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1. 『카메라 소메티카』 박선 저자와의 인터뷰
Q. 제목 『카메라 소메티카』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카메라 소메티카는 영화의 본질적인 성격을 표현해보려는 시도입니다. 카메라 소메티카를 설명하기 위해 이와 유사한 개념들 몇 개를 살펴보고 싶습니다.
영화를 한마디로 규정하기는 어렵습니다. 사진을 정의하려는 시도는 그것이 발명되는 시점부터 있었고 지금도 진행 중입니다. 카메라를 통해 대상을 재현한다는 점에서 사진은 영화의 모태입니다. 따라서 사진을 지시하는 말을 영화의 비유로 써도 무방할 것입니다.
카메라 옵스큐라는 최초의 사진 기술을 일컫는 말로 빛이 온통 차단된 방을 뜻합니다. 한쪽 벽면에 작은 구멍 하나를 뚫어 놓으면 빛이 투과하면서 반대편 벽면에 방 바깥의 풍경을 재현합니다. 카메라 옵스큐라 속 이미지는 말 그대로 빛이 그린 그림입니다. 이 그림을 완성하는 데는 인간의 의도나 솜씨가 개입할 수 없습니다. 그 때문에 서양 사람들은 초창기 사진을 일컬어 신이 그린 그림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신의 그림 앞에서 인간은 작아질 수밖에 없습니다. 신의 그림과 인간의 응시 사이에는 심원한 경계가 놓여 있는 듯합니다.
카메라 루시다는 휴대용 카메라 옵스큐라입니다. 화가는 빛이 투사하는 풍경을 렌즈를 통해 화폭에 고정시킵니다. 그런 다음 화가는 빛 그림의 윤곽을 따라 펜이나 붓으로 선과 명암을 가미합니다. 카메라 옵스큐라와 원리는 같지만 카메라 루시다의 이미지는 인간의 개입을 허락합니다. 카메라 루시다는 빛이 그린 그림이지만 동시에 화가의 채취를 담고 있습니다. 카메라 옵스큐라가 사진 이미지의 객관성을 강조한다면 카메라 루시다는 사진 이미지에도 내밀한 정서가 있음을 말해줍니다. 두 용어는 영화의 성격을 표현하는 데도 비유적으로 쓰일 수 있습니다. 영화는 살아 움직이는 듯한 사실적인 이미지를 과시하는 매체입니다. 하지만 영화는 동시에 관객의 정서와 감정을 자극하는 매체입니다.
카메라 폴리티카는 미국의 미디어 학자 더글라스 켈러와 마이클 라이언이 쓴 책의 제목입니다. 카메라 폴리티카는 말 그대로 영화가 정치적 메시지를 담는다는 의미입니다. 이 표현을 달리 해석하면 카메라가 포착하는 이미지는 인간의 이해관계로부터 초탈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카메라는 누가, 어떤 대상을 향해, 언제, 어디에서 작동하느냐에 따라 다른 이미지를 만들어냅니다. 그 결과물이 스틸 사진이든 동영상이든 동시대의 이념과 가치관을 드러냅니다. 카메라 옵스큐라의 관찰자, 카메라 루시다의 창작자는 카메라 폴리티카에 이르면 매개자가 됩니다.
이 책의 제목인 카메라 소메티카는 영화에 대한 이전의 비유들이 공유하는 전제를 의문시합니다. 그 전제란 대상과 카메라, 이미지와 감상자 사이의 거리입니다. 그 거리가 관찰과 창작과 매개를 가능하게 만듭니다. 이 경우 보는 사람은 마치 빈 그릇과 같습니다. 이미지가 보는 사람의 뇌리에 박히고 생각과 감정을 전달합니다. 하지만 과연 그러한지요? 실상 사진과 영화의 감상자는 이미지를 검토하고 그것을 어떻게 분류할지를 판단하는 도식을 품고 있습니다. 도식을 영어로 스키마(schema)라고 부릅니다. 관객은 스크린 속을 나는 비둘기의 모습이 자신이 가진 비둘기 모양의 도식에 부합하기에 그것을 비둘기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극영화의 이야기를 이해하는 방식도 마찬가지입니다. 관객은 이미 알고 있는 이야기들과 더불어 자신의 인생 경험을 투사하여 극영화 속 이야기를 음미합니다. 관객은 이미지와 그것이 품은 이야기를 끊임없이 자신만의 것으로 가공하고 소유하려 합니다. 이미지를 향한 관객의 소유 욕구는 독점욕이나 탐욕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보다 오감을 최대한 활용하여 이미지를 음미하고 그것과 동화되려는 의지입니다. 그렇게 해야만 이미지를 온전히 이해하고 즐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림이 액자 바깥으로 빠져나오는 듯한 서양 회화의 ‘트롬페 로일’(Trompe L'Oeil), 그림을 연극적으로 재현하는 ‘타블로 비방’(tableau vivant, 活人畵), 그리고 현대의 3D 영화와 홀로그램 영상은 시청각뿐만 아니라 촉각, 후각, 미각까지를 총동원해 이미지를 독차지하려는 관람자의 욕구에 부응합니다. 카메라 소메티카는 몸을 뜻하는 영어 단어 ‘소마’(soma)를 활용한 조어입니다. 카메라 소메티카는 관객이 온몸으로 향유하는 대상으로서의 영화를 표현합니다. 카메라 소메티카는 현대인이 디지털 기기를 활용해 영상을 직접 만들거나 기존의 시청각물을 재구성하는 등 영상의 개인적, 적극적 소비행위를 지칭하는 용어이기도 합니다.
Q. 『카메라 소메티카』는 신체를 뜻하는 낱말 soma를 차용한 조어입니다. soma 혹은 신체가 우리 시대에 중요한 키워드로 등장한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소마’는 원래 그리스 말로 몸이라는 뜻입니다. ‘프뉴마’(pneuma)라는 그리스 말은 몸에 대비되는 영(靈)을 뜻합니다. 저는 ‘소마’라는 말을 떠올릴 때마다 십자가에 박힌 예수의 몸을 생각하게 됩니다. 예수가 신의 아들이라면 ‘프뉴마’ 즉, 신성만을 드러내는 것이 맞을 듯한데 평범한 인간의 몸을 갖고 속절없이 십자가에 매달린 형국이 역설적입니다. 깨달음을 향한 고행 속에서 야윈 몸으로 정좌한 붓다의 모습도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이들은 모두 진리가 선택된 소수의 전유물이 될 수 없다고 설파했습니다. 오히려 세속의 지배자들은 자신만이 신성을 부여받았다고 선포하며 뭇 민중을 기만하고 통제하려 했습니다. 예수와 붓다의 헐벗은 몸 즉 소마는 진리가 몸을 움직여 정직한 노동으로 살아가는 모든 사람의 소유물임을 암시합니다. 뉴미디어의 시대에는 소마의 가치가 더욱 두드러집니다. 문화와 언어의 장벽을 뚫고 평범한 모든 사람이 세계 전체의 문제들에 대해 자기 생각을 공유합니다. 집단지성은 가짜 ‘프뉴마’의 결탁이 아닌 다수의 ‘소마’가 연대한 결과물입니다.
Q. 피테르 브뤼헐의 작품들이 책 전체에서 큰 울림을 갖고 있습니다. 브뤼헐은 언제 처음 만나셨고, 브뤼헐의 작업에 특별히 주목하게 되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브뤼헐과 『카메라 소메티카』라는 책의 관계를 풀어주시기 바랍니다.
저는 고등학생 시절 영어 공부를 위해 『리더스 다이제스트』 영한 대역판을 많이 읽었습니다. 그때 16세기 네덜란드 화가 피테르 브뤼헐의 그림을 소개하는 글을 재미있게 읽었는데, 그 글에서 처음으로 브뤼헐 그림에 대한 상세한 소개를 접했습니다. 그 글은 브뤼헐을 숨은그림찾기 놀이의 대가 정도로 설명했습니다. 제 책에서 언급하는 <갈보리 가는 길>만 해도 오백여 명의 인물이 그려져 있다고 합니다. 인물뿐만 아니라 각종 소품까지 고려하면 한 폭의 회화작품에 어마어마한 양의 피사체가 그려진 셈입니다. 유명한 서양회화 작품을 보면 보통 누군가의 초상화이거나 정물화, 또는 성서 속 인물이나 신화적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그런데 브뤼헐 그림의 주인공들은 평범한 농민이나 심지어 아이들입니다. 브뤼헐의 <이카루스의 추락>을 보면 신화 속 영웅 이카루스는 바다 한쪽 구석에 말 그대로 ‘처박혀’ 있고 전경에서 가장 시선을 끄는 존재는 밭가는 농부입니다. 제가 십 대였던 시절에도 <이카루스의 추락>을 보며 묘한 통쾌감을 느꼈습니다. <갈보리 가는 길>에서도 주인공 예수는 한참을 둘러봐야 겨우 찾아낼 수 있을 정도입니다. 『카메라 소메티카』에서 소개하는 영화 <뮤지엄 아워스>에서도 미술관 안내원인 요한은 브뤼헐 그림 속 오브제를 찾아내는 일에 재미를 느낀다고 말합니다. 브뤼헐 그림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요한과 비슷한 경험을 했을 것입니다.
브뤼헐 그림에 애착을 느끼는 또 하나의 이유는 귀엽고 역동적인 인물들 때문입니다. 브뤼헐 그림 속의 인물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부드러운 곡선으로 묘사되며 각각이 모종의 동작을 부여받습니다. 그들의 몸동작을 보면 마음속으로 그것을 따라하게 되고 자연스럽게 회화의 세계 안으로 침잠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인물 각자가 겪고 있을 사연을 떠올리게 됩니다. 그림 속의 수많은 사람 하나하나가 표정과 몸짓으로 나름의 인생사를 증언합니다. 그 때문에 브뤼헐을 서양회화사의 셰익스피어라고 칭하기도 합니다.
미술관에 걸린 브뤼헐 그림을 보고 있는 상황을 상상합니다. 감상자는 그림 속의 인물을 훑어보면서도 그림의 구도를 관망하며 주된 메시지가 무엇인지 헤아려 봅니다. 그런데도 수많은 인간군상 속에서 진정 주인공이 누구인지 파악하기 어렵고 또 브뤼헐 특유의 부감도법은 여러 소실점을 갖고 있어 그림 전체의 구도를 파악하기 어렵게 만듭니다. 도쿄경제대학 서경식 교수는 “중요한 것은 숨겨져 있다”라는 말로 브뤼헐 회화의 의도를 설명합니다.
저는 오감을 총동원해 이미지를 전유(專有)하고자 하는 영화 관객의 태도를 ‘카메라 소메티카’라는 말로 표현합니다. 브뤼헐 회화 속에 ‘숨겨진 어떤 것’을 찾아내려는 감상자의 태도 또한 ‘카메라 소메티카’와 일맥상통합니다. ‘카메라 소메티카’의 관객은 동굴벽화를 눈앞에 두고서도, 스마트 폰의 유튜브 화면을 보면서도 동일한 욕망을 투사할 것입니다. 제 책에서 브뤼헐의 그림이 자주 언급되는 이유는 브뤼헐의 작품이 ‘카메라 소메티카’가 암시하는 관객성을 선취했기 때문입니다.
2. 『카메라 소메티카』 간략한 소개
영화학자 박선의 첫 번째 단독 저서. 회화 세계를 참조한 일곱 편의 영화를 분석한다. 영화와 회화의 비관습적 만남이 제기하는 여러 논점을 살피며, 뉴미디어 시대, 포스트-시네마 시대의 관객성을 표현하는 말로서 ‘카메라 소메티카’를 제안한다.
『카메라 소메티카』는 저자의 새로운 예술론을 집약하는 조어이다. 이 용어를 이해하려면 카메라 옵스큐라camera obscura와 카메라 루시다camera lucida라는 미학 용어들에서 출발해야 한다. 카메라 옵스큐라는 환영이 비친 검은 방으로, 영상매체의 원형을 나타낸다. 어두운 공간 속에서 보는 자는 해부학자와 같은 눈으로 벽면에 비친 이미지를 검시하고 판독하는 주체이다. 카메라 루시다라는 용어는 프랑스의 철학자 롤랑 바르트가 사용한 용어이다. 바르트는 사진철학을 전개하였는데 복제 이미지를 완벽하게 독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감지하고, 화가들의 모사 도구인 카메라 루시다라는 용어를 빌려 모든 사진이미지에는 말로 표현하기 힘든 정서의 잔여물이 침전돼 있음을 지적하였다. 바르트는 이것을 ‘푼크툼’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저자가 보기에 보는 사람은 이미지를 관망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자신의 희로애락을 투사한다. 무엇이든 보는 자의 정동 반응과 결합해야만 그 의미를 얻는다. 관객 없이 예술작품이, 회화가, 영화가 존재할 수 있을까? 게다가 뉴미디어 시대에 수용자는 이미지와 촉각으로도 교유한다. 이미지를, 그리고 예술을 다중이 자기 것으로 가져와 변형하고 활용하며 체화하는 것이 용이해진 시대이다. 그래서 저자는 뉴미디어의 수용자는 이제 신체와 감각을 동원해 가상 이미지를 체험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경험적 현실의 일부로 전유한다고 본다. 이러한 복제 이미지의 신체화를 표현하기 위해서, 이 책은 몸을 지칭하는 영어 단어 소마soma를 차용해 ‘카메라 소메티카’camera somatica라는 표현을 제안한다.
3. 『카메라 소메티카』 상세한 소개
영화가 회화를 만날 때
천재 화가를 주인공으로 삼은 영화들을 우리는 여럿 알고 있다. ‘빈센트 반 고흐’와 ‘영화’를 함께 검색하면 <열정의 랩소디>(1956), <빈센트>(1990)를 비롯하여 총 여섯 편의 영화가 뜬다. 이런 영화들은 대개 유사한 플롯 진행을 보인다. 천재 화가가 현실적인 고난을 뚫고 창작의 고통을 이겨내며 마침내 역사에 길이 남을 작품을 완성하게 된다. 『카메라 소메티카』는 천재 예술가에게 헌정되는 이러한 관습적 회화 담론의 외부를 탐색하는 영화들을 분석한다.
1장이 분석하는 폴란드 감독 레흐 마예브스키의 영화 <풍차와 십자가>(2011)는 회화 <갈보리 가는 길>(1564)을 활인화한 작품이다. 이 영화는 화가를 비롯한 그림 속 인물에게 대사를 부여하고 움직임을 가미한다. <갈보리 가는 길>을 그린 화가는 브뤼걸이라는 이름으로도 알려진 16세기 네덜란드의 화가 피테르 브뤼헐(1527~1569)이다. 화가 브뤼헐과 그의 작품 <갈보리 가는 길>은 관습적 회화 담론에서 벗어난 작품이다. 그림의 주제와 주인공을 파악하기 어려운 구도를 택하고 있고(부감도법), 예수와 성모마리아가 그림 속 어딘가에 있기는 하지만 그와 함께 무려 500여 명의 보통 사람이 출현한다. 1장은 영화가 그림 속 인물에게 대사를 부여하고 움직임을 가미한다면 원작회화의 내용은 어떻게 변하게 되는지, 거기에서 드러나는 새로움은 무엇인지를 서술한다. 1장뿐 아니라 책 전체에 걸쳐 바쟁의 영화철학과 벤야민의 예술철학, 롤랑 바르트의 사진철학이 참조된다.
고난 끝에 대작을 완성하는 고독한 천재가 아닌 공식으로 예술가를 영화 속에서 재현할 수 있을까? 사회의 모순을 고민하면서 그것을 체화한 화가를 그려볼 수 있을까? 이런 질문은 3장에서 스즈키 세이준의 영화 <유메지>(1991)를 분석하면서 탐구된다. 이 영화는 일본 화가 다케히사 유메지(1884~1934)를 주인공으로 삼는 작품이다. 저자에 따르면 이 영화는 예술적 고뇌가 작품으로 열매를 맺는 주류 화가영화의 목적론적 서사를 뒤튼다는 점에서 주류 화가영화의 관습을 전복하는 작품이다.
동굴벽화 다큐멘터리가 예술에 대해서 던지는 질문
『카메라 소메티카』가 3장에서 분석한 베르너 헤어조크의 <잊혀진 꿈의 동굴>(2010)은 1994년 프랑스에서 발견된 쇼베 동굴의 원시 동굴벽화를 기록한 다큐멘터리이다. 이 작품은 2014년에 국내 개봉하여 많은 관객의 호응을 받았다. 우선 저자는 동굴벽화를 하나의 예술작품으로서 생각해본다. 우리 시대에 예술작품은 작가를 가진다. 작가는 저작권을 소유한다. 그렇다면 선사시대의 예술작품의 작가는 누구인가? 그들은 왜 이런 그림을 그렸을까?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은 쇼베 동굴벽화에는 5천 년의 간격을 두고 겹쳐 그려진 동물의 형상들이 있다는 점이다. 5천 년의 세월을 가로질러서 개작된 작품을 현생 인류가 감상하는 것이다.
저자는 “선사시대의 창작자들은 동굴벽화의 시작과 완성을 한 사람이 주도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으며, 현대예술의 작가주의 및 저작권 개념으로부터 자유로웠다”고 말한다. 언뜻 보면 당연한 서술이지만 이런 시간을 넘나드는 과감한 사고는 예술의 의미, 회화의 의미, 다큐멘터리를 본다는 것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한다. 5천 년의 간격을 두고 인류가 협업한 끝에 만들어진 쇼베동굴의 벽화 앞에서 고독한 천재 예술가는 어떤 존재일지 질문하게 된다. 나아가 저자가 보기에 선사시대의 회화 즉 동굴벽화를 담은 다큐멘터리가 시청자에게 주는 효과는 ‘지식과 교양’에 그치지 않는다. 동굴벽화 작성자들의 체험과 현대인이 뉴미디어 경험을 하며 느끼는 감각을 ‘숭고체험’이라는 개념으로 연결해볼 수 있다.
관람자는 창작 과정의 일부이다
관습적 회화 담론이 강화하는 것 중 하나는 작품과 관람자, 무대와 관객, 예술과 다중 사이에 그어진 견고한 선이다. 저자는 이러한 구도의 발생과 함의, 문제점, 그리고 대안에 대해서 5장과 6장에서 신중하게 고민해 본다. 5장에서는 잼 코헨 감독의 영화 <뮤지엄 아워스>(2012)가 고찰되며, 6장에서는 프랑스의 루브르 미술관과 영국의 내셔널 갤러리를 각각 소재로 삼은 다큐멘터리 <프랑코포니아>Francofonia (2015)와 <내셔널 갤러리>National Gallery(2014)를 분석한다.
먼저 두 남녀의 우연한 만남과 우정, 그리고 기약 없는 이별을 극화한 <뮤지엄 아워스>는 <비포 선라이즈>(1996)나 <원스>(2007)에 비견될 만한 작품이다. <뮤지엄 아워스>는 오스트리아 국립미술관을 배경으로 하며 오스트리아 빈 소재 미술사박물관의 안내원인 요한과 캐나다에서 온 여행객 앤이 주인공이다.
5장은 “부르주아 계급이나 예술가와 거리가 먼 생활인”인 두 주인공의 삶과 생각을 보들레르나 벤야민 같은 ‘근대성’ 이론가들의 견해에 비추어 본다. 저자에 따르면 근대성 이론가들의 생각은 “예술의 생산자와 수용자를 구분하면서 후자를 방향성을 잃은 군중 또는 상품자본의 의도에 순응하는 집단으로 규정”하는 기능을 해왔다. 이는 영화학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근대성 담론에서 민중·도시민·하층계급은 하릴없는 희생자로 표현되고, 지식인·예술가는 도시의 파괴적 속성을 목도하고 민중의 예속성을 증언하는 존재로 자리매김한다.” 저자는 영화 <뮤지엄 아워스>가 이방인이면서 생활인인 요한과 앤을 그리는 방식에서, 대안적인 도시 재현 방식, 예술 재현 방식을 엿볼 수 있다고 본다. 산책자 요한이 바라본 도시는 지배받는 자들의 음울한 초상이 가득한 곳이 아니라, 오히려 “다른 삶의 가능성으로 충만”한 공간이다.
6장은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미술관의 관객은 “수동적인 구경꾼이 아니라 예술작품의 의미를 최종적으로 완성하는 창작 과정의 중요한 일부”라고 말한다. “국립미술관은 통속적 대중문화와 구별되는 중상류 취향의 고급문화를 옹호”해온 공간이었지만 “영화, 텔레비전, 뉴미디어 등 대중매체가 문화상품의 생산과 소비를 주도하는 상황에서 미술관은 고급문화의 성채 자격을 고수하기 어렵게 되었다”는 진단이 이제 널리 수용되고 있다. 누구나 손쉽게 기성 작품을 패러디하고, 파생작품을 만들고, 쇼츠 영상을 쪼개 올리고, 촬영하고 업로드하고 공유하는 시대에 이러한 주장은 설득력 있게 다가온다. “미술관의 전통적인 정체성이 붕괴하는 상황은 예술의 정의, 정전의 자격, 예술 감상자의 태도에 관한 고정관념을 재고”하게 만든다. 이때 다중은 미술관, 제도 미술과 어떤 관계를 맺는 것인지가 6장에서 고찰된다.
작가 소개
박선
영화학자. 서울시립대학교 영문학과의 학부와 대학원에서 영미희곡을 전공하고 미국 캔자스 대학에서 영화학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학위논문에서는 한국 독립영화사를 서구영화의 뉴웨이브 담론과 토착적 민족문화 담론의 변증법적 길항관계로 해석했다. 이후 비서구 영화의 탈식민주의적 담론을 모색하면서도 영미권의 예술적 성취를 곁눈질하는 사유의 분열을 겪어왔다. 영국 선정소설의 효시로 불리는 윌키 콜린스의 Woman in White를 『흰옷을 입은 여인』(토네이도, 2008)으로 완역한 한편, 『한국영화와 테크놀로지』(근간)에 공저자로 참여했다. 영화학 방법론으로서 인지주의 영화학을 모색하며 의식의 분열성을 생산성으로 승화시키고자 노력 중이다. 가족 트라우마의 관점에서 한국의 여성독립영화를 해석하는 영문 저작을 준비 중이다. 한국뉴욕주립대학교 교양학부에서 영상제작과 영화이론을 강의하고 있다.
목 차
프롤로그 6
1장 회화, 무대, 영화 : <풍차와 십자가>와 앙드레 바쟁 영화미학의 유산
그림 속을 걷는 카메라 24
피테르 브뤼헐의 <갈보리 가는 길> 27
회화에서 영화로 34
회화와 영화의 공존 양식 51
확장된 영화 65
2장 회화의 “푼크툼” : 에드워드 호퍼 회화의 서사적 확장으로서 <셜리에 관한 모든 것>
회화, 영화, 활인화에 관한 생각들 70
활인화 서사와 해석의 빈곤 78
연기예술가의 사명감 83
감정의 구조들 93
자아라는 극장 105
회화의 “푼크툼” 116
3장 숭고의 재매개 : 베르너 헤어조크의 <잊혀진 꿈의 동굴>과 다큐멘터리의 숭고미 문제
동굴벽화라는 기호 120
완벽한 타임캡슐 ― 현전성의 재매개 126
“이 심장의 고동 소리는 누구의 것인가?” ― 역사의 재매개 132
의식의 스펙트럼 ― 숭고의 재매개 141
숭고 체험과 다큐멘터리의 본질 155
4장 경계에 선 예술가의 영화적 초상 : 스즈키 세이준의 <유메지>
화가영화 속의 화가들 162
<유메지>의 아방가르드 스타일 166
얼굴을 가린 여인들 176
와키야 또는 이름 없는 자 190
창작 불능의 기록으로서 유메지의 여인화 201
5장 아래로부터의 근대성 : 영화 <뮤지엄 아워스> 분석을 통한 근대성 테제 비판
서사세계와 현실세계의 상호조응 210
근대성의 캐릭터들 ― 이방인, 소요객, 군중 214
노동계급의 소요객 225
근대성 테제 비판 237
아래로부터의 근대성 241
6장 미술관 서사의 영화적 재매개 : <프랑코포니아>와 <내셔널 갤러리>
영화가 표상하는 미술관 249
몽타주로서의 미술관 253
예술의 영속적 자기반영 267
탈계몽주의의 분화된 시선들 279
에필로그 283
영화 작품 안내 288
참고문헌 290
인명 찾아보기 298
용어 찾아보기 302
역자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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