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백범 탄생 140주년, 그의 숨결까지 구현하다!
“백범은 자식에게 물려줄 유일한 유산으로 『백범일지』를 생각했고, 피난 중에도 몸에 지니고 다녔으며, 기회 있을 때마다 수정하고 보완했다. 군데군데 떨어져 나간 글자를 등사본이나 필사본으로 보완하는 작업은 마치 떨어진 살점을 찾아 꿰매는 것 같았다. ‘겨자씨 안에 수미산이 있다’ 했던가. 한 글자의 수정이나 보완이 때로는 백범의 정신세계로 들어가는 비밀 열쇠와 같았다.”
광복 71주년, 우리는 여태껏 『백범일지』 정본(定本)이 없었다.
정본(定本)의 사전적 의미는 “고전의 여러 이본 가운데, 검토하고 교정하여 원본과 가장 가깝다고 판단한, 표준이 될 만한 책”이다. 이 책에 ‘정본’이라는 명칭을 감히 붙인 것은 바로 이러한 뜻에서이다. 그렇다면 그동안 나온 숱한 『백범일지』는 뭐란 말인가? 1994년에 『백범일지』 친필 원본이 공개되고 동시에 이 원본을 영인한 책이 출간되었다. 그리고 원본에 최소한의 교정을 한 직해본이 1995년에 출간되었고, 2002년에는 이 원본을 탈초한 책이 출간되었으며, 이후 각주가 있는 주해본 등이 연이어 출간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정본이라 부르는 이유는 친필 원본 자체가 판독이 어려운 부분이 많고 오탈자가 심한데, 최초 탈초한 책은 이들 오탈자와 판독이 불분명한 부분을 교감하지 않은 채 탈초만 하였고, 이후 직해본과 주해본이 이 잘못 탈초된 책을 바탕으로 집필되고 연구되었기 때문이다.
『백범일지』는 원본 이외에 등사본과 필사본, 그리고 백범 생전에 출간된 국사원본을 주요 판본으로 들 수 있다. 등사본은 1929년에 엄항섭이 등사하여 미국으로 보낸 것으로 현재 미국 콜롬비아대학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필사본은 1948년 초 백범의 측근이 상·하권을 필사한 것으로 현재 개인이 소장하고 있다. 국사원본은 백범 생전인 1947년에 국사원에서 출간된 최초 출간본으로 한글판으로 윤문한 것인데 이광수가 윤문 작업에 참여했다. 『백범일지』 원본은 등사본이 만들어지고 필사본이 만들어지는 와중에도 백범 스스로 여러 번에 걸쳐 수정하고 보완하고 삭제하기도 하였다. 따라서 최초 원본과 이후 보완되면서 변화한 과정은 등사본과 필사본을 통해 원래의 모습을 추적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판본들을 활용하면 그동안 오독하거나 잘못 이해하고 있던 부분들을 해결할 수 있다.
이 책의 탈초·교감자인 도진순 교수는 1994년에 백범 선생의 영식 고(故) 김신(金信) 장군으로부터 『백범일지』의 원본 사본을 기증받았고, 당시 한 차례 탈초한 바 있다. 하지만 연구가 미진하다고 판한하여 우선 주해본을 1997년에 출간하고, 이후 20년 가까이 『백범일지』 연구에 매진했으며, 이제 결정판이라 부를 만한 ‘정본’ 『백범일지』를 세상에 내놓는다.
우리나라가 해방된 지 올해로 71주년, 백범 선생이 탄생하신 지 140년이 흘렀다. 어쩌면 이제야 내놓는 『정본定本 백범일지』는 만시지탄(晩時之歎)일지 모른다. 하지만, 요즘 항간에서 벌어지는 건국절 논란을 지켜보며, 백범의 정신과 『백범일지』가 말하는 우리 민족의 길이 여전히 유효함을 느낀다. 아마도 백범 선생이라면 이념적 논리, 경제적 논리 등 어떠한 이유를 대더라도 민족의 분열, 국민의 분열만은 결코 원치 않으셨을 것이다.
『정본定本 백범일지』는 다르다!
수고(手槁)로 이루어진 『백범일지』는 숙독하지 않으면 맥락을 종잡을 수 없는 경우가 허다하다. 특히 문장의 전후 비교로 부족한 부분을 보완하고, 그것을 백범의 심중(心中)과 연결해 보아야 비로소 글이 온전한 생명력을 얻게 된다. 『백범일지』 원본에는 군데군데 지워진 부분이 있고, 4면 여백을 이용해 추가한 글들, 따로 별지를 써서 보완한 부분도 적지 않다. 이러한 부분들이 탈초되고 번역되는 과정에서 빠지거나 잘못 번역되는 경우가 많다. 이 책은 탈초 과정에서 빠트린 부분을 제자리에 집어넣고, 번역의 오류를 문맥에 맞게 바로잡았으며, 백범의 집필 당시 오류 또한 주석을 통해 바로잡았다. 관련 내용은 이 책의 해제인 ‘『백범일지』 조직 검사: 기억과 망각, 오독과 정독’에 자세히 설명되어 있다. 도진순 교수는 이미 주해본 『백범일지』(1997, 돌베개)에서 상당 부분의 오역과 오독을 지적하고 주석으로 설명했지만, 이 책을 통해 주해본 출간 이후의 연구 성과까지 모두 반영하였다.
★ 백범은 어떤 부분을 수정하고, 삭제했을까?
『백범일지』 상권은 대부분 녹색선 450자(30×15) 원고지에 펜으로 쓰고 펜 혹은 붓으로 수정·보완했다. 상권 마지막 줄에는 1년 2개월 걸려 1929년 5월 3일에 상권 글쓰기를 마쳤다는 기록이 있다. 1929년은 54세의 백범이 한창 상해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엄혹한 시절이었다. 그러니 1년 남짓 걸려 출생부터 당시까지의 소경력을 급하게 써내려간 글들에는 어그러진 문맥과 사실 기록의 오류가 많았을 것이다. 그래서 탈고 이후에도 백범은 수시로 글을 수정하고 보완하고 삭제했다. 집필하고 바로 수정한 부분도 있지만, 특히 상권에서 붓으로 수정한 부분은 대부분 해방 이후의 수정이라 탈고 직후 만들어진 등사본에는 반영되어 있지 않다. 가령 펜으로 쓴 1차 원본의 ‘아부님’은 해방 이후 붓으로 ‘父親’으로 수정됐다. 백범의 시초 집필에서 출발하여 수정·삭제·보완한 것을 추적하는 작업은 마치 백범의 뇌를 시기별 단층사진으로 보는 것과 같다.
― 백범은 유독 어머님에 대해서 각별하게 내용을 보완했는데, 해방 이후 수정한 상권에서는 어머님과 관련하여 1차 원본에서 오히려 삭제한 부분이 있다.
“母親 年歲가 겨우 十七이라, 恒常 내가 죽어시면 조켓다는 苦歎을 하섯다 한다.”
여기서 ‘연세(年歲)가 겨우 십칠(十七)’과 ‘내가 죽었으면 좋겠다는 고탄(苦歎)’ 사이에 인과관계가 잘 연결되지 않는다. 또한 여기서 ‘내가’가 아들인 백범을 가리키는지 어머님 자신인지도 분명치 않다. 그런데 등사본을 살펴보면 이 사이에 “子女 養育에 職責感이 不足하야”가 들어 있다. 그리하여 전문을 현대어로 풀면 ‘어머님의 나이 17세 때라, 자녀 양육에 직책감이 부족하여, 항상 내가 죽었으면 좋겠다고 고탄(苦歎)을 하였다고 한다’로 전체의 문맥과 인과관계가 부드럽게 이어진다. 이것이 1차 집필 당시의 모습이다. 하지만 이러한 표현이 어머님에 대한 불효라고 생각하셨는지 해방 이후 원본에서는 이 부분을 삭제하였다.
― 『백범일지』 하권은 상권에 비해 수정과 보완이 거의 없지만, 대대적으로 절삭된 부분이 특별하게 한 군데 집중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원본뿐 아니라 필사본에서도 해당 부분을 찾아 일일이 지웠다. 하권에서 대대적으로 절삭된 부분은 안중근 의사의 동생 안공근 관련 기록이다. 『백범일지』에 백범과 안공근의 관계가 서로 어긋나는 것을 짐작케 하는 구절은 남아 있지만, 삭제된 부분처럼 노골적인 대립이 서술된 부분은 없다. 그래서 이 절삭 부분은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1895년 2월, 20세의 동학 접주 백범(김창수)은 황해도 신천의 안태훈 진사에게 몸을 의탁함으로써 안중근 의사 집안과 인연이 시작되었다. 안 의사의 동생인 안정근의 딸 안미생은 백범의 큰며느리였다. 하지만 이러한 아름다운 인연도 결국 비극적으로 끝나게 되는데, 그 핵심에 안 의사의 막내동생인 안공근 문제가 있었다. 1932년 백범이 이봉창·윤봉길 의거를 주도할 때까지만 해도 안공근은 한인애국단의 단장으로서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그러나 1937년 7월 중일전쟁 이후 임시정부가 남경을 떠날 즈음부터 서로 관계가 어긋나기 시작하여, 중경 도착 직후는 거의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악화되었다. 이런 중에 안공근이 갑자기 행방불명되었는데, 바로 안공근의 실종 사건 관련 대목이 대폭 절삭된 것이다(삭제 부분에 대한 해독은 이 책 ‘해제’ 참조).
★ 백범의 오류를 바로잡다
『백범일지』는 일기가 아니라 일지다. 그렇기 때문에 연월일에 상당히 많은 착오가 보인다. 백범 자신도 정확한 연월일이 기억나지 않아 어머님인 곽낙원 여사에게 일일이 물어서 기록했다고 일지에서 밝히고 있다. 백범의 오류 중 이러한 연월일의 착오를 예로 들면 다음과 같은 경우이다.
― 백범은 1896년, 21세의 나이로 치하포에서 일본인을 척살하고, 해주감영에 체포되었다가 인천으로 이송되는데, 날짜를 적은 대목에서 오류가 발견된다.
“七月 初에 仁川으로 移囚가 되어 仁川 監理營으로 四五名의 巡檢이 海州로 와서 領去한다.”
규장각 자료에 의하면 백범의 인천 압송은 음력 7월 7일(양력 8월 15일) 경으로 백범이 기록한 7월 초가 맞다. 이제 해주감영에서 인천으로 이송되는 기록을 보자.
“陸行은 羅津浦까지 끗나고 배를 탓다. 丙申 七月 二十五日 月色이 업시 天地가 캄캄하고 물조차 소래뿐이다.”
해주감영을 출발해 나진포 도착, 다시 배를 타고 인천으로 가는 여정을 기록한 부분인데, 날짜를 기록한 부분이 지워져 있고, 대신 상단 여백에 ‘병신(丙申) 7월 25일 월색(月色)이 없이’로 수정되어 있다(밑줄 부분). 해주감영에서 나진포까지는 거리가 얼마 되지 않는다. 그런데 날짜의 간극이 상당하다. 어찌된 일일까?
도진순 교수의 설명에 따르면, 백범이 인천으로 이송되던 날 밤은 달빛도 없이 캄캄하고 물조차 소리만 들리는 그런 밤이었는데, 배 위에서 어머님이 백범에게 투신자살을 제안했고, 백범은 결코 죽지 않겠다며 어머님을 만류했다. 그러므로 백범에게는 배를 타고 건넌 날짜보다 달빛도 없는 캄캄한 밤이 뇌리에 더 또렷하게 남았을 것이다. 따라서 달빛 없는 그믐께인 7월 25일로 생각하고 처음 집필을 수정했다는 것이다.
도 교수의 설명을 뒷받침하는 자료로, 1차 집필 본문의 지워진 부분을 자세히 살펴보면, “初生달이 어느새 西天에 가고 深夜” 정도로 복원할 수 있다. 즉 초저녁에는 초승달이 있다가 지고 한밤중이 되자 캄캄했다는 것이다. 백범은 인천으로 압송되던 날 밤바다에 달이 없고 캄캄하여 그믐께로 수정했지만, 사실은 초순으로 초저녁에 상현달이 있었고, 그것이 지고 난 이후 캄캄한 한밤중에 강화를 거쳐 인천에 도착한 것이다. 백범의 처음 집필이 맞았다. 그러나 현재 여러 『백범일지』 주해본과 번역본에는 이것에 관한 설명 없이 7월 25일로 기록하고 있다.
★ 잘못 읽어 온 『백범일지』를 바로잡다
『정본 백범일지』가 반드시 필요한 이유는 탈초과 교감이 정밀하게 이루어진 원본의 탈초본이 있어야, 연구자들이 이 책을 저본으로 하여 연구·번역을 하고, 이를 통해 오역(誤譯)과 오독(誤讀) 없는 책을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원본이 알아보기 힘든 수고로 쓰인데다가, 탈초 과정에서 잘못된 부분까지 여태껏 바로잡히지 않고 그대로 이어져 온 것들이 너무나 많다.
― 백범이 결혼할 당시 부인 최준례 여사의 나이는, 원본에는 연도 없이 나이만 “當時 十■八歲인데”로 되어 있다. ‘十’ 다음에 1차 집필한 한 글자를 까맣게(■) 지우고 ‘八’로 수정하여 정확을 기하고자 한 흔적이 남아 있다. 최준례 여사의 비문을 보면 단기 4222년(ㄹㄴㄴㄴ해), 즉 1889년에 태어났다. 그러므로 최준례 여사가 18세이면 1906년이고, 당시 백범은 31세이다. 즉 1906년 백범과 최준례 여사가 결혼했다. 그런데 『백범일지』에는 이 부분이 1905년 을사늑약 이전에 기술되어 있다. 그리하여 대부분의 출간본들이 「연표」에서 『백범일지』 본문 서술의 순서에 따라 1904년에 백범이 결혼한 것으로 기술했고, 1904년을 기준으로 결혼 당시 최준례 여사의 나이를 ‘28청춘’(16세)으로 서술한 추도사도 있다. 이러한 오류는 수정되어야 한다.
― 1894년 말 백범은 황해도 동학군의 ‘팔봉 접주’로 해주성 공격에 선봉으로 나서지만 실패하고, 해주 서쪽 80리 후방인 회학동으로 후퇴했다. 이때 정덕현이라는 사람이 찾아와 백범에게 동학군의 5개 방책을 제시하는데, 제1조가 군기에 관한 것이다. 원문은 다음과 같다.
“軍紀正肅(兵卒를 對하여도 互相拜 互相敬語 等을 廢止할 일)”
이 구절은 동학군이 ‘평등주의’ 때문에 군기가 문란해진 것을 보고, 정덕현이 상하의 엄격한 군기와 질서를 세울 것을 강조한 것으로, 당시 동학 농민부대의 군율과 기강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부분이다. 그런데 국사원본에서는 이 부분을 “1. 군기를 정숙히 하되 비록 병졸에 대하더라도 하대하지 아니하고 경어를 쓸 것”으로 독해하고, 이후 거의 모든 책들이 이것을 따랐다. 이것은 병졸에게도 경어를 쓰는 것이 좋다는 생각에서 비롯되기도 했겠지만, 어쩌면 ‘廢’(폐)자가 초서로 적혀 있어 잘못 읽은 탓도 있을 듯하다.
― 하권에서는 중국 동북 삼성의 정세를 소개하면서, “우리 獨立軍이 벌서 影絶되엿을 터이나” “今日까지, 오히려 金一聲 等 武裝部隊가 依然히 山岳地帶를 依據하고 鴨綠 豆滿을 越하여 倭兵과 戰爭되는 데는”이라는 구절이 있다. 그런데 인명 ‘김일’(金一) 다음의 한 글자를 필사본은 ‘정’(靜)으로, 직해본은 ‘택’(擇)으로 해독했다. 하지만 이 글씨를 확대해 보면 성(聲)으로 읽는 것이 맞다. 김일성(金一聲), 바로 북한의 김일성(金日成)과 동일 인물이다. 백범은 해방 이후 1948년 남북연석회의를 통해 북의 김일성과 만나 회담했는데, 일제 강점기에도 만주 지역의 김일성을 주목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1940년대 김구는 임시정부의 주석으로서 항일독립운동의 확대와 연대를 위해 동북 지방의 김일성 빨치산 부대와 합작을 시도했다. 백범의 측근 안우생의 회고에 따르면, 이충모가 백범의 신임장을 휴대하고 김일성을 찾아 중경을 출발하여 산서성 태원까지 이르렀으나 중도에서 8·15광복을 맞이하게 되어 성사되진 못했다고 한다. 일제 말기 김일성과의 합작은 성사되지 못했지만, 이러한 경험이 1948년 백범이 김일성과 김두봉에게 서신을 보내 남북합작을 추진하는 배경이 되었다. 그 단서가 되는 인명이 『백범일지』에 ‘김일성’(金一聲)으로 남아 있는 것이다. 필사본과 직해본의 오류 이후 거의 대부분의 책들이 이 번역을 따랐고, 도진순 교수의 주해본 『백범일지』가 나옴으로써 비로소 김일성임이 밝혀졌다.
― 백범은 치하포 사건으로 1896년 7월에 인천감리서 감옥에 수감되었다가, 1898년 3월에 탈옥한다. 당시 삼남 지방으로 피신하며 강경포의 공종렬 집에서 하룻밤을 묵게 되었는데 이때의 기록에서 오역들이 발견된다. 본문은 다음과 같다.
“‘간새벽에 갯가에 얼인 아희 우는 소리가 들니드니, 소리가 끊어진지 오랫으니, 그 아희는 죽은 거시라’고 야단 일다. 나는 이 말을 들으매 天地가 아득하다. 오늘날殺人을 하고 가는 길이로구나.”
사연은, 공종렬의 누님과 그 집의 하인이 관계를 맺었고, 누님은 아이를 출산하다 그만 죽고 말았다. 공종렬이 그 하인과 갓난아이를 집에서 쫓아내려 하지만 하인이 말을 듣지 않았고, 이에 백범에게 사정을 말하여 백범이 대신 하인을 꾸짖고 협박해 그 하인이 새벽에 집을 떠나게 된 것이다. 하지만 하인은 떠나면서 갓난아이를 강변에 버리고 감으로써 결국 아이가 죽게 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여기서 위 원문의 밑줄 친 부분을 거의 모든 『백범일지』에서 ‘오늘날∨살인’으로 띄어쓰기하여 ‘오늘날 살인을 했다’ 또는 ‘오늘 살인을 했다’라고 독해한다. 하지만, 시대를 지칭하는 ‘오늘날’은 갓난아이가 죽은 ‘간새벽’이란 구체적인 시점과 어울리지 않는다. 이 대목은 ‘날살인’으로 읽어야 의미가 온전하다. 즉 ‘오늘∨날살인’으로 띄어쓰기해야 한다. 여기서 ‘날-’은 ‘날강도’ ‘날건달’ 등의 접두사 ‘날’과 같은 의미로, ‘날살인’은 일반 살인보다 더 질이 나쁜 살인으로, 무고한 어린아이를 죽게 만든 회한이 반영된 단어라 할 수 있다.
이 책의 구성
# 권두 사진을 배치하여 『백범일지』의 여러 이본 표지 및 원본, 필사본, 등사본 등의 판본 모습을 보여준다. 또한 상·하권의 전형적인 모습과 삽입구를 넣을 때의 규칙, 목차를 다는 방식, 특이한 수정과 재수정의 모습, 후면이나 별지를 통해 보완한 부분 등을 사진을 통해 자세히 설명한다.
# 200매에 달하는 긴 해제 글인 ‘『백범일지』 조직 검사: 기억과 망각, 오독과 정독’을 통해 『백범일지』에 대한 그간의 논란과 오해를 규명하고, 등사본과 필사본 등 여러 판본을 자세히 설명하는 한편, 상·하권의 형식과 내용 수정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자세히 다루었다. 또한 『백범일지』에 풍부하게 담겨 있는 옛말과 방언에 대해서도 설명함으로써, 『백범일지』의 또 다른 가치를 보여 준다.
# 이 책은 백범의 친필로 이루어진 상·하권만을 다루고 있다. 해방 이후의 ‘후속편’ 기록과 ‘나의 소원’은 백범의 친필이 아닌데다 비교적 정서되고 있고, 또한 국사원본으로 활자화되어 해독하기에 용이하므로, 이 책에서는 다루지 않았다.
작가 소개
지은이 : 김구
1876년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났고 본명은 김창수(金昌洙)이다. 서너 살 무렵 심한 천연두를 앓아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고, 《통감》과 《사략》, 병서를 즐겨 읽었다. 15세에 정문재의 서당에서 본격적으로 한학 수업을 받고, 조선 왕조 최후의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동학과 위정척사사상, 의병운동 등에 참여했으며,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나라를 살리고 새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 교육운동과 구국운동에 앞장섰다. 1911년 안악 사건으로 15년형을 선고받았고, 이때 독립에 대한 바람과 결심을 담아 호를 ‘백범(白凡)’으로 했다. 이후 몇 번의 감형을 통해 1915년 석방되었다. 1919년 3?1운동에 가담한 뒤, 상해로 망명하여 임시정부 경무국장에 취임하였고 이후 임시정부 요직을 거치며 항일 투쟁에 매진했다. 1945년 광복 후, 임시정부 국무위원 일동과 함께 환국하여 신탁통치 반대와 통일 정부 수립을 위해 힘썼고, 남북협상을 추진했지만 성사되지 못했다. 1949년 6월 26일 경교장에서 안두희가 쏜 총에 숨을 거두었다.
목 차
권두 사진
해제 - 『백범일지』 조직 검사: 기억과 망각, 오독과 정독
일러두기
상권
與仁信兩兒書 / 祖先과 家庭 / 出生 及 幼年 時代 / 學童 時代 / 學究 時代 / 東學 接主 / 淸國 視察 / 國母報讎 / 投獄 / 受死刑宣告 / 大君主 親電停刑 / 破獄 / 緇徒 / 耶蘇敎와 敎育者 / 再次投獄哈爾濱事件 / 三次投獄, 十五年役 / 獄中 生活 / 農夫 / 出國 / 警務局長 / 喪妻 / 國務領, 國務委員
하권
白凡逸志 下卷 自引言 / 上海 到着 / 警務局長 / 사상 갈등과 좌우 분열 / 國務領, 國務委員 / 李奉昌 東京의거 / 尹奉吉 上海의거 / 嘉興 海鹽 海寧: 피신과 유랑 / 南京: 蔣介石 면담과 민족운동 / 長沙로 이동과 어머님에 대한 추억 / 南木廳 사건 / 重慶: 臨政의 확대와 韓獨黨 / 光復軍 / 大家族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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