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 출판사서평
인생이 농담을 하면 인간은 병들거나 술을 마신다…
지독한 생에 거꾸러진 주정뱅이에게 건네는 쓸쓸한 인사
“산다는 게 참 끔찍하다. 그렇지 않니?”(8면)라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소설 「봄밤」에는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 두 남녀가 등장한다. 스무살에 쇳일을 시작해 서른셋에 일으킨 사업으로 제법 돈을 벌지만 곧 부도를 맞아 아내에게 버림받고 서른아홉에 신용불량자가 돼 노숙생활까지 하게 된 수환 교사생활을 하다 결혼하지만 곧 이혼하고 아들을 빼앗긴 뒤부터 술을 마시기 시작한 영경. 술 때문에 생활이 마비돼 직장도 그만둘 수밖에 없었던 영경 앞에 수환이 나타났을 때 영경은 그 순간을 이렇게 회상한다.
그가 조용히 등을 내밀어 그녀를 업었을 때 그녀는 취한 와중에도 자신에게 돌아올 행운의 몫이 아직 남아 있었다는 사실에 놀라고 의아해했다.(28면)
더한 불행이 있을까 싶은 그들에게 치명적인 병까지 찾아오고 오로지 서로에게 서로만 남은 상태로 그들은 죽음 앞에 예정된 이별과 가차없는 삶을 사랑의 형식으로 견뎌낸다.
인생에 결코 지지 않은 인물은 「이모」에도 등장한다. 안산 외곽의 오래된 소형 아파트에서 혼자 살고 있는 ‘이모’의 집에는 텔레비전도 컴퓨터도 휴대전화도 없다. 착취했다고밖에는 말할 수 없는 가족 곁을 완전히 떠나기 전 5년간 악착같이 모은 1억 5천만원에서 1억은 아파트 보증금으로 남은 5천만원으로는 그 돈이 떨어질 때까지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살겠다 결심한 ‘이모’가 췌장암으로 죽기 전까지 살아간 2년의 삶은 이런 것이다.
간단히 아침을 만들어 먹고 씻고 열시쯤 가방을 메고 도서관에 간다. 필기도구와 지갑 열쇠가 든 가방에 보리차를 담은 물병을 챙긴다. (…) 도서관에 가면 일단 서가에서 책을 고르고 자리에 앉아 하루 종일 그 책만 읽는 게 그녀의 방식이었다. (…) 오후 두시쯤 집에 돌아와 점심을 만들어 먹고 다시 도서관에 가서 문을 닫는 여섯시까지 책을 읽는다. 책을 다 못 읽으면 대출해 가지고 와서 저녁을 만들어 먹고 잠들기 전까지 마저 읽는다.(83~84면)
‘이모’가 처음부터 이렇듯 고독하고도 자유로운 삶을 누렸던 것은 아니었다. “그날은 시작부터 이상한 날이었다”(90면)는 말을 기점으로 이모는 인생을 바꿔놓은 겨울밤의 한 장면에 대해 말한다. ‘이모’가 풀어놓는 이야기는 눈앞에 드리워진 장막을 슬쩍 들추고 그 안을 들여다보는 듯한 단편소설만이 보여줄 수 있는 어떤 찰나의 진실을 예민한 관찰자의 언어로 생생하게 보여준다.
관찰자적 면모는 세사람의 짧은 여행을 다룬 「삼인행」에서도 잘 드러난다. ‘규’와 ‘주란’ 부부의 하룻밤 이별여행에 친구 ‘훈’이 가세하며 시작되는 이 소설은 그들이 맞닥뜨리는 에피소드와 일견 무의미해 보이는 세사람의 언쟁을 고스란히 중계한다. 맛있는 밥을 먹는 것만이 지상목표라는 듯 먼 길을 돌고 돌며 끝을 유예하는 듯한 그들 여행을 초점화자 ‘훈’을 통해 들여다보게 되는데 그 시선을 따라가다보면 이 소설이 보여주는 진실의 얼굴을 슬쩍 맞닥뜨릴 수 있다.
권여선은 또한 신경증자를 그려내는 데도 탁월한 솜씨를 발휘한다. 「역광」에는 식사 후 커피잔에 소주를 부어 마시는 알코올중독자로서 불안장애를 갖고 있을 것으로 짐작되는 신예소설가 ‘그녀’가 등장한다. 이야기를 끌고 오던 인물과 사건이 모두 애초 없었던 일이라는 듯 소설은 끝을 맺는데 이 작품에 등장하는 주요인물의 이름(‘위현僞現’)처럼 ‘모든 것이 거짓으로 나타났을 뿐’이라는 듯 이 소설의 결말은 ‘그녀’의 불안정한 내면을 보여준다.
이 책에는 술 마시는 장면이 자주 등장한다. 이유는 제각각이지만 그들은 습관적으로 혹은 무언가를 견디기 위해 술을 마신다. 아이를 빼앗기고 술을 마시다 알코올중독이 되어버린 「봄밤」의 영경이 술에 취한 채 김수영의 시를 큰 소리로 외는 장면은 그중 단연 압권이다. 바닥을 맞닥뜨린 자의 절망을 고통스럽게 보여주며 취기 어린 인물의 행동을 복기해내는 권여선의 언어는 곧 허물어질 것 같은 ‘주정뱅이’의 아슬아슬한 내면을 서늘하게 포착한다.
권여선 소설만이 보여줄 수 있는 비극적 기품
「카메라」에는 우연이라고밖에는 말할 수 없는 비극이 등장한다. ‘문정’은 연인과 사소하게 다투고 헤어진 이후 그(‘관주’)와 연락이 끊어져 당연히 연애가 끝났다고 받아들인 채 2년을 살았다. 오랜만에 만나게 된 그의 누나(‘관희’)를 통해 전모를 알게 되지만 문정과 관주 관희를 둘러싼 그 불행은 부당하게 느껴진다 해도 누구를 탓할 수조차 없는 우연한 사고일 뿐이다.
인간은 그 누구라도 벼락처럼 떨어지는 불행에 대비할 수 없다. 인생에는 누구의 탓이라고 책임을 전가할 수조차 없는 비극이 산재한다. 그래서 어떤 비극은 마치 인생이 던지는 악의적인 농담처럼 느껴지기도 하는 것이다. 「층」에는 “이게 내 탓은 아니잖아요?”(224면)라고 묻는 인물이 등장한다. 그 물음에 대구를 이루듯 이 작품은 “내가 무슨 도움이 되겠어요?”(242면)라는 말로 끝을 맺지만 소설은 그리고 문학은 분명 도움이 된다. 모든 것을 잃은 이들은 서로를 위로할 수 있다. 마치 「봄밤」의 영경과 수환처럼. 이 책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그렇게 꽉 쥐지 말아요 문정씨. 놓아야 살 수 있어요.”(135면)라는 말로 상대를 위로할 때 그 위로는 이 소설을 펼치는 우리에게도 건네진다. 마치 “안녕 주정뱅이” 하고 담담한 듯 건네는 쓸쓸한 인사처럼 말이다.
▣ 작가 소개
저 : 권여선
1965년 경북 안동 출생. 서울대 국어국문학과와 같은 학교 대학원을 졸업하고 인하대 대학원에서 국문학과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1996년 장편소설 『푸르른 틈새』로 제2회 상상문학상을 수상하면서 등단한 이래 솔직하고 거침없는 목소리로 자신의 상처와 일상의 균열을 해부하는 개성있는 작품세계로 주목받고 있다. 장편소설 『푸르른 틈새』와 소설집 『처녀치마』가 있다. 2007년 오영수문학상을 수상했다. 2008년도 제32회 이상문학상 수상작인 사랑을 믿다는 남녀의 사랑에 대한 감정과 그 기복을 두 겹의 이야기 속에 감추어 묘사하여 호평을 얻었다.
▣ 주요 목차
봄밤 / 삼인행 / 이모 / 카메라 / 역광 / 실내화 한켤레 / 층 / 해설│신형철 / 작가의 말 / 수록작품 발표지면
인생이 농담을 하면 인간은 병들거나 술을 마신다…
지독한 생에 거꾸러진 주정뱅이에게 건네는 쓸쓸한 인사
“산다는 게 참 끔찍하다. 그렇지 않니?”(8면)라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소설 「봄밤」에는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 두 남녀가 등장한다. 스무살에 쇳일을 시작해 서른셋에 일으킨 사업으로 제법 돈을 벌지만 곧 부도를 맞아 아내에게 버림받고 서른아홉에 신용불량자가 돼 노숙생활까지 하게 된 수환 교사생활을 하다 결혼하지만 곧 이혼하고 아들을 빼앗긴 뒤부터 술을 마시기 시작한 영경. 술 때문에 생활이 마비돼 직장도 그만둘 수밖에 없었던 영경 앞에 수환이 나타났을 때 영경은 그 순간을 이렇게 회상한다.
그가 조용히 등을 내밀어 그녀를 업었을 때 그녀는 취한 와중에도 자신에게 돌아올 행운의 몫이 아직 남아 있었다는 사실에 놀라고 의아해했다.(28면)
더한 불행이 있을까 싶은 그들에게 치명적인 병까지 찾아오고 오로지 서로에게 서로만 남은 상태로 그들은 죽음 앞에 예정된 이별과 가차없는 삶을 사랑의 형식으로 견뎌낸다.
인생에 결코 지지 않은 인물은 「이모」에도 등장한다. 안산 외곽의 오래된 소형 아파트에서 혼자 살고 있는 ‘이모’의 집에는 텔레비전도 컴퓨터도 휴대전화도 없다. 착취했다고밖에는 말할 수 없는 가족 곁을 완전히 떠나기 전 5년간 악착같이 모은 1억 5천만원에서 1억은 아파트 보증금으로 남은 5천만원으로는 그 돈이 떨어질 때까지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살겠다 결심한 ‘이모’가 췌장암으로 죽기 전까지 살아간 2년의 삶은 이런 것이다.
간단히 아침을 만들어 먹고 씻고 열시쯤 가방을 메고 도서관에 간다. 필기도구와 지갑 열쇠가 든 가방에 보리차를 담은 물병을 챙긴다. (…) 도서관에 가면 일단 서가에서 책을 고르고 자리에 앉아 하루 종일 그 책만 읽는 게 그녀의 방식이었다. (…) 오후 두시쯤 집에 돌아와 점심을 만들어 먹고 다시 도서관에 가서 문을 닫는 여섯시까지 책을 읽는다. 책을 다 못 읽으면 대출해 가지고 와서 저녁을 만들어 먹고 잠들기 전까지 마저 읽는다.(83~84면)
‘이모’가 처음부터 이렇듯 고독하고도 자유로운 삶을 누렸던 것은 아니었다. “그날은 시작부터 이상한 날이었다”(90면)는 말을 기점으로 이모는 인생을 바꿔놓은 겨울밤의 한 장면에 대해 말한다. ‘이모’가 풀어놓는 이야기는 눈앞에 드리워진 장막을 슬쩍 들추고 그 안을 들여다보는 듯한 단편소설만이 보여줄 수 있는 어떤 찰나의 진실을 예민한 관찰자의 언어로 생생하게 보여준다.
관찰자적 면모는 세사람의 짧은 여행을 다룬 「삼인행」에서도 잘 드러난다. ‘규’와 ‘주란’ 부부의 하룻밤 이별여행에 친구 ‘훈’이 가세하며 시작되는 이 소설은 그들이 맞닥뜨리는 에피소드와 일견 무의미해 보이는 세사람의 언쟁을 고스란히 중계한다. 맛있는 밥을 먹는 것만이 지상목표라는 듯 먼 길을 돌고 돌며 끝을 유예하는 듯한 그들 여행을 초점화자 ‘훈’을 통해 들여다보게 되는데 그 시선을 따라가다보면 이 소설이 보여주는 진실의 얼굴을 슬쩍 맞닥뜨릴 수 있다.
권여선은 또한 신경증자를 그려내는 데도 탁월한 솜씨를 발휘한다. 「역광」에는 식사 후 커피잔에 소주를 부어 마시는 알코올중독자로서 불안장애를 갖고 있을 것으로 짐작되는 신예소설가 ‘그녀’가 등장한다. 이야기를 끌고 오던 인물과 사건이 모두 애초 없었던 일이라는 듯 소설은 끝을 맺는데 이 작품에 등장하는 주요인물의 이름(‘위현僞現’)처럼 ‘모든 것이 거짓으로 나타났을 뿐’이라는 듯 이 소설의 결말은 ‘그녀’의 불안정한 내면을 보여준다.
이 책에는 술 마시는 장면이 자주 등장한다. 이유는 제각각이지만 그들은 습관적으로 혹은 무언가를 견디기 위해 술을 마신다. 아이를 빼앗기고 술을 마시다 알코올중독이 되어버린 「봄밤」의 영경이 술에 취한 채 김수영의 시를 큰 소리로 외는 장면은 그중 단연 압권이다. 바닥을 맞닥뜨린 자의 절망을 고통스럽게 보여주며 취기 어린 인물의 행동을 복기해내는 권여선의 언어는 곧 허물어질 것 같은 ‘주정뱅이’의 아슬아슬한 내면을 서늘하게 포착한다.
권여선 소설만이 보여줄 수 있는 비극적 기품
「카메라」에는 우연이라고밖에는 말할 수 없는 비극이 등장한다. ‘문정’은 연인과 사소하게 다투고 헤어진 이후 그(‘관주’)와 연락이 끊어져 당연히 연애가 끝났다고 받아들인 채 2년을 살았다. 오랜만에 만나게 된 그의 누나(‘관희’)를 통해 전모를 알게 되지만 문정과 관주 관희를 둘러싼 그 불행은 부당하게 느껴진다 해도 누구를 탓할 수조차 없는 우연한 사고일 뿐이다.
인간은 그 누구라도 벼락처럼 떨어지는 불행에 대비할 수 없다. 인생에는 누구의 탓이라고 책임을 전가할 수조차 없는 비극이 산재한다. 그래서 어떤 비극은 마치 인생이 던지는 악의적인 농담처럼 느껴지기도 하는 것이다. 「층」에는 “이게 내 탓은 아니잖아요?”(224면)라고 묻는 인물이 등장한다. 그 물음에 대구를 이루듯 이 작품은 “내가 무슨 도움이 되겠어요?”(242면)라는 말로 끝을 맺지만 소설은 그리고 문학은 분명 도움이 된다. 모든 것을 잃은 이들은 서로를 위로할 수 있다. 마치 「봄밤」의 영경과 수환처럼. 이 책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그렇게 꽉 쥐지 말아요 문정씨. 놓아야 살 수 있어요.”(135면)라는 말로 상대를 위로할 때 그 위로는 이 소설을 펼치는 우리에게도 건네진다. 마치 “안녕 주정뱅이” 하고 담담한 듯 건네는 쓸쓸한 인사처럼 말이다.
▣ 작가 소개
저 : 권여선
1965년 경북 안동 출생. 서울대 국어국문학과와 같은 학교 대학원을 졸업하고 인하대 대학원에서 국문학과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1996년 장편소설 『푸르른 틈새』로 제2회 상상문학상을 수상하면서 등단한 이래 솔직하고 거침없는 목소리로 자신의 상처와 일상의 균열을 해부하는 개성있는 작품세계로 주목받고 있다. 장편소설 『푸르른 틈새』와 소설집 『처녀치마』가 있다. 2007년 오영수문학상을 수상했다. 2008년도 제32회 이상문학상 수상작인 사랑을 믿다는 남녀의 사랑에 대한 감정과 그 기복을 두 겹의 이야기 속에 감추어 묘사하여 호평을 얻었다.
▣ 주요 목차
봄밤 / 삼인행 / 이모 / 카메라 / 역광 / 실내화 한켤레 / 층 / 해설│신형철 / 작가의 말 / 수록작품 발표지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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