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 출판사서평
성산 장기려 (聖山 張起呂, 1911.8.14. - 1995.12.25.)
평안북도 용천군 양하면 입암동에서 아버지 장운섭, 어머니 최윤경의 차남으로 출생. 개성 송도고등보통학교, 경성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나고야 대학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평양 연합기독병원 원장, 김일성대학 의과대학 외과 교수, 부산복음병원 초대 원장, 청십자병원 원장, 부산아동병원 원장 등을 역임했다. 부산대, 가톨릭대, 서울대 등에서 후학들을 가르쳤고, 우리나라 최초로 “간의 부분절제(1943) 및 대량절제술(1959)”에 성공했으며, 부산외과학회를 창립하여 의학 연구에 공적을 남겼다. 가난한 환자들을 위한 무료 병원, 간질 환자들의 모임 ‘장미회’ 활동, 우리나라 최초의 의료보험협동조합 ‘청십자의료보험’ 창설 등은 그가 평생 동안 무엇에 소망을 두고 어떻게 살았는지 증언해 준다. 아내 김봉숙과의 사이에 6남매를 두었으나 6·25전쟁 때 둘째아들만 데리고 월남하게 된 뒤, 북에 두고 온 아내와 가족을 그리며 평생 독신으로 살았다.
아시아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막사이사이상(사회봉사 부문), 국민훈장 무궁화장, 자랑스런 서울대인상 등을 수상했다. ‘한국의 슈바이처’, ‘살아 있는 성자’, ‘바보 의사’, ‘작은 예수’ 등으로 불리며 온전히 이웃을 위해, 이웃과 함께 살아온 그의 묘비에는 “주님만을 섬기다 간 사람”이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심층 보기】
중국 당나라 때는 ‘신언서판’(身言書判)이라 하여, 몸[體貌]과 말씨[言辯], 글씨[筆跡], 판단[文理]을 인물 평가 요소로 삼았다. 미국의 주식투자가 워런 버핏은 ‘정직한가’, ‘지적인가’, ‘에너지가 넘치는가’를 사람 평가의 기준으로 본다고 했다. 과거의 인물을 평가하는 기준은 과연 무엇일까? 도덕적 깨끗함일까, 그가 남긴 업적일까?
성자(聖子) 장기려
도덕적인 잣대로 평가할 때 별 문제없이 일생을 살아간 사람들이 꽤 있지만, 이들 대부분은 평범한 소시민일 경우가 많다. 반면 업적에 우선을 두어 평가하면, 악덕 경영자가 영웅이 될 수 있고 정경유착에 따른 기회주의자가 큰 산과 같은 인물로 만들어질 수 있다. 그러나 간혹 이런 두 기준에서 조화를 이룬 사람을 만나게 되는데, 이럴 때 우리는 그를 ‘성인’(聖人) 혹은 ‘성자’(聖子)라 일컫는다. 비폭력 무저항 운동으로 인도 사회를 이끌었던 간디, 빈민 봉사에 헌신한 마터 테레사가 그렇다. 동덕여대 총장을 지낸 손봉호 교수는 장기려 선생을 이야기하면서, “그의 약점에 대해서는 별로 들어 본 바도 없고, 나 스스로 발견하지도 못했다. 우리가 사도 바울 같은 분을 ‘성자’라고 부를 수 있다면, 충분히 장기려 박사도 성자라 부를 수 있겠다”고 증언했다.
인간(人間) 장기려
장기려(張起呂, 1911-1995). 우리나라 최초로 ‘간의 부분절제(1943) 및 대량절제술(1959)’ 성공, 북한이 수여한 최초의 박사학위 수여자(1948), 우리나라 의료보험의 모태가 된 청십자의료보험 설립(1968). 평양 연합기독병원 원장, 김일성대학 의과대학 외과 교수, 부산복음병원 초대 원장, 청십자병원 원장……. 일일이 이력을 열거하기도 힘들 만큼 그는 많은 활동을 했다. 하지만 어찌된 일인지 사람들은 이런 업적으로 그를 기억하지 않는다. 오직 가난한 사람을 위해 헌신했던 사람, 자기를 위해서는 죽어서 묻힐 땅 한 평도 마련하지 않고 무소유로 살다간 사람, 돈이 없어 의료혜택을 받지 못한 환자를 위해 피를 뽑아 주고 입원비를 지불할 수 없는 환자가 밤에 몰래 도망할 수 있도록 도와준 사람, 북에 두고 온 아내를 그리며 평생 독신으로 살다간 ‘인간 장기려’로 기억한다.
‘참’장기려를 찾기 위한 노력
우리 사회의 안티 혹은 마이너로 남아 있는 개혁적 지식인들(홍세화, 진중권, 김규항, 고종석, 오한숙희, 박홍규 등)을 꾸준히 인터뷰해 온 저자 지강유철은 장기려 평전 집필을 제안받고서 장기려가 “우리 시대 성인이라는 사람들의 주장을 눈으로 확인하고 손으로 만지고 깨물어 그 맛을 느끼고” 싶었다고 고백했다. 이런 불순한(?) 의도가 있어서인지 《장기려, 그 사람》은 다른 전기나 평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영웅 만들기’가 없다. 저자는 장기려 선생의 일기, 신문이나 잡지를 통해 기고했던 글들, 그리고 장기려 선생에 관한 문헌을 발굴하고 연구하는 데 그치지 않고, 장기려를 증언해 줄 수 있는 여러 사람들을 만나 허상이 아닌 ‘진짜 장기려’를 찾기 위해 노력했다. 장기려 곁에서 그를 도왔던 사람뿐 아니라 의견을 달리했던 사람까지 취재해 서술했다.
(인터뷰에 응해 주신 분들: 손봉호 동덕여대 총장, 안병영 전 교육부총리, 김용준 학술협의회 이사장, 서재관 전 고신대의대 교수, 최중묵 서면 복음외과 원장, 이건오 한동대 선린병원장, 김서민 전 청십자사회복지회 이사, 박영훈 전 고신의료원장, 양덕호 전 청십자병원 원장, 이충한 고신대 복음병원장, 강현진 성형외과 원장, 태영숙 전 고신대 간호대학 학장, 윤여형 전 청십자병원 임상병리과 과장, 정기상 전 고신의료원 행정원장, 박광선 부산 산정현교회 원로목사, 김관선 서초동 산정현교회 목사, 권상석 부산 산정현교회 담임목사)
저자는 이 평전을 쓰면서 세 가지 원칙을 세웠다.
‘첫째, 시대와 역사 속에서 장기려를 본다.’ 한 사람의 삶과 사상은 결국 그 시대 가운데 형성되는 것이므로, 저자는 생애와 사상을 나누지 않고 행간 행간에 녹여 서술했다.
‘둘째, 아무런 정치적 고려를 하지 않고 장기려의 삶을 있는 그대로 드러낸다.’ 이전의 연구나 전기에는 빠져 있거나 에둘러 갔던 문제들, 이를 테면 고신교단이 복음병원을 장악하기 위해 선생을 조기 은퇴시키는 과정에서 벌어졌던 의사들 사이의 폭력사태, 고신대 의대생들의 대규모 유급과 교단에 저항했던 교수들의 재임용 탈락을 불러왔던 학내사태, 그리고 제도권 교회를 떠나 말년에 몸을 맡겼던 ‘종들의 모임’과 다시 받은 세례, 함석헌과 장기려의 관계, 선생의 신앙과 사상에 결정적으로 작용한 후지이 다케시?야나이하라 다다오의 영향, 평양 산정현교회의 분열과 기독교의 변절 등도 깊이 있게 다루었다.
‘셋째, 최대한 쉽게 쓴다.’ 쉽게 쓰려는 노력이 자칫 허구나 사실에 대한 추측으로 비칠 우려가 있어, 인용 출처를 꼼꼼히 밝히는 논문식 글쓰기를 빌려 왔다. 이는 선생의 삶을 본격적으로 다룬 최초의 평전인 만큼 다음 연구자들을 위해 꼭 필요한 일이었다.
다시 찾은 장기려
저자 지강유철은 이번 책을 통해 장기려를 여러 각도에서 입체적으로 조명하고 있다. 가장 먼저 “이면과 표면의 경계를 허문 사람”이었음을 강조한다. 장기려는 감출 것 없는 삶을 살았고, 어떤 상황에서든 있는 그대로를 드러냈으며, 거짓을 저주받을 짓이라고 여기고 정직을 최고의 미덕으로 삼았다. 의료 사고가 일어날 때는 직접 경찰서에 찾아가 본인의 과오를 인정하기까지 했다.
장기려는 “사람을 사람으로” 대했다. 자신의 집에 구걸 온 거지와 겸상을 하고, 입고 나갔던 코트를 거지에게 벗어 주며, 권력이나 돈이나 신분에 의해서가 아니라 생명 있는 ‘존재’로 사람을 대했다.
장기려는 “아마추어리즘을 고집했던 의학도”였다. 평생 공부밖에 몰랐던 사람, 없는 사람들을 위해 봉사하더라도 “실력 있는 의사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의사가 되려고 공부했지 전문가 되려고 공부한 것은 아니”라면서 전문의 자격증을 거부하고 외과학회 명예회원을 고집했다.
장기려는 “교회 개혁을 열망했던” 사람이다. 70여 년을 교회 안에 머물렀지만, 1974년에 남긴 글에서 “기독교는 새 혁명을 요구하고 있다”고 밝혔다. 그는 제도권 교회에서 집사, 장로로 봉사하다가 77세에 교회 개혁을 실천하는 작은 무리인 ‘종들의 모임’을 선택했다. 공식 이름도, 총회도, 직영 신학교도 없이 160여 개국에 산재해 있는 이 모임에서 말년에 그는 영적 평안을 누렸다.
장기려는 “이념에 얽매이지” 않았다. 가장 보수적이라는 장로교 고신 측에 속해 있으면서도 한국 교회가 거의 이단시하던 무교회주의적 색채를 지닌 ‘부산모임’을 32년이나 이끌었고, 기성교회에서 그리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던 함석헌과도 지속적으로 교제했다. 장기려는 사랑이 없다면 이념은 쓰레기라 생각했다. 그러기에 김일성과 김정일을 위해서도 기도할 수 있었다.
장기려에 대한 오해와 진실
○ 장기려는 이광수 소설 《사랑》 속 주인공이다?
인터넷에 들어가 ‘장기려’를 검색했을 때 춘원의 소설 속 주인공 ‘안빈’의 실제 모델이었다는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소설 속 주인공과 선생이 여러 면에서 닮았을 뿐 아니라 당시 정황이 유사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선생은 말했다.
“나를 두고 《사랑》의 주인공 안빈의 모델이라는 사람들이 있지만 그것은 사실과 좀 어긋나는 이야기가 아닌가 한다. ……춘원이 입원하고 있었을 때 ……나는 개를 대상으로 위와 알레르기에 대한 동물 실험을 하고 있었는데, 《사랑》 속에 안빈이 개, 토끼, 고양이를 대상으로 해서 공포의 감정 실험으로 ‘안피노톡신 제1호’를 발견했다는 구절이 있다든가, 안빈의 인간상에서 나를 연상케 하는 점이 많다는 등의 이유로 동료들 중에는 내가 안빈의 모델이라고 하는 이도 있지만……작품 인물들도 저자가 창조해 낸 인물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98~101쪽)
○ 북에 두고 온 아내를 그리며 평생 독신으로 살았다?
선생의 아내 김봉숙은 희생과 절대 순종을 미덕으로 여기며, 결혼할 때 선생과 한 모든 약속을 지키며 살았다. 선생은 “내 아내가 절대의 사랑으로 순종했기 때문에 나도 아내에게 죽도록 충성하는 사랑을 주려고 결심”하고, 1950년 12월 월남한 이후 북에 두고 온 아내를 기리며 평생 독신으로 지냈다. 선생에게 병적으로 집착하던 간호사가 시도 때도 없이 선생 사택으로 쳐들어 올 때도, 그동안 조국과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일할 만큼 일했으니 이제 미국으로 건너와 여생을 편하게 지내자는 돈 많은 여성의 청혼도 끝끝내 이겨냈다. (92쪽)
○ 김일성의 맹장 수술을 집도했다?
김일성 주석의 맹장 수술을 집도했다는 소문은 선생이 북에 있을 때부터 있었다. 선생은 1988년에 쓴 글에서 이 오해를 바로잡기 위해 김일성을 세 번 만났던 이야기를 자세히 기록했다. 맨 처음 만난 것은 1947년. 보건부 부국장 이성숙과 소련 고문관을 따라 김일성을 만나러 간 적이 있다. 두 번째 만남은 1948년.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 책임비서를 지낸 김용범의 수술 경과를 알아보기 위해 김일성 주석이 선생을 부른 것. 세 번째는 김윤범의 장례식장에서였다. 이날은 서로 대화는 하지 못하고 멀리서 지켜볼 뿐이었다. 김일성은 머리 뒤의 혹을 떼어 내고 싶었지만 누구도 믿을 수 없어 수술을 못 맡기고 있었는데, 어느 날 “장기려가 있으면 수술을 맡길 텐데……”라며 아쉬워했다고 한다. (194~196쪽)
○ 전두환 대통령의 식사 제의를 거절했다?
신군부가 광주를 피로 진압하고 철권 정치를 하고 있을 때였다. 무슨 일 때문인지 전두환 대통령이 부산에 내려왔고, 저녁식사 자리에 선생을 초대했다. 하지만 선생은 주례를 서 주기로 한 예비 신랑 신부와의 저녁 약속을 이행하기 위해 초대를 거절했다. 예비 신랑이 혹 선생의 신변에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어쩌나 걱정을 하자, 선생은 “아무리 대통령이라도 그렇지. 당일 전화해서 오라가라 하는 경우가 어딨어”라며 껄껄 웃었다고 한다. (415~417쪽)
○ 꿈에도 그리던 아내를 만날 수 있는 방북기회를 놓쳤다?
정부 당국이 북한에 있는 아내를 만나게 해 줄 테니 방북 신청을 하라고 제안하자, 선생은 “이산가족이 나 하나뿐이 아닌데 가족을 두고 온 사람들이 얼마나 가고 싶겠소. 그 사람들도 다 보내 준다면 나도 갈 생각이 있지만 그렇지 않다면 거절하겠소”, “나는 매일같이 영적으로 아내와 교통하고 있는 사람이오. 육신으로 며칠 만나고 오는 것이 내 나이에 무슨 득이 있겠소. 내가 평양에 간다면 그곳에서 내 생명이 다할 때까지 함께 살 수 있든지, 아니면 내가 아내를 데리고 남한에서 살 수 있다면 평양에 가겠지만 그렇지 못하다면 사양하겠소”라고 했다고 한다. (417~419쪽)
오늘날 왜 장기려인가?
의료법 개정에 반대하는 의사들의 집단 휴진, 공약만 있고 실천은 없는 정치, 예언자적 목소리는 없고 오직 ‘축복’만이 넘치는 교회, 대중 사회 속에서 고립감을 이기지 못해 목숨을 끊는 젊은이들, 비전 없이 전공을 택하고 젊은 날 동안 무슨 일을 해야 할지 고민만 하는 세대, 맘몬에 빠져 돈이라면 뭐든 오케이인 사회, 가족을 지키려는 노력 없이 성격 차이라는 이유로 갈라서는 부부들…….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지 못하는 듯 이리저리 방황하는 지금 이 시대에 장기려 선생이 살아 있다면 무슨 말을 했을까? 장기려의 삶은 정신적 지주를 애타게 기다리는 우리에게 변함없고 믿을 만한 사표가 되어 준다.
【장기려에 대한 회고】
오직 주님만을 섬기다 간 사람
기용숙(전 서울대 교수) _장기려에게서는 영원을 느낍니다.
김서민(전 청십자사회복지회 이사) _그는 자유한 삶을 사셨습니다. 자신이 그렇게 산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영이 그의 속에 있어 그를 지배하고 이끌어 주신 것입니다.
박홍규(영남대 교수) _그가 몸담았던 병원이나 교회나 대학의 대형화, 자본화, 권력화를 철저히 경계하고, 일제 때의 신사참배는 물론 해방 후 미국 자본주의에 굴복한 점을 철저히 비판한 그의 목소리는 지금에야말로 더욱 절실하게 들려온다.
손동길(부산 삼성병원 이사) _“금년엔 날 좀 닮아서 살아 보아” 하시기에 “선생님 닮아 살면 바보 되게요” 하였더니 크게 웃으시면서 “그렇지. 바보 소리 들으면 성공한 거야! 바보로 살기가 얼마나 어려운 줄 아니?” 하셨습니다. 알쏭달쏭한 그의 이 한 말씀이 늘 귓전에 쟁쟁합니다.
손봉호(동덕여대 총장) _그분의 약점에 대해서는 별로 들어 본 바도 없고, 나 스스로 발견하지도 못했습니다. 우리가 사도 바울 같은 분을 ‘성자’라고 부를 수 있다면, 나는 충분히 장기려 박사도 성자라 부를 수 있겠다고 생각합니다.
안병영(전 교육부 총리) _장기려 선생은 나의 교육 철학의 모델입니다. 그는 항상 맨손으로 시작하지만, 얼마 안 가 조직적·창의적 노력과 결부되어 엄청난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이만열(전 국사편찬위원장) _그의 성경 연구는 단순히 관념적인 사유에 의해 도출된 것이 아니라 삶의 현장에서 사색과 실천을 통해 육화(肉化)되어 나온 것입니다. 그는 오직 하나님께만 인정받기를 원하셨던 분입니다.
이건오(한동대 선린병원 원장) _선생은 다른 의학자들이나 병리학자들과는 색깔이 다르셨습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것은 반드시 원리가 있고 그래서 그 원리를 찾으면 치료할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습니다.
이상규(고신대 신대원 교수) _한국 교회의 문제를 신랄하게 지적하고 비판하기보다는 자신의 삶을 통해 한국 교회의 문제를 지적해 주고 그 문제를 개혁해야 한다는 점을 보여 주셨습니다.
함석헌(민중운동가) _마음 놓고 내 친구라고 감히 부를 수 있는 몇 안 되는 친구 중 한 분입니다.
▣ 작가 소개
저자 : 지강유철
1958년 강원도 화천에서 태어나 총신대에서 지휘를 공부했다. 30여 년 동안 여러 교회에서 전도사와 성가대 지휘자로 봉사하던 중 교단장 금권선거에 연루되어 양심선언을 했다. 기독교윤리실천운동 및 교회개혁실천연대 사무국장 및 집행위원으로 있했으며 월간 [복음과 상황], [인물과 사상], [기독교사상] 등에서 객원 인터뷰어로 활동했다. 현재는 양화진문화원 선임연구원으로 있디. 지은 책으로 《요셉의 회상》, 《안티 혹은 마이너》가 있고, 공저로 《존 스토트, 우리의 친구》, 《나를 딛고 일어서라》, 《전병욱 다시 읽기》, 《한국교회, 개혁의 길을 묻다》 등이 있다. 정리한 책으로는 도법 스님, 김민웅 목사, 김인국 신부의 대담을 묶은 《잡설》이 있다.
성산 장기려 (聖山 張起呂, 1911.8.14. - 1995.12.25.)
평안북도 용천군 양하면 입암동에서 아버지 장운섭, 어머니 최윤경의 차남으로 출생. 개성 송도고등보통학교, 경성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나고야 대학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평양 연합기독병원 원장, 김일성대학 의과대학 외과 교수, 부산복음병원 초대 원장, 청십자병원 원장, 부산아동병원 원장 등을 역임했다. 부산대, 가톨릭대, 서울대 등에서 후학들을 가르쳤고, 우리나라 최초로 “간의 부분절제(1943) 및 대량절제술(1959)”에 성공했으며, 부산외과학회를 창립하여 의학 연구에 공적을 남겼다. 가난한 환자들을 위한 무료 병원, 간질 환자들의 모임 ‘장미회’ 활동, 우리나라 최초의 의료보험협동조합 ‘청십자의료보험’ 창설 등은 그가 평생 동안 무엇에 소망을 두고 어떻게 살았는지 증언해 준다. 아내 김봉숙과의 사이에 6남매를 두었으나 6·25전쟁 때 둘째아들만 데리고 월남하게 된 뒤, 북에 두고 온 아내와 가족을 그리며 평생 독신으로 살았다.
아시아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막사이사이상(사회봉사 부문), 국민훈장 무궁화장, 자랑스런 서울대인상 등을 수상했다. ‘한국의 슈바이처’, ‘살아 있는 성자’, ‘바보 의사’, ‘작은 예수’ 등으로 불리며 온전히 이웃을 위해, 이웃과 함께 살아온 그의 묘비에는 “주님만을 섬기다 간 사람”이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심층 보기】
중국 당나라 때는 ‘신언서판’(身言書判)이라 하여, 몸[體貌]과 말씨[言辯], 글씨[筆跡], 판단[文理]을 인물 평가 요소로 삼았다. 미국의 주식투자가 워런 버핏은 ‘정직한가’, ‘지적인가’, ‘에너지가 넘치는가’를 사람 평가의 기준으로 본다고 했다. 과거의 인물을 평가하는 기준은 과연 무엇일까? 도덕적 깨끗함일까, 그가 남긴 업적일까?
성자(聖子) 장기려
도덕적인 잣대로 평가할 때 별 문제없이 일생을 살아간 사람들이 꽤 있지만, 이들 대부분은 평범한 소시민일 경우가 많다. 반면 업적에 우선을 두어 평가하면, 악덕 경영자가 영웅이 될 수 있고 정경유착에 따른 기회주의자가 큰 산과 같은 인물로 만들어질 수 있다. 그러나 간혹 이런 두 기준에서 조화를 이룬 사람을 만나게 되는데, 이럴 때 우리는 그를 ‘성인’(聖人) 혹은 ‘성자’(聖子)라 일컫는다. 비폭력 무저항 운동으로 인도 사회를 이끌었던 간디, 빈민 봉사에 헌신한 마터 테레사가 그렇다. 동덕여대 총장을 지낸 손봉호 교수는 장기려 선생을 이야기하면서, “그의 약점에 대해서는 별로 들어 본 바도 없고, 나 스스로 발견하지도 못했다. 우리가 사도 바울 같은 분을 ‘성자’라고 부를 수 있다면, 충분히 장기려 박사도 성자라 부를 수 있겠다”고 증언했다.
인간(人間) 장기려
장기려(張起呂, 1911-1995). 우리나라 최초로 ‘간의 부분절제(1943) 및 대량절제술(1959)’ 성공, 북한이 수여한 최초의 박사학위 수여자(1948), 우리나라 의료보험의 모태가 된 청십자의료보험 설립(1968). 평양 연합기독병원 원장, 김일성대학 의과대학 외과 교수, 부산복음병원 초대 원장, 청십자병원 원장……. 일일이 이력을 열거하기도 힘들 만큼 그는 많은 활동을 했다. 하지만 어찌된 일인지 사람들은 이런 업적으로 그를 기억하지 않는다. 오직 가난한 사람을 위해 헌신했던 사람, 자기를 위해서는 죽어서 묻힐 땅 한 평도 마련하지 않고 무소유로 살다간 사람, 돈이 없어 의료혜택을 받지 못한 환자를 위해 피를 뽑아 주고 입원비를 지불할 수 없는 환자가 밤에 몰래 도망할 수 있도록 도와준 사람, 북에 두고 온 아내를 그리며 평생 독신으로 살다간 ‘인간 장기려’로 기억한다.
‘참’장기려를 찾기 위한 노력
우리 사회의 안티 혹은 마이너로 남아 있는 개혁적 지식인들(홍세화, 진중권, 김규항, 고종석, 오한숙희, 박홍규 등)을 꾸준히 인터뷰해 온 저자 지강유철은 장기려 평전 집필을 제안받고서 장기려가 “우리 시대 성인이라는 사람들의 주장을 눈으로 확인하고 손으로 만지고 깨물어 그 맛을 느끼고” 싶었다고 고백했다. 이런 불순한(?) 의도가 있어서인지 《장기려, 그 사람》은 다른 전기나 평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영웅 만들기’가 없다. 저자는 장기려 선생의 일기, 신문이나 잡지를 통해 기고했던 글들, 그리고 장기려 선생에 관한 문헌을 발굴하고 연구하는 데 그치지 않고, 장기려를 증언해 줄 수 있는 여러 사람들을 만나 허상이 아닌 ‘진짜 장기려’를 찾기 위해 노력했다. 장기려 곁에서 그를 도왔던 사람뿐 아니라 의견을 달리했던 사람까지 취재해 서술했다.
(인터뷰에 응해 주신 분들: 손봉호 동덕여대 총장, 안병영 전 교육부총리, 김용준 학술협의회 이사장, 서재관 전 고신대의대 교수, 최중묵 서면 복음외과 원장, 이건오 한동대 선린병원장, 김서민 전 청십자사회복지회 이사, 박영훈 전 고신의료원장, 양덕호 전 청십자병원 원장, 이충한 고신대 복음병원장, 강현진 성형외과 원장, 태영숙 전 고신대 간호대학 학장, 윤여형 전 청십자병원 임상병리과 과장, 정기상 전 고신의료원 행정원장, 박광선 부산 산정현교회 원로목사, 김관선 서초동 산정현교회 목사, 권상석 부산 산정현교회 담임목사)
저자는 이 평전을 쓰면서 세 가지 원칙을 세웠다.
‘첫째, 시대와 역사 속에서 장기려를 본다.’ 한 사람의 삶과 사상은 결국 그 시대 가운데 형성되는 것이므로, 저자는 생애와 사상을 나누지 않고 행간 행간에 녹여 서술했다.
‘둘째, 아무런 정치적 고려를 하지 않고 장기려의 삶을 있는 그대로 드러낸다.’ 이전의 연구나 전기에는 빠져 있거나 에둘러 갔던 문제들, 이를 테면 고신교단이 복음병원을 장악하기 위해 선생을 조기 은퇴시키는 과정에서 벌어졌던 의사들 사이의 폭력사태, 고신대 의대생들의 대규모 유급과 교단에 저항했던 교수들의 재임용 탈락을 불러왔던 학내사태, 그리고 제도권 교회를 떠나 말년에 몸을 맡겼던 ‘종들의 모임’과 다시 받은 세례, 함석헌과 장기려의 관계, 선생의 신앙과 사상에 결정적으로 작용한 후지이 다케시?야나이하라 다다오의 영향, 평양 산정현교회의 분열과 기독교의 변절 등도 깊이 있게 다루었다.
‘셋째, 최대한 쉽게 쓴다.’ 쉽게 쓰려는 노력이 자칫 허구나 사실에 대한 추측으로 비칠 우려가 있어, 인용 출처를 꼼꼼히 밝히는 논문식 글쓰기를 빌려 왔다. 이는 선생의 삶을 본격적으로 다룬 최초의 평전인 만큼 다음 연구자들을 위해 꼭 필요한 일이었다.
다시 찾은 장기려
저자 지강유철은 이번 책을 통해 장기려를 여러 각도에서 입체적으로 조명하고 있다. 가장 먼저 “이면과 표면의 경계를 허문 사람”이었음을 강조한다. 장기려는 감출 것 없는 삶을 살았고, 어떤 상황에서든 있는 그대로를 드러냈으며, 거짓을 저주받을 짓이라고 여기고 정직을 최고의 미덕으로 삼았다. 의료 사고가 일어날 때는 직접 경찰서에 찾아가 본인의 과오를 인정하기까지 했다.
장기려는 “사람을 사람으로” 대했다. 자신의 집에 구걸 온 거지와 겸상을 하고, 입고 나갔던 코트를 거지에게 벗어 주며, 권력이나 돈이나 신분에 의해서가 아니라 생명 있는 ‘존재’로 사람을 대했다.
장기려는 “아마추어리즘을 고집했던 의학도”였다. 평생 공부밖에 몰랐던 사람, 없는 사람들을 위해 봉사하더라도 “실력 있는 의사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의사가 되려고 공부했지 전문가 되려고 공부한 것은 아니”라면서 전문의 자격증을 거부하고 외과학회 명예회원을 고집했다.
장기려는 “교회 개혁을 열망했던” 사람이다. 70여 년을 교회 안에 머물렀지만, 1974년에 남긴 글에서 “기독교는 새 혁명을 요구하고 있다”고 밝혔다. 그는 제도권 교회에서 집사, 장로로 봉사하다가 77세에 교회 개혁을 실천하는 작은 무리인 ‘종들의 모임’을 선택했다. 공식 이름도, 총회도, 직영 신학교도 없이 160여 개국에 산재해 있는 이 모임에서 말년에 그는 영적 평안을 누렸다.
장기려는 “이념에 얽매이지” 않았다. 가장 보수적이라는 장로교 고신 측에 속해 있으면서도 한국 교회가 거의 이단시하던 무교회주의적 색채를 지닌 ‘부산모임’을 32년이나 이끌었고, 기성교회에서 그리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던 함석헌과도 지속적으로 교제했다. 장기려는 사랑이 없다면 이념은 쓰레기라 생각했다. 그러기에 김일성과 김정일을 위해서도 기도할 수 있었다.
장기려에 대한 오해와 진실
○ 장기려는 이광수 소설 《사랑》 속 주인공이다?
인터넷에 들어가 ‘장기려’를 검색했을 때 춘원의 소설 속 주인공 ‘안빈’의 실제 모델이었다는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소설 속 주인공과 선생이 여러 면에서 닮았을 뿐 아니라 당시 정황이 유사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선생은 말했다.
“나를 두고 《사랑》의 주인공 안빈의 모델이라는 사람들이 있지만 그것은 사실과 좀 어긋나는 이야기가 아닌가 한다. ……춘원이 입원하고 있었을 때 ……나는 개를 대상으로 위와 알레르기에 대한 동물 실험을 하고 있었는데, 《사랑》 속에 안빈이 개, 토끼, 고양이를 대상으로 해서 공포의 감정 실험으로 ‘안피노톡신 제1호’를 발견했다는 구절이 있다든가, 안빈의 인간상에서 나를 연상케 하는 점이 많다는 등의 이유로 동료들 중에는 내가 안빈의 모델이라고 하는 이도 있지만……작품 인물들도 저자가 창조해 낸 인물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98~101쪽)
○ 북에 두고 온 아내를 그리며 평생 독신으로 살았다?
선생의 아내 김봉숙은 희생과 절대 순종을 미덕으로 여기며, 결혼할 때 선생과 한 모든 약속을 지키며 살았다. 선생은 “내 아내가 절대의 사랑으로 순종했기 때문에 나도 아내에게 죽도록 충성하는 사랑을 주려고 결심”하고, 1950년 12월 월남한 이후 북에 두고 온 아내를 기리며 평생 독신으로 지냈다. 선생에게 병적으로 집착하던 간호사가 시도 때도 없이 선생 사택으로 쳐들어 올 때도, 그동안 조국과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일할 만큼 일했으니 이제 미국으로 건너와 여생을 편하게 지내자는 돈 많은 여성의 청혼도 끝끝내 이겨냈다. (92쪽)
○ 김일성의 맹장 수술을 집도했다?
김일성 주석의 맹장 수술을 집도했다는 소문은 선생이 북에 있을 때부터 있었다. 선생은 1988년에 쓴 글에서 이 오해를 바로잡기 위해 김일성을 세 번 만났던 이야기를 자세히 기록했다. 맨 처음 만난 것은 1947년. 보건부 부국장 이성숙과 소련 고문관을 따라 김일성을 만나러 간 적이 있다. 두 번째 만남은 1948년.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 책임비서를 지낸 김용범의 수술 경과를 알아보기 위해 김일성 주석이 선생을 부른 것. 세 번째는 김윤범의 장례식장에서였다. 이날은 서로 대화는 하지 못하고 멀리서 지켜볼 뿐이었다. 김일성은 머리 뒤의 혹을 떼어 내고 싶었지만 누구도 믿을 수 없어 수술을 못 맡기고 있었는데, 어느 날 “장기려가 있으면 수술을 맡길 텐데……”라며 아쉬워했다고 한다. (194~196쪽)
○ 전두환 대통령의 식사 제의를 거절했다?
신군부가 광주를 피로 진압하고 철권 정치를 하고 있을 때였다. 무슨 일 때문인지 전두환 대통령이 부산에 내려왔고, 저녁식사 자리에 선생을 초대했다. 하지만 선생은 주례를 서 주기로 한 예비 신랑 신부와의 저녁 약속을 이행하기 위해 초대를 거절했다. 예비 신랑이 혹 선생의 신변에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어쩌나 걱정을 하자, 선생은 “아무리 대통령이라도 그렇지. 당일 전화해서 오라가라 하는 경우가 어딨어”라며 껄껄 웃었다고 한다. (415~417쪽)
○ 꿈에도 그리던 아내를 만날 수 있는 방북기회를 놓쳤다?
정부 당국이 북한에 있는 아내를 만나게 해 줄 테니 방북 신청을 하라고 제안하자, 선생은 “이산가족이 나 하나뿐이 아닌데 가족을 두고 온 사람들이 얼마나 가고 싶겠소. 그 사람들도 다 보내 준다면 나도 갈 생각이 있지만 그렇지 않다면 거절하겠소”, “나는 매일같이 영적으로 아내와 교통하고 있는 사람이오. 육신으로 며칠 만나고 오는 것이 내 나이에 무슨 득이 있겠소. 내가 평양에 간다면 그곳에서 내 생명이 다할 때까지 함께 살 수 있든지, 아니면 내가 아내를 데리고 남한에서 살 수 있다면 평양에 가겠지만 그렇지 못하다면 사양하겠소”라고 했다고 한다. (417~419쪽)
오늘날 왜 장기려인가?
의료법 개정에 반대하는 의사들의 집단 휴진, 공약만 있고 실천은 없는 정치, 예언자적 목소리는 없고 오직 ‘축복’만이 넘치는 교회, 대중 사회 속에서 고립감을 이기지 못해 목숨을 끊는 젊은이들, 비전 없이 전공을 택하고 젊은 날 동안 무슨 일을 해야 할지 고민만 하는 세대, 맘몬에 빠져 돈이라면 뭐든 오케이인 사회, 가족을 지키려는 노력 없이 성격 차이라는 이유로 갈라서는 부부들…….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지 못하는 듯 이리저리 방황하는 지금 이 시대에 장기려 선생이 살아 있다면 무슨 말을 했을까? 장기려의 삶은 정신적 지주를 애타게 기다리는 우리에게 변함없고 믿을 만한 사표가 되어 준다.
【장기려에 대한 회고】
오직 주님만을 섬기다 간 사람
기용숙(전 서울대 교수) _장기려에게서는 영원을 느낍니다.
김서민(전 청십자사회복지회 이사) _그는 자유한 삶을 사셨습니다. 자신이 그렇게 산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영이 그의 속에 있어 그를 지배하고 이끌어 주신 것입니다.
박홍규(영남대 교수) _그가 몸담았던 병원이나 교회나 대학의 대형화, 자본화, 권력화를 철저히 경계하고, 일제 때의 신사참배는 물론 해방 후 미국 자본주의에 굴복한 점을 철저히 비판한 그의 목소리는 지금에야말로 더욱 절실하게 들려온다.
손동길(부산 삼성병원 이사) _“금년엔 날 좀 닮아서 살아 보아” 하시기에 “선생님 닮아 살면 바보 되게요” 하였더니 크게 웃으시면서 “그렇지. 바보 소리 들으면 성공한 거야! 바보로 살기가 얼마나 어려운 줄 아니?” 하셨습니다. 알쏭달쏭한 그의 이 한 말씀이 늘 귓전에 쟁쟁합니다.
손봉호(동덕여대 총장) _그분의 약점에 대해서는 별로 들어 본 바도 없고, 나 스스로 발견하지도 못했습니다. 우리가 사도 바울 같은 분을 ‘성자’라고 부를 수 있다면, 나는 충분히 장기려 박사도 성자라 부를 수 있겠다고 생각합니다.
안병영(전 교육부 총리) _장기려 선생은 나의 교육 철학의 모델입니다. 그는 항상 맨손으로 시작하지만, 얼마 안 가 조직적·창의적 노력과 결부되어 엄청난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이만열(전 국사편찬위원장) _그의 성경 연구는 단순히 관념적인 사유에 의해 도출된 것이 아니라 삶의 현장에서 사색과 실천을 통해 육화(肉化)되어 나온 것입니다. 그는 오직 하나님께만 인정받기를 원하셨던 분입니다.
이건오(한동대 선린병원 원장) _선생은 다른 의학자들이나 병리학자들과는 색깔이 다르셨습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것은 반드시 원리가 있고 그래서 그 원리를 찾으면 치료할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습니다.
이상규(고신대 신대원 교수) _한국 교회의 문제를 신랄하게 지적하고 비판하기보다는 자신의 삶을 통해 한국 교회의 문제를 지적해 주고 그 문제를 개혁해야 한다는 점을 보여 주셨습니다.
함석헌(민중운동가) _마음 놓고 내 친구라고 감히 부를 수 있는 몇 안 되는 친구 중 한 분입니다.
▣ 작가 소개
저자 : 지강유철
1958년 강원도 화천에서 태어나 총신대에서 지휘를 공부했다. 30여 년 동안 여러 교회에서 전도사와 성가대 지휘자로 봉사하던 중 교단장 금권선거에 연루되어 양심선언을 했다. 기독교윤리실천운동 및 교회개혁실천연대 사무국장 및 집행위원으로 있했으며 월간 [복음과 상황], [인물과 사상], [기독교사상] 등에서 객원 인터뷰어로 활동했다. 현재는 양화진문화원 선임연구원으로 있디. 지은 책으로 《요셉의 회상》, 《안티 혹은 마이너》가 있고, 공저로 《존 스토트, 우리의 친구》, 《나를 딛고 일어서라》, 《전병욱 다시 읽기》, 《한국교회, 개혁의 길을 묻다》 등이 있다. 정리한 책으로는 도법 스님, 김민웅 목사, 김인국 신부의 대담을 묶은 《잡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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