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쓸쓸하던 그 골목을 당신은 기억하십니까?
어릴 적 살던 동네엔 골목이 많았다. 서울 한가운데였고 단독주택 즐비한 주택가였다. 골목은 담장으로 이어졌으며 담벼락엔 낙서가 그득했다. 골목은 아이들 공간이었다. 구불구불 이어진 골목을 활용한 놀이가 발달했다. 그때는 어디라도 골목 천지였다. 조금 큰 길과 고리를 이룬 골목, 두 큰 길 사이를 이어주는 골목, 어느 집 문간에서 끝나는 막다른 골목 등. 골목은 곧 동네 축소판이었다. 숨기 알맞았고 은밀하고 불온한 기운이 휘휘 감돌았다. 날이 저문 골목길 가로등 아래는 연인들 차지였다. 빚 받으러 온 사내가 담배 물고 담벼락에 기대 죽치던 장소도, 경찰에 쫓긴 범죄자나 데모에 가담한 학생이 뭇매 맞고 덜미를 잡히는 곳도, 짝사랑에게 건넬 연서를 들고 하염없이 기다리던 장소도 골목이었다.
어느 날부터인가 골목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어른들은 개발이라고 불렀다. 도시개발은 구부러진 길을 곧게 펴면서 시작되었다. 평평하고 곧게 뻗은 직선에서 더 이상 비밀은 피어나지 않았다. 구부러진 홈 사이에 담긴 추억과 낭만과 비밀의 서사가 사라지고 있었다. 사람들의 발걸음은 씩씩해졌을지언정 기계적 율동에 가까웠다. 근대화·도시화는 그렇게 골목을 지우면서 시작되었다. 골목은 재빨리 도시 일부로 편입되었다. 영화는 좀 더 기민했다. 도시를 배경으로 혹은 후경으로 삼은 영화들에서 골목은 추격전이 벌어지는 사건 전개 장소이거나 특정 공간을 상징하는 용도로 사용되었다. 영화에서 골목은 곧 ‘도시의 뒷골목’과 같은 이미지가 되었다.
골목을 품은 도시, 도시를 품은 영화
내가 도시와 골목에 관심을 가진 계기는 공공기관 강연에서 ‘도시재생과 영화’를 다루면서부터였다. 도시 전문가도 아니고 건축 전문가도 아니며, 공공활동에 관해 잘 아는 것은 더더욱 아니지만 우연찮게 이 테마를 숙명처럼 품었더랬다.
사회생태학 개척자 머레이 북친Murray Bookchin은 스스로 존재하는 자연을 1차 자연(first nature), 도시 마을과 같이 인간화된 혹은 사회화된 자연을 2차 자연(second nature)이라 구분하여 불렀다. 도시에서 1차 자연과 2차 자연은 거주 선택의 중요한 조건이며 매력이다. 지리적 공간과 거주형태로 인물과 지역 정서를 설명한다는 점에서 영화와 도시는 뗄 수 없는 관계다. 시대의 공기를 보여주기에 도시만큼 적절한 재료는 없다. 매체를 업고 승승장구한 사례는 영화 로케이션에도 고스란히 적용되었다. 영화 촬영지가 세간에 화제가 되자 지자체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지자체마다 앞 다투어 조직과 자본을 동원해 영화계에 러브콜을 보냈다. 지역을 배경으로 찍는 영화에 제작비 지원을 내건 도시도 있다. 팸 투어를 유치해 영화공간으로 적합한 장소를 견학시켜준다. 촬영횟수에 따라 수천 만 원에서 수억 원까지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 영화가 도시와 만나 이룬 기적을 보았기 때문이다. 이 책이 시작된 지점이다.
도시와 만난 영화, 영화를 만나 새로운 이미지를 얻은 도시들
메트로폴리스가 아닌 소도시의 정서와 욕망을 헤집으려 했다. 변두리일지언정 한 시절의 찬란함은 기억하고 있었다. 한국영화와 만난 14개의 도시. 유명하고 거창한 이름보다는 소소한 재미로 작은 영화의 주된 소재가 된 곳이다. 도시와 만난 영화 이야기인 동시에, 영화와 만나 새로운 이미지를 얻은 도시 이야기다. 공간이 풍경이 되고 극의 정서를 좌우한 곳을 위주로 골랐다. 그렇게 파주와 함평과 옥천과 거제와 영월과 삼척과 제천을 만났다. 여기에 몇몇 매체에 기고한 글을 재구성해 추렸고 몇 개의 도시를 추가했다. 도시가 영화와 만나 기능하는 방식에 초점을 맞추되, 영화를 만난 도시의 변화까지 간파하고자 했다. 당대 도시 공기를 제대로 담아낸 영화를 기다리는 마음이 더해졌다. 무수한 한국영화가 선택한 도시 가운데 특별히 작은 공간을 소환하는 작업은, 이른바 동시대적 공간의식을 통한 전복적인 창조성을 향해 나아가는 첫발이 될 것이다.
도시는 일정한 성격의 활동들이 지속적으로 일어난다. 지속된 활동을 통해 장소에는 일정한 성격의 기억이 새겨진다. 이렇게 집단 기억이 층층이 쌓여 어느 도시, 어떤 장소만의 특별한 분위기와 성격을 부여해주는 것을 ‘장소성’이라고 한다. 장소성에 새겨진 기억을 엮으면 하나의 커다란 이야기가 만들어진다. 그것이 도시의 ‘서사’이다. 오늘날 역사적 도시에 사는 사람들은 서사 위에 새로운 기억을 쌓는 또 다른 주인공이다. 그들이 가끔 찾아가는 도심 건물에도, 일상적으로 걷는 골목에도 나름의 이야기가 깃들어 있다. … 영화를 떠올리면서 도시의 역사와 함께한 오늘과 내일의 문제를 고민한다.
작가 소개
영화평론가. '엄마 없는 하늘 아래'를 보고도 울지 않던 아이였다. 어느 날 내 인생에 영화가 엎질러졌다. 그 영화를 주섬주섬 곱게 담아 글과 말로 육화시키며 일용할 양식을 구한다. 매체에 글을 쓰고 강연도 한다. 끝내 소망은 영화가 주는 감흥과 충격을 오래도록 유지시키는 일. 그 일을 제대로 하는 사람이 나였으면 좋겠다. 아이는 토니 스타크의 죽음 앞에서 눈물샘 터진 아저씨가 되었다.
목 차
제천 : 기차가 멈춘 자리에서 미래로 향하다
함평 : 타고난 튼튼함 하나면 만사 오케이
인천 : 변두리의 질박함을 부탁해!
군산 : 뿌리 없는 자들, 고향을 노래하다
영월 : 비탄의 역사가 품은 마이너리티 찬가
삼척 : 사랑이야 변하든 말든, 봄날은 간다
옥천 : 소녀의 뜨거웠던 그 여름날
파주 : 욕망 가득한 점묘화로 쓴 도시 서사
춘천 : 호반의 도시에서 찾은 이타적 헤픔의 미학
울산 : 고래, 근대의 신으로 다시 태어나다
소성리 : 하늘과 땅 사이에 사람이 있었네
거제 : 조선소 소녀들에게 땐뽀를 허하라
부산 : 눈 내린 아침이 어찌나 포근하던지
대구 : 그때 그 사람들의 불온함을 찾아서
번외 20세기 영화와 서울, 한국현대사에 관한 기억집합소
이 책에서 이야기한 영화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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