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 출판사서평
‘종교개혁 이전의 종교개혁자’ 얀 후스.
그는 왜 눈에 보이지 않는 교회를 주장했을까?
존 위클리프, 얀 후스, 루터, 츠빙글리, 칼뱅…… 서양 중세기가 끝나고 근세가 시작되는 시기에 로마가톨릭교회에 맞서 종교개혁이라는 대역사를 만든 인물들이다. 하지만 보헤미아에서 출판된 16세기 문헌을 보면 위 인물들의 영향력을 한눈에 보여주는 그림이 있다. 세 컷으로 나눠진 그림의 맨 위에는 위클리프가 어둠 속에서 부싯돌로 불씨를 일으키는 모습이, 가운데 칸에는 얀 후스가 양초에 불을 붙이는 모습이, 마지막 칸에는 루터가 횃불로 세상을 밝히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위클리프가 중세교회의 신앙관에 비판적인 견해를 피력한 선구적 이론가에 그쳤다면, 이 책의 주인공인 얀 후스는 훗날 루터로 대변되는 종교개혁 완성형 이전의 첫 교회 개혁가인 셈이다. 그것도 ‘실천적 개혁가’로 말이다.
보헤미아, 지금의 체코 출신이었던 얀 후스는 그저 안정적인 삶을 위해 신학을 공부하고 사제가 되었지만, 막상 그의 눈에 비친 현실의 교회는 온갖 부조리의 장이었다. 기초학문인 철학은 신학이라는 절대권력에 무릎 꿇은 시녀가 되었고, 교황은 돈을 받고 극악한 범죄에 면제부를 내려주었으며, 악착같이 걷은 세금은 나라가 아닌 교회가 징수처였다. 초라한 옷에 당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했던 예수 그리스도의 신앙을 이어 받은 자, 즉 신의 대리자라고 하는 교황은 화려한 3단 면류관을 쓰고 세상의 주인노릇을 하고 있었다. 이때부터 후스는 강단에서, 설교단에서, 문서를 통해서 부패한 교회 현실을 비판하며, 오직 예수와 성서만을 근본으로 하는 초기그리스도교로 돌아가자고 호소하였다. 후스의 동향민이었던 체코인들도 로마 교황청 중심의 신앙에서 탈피하기 위해 자국어로 설교하는 등 후스의 영향을 받기 시작했다. 이에 로마 교황청으로부터 눈엣가시가 된 후스는 강제로 소환되어 굴욕적인 심문을 당하다가 결국 콘스탄츠 공의회 자리에서 화형에 처해지고 만다. 자기주장을 철회하면 없던 일로 해주겠다는 추기경들의 회유에도 그는 “부디 나의 적들에게 자비를 베푸소서”라고 마지막 말을 남기며 눈을 감았다.
얀 후스는 절대권력의 교황과 추기경들을 강하게 비판하며, ‘눈에 보이는 교회’에 다니는 것과 ‘눈에 보이지 않는 교회’에 속해 있는 것은 엄연히 다르다고 주장하였다. 즉 제도적인 교회에 다닌다고 해서 꼭 구원받으리라는 법은 없으며, 눈에 보이지 않는 진실한 교회에 소속되어야만 구원받을 수 있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현실세계에서는 그 구분이 쉽지 않다. 누가 구원의 대상이 되는지 아닌지를 사람이 판단할 수 없으며 곧 신만이 알고 있음을 후스는 확신했던 것이다.
후스에게 교회는 눈에 보이지 않는 진실한 교회뿐이다. 그러나 누가 이 눈에 보이지 않는 교회에 속해 있는지는 인간의 힘으로는 이해할 수 없다. 그러므로 한계를 가진 이 세계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교회는 “예정된 자와 정죄(定罪)된 자들의 혼합,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정죄된 자와 멸망할 자가 뒤섞인 예정된 자들의 교회”라고 할 수 있다. _ 277쪽
그리스도교만의 사건으로 끝나지 않은 후스의 종교운동.
사회변혁으로, 그리고 ‘민족’ 개념의 탄생까지
종교개혁 역사에 있어 얀 후스가 더욱 전무후무한 인물로 기억될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그가 체코라는, 당시 비주류 민족의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앞서 거론했던 영국의 위클리프나 독일의 루터, 프랑스의 칼뱅 등은 당시 서유럽 주류 국가 출신이어서 종교활동을 하는 데 민족적인 설움을 겪을 일은 없었다. 그와 달리 보헤미안인 체코 출신의 후스는 프라하대학의 학장으로 지냈던 당시에도 자국민보다는 독일인 교수와 학생들의 세력이 더 컸던 것에 대해 늘 저항하고 개선하고자 노력했다. 라틴어로만 되어 있는 성서 교재를 버리고 체코어로 번역하여 다시 만들었고, 체코어로 설교하지 말라는 로마 교황청의 명령에 불복하며 의지를 이어나갔다.
설교와 저술로써 초기 기독교 정신으로 복귀해야 한다는 그의 주장에 체코의 지식인들과 왕실, 일부 귀족, 그리고 많은 대중은 열렬히 환호했다. 이렇듯 후스는 체코 민족에게 종교뿐 아니라 ‘우리 민족’이라는 사회적 아이덴티티를 부여해주는 역할을 해냈을 뿐만 아니라, 소외된 농민이나 하층 계급에게까지 자국 언어 및 눈높이에 맞춰 설교하는 등 소외된 자에게 사랑을 전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정신, 즉 초기 기독교 정신을 여실히 실천하였다. 그런 그의 행보를 거슬려했던 교황청에서 그를 공의회에 불러 불시에 처형하기까지 그는 체코 민족의 아버지에 다름 아니었다. 예상 가능한 일이지만, 그의 화형 이후 체코인들은 ‘후스전쟁’을 일으켜 15년간 조직적인 전투를 곳곳에서 이어나갔고, 그의 기독교정신을 이어받은 모라비아 형제단은 ‘체코 개신교’라는 이름으로 지금까지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19세기 중반에 체코 민족의 아버지라 불린 프란치섹 파라츠키가 후스를 재해석함으로써 체코 민족을 형성했다. 후스에 의해 체코인은 독일인의 멍에로부터 헤어 나올 수 있었으며, 약속대로 보헤미아와 모라비아에 체코인의 나라를 건국하리라는 이야기가 만들어졌다. 그리고 1918년 토마슈 가릭 마사리크는 보헤미아와 모라비아에 슬로바키아와 칼파치아를 합해 체코슬로바키아공화국을 건설했다. 이렇게 해서 신화는 현실을 만들어냈다.
_100쪽
중세와 근대가 교차하는 서양사에서 종교개혁은 빼놓을 수 없는 사건이다. 하지만 종교개혁을 그리스도교의 역사 안에서만 국한되어 바라본다면 중세와 근대의 교차로에 왜 종교개혁이 놓여있는지를 모르고 넘어가게 된다. 예수가 아닌 교황, 즉 가톨릭이라는 종교가 지배하던 한 시대가 끝난 것이 중세의 종말이며, 이제 제대로 된 예수 중심의 신앙을 회복함과 동시에 그간 인식하지 못했던 ‘우리 민족’에 대한 개념의 탄생이 곧 근대의 시작을 알렸다(일반적인 역사 구분법에서는 17~18세기를 ‘근세’라고 하나 이 책의 저자는 이때부터를 근대라고 통합하여 부르고 있다). 오랫동안 ‘사회와 교회는 일체’라는 관념이 의심 받기 시작했고, 이 의심은 유럽사회에 분열을 일으킨다. 이 분열은 훗날 ‘네이션(민족)’이라는 강력한 아이덴티티로 뿌리내리는데, 이처럼 세계사에 민족을 탄생시킨 중요한 기원이 곧 후스의 종교개혁이었다.
일본의 인기 논객은 왜 얀 후스의 종교개혁에 주목했나?
이 책에서 다루는 종교개혁은 대부분의 역사 교과서에서 다뤄지는 루터나 칼뱅의 스토리를 전혀 담고 있지 않는다. 얀 후스 사상의 기저가 되었던 존 위클리프의 이론이 조금 소개되어 있지만 철저히 얀 후스의 교회관에 집중해 있다. 그렇다면 현재 일본의 베스트셀러 논픽션 작가이자 괴짜논객으로 불리는 사토 마사루는 왜 15세기 체코 종교개혁 이야기에 천착한 것일까? 그가 대학시절 신학을 전공하고, 러시아 외교관으로 근무하던 중에도 러시아대학에서 변증법신학을 연구했던 이력만 보더라도 그가 이 주제를 다룬 점은 그리 특별할 게 없다. 하지만 이 책의 머리말과 후기를 읽어보면 (물론 본문 곳곳에서도) 저자가 특별히 후스의 정신을 21세기에 다시 끌고 들어온 이유가 강하게 나타나 있다. 그 이유는 본문 제4부의 ‘근대, 민족, 그리고 사랑’이라는 제목에서도 알 수 있다.
사토 마사루는 러시아대사관 외교분석관으로 근무하면서 일본의 북방영토 회복작전의 최전방에 서서 일했다. 영토반환이 코앞으로 다가올 정도로 패기 넘치게 일했던 그에게, 어느 날 배임 및 위계업무방해죄라는 명목으로 체포영장이 날아온다. 일본 정치세력 간의 정쟁과 우익세력의 반발이 뒤얽혀 일어난 올가미였다. 젊은 날을 오롯이 바친 외교관으로서의 인생도 끝났지만, 한편으로는 512일간 구류되어 무죄로 석방되기 전까지 그는 자신의 출신과 과거, 개인과 국가와의 관계, 개신교도로서의 정체성을 깊이 생각하는 시간도 경험하였다. 그런 그에게 종교개혁과 사회변혁 모두를 일으킨 얀 후스는 가슴 벅찬 롤모델이 아닐 수 없었다. 눈앞에 보이는 부패를 비판하면서도 자신이 어려서부터 접했던 그리스도교에 대한 바른 믿음, 가톨릭 주류국과 주변 강대국의 위세에 눌려 모국어로 된 설교 한번 할 수 없었던 체코인의 설움을 눈물이 아닌 에너지로 바꾸었던 것이 얀 후스 아니었는가.
일본 우익세력의 반발로 외무성에서 쫓겨나간 사토 마사루는 아이러니하게도 현재 일본의 대표적 우익논객이다. 잘못된 부조리에 대해선 날선 비판을 가감 없이 쏟아내지만, 오키나와 출신의 어머니를 둔 자신의 근본적 핏줄의 영향에서 그는 벗어나지 못한다(현재 오키나와 섬이 처해진 위기상황에 대한 설명은 본문 426쪽에 자세히 나타나 있다. 저자는 오키나와의 동정과 15세기 체코의 민족 개념 성립의 과정을 동일한 해석으로 바라보고 있다). 이 책은 단순한 종교개혁 연구서가 아니다. 장을 거듭할수록 지난 역사와 현재 사회 읽기를 교차하는 폭넓은 인문서로 읽히고 있음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는 체코(보헤미아)라는 출신지, 체코어라는 언어와 결부된 자기의식을 갖고 있었다. 이 자기의식은 후스전쟁을 통해 체코인이라는 강력한 에트니의 윤곽을 형성했고, 게다가 이 자기의식은 16세기에 일어난 종교개혁의 결과 프로테스탄티즘과 밀접한 관련을 맺게 된다. 그리고 이 체코 에트니라는 의식은 근대가 되자 체코인이 국가를 형성하는 민족의식의 모체가 되었다. ……곧 일본은 국가통합의 위기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합스부르크제국 안에서의 체코와 일본제국 안에서의 오키나와는 유사한 정황에 놓여 있다. _430쪽
▣ 작가 소개
저 : 사토 마사루
Masaru Sato,佐藤優
전직은 외무성 주임분석관, 현재는 전업작가, ‘일본을 대표하는 괴짜논객’이라는 소개도 늘 따라다닌다. 1960년 도쿄에서 출생하여 도시샤(同志社)대 대학원 신학연구과를 수료한 후 외무성에 들어갔다. 재러시아 일본국대사관 및 국제정보국 주임분석관으로 대러시아 외교의 최전선에서 활약했다. ‘외무성의 라스푸틴’으로 불렸던 그는 본인 스스로 말하길 ‘인생 전반부를 온전히 바쳤던’ 북방영토반환 문제 해결이 코앞에 다가온 순간 정치세력 간의 정쟁과 우익세력의 반발로 임무의 실패는 물론, 2002년 배임과 위계업무방해죄 혐의로 도쿄지검 특수부에 체포된다. 도쿄 구치소에서 512일간 구류된 후 그에게 날아온 소식은 무죄판결이었지만 이미 외무성에서 실직한 채 모든 것을 잃고 난 후였다. 그러다 2005년에 발표한 《국가의 덫》이 일본에서 폭발적인 베스트셀러로 등극하면서 그는 공격적인 사회비판을 서슴지 않는 일본의 대표논객이 되었다. 《옥중기》 《제국의 시대를 어떻게 살 것인가》 《지의 정원》 등의 저서가 있으며 신초다큐멘터리상, 오야소이치 논픽션상 등을 수상하였다.
대학에서 신학을 전공하고 러시아외교관으로 근무하는 중에도 모스크바대학 철학부에 신설된 종교사종교철학과(변증법신학) 강사로 활동하는 등 그는 수많은 신학관련 저술을 읽으며 개신교도로서의 정체성을 세우기 위해 고민해왔다. 펼처보기 닫기
역자 : 김소영
전남 장흥 출생. 부산대 일어일문학과, 와세다대 대학원에서 일본문학 석박사 학위 및 컬럼비아대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미국에서의 파견유학 경험은 같은 일본문학이라도 연구 방법이 달라 좀 더 큰 틀에서 문학을 바라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현재는 부산대 일본연구소 연구원으로 근무하며 출강 및 논문 저작활동을 지속하고 있다. 옮긴 책으로는 메이지시대에 쓰인 역사평전인 《도요토미 히데요시》 등이 있다.
▣ 주요 목차
머리글 | 나는 왜 이 글을 쓰는가 7
I. 얀 후스
1화 콘스탄츠의 불길 29
2화 보이지 않는 교회 51
3화 그리스도교도란? 73
4화 카렐대학 신학부 96
II. 원시 기독교로의 회귀
5화 존 위클리프 121
6화 위클리프에게 교회와 국가란? 131
7화 ‘신과 민족’의 계약에서 ‘신과 개인’의 계약으로 153
8화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 173
III. 종교개혁
9화 대분열 193
10화 공의회운동 215
11화 사후 예언 237
12화 민족이 태어나다 259
13화 권위의 원천 278
14화 양종배찬 287
IV. 근대, 민족, 그리고 사랑
15화 근대의 여명 311
16화 교회 형성 325
17화 두 개의 칼 337
18화 종말을 의식하는 것 345
19화 악마의 교회 354
20화 새로운 예루살렘 368
21화 참회 376
22화 창백한 말 384
23화 바울의 재발견 397
마지막화 사랑의 리얼리티 417
후기 | 후스의 종교개혁은 인간의 희망을 회복시켰다 438
옮긴이 해제 481
참고문헌 일람 502
‘종교개혁 이전의 종교개혁자’ 얀 후스.
그는 왜 눈에 보이지 않는 교회를 주장했을까?
존 위클리프, 얀 후스, 루터, 츠빙글리, 칼뱅…… 서양 중세기가 끝나고 근세가 시작되는 시기에 로마가톨릭교회에 맞서 종교개혁이라는 대역사를 만든 인물들이다. 하지만 보헤미아에서 출판된 16세기 문헌을 보면 위 인물들의 영향력을 한눈에 보여주는 그림이 있다. 세 컷으로 나눠진 그림의 맨 위에는 위클리프가 어둠 속에서 부싯돌로 불씨를 일으키는 모습이, 가운데 칸에는 얀 후스가 양초에 불을 붙이는 모습이, 마지막 칸에는 루터가 횃불로 세상을 밝히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위클리프가 중세교회의 신앙관에 비판적인 견해를 피력한 선구적 이론가에 그쳤다면, 이 책의 주인공인 얀 후스는 훗날 루터로 대변되는 종교개혁 완성형 이전의 첫 교회 개혁가인 셈이다. 그것도 ‘실천적 개혁가’로 말이다.
보헤미아, 지금의 체코 출신이었던 얀 후스는 그저 안정적인 삶을 위해 신학을 공부하고 사제가 되었지만, 막상 그의 눈에 비친 현실의 교회는 온갖 부조리의 장이었다. 기초학문인 철학은 신학이라는 절대권력에 무릎 꿇은 시녀가 되었고, 교황은 돈을 받고 극악한 범죄에 면제부를 내려주었으며, 악착같이 걷은 세금은 나라가 아닌 교회가 징수처였다. 초라한 옷에 당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했던 예수 그리스도의 신앙을 이어 받은 자, 즉 신의 대리자라고 하는 교황은 화려한 3단 면류관을 쓰고 세상의 주인노릇을 하고 있었다. 이때부터 후스는 강단에서, 설교단에서, 문서를 통해서 부패한 교회 현실을 비판하며, 오직 예수와 성서만을 근본으로 하는 초기그리스도교로 돌아가자고 호소하였다. 후스의 동향민이었던 체코인들도 로마 교황청 중심의 신앙에서 탈피하기 위해 자국어로 설교하는 등 후스의 영향을 받기 시작했다. 이에 로마 교황청으로부터 눈엣가시가 된 후스는 강제로 소환되어 굴욕적인 심문을 당하다가 결국 콘스탄츠 공의회 자리에서 화형에 처해지고 만다. 자기주장을 철회하면 없던 일로 해주겠다는 추기경들의 회유에도 그는 “부디 나의 적들에게 자비를 베푸소서”라고 마지막 말을 남기며 눈을 감았다.
얀 후스는 절대권력의 교황과 추기경들을 강하게 비판하며, ‘눈에 보이는 교회’에 다니는 것과 ‘눈에 보이지 않는 교회’에 속해 있는 것은 엄연히 다르다고 주장하였다. 즉 제도적인 교회에 다닌다고 해서 꼭 구원받으리라는 법은 없으며, 눈에 보이지 않는 진실한 교회에 소속되어야만 구원받을 수 있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현실세계에서는 그 구분이 쉽지 않다. 누가 구원의 대상이 되는지 아닌지를 사람이 판단할 수 없으며 곧 신만이 알고 있음을 후스는 확신했던 것이다.
후스에게 교회는 눈에 보이지 않는 진실한 교회뿐이다. 그러나 누가 이 눈에 보이지 않는 교회에 속해 있는지는 인간의 힘으로는 이해할 수 없다. 그러므로 한계를 가진 이 세계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교회는 “예정된 자와 정죄(定罪)된 자들의 혼합,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정죄된 자와 멸망할 자가 뒤섞인 예정된 자들의 교회”라고 할 수 있다. _ 277쪽
그리스도교만의 사건으로 끝나지 않은 후스의 종교운동.
사회변혁으로, 그리고 ‘민족’ 개념의 탄생까지
종교개혁 역사에 있어 얀 후스가 더욱 전무후무한 인물로 기억될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그가 체코라는, 당시 비주류 민족의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앞서 거론했던 영국의 위클리프나 독일의 루터, 프랑스의 칼뱅 등은 당시 서유럽 주류 국가 출신이어서 종교활동을 하는 데 민족적인 설움을 겪을 일은 없었다. 그와 달리 보헤미안인 체코 출신의 후스는 프라하대학의 학장으로 지냈던 당시에도 자국민보다는 독일인 교수와 학생들의 세력이 더 컸던 것에 대해 늘 저항하고 개선하고자 노력했다. 라틴어로만 되어 있는 성서 교재를 버리고 체코어로 번역하여 다시 만들었고, 체코어로 설교하지 말라는 로마 교황청의 명령에 불복하며 의지를 이어나갔다.
설교와 저술로써 초기 기독교 정신으로 복귀해야 한다는 그의 주장에 체코의 지식인들과 왕실, 일부 귀족, 그리고 많은 대중은 열렬히 환호했다. 이렇듯 후스는 체코 민족에게 종교뿐 아니라 ‘우리 민족’이라는 사회적 아이덴티티를 부여해주는 역할을 해냈을 뿐만 아니라, 소외된 농민이나 하층 계급에게까지 자국 언어 및 눈높이에 맞춰 설교하는 등 소외된 자에게 사랑을 전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정신, 즉 초기 기독교 정신을 여실히 실천하였다. 그런 그의 행보를 거슬려했던 교황청에서 그를 공의회에 불러 불시에 처형하기까지 그는 체코 민족의 아버지에 다름 아니었다. 예상 가능한 일이지만, 그의 화형 이후 체코인들은 ‘후스전쟁’을 일으켜 15년간 조직적인 전투를 곳곳에서 이어나갔고, 그의 기독교정신을 이어받은 모라비아 형제단은 ‘체코 개신교’라는 이름으로 지금까지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19세기 중반에 체코 민족의 아버지라 불린 프란치섹 파라츠키가 후스를 재해석함으로써 체코 민족을 형성했다. 후스에 의해 체코인은 독일인의 멍에로부터 헤어 나올 수 있었으며, 약속대로 보헤미아와 모라비아에 체코인의 나라를 건국하리라는 이야기가 만들어졌다. 그리고 1918년 토마슈 가릭 마사리크는 보헤미아와 모라비아에 슬로바키아와 칼파치아를 합해 체코슬로바키아공화국을 건설했다. 이렇게 해서 신화는 현실을 만들어냈다.
_100쪽
중세와 근대가 교차하는 서양사에서 종교개혁은 빼놓을 수 없는 사건이다. 하지만 종교개혁을 그리스도교의 역사 안에서만 국한되어 바라본다면 중세와 근대의 교차로에 왜 종교개혁이 놓여있는지를 모르고 넘어가게 된다. 예수가 아닌 교황, 즉 가톨릭이라는 종교가 지배하던 한 시대가 끝난 것이 중세의 종말이며, 이제 제대로 된 예수 중심의 신앙을 회복함과 동시에 그간 인식하지 못했던 ‘우리 민족’에 대한 개념의 탄생이 곧 근대의 시작을 알렸다(일반적인 역사 구분법에서는 17~18세기를 ‘근세’라고 하나 이 책의 저자는 이때부터를 근대라고 통합하여 부르고 있다). 오랫동안 ‘사회와 교회는 일체’라는 관념이 의심 받기 시작했고, 이 의심은 유럽사회에 분열을 일으킨다. 이 분열은 훗날 ‘네이션(민족)’이라는 강력한 아이덴티티로 뿌리내리는데, 이처럼 세계사에 민족을 탄생시킨 중요한 기원이 곧 후스의 종교개혁이었다.
일본의 인기 논객은 왜 얀 후스의 종교개혁에 주목했나?
이 책에서 다루는 종교개혁은 대부분의 역사 교과서에서 다뤄지는 루터나 칼뱅의 스토리를 전혀 담고 있지 않는다. 얀 후스 사상의 기저가 되었던 존 위클리프의 이론이 조금 소개되어 있지만 철저히 얀 후스의 교회관에 집중해 있다. 그렇다면 현재 일본의 베스트셀러 논픽션 작가이자 괴짜논객으로 불리는 사토 마사루는 왜 15세기 체코 종교개혁 이야기에 천착한 것일까? 그가 대학시절 신학을 전공하고, 러시아 외교관으로 근무하던 중에도 러시아대학에서 변증법신학을 연구했던 이력만 보더라도 그가 이 주제를 다룬 점은 그리 특별할 게 없다. 하지만 이 책의 머리말과 후기를 읽어보면 (물론 본문 곳곳에서도) 저자가 특별히 후스의 정신을 21세기에 다시 끌고 들어온 이유가 강하게 나타나 있다. 그 이유는 본문 제4부의 ‘근대, 민족, 그리고 사랑’이라는 제목에서도 알 수 있다.
사토 마사루는 러시아대사관 외교분석관으로 근무하면서 일본의 북방영토 회복작전의 최전방에 서서 일했다. 영토반환이 코앞으로 다가올 정도로 패기 넘치게 일했던 그에게, 어느 날 배임 및 위계업무방해죄라는 명목으로 체포영장이 날아온다. 일본 정치세력 간의 정쟁과 우익세력의 반발이 뒤얽혀 일어난 올가미였다. 젊은 날을 오롯이 바친 외교관으로서의 인생도 끝났지만, 한편으로는 512일간 구류되어 무죄로 석방되기 전까지 그는 자신의 출신과 과거, 개인과 국가와의 관계, 개신교도로서의 정체성을 깊이 생각하는 시간도 경험하였다. 그런 그에게 종교개혁과 사회변혁 모두를 일으킨 얀 후스는 가슴 벅찬 롤모델이 아닐 수 없었다. 눈앞에 보이는 부패를 비판하면서도 자신이 어려서부터 접했던 그리스도교에 대한 바른 믿음, 가톨릭 주류국과 주변 강대국의 위세에 눌려 모국어로 된 설교 한번 할 수 없었던 체코인의 설움을 눈물이 아닌 에너지로 바꾸었던 것이 얀 후스 아니었는가.
일본 우익세력의 반발로 외무성에서 쫓겨나간 사토 마사루는 아이러니하게도 현재 일본의 대표적 우익논객이다. 잘못된 부조리에 대해선 날선 비판을 가감 없이 쏟아내지만, 오키나와 출신의 어머니를 둔 자신의 근본적 핏줄의 영향에서 그는 벗어나지 못한다(현재 오키나와 섬이 처해진 위기상황에 대한 설명은 본문 426쪽에 자세히 나타나 있다. 저자는 오키나와의 동정과 15세기 체코의 민족 개념 성립의 과정을 동일한 해석으로 바라보고 있다). 이 책은 단순한 종교개혁 연구서가 아니다. 장을 거듭할수록 지난 역사와 현재 사회 읽기를 교차하는 폭넓은 인문서로 읽히고 있음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는 체코(보헤미아)라는 출신지, 체코어라는 언어와 결부된 자기의식을 갖고 있었다. 이 자기의식은 후스전쟁을 통해 체코인이라는 강력한 에트니의 윤곽을 형성했고, 게다가 이 자기의식은 16세기에 일어난 종교개혁의 결과 프로테스탄티즘과 밀접한 관련을 맺게 된다. 그리고 이 체코 에트니라는 의식은 근대가 되자 체코인이 국가를 형성하는 민족의식의 모체가 되었다. ……곧 일본은 국가통합의 위기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합스부르크제국 안에서의 체코와 일본제국 안에서의 오키나와는 유사한 정황에 놓여 있다. _430쪽
▣ 작가 소개
저 : 사토 마사루
Masaru Sato,佐藤優
전직은 외무성 주임분석관, 현재는 전업작가, ‘일본을 대표하는 괴짜논객’이라는 소개도 늘 따라다닌다. 1960년 도쿄에서 출생하여 도시샤(同志社)대 대학원 신학연구과를 수료한 후 외무성에 들어갔다. 재러시아 일본국대사관 및 국제정보국 주임분석관으로 대러시아 외교의 최전선에서 활약했다. ‘외무성의 라스푸틴’으로 불렸던 그는 본인 스스로 말하길 ‘인생 전반부를 온전히 바쳤던’ 북방영토반환 문제 해결이 코앞에 다가온 순간 정치세력 간의 정쟁과 우익세력의 반발로 임무의 실패는 물론, 2002년 배임과 위계업무방해죄 혐의로 도쿄지검 특수부에 체포된다. 도쿄 구치소에서 512일간 구류된 후 그에게 날아온 소식은 무죄판결이었지만 이미 외무성에서 실직한 채 모든 것을 잃고 난 후였다. 그러다 2005년에 발표한 《국가의 덫》이 일본에서 폭발적인 베스트셀러로 등극하면서 그는 공격적인 사회비판을 서슴지 않는 일본의 대표논객이 되었다. 《옥중기》 《제국의 시대를 어떻게 살 것인가》 《지의 정원》 등의 저서가 있으며 신초다큐멘터리상, 오야소이치 논픽션상 등을 수상하였다.
대학에서 신학을 전공하고 러시아외교관으로 근무하는 중에도 모스크바대학 철학부에 신설된 종교사종교철학과(변증법신학) 강사로 활동하는 등 그는 수많은 신학관련 저술을 읽으며 개신교도로서의 정체성을 세우기 위해 고민해왔다. 펼처보기 닫기
역자 : 김소영
전남 장흥 출생. 부산대 일어일문학과, 와세다대 대학원에서 일본문학 석박사 학위 및 컬럼비아대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미국에서의 파견유학 경험은 같은 일본문학이라도 연구 방법이 달라 좀 더 큰 틀에서 문학을 바라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현재는 부산대 일본연구소 연구원으로 근무하며 출강 및 논문 저작활동을 지속하고 있다. 옮긴 책으로는 메이지시대에 쓰인 역사평전인 《도요토미 히데요시》 등이 있다.
▣ 주요 목차
머리글 | 나는 왜 이 글을 쓰는가 7
I. 얀 후스
1화 콘스탄츠의 불길 29
2화 보이지 않는 교회 51
3화 그리스도교도란? 73
4화 카렐대학 신학부 96
II. 원시 기독교로의 회귀
5화 존 위클리프 121
6화 위클리프에게 교회와 국가란? 131
7화 ‘신과 민족’의 계약에서 ‘신과 개인’의 계약으로 153
8화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 173
III. 종교개혁
9화 대분열 193
10화 공의회운동 215
11화 사후 예언 237
12화 민족이 태어나다 259
13화 권위의 원천 278
14화 양종배찬 287
IV. 근대, 민족, 그리고 사랑
15화 근대의 여명 311
16화 교회 형성 325
17화 두 개의 칼 337
18화 종말을 의식하는 것 345
19화 악마의 교회 354
20화 새로운 예루살렘 368
21화 참회 376
22화 창백한 말 384
23화 바울의 재발견 397
마지막화 사랑의 리얼리티 417
후기 | 후스의 종교개혁은 인간의 희망을 회복시켰다 438
옮긴이 해제 481
참고문헌 일람 502
01. 반품기한
- 단순 변심인 경우 : 상품 수령 후 7일 이내 신청
- 상품 불량/오배송인 경우 : 상품 수령 후 3개월 이내, 혹은 그 사실을 알게 된 이후 30일 이내 반품 신청 가능
02. 반품 배송비
반품사유 | 반품 배송비 부담자 |
---|---|
단순변심 | 고객 부담이며, 최초 배송비를 포함해 왕복 배송비가 발생합니다. 또한, 도서/산간지역이거나 설치 상품을 반품하는 경우에는 배송비가 추가될 수 있습니다. |
고객 부담이 아닙니다. |
03. 배송상태에 따른 환불안내
진행 상태 | 결제완료 | 상품준비중 | 배송지시/배송중/배송완료 |
---|---|---|---|
어떤 상태 | 주문 내역 확인 전 | 상품 발송 준비 중 | 상품이 택배사로 이미 발송 됨 |
환불 | 즉시환불 | 구매취소 의사전달 → 발송중지 → 환불 | 반품회수 → 반품상품 확인 → 환불 |
04. 취소방법
- 결제완료 또는 배송상품은 1:1 문의에 취소신청해 주셔야 합니다.
- 특정 상품의 경우 취소 수수료가 부과될 수 있습니다.
05. 환불시점
결제수단 | 환불시점 | 환불방법 |
---|---|---|
신용카드 | 취소완료 후, 3~5일 내 카드사 승인취소(영업일 기준) | 신용카드 승인취소 |
계좌이체 |
실시간 계좌이체 또는 무통장입금 취소완료 후, 입력하신 환불계좌로 1~2일 내 환불금액 입금(영업일 기준) |
계좌입금 |
휴대폰 결제 |
당일 구매내역 취소시 취소 완료 후, 6시간 이내 승인취소 전월 구매내역 취소시 취소 완료 후, 1~2일 내 환불계좌로 입금(영업일 기준) |
당일취소 : 휴대폰 결제 승인취소 익월취소 : 계좌입금 |
포인트 | 취소 완료 후, 당일 포인트 적립 | 환불 포인트 적립 |
06. 취소반품 불가 사유
- 단순변심으로 인한 반품 시, 배송 완료 후 7일이 지나면 취소/반품 신청이 접수되지 않습니다.
- 주문/제작 상품의 경우, 상품의 제작이 이미 진행된 경우에는 취소가 불가합니다.
- 구성품을 분실하였거나 취급 부주의로 인한 파손/고장/오염된 경우에는 취소/반품이 제한됩니다.
- 제조사의 사정 (신모델 출시 등) 및 부품 가격변동 등에 의해 가격이 변동될 수 있으며, 이로 인한 반품 및 가격보상은 불가합니다.
- 뷰티 상품 이용 시 트러블(알러지, 붉은 반점, 가려움, 따가움)이 발생하는 경우 진료 확인서 및 소견서 등을 증빙하면 환불이 가능하지만 이 경우, 제반 비용은 고객님께서 부담하셔야 합니다.
- 각 상품별로 아래와 같은 사유로 취소/반품이 제한 될 수 있습니다.
상품군 | 취소/반품 불가사유 |
---|---|
의류/잡화/수입명품 | 상품의 택(TAG) 제거/라벨 및 상품 훼손으로 상품의 가치가 현저히 감소된 경우 |
계절상품/식품/화장품 | 고객님의 사용, 시간경과, 일부 소비에 의하여 상품의 가치가 현저히 감소한 경우 |
가전/설치상품 | 전자제품 특성 상, 정품 스티커가 제거되었거나 설치 또는 사용 이후에 단순변심인 경우, 액정화면이 부착된 상품의 전원을 켠 경우 (상품불량으로 인한 교환/반품은 AS센터의 불량 판정을 받아야 합니다.) |
자동차용품 | 상품을 개봉하여 장착한 이후 단순변심의 경우 |
CD/DVD/GAME/BOOK등 | 복제가 가능한 상품의 포장 등을 훼손한 경우 |
상품의 시리얼 넘버 유출로 내장된 소프트웨어의 가치가 감소한 경우 | |
노트북, 테스크탑 PC 등 | 홀로그램 등을 분리, 분실, 훼손하여 상품의 가치가 현저히 감소하여 재판매가 불가할 경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