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중년이 되도록 스스로 선택해서 해낸 일이 제대로 없었다. 자유롭게 자신의 삶을 사는 사람들이 부러웠다. 47세에 결심했다. 용기를 낼 마지막 기회였다. 내가 쓴 희곡을 무대에 올리리라 마음먹었다. 눈앞의 현실적이고 안락한 욕구들을 모두 밀어내고 무조건 읽고 보고 썼다. ‘고석할매 살아있네!’는 희곡을 써서 상을 받을 수 있다는 걸 알게 해준 첫 작품이다. 스토리텔링 공모였는데, 설화에 허구를 보태서 완성한 마당극이다. 현대 서구적인 미인이 조선시대에 살았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하는 엉뚱한 상상이었다. 사상강변축제에서 개막공연을 보며 감격에 겨웠다. 내가 쓴 희곡을 이렇게 많은 사람이 보면서 웃고 즐거워하다니 꿈만 같았다. ‘아카섬이 남긴 것은’은 더 강렬한 감흥이었다. 관계자들도 입을 모아 역대급 공연이라고 했다. 서울 극단 반의 훌륭한 연출력 덕분에 빛났다. 행운은 분명 있다. 그게 날 찾아온 감사한 한 해였다. 라디오에서 위안부 할머니의 증언을 듣는데 몸이 굳어버렸다. 거기서부터 시작이었다. 우리 시대 때는 여자를 비하하는 말을 일상적으로 들었다. 가정, 학교, 회식자리, TV드라마에서도 그랬다. 여자라는 게 싫었고 자존감은 바닥이었다. 나 스스로를 부정하려 했다. 이런 나에게 위안부 할머니의 고통은 생채기를 헤집는 듯했다. 천 길 낭떠러지 같은 삶을 사셨겠구나. 몇 년이 걸려도 저 이야기를 써야겠다고 다짐했다. 초고를 들고 연극 선배들에게 조언을 구했다. 결국 꿈은 끝까지 나를 이끌었고 통영희곡상을 받게 해줬다. 통영연극축제위원회와 선배님들에게 감사하다. 큰 상을 받고 지난 2년 동안 힘들었다. 사람들의 과도한 기대와 나 스스로 강박적으로 매달려 예술이 마음의 부채가 되었다. 자유로운 상상도 치열한 성찰도 사라지고 욕심에 허우적거렸다. 그 혼돈 속에서도 지키려 한 졸작이 둘 있다. ‘정당방위’와 ‘마음의 연주’다. ‘정당방위’는 직장 내 괴롭힘을 다룬 이야기로 법정과 살인현장이 무대다. 갑질의 사슬, 미로에 갇힌 약자, 다수의 방관을 반영하려 했다. ‘마음의 연주’는 음악을 소재로 여행 중 벌어지는 러브스토리다. 사랑은 진정한 응원이라는 것을 전달하려 했다. 그리고 ‘블랙꼬레아와 율도’는 과학창작대전에 참여하며 상상력을 마음껏 펼쳐본 SF희곡이다. 조지 오웰의 ‘1984년’에서 영감을 받았다. 다시 초심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에 지금까지 쓴 희곡을 묶어낸다. 요즘 한계가 온 게 아닐까 의구심이 든다. 간절했던 예전의 나로 다시 서고 싶다. 버팀목이 되어주는 남편과 아들이 곁에 있어 든든하고 고맙다.
“조선여자들을 짐승보다 못하게 취급했던데 뭐! 자신들이 전쟁에서 느끼는 절망감을 성욕으로 풀기 위해 소녀들을 이용하고, 병들면 내다버리고……. (어처구니없다는 듯) 불과 몇 십 년 전 일이야. 마츠모토는 언제 위안부에 관해 알았어?”
- 제1부 <아카섬이 남긴 것은> 본문 中에서
“블랙황이 한 일은 의료행위였어. 바이러스 전문가로써 치료백신으로 환자들을 살린 것뿐이야! 신탁을 받아 인류를 구원한 게 아니잖아. 참! 터무니없게도 스스로를 구세주로 둔갑시켜놨어. 억지 순교자를 만들고, 병원을 성지로 각색하고. 이러니 사람들이 집단 최면에라도 걸린 것처럼 그를 찬양하고 충성심으로 혈안이 되는 거야. 처제는 블랙꼬레아 정부의 부당함을 직접 다 경험했잖아. 설마 동화되어 버린 건 아니겠지?”
- 제2부 <블랙꼬레아와 율도> 본문 中에서
“이기 소박이라카는 거 아이가? 우와, 내 얼굴을 우째 들고 다니꼬? 갤국 부모 얼굴에 똥칠을 해뿌네! 딸자슥은 도대체 누굴 닮아가 저래 생기 뿌릿노!”
- 제3부 <고석할매 살아있네!> 본문 中에서
“(불안정한 모습) 우리나라는 힘없고 돈 없는 사람은 무시당하는 세상이잖아요. 그 총각을 보면서 안 됐다는 생각을 했습니더. 늘 기름때 묻은 작업복에, 한 달에 두 번밖에 못 논다고 하대요. 지 집도 없이 직원당직실에서 산다고 들었어예. 그러니까 자기 신세가 얼마나 한스러웠겠습니꺼. (떨리는 목소리) 혼자 죽기는 억울하니까 그런 무서운 일도 저지르고, 고마, 자, 자살한 거랑 마찬가지지예.”
- 제4부 <정당방위> 본문 中에서
“두 얼굴의 사나이요. 지지리 가난해서 집에 얘기할 수도 없었어요. 헤어져야겠다고 선언했는데 이별하고 나니 내가 더 많이 좋아했더라고요. 견딜 수가 없어 다시 매달렸지요. 잊히지도 않아요, 마지막 날이. 날 능욕하고 택시에 태워 보내버리더라고요. 택시 안에서, 그, 진짜, 막, 목 놓아 우는 거 있잖아요. 집으로 가는 내내 펑펑 울었어요. 그 사람, 지금은 유명한 PD가 되었어요. 모진 사람. 성취욕밖에 없었어.”
- 제5부 <마음의 연주> 본문 中에서
작가 소개
지은이 : 김정리
1965년 부산에서 태어났다. 극단 부산레파토리시스템에서 배우로 데뷔했다. 출연작으로 <사람의 아들>, <남포동말뚝이>, <불타는 서낭당>, <넋이야 있고없고> 등이 있다. <고석할매 살아있네>로 사상문화스토리텔링 대상을 받으며 극작가에 입문했다. 과학창작대전에 SF희곡 <블랙꼬레아와 율도>로 본선에 참여하고, 부산무대예술제에 <도희와 도치>로 작가에 합류했다. <아카섬이 남긴 것은>으로 통영희곡상을 받았다. 현재는 희곡작가와 독립영화 배우 활동을 병행하고 있다.
목 차
제1부. 아카섬이 남긴 것은
제2부. 블랙꼬레아와 율도
제3부. 고석할매 살아있네!
제4부. 정당방위
제5부. 마음의 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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