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청년기 기독교 비판에서 읽는 헤겔 철학의 단초들!
「민중종교와 기독교에 대한 단편들」, 「예수의 생애」, 「기독교의 정신과 그 운명」 등 헤겔의 신학 관련 글 9편 수록
난해하기로 이름 높은 철학자 헤겔(G. W. F. Hegel, 1770~1831), 그러한 그의 사상을 이해하는 단초가 되는 청년기 저작, 그중에서도 특히 그의 비판의식과 역사의식을 잘 보여 주는 종교 관련 단편들을 묶은 『청년 헤겔의 신학론집』이 그린비출판사 프리즘총서로 재출간되었다. 2005년 첫 출간 이후 국내 헤겔 연구의 주요 자료 중 하나로 손꼽혔으나 절판되었다가, 책의 가치와 중요성에 공감한 번역자, 총서 기획자, 출판사의 노력으로 새롭게 독자들을 찾아가게 된 것이다.
국경 너머로부터 불어오는 프랑스혁명(1789)의 자유풍 속에서 헤겔은 그 어떤 때보다도 시대의 경직된 제도와 자유를 억압하는 체제에 역동적으로 대항했다. 그리고 그 억압성의 정점에 있었던 것이 바로 기독교이다. 헤겔에게 독일 사회의 파편적 개인주의를 생산해 내는 기제는 다름 아닌 바로 이 기독교 문화였으며, 그는 독일 사회의 후진성을 기독교 문화가 가진 억압적 성격에서 찾았다. 이런 이유로 헤겔은 이 시기에 주로 종교 문제에 천착하였는데, 종교의 개혁이 없이는 새로운 사회로의 진입이 가능하다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베른(1793~1796년)과 프랑크푸르트(1797~1800년)에서 지내는 동안 그가 쓴 여러 글들은 바로 이 지점을 겨냥하고 있었다.
이 책은 「민중종교와 기독교에 대한 단편들」, 「예수의 생애」, 「기독교의 실정성」, 「기독교의 정신과 그 운명」 등의 중요한 논문들 이외에도 다섯 편의 논문이 더 실려 있다. 특히 이번 개정증보판에서는 「역사와 정치에 대한 단상들」이 추가되었고, 그간의 연구 성과를 반영하여 옮긴이 해제를 보완하였다.
‘청년’ 헤겔 ― 헤겔 사상의 독해를 위한 중요한 지침
유럽 질풍노도의 시기를 살다 간 헤겔은 최초의 체계적인 저서로 1807년 『정신현상학』을 출판하였다. 청년기의 완결판이라고 할 수 있는 이 저작은 그 사상적 함의는 두고라도 해독 자체가 문제가 될 만큼 난해한 철학서로 알려져 있다. 이러한 사실은 이 저작 이전의 청년기 수고들에 주목하여 헤겔 사상의 발전사를 연구하게 하는 하나의 이유가 되었다. 헤르만 놀(Herman Nohl)은 1907년, 흩어져 있던 청년기 헤겔의 수고를 모아 『헤겔의 청년기 신학 저술들』(Hegels theologische Jugendschriften)로 편집했는데, 이는 헤겔 후기 철학에서도 여전히 중요한 그리스의 비극, 도덕성, 계몽, 사랑, 삶, 반성 등에 대한 그의 평가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어서 난해한 후기 저작들의 해석을 위한 중요한 지침을 제공한다.
초기 사유에는 후기의 도식적 사유에서는 발견될 수 없는 독특한 사상이 함유되어 있다는 데서도 청년 헤겔은 주목을 받는다. 청년 헤겔 연구의 선구자인 딜타이가 20세기 초에 자신의 생철학의 단초를 청년 헤겔의 ‘삶’ 개념에서 이끌어 낸 것이나, 하버마스가 청년기의 단편들에서 후기의 체계화된 주관주의 대신 상호주관성 이론의 단초들을 발견해 낸 것은 그 대표적인 예들이다.
청년 헤겔은 자기 시대의 경직된 제도와 자유를 억압하는 체제에 그 어느 시기보다 비판적이었다. 그의 비판의식은 ‘실정성’(율법성 혹은 경직성), ‘운명’ 등의 개념으로 요약된다. 실정성은 인간의 자율성을 억압하는 사회의, 특히 종교의 경직된 속성을 표현하는 개념이며, ‘운명’은 현실체제가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역사적 필연성을 지칭하는 말이다. 그가 종교, 특히 기독교를 비판의 대상으로 삼은 이유는 당시 유럽에서 기독교는 단순한 종교가 아니라 정치, 문화 등 삶의 모든 부분을 지배하는 유럽의 정신이었기 때문이다. 프랑스혁명의 자유의 이념은 그의 비판의식을 형성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그는 독일 사회의 분열과 후진성의 뿌리를 기독교 문화에서 찾았기 때문에 사회개혁을 위한 종교개혁의 필연성을 강하게 느꼈다. 이 시기의 커다란 네 개의 수고 모음집인 「민중종교와 기독교에 대한 단편」(1794/94), 「예수의 생애」(1795),「기독교의 실정성」(1795/96),「기독교의 정신과 그 운명」(1798/1800)은 바로 이런 관점에서 쓰였다.
화석화된 물신신앙을 넘어 민중종교를 꿈꾸다
사회에서의 종교의 근원적 힘을 인정했던 청년 헤겔은 「민중종교와 기독교에 대한 단편」에서 한 국가를 지탱할 수 있는 진정한 의미의 ‘민중종교’를 기획한다. 기독교가 민중종교로서의 자격을 갖지 못하는 이유는 한편으로는 그 사적인 기복신앙 때문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민중의 현실적인 삶과는 유리된 추상적인 율법성, 즉 오성적인 객관성 때문이다. 헤겔이 ‘물신신앙’ 혹은 ‘객관종교’라고 부르는 이 종교는 상상력이 살아 있는 주관종교와는 구분된다. 헤겔은 객관종교를 박제된 생물에, 주관종교를 자연에 놓여 있는 생물에 비교하였다. 객관종교에 대한 헤겔의 비판은 화석화된 기독교에 대한 비판을 넘어 환상의 무가치와 차가운 오성의 추론만을 내세우는 당시의 시대정신인 계몽주의를 겨냥하고 있다.
기독교에 대한 헤겔의 관심은 점차 기독교의 창시자와 역사적 기독교에 대한 평가로 이어진다. 「예수의 생애」에서 그는 칸트의 도덕성 개념에 의지하여 예수의 행위를 인간의 실천이성을 일깨우기 위한 가르침으로 이해한다. 이것은 여기서 기적이나 부활과 같은 초현실적인 것이 거론되지 않는 이유이다. 「기독교의 실정성」 역시 종교를 주관성, 도덕성의 관점에서 해석하고 있다. 하지만 기독교가 근원적으로 도덕적인 종교였음을 보이고자 한「예수의 생애」와는 달리 여기서는 기독교의 실정성, 특히 역사적·현실적 기독교의 경직성을 보여 주고자 한다. 실정적 신앙이란 어떤 권위에 의해 주어진 교리 체계를 무조건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하는 신앙이다. 이 신앙은 신자의 마음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외부의 명령에서 온 것이며, 주관적이지 않고 객관적이며, 살아 있는 신앙이 아니라 죽은 신앙이다.
베른에서 프랑크푸르트로 이적한 후 헤겔은 실천이성의 도덕적 명령 역시 살아 있는 전체를 존재와 당위로 구별하고 당위가 존재를 지배하는 형식을 취한다는 사실에 주의한다. 이 말은 그가 도덕성을 더 이상 주관성을 대표하는 것으로 여기지 않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이 시기 단편들의 모음인 「기독교의 정신과 그 운명」은 이 변화를 잘 보여 준다. 여기에서 도덕성이란 개별자의 보편자에의 종속, 개별자에 대한 보편자의 승리를 의미할 뿐이다. 이런 점에서 칸트의 도덕법 역시 권위를 본질로 하는 유태교적인 지배 구조를 여전히 간직하고 있다. 이 글에서 칸트의 윤리학은 칸트 자신이 극복하고자 했던 기독교의 사랑의 정신보다 더 열등한 것으로 그려진다.
그런데 이 글에서 헤겔은 기독교의 원리인 사랑이 유태의 율법이나 칸트의 도덕성보다 뛰어난 인간의 살아 있는 능력이긴 하지만, 삶의 총체성을 모두 드러내지 못하는 직접성의 원리임을 보인다. 사랑에 기반을 둔 예수의 종교는 직접적인 접촉이 가능한 소규모 공동체, 예컨대 가족이나 초대교회 공동체에서나 효과를 발휘할 수 있다. 인간의 사회적 삶은 그 규모의 크기 때문에 매개의 원리가 도입되어야 하고, 그런 한에서 직접성의 원리인 사랑이 국가나 사회의 총체성을 온전하게 드러낼 수 없다고 한다. 이러한 사실은 역사의 기계론적 필연성을 설명하는 ‘운명’ 개념에서 잘 드러난다. 근대 세계의 분열은 삶을 전체로서 표현하지 못하는 사랑의 정신을 국가와 사회에 확대하여 적용한 기독교 정신의 운명적 결과라는 것이다. 사랑은 헤겔이 체계를 고려하기 시작한 예나 시대 이후 가족에서의 통일의 원리로 자리 매김한다.
종교, 통일성을 향한 염원이자 갈구
청년 헤겔은 절대적 삶을 가장 순수하게 드러내는 것이 종교라고 하는데 주저 없이 동의한다. 왜냐하면 종교에 대한 충동은 인간 정신의 가장 고귀한 욕구로서 필연적으로 분리되어야 했던 것을 신속에서 다시 통일하고자 갈구하는 힘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헤겔은 종교적 행위들을 가장 정신적이고 가장 아름다운 것이라고 한다. 이는 종교에서가 아니라 철학에서 절대자를 가장 잘 드러낸다고 하는 그의 후기 사상과 확실히 구별된다. 청년 헤겔의 이러한 생각은 유물론적인 경향을 보인 프랑스 계몽주의와는 달리 종교 속에서 인간의 전인적 형태를 발견하고자 한 레싱 등 독일 계몽주의자들의 영향 아래서 형성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찢겨진 운명을 치유하고 삶의 총체성을 가장 잘 드러낼 수 있는 종교의 역사적 모범을 이 시기 헤겔은 그리스의 자유로운 종교에서 봤다. 그의 ‘미적 종교’, ‘민중종교’ 등의 이름은 그리스의 종교를 예술적으로 채색한 종교상이었다. 현실적 분석이 아닌 예술적 상상에 의한 그의 그리스상은 예나 시기 이후 역사와 경제 등 실증학문에 대한 연구와 더불어 그 힘을 상실하게 된다. 역사적 진행의 필연성을 인식하게 됨으로써 성숙기 헤겔은 소위 변증법적 필연성에 기초한 체계를 그려 나간다.
작가 소개
지은이 : 게오르그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
칸트와 함께 독일 근대 철학을 대표하는 철학자로서, 독일 관념론의 완성자로 평가된다. 1770년 독일 슈투트가르트에서 태어났으며, 튀빙엔 신학교에서 수학한 후 스위스의 베른과 독일의 프랑크푸르트에서 가정교사 시절을 보냈다. 이때 영국의 고전경제학에 관한 책들을 연구했으며, 종교와 정치에 관한 여러 단편들을 남겼다. 1808년부터 1816년까지 뉘른베르크의 한 김나지움에서 교장직을 수행한 후, 2년간 하이델베르크 대학에서 교수직을 역임하였다. 1818년 베를린 대학의 정교수로 취임하면서 자신의 철학적 생애의 전성기를 맞이하였으며, 이 시기에 그의 실천철학적 명저 『법철학(Grundlinien der Philosophie des Rechts)』을 출간하였다. 1831년 콜레라로 사망하였으며, 이후 철학사의 전개에 지속적이고도 심대한 영향을 끼쳤다. 헤겔의 철학체계는 논리학, 자연철학, 정신철학의 세 부분으로 이루어지며, 그의 철학은 자연, 역사, 정신의 영역 전체를 부단한 운동과 변화, 발전의 과정으로 서술하고, 그것들의 내적 연관성을 파악하려는 거대한 시도라고 할 수 있다. 주요 저서로는 『법철학』 외에 『정신현상학(Phanomenologie des Geistes)』, 『논리학(Wissenschaft der Logik)』, 『엔치클로페디(Enzyklopadie der philosophischen Wissenschaften im Grundrisse)』 등이 있다.
옮긴이 : 정대성
연세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받은 뒤, 독일 보쿰(Bochum) 대학교에서 독일관념론과 사회정치철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연세대학교 언어정보연구원 HK연구교수를 거쳐 현재는 연세대학교 근대한국학연구소 HK교수로 재직 중이다. 서양 현대사상의 근대 고전기와의 연관성을 밝히는 작업, 20세기로의 전환기 한국의 서양철학 수용과 변용 그리고 확산의 과정 등을 계보학적으로 탐구하는 작업을 수행하고 있다. 「반성문화에 대한 청년헤겔의 비판」 (2003), 「평등자유주의적 정의이념의 철학적 의의와 한계」 (2013), 「자유주의와 공화주의를 넘어서」 (2015) 등의 논문이 있으며, 찰스 테일러의 『헤겔』 (그린비, 2014), 세일라 벤하비브의 『비판, 규범, 유토피아』 (울력, 2008) 등을 옮겼고, 『인문정신의 탐색과 인문언어학』 (박이정출판사, 2015, 공저), 『세상을 바꾼 철학자들』 (동녘, 2015, 공저) 등의 저술 활동에 참여했다.
목 차
민중종교와 기독교에 대한 단편들
예수의 생애
기독교의 실정성
엘레우시스 - 횔더린에 부쳐
독일 관념론에 대한 최초의 체계 계획
종교와 사랑에 대한 단편들
기독교의 정신과 그 운명
1800년 체계 단편
역사와 정치에 대한 단상들 - 베른/프랑크푸르트 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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