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땅통종주’,
1,350km 사색 길을 걷다
6인 병실, 새벽 3시다. 커튼이 쳐지고 옆 병상의 곤한 숨소리가 들린다. 화장실을 가려고 어떻게든 일어서려는데 허리를 세우기 힘들다. 입원 사흘째. 허리 통증이 심해져 MRI를 찍었는데 2번 척추 압박골절이라고 한다. 침대를 짚고 몇 번 용을 쓰고 나서 겨우 몸을 가눈다. 장애인들은 일상 이런 고통을 겪으며 살겠지. 서랍에서 진통제를 꺼내 먹는다.
2018년 5월, 산악회의 주말 산행 중 소백산 금계능선에서 비탈길을 횡단하다 스틱이 부러져 구르고 말았다. 20m를 구르다 배낭 덕분에 겨우 멈췄다. 머리부터 살폈는데 돌이나 나무에 머리를 부딪지는 않아 ‘아, 살았구나!’ 하고 안도했다. 허겁지겁 사고 현장으로 내려온 산악회원 두 분이 “큰 돌이 굴러 내려오길래 많이 놀랐다”며 내 몸을 살폈다. 허리에서 격심한 통증이 느껴졌다. 화장실을 다녀와 침대에 누웠는데, 쉽게 잠을 이루지 못하고, 지금껏 살아온 과거가 주마등처럼 떠오른다.
나는 가정 형편상 실업계인 상고에 진학했다. 소농의 8남매 중 여섯째로 밑으로 동생이 둘 있어서 대학 진학은 언감생심 꿈도 꾸지 못했다. 상고를 졸업하고 스무 살에 한전에 입사했다. 서울에서 야간대학을 다니다 같은 직장의 눈 맑고 목소리 고운 서울 처자를 만났다. 몇 번 만나고 ‘바로 이 여자다’라는 확신이 들어 결혼하자는 장문의 손 편지를 보냈다. 지금으로 보면 프러포즈였다. 3학년 때 결혼했는데 나는 스물일곱, 아내는 스물다섯 살이었다.
나는 지리부도 보기와 독서를 좋아했다. 버킷리스트라는 말이 없을 때였지만 한 권의 책을 쓰는 걸 소원했다. 고교 시절에는 역사 소설이나 전쟁 소설을 즐겨 읽어 마거릿 미첼이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남긴 것처럼 장차 6·25 전쟁을 소재로 한 소설을 쓰고 싶었다. 20대 후반에 조정래의 『태백산맥』, 이태의 『남부군』 같은 걸출한 분단소설이 쏟아져 소설의 꿈은 뇌리에서 멀어져 갔다.
40대에 접어들어 아내와 테니스, 마라톤을 하게 되었고, 어느 날 우편함에 꽂힌 산악회가 주관하는 ‘울릉도 독도 여행’ 전단지를 보고 아내와 다녀오고부터 본격적으로 등산을 시작하였다. 주말마다 산악회를 따라다녔고, 2012년 봄에는 나사모 산우회(=나사모산악회)에서 총무로 봉사하면서 한 달에 한 번 가는 백두대간 종주단에 참가했다. 진부령부터 지리산까지 남진하는 일정인데 한 번도 결석하지 않고 32구간을 마쳤다. 2014년에는 산악회 회장 일도 맡아 제법 열성을 보였다.
어릴 때부터 꿈꿨던 ‘한 권의 책’은 마음에서 떠나지 않았다. 백두대간 후기를 열심히 산악회 카페에 올렸으나 대절 버스에 실려 바닥 표식지까지 친절히 깔아주는 편한 산행이라 아쉬움이 남았다. 여럿이 우르르 몰려다니고 앞사람 쫓기 바쁜 산행이라 생각할 여유도 없었다.
‘한 권의 책’을 위해 홀로 백두대간을 종주하자고 결심하고 길에 오른게 2015년 5월이었다. 지리산에서 백두대간 북진을 시작했다. 시중에 있는 백두대간 책을 15권가량 사서 탐독하는 동안 2016년 6월 진부령에 닿았다. 책을 출판하려고 하니 이제는 후기와 사진의 질이 문제였다. 지금 생각해 보니 원고는 초고草稿 수준이었고, 사진은 기록 위주의 ‘이정표’ 사진이었다. 원고량이 부족하다는 출판사의 말을 듣고 인터넷에서 이것저것 자료를 모아 채우다 보니 수정하는 게 새로 쓰는 것보다 어렵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2017년에 산악회 산행대장을 맡다 보니 백두대간 책자 출판 꿈은 점점 멀어져 갔다. 그러다 2018년 봄, 소백산에서 사고를 당했다. 아이러니하게도 땅통종주는 그때 입원한 병원에서 독서하는 와중에 구상한 것이다.
정진홍의 『인문의 숲에서 경영을 만나다』를 보면, 인간의 유전자 구조는 침팬지와 98.77% 일치한다고 한다. 만일 인간에게 창의성이 없었다면 팬지와 별 차이가 없다는 것이다. 백두대간 기록은 시중에 수십 권 나와 있으므로 땅통종주길을 최초로 걸어봐야겠다고 결심했다. ‘삼천리금수강산’이라 할 때 삼천리는 해남 땅끝에서 두만강이 흐르는 함경북도 온성까지다. 당시는 문재인 대통령이 평양에서 김정은 위원장을 만나 남북 화해 무드가 조성될 때였다. 땅통종주길을 오르다 보면 북녘 땅 백두대간도 열릴 수 있으리라는 희망도 결심에 한몫했다.
그러나 백두대간과 몇 차례 해외 산행으로 경비를 수월찮게 지출한 터라 아내의 이해가 관건이었다. ‘열정계획서’를 작성해 퇴직 후 연금 수입으로 생활비를 해결할 수 있다는 점과 아들딸도 취직했으니 퇴직 후의 삶을 구상하는 땅통종주를 하고 싶다고 아내를 설득했다. 아내는 “그동안 고생했으니 한 번 해보세요” 하고 동의해 주었다. 아내의 응원에 힘입어 해남 땅끝에서 강원도 고성 통일전망대에 이르는 ‘땅통종주 계획서’를 정성껏 작성했다.
2019년 봄부터 땅통종주를 시작하기로 하고, 남은 6개월 동안 스스로에게 세 가지 미션을 주었다. 우리나라 역사를 알기 위해 ‘한국사 시험’을 보고, 땅통종주 구간에 포함되지 않은 필자 고향인 ‘호남정맥(200km)’ 일부를 미리 걸으며, 종주 기록을 의미 있게 남기기 위해 산악 잡지에 종주기를 연재하기로 계획했다.
2018년 가을부터 호남정맥 1구간-섬진강 휴게소가 있는 광양시 망덕포구에서 시작하여 광양, 순천, 보성을 거쳐 땅통종주와 만나는 장흥 노적봉까지-을 걸었으며, 겨울 동안 한국사 시험 1급에 응시해 90점이라는 높은 점수로 합격했다. 한국사 시험 당시 35세 이상은 교실에 나 혼자뿐이었는데 높은 점수를 받고 보니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자신감을 게 되었다. 〈사람과 산〉 강윤성 편집장에게 계획서를 보내 어렵게 연재 승낙도 받았다.
2019년 4월 14일, 해남 땅끝에서 우리나라 최초 땅통종주길에 올랐다. 종주는 11개 국립공원을 거쳤다. 호남의 월출산, 무등산, 내장산과 백두대간의 지리산, 덕유산, 속리산, 월악산, 소백산, 태백산, 오대산, 설악산을 거치는 장장 1,350km 대장정은 2020년 11월 1일 고성 통일전망대에서 마쳤다. 65구간으로 나누어 한 달에 주로 4구간씩 걸었으며, 종주기는 월간 〈사람과 산〉에 19개월 동안 연재되었다.
주로 1박 2일로 산행했으며, 하루에 21km가량 걸어야 하므로 아침 일찍 산행을 시작했다. 등산객이 다녀 오솔길처럼 잘 다듬어진 길에 ‘카프리 통종주’ 산행 리본을 달며 진행했다. 깊은 산속에 부는 바람과 지저귀는 산새 소리를 들으며 걷다 보면 영감이 뭉게뭉게 떠올랐다. 그러면 길가 쓰러진 나무나 바위에 걸터앉아 편지 쓰듯 메모장에 기록했고, 집에 돌아
와 그 자료로 매달 잡지 연재분을 썼다.
홀로 걸으며 많은 생각을 했다. 41년간 회사라는 보호막에서 살았는데 퇴직 후 어떻게 살 것인가 고민했다. 생각이 끊기면 EBS ‘책 읽어주는 라디오’ 프로그램을 다시 듣기로 청취하며 걸었다. 종주길이 평탄하지만은 않았다. 산중에서 멧돼지를 만나 혼이 나고, 하산 길에 맹견 세 마리와 맞닥뜨려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지리산 종주 때는 감기 기운으로 열다섯 시간 걸려 힘들게 걸었고, 설악산에서는 너덜겅구간을 타다 다리에 쥐가 났으며 설상가상 어둠 속에서 길까지 잃었다. 이제 환갑이 지났으니 이렇게 무리한 산행은 그만해야겠다고 자책했다.
그러나 초심을 돌이키며 마음을 다잡곤 했다.
돌이켜보니 종주를 성공리에 마칠 수 있었던 원동력은 ‘산행계획서’였다. 종주하는 2년 동안의 종주 기본 계획, 월간 및 주간 계획, 당일 산행계획서를 망라한다. 마음이란 시시때때로 변하게 마련인데 매주 월요일마다 주간 계획 시간표를 작성하면 한 주일 동안 할 일이 생겼고, 산행 시 당일 산행계획서를 가지고 가면 변수가 발생해도 대처하기 쉬웠다.
또한 땅통종주를 무사히 마친 건 아내의 도움이 컸다. 원고에 대한 이야기도 나누고, 많은 경비가 소요됨에도 묵묵히 지켜봐 주고, 통화할 때마다 ‘건강 잘 챙기라’는 따스한 말로 위로하고 격려해 주었다. 객지 숙소에서 이른 새벽마다 내 몸을 일으킨 건 아내가 아니었던가 싶다. 아들 진수, 며느리 지은, 딸 미수도 만나고 전화할 때마다 힘을 보태주었다. 땅통종주 중에 결혼한 아들과 며느리는 종주를 마친 작년 11월에 귀여운 손자 은율을 안겨주었고, 그 아이가 벌써 백일을 지났다.
홀로 외롭게 땅통종주하는 동안 동행 지원도 해주고 산악회 카페에서 댓글로 응원해 준 나사모 회원들과 중학 동창들, 종주 내내 잡지를 구독하면서 사랑을 보여준 친척들, 여동생과 매제, 친구들 그리고 책을 내는데 용기를 준 전성태 작가님에게도 감사드린다. 한솜미디어 대표와 편집부의 정성도 가슴 깊이 새긴다. 본문에서 역사 유래를 설명하면서 출처를 밝히지 않은 사항은 한국문화유산답사회가 엮은 『답사여행의 길잡이』 시리즈를 주로 참고하였다.
글과 사진으로 우리 산하의 아름다움을 전하며 독자와 대화한다는 기분으로 걸었다. ‘한 권의 책’을 위해 세 번이나 백두대간을 걸었으므로 땀으로 쓴 책이라 말하고 싶다.
종주가 끝나고 〈사람과 산〉 가족들과 ‘땅통 쫑파티’를 가졌을 때 연재담당 문예진 기자님이 “땅끝에서 진부령까지 걸었으니 통일 되면 금강산, 백두산, 개마고원을 거쳐 두만강을 만나는 함북 온성까지 한반도 종주도 가능할 거예요”라고 덕담을 했지만, 통일의 희망은 보이지 않고 나이만 들어가니 내 생에 기회가 다시 올지 알 수 없다.
아내와 차를 몰고 가다 보면 가끔 땀 흘려 걷던 땅통종주 산 너울이 보인다. 감회로 코끝이 찡해진다. 땅통종주에 빠져 책상에서, 버스에서, 산에서 보냈던 시간을 어찌 잊을까. 시간이라는 건 지나면 쓸데없어지는 소모품인데 그래도 삶의 한 대목에서 ‘내가 한 건 했구나’ 하는 자부심도 든다.
나는 특별히 풍족하거나 용기가 있지 않았고 체력마저 저질이었다. 그런 나를 움직이게 한 건 무엇이었을까? 꿈이지 않았을까? 삶을 꿈꾸고 산을 사랑하는 분들과 나누고 싶다. 미력하나마 내 기록이 땅통종주에 도전하실 분들의 길잡이가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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