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그들이 만나지 않았다면, 그림은 완성되지 않았다”
다빈치의 수학 선생, 뒤러의 동네친구…
캔버스 너머에 존재했던, 위대한 화가들의 특별한 조력자
6천 장에 달하는 노트 중 어느 하나 세상에 발표하지 않은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유일하게 출판한 그림은 어느 수학책에 그린 삽화였다. 빈센트 반 고흐가 ‘해바라기의 화가’로 미술사에 기록되게 만든 공로자는 고흐의 동생 테오가 아닌 고갱이었다. 구스타프 클림트의 황금빛 그림 속에 담긴 기하학적 장식은 의대 교수들에게 배운 생물학 지식이 그대로 반영된 것이었다.
흔히 위대한 예술가는 외롭고 고독하게 작품 활동에만 몰두했을 거라 오해하지만, 그들 주변에는 언제나 사람이 있었다. 천재 화가 달리의 청년 시절 친구 페데리코 로르카는 그들이 이별한 후에도 달리의 그림 속에 흔적을 남겼고, 인상파 화가 카미유 피사로는 세상과 불화하던 폴 세잔에게 윤곽선이 아닌 색만으로 형태를 표현하는 법을 알려주며 세잔의 그림에 조화로운 세계가 담기도록 이끌었다. 이처럼 거장의 풋풋했던 시절을 함께하며 그 가치를 알아봐준 친구들, 어떤 이해관계도 없이 곁을 내어준 후원자들, 찰나의 만남이지만 누구보다 강렬하고 파괴적인 영향을 미쳤던 관계들은 명화의 탄생에 크고 작은 영향을 미쳤고, 미술사의 중요한 순간들을 만들어냈다.
이 책 《화가의 친구들》은 언뜻 관계없어 보이는 그림과 그림, 사람과 사람 사이를 연결하며 우리가 그동안 알지 못했던 캔버스 너머의 흥미로운 이야기들을 들려준다. 명화 속에 숨겨진 신기한 과학 이야기를 담아낸 전작 《실험실의 명화》에서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거장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와 수학자 루카 파치올리의 관계를 다루었던 저자 이소영은 파치올리가 다빈치와 밀라노 궁정 시절을 함께 보냈다는 점에 호기심을 느꼈고, 다빈치가 파치올리의 저서 《신성한 비례》에 다면체 삽화를 그렸다는 사실을 발견하면서 화가와 그 주변 인물들의 관계에 주목하게 되었다.
이 책에는 예상치 못한 의외의 만남, 서로의 삶과 예술 세계에 결정타가 된 관계, 사랑인 듯 우정인 듯 하나로 뭉뚱그릴 수 없는 미묘한 사이 등 다양한 형태의 관계들이 소개된다. 역사적 사실에 상상력이 더해져 드라마틱하게 재구성된 이야기들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명화를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져 있음을 느끼게 될 것이다.
생물학에 눈뜬 클림트, 인문학자 친구를 둔 뒤러…
화가에게 뜻밖의 만남을 선사한 시대적 배경
오스트리아 화가 구스타프 클림트의 작품에서 찾아볼 수 있는 가장 큰 특징은 눈부신 황금빛 배경과 거기에 녹아든 기하학적 무늬다. 클림트의 대표작 〈키스〉에서 남성의 몸은 여러 가지 형태의 사각형으로, 여성은 동그라미로 가득 채워져 있다. 이 무늬는 다름 아닌 인간의 생식세포를 형상화한 것이다. 화가의 그림에 어떤 연유로 생식세포가 그려지게 되었을까?
클림트가 활동하던 1900년 무렵의 빈은 사상가 프로이트와 비트겐슈타인, 화가 클림트와 에곤 실레, 작곡가 구스타프 말러 같은 이들이 카페와 살롱에 모여 예술과 학문에 관한 숱한 대화를 나누고 의견을 교환하던 시기였다. 당시 영향력 있는 사교계 인물이자 작가인 베르타 추커칸들은 클림트의 적극적인 옹호자였는데, 그의 남편 에밀 추커칸들은 빈대학의 해부학 교수였다. 추커칸들 부부는 당시 빈 사회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던 학문인 생물학의 최신 지식을 클림트에게 전해주었고, 클림트는 이들을 통해 다윈의 진화론과 현미경으로 관찰한 세포의 모양과 형태를 접할 수 있었다. 인간의 근원, 생명의 본질을 그리고자 했던 클림트는 현미경으로 본 세포의 모습에 매혹되었고, 이를 작품에 담아내었다. 미술과 과학, 화가와 의대 교수라는 언뜻 어울리지 않는 조합은 이처럼 시대를 앞서가는 명작을 탄생시킨 운명적 만남이 되었다.
《화가의 친구들》은 전혀 다른 분야의 사람들이 어울릴 수밖에 없었던 시대적 배경을 간과하지 않는다. 금 세공사 아들인 알브레히트 뒤러가 법률가 집안의 피르크하이머와 동네 절친이 될 수 있었던 데에는 장인과 인문학자들이 자유롭게 교류하던 뉘른베르크의 개방적 분위기가 한몫했다. 18세기 산업혁명과 과학에 대한 호기심, 기대, 불안과 공포 등을 생생하게 담아낸 영국 화가 조지프 라이트의 걸작 〈공기 펌프 속 새 실험〉은 화가가 ‘루나 소사이어티’ 회원들과 두루 친분을 쌓으며 당시 유행하던 자연철학자들의 대중 강연이나 실험을 직간접적으로 경험한 덕에 탄생했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역사와 미술사를 공부하고 잡지에 과학칼럼을 썼던 저자의 남다른 이력은 분야를 가리지 않은 자료들을 다채롭게 엮어내 화가와 그 주변 인물을 둘러싼 이야기들을 더욱 풍성하게 만들어준다.
아름답고 다정한, 혹은 치명적인 관계 속에서
자신만의 예술 세계를 완성해간 화가들
그리고 그들의 작품이 된 또 다른 주인공들의 이야기
유명한 화가의 친구가 된다는 것은 당사자에게는 별로 좋지 않은 일임이 분명하다. 대체로 화가 쪽의 정보는 넘치고 주변인(모델)에 대해서는 그림의 이미지만이 남는다. 그러므로 후대 사람들은 그를 온전한 한 사람으로 생각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그 대상이 여성일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화가의 친구들》은 그동안 비중 있게 언급되지 않았거나 ‘화가의 모델’ 정도로 그친 인물들을 재조명한다.
뭉크의 대표작 〈마돈나〉의 모델인 다그니 유엘은 뭉크의 뮤즈, 또는 남자를 유혹하고 속이고 파괴하는 팜므파탈, 복잡한 남자관계로 타락한 추악한 스캔들의 주인공이라는 이미지가 강했다. 하지만 사실 다그니 유엘은 뭉크의 전시 기획자 역할을 했고, 잡지를 만들고 책을 번역하고 희곡과 시를 쓰는 재능 있는 문인이었으며, 술과 여자에 빠진 남편 대신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던 강인하고 용감한 여성이었다. 다그니 유엘이 총격으로 사망한 뒤, 뭉크는 신문에 추도사를 써 세상의 오해를 바로잡고자 했다.
에드가 드가와 오랜 친구 사이였던 메리 카샛 역시 오랜 기간 ‘미국인 화가 지망생’, ‘드가의 제자 혹은 모델’, 또는 ‘드가의 연인’ 등으로 항상 드가의 그림자 속에서 언급되곤 했다. 메리 카샛은 당당한 인상파 그룹의 일원이었고, 재료나 기법에서 다양한 실험을 두려워하지 않는 모험가였다. 여성이 아이를 낳는 것이 일생의 과업이던 시대, 오직 예술을 위해 다른 모든 것을 포기한, 온전한 한 사람의 화가였다. 주목받지 못했다고 해서 존재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이 책은 인간은 누구나, 아무리 뛰어난 화가라도 무언가를 혼자서 해내는 일은 없으며, 화가에게 도움을 주었던 주변 인물들이 화가의 일부, 화가의 액세서리가 아닌 작품의 또 다른 주인공임을 잊지 않도록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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