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 출판사서평
한국의 절들을 찾아가는 이야기를 담은 에세이집. 제주도의 올레길이나 스페인의 산티아고 순례길보다 더 오래되고 더 깊은 명상을 제공하는 길들이 우리 주변에 존재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문득 깨달은 저자는 ‘저 절로 가는 길’을 찾아 도반들을 모아 길을 나선다. 도반들이 모이는 이름은 ‘서울불교산악회’와 ‘저절로가는길’. 사람들이 ‘저 절로 가는’ 목적이 절에 도착해서가 아니라 ‘그 길을 가는 동안 저절로 해결되면 더 좋지 않겠는가’하는 생각을 하면서 걷기 모임의 이름을 ‘저절로가는길’로 지었다. 그러기를 7년, 700여 곳의 절을 탐방, 순례, 참배하면서 떠오른 생각을 적은 글들 중 일부를 이 책에 담았다.
이 책에는 서른 여섯 개의 절에 가는 이야기가 담겨있다. 이 책에서 저자가 찾아가는 절들은 서울과 수도권, 전남, 경남, 강원까지 골고루 아우르고 있지만, 그것 외에는 어떤 기준에 의해서 선택되었는지 알 수 없다. 아마 저자도 설명하지 못하리라. 조계사, 봉원사, 상원사 등 누구나 아는 유명한 절도 포함되어 있기는 하지만 이 책에서 저자가 찾아가는 대부분의 절들은 금선사, 일락사, 불갑사 처럼, 특별히 기도처를 찾아다니는 신심깊은 불자들이나 부근에 사는 주민이 아니면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다.
자신이 불자이고, 절에 도착하면 도반들의 법회를 인도하기도 하지만, 저자는 이 책의 범위를 불교 이야기에 한정짓지 않는다. 저 절로 가는 사람들의 마음을 헤아리고 함께 느껴주고 그들의 소원을 이루고 고민을 해결하는 데 힘을 보태준다고 생각되면 이야기의 소재가 불교나 부처가 아니라고 망설이지 않는다.
대문이 닫힌 성벽을 날개 달린 말을 타고 뛰어넘는 출가에서부터, 불붙지 않던 장작이 마하가섭에게 관 속에 있던 부처가 발을 내밀어 보여 준 뒤에야 활활 타오른 다비에 이르기까지 부처의 일대기와 사상이 띄엄 띄엄 나타나고, 경허 아래서 함께 공부하던 수월과 만공의 일화, 그리고 법정스님의 맏상좌였던 덕조스님의 근황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불교 이야기가 등장하지만, 그에 못지 않게 어느 날 소수서원을 나와 국망봉 아래에 있는 석륜사를 찾아가서 소백산을 샅샅이 유람할 요량으로 거기서 사흘을 머물렀던 퇴계 같은 유학자와 18년의 유배생활을 마치고 북한강변의 본가로 돌아와 어릴 때 오르 내리던 운길산을 바라보며 늙어 기력없음을 슬퍼하는 시를 지었던 다산 정약용, 1890년에 깎아지는 벼랑길로 북한산 중흥사를 찾아갔던 기록을 남겼던 영국 여행가 아놀드 새비지 랜도어, 그리고 다산 유배길 중 ‘뿌리의 길’을 시를 지어 찬탄한 정호승 시인까지 종교와 시대를 뛰어 넘는 수 많은 사람들이 ‘저 절로 가는 길’을 걷는 저자의 머리 속에 동행한다.
부처와 다산 같은 역사적 인물들 만이 아니다. 그들만큼 유명하지는 않지만, 책을 읽는 우리들에게는 더 중요한 등장인물들이 곳곳에 등장한다.
늦게 일어났다면서, 지하철 노조가 파업했다면서, 휴대폰 액정이 깨져 시간을 제대로 볼 수 없었다면서 제각각 지각한 이유를 둘러대고, 목정굴 안내판 앞에서는 누군가 개탄조로 “내가 요즘 산에 다니면서 죽기 살기로 살 빼는 이유가 뭔지 압니까? 울 마누라가 무겁다 캅니더. 지가 올라오면 될낀데,”하고 운을 떼면 그 말을 받아 “와아, 아직 밑에 있나베? 울 마눌은 벌써 올라와 버렸는대. 그 육중한 몸매로 말이시. 오늘은 정말 죽인다, 이래야 살아남아요. 천장에 도배 새로 해야겠네, 이랬다간 크게 다칩니다” 대꾸하고, 그 말에 콩 자루가 터진 듯 와르르 웃음을 쏟아내는 도반들이 그들이다.
그들과 함께 저 절을 찾아가는 길이 마냥 이처럼 만만하고 즐겁기만 한 것은 아니다. 아내에게 살 빼라는 지청구를 듣지 않겠다는 그런 애교스런 소망을 가진 이들만 동행하는 등산 모임에서 일어나는 가벼운 이야기만 기대하고 이 책을 집는 분들은 예기치 않은 스토리에 전혀 다른 감정을 느끼게 될 가능성이 있다. 예를 들면 이런 이야기다.
‘오세암에서 하룻밤을 묵기로 하고 배낭을 내리자 마침내 빗방울이 듣기 시작했다. 방사에서 곰팡내가 심하게 풍겨왔다. 방바닥은 습기를 머금었고 이불은 눅눅했다. 순례자들이 서로의 신변을 묻거나 법담을 나누는 소리가 빗소리에 섞였다. 방사 봉창으로 사선을 그리며 내리는 빗줄기가 보였다. 피로한데도 잠이 오지 않는 밤이었다. 눈을 감았으나 비가 지붕을 치고 벽을 때리는 소리에 깊은 잠이 들 수 없었다. 이따금 가벼운 천둥이 치고 번개가 봉창을 긁고 지나갔다.
선잠에서 깨어나 봉창을 보니 빗줄기가 수직을 긋고 있었다.
…
새벽녘 봉정암으로 떠날 채비였던 사람들은 빗줄기를 보며 불안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그때였다.
“오세암까지 왔으니 내는 직여도 봉정암에 갈랍니다. 봉정암 갈라꼬 일년을 기다렸어예.”
경상도 노보살을 필두로 의견이 둘로 갈렸다. 봉정암만큼은 가야 한다는 불심론과 비 오는 날은 모든 산행을 포기해야 한다는 원칙론. 산행대장인 나는 선택해야 했다. 아니, 결정해야 했다.
“갈 사람 가고 남을 사람 남으시지요.”
사실 나는 간밤에도 그랬고 새벽녘에도 순례자들 앞에서 산행을 포기하자는, 설득력 있는 말을 준비했었다. 그랬는데 나도 모르게 갑자기 바뀌어버렸다. 경상도 보살 때문이 아니라 순간적으로 무엇에 홀린 듯했다.
봉정암행을 포기한 사람들의 움직임은 빨랐지만 얼굴은 밝지 않았다. 몇몇은 돌아서면서 혀를 찼다.
“아무리 봉정암이지만 이 비에 뭔 산행이여. 산행대장이면 말려야지.”
그들이 백담사로 가고 나서도 남은 사람들은 빗줄기를 바라보기만 할 뿐 걸음을 떼놓지 않았다. 각자 무얼 생각했을까. 나는 숲에서 수행하는 고대 인도의 수행자들이 우기 때면 나뭇가지나 풀을 엮어 만든 움집에 들어선다는 안거安居를 떠올려보았다. 그들은 비를 피할 수 있는 최소한의 장치 속에 들어 앉아 선정에 들었다. 그들의 눈앞에서, 생각에 잠긴 눈꺼풀 밖에서 내렸던 천오백 년 전의 비를 상상하며 나는 천천히 우비를 입었다.
…
나는 오세암 공양간 옆에 표시된 이정표를 향해 첫발을 내디뎠다. 그러자 준비라도 한 듯 나머지 사람들도 내 뒤를 따랐다. 그중에는 아들이 대학에 들어가기를 봉정암 사리탑에 간절히 기도하려고 뒤따르는 학부모도 있었다.
…
시냇물을 건너 숲길 모퉁이를 돌자 갑자기 빗줄기가 굵어진다. 역시 설악산이다. 큰 산은 일정한 기후와 온도를 유지하지 않는다. 산에서는 몰아쳐 내리는 소나기를 만날 때가 가장 곤혹스럽다. 물론 내리기 전에 몇 차례 징후를 보인다. 먼저 먼지와 낙엽을 날리며 지나는 바람이 공기를 긴장시킨다. 숲이 슬그머니 몸을 뒤챈다. 이윽고 빗줄기가 잎사귀에 쏴아 쏴, 내리꽂히고, 땅에 깔린 돌멩이들도 덩달아 들썩일 때 내 눈은 허둥지둥 피할 곳을 더듬고, 내 손은 배낭 속에 든 우비를 뒤지게 된다.
…
어디만큼 올랐을까. 잠시 다리를 펴고 나무 밑에 쉬는데도 경상도 노보살은 휘어휘어 산길을 오른다. 남들 쉴 때 같이 쉬지 못하는 건 당신의 몸을 알아서이다. …
앞서 가던 경상도 노보살이 하염없이 뒤처지고 있었다. 나는 선두를 다른 사람에게 맡기고 노보살을 부축했다. 노보살이 고맙다면서도 당신의 늙은 몸을 한탄한다.
노보살의 몸도 비에 젖어 있었다. 더 이상 관리되지 않는 살과 뼈가 젖은 옷에 드러나서 제멋대로 덜렁거린다. 살과 뼈가 다른 살림을 차린 모양새이고, 내 집이 아닌 다른 집에 내가 살고 있다고 늙은 몸은 말하고 있었다.
…
오세암을 통해 봉정암으로 오르는 길은 유난히 구불구불했다. 뒤에서 보니 길이 비구름과 안개를 번갈아 드나드는 것 같았고, 순례자들이 배낭 대신 비구름의 집을 등에 짊어지고 힘겹게 걷는 것 같았다.
…
선두가 봉정암으로 넘어가는 ‘깔딱고개’ 앞에 멈추었다. 거기서 마지막으로 쉬었다가 봉정암으로 갈 요량인가 보았다. 경상도 노보살은 더 참지 못하고 바위에 박은 쇠파이프 손잡이를 두 손에 거머쥔 채 털썩 주저앉았다. 하얗게 세다 못해 듬성듬성 머리카락이 빠져나간 정수리를 보이면서 노보살은 겨우 말했다.
“하이고, 내는 이자 봉정암 올라가삘면 더는 몬 올라가예.”
“그래도 내려가면 생각이 달라지실 걸요.”
내가 웃었지만 노보살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영감이 아파서 올라왔어예. 영감 저승 가뿔기 전에 부처님께 인사 대신 드릴라꼬예. 전엔 봉정암에 노상 같이 왔지예.”
…
이제 우리는 일어나 깔딱고개를 넘어야 한다. 사는 일은 얼마나 힘든 고갯길이었나. 그러나 굳이 깔딱고개를 넘어 사리탑에 이르지 않아도 산행대장으로서의 범계를 무릅쓰고 봉정암에 오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눈이 밝아지고 가슴이 훤히 열렸다. 나는 비에 젖은 파이프를 움켜준 경상도 노보살의 쪼글쪼글한 손에서 부처를 보았다. 그 순간, 비가 개었다.’
때때로 저자의 순례길에 동행했던 산악인 엄홍길은 이렇게 이 책의 추천사를 썼다. ‘고원영 작가의 글을 읽으니 작년에 안데스 산맥을 종주하면서 잉카 문명의 발원지를 돌아봤을 때의 기억이 새롭다. 적도에서 파타고니아까지, 8,000km에 이르는 그 길은 에콰도르, 페루, 볼리비아, 칠레, 아르헨티나로 국경이 갈라졌지만, 국경을 통해 다시 이어지기도 하는 길이었다. 그 기나긴 길에서 75일 동안 숙식을 해가며 걷는 일이 히말라야 등정 못지않게 힘들었지만, 그만큼 보람도 컸다. 산을 넘을 때와 마찬가지로 길에서도 삶의 여러 의미와 마주쳤기 때문이다. 인생이 왜 길에 비유되는지, 종교가 왜 길에서 생겨나는지 알 것도 같았다. 잉카문명은 남미의 오랜 신앙이 바탕했으므로 불자인 내게는 자연스레 1,600여 년의 역사를 지닌 우리 불교가 떠올랐다. 우리나라 어느 산에 가도 절이 있고, 절로 가는 길이 있으니, 그에 대한 이야기도 함께 있지 않겠는가. 그때 내가 그렇게 막연히 생각했던 것을 평소 불연을 맺어온 고원영 작가가 썼다는 사실이 예사롭지 않으면서도 우선은 매우 기쁘다.’
저자가 찍은 사진들이 가끔씩 등장해서 저 절로 가는 길의 풍광을 그려보려는 독자들의 상상력에 힘을 보태준다.
▣ 작가 소개
저자 : 고원영
스페인의 산티아고 길과 달리 우리나라는 국토 전체가 성지순례길임을 깨닫고, 7년 째 순례 중이다. 등산과 걷기여행 모임인 ‘서울불교산악회’와 ‘저절로가는길’ 회원들이 함께 한 700여 차례의 등산과 걷기여행을 통해 전국 각지의 여러 절과 불교유적지를 참배했다. 그 길에 스님, 산악인, 주부, 할머니, 법조인, 시인, 대졸 미취업자, 공무원, 구두닦이 등 다양한 연령대와 직업의 사람들이 ‘도반’으로 참여했다. 2010년 장편소설 ‘나뭇잎 병사’를 발표했다.
▣ 주요 목차
■들어가는 말 ...6
서울의 절길
1. 출가 / 조계사 가는 길 ...14
2. 낮은 데로 임하소서 / 금선사에서 승가사 가는 길 ...30
3. 중생이 절에 가는 법 / 화계사 가는 길 ...46
4. 니사길을 아시나요? / 청룡사 가는 길 ...57
5. 지옥과 극락 사이 / 봉은사 가는 길 ...69
6. 그리움이 찰랑거리는 물병 / 길상사 가는 길 ...78
7. 야만인과 함께 절에 가다 / 문수사 가는 길 ...90
8. 선지식이란 무엇인가 / 청계사 가는 길 ...106
9. 여름의 절길 / 진관사에서 삼천사로 가는 길 ...119
10. 달의 길, 용의 길 / 망월사 가는 길 ...132
경기도의 절길
11. 도둑과 미륵이 함께 쓰는 일기 / 칠장사 가는 길 ...146
12. 저절로 이루어지게 해주소서 / 보문사 가는 길 ...158
13. 누가 용을 보았는가? / 신륵사 가는 길 ...166
14. 죽음이 삶을 내려다보는 집 / 수종사 가는 길 ...179
15. 나무 곁을 지나다 / 봉선사 가는 길 ...194
충청도의 절길
16. 산에서 바다를 찾다
/ 일락사와 개심사, 보원사지, 서산마애삼존불 가는 길 ...204
17. 나라고 할 만한 게 없다 / 장곡사 가는 길 ...219
전라도의 절길
18. 새해 일출을 보러 가다 / 향일암 가는 길 ...232
19. 삶이 힘겨운 당신, 다산유배길을 걸으시라
/ 다산유배길 걸어 백련사 길 ...244
20. 질마재길에서 피어오르는 신화 / 선운사 가는 길 ...255
21. 누구나 이 절에서 한 소식 얻어 가리라 /
/ 월명암에서 내소사 가는 길 ...268
22. 굴목재길을 걸어 서역에 가다
/ 송광사에서 선암사 가는 길, 혹은 선암사에서 송광사 가는 길 ...281
23. 그리움이 피워낸 길 / 불갑사에서 용천사 가는 길 ...294
24. 달마가 도솔암에 간 까닭은? / 미황사에서 도솔암 가는 길 ...305
25. 손오공도 덕유산을 넘었다 / 백련사 가는 길 ...319
경상도의 절길
26. 꿈에서 깨어나 울다 / 쌍계사 가는 길 ...328
27. 모든 길은 사이에 있다 / 칠암자 가는 길 ...338
28. 도마뱀이 내게 말을 걸어왔네 / 연화사 가는 길 ...347
29. 크지도 작지도 않은 산이 소백산이다
/ 초암사에서 비로사 가는 소백산자락길 ...359
30. 인문학이 날개를 편 가을산 / 청량산 가는 길 ...369
31. 불국토는 동쪽 나라에 있었다
/ 경주 남산, 삼릉에서 칠불암 가는 길 ...384
강원도의 절길
32. 물속에 절이 있네 / 청평사 가는 길 ...402
33. 바람의 화두 / 보현사 가는 길 ...415
34. 거기에 부처는 없었다
/ 선재길 걸어 오대산 적멸보궁 가는 길 ...427
35. 거울, 겨울 / 유일사에서 망경사 가는 길 ...440
36. 혼자 오르되, 남을 위해 오르는 길 / 봉정암 가는 길 ...455
한국의 절들을 찾아가는 이야기를 담은 에세이집. 제주도의 올레길이나 스페인의 산티아고 순례길보다 더 오래되고 더 깊은 명상을 제공하는 길들이 우리 주변에 존재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문득 깨달은 저자는 ‘저 절로 가는 길’을 찾아 도반들을 모아 길을 나선다. 도반들이 모이는 이름은 ‘서울불교산악회’와 ‘저절로가는길’. 사람들이 ‘저 절로 가는’ 목적이 절에 도착해서가 아니라 ‘그 길을 가는 동안 저절로 해결되면 더 좋지 않겠는가’하는 생각을 하면서 걷기 모임의 이름을 ‘저절로가는길’로 지었다. 그러기를 7년, 700여 곳의 절을 탐방, 순례, 참배하면서 떠오른 생각을 적은 글들 중 일부를 이 책에 담았다.
이 책에는 서른 여섯 개의 절에 가는 이야기가 담겨있다. 이 책에서 저자가 찾아가는 절들은 서울과 수도권, 전남, 경남, 강원까지 골고루 아우르고 있지만, 그것 외에는 어떤 기준에 의해서 선택되었는지 알 수 없다. 아마 저자도 설명하지 못하리라. 조계사, 봉원사, 상원사 등 누구나 아는 유명한 절도 포함되어 있기는 하지만 이 책에서 저자가 찾아가는 대부분의 절들은 금선사, 일락사, 불갑사 처럼, 특별히 기도처를 찾아다니는 신심깊은 불자들이나 부근에 사는 주민이 아니면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다.
자신이 불자이고, 절에 도착하면 도반들의 법회를 인도하기도 하지만, 저자는 이 책의 범위를 불교 이야기에 한정짓지 않는다. 저 절로 가는 사람들의 마음을 헤아리고 함께 느껴주고 그들의 소원을 이루고 고민을 해결하는 데 힘을 보태준다고 생각되면 이야기의 소재가 불교나 부처가 아니라고 망설이지 않는다.
대문이 닫힌 성벽을 날개 달린 말을 타고 뛰어넘는 출가에서부터, 불붙지 않던 장작이 마하가섭에게 관 속에 있던 부처가 발을 내밀어 보여 준 뒤에야 활활 타오른 다비에 이르기까지 부처의 일대기와 사상이 띄엄 띄엄 나타나고, 경허 아래서 함께 공부하던 수월과 만공의 일화, 그리고 법정스님의 맏상좌였던 덕조스님의 근황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불교 이야기가 등장하지만, 그에 못지 않게 어느 날 소수서원을 나와 국망봉 아래에 있는 석륜사를 찾아가서 소백산을 샅샅이 유람할 요량으로 거기서 사흘을 머물렀던 퇴계 같은 유학자와 18년의 유배생활을 마치고 북한강변의 본가로 돌아와 어릴 때 오르 내리던 운길산을 바라보며 늙어 기력없음을 슬퍼하는 시를 지었던 다산 정약용, 1890년에 깎아지는 벼랑길로 북한산 중흥사를 찾아갔던 기록을 남겼던 영국 여행가 아놀드 새비지 랜도어, 그리고 다산 유배길 중 ‘뿌리의 길’을 시를 지어 찬탄한 정호승 시인까지 종교와 시대를 뛰어 넘는 수 많은 사람들이 ‘저 절로 가는 길’을 걷는 저자의 머리 속에 동행한다.
부처와 다산 같은 역사적 인물들 만이 아니다. 그들만큼 유명하지는 않지만, 책을 읽는 우리들에게는 더 중요한 등장인물들이 곳곳에 등장한다.
늦게 일어났다면서, 지하철 노조가 파업했다면서, 휴대폰 액정이 깨져 시간을 제대로 볼 수 없었다면서 제각각 지각한 이유를 둘러대고, 목정굴 안내판 앞에서는 누군가 개탄조로 “내가 요즘 산에 다니면서 죽기 살기로 살 빼는 이유가 뭔지 압니까? 울 마누라가 무겁다 캅니더. 지가 올라오면 될낀데,”하고 운을 떼면 그 말을 받아 “와아, 아직 밑에 있나베? 울 마눌은 벌써 올라와 버렸는대. 그 육중한 몸매로 말이시. 오늘은 정말 죽인다, 이래야 살아남아요. 천장에 도배 새로 해야겠네, 이랬다간 크게 다칩니다” 대꾸하고, 그 말에 콩 자루가 터진 듯 와르르 웃음을 쏟아내는 도반들이 그들이다.
그들과 함께 저 절을 찾아가는 길이 마냥 이처럼 만만하고 즐겁기만 한 것은 아니다. 아내에게 살 빼라는 지청구를 듣지 않겠다는 그런 애교스런 소망을 가진 이들만 동행하는 등산 모임에서 일어나는 가벼운 이야기만 기대하고 이 책을 집는 분들은 예기치 않은 스토리에 전혀 다른 감정을 느끼게 될 가능성이 있다. 예를 들면 이런 이야기다.
‘오세암에서 하룻밤을 묵기로 하고 배낭을 내리자 마침내 빗방울이 듣기 시작했다. 방사에서 곰팡내가 심하게 풍겨왔다. 방바닥은 습기를 머금었고 이불은 눅눅했다. 순례자들이 서로의 신변을 묻거나 법담을 나누는 소리가 빗소리에 섞였다. 방사 봉창으로 사선을 그리며 내리는 빗줄기가 보였다. 피로한데도 잠이 오지 않는 밤이었다. 눈을 감았으나 비가 지붕을 치고 벽을 때리는 소리에 깊은 잠이 들 수 없었다. 이따금 가벼운 천둥이 치고 번개가 봉창을 긁고 지나갔다.
선잠에서 깨어나 봉창을 보니 빗줄기가 수직을 긋고 있었다.
…
새벽녘 봉정암으로 떠날 채비였던 사람들은 빗줄기를 보며 불안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그때였다.
“오세암까지 왔으니 내는 직여도 봉정암에 갈랍니다. 봉정암 갈라꼬 일년을 기다렸어예.”
경상도 노보살을 필두로 의견이 둘로 갈렸다. 봉정암만큼은 가야 한다는 불심론과 비 오는 날은 모든 산행을 포기해야 한다는 원칙론. 산행대장인 나는 선택해야 했다. 아니, 결정해야 했다.
“갈 사람 가고 남을 사람 남으시지요.”
사실 나는 간밤에도 그랬고 새벽녘에도 순례자들 앞에서 산행을 포기하자는, 설득력 있는 말을 준비했었다. 그랬는데 나도 모르게 갑자기 바뀌어버렸다. 경상도 보살 때문이 아니라 순간적으로 무엇에 홀린 듯했다.
봉정암행을 포기한 사람들의 움직임은 빨랐지만 얼굴은 밝지 않았다. 몇몇은 돌아서면서 혀를 찼다.
“아무리 봉정암이지만 이 비에 뭔 산행이여. 산행대장이면 말려야지.”
그들이 백담사로 가고 나서도 남은 사람들은 빗줄기를 바라보기만 할 뿐 걸음을 떼놓지 않았다. 각자 무얼 생각했을까. 나는 숲에서 수행하는 고대 인도의 수행자들이 우기 때면 나뭇가지나 풀을 엮어 만든 움집에 들어선다는 안거安居를 떠올려보았다. 그들은 비를 피할 수 있는 최소한의 장치 속에 들어 앉아 선정에 들었다. 그들의 눈앞에서, 생각에 잠긴 눈꺼풀 밖에서 내렸던 천오백 년 전의 비를 상상하며 나는 천천히 우비를 입었다.
…
나는 오세암 공양간 옆에 표시된 이정표를 향해 첫발을 내디뎠다. 그러자 준비라도 한 듯 나머지 사람들도 내 뒤를 따랐다. 그중에는 아들이 대학에 들어가기를 봉정암 사리탑에 간절히 기도하려고 뒤따르는 학부모도 있었다.
…
시냇물을 건너 숲길 모퉁이를 돌자 갑자기 빗줄기가 굵어진다. 역시 설악산이다. 큰 산은 일정한 기후와 온도를 유지하지 않는다. 산에서는 몰아쳐 내리는 소나기를 만날 때가 가장 곤혹스럽다. 물론 내리기 전에 몇 차례 징후를 보인다. 먼저 먼지와 낙엽을 날리며 지나는 바람이 공기를 긴장시킨다. 숲이 슬그머니 몸을 뒤챈다. 이윽고 빗줄기가 잎사귀에 쏴아 쏴, 내리꽂히고, 땅에 깔린 돌멩이들도 덩달아 들썩일 때 내 눈은 허둥지둥 피할 곳을 더듬고, 내 손은 배낭 속에 든 우비를 뒤지게 된다.
…
어디만큼 올랐을까. 잠시 다리를 펴고 나무 밑에 쉬는데도 경상도 노보살은 휘어휘어 산길을 오른다. 남들 쉴 때 같이 쉬지 못하는 건 당신의 몸을 알아서이다. …
앞서 가던 경상도 노보살이 하염없이 뒤처지고 있었다. 나는 선두를 다른 사람에게 맡기고 노보살을 부축했다. 노보살이 고맙다면서도 당신의 늙은 몸을 한탄한다.
노보살의 몸도 비에 젖어 있었다. 더 이상 관리되지 않는 살과 뼈가 젖은 옷에 드러나서 제멋대로 덜렁거린다. 살과 뼈가 다른 살림을 차린 모양새이고, 내 집이 아닌 다른 집에 내가 살고 있다고 늙은 몸은 말하고 있었다.
…
오세암을 통해 봉정암으로 오르는 길은 유난히 구불구불했다. 뒤에서 보니 길이 비구름과 안개를 번갈아 드나드는 것 같았고, 순례자들이 배낭 대신 비구름의 집을 등에 짊어지고 힘겹게 걷는 것 같았다.
…
선두가 봉정암으로 넘어가는 ‘깔딱고개’ 앞에 멈추었다. 거기서 마지막으로 쉬었다가 봉정암으로 갈 요량인가 보았다. 경상도 노보살은 더 참지 못하고 바위에 박은 쇠파이프 손잡이를 두 손에 거머쥔 채 털썩 주저앉았다. 하얗게 세다 못해 듬성듬성 머리카락이 빠져나간 정수리를 보이면서 노보살은 겨우 말했다.
“하이고, 내는 이자 봉정암 올라가삘면 더는 몬 올라가예.”
“그래도 내려가면 생각이 달라지실 걸요.”
내가 웃었지만 노보살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영감이 아파서 올라왔어예. 영감 저승 가뿔기 전에 부처님께 인사 대신 드릴라꼬예. 전엔 봉정암에 노상 같이 왔지예.”
…
이제 우리는 일어나 깔딱고개를 넘어야 한다. 사는 일은 얼마나 힘든 고갯길이었나. 그러나 굳이 깔딱고개를 넘어 사리탑에 이르지 않아도 산행대장으로서의 범계를 무릅쓰고 봉정암에 오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눈이 밝아지고 가슴이 훤히 열렸다. 나는 비에 젖은 파이프를 움켜준 경상도 노보살의 쪼글쪼글한 손에서 부처를 보았다. 그 순간, 비가 개었다.’
때때로 저자의 순례길에 동행했던 산악인 엄홍길은 이렇게 이 책의 추천사를 썼다. ‘고원영 작가의 글을 읽으니 작년에 안데스 산맥을 종주하면서 잉카 문명의 발원지를 돌아봤을 때의 기억이 새롭다. 적도에서 파타고니아까지, 8,000km에 이르는 그 길은 에콰도르, 페루, 볼리비아, 칠레, 아르헨티나로 국경이 갈라졌지만, 국경을 통해 다시 이어지기도 하는 길이었다. 그 기나긴 길에서 75일 동안 숙식을 해가며 걷는 일이 히말라야 등정 못지않게 힘들었지만, 그만큼 보람도 컸다. 산을 넘을 때와 마찬가지로 길에서도 삶의 여러 의미와 마주쳤기 때문이다. 인생이 왜 길에 비유되는지, 종교가 왜 길에서 생겨나는지 알 것도 같았다. 잉카문명은 남미의 오랜 신앙이 바탕했으므로 불자인 내게는 자연스레 1,600여 년의 역사를 지닌 우리 불교가 떠올랐다. 우리나라 어느 산에 가도 절이 있고, 절로 가는 길이 있으니, 그에 대한 이야기도 함께 있지 않겠는가. 그때 내가 그렇게 막연히 생각했던 것을 평소 불연을 맺어온 고원영 작가가 썼다는 사실이 예사롭지 않으면서도 우선은 매우 기쁘다.’
저자가 찍은 사진들이 가끔씩 등장해서 저 절로 가는 길의 풍광을 그려보려는 독자들의 상상력에 힘을 보태준다.
▣ 작가 소개
저자 : 고원영
스페인의 산티아고 길과 달리 우리나라는 국토 전체가 성지순례길임을 깨닫고, 7년 째 순례 중이다. 등산과 걷기여행 모임인 ‘서울불교산악회’와 ‘저절로가는길’ 회원들이 함께 한 700여 차례의 등산과 걷기여행을 통해 전국 각지의 여러 절과 불교유적지를 참배했다. 그 길에 스님, 산악인, 주부, 할머니, 법조인, 시인, 대졸 미취업자, 공무원, 구두닦이 등 다양한 연령대와 직업의 사람들이 ‘도반’으로 참여했다. 2010년 장편소설 ‘나뭇잎 병사’를 발표했다.
▣ 주요 목차
■들어가는 말 ...6
서울의 절길
1. 출가 / 조계사 가는 길 ...14
2. 낮은 데로 임하소서 / 금선사에서 승가사 가는 길 ...30
3. 중생이 절에 가는 법 / 화계사 가는 길 ...46
4. 니사길을 아시나요? / 청룡사 가는 길 ...57
5. 지옥과 극락 사이 / 봉은사 가는 길 ...69
6. 그리움이 찰랑거리는 물병 / 길상사 가는 길 ...78
7. 야만인과 함께 절에 가다 / 문수사 가는 길 ...90
8. 선지식이란 무엇인가 / 청계사 가는 길 ...106
9. 여름의 절길 / 진관사에서 삼천사로 가는 길 ...119
10. 달의 길, 용의 길 / 망월사 가는 길 ...132
경기도의 절길
11. 도둑과 미륵이 함께 쓰는 일기 / 칠장사 가는 길 ...146
12. 저절로 이루어지게 해주소서 / 보문사 가는 길 ...158
13. 누가 용을 보았는가? / 신륵사 가는 길 ...166
14. 죽음이 삶을 내려다보는 집 / 수종사 가는 길 ...179
15. 나무 곁을 지나다 / 봉선사 가는 길 ...194
충청도의 절길
16. 산에서 바다를 찾다
/ 일락사와 개심사, 보원사지, 서산마애삼존불 가는 길 ...204
17. 나라고 할 만한 게 없다 / 장곡사 가는 길 ...219
전라도의 절길
18. 새해 일출을 보러 가다 / 향일암 가는 길 ...232
19. 삶이 힘겨운 당신, 다산유배길을 걸으시라
/ 다산유배길 걸어 백련사 길 ...244
20. 질마재길에서 피어오르는 신화 / 선운사 가는 길 ...255
21. 누구나 이 절에서 한 소식 얻어 가리라 /
/ 월명암에서 내소사 가는 길 ...268
22. 굴목재길을 걸어 서역에 가다
/ 송광사에서 선암사 가는 길, 혹은 선암사에서 송광사 가는 길 ...281
23. 그리움이 피워낸 길 / 불갑사에서 용천사 가는 길 ...294
24. 달마가 도솔암에 간 까닭은? / 미황사에서 도솔암 가는 길 ...305
25. 손오공도 덕유산을 넘었다 / 백련사 가는 길 ...319
경상도의 절길
26. 꿈에서 깨어나 울다 / 쌍계사 가는 길 ...328
27. 모든 길은 사이에 있다 / 칠암자 가는 길 ...338
28. 도마뱀이 내게 말을 걸어왔네 / 연화사 가는 길 ...347
29. 크지도 작지도 않은 산이 소백산이다
/ 초암사에서 비로사 가는 소백산자락길 ...359
30. 인문학이 날개를 편 가을산 / 청량산 가는 길 ...369
31. 불국토는 동쪽 나라에 있었다
/ 경주 남산, 삼릉에서 칠불암 가는 길 ...384
강원도의 절길
32. 물속에 절이 있네 / 청평사 가는 길 ...402
33. 바람의 화두 / 보현사 가는 길 ...415
34. 거기에 부처는 없었다
/ 선재길 걸어 오대산 적멸보궁 가는 길 ...427
35. 거울, 겨울 / 유일사에서 망경사 가는 길 ...440
36. 혼자 오르되, 남을 위해 오르는 길 / 봉정암 가는 길 ...4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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