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먼저 온 미래'였기에 잊혔거나, 지워졌거나,
미완의 이름으로 불리던 여자들,
예술로 자신의 이름에 완결성을 부여하다!
‘다가가 들여다보기 전에는 보이지 않는’ 이들의 삶 속에서 그저 자기 자신이 되고자 했던 빛나는 영혼의 아름다움을 본다._김보라(영화감독)
사건 #1. 지워진 이름의 흔적
1893년 프랑스 파리, 루브르박물관은 17세기 네덜란드 황금시대를 이끌었던 대가 프란스 할스의 작품을 소장하게 되었다는 기쁨으로 흥분에 휩싸였다. 술에 취해 볼이 발그레해진 여성과 남성이 즐거운 한때를 보내는 장면을 그린 이 그림은 할스의 작품 가운데서도 최고의 표현력을 선보인 것으로 추앙받았고, 루브르 소장 역사에도 기록될 만한 사건이었다.
하지만 루브르의 기쁨은 오래가지 못했다. 할스의 명작이라 생각하고 사들인 그림의 해묵은 때를 벗겨내는 과정에서 할스의 다른 작품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던 모노그램을 발견한 것이다. 루브르는 이 작품이 모조품일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혹은 다른 화가의 작품일 수도 있다는 근심에 사로잡혔다.
루브르가 발견한 모노그램은 J와 L, 그리고 이들 알파벳을 가로지르는 별모양이 그려져 있었다. 이 모노그램은 그전에도 주목받은 적이 있었다. 갖가지 추측이 난무하는 와중에 코르넬리스 더흐로트라는 이름의 미술사가가 모노그램의 ‘진짜 주인’을 밝혀냈다. 그것은 그때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유딧 레이스터르라는 ‘여성 화가’의 것이었다. 루브르는 “엉터리 감정으로 손해를 입혔다”며 딜러를 고소했고, 매입가의 25퍼센트를 환불받았다.
사건 #2. 대중의 뭇매를 견뎌야 했던 이름
유년기부터 ‘최초’ ‘1등’이라는 수식어가 뒤따랐던 인물, 나혜석. 도쿄여자미술전문학교 서양화과에 한국인 최초로 입학하는가 하면, 신문 광고란에 공개 결혼 청첩장을 올려 세상 떠들썩한 결혼식을 올린 여자. 당당한 언행으로 세간의 오해가 끊이지 않던 나혜석은, 근대기 알파걸로 불린다. 하지만 그녀는 시대를 앞선 깨인 사고방식과 예술적 능력은 인정받아 마땅했음에도 불구하고 생의 말년에는 행려병자 신세로 생을 마감했다.
나혜석은 화려하게 주목받았지만 동시에 세간의 소문을 감내해야 하는 유명인이었다. 남들보다 뛰어나고 굽힐 줄 모르는 성정을 타고난 탓에 애꿎은 손가락질과 시선의 감옥에 갇혀 지내야 하는 일도 태반이었다. 이러한 상황은 21세를 맞이한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다. 오히려 대중의 입맛대로 프레임을 씌우고 더한 뭇매를 때리는 경우도 허다하다. 악플과 혐오에 시달리다 끝내 유명을 달리한 대중예술인들처럼…….
사건 #3. 미술사의 구석진 자리를 박차고 나온 여자들, 다시, 이름을 찾다
대학에서 미학을 전공하고 10년 넘게 미술과 문화에 관한 글 쓰는 일을 하는 권근영은 과거 대학에서 미술사를 공부할 때를 회상하며 여성 예술가들의 이름이 언급되지 않는 점에 크게 의문을 갖지 않았다고 말한다. 그러다 사회인으로 문화예술계를 취재하고 소식을 전하는 전달자가 된 후에는 한쪽으로만 치우친 예술가들의 성별이 차츰 이질적으로 느껴졌고, 그래서 더 여성 예술가들을 찾아가 그들의 이야기를 전하고자 노력했다. 그들은 자신과 주변의 이야기를 예술이라는 매체를 통해 꼭꼭 씹어 들려주었고, 그 이야기는 학문으로 접하던 미술세계와는 전혀 달랐다. 『완전한 이름』은 기자이자 한 사람의 여성으로서 권근영이 연구하고 취재한 여성 예술가들을 한 명 한 명 소환하여 대중에 그 이름을 전하고자 쓰였다.
책은 총 3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 「길을 떠나다」에서는 100년 전 진보적 교육기관으로 거듭나겠다며 성별 불문 입학 조건을 내건 바우하우스가 결국 여성의 능력을 제대로 인정하지 않고, 남성의 그늘 아래 놓이게 한 ‘흑역사’를 지적하며, 그럼에도 아동미술에 선구적 역할을 한 프리들 디커브란다이스를 언급한다. 낯선 이름이지만 전쟁이라는 암울한 시대에 내던져진 아동·청소년을 위한 미술교육으로 재조명된 프리들을 시작으로, 서양인의 눈으로 바라본 조선 여인의 삶을 기록한 엘리자베스 키스, 현 함부르크 국립조형미술대학 교수이자 유럽에서 활발히 활동 중인 그림 철학자 노은님, 소재와 매체를 확장하며 ‘지금, 여기’의 이야기를 경쾌하고 세련되게 전하는 정직성의 예술세계를 심층적으로 다룬다.
2부 「거울 앞에서」는 인상파의 여성 멤버였고, 출산을 했던 한 해를 제외하고 인상파 전시회에 빠짐없이 출품했던 화가 베르트 모리조의 이야기로 포문을 연다. 생전 마네를 비롯한 인상파 화가들의 모델로 인식되던 모리조였지만 화가이기를 포기한 적 없던 그녀였기에 모리조를 모델로 그린 마네의 그림과 모리조의 자화상을 병치한 부분은 시각의 차이를 극명하게 드러내준다. 뒤이어 누구의 아내도, 엄마도, 딸도 아닌 직업인으로서의 화가 자신이 되고자 분투한 파울라 모더존베커의 삶과, 가족을 추스르는 고된 생활 속에서도 붓을 놓지 않고 누구보다 오래 살아남아 예술적 발자취를 남긴 버네사 벨의 시간이, 시공간을 뛰어넘어 한국의 현대미술가 천경자, 박영숙의 인생과 작품세계에 투영된다.
3부 「되찾은 이름들」에서는 조금 더 앞선 시대를 살아낸 여성 예술가들의 이름을 불러본다. 바로크시대 유럽 무대를 종횡무진했던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 17세기 네덜란드 황금시대에 프란스 할스만큼 뛰어난 실력을 지녔던 유딧 레이스터르, 조선의 알파걸 나혜석, 18세기 파리를 배경으로 화가이자 스승으로서 일찍이 여성 연대를 꿈꿨던 아델라이드 라비유귀아르, 그리고 최초의 추상화가였으나 이름 대신 ‘먼저 온 미래’라 불린 힐마 아프 클린트에 이르기까지, 책에는 사회적 그늘 혹은 가문의 이름에 가려졌던 여성들이 어떻게 예술로 자신의 이름에 완결성을 부여했는지 그 당찬 행보를 되짚어간다.
특히 기자이기에 앞서 미학자, 여성인 저자가 앞선 시대를 살아낸 여성 예술가들을 자신 혹은 현대사회 여성과 연결시켜 풀어내는 방식은 미술사라는 바탕 위에 써내려간 자기 고백 에세이라고 할 수 있다. 저자가 직접 만나 인터뷰한 내용을 담아내어 더욱 생생하게 전달되는 그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일 수 있는 이 책은, 그래서 더 귀하게 다가온다.
“다시 이름을 찾은 여성 화가들이 ‘당신은 혼자가 아니다’라며, 오늘 그림으로 나를, 우리를 다독인다.”
작가 소개
저자 : 권근영
수원에서 초등학생 시절을 보냈다. 이동도서관이 오는 날만 손꼽아 기다렸다. 서울로 전학 후 중학교 2학년 때, 장래희망을 묻는 질문에 “3면이 책으로 둘러싸인 방에서 살고 싶다”고 답했다. 서울대학교에서 국문학과 미학을 전공했고, 같은 대학 미술대학원에서 석사학위(MFA 첨자 처리)를 받은 뒤 기자가 됐다.
이후 10년 넘게 미술·문화에 대한 글을 쓰며 밥벌이를 하고 있다. 『중앙일보』에 칼럼 「그림 속 얼굴」 「권근영의 숨은그림찾기」를 연재했고, 지은 책으로 『나는 예술가다-한국 대표 예술가 10인 창작과 삶을 말하다』가 있다. 광주비엔날레 연구로 서울대학교 대학원에서 미술경영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는 JTBC 스포츠문화부장으로 일하고 있다.
기자를 하며 만난 미술가들, 대학과 미술관 강의 때 만난 미술에 대한 열정 가득한 사람들, 또 세계 곳곳으로 취재를 다니며 접한 명작들은 삶의 어두운 순간을 ‘반짝’ 밝혀주는 빛으로 돌아오곤 했다. 이 책은 바로 그 순간의 나눔이다.
목 차
시작하며
1. 길을 떠나다
바우하우스에서 아우슈비츠까지, 프리들 디커브란다이스
서양 여자 눈에 비친 조선 신부, 엘리자베스 키스
‘이상한 동물’의 ‘큰 걸음’, 노은님
정직하지 못한 세상에 내미는 그림, 정직성
2. 거울 앞에서
인상파의 여성 멤버, 베르트 모리조
누구의 아내도, 엄마도, 딸도 아닌 파울라 모더존베커
‘버지니아 울프의 화가 언니?’, 버네사 벨
내 슬픈 전설의 91페이지, 천경자
‘마녀’ ‘미친년’으로 살아남았다, 박영숙
3. 되찾은 이름들
230년 만에 되찾은 이름, 유딧 레이스터르
칸딘스키·몬드리안보다 앞선 최초의 추상화가, 힐마 아프 클린트
조선의 ‘알파걸’, 나혜석
‘여적여’는 없다, 아델라이드 라비유귀아르
피해자에서 아이콘으로,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
에필로그_아버지의 카메라, 딸의 사진집
마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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