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동서 문화철학의 세계적 석학 프랑수아 줄리앙
탈합치(脫合致)의 개념을 성서, 회화, 문학, 철학에서 가동시킴으로써
어떻게 예술과 실존의 원천에 탈합치 개념이 내재되어 있는지 밝힌다!
합치는 죽음으로 가는 길이며
탈합치는 삶을 열어주는 가능성이다
“탈합치는 탐험이다.
탈합치는 우발적인 것, 창조적인 것, 미리 예견되거나 내포되지 않은 것,
개시될 수도 있고 불발될 수도 있는 것을 향해 열려 있다.”
행복한 삶이란 무엇일까? 모든 것이 맞아떨어지고 충족되고 안정적인 상태, 즉 나와 세상이 합치된 상태라고 생각하기 쉽다. 고전적인 예술 또한 합치를 지향했다. ‘사실’적인 묘사를 통해 자아와 타자를 완전히 일치시키려 했던 것이다. 미술작품을 자연과 합치시키기 위해 르네상스 시대에 알베르티가 고안해낸 원근법은 이후 수백 년 동안 회화 기법의 토대가 되었다. 조화, 융합, 반영, 합일 같은 말들은 미(美)를 수식하는 긍정적 표현으로 쓰여왔다.
이 같은 생각과 정반대로, 철학자 프랑수아 줄리앙은 합치를 벗어나야만 실존할 수 있다는 대담한 이론을 제기한다. 현재란 포착되지 않고 계속 빠져나가는 것이며, 생명체에 있어 기존 상태의 지속은 해체와 죽음으로 이어진다. 따라서 산다는 것은 오히려 밀착과 결속을 깨고 현재의 적합성에서 떨어져 나오는 것이다. 진정으로 ‘살아갈’ 수 있기 위해 합치를 끊임없이 쇄신하는 것, 즉 탈합치의 과정이다.
그러나 줄리앙에 따르면 탈합치는 특정한 목적을 가질 수 없으며 그 결과를 예상할 수도 없다. 탈합치는 선행 규범의 폐쇄성을 벗어나게 하고 창조적 가능성을 활성화시키지만, 반드시 진보나 발전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인류의 진화 과정이나 예술의 역사는 탈합치가 항상 우발적이며 위험을 무릅쓰는 것임을 보여준다. 따라서 인간에게 탈합치는 자유와 실존을 향해 열린 창이 된다.
탈합치 개념을 통해 이해하는
인류 역사와 근대성의 의미
줄리앙은 종교, 과학, 문학, 미술 등 다양한 분야를 넘나들며 탈합치의 사례와 정당성을 설파한다. 십자가 위에서 죽은 예수는 인간으로서의 자신과 탈합치함으로써 영원한 삶을 활성화했다. 진화론에 따르면 생명체는 선행 단계에 갇혀 있는 대신 그 단계로부터 탈합치하면서 미지를 향해 도약했다. 세잔과 피카소는 원근법이라는 작위적인 시각 장치를 거부하고 “매우 잘못” 그리기를 택했으며, 말라르메는 시의 ‘순수성’과 의미 대신 무작위와 모순을 택했다. 줄리앙은 이처럼 19세기에서 20세기로의 전환점에 여러 분야에서 동시에 전개되었던 정신을 ‘근대성’이라고 일컫는다. 서구에서 이상적인 삶과 예술은 부정적인 것을 극복하고 합치에 이르러야 했지만 근대성이 이런 가치관을 깨뜨렸던 것이다.
하지만 탈합치는 단지 근대적 사상에 한정된 것만은 아니다. 줄리앙이 최초의 탈합치 사례로 드는 아담과 이브를 보자. 낙원에서 아담과 이브는 합치 상태였지만 실존하지는 않았다. 그들은 신의 질서에 의문을 갖지 않았고 완벽한 적응의 세계 바깥을 조망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들은 사과를 먹음으로써 그 충족성에서 빠져나왔고, 서로가 발가벗고 있다는 것을 의식하면서 주체로 활성화되었다. 그들이 낙원에서 추방된 것은 달리 말하자면 실존에 진입한 것이다. 주체의 가능성은 합치 상태에 간극을 벌림으로써 생겨난다.
실존(ex-ister)이란 ‘바깥에 서는(ex-sistere)’ 것이다
우리는 안정된 것에서 벗어남으로써 자유로워진다
간극은 줄리앙의 사유에서 핵심이 되는 개념이다. 줄리앙 본인이 그리스 철학을 연구하다가 돌연 중국으로 간 것도 유럽 사상의 익숙함으로부터 간극을 벌려 사유를 새롭게 가동하기 위해서였다. 인류 역사에서 새로운 가능성은 언제나 익숙한 것의 바깥에 서려는 시도를 통해 나타났다. 이는 비단 예술이나 철학뿐만 아니라 개인의 삶과 정체성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살아가면서 편안한 상태를 거부하고 굳어진 습관을 버리기란 쉽지 않다. 하지만 우리는 탈합치 개념을 통해 그런 적합성에 간극을 벌리고 자아의 마비에서 빠져나올 수 있다. 탈합치는 과거의 삶과 단절하는 것이 아니라 그로부터 활용할 것을 선별해내고 이를 토대로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젖히는 일이기 때문이다. 탈합치는 지성과 용기를 필요로 하는 자유의 구체적인 표현이다.
이번 한국어 번역판에는 줄리앙의 최신작이자 ‘탈합치 연합’ 창립 선언문인 「탈합치의 정치」를 정리한 내용이 특별히 추가되었다.
작가 소개
지은이 : 프랑수아 줄리앙
프랑스의 철학자로 파리7대학 교수, 프랑스 파리국제철학대학원원장, 프랑스 중국학협회 회장, 파리7대학 현대사상연구소 소장 등을 역임했고 현재 프랑스 인문과학재단 교수로 재직중이다. 줄리앙은 40여 년간 중국사유와 서양사유를 맞대면시키는 작업을 통해 중국학의 차원을 뛰어넘어 완전히 새로운 사유를 펼쳐왔다. 역사, 언어, 개념 등 모든 면에서 서로 무관하게 정립된 중국사유와 서양사유는 각각의 습벽(習癖)을 서로에게 드러냄으로써 철학을 재가동시킨다. 줄리앙은 그동안 동서양 사유의 관계를 통찰한 40여 종의 단행본을 저술했고 최근에는 이와 같은 방대한 지적 자산을 토대로 독창적인 문화론과 실존의 윤리학을 정립하고 있다. 서양의 대다수 이론가들이 동양사상을 제대로 읽지 못하고 많은 동양학자들은 서양사상을 정확히 다루지 못하기 때문에 줄리앙의 관점은 엄밀한 연구 대상이 되지 못하고 있다. 그의 철학은 동서양 양쪽 이론가들에게 무궁무진한 영감을 제공할 것이다. 이미 그의 많은 저작이 20여 개국에서 번역되었다.
옮긴이 : 이근세
경희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하고 벨기에 루뱅대학교 철학고등연구소ISP에서 스피노자 철학과 모리스 블롱델의 철학 연구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브뤼셀 통·번역대학교ISTI 강사를 역임하고 귀국 했다. 현재 국민대학교 교양대학 교수로 재직중이다. 주요 연구 분야는 서양근대철학, 프랑스철학이다. 점차 연구의 초점을 동서 문화담론으로 이동시키고 있다. 주요 저서로 『효율성, 문명의 편견』, 『철학의 물음들』 등이 있고, 역서로 『스피노자와 도덕의 문제』, 『변신론』, 『데카르트, 이성과 의심의 계보』, 『스피노자 서간집』, 『전략』, 『문화적 정체성은 없다』 등이 있다. 연구 논문으로는 「스피노자의 존재론 기초」, 「스피노자의 철학에 있어서 시간성과 윤리」, 「블롱델의 행동철학과 라이프니츠의 실체적 연결고리 가설」, 「프랑수아 줄리앙의 비교철학에서 중국과 서양의 효율성 개념 비교」, 「야코비의 사유구조와 스피노자의 영향」, 「스피노자의 정치철학에서 개인의 자유와 정치적 복종의 관계」, 「모리스 블롱델의 행동철학에서 과학과 기술의 의미」, 「이념의 문제와 글쓰기 전략」, 「동아시아적 이념의 가능성」, 「블롱델의 철학에서 방법론과 실천의 문제」, 「모리스 블롱델의 현상학적 방법론」, 「데카르트와 코기토 논쟁」, 「조선 천주교 박해와 관용의 원리」, 「프랑수아 줄리앙의 중국회화론」, 「로고스와 노장」, 「조선 천주교와 미시정치학」 외 다수가 있다.
목 차
한국어판 서문
서문
1. 탈-봉인(封印)
2. 우발적인 것과 조정된 것
3. 산다는 것은 탈-합치하는 것이다
4. 태초에 탈합치가 있었다
5. 탈합치에서 의식이 비롯한다
6. 어떻게 부정적인 것이 실존을 활성화하는가
7. 탈합치의 윤리를 위하여
8. 합치의 무덤
9. 근대성
역자 해제: 탈합치의 정치
역자 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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