게 된 결실이 바로 이 책이다.
백봉 거사의 감동 깊은 구도기와 깨달음, 제자들이 직접 보고 들은 진솔한 수행담은 재가 불자를 비롯한 출가 수행자에게도 의미심장한 내용을 많이 담고 있다. 백봉 거사 문하 제자들의 깊은 불연(佛緣)과 간절한 발심, 생활을 병행해야 하는 재가 수행자들의 각고의 노력, 스승의 인간적 면모와 제자들의 고뇌, 그리고 화두 타파와 깨달음, 스승의 인가(또는 인정)에 대한 가감 없는 기록을 통해 각자의 공부를 점검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공겁인(空劫人), 백봉 김기추 거사 행장(行狀)
1908년 2월 2일(음) 부산 영도에서 한의원집의 아들로 태어난 백봉 거사는 1923년 부산 제2상업학교에 입학, 뒤늦게 설립한 일본계 학교를 ‘부산 제1상업학교’라고 부르는데 반발해 동맹휴학을 주도하다 퇴학당했다. 이후 본격적인 수난의 세월이 시작된다. 20세 때 부산청년동맹 3대 위원장직을 맡아 독립운동을 하다가 1931년 형무소에 수감되고, 만기출소 후에도 일경의 감시가 끊이질 않자 만주로 망명, 동만산업개발사를 설립해 운영하던 중 다시 구금됐다.
당시 만주는 일제의 잔학이 극에 이른 곳이었다. 백봉 거사가 살아생전 고백했던 것처럼 아무런 죄 없는 사람들을 고문과 폭력으로 반죽음을 만들거나 칼로 머리를 자르는 잔혹한 일들이 비일비재했다. 이런 상황에서 독립운동 전력이 있던 백봉 거사가 만주의 감옥에서 살아나온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해보였다. 당시 불자는 아니었지만 그는 사방의 벽에 빈틈이 없을 정도로 ‘관세음보살’의 명호를 쓰고 염송했다. 그 때문일까. 기적이 일어났다. 불자였던 일본 간수의 도움을 받아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질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힘겹게 맞이한 해방. 그러나 조선건국준비위원회 간사장을 맡았던 그는 극빈자들에게 쌀을 무상으로 배급하다 또다시 감옥 생활을 하게 된다.
이런 백봉거사가 수행에 힘 쓴 것은 1963년 6월, 그의 나이 56세 때다. 백봉 거사는 충남 심우사 주지스님에게 “요술이나 좀 가르쳐달라”고 할 만큼 불법엔 무지했다. 그러나 그는 마음이 순수했고, 무엇을 하든지 철저하게 했다. 주지스님으로부터 ‘무자(無字)’ 화두를 받고 용맹정진을 하던 그는 1964년 1월, 도반들과 함께 보름간 정진하기로 하고 다시 심우사로 갔다. 이때는 밥도 먹지 않고 잠도 자지 않았다. 백봉 거사에게 어떤 변화가 생기고 있음을 감지한 도반들이 몰래 그를 돌보기 시작했다.
도반들이 법당에서 예불하고 참선하는 사이 백봉 거사는 남몰래 나와 눈 내리는 바위 위에서 좌선에 들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4~5리쯤 떨어진 아랫마을 사람들이 어느 집 사랑방에서 놀다 집으로 가던 중 암자가 있는 곳에서 불빛이 솟구치는 것을 보았다. 마을 사람들은 그런 광명이 솟는 곳엔 금광이나 금불상이 있다는 속설을 들었기에 삽과 곡괭이를 들고 올라갔다. 그 빛이 나는 곳에 가보니 정작 바위 위엔 눈에 싸인 사람의 코만 빠끔히 나와 있었다. 살펴보니 온 몸이 얼어붙은 채 숨소리만 가늘게 내뿜고 있었다. 사람들이 꽁꽁 언 그를 방으로 옮겨 뉘어 주물렀다. 한 도반이 선사의 어록을 가져와 읽어주었다.
“마음도 아니고, 부처도 아니다[非心非佛].”
그 순간 백봉 거사가 깜짝 놀라며 벌떡 일어섰다. 그 때 그의 몸이 눈부시게 빛나기 시작하였다. 또다시 방광이었다. 바로 그 때 암자 아랫마을로부터 예배당의 새벽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 순간 백봉의 몸이 텅 비고 욕계, 색계, 무색계도 비고, 천당과 지옥마저 비어 툭 터져 버렸다. 몸이라는 감옥에서 벗어나 일체가 허공인 경지를 체득한 것이다.
홀연히도 들리나니 종소리는 어디서 오나 忽聞鐘聲何處來
까마득한 하늘이라 내 집안이 분명허이 廖廖長天是吾家
한 입으로 삼천계를 고스란히 삼켰더니 一口呑盡三千界
물은 물은, 뫼는 뫼는, 스스로가 밝더구나 水水山山各自明
백봉 거사는 깨달음을 이렇게 읊었다. 57세에 화두를 잡은 이래로 1년도 되지 않아 ‘확철대오’를 함으로서 거사는 육조혜능 선사처럼 돈오(頓悟)를 체현한 것이다. 한 도반이 바로 백봉 거사에게 《금강경》을 한 구절씩 들려주자 단 하루만에 이를 명쾌하게 풀어냈다. 이것이 백봉의 《금강경 강송》이다. 그 때까지 백봉 거사는 《금강경》 한번 읽어본 적이 없었다. 혜능 대사가 행자인 거사의 신분으로 깨달았듯이 백봉 거사 역시 재가자의 신분으로 선종(禪宗)의 맥을 충실히 잇는 전승자가 된 셈이다.
백봉 거사가 대오(大悟)했다는 소식은 승가에까지 전해졌다. ‘욕쟁이 도인’으로 유명한 춘성 선사는 백봉을 가리켜 출가자가 아닌 거사의 몸으로 무상대도를 이룬 유마 거사에 빗대 ‘이 시대의 유마 거사’라고 불렀고, 탄허 스님은 ‘말법시대의 등불’이라고 칭송했다. 백봉 거사를 달마와 육조의 후신으로 믿는 묵산 선사는 보림선원을 개설해 백봉의 선풍 선양에 앞장섰다. 이때 거사에게 출가를 권유한 청담 등의 스님과 재가 설법을 권유한 혜암 등의 스님으로 갈렸는데, 백봉 거사는 “불법(佛法)이 머리를 깎고 안 깎고에 있지 않다”고 하면서 재가에서 법을 펴기로 하고, 이후 재가수행단체인 보림회를 결성해 85년 열반에 들 때까지 쉼 없는 설법으로 중생들을 제도함으로써 거사로서 한국불교에 커다란 발자취를 남겼다.
20여 년간 수많은 사람들을 교화했던 그는 1985년 8월 2일 지리산 산청 보림선원에서 여름 철야정진 해제 법어를 마치고 당신의 방에서 제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마침내 ‘모습놀이’를 거두고 적멸에 들었다. 백봉 거사가 하얀 천 위에 써서 선원 입구 대나무 장대 위에 걸어둔 당신의 게송 ‘최초구(最初句)’가 열반송이 된 셈이다.
가이없는 허공에서 한구절이 이에 오니 無邊虛空一句來
허수아비 땅 밟을새 크게 둥근 거울이라. 案山踏地大圓鏡
여기에서 묻지 마라 지견풀이 가지고는 於此莫問知見解
이삼이라 여섯이요 삼삼이라 아홉인 걸. 二三六而三三九
책 속의 한 구절 - 11인 제자가 본 스승의 가르침
“석가 눈이 어디 붙었습니까?”
그러니까 내 눈을 가르키면서 “거기 붙었다.” 그래요.
그 법문을 듣고 너무 좋아서 거기 앉아있을 수가 없는 거예요. 그래서 선원을 나왔지요. … 그 때 눈에서 하얀 실 날 같은 것이 흘렀어. 길이가 일곱 자쯤 되는 것이… 차를 타도, 산길을 걸어도 앞에 있는 거야. 그러다 한 주일쯤 지나서 없어지더라고. 백봉 선생님 법문이 그렇게 거룩하고 법력이 그렇게 장한 어른입니다.(보림사 회주 묵산 스님)
(36년 전과 비교하면 지금은) ‘이뭐꼬?’가 없지. ‘내가 누구인가?’하는 그 의심이 없어졌지. 그게 ‘탁’ 틀려. 그러니까 ‘일체가 내다’카는 말이, 이제는 분명한 이야기야. 백봉 선생님이 ‘허공이 내다’ 했는데 그 말이 분명한 사실이야. ‘허공이 니니깐, 그리 알아라’ 그런 게 아니라, 그만 ‘허공이 내’라. (야청 황정원, 해양대 명예교수)
백봉 선생님은 선종의 전통에서 나왔지만 이 시대의 새로운 선풍을 일으킨 어떤 봉우리라고 생각해요. 재가불자로 사시면서 그 선을 통해서 얻으신 지혜를 재가불자의 입장에서 선양(宣揚)하신 분이죠. 삶속에서 끊임없이 부처님을 향해 가는, 지혜를 증장시키는 선을 열어놓으신 분이죠.(대우 성태용, 우리는선우 이사장)
제가 실감한 것이 공겁인입니다. 다른 거 없습니다. 내가 부처다 믿고, 바로 부처행으로 들어가는 거예요. 공겁인은 모두가 하나라는 것이거든요. 거사님이나, 저나, 이런 공부를 처음 하는 분이나, 공부를 거부하는 분이나, 다 똑같이 하나라는 것이죠. 그걸 놓치지 않는 공부죠. (청봉 전근홍, 보림선원 서울선원장)
좌선할 때도 ‘빛깔도 소리도 냄새도 없는 나’를 떠올려요. 그리고 잠시 그대로 있다가 다시 ‘빛깔도 소리도 냄새도 없는 나’를 떠올려요. 이를 반복합니다. 처음엔 이 구절을 다 떠올려야 되지만 나중에는 ‘나’ 하나만 떠올려도 그냥 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도 한번씩은 앞 구절까지 떠올립니다. (일심행 안경애 보살)
“믿고 결정하고 달려들어라.”
중생이 그게 안돼요, 중생이! 그것만 하면 다 끝나는데 말이죠! 부처님 당시에 언하에 대오한 게 다 그거 아닙니까? 들으면 그냥 믿어졌고 믿으면 깨치는 데! 그런데, 그걸 못하는 거야, 우리 중생이! 백봉 선생님은 아주 쉽게 이야기해 주셨고, 그냥 그걸 믿고 달려들면 되는 건데, 그런데 그걸 못하는 겁니다. 여우와 같은 마음으로… 신심이 부족해서… 그 말씀도 아주 좋은 말씀이고 또 “내 눈깔을 믿어라.”하는 말씀도 기억납니다. 눈빛, 맑은 눈동자. 깊이를 알 수 없는…. (무염 이수열, 중앙대 창업대학원 겸임교수)
서산 대사가 “내가 깨치기 전에는 우주 속에 내가 있었는데 깨치고 나니까 내 속에 우주가 있더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틀림없습니다. 이처럼 미망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깨달음입니다. 자기가 전에는 요만하게 작았는데 진짜 자기를 찾으니까 자꾸 커지는 거예요. 정말 큰 자기를 깨치는 것이죠. 본래의 진여 자성자리를 깨치는 것입니다. (명성 김명식 거사, 자영업)
이런 시대에 거사인 백봉 선생님이 56세에 공부를 하셨다는 겁니다. 내가 만난 많은 사람들이 “내가 오십 넘었는데, 지금 해도 되는구나.” 하는 분들이 많아요. 희망을 갖는 거예요. 공부를 안 해도, 화두를 들든 뭘 하든, 확실하게 한 가지 수행을 열심히 하면, 터지는 경우가 있다는 사실에 사람들이 놀라는 겁니다. 백봉 선생님처럼 무섭게 정진하면, 긴 시간이 아니라 짧은 시간에도, 높은 경지를 얻을 수 있다, 견성할 수 있다는 겁니다. 재가자도 말이죠. (여운 김광하, (사)작은손길 대표)
만약에 수행을 하겠다고 결심했다면 모든 것을 방하착(放下着) 해야, 놓아야 합니다. 제가 “놓아라, 다 놓아라, 그리하면 누리의 주인공!”
이런 것을 티로 만들어 보급도 했어요. 저는 제 경험만 이야기합니다. 제 경험에 의한 건데 목숨을 걸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것은 목숨은 건 만큼만 된다.’ 그렇게 이야기하고 싶어요. (춘당 이황우, 새말귀선원 선원장)
백봉 선생님은 우리한테 어떤 돌을 던져줬죠. 돌을 던져 그걸 ‘탁’ 바라보게 만들어주셨죠. 연못에 돌을 던져가지고 ‘어!’ 하고 보게끔 만들어주셨어요. 눈을 뜨게 해주신 분이시죠. 그 순간에 이렇게 바뀌었지만 바뀌어 이렇게 살고 있는 이 존재도 아무것도 아니지만, 이 지구에서 백봉 선생님을 만났기 때문에 가치관이 바뀌면서 이렇게 숨을 잘 쉬고 살아갈 수 있게 되었죠. 그러고 ‘이렇게 사는 게 맞는 거구나’하는 신념을 심어준 분이죠. (정선주ㆍ영주 자매, 한의사ㆍ공무원)
▣ 작가 소개
저자 : 최운초
스물아홉에 백봉 거사를 만나 입문했고 이듬해 선원에 입주해 직접 사사를 받았다. 서울대에서 우주항공공학을 전공하고 고려대에서 경영학 석사를 받았다. 경영컨설턴트로 일하고 있으며 《성과주의의 혁신》, 《이너게임》 등 저서와 역서 4권이 있다.
▣ 주요 목차
○ 머리말
○ ‘한국의 유마’ 백봉 김기추 거사 행장
○ 백봉 거사 제자들의 구도와 깨달음
1. 허공을 부수어라!
-묵산(?山) 스님
2. 한번 대를 때리는 소리에 아는 걸 다 잊다
-야청(也靑) 황정원 거사
3. 삶의 현장에서 모습을 잘 굴리자!
-대우(大愚) 성태용 거사
4. 생사를 초월한 공겁인(空劫人)
-청봉(靑峰) 전근홍 거사
5. 자유와 회향이 둘이 아니다
-일심행(一心行) 안경애 보살
6. 믿고 결정하고 달려들어라
-무염(無染) 이수열 거사
7. 상(相)이 떨어져버리면 생사에도 걸림 없다
-명성(明性) 김명식 거사
8. 베푸는 자도, 받는 자도, 베푸는 물건도 없어야
-여운(如雲) 김광하 거사
9. 다 놓아라, 그리하면 누리의 주인공!
-춘당(春堂) 이황우 거사
10. 모든 것이 진리이자 절대긍정이다
-정선주ㆍ영주 자매
‘한국의 유마’ 백봉 거사의 생생한 언행 기록한 선어록
8년 여의 자료조사와 인터뷰로 되살아난 스승의 가르침
백봉 김기추(白峰 金基秋, 1908~1985) 거사는 20세기 ‘한국의 유마 거사’로 추앙받는 불교계의 큰 산맥이다. 그는 50세를 훌쩍 넘겨 불교에 입문했지만 용맹정진으로 단기간에 큰 깨달음을 얻었고, 이후 20여 년간을 속가(俗家)에 머물면서 거사풍(居士風) 불교로 후학지도와 중생교화에 힘쓴 탁월한 선지식이다. 많은 지식인들이 그를 따랐으며, 그의 자비심에 넘치는 열정적인 설법은 많은 사람에게 인생의 존엄성을 알게 하였다. 그리하여 닫혀있던 좁은 마음의 문이 열리고 눈에서는 시비ㆍ분별의 비늘이 떨어졌으며 집착과 망상을 내려놓아 참다운 자유와 안심을 얻은 제자들이 적지 않았다.
백봉 거사는 《금강경강송》, 《유마경 대강론》, 《벽오동》, 《절대성과 상대성》, 그리고 15권의 《선문염송요론》 등 많은 저술을 남겼다. 그분의 설법을 녹음한 테이프가 300여 개나 되고 제자들은 그 테이프에서 추출한 내용으로 《도솔천에서 만납시다》와 《허공법문》이라는 책을 출판하기도 했다. 그래서 그분의 가르침이 무엇인지는 책에 자세히, 반복해서 설명되어 있다. 그러나 그분을 만나지 못한 사람들은 그분의 발 아래서 공부한 사람을 부러워하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분이 어떻게 제자를 지도하셨는지, 어떤 행동을 하시고 어떤 수행을 하셨는지, 그리고 하루를 어떻게 보내셨는지 등등을 궁금해 한다.
왜 우리는 큰 스승의 삶에 대해 알고 싶어하는 것일까? 석가모니 부처님은 연꽃을 들어 보임으로써 실상(實相)을 전하셨다. 유마 거사는 입을 열지 않으시고 둘이 아님의 법문을 하셨다. 이처럼 연꽃을 들어 보이거나 침묵으로써 법을 보일 수 있다면, 그분들의 행위는 그저 단순한 행위가 아니다. 법을 보이는 것이며 실상을 전하는 것이다. 아침에 일어나 세수를 하시는 것, 옷을 갖춰 입으시는 것, 음식을 드시는 것, 걸음을 걸으시는 것, 글을 쓰시는 것, 일을 하시는 것 등 모든 행위가 모두 그 자리를 드러내는 소식이며 부처의 지혜가 드러나는 순간이다. 그러니 스승과 일상을 함께하거나 스승의 일상에 대해 듣는 것이 바로 수행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백봉 거사를 모시고 공부한 제자들이 이 책을 기획했다. 그리고 저자인 운초 최명돈 거사가 이 일을 주관하게 되었다. 이 책에는 백봉 거사님께 직접 지도를 받은 열한 명 제자들이 스승을 모시고 수행한 이야기가 담겨있다. 물론 열한 명이라는 것에 특별한 의미는 없다. 당초 책으로 내기에는 열 명 정도가 좋다고 보았는데 진행을 하면서 한 명이 더 늘어난 것뿐이다. 또 이 책에 나온 열한 명이 문도를 대표한다거나, 또는 가장 뛰어난 제자라는 상상은 적절하지 않다. 백봉 거사에게 인가를 받은 제자가 30인 가까이 되지만 이미 세상을 떠난 분들도 많다. 이 책이 좀 더 일찍 기획되었다면 새로운 인물이 많이 포함되어 있었을 것이다.
이 책이 나오기 까지 가장 큰 역할을 한 사람은 보림선원 서울선원장으로 있는 청봉 전근홍 거사이다. 그는 2005년에 뜻을 세우고 도반들에게 각자의 수행기를 쓰도록 요청했다. 그 때 쓴 수행기를 바탕으로 저자는 인터뷰를 구상하고 진행했다. 인터뷰 여행에 동참한 대도성 김정애 보살은 녹취를, 명각 이민형 거사는 비디오 촬영과 편집을 담당했다. 인터뷰에는 1년 반이 걸렸지만, 자료 조사 기간까지 포함하면 무려 8년간의 깊은 신심과 원력으로 세상에 빛을 보게 된 결실이 바로 이 책이다.
백봉 거사의 감동 깊은 구도기와 깨달음, 제자들이 직접 보고 들은 진솔한 수행담은 재가 불자를 비롯한 출가 수행자에게도 의미심장한 내용을 많이 담고 있다. 백봉 거사 문하 제자들의 깊은 불연(佛緣)과 간절한 발심, 생활을 병행해야 하는 재가 수행자들의 각고의 노력, 스승의 인간적 면모와 제자들의 고뇌, 그리고 화두 타파와 깨달음, 스승의 인가(또는 인정)에 대한 가감 없는 기록을 통해 각자의 공부를 점검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공겁인(空劫人), 백봉 김기추 거사 행장(行狀)
1908년 2월 2일(음) 부산 영도에서 한의원집의 아들로 태어난 백봉 거사는 1923년 부산 제2상업학교에 입학, 뒤늦게 설립한 일본계 학교를 ‘부산 제1상업학교’라고 부르는데 반발해 동맹휴학을 주도하다 퇴학당했다. 이후 본격적인 수난의 세월이 시작된다. 20세 때 부산청년동맹 3대 위원장직을 맡아 독립운동을 하다가 1931년 형무소에 수감되고, 만기출소 후에도 일경의 감시가 끊이질 않자 만주로 망명, 동만산업개발사를 설립해 운영하던 중 다시 구금됐다.
당시 만주는 일제의 잔학이 극에 이른 곳이었다. 백봉 거사가 살아생전 고백했던 것처럼 아무런 죄 없는 사람들을 고문과 폭력으로 반죽음을 만들거나 칼로 머리를 자르는 잔혹한 일들이 비일비재했다. 이런 상황에서 독립운동 전력이 있던 백봉 거사가 만주의 감옥에서 살아나온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해보였다. 당시 불자는 아니었지만 그는 사방의 벽에 빈틈이 없을 정도로 ‘관세음보살’의 명호를 쓰고 염송했다. 그 때문일까. 기적이 일어났다. 불자였던 일본 간수의 도움을 받아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질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힘겹게 맞이한 해방. 그러나 조선건국준비위원회 간사장을 맡았던 그는 극빈자들에게 쌀을 무상으로 배급하다 또다시 감옥 생활을 하게 된다.
이런 백봉거사가 수행에 힘 쓴 것은 1963년 6월, 그의 나이 56세 때다. 백봉 거사는 충남 심우사 주지스님에게 “요술이나 좀 가르쳐달라”고 할 만큼 불법엔 무지했다. 그러나 그는 마음이 순수했고, 무엇을 하든지 철저하게 했다. 주지스님으로부터 ‘무자(無字)’ 화두를 받고 용맹정진을 하던 그는 1964년 1월, 도반들과 함께 보름간 정진하기로 하고 다시 심우사로 갔다. 이때는 밥도 먹지 않고 잠도 자지 않았다. 백봉 거사에게 어떤 변화가 생기고 있음을 감지한 도반들이 몰래 그를 돌보기 시작했다.
도반들이 법당에서 예불하고 참선하는 사이 백봉 거사는 남몰래 나와 눈 내리는 바위 위에서 좌선에 들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4~5리쯤 떨어진 아랫마을 사람들이 어느 집 사랑방에서 놀다 집으로 가던 중 암자가 있는 곳에서 불빛이 솟구치는 것을 보았다. 마을 사람들은 그런 광명이 솟는 곳엔 금광이나 금불상이 있다는 속설을 들었기에 삽과 곡괭이를 들고 올라갔다. 그 빛이 나는 곳에 가보니 정작 바위 위엔 눈에 싸인 사람의 코만 빠끔히 나와 있었다. 살펴보니 온 몸이 얼어붙은 채 숨소리만 가늘게 내뿜고 있었다. 사람들이 꽁꽁 언 그를 방으로 옮겨 뉘어 주물렀다. 한 도반이 선사의 어록을 가져와 읽어주었다.
“마음도 아니고, 부처도 아니다[非心非佛].”
그 순간 백봉 거사가 깜짝 놀라며 벌떡 일어섰다. 그 때 그의 몸이 눈부시게 빛나기 시작하였다. 또다시 방광이었다. 바로 그 때 암자 아랫마을로부터 예배당의 새벽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 순간 백봉의 몸이 텅 비고 욕계, 색계, 무색계도 비고, 천당과 지옥마저 비어 툭 터져 버렸다. 몸이라는 감옥에서 벗어나 일체가 허공인 경지를 체득한 것이다.
홀연히도 들리나니 종소리는 어디서 오나 忽聞鐘聲何處來
까마득한 하늘이라 내 집안이 분명허이 廖廖長天是吾家
한 입으로 삼천계를 고스란히 삼켰더니 一口呑盡三千界
물은 물은, 뫼는 뫼는, 스스로가 밝더구나 水水山山各自明
백봉 거사는 깨달음을 이렇게 읊었다. 57세에 화두를 잡은 이래로 1년도 되지 않아 ‘확철대오’를 함으로서 거사는 육조혜능 선사처럼 돈오(頓悟)를 체현한 것이다. 한 도반이 바로 백봉 거사에게 《금강경》을 한 구절씩 들려주자 단 하루만에 이를 명쾌하게 풀어냈다. 이것이 백봉의 《금강경 강송》이다. 그 때까지 백봉 거사는 《금강경》 한번 읽어본 적이 없었다. 혜능 대사가 행자인 거사의 신분으로 깨달았듯이 백봉 거사 역시 재가자의 신분으로 선종(禪宗)의 맥을 충실히 잇는 전승자가 된 셈이다.
백봉 거사가 대오(大悟)했다는 소식은 승가에까지 전해졌다. ‘욕쟁이 도인’으로 유명한 춘성 선사는 백봉을 가리켜 출가자가 아닌 거사의 몸으로 무상대도를 이룬 유마 거사에 빗대 ‘이 시대의 유마 거사’라고 불렀고, 탄허 스님은 ‘말법시대의 등불’이라고 칭송했다. 백봉 거사를 달마와 육조의 후신으로 믿는 묵산 선사는 보림선원을 개설해 백봉의 선풍 선양에 앞장섰다. 이때 거사에게 출가를 권유한 청담 등의 스님과 재가 설법을 권유한 혜암 등의 스님으로 갈렸는데, 백봉 거사는 “불법(佛法)이 머리를 깎고 안 깎고에 있지 않다”고 하면서 재가에서 법을 펴기로 하고, 이후 재가수행단체인 보림회를 결성해 85년 열반에 들 때까지 쉼 없는 설법으로 중생들을 제도함으로써 거사로서 한국불교에 커다란 발자취를 남겼다.
20여 년간 수많은 사람들을 교화했던 그는 1985년 8월 2일 지리산 산청 보림선원에서 여름 철야정진 해제 법어를 마치고 당신의 방에서 제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마침내 ‘모습놀이’를 거두고 적멸에 들었다. 백봉 거사가 하얀 천 위에 써서 선원 입구 대나무 장대 위에 걸어둔 당신의 게송 ‘최초구(最初句)’가 열반송이 된 셈이다.
가이없는 허공에서 한구절이 이에 오니 無邊虛空一句來
허수아비 땅 밟을새 크게 둥근 거울이라. 案山踏地大圓鏡
여기에서 묻지 마라 지견풀이 가지고는 於此莫問知見解
이삼이라 여섯이요 삼삼이라 아홉인 걸. 二三六而三三九
책 속의 한 구절 - 11인 제자가 본 스승의 가르침
“석가 눈이 어디 붙었습니까?”
그러니까 내 눈을 가르키면서 “거기 붙었다.” 그래요.
그 법문을 듣고 너무 좋아서 거기 앉아있을 수가 없는 거예요. 그래서 선원을 나왔지요. … 그 때 눈에서 하얀 실 날 같은 것이 흘렀어. 길이가 일곱 자쯤 되는 것이… 차를 타도, 산길을 걸어도 앞에 있는 거야. 그러다 한 주일쯤 지나서 없어지더라고. 백봉 선생님 법문이 그렇게 거룩하고 법력이 그렇게 장한 어른입니다.(보림사 회주 묵산 스님)
(36년 전과 비교하면 지금은) ‘이뭐꼬?’가 없지. ‘내가 누구인가?’하는 그 의심이 없어졌지. 그게 ‘탁’ 틀려. 그러니까 ‘일체가 내다’카는 말이, 이제는 분명한 이야기야. 백봉 선생님이 ‘허공이 내다’ 했는데 그 말이 분명한 사실이야. ‘허공이 니니깐, 그리 알아라’ 그런 게 아니라, 그만 ‘허공이 내’라. (야청 황정원, 해양대 명예교수)
백봉 선생님은 선종의 전통에서 나왔지만 이 시대의 새로운 선풍을 일으킨 어떤 봉우리라고 생각해요. 재가불자로 사시면서 그 선을 통해서 얻으신 지혜를 재가불자의 입장에서 선양(宣揚)하신 분이죠. 삶속에서 끊임없이 부처님을 향해 가는, 지혜를 증장시키는 선을 열어놓으신 분이죠.(대우 성태용, 우리는선우 이사장)
제가 실감한 것이 공겁인입니다. 다른 거 없습니다. 내가 부처다 믿고, 바로 부처행으로 들어가는 거예요. 공겁인은 모두가 하나라는 것이거든요. 거사님이나, 저나, 이런 공부를 처음 하는 분이나, 공부를 거부하는 분이나, 다 똑같이 하나라는 것이죠. 그걸 놓치지 않는 공부죠. (청봉 전근홍, 보림선원 서울선원장)
좌선할 때도 ‘빛깔도 소리도 냄새도 없는 나’를 떠올려요. 그리고 잠시 그대로 있다가 다시 ‘빛깔도 소리도 냄새도 없는 나’를 떠올려요. 이를 반복합니다. 처음엔 이 구절을 다 떠올려야 되지만 나중에는 ‘나’ 하나만 떠올려도 그냥 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도 한번씩은 앞 구절까지 떠올립니다. (일심행 안경애 보살)
“믿고 결정하고 달려들어라.”
중생이 그게 안돼요, 중생이! 그것만 하면 다 끝나는데 말이죠! 부처님 당시에 언하에 대오한 게 다 그거 아닙니까? 들으면 그냥 믿어졌고 믿으면 깨치는 데! 그런데, 그걸 못하는 거야, 우리 중생이! 백봉 선생님은 아주 쉽게 이야기해 주셨고, 그냥 그걸 믿고 달려들면 되는 건데, 그런데 그걸 못하는 겁니다. 여우와 같은 마음으로… 신심이 부족해서… 그 말씀도 아주 좋은 말씀이고 또 “내 눈깔을 믿어라.”하는 말씀도 기억납니다. 눈빛, 맑은 눈동자. 깊이를 알 수 없는…. (무염 이수열, 중앙대 창업대학원 겸임교수)
서산 대사가 “내가 깨치기 전에는 우주 속에 내가 있었는데 깨치고 나니까 내 속에 우주가 있더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틀림없습니다. 이처럼 미망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깨달음입니다. 자기가 전에는 요만하게 작았는데 진짜 자기를 찾으니까 자꾸 커지는 거예요. 정말 큰 자기를 깨치는 것이죠. 본래의 진여 자성자리를 깨치는 것입니다. (명성 김명식 거사, 자영업)
이런 시대에 거사인 백봉 선생님이 56세에 공부를 하셨다는 겁니다. 내가 만난 많은 사람들이 “내가 오십 넘었는데, 지금 해도 되는구나.” 하는 분들이 많아요. 희망을 갖는 거예요. 공부를 안 해도, 화두를 들든 뭘 하든, 확실하게 한 가지 수행을 열심히 하면, 터지는 경우가 있다는 사실에 사람들이 놀라는 겁니다. 백봉 선생님처럼 무섭게 정진하면, 긴 시간이 아니라 짧은 시간에도, 높은 경지를 얻을 수 있다, 견성할 수 있다는 겁니다. 재가자도 말이죠. (여운 김광하, (사)작은손길 대표)
만약에 수행을 하겠다고 결심했다면 모든 것을 방하착(放下着) 해야, 놓아야 합니다. 제가 “놓아라, 다 놓아라, 그리하면 누리의 주인공!”
이런 것을 티로 만들어 보급도 했어요. 저는 제 경험만 이야기합니다. 제 경험에 의한 건데 목숨을 걸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것은 목숨은 건 만큼만 된다.’ 그렇게 이야기하고 싶어요. (춘당 이황우, 새말귀선원 선원장)
백봉 선생님은 우리한테 어떤 돌을 던져줬죠. 돌을 던져 그걸 ‘탁’ 바라보게 만들어주셨죠. 연못에 돌을 던져가지고 ‘어!’ 하고 보게끔 만들어주셨어요. 눈을 뜨게 해주신 분이시죠. 그 순간에 이렇게 바뀌었지만 바뀌어 이렇게 살고 있는 이 존재도 아무것도 아니지만, 이 지구에서 백봉 선생님을 만났기 때문에 가치관이 바뀌면서 이렇게 숨을 잘 쉬고 살아갈 수 있게 되었죠. 그러고 ‘이렇게 사는 게 맞는 거구나’하는 신념을 심어준 분이죠. (정선주ㆍ영주 자매, 한의사ㆍ공무원)
▣ 작가 소개
저자 : 최운초
스물아홉에 백봉 거사를 만나 입문했고 이듬해 선원에 입주해 직접 사사를 받았다. 서울대에서 우주항공공학을 전공하고 고려대에서 경영학 석사를 받았다. 경영컨설턴트로 일하고 있으며 《성과주의의 혁신》, 《이너게임》 등 저서와 역서 4권이 있다.
▣ 주요 목차
○ 머리말
○ ‘한국의 유마’ 백봉 김기추 거사 행장
○ 백봉 거사 제자들의 구도와 깨달음
1. 허공을 부수어라!
-묵산(?山) 스님
2. 한번 대를 때리는 소리에 아는 걸 다 잊다
-야청(也靑) 황정원 거사
3. 삶의 현장에서 모습을 잘 굴리자!
-대우(大愚) 성태용 거사
4. 생사를 초월한 공겁인(空劫人)
-청봉(靑峰) 전근홍 거사
5. 자유와 회향이 둘이 아니다
-일심행(一心行) 안경애 보살
6. 믿고 결정하고 달려들어라
-무염(無染) 이수열 거사
7. 상(相)이 떨어져버리면 생사에도 걸림 없다
-명성(明性) 김명식 거사
8. 베푸는 자도, 받는 자도, 베푸는 물건도 없어야
-여운(如雲) 김광하 거사
9. 다 놓아라, 그리하면 누리의 주인공!
-춘당(春堂) 이황우 거사
10. 모든 것이 진리이자 절대긍정이다
-정선주ㆍ영주 자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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