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 출판사서평
칠흑같이 어두운 세계를 뚫고 나온 희망메시지!!
어린시절 뇌척수막염이라 추정되는 질병에 걸려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고 결국 말도 못하게 된 헬렌 켈러가 세상과의 소통이 막힌 채 살다가 앤 설리번 선생님을 만나 암흑의 세계를 뚫고 세상 밖으로 나오기까지 이를 극복하는 과정을 써내려간 자서전 The story of my life](내 삶의 이야기)를 고등학생들이 번역한 책이다. 시각과 청각 장애로 인해 겪게 되는 언어적 문제를 앤 설리번 선생과 자신의 노력으로 극복한 어린 시절을 다룬 영화 [미라클 워터]를 통해서 우리는 헬렌 켈러에 대해 장애의 삼중고를 이겨낸 인간 승리의 상징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후의 삶을 보면 헬렌 켈러는 미국의 작가이면서 교육가 나아가 사회운동가로서의 삶을 살았다.
헬렌 켈러는 자신에게 주어진 신체적인 장애를 극복하는 과정과 그후 세상 속에서 그녀가 보여준 끊임없는 도전과 어둠 속에 가려진 사람들을 대변한 세상을 향한 외침 그리고 기성세대와 권위주의로 둘러싸인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한 리더십을 발휘하였다. 그녀의 세상을 향한 외침은 변화와 희망의 메시지였다.이미 널리 알려진 헬렌 켈러의 삶이지만 학생들이 직접 한 자 한 자 번역하면서 만나게 되는 헬렌 켈러는 더욱 의미가 남달랐다. 영어를 잘 한다는 것과 번역을 잘 한다는 것은 전혀 다른 세계이기 때문에 처음에 번역하면서 겪게 되는 어려움은 피하고 싶을 정도였을 것이다. 그러나 학생들은 하나하나 검토하고 감수를 받아가면서 헬렌 켈러의 세계를 파헤쳐 갔다.
특히 비슷한 나이 때 겪었을 헬렌 켈러의 고통과 도전과 희망의 과정이 학생들에게 큰 감동과 새로운 삶의 지표를 삼는 데 큰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이번 작업을 통해 이 책을 읽는 많은 청소년들에게 헬렌 켈러의 세상을 바라보는 눈과 때로는 고통과 절망으로 다가오는 세상을 대하는 자세 등이 전해지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예나 지금이나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세상은 때로는 절망적인 모습으로 때로는 희망적인 모습으로 보일 것이다. 질풍노도의 시기를 겪어야 하는 청소년들에게 어려움을 극복하고 용기를 내야 하고 도전해야 하는 과정에서 생동감 넘치는 헬렌 켈러의 인생을 대하는 모습은 큰 버팀목이 될 것이고 세상을 살아가는 데 훌륭한 멘토 역할을 할 것이다.
헬렌 켈러는 볼 수도 없고 듣지도 못하고 나아가 말도 할 수 없게 된 상태에서도 오로지 만지고 맛보고 냄새 맡을 수 있는 세 가지 감각으로 살아왔다. 즉 헬렌 켈러는 어떤 순간에도 결코 좌절하거나 포기하지 않았던 것이다.부디 이 책이 힘든 시기를 겪고 있는 수많은 청소년들에게 희망의 길잡이가 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내가 번역한 책이 나온다고 생각하니까 신나고 설렌다. 한번쯤 이런 일을 해보는 게 좋다는 것을 새삼 다시 깨달았다. 좋은 작업이었다.”
_ 강유정(배화여고)
“영어에 어느 정도 관심을 가지고 시작했지만 번역을 끝마치고 나니까 영어 지식의 폭이 더욱 넓어진 걸 느낄 수 있었다.”
_ 김민준(한성고)
“강인한 정신력으로 이를 극복해낸 헬렌 켈러를 보며 그녀의 굳건한 마음가짐을 배워야겠다고 생각했다.”
_ 김유빈(명덕외고)
“세상은 균형 잡힌 의식을 지니고 끊임없이 노력하며 도전하는 사람들을 중심으로 발전되어 왔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는 것을 확신하게 해준 귀한 시간이었다.”
_ 김채원(하나고)
“자신의 신념에 따라 삶을 살았던 헬렌 켈러의 삶을 접하면서 나는 도전하는 삶을 살아가겠다는 다짐을 할 수 있었다.”
_ 박경호(하나고)
“이번 번역작업을 통해 내가 쓴 내용이 담긴 책이 출판된다는 생각에 많은 보람을 느꼈고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었다.”
_ 박정훈(중앙고)
“내 10대 인생에서 번역은 나에게 색다른 경험과 동시에 번역은 큰 도전이었다. 이 작업은 어떤 일도 주저하지 않고 도전하면 이룰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_ 정유찬(중앙고)
“앞으로 이런 기회가 또 올진 모르겠지만 ‘헬렌 켈러’를 번역하면서 느낀 것과 내적으로 성장하는데 도움 주었던 것은 영원히 잊지 못할 것 같다.”
_ 진정민(이대부고)
■ 머리말
내 삶의 이야기:발견 여행
“혹독한 비판도 달게 들을 수 있어요.”
헬렌 켈러는 말했다.
“저도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마음을 지닌 인격체로 대우한다면 말입니다.” 켈러가 22살 때 출간한 이 책은 자신도 엄연히 독자로서의 마음을 가진 존재라는 젊은 여성의 자기 주장일 뿐만 아니라 이 소녀가 어떻게 총명하고 정열적인 젊은 여성으로 성장할 수 있었는지 그 과정을 그린 얘기이기도 하다.
우리들 대부분은 헬렌 켈러를 단지 농맹아로서의 역경을 딛고 마침내 세계적인 저명인사로 성장한 소녀로만 알고 있다. 독자 여러분들은 아마도 켈러가 ‘물(WATER)’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어렵사리 찾아가는 유명한 장면의 영화 〈기적은 사랑과 함께〉를 보았을 것이다. 또는 헬렌 켈러 조크를 말하거나 들어 본 적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켈러의 삶은 이 책에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기적도 조크거리도 아니었다. 오로지 위대한 성취 그 자체였다. 평생 암흑과 고립 속에 갇혀 살 운명 같았던 켈러는 설리번 선생님의 눈부신 도움에 힘입어 미국 전역의 존경과 인정을 받는 인물로 성장했다.
배움을 향한 결단력 직접 체험하는 열정 자신을 규정짓는 사회의 고정관념에 대한 단호한 거부 등은 모두 감동적인 단면들임에 틀림없지만 동시에 으스스한 기분을 안겨 주기도 한다. 우리들 중에 누가 감히 헬렌 켈러처럼 강한 사람이 되는 걸 바랄 수나 있단 말인가? 그러나 켈러의 이야기를 읽어 보면 그녀 역시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었다는 걸 알게 된다. 그녀도 우리들처럼 뜻대로 할 수 없으면 화를 냈다. 사람들한테 무시 당하면 짜증을 내기도 했고 심지어 학교 숙제를 두고 불만을 터뜨리기도 했다.
이 책은 다른 무엇보다도 발견 여행의 정수라는 사실이다. 언어는 헬렌 켈러가 세상을 발견해 가는 창구였고 세상과 자신을 이해하는 과정에서 간절하게 의지했던 도구였다. ‘내가 누구인가?’라는 사람이면 누구나 갖게 되는 가장 중요한 질문을 그녀 역시도 품었다. 켈러가 이 질문의 해답을 찾아낸 과정은 똑같은 과제를 안고 사는 우리에게 의미심장한 메시지를 선사한다.
헬렌 켈러의 생애와 활동
헬렌 켈러는 1880년 6월 27일에 앨라배마 주 터스컴비아에서 남군의 퇴역 대위이자 신문 편집장이었던 아버지 아더 헨리 켈러와 어머니 케이트 애덤스 켈러 사이에서 태어났다. 태어날 때는 모든 면에서 정상적인 아이였다. 그러나 19개월 때 병(아마도 성홍열 또는 뇌막염)을 앓은 후에 시각과 청각을 동시에 상실했다. 이로 인해 그녀는 기본적인 집안일을 익히고 더러는 몸짓을 통해 욕구를 표현할 때도 있었지만 다른 아이들처럼 언어를 습득하지 못했다. 실제로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은 농맹아에게 과연 교육이 가능할까 의구심을 품었다. 심지어 가족들마저도 그랬다.
켈러가 6살 때 켈러의 어머니는 퍼킨스 맹아학교 마이클 아나그노스 교장을 가까스로 접촉할 수 있었고 교장은 켈러를 가르칠 선생님으로 이 학교 졸업생인 앤 설리번을 보내 주겠다고 했다. 설리번 선생님의 성공담은 레전드 자체이다. 설리번의 초창기 교육 1라운드가 끝났을 때 켈러는 이미 전국적인 유명인사 및 사회 운동가의 위상을 향해 순조로운 출발을 하고 있었다. 전국적인 유명인사 및 사회 운동가로서의 위상은 켈러가 이후 생을 마감할 때까지 지녔던 경력이었다.
라이트-휴메이슨 농아학교와 케임브리지 여학교에서 공부한 후에 켈러는 1900년에 래드클리프 대학에 입학했다. 1902년에 그녀는 여성잡지 〈레이디스 홈 저널〉에 글을 투고했는데 이 기사들이 모아져 1903년에 〈내 삶의 이야기〉로 출간되었다. 1904년 그녀가 래드클리프 대학을 우등으로 졸업하자 사람들은 평생 그녀의 곁을 지키며 강의 내용을 통역해 주는 등 학업을 적극 도운 앤 설리번 선생님에게도 학위를 주어야 한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켈러와 설리번 선생님은 〈내 삶의 이야기〉의 인세 수입으로 집을 한 채 공동 구입했다. 1905년 설리번 선생님이 결혼하면서 남편 존 메이시가 이 집으로 이사 왔다. 하버드 대학 영어강사이자 문학평론가였던 메이시는 켈러가 쓴 책의 편집자 및 저작권 대리인 역할을 맡아 주었다. 열정적인 사회주의자였던 그는 켈러의 정치적 사고방식에 일정 부분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
1908년에 켈러는 촉각과 미각 후각을 통해 세상을 알아 간 과정을 그린 〈내가 사는 세상〉을 출간했다. 또한 여러 잡지에 기고한 기사들을 통해 맹아들의 사회적 기회를 넓히고 맹아의 감축 방안 개선을 주장했다. 1909년에 켈러는 매사추세츠 주 사회당에 입당하면서 산아제한 노동조합 여성의 투표권 등 진보시대(Progressive Era)의 대세였던 많은 사회운동을 지지했다. 또한 미국의 제 1차 세계대전 참전에 반대했고 ‘전미 유색인 지위 향상 협회(NAACP)’에 기부금을 냈는데 그녀는 이 일로 각계 각층으로부터 격렬한 비판을 듣기도 했다. 사회적 정치적 현안들에 대해 1913년에 출간한 에세이 모음집인 〈암흑에서 벗어나〉는 혹평을 들었다. 대중들이 켈러에게 듣고자 하는 게 인생 스토리일 뿐 그녀의 의견이나 정치 철학이 아니라는 사실이 낙담한 켈러에게 뼈아프게 다가왔다.
1920년에 켈러와 설리번 선생님은 돈을 벌기 위해 순회 여행을 하면서 자신들의 인생 실화를 연극으로 상연하고 관중들과 질의 응답을 나누는 형식의 버라이어티 공연을 벌였다. 인기가 다소 회복된 1924년에 켈러는 강연가 및 미국맹아재단(AFB)의 기금모집가로 활동했다. 1927년에는 〈나의 종교〉를 출간했는데 신비주의 기독교 신앙인 스베덴보리 신학에 대한 켈러의 체험을 기술한 책이었다. 1929년에는 〈내 삶의 이야기〉의 속편 격인 〈나의 중년〉을 출간했다. 1930년대 내내 켈러는 맹아들을 옹호하는 사회 운동을 벌였다. 정치 소신을 곧장 피력하는 직선적인 태도가 누그러졌음에도 그녀의 진보적인 정치운동과 스페인 내전에서 공화파를 지지한 사실은 결국 그녀의 고용주들에게 경종을 울렸고 급기야 FBI 파일에서는 켈러를 ‘공산주의’의 동조 성향이 있는 사람으로 기록했다.
1936년에 앤 설리번 선생님이 죽자 켈러는 큰 충격을 받았다. 두 사람은 거의 50년을 함께한 친구였다. 그러나 불굴의 켈러는 저작과 강연 활동을 멈추지 않았다. 1937년에 켈러는 일본을 방문하여 현지의 농맹아동들을 위해 수백만 달러를 모금했고 1938년에는 〈헬렌 켈러 비망록〉(1936-1937년호)을 출간하여 널리 호평을 받았다. 제 2차 세계대전 중에는 부상당한 군인들을 위문하기도 했다. 대전 후에 켈러는 30여 개 국가를 순회하면서 맹아들을 옹호하는 활동을 계속했다. 1955년에는 앤 설리번의 전기인 〈선생님〉을 출간했고 1957년에는 에세이 모음집인 〈열린 문〉을 출간했다.
1957년에는 켈러의 어린 시절을 다소 감상적으로 그린 〈기적은 사랑과 함께〉가 TV에서 생방송 드라마로 방영되었다. 이 작품은 연극으로 각색되어 1959년에 브로드웨이에서 크게 히트했고 영화로도 만들어져서 1962년에 아카데미 상을 수상했다. 영화는 헬렌 켈러에게 불후의 명성을 선사했지만 다른 한편으로 다사다난했고 더러는 격렬한 논쟁의 불씨이기도 했던 켈러의 성인시절을 마치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증발시켜 버린 폐단을 낳기도 했다.
1961년에 켈러는 말년에 고질적으로 고생했던 뇌졸중 증상을 처음 앓게 되자 마침내 공적인 생활에서 은퇴했다. 1964년에는 린든 존슨 대통령으로부터 미국의 최고 시민상인 ‘대통령 자유훈장’을 받았다. 켈러는 1968년 6월 1일에 코네티컷 주 아컨리지의 자택에서 영면했다.
■ 추천하는 글
인간 이해와 자기 이해를 위한 공부
저는 헬렌 켈러와 자서전에 대해서 상식적인 이해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장애의 역경을 극복한 위인 헌신적인 교사의 노력 자서전의 가치에 대한 사회적 논란 정도가 그것입니다. 저는 번역서를 일독하면서 이전에 생각해 보지 못했던 많은 것을 느끼고 배울 수 있었습니다. 제가 배운 점을 번역에 참여했던 고등학교 학생들의 언어로 표현해 보고 싶습니다. 아마도 그들은 이렇게 느끼고 생각했으리라고 상상하고 또 믿습니다. 이것이 이 책을 추천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고등학교 학생들입니다. 영어 공부를 같이 하게 된 것을 계기로 함께 의미 있는 일을 하기로 하였습니다. 영어책 한 권을 함께 읽고 같이 번역해 보는 것입니다. 잘 알려진 얘기를 담고 있는 헬렌 켈러의 자서전을 함께 읽었습니다. 쉽게 시작했지만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읽고 이해하는 일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교과서와 교재에서 읽던 예문과도 많이 달랐습니다. 수없이 등장하는 동·식물명과 고유명사도 어려움을 더해 주었습니다. 다시 읽고 또 고치는 일을 수없이 반복했습니다. 겨우 초고를 완성하고 함께 얘기를 나누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소중했던 것은 서로 의견을 나누고 토론하면서 공동의 이해에 이르게 되는 과정에서 경험했던 협력과 인내심이었습니다. 이해하는 일에 공동 협력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자칫 헬렌 켈러의 얘기는 장애와 고난을 극복한 위인 얘기로 들릴 수 있습니다. 우리의 나태함과 나약함을 탓하고 반성하라는 얘기로 들릴 수 있습니다. 우리들은 보통의 인간에 대해 다르게 생각하는 관점을 배웠습니다. 우리 스스로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몸을 움직이고 걷고 말하고 읽고 서로 얘기를 나눌 수 있으며 세상을 보고 느낄 수 있다는 것이 결코 하찮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누구나 다 할 수 있다고 해서 결코 저절로 이루어진 범상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런 능력들은 엄청난 집중과 노력이 투여된 인간의 위대한 도전이자 성취라는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늘 부족과 결핍이라는 부정적인 시각으로 인간을 그리고 자신을 탓하는 데에 익숙해 있습니다. 그렇지만 헬렌 켈러의 감동적인 노력과 성취는 우리 모두가 지니고 있는 경험과 능력에도 그대로 배어 있다는 생각에 이르렀습니다. 그런 만큼 우리는 인간을 긍정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어머니와 선생님의 끊임없는 잔소리와 야단에 대해서도 다른 생각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귀찮기만 했던 어머니와 선생님의 잔소리와 야단이 사실은 인간의 위대한 성취를 가능하게 했던 기대와 축복의 기도였습니다. 만일 그것이 없었다면 우리의 일상을 가능하게 하는 말과 행동 생각을 배울 수 없었을 것입니다. 설리번 선생님의 헌신과 노력을 빼고 헬렌 켈러가 장애를 극복하며 이룬 성취를 상상할 수 없듯이 우리 곁에 언제나 존재하는 어머니와 선생님이 없다면 우리는 한갓 몸과 몸짓으로만 남아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들은 헬렌 켈러의 대학 생활 이후 성인으로서의 삶에 대해서 관심을 갖게 된 것도 큰 소득이었습니다. 단순한 영어 공부가 이제는 한 사람의 일생을 온전하게 이해해 보려는 기대와 관심으로 진화하였습니다. 우리들은 대학에 들어가 좀 더 공부를 하고 나서 헬렌 아주머니 헬렌 할머니가 남긴 글을 함께 읽고 번역해 보려는 희망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우리들은 초기 헬렌 켈러의 편지까지 번역하여 덧붙이게 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자서전에 대한 당시의 사회적 논란이 단순한 진위 문제를 넘어선다는 점을 어렴풋하게나마 느낄 수 있어서입니다. 인간의 언어 발달 신체적 감각과 언어 발달의 관계와 같은 주제들은 지금도 많은 학자들이 씨름하고 있는 연구 문제라는 것이 약간 이해되기도 하였습니다. 헬렌 켈러의 경험과 얘기가 인간의 언어 습득과 언어 발달을 연구하고 이해하는 데에 중요한 사례가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그것입니다.
영어 공부라는 소박한 목표에서 출발한 우리들의 번역은 한 인간에 대한 동정에서 공감으로 또 공감에서 이해로 그리고 우리들 자신에 성찰과 질문으로 이어진 힘들고 긴 공부의 과정이었습니다. 100년 전쯤 헬렌 켈러가 살았던 역사와 문화에 대한 이해도 부족하고 또 고풍스러운 영어 문투에도 익숙하지 않아서 번역에 어려움이 컸습니다. 훗날 우리들이 좀 더 성장하여 다시 번역을 해보면 좋겠다는 생각도 해 보았습니다.
우리들은 영어 공부를 이끌어 주신 선생님께 그리고 끈기를 갖고 격려하고 배려하며 함께 공부했던 서로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표하고 싶습니다. 우리가 함께 배꼽을 쥐며 웃었던 구절이 생각납니다. 어린 헬렌이 바다에 빠져 실컷 바닷물을 들이키고 겨우 구제되어 나와 하는 말 “도대체 바닷물에 소금을 집어넣은 사람이 누구에요?”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교육학과 교수
우용제
■ 의 역사적 배경과 문학적 위상
농맹아의 교육
이 책이 세상에 나올 당시에 미국 사회가 사회 구성원으로서 장애인을 대하는 시각은 노골적이었다. 당시 미국에도 물론 농아나 맹아를 위한 학교들이 있었지만 이들은 오로지 직업교육에 중점을 두면서 장애인들이 자신들이 할 수 있는 기술을 배워서 졸업 후에 생계를 유지할 수 있게 만드는 데에만 초점을 맞추었다. 이에 비하면 헬렌 켈러가 받은 교육은 기적 그 자체였다. 그러나 한편으로 분명히 계속되고 있던 한 줄기 전통의 연장선이기도 했다.
미국 최초의 맹아학교는 1832년 보스턴에서 문을 연 퍼킨스 학교였다. 새뮤얼 그리들리 하우 교장은 맹아들의 자립생활과 점자교재를 사용한 읽기 능력 습득을 강조했다. 1837년에 그는 유아 때부터 농맹아였던 7살의 로라 브리지먼에게 읽기를 가르쳤다. 처음에는 점자를 사용했고 다음에는 손바닥에 알파벳을 써 주는 지문자 방식을 사용했다. 이 일로 브리지먼과 하우 교장은 단번에 유명인사가 되었다.
앤 설리번 선생님도 켈러의 손바닥에 알파벳을 써 주는 방법을 썼지만 단어마다 따로따로 쓰지 않고 문장 전체를 써 주었다. 설리번 선생님은 켈러도 정상 아이들과 똑같은 언어습득 능력을 가지고 있고 따라서 정상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반복과 모방’을 통해 언어를 익힐 수 있다고 굳게 믿었다. 당시에 켈러의 나이는 과학자들이 대부분 언어습득의 한계시점이라고 규정하는 만 7살 무렵이었다. 그렇지만 아직 경계선을 넘지 않았기 때문에 켈러 역시 아직은 언어습득이 가능한 시점이라는 게 현대 언어학의 결론인 것 같다. 따라서 설리번 선생님이 몇 달 뒤에 왔더라면 켈러는 말하는 방법을 영영 배우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켈러가 어렸을 때는 많은 맹인용 점자법이 여기저기 생겨나 경쟁하고 있었다. 6개의 점을 사용하는 브라유 점자법이 미국 표준으로 공인된 건 1932년에야 비로소 가능했다. 많은 점자법을 배웠던 켈러는 브라유 점자법의 초창기 옹호론자로서 브라유 점자법이 공인되는 데 도움이 되었다.
농아교육은 수화를 두고 벌어진 논쟁 때문에 더디게 발전하였다. 초창기 수화를 지지했던 토머스 갤러뎃은 1817년에 코네티컷 주 하트퍼드에 코네티컷 농아학교를 세웠다. 수화는 미국에서 오랫동안 사랑받고 발전되었다. 하지만 알렉산더 그레이엄 벨 등 몇몇 영향력 있는 사람들이 수화는 농아들에게 ‘외국어’나 마찬가지라고 하면서 이들도 (외국어가 아닌) 영어를 직접 배워야 한다는 주장을 폈다. 1880년에는 ‘구화법(독순술)’ 지지자들이 이미 대세를 장악했고 이에 따라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열린 ‘국제농아교사대회’의 대의원들은 농아 교육에서 수화 사용을 금지하는 내용의 결의안을 채택했다. 결의안은 이후에도 수화에 의한 교육을 완전히 막지는 못했지만 수화에 대한 사람들의 태도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고 따라서 그 사용범위를 위축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오늘날 대부분의 교육자들은 장애아동들도 또래의 정상 학생들과 함께 교육해야 한다는 데 동의하지만 농아를 옹호하는 사람들은 이 방식이 해로울 수 있음을 지적한다. 농아에게 강제로 말로 의사소통하는 법을 배우도록 하면서 아이들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언어인 수화를 사용하지 못하게 하는 건 그들의 교육적 사회적 발달 과정을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퇴보시킬 수 있다. 켈러가 영웅으로 받들었던 알렉산더 그레이엄 벨은 오늘날 구화법(독순술)을 지지했던 사실때문에 농아들한테 엄청난 비난을 받고 있다.
농맹아동들의 교육은 여전히 복잡하고 어려운 과제이다. 손바닥 지문자나 촉화법(타도마 법) 브라유 점자법 등 켈러가 배웠던 방법들도 여전히 농맹아의 교육에 널리 사용되고 있다. 한편 오늘날의 농맹아동들은 촉각수화나 hands-on 또는 signing같은 수화와 손가락 브 라유 점자법등 켈러가 몰랐던 커뮤니케이션 기법도 배우고 있다.
변화하는 여성의 역할
헬렌 켈러는 생애의 대부분을 20세기에 살았지만 켈러가 태어난 가족은 여성의 역할을 엄격하게 제한하는 계층에 속해 있었고 당시의 사회 분위기 또한 마찬가지였다. 켈러 가족과 같은 미국 남부의 백인 상위 중산층 가족의 여성들은 바깥 일이나 정치 참여를 못하게 하거나 금지당했다. 여성들의 활동공간은 고작 집과 가족이었다. 설령 교육을 받더라도 지적 능력을 기르거나 미래의 사회생활을 준비하는 과정이 아니었다. 그저 ‘가정의 천사’라는 역할을 위해 우아함을 갈고 닦는 과정이었다. 경건하고 순결하며 순종하는 역할뿐이었다.
그러나 헬렌 켈러가 태어났을 때는 남부경제가 이미 남북전쟁으로 파괴된 상황이었다. 남부의 아름다운 여인상은 여전히 이상형이었지만 현실적으로는 점점 타당성이 없는 가치로 전락하고 있었다. 한때 부자였던 켈러의 아버지도 가족의 생계 유지를 위해 악전고투하면서 종종 빚에 허덕이기도 했다. 심지어 아버지는 돈을 벌기 위해 켈러를 프릭 쇼(아주 별난 사람이나 동물을 동원하는 쇼)에 출연시킬 생각까지 했었다.
이렇듯 켈러는 여성들에게 상황의 변화에 따른 자립성을 요구하면서도(자립성은 켈러 자신이 원하기도 했다) 낡은 이상형을 여전히 고집하는 세상에서 성장했다. 켈러의 얘기를 책으로 읽거나 켈러를 만난 많은 사람들은 그녀를 기적 자체라고 존경했을 뿐만 아니라 미덕과 순결과 정숙함의 상징 사회로부터 오염되거나 더렵혀지지 않은 순수한 영혼이라고 찬양했다. 그러나 자신들이 예찬했던 ‘내일의 성자’가 정작 산아제한이나 여성의 선거권에 대해 직설적으로 발언하니까 불쾌히 여겼다. 이 책에서 우리는 급변하는 세상 양쪽의 경계선 위에서 줄타기를 하면서 몸의 균형을 가까스로 유지하는 여성상을 볼 수 있다.
자서전 교양소설 그리고 감성소설
헬렌 켈러는 지독한 독서광이었다. 그녀는 성경 고전문학 영국과 유럽 문학의 걸작들 그리고 당대의 영국 및 미국의 시에 정통했고 우화나 동화를 비롯한 아동용 문예물들을 좋아했다. 특히 해피엔딩의 책들을 사랑했다.
〈내 삶의 이야기〉가 어떤 유형의 책인지 분류하는 일은 켈러의 다양한 취향때문에 쉬운 작업이 아니다. 이 책은 분명 자신의 삶을 진솔하게 털어놓은 자서전이다. 동시에 우리의 영웅인 어린 소녀가 어른으로 성장해가면서 온갖 시련과 고통을 극복하고 마침내 자신의 정체성을 발견하는 과정을 그린 교양소설이나 성인 동화이기도 하다. 찰스 디킨스의 〈데이비드 코퍼필드〉나 〈위대한 유산〉은 켈러가 아주 좋아했던 프랜시스 호지슨 버넷의 동화 〈소공자〉와 마찬가지로 확실히 교양소설로 분류할 수 있다. 또한 감성소설의 요소도 어느 정도 가지고 있다. 세상 속에서 운명을 개척하면서 부딪히는 갖가지 장애와 자신이 여자이므로 세상의 보호를 받을 거라는 헛된 망상을 극복하고 마침내 자신의 정체성과 만나게 되는 젊은 여성의 얘기는 감성소설에서도 가끔 다루는 소재이다. 또한 사회 속에서 여성의 역할이 어때야 하는지의 문제 역시 감성소설이 정면으로 다루는 주제 중의 하나이다.
▣ 작가 소개
저 : 헬렌 켈러
Helen Adams Keller
보지도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장애를 이겨낸 미국의 사회사업가 작가다. 1880년 6월 27일 미국 앨라배마 주의 터스컴비아에 있는 비교적 풍족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19개월 만에 열병을 앓고 난 후 시력과 모두 청력을 잃었다. 일곱 살 때인 1987년 가정교사 앤 설리번을 만나 사물에 이름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것을 통해 헬렌에게 새로운 세계가 열리게 되었다. 설리반은 10살 이후 남동생과 함께 고아원에서 학대와 고통 속에서 성장했다. 뿐만 아니라 불결하고 빈약한 환경에서 남동생을 떠나 보내야만 했고 그녀 본인은 눈병에 걸려 실명 직전까지 간 적이 있었다. 설리반은 겨우 20살이었지만 헬렌 켈러의 고통을 이해해줄 수 있는 인내심과 신앙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다. 설리반이 없었더라면 아마 위대한 사회사업가 헬렌 켈러는 존재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어린 나이에 삼중 장애를 가지고 있었던 헬렌은 난폭하고 거칠었으나 장애의 고통을 잘 이해해주는 훌륭한 스승 설리반 덕분에 그녀는 지적으로 큰 성장을 거둘 수 있었다. 그 해 7월부터 점자 공부를 시작한 헬렌 켈러는 1890년에는 보스턴의 농아 학교 플러 선생님으로부터 발성법을 배워 말을 할 수 있게 되었다.
1899년 하버드 부속 래드클리프 대학에 입학하였고 마침내 1904년 일반인도 입학하기 어렵다는 하버드 대학을 졸업할 수 있었다. 바로 그 해 센트 힐 박람회에서 헬렌 켈러의 날이 제정되어 헬렌은 처음으로 강연을 하였다. 그 후 그녀는 처음으로 전세계의 장애인들을 위한 활동을 펼치게 되었으며 사람들에게 큰 희망과 복음을 심어 주었다. 그녀는 미국 본토가 아닌 해외에서도 강연 여행에 나섰으며 생전에 한국을 방문한 적도 있다(1937년). 1942년에는 제 2차 세계대전의 부상병 구제 운동을 전개하였다. 1952년에는 프랑스의 레지옹도뇌르 훈장을 수상하였고 1964년에는 미국의 최고 훈장인 자유의 메달을 수여 받았다. 그녀는 풍부하고 섬세한 감수성을 지닌 뛰어난 문필가이기도 했다. 1968년 88세를 일기로 코네티컷에 있는 자택에서 영면했다.
그녀의 저서로는 『신앙의 권유』 『나의 종교』 『암흑 속에서 벗어나』 『나의 생애』 『사흘만 볼 수 있다면』 등이 있다. 『사흘만 볼 수 있다면』은 헬렌 켈러가 22세에 쓴 아름다운 자서전 『내가 살아온 이야기』와 50대에 이른 그녀가 자신의 눈이 뜨여 3일간 세상을 볼 수 있게 되는 상황을 가정하고 쓴 『사흘만 볼 수 있다면』을 완역한 책이다. 53세에 쓴 수필 『사흘만 볼 수 있다면』은 리더스 다이제스트』에서 20세기 최고의 수필로 선정한 작품이기도 하다. 시력과 청력 대신 풍부하고 예민한 감수성을 지니고 있었던 헬렌 켈러의 작품은 정밀하고 섬세한 묘사가 특징적이다.
역자 : WE GROUP
WE GROUP은 어린 시절부터 오랫동안 자연스럽게 영어를 즐겨온 친구들로 구성된 10대 번역 모임이다. 함께 동화책도 읽고 영어 동화 구연대회를 통해 실력을 쌓아온 친구들로 미국과 캐나다를 여행하면서 미국 문화를 직접 경험하기도 하고 미국 동부 IVY LEAGUE 대학들을 방문하는 등 다양한 문화 체험을 함께하면서 오랜 시간 동안 공부를 하고 있다.
미국 여행을 하면서 선택한 책들을 읽고 우리 글로 번역하는 작업을 함께하자는 ‘WELCOME ENGLISH 영어학원’ 김인혜 원장의 제안을 받아들여 시간을 쪼개 땀흘려 가며 훌륭하게 번역 작업을 하고 있다. 미국의 청소년들의 생각과 고민들이 WE GROUP만의 언어와 감성으로 표현되어 책으로 나오고 있다. 함께한 작업이라서 의미있었다.
감수 : 스티븐 전
서울대 법학과를 졸업하고 ‘희주번역’을 운영하고 있다. 《유럽 지역 중소기업 경영 컨설팅 핸드북》 《블루 젤리》 《EU 산하 동구권의 시장경제 체제 편입을 위한 제도 연구》 등을 비롯해 인문사회 분야 자료를 다수 번역했으며 이 책의 감수를 맡았다.
▣ 주요 목차
머리말 내 삶의 이야기:발견 여행
추천하는 글 인간 이해와 자기 이해를 위한 공부_우용제
〈내 삶의 이야기〉의 역사적 배경과 문학적 위상
〈내 삶의 이야기〉의 시대적 배경
내 삶의 이야기
편지 모음(1887~1901)
도움말
평론 초록
토론 주제 모음
옮긴이의 글_김인혜
칠흑같이 어두운 세계를 뚫고 나온 희망메시지!!
어린시절 뇌척수막염이라 추정되는 질병에 걸려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고 결국 말도 못하게 된 헬렌 켈러가 세상과의 소통이 막힌 채 살다가 앤 설리번 선생님을 만나 암흑의 세계를 뚫고 세상 밖으로 나오기까지 이를 극복하는 과정을 써내려간 자서전 The story of my life](내 삶의 이야기)를 고등학생들이 번역한 책이다. 시각과 청각 장애로 인해 겪게 되는 언어적 문제를 앤 설리번 선생과 자신의 노력으로 극복한 어린 시절을 다룬 영화 [미라클 워터]를 통해서 우리는 헬렌 켈러에 대해 장애의 삼중고를 이겨낸 인간 승리의 상징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후의 삶을 보면 헬렌 켈러는 미국의 작가이면서 교육가 나아가 사회운동가로서의 삶을 살았다.
헬렌 켈러는 자신에게 주어진 신체적인 장애를 극복하는 과정과 그후 세상 속에서 그녀가 보여준 끊임없는 도전과 어둠 속에 가려진 사람들을 대변한 세상을 향한 외침 그리고 기성세대와 권위주의로 둘러싸인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한 리더십을 발휘하였다. 그녀의 세상을 향한 외침은 변화와 희망의 메시지였다.이미 널리 알려진 헬렌 켈러의 삶이지만 학생들이 직접 한 자 한 자 번역하면서 만나게 되는 헬렌 켈러는 더욱 의미가 남달랐다. 영어를 잘 한다는 것과 번역을 잘 한다는 것은 전혀 다른 세계이기 때문에 처음에 번역하면서 겪게 되는 어려움은 피하고 싶을 정도였을 것이다. 그러나 학생들은 하나하나 검토하고 감수를 받아가면서 헬렌 켈러의 세계를 파헤쳐 갔다.
특히 비슷한 나이 때 겪었을 헬렌 켈러의 고통과 도전과 희망의 과정이 학생들에게 큰 감동과 새로운 삶의 지표를 삼는 데 큰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이번 작업을 통해 이 책을 읽는 많은 청소년들에게 헬렌 켈러의 세상을 바라보는 눈과 때로는 고통과 절망으로 다가오는 세상을 대하는 자세 등이 전해지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예나 지금이나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세상은 때로는 절망적인 모습으로 때로는 희망적인 모습으로 보일 것이다. 질풍노도의 시기를 겪어야 하는 청소년들에게 어려움을 극복하고 용기를 내야 하고 도전해야 하는 과정에서 생동감 넘치는 헬렌 켈러의 인생을 대하는 모습은 큰 버팀목이 될 것이고 세상을 살아가는 데 훌륭한 멘토 역할을 할 것이다.
헬렌 켈러는 볼 수도 없고 듣지도 못하고 나아가 말도 할 수 없게 된 상태에서도 오로지 만지고 맛보고 냄새 맡을 수 있는 세 가지 감각으로 살아왔다. 즉 헬렌 켈러는 어떤 순간에도 결코 좌절하거나 포기하지 않았던 것이다.부디 이 책이 힘든 시기를 겪고 있는 수많은 청소년들에게 희망의 길잡이가 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내가 번역한 책이 나온다고 생각하니까 신나고 설렌다. 한번쯤 이런 일을 해보는 게 좋다는 것을 새삼 다시 깨달았다. 좋은 작업이었다.”
_ 강유정(배화여고)
“영어에 어느 정도 관심을 가지고 시작했지만 번역을 끝마치고 나니까 영어 지식의 폭이 더욱 넓어진 걸 느낄 수 있었다.”
_ 김민준(한성고)
“강인한 정신력으로 이를 극복해낸 헬렌 켈러를 보며 그녀의 굳건한 마음가짐을 배워야겠다고 생각했다.”
_ 김유빈(명덕외고)
“세상은 균형 잡힌 의식을 지니고 끊임없이 노력하며 도전하는 사람들을 중심으로 발전되어 왔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는 것을 확신하게 해준 귀한 시간이었다.”
_ 김채원(하나고)
“자신의 신념에 따라 삶을 살았던 헬렌 켈러의 삶을 접하면서 나는 도전하는 삶을 살아가겠다는 다짐을 할 수 있었다.”
_ 박경호(하나고)
“이번 번역작업을 통해 내가 쓴 내용이 담긴 책이 출판된다는 생각에 많은 보람을 느꼈고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었다.”
_ 박정훈(중앙고)
“내 10대 인생에서 번역은 나에게 색다른 경험과 동시에 번역은 큰 도전이었다. 이 작업은 어떤 일도 주저하지 않고 도전하면 이룰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_ 정유찬(중앙고)
“앞으로 이런 기회가 또 올진 모르겠지만 ‘헬렌 켈러’를 번역하면서 느낀 것과 내적으로 성장하는데 도움 주었던 것은 영원히 잊지 못할 것 같다.”
_ 진정민(이대부고)
■ 머리말
내 삶의 이야기:발견 여행
“혹독한 비판도 달게 들을 수 있어요.”
헬렌 켈러는 말했다.
“저도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마음을 지닌 인격체로 대우한다면 말입니다.” 켈러가 22살 때 출간한 이 책은 자신도 엄연히 독자로서의 마음을 가진 존재라는 젊은 여성의 자기 주장일 뿐만 아니라 이 소녀가 어떻게 총명하고 정열적인 젊은 여성으로 성장할 수 있었는지 그 과정을 그린 얘기이기도 하다.
우리들 대부분은 헬렌 켈러를 단지 농맹아로서의 역경을 딛고 마침내 세계적인 저명인사로 성장한 소녀로만 알고 있다. 독자 여러분들은 아마도 켈러가 ‘물(WATER)’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어렵사리 찾아가는 유명한 장면의 영화 〈기적은 사랑과 함께〉를 보았을 것이다. 또는 헬렌 켈러 조크를 말하거나 들어 본 적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켈러의 삶은 이 책에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기적도 조크거리도 아니었다. 오로지 위대한 성취 그 자체였다. 평생 암흑과 고립 속에 갇혀 살 운명 같았던 켈러는 설리번 선생님의 눈부신 도움에 힘입어 미국 전역의 존경과 인정을 받는 인물로 성장했다.
배움을 향한 결단력 직접 체험하는 열정 자신을 규정짓는 사회의 고정관념에 대한 단호한 거부 등은 모두 감동적인 단면들임에 틀림없지만 동시에 으스스한 기분을 안겨 주기도 한다. 우리들 중에 누가 감히 헬렌 켈러처럼 강한 사람이 되는 걸 바랄 수나 있단 말인가? 그러나 켈러의 이야기를 읽어 보면 그녀 역시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었다는 걸 알게 된다. 그녀도 우리들처럼 뜻대로 할 수 없으면 화를 냈다. 사람들한테 무시 당하면 짜증을 내기도 했고 심지어 학교 숙제를 두고 불만을 터뜨리기도 했다.
이 책은 다른 무엇보다도 발견 여행의 정수라는 사실이다. 언어는 헬렌 켈러가 세상을 발견해 가는 창구였고 세상과 자신을 이해하는 과정에서 간절하게 의지했던 도구였다. ‘내가 누구인가?’라는 사람이면 누구나 갖게 되는 가장 중요한 질문을 그녀 역시도 품었다. 켈러가 이 질문의 해답을 찾아낸 과정은 똑같은 과제를 안고 사는 우리에게 의미심장한 메시지를 선사한다.
헬렌 켈러의 생애와 활동
헬렌 켈러는 1880년 6월 27일에 앨라배마 주 터스컴비아에서 남군의 퇴역 대위이자 신문 편집장이었던 아버지 아더 헨리 켈러와 어머니 케이트 애덤스 켈러 사이에서 태어났다. 태어날 때는 모든 면에서 정상적인 아이였다. 그러나 19개월 때 병(아마도 성홍열 또는 뇌막염)을 앓은 후에 시각과 청각을 동시에 상실했다. 이로 인해 그녀는 기본적인 집안일을 익히고 더러는 몸짓을 통해 욕구를 표현할 때도 있었지만 다른 아이들처럼 언어를 습득하지 못했다. 실제로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은 농맹아에게 과연 교육이 가능할까 의구심을 품었다. 심지어 가족들마저도 그랬다.
켈러가 6살 때 켈러의 어머니는 퍼킨스 맹아학교 마이클 아나그노스 교장을 가까스로 접촉할 수 있었고 교장은 켈러를 가르칠 선생님으로 이 학교 졸업생인 앤 설리번을 보내 주겠다고 했다. 설리번 선생님의 성공담은 레전드 자체이다. 설리번의 초창기 교육 1라운드가 끝났을 때 켈러는 이미 전국적인 유명인사 및 사회 운동가의 위상을 향해 순조로운 출발을 하고 있었다. 전국적인 유명인사 및 사회 운동가로서의 위상은 켈러가 이후 생을 마감할 때까지 지녔던 경력이었다.
라이트-휴메이슨 농아학교와 케임브리지 여학교에서 공부한 후에 켈러는 1900년에 래드클리프 대학에 입학했다. 1902년에 그녀는 여성잡지 〈레이디스 홈 저널〉에 글을 투고했는데 이 기사들이 모아져 1903년에 〈내 삶의 이야기〉로 출간되었다. 1904년 그녀가 래드클리프 대학을 우등으로 졸업하자 사람들은 평생 그녀의 곁을 지키며 강의 내용을 통역해 주는 등 학업을 적극 도운 앤 설리번 선생님에게도 학위를 주어야 한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켈러와 설리번 선생님은 〈내 삶의 이야기〉의 인세 수입으로 집을 한 채 공동 구입했다. 1905년 설리번 선생님이 결혼하면서 남편 존 메이시가 이 집으로 이사 왔다. 하버드 대학 영어강사이자 문학평론가였던 메이시는 켈러가 쓴 책의 편집자 및 저작권 대리인 역할을 맡아 주었다. 열정적인 사회주의자였던 그는 켈러의 정치적 사고방식에 일정 부분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
1908년에 켈러는 촉각과 미각 후각을 통해 세상을 알아 간 과정을 그린 〈내가 사는 세상〉을 출간했다. 또한 여러 잡지에 기고한 기사들을 통해 맹아들의 사회적 기회를 넓히고 맹아의 감축 방안 개선을 주장했다. 1909년에 켈러는 매사추세츠 주 사회당에 입당하면서 산아제한 노동조합 여성의 투표권 등 진보시대(Progressive Era)의 대세였던 많은 사회운동을 지지했다. 또한 미국의 제 1차 세계대전 참전에 반대했고 ‘전미 유색인 지위 향상 협회(NAACP)’에 기부금을 냈는데 그녀는 이 일로 각계 각층으로부터 격렬한 비판을 듣기도 했다. 사회적 정치적 현안들에 대해 1913년에 출간한 에세이 모음집인 〈암흑에서 벗어나〉는 혹평을 들었다. 대중들이 켈러에게 듣고자 하는 게 인생 스토리일 뿐 그녀의 의견이나 정치 철학이 아니라는 사실이 낙담한 켈러에게 뼈아프게 다가왔다.
1920년에 켈러와 설리번 선생님은 돈을 벌기 위해 순회 여행을 하면서 자신들의 인생 실화를 연극으로 상연하고 관중들과 질의 응답을 나누는 형식의 버라이어티 공연을 벌였다. 인기가 다소 회복된 1924년에 켈러는 강연가 및 미국맹아재단(AFB)의 기금모집가로 활동했다. 1927년에는 〈나의 종교〉를 출간했는데 신비주의 기독교 신앙인 스베덴보리 신학에 대한 켈러의 체험을 기술한 책이었다. 1929년에는 〈내 삶의 이야기〉의 속편 격인 〈나의 중년〉을 출간했다. 1930년대 내내 켈러는 맹아들을 옹호하는 사회 운동을 벌였다. 정치 소신을 곧장 피력하는 직선적인 태도가 누그러졌음에도 그녀의 진보적인 정치운동과 스페인 내전에서 공화파를 지지한 사실은 결국 그녀의 고용주들에게 경종을 울렸고 급기야 FBI 파일에서는 켈러를 ‘공산주의’의 동조 성향이 있는 사람으로 기록했다.
1936년에 앤 설리번 선생님이 죽자 켈러는 큰 충격을 받았다. 두 사람은 거의 50년을 함께한 친구였다. 그러나 불굴의 켈러는 저작과 강연 활동을 멈추지 않았다. 1937년에 켈러는 일본을 방문하여 현지의 농맹아동들을 위해 수백만 달러를 모금했고 1938년에는 〈헬렌 켈러 비망록〉(1936-1937년호)을 출간하여 널리 호평을 받았다. 제 2차 세계대전 중에는 부상당한 군인들을 위문하기도 했다. 대전 후에 켈러는 30여 개 국가를 순회하면서 맹아들을 옹호하는 활동을 계속했다. 1955년에는 앤 설리번의 전기인 〈선생님〉을 출간했고 1957년에는 에세이 모음집인 〈열린 문〉을 출간했다.
1957년에는 켈러의 어린 시절을 다소 감상적으로 그린 〈기적은 사랑과 함께〉가 TV에서 생방송 드라마로 방영되었다. 이 작품은 연극으로 각색되어 1959년에 브로드웨이에서 크게 히트했고 영화로도 만들어져서 1962년에 아카데미 상을 수상했다. 영화는 헬렌 켈러에게 불후의 명성을 선사했지만 다른 한편으로 다사다난했고 더러는 격렬한 논쟁의 불씨이기도 했던 켈러의 성인시절을 마치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증발시켜 버린 폐단을 낳기도 했다.
1961년에 켈러는 말년에 고질적으로 고생했던 뇌졸중 증상을 처음 앓게 되자 마침내 공적인 생활에서 은퇴했다. 1964년에는 린든 존슨 대통령으로부터 미국의 최고 시민상인 ‘대통령 자유훈장’을 받았다. 켈러는 1968년 6월 1일에 코네티컷 주 아컨리지의 자택에서 영면했다.
■ 추천하는 글
인간 이해와 자기 이해를 위한 공부
저는 헬렌 켈러와 자서전에 대해서 상식적인 이해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장애의 역경을 극복한 위인 헌신적인 교사의 노력 자서전의 가치에 대한 사회적 논란 정도가 그것입니다. 저는 번역서를 일독하면서 이전에 생각해 보지 못했던 많은 것을 느끼고 배울 수 있었습니다. 제가 배운 점을 번역에 참여했던 고등학교 학생들의 언어로 표현해 보고 싶습니다. 아마도 그들은 이렇게 느끼고 생각했으리라고 상상하고 또 믿습니다. 이것이 이 책을 추천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고등학교 학생들입니다. 영어 공부를 같이 하게 된 것을 계기로 함께 의미 있는 일을 하기로 하였습니다. 영어책 한 권을 함께 읽고 같이 번역해 보는 것입니다. 잘 알려진 얘기를 담고 있는 헬렌 켈러의 자서전을 함께 읽었습니다. 쉽게 시작했지만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읽고 이해하는 일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교과서와 교재에서 읽던 예문과도 많이 달랐습니다. 수없이 등장하는 동·식물명과 고유명사도 어려움을 더해 주었습니다. 다시 읽고 또 고치는 일을 수없이 반복했습니다. 겨우 초고를 완성하고 함께 얘기를 나누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소중했던 것은 서로 의견을 나누고 토론하면서 공동의 이해에 이르게 되는 과정에서 경험했던 협력과 인내심이었습니다. 이해하는 일에 공동 협력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자칫 헬렌 켈러의 얘기는 장애와 고난을 극복한 위인 얘기로 들릴 수 있습니다. 우리의 나태함과 나약함을 탓하고 반성하라는 얘기로 들릴 수 있습니다. 우리들은 보통의 인간에 대해 다르게 생각하는 관점을 배웠습니다. 우리 스스로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몸을 움직이고 걷고 말하고 읽고 서로 얘기를 나눌 수 있으며 세상을 보고 느낄 수 있다는 것이 결코 하찮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누구나 다 할 수 있다고 해서 결코 저절로 이루어진 범상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런 능력들은 엄청난 집중과 노력이 투여된 인간의 위대한 도전이자 성취라는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늘 부족과 결핍이라는 부정적인 시각으로 인간을 그리고 자신을 탓하는 데에 익숙해 있습니다. 그렇지만 헬렌 켈러의 감동적인 노력과 성취는 우리 모두가 지니고 있는 경험과 능력에도 그대로 배어 있다는 생각에 이르렀습니다. 그런 만큼 우리는 인간을 긍정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어머니와 선생님의 끊임없는 잔소리와 야단에 대해서도 다른 생각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귀찮기만 했던 어머니와 선생님의 잔소리와 야단이 사실은 인간의 위대한 성취를 가능하게 했던 기대와 축복의 기도였습니다. 만일 그것이 없었다면 우리의 일상을 가능하게 하는 말과 행동 생각을 배울 수 없었을 것입니다. 설리번 선생님의 헌신과 노력을 빼고 헬렌 켈러가 장애를 극복하며 이룬 성취를 상상할 수 없듯이 우리 곁에 언제나 존재하는 어머니와 선생님이 없다면 우리는 한갓 몸과 몸짓으로만 남아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들은 헬렌 켈러의 대학 생활 이후 성인으로서의 삶에 대해서 관심을 갖게 된 것도 큰 소득이었습니다. 단순한 영어 공부가 이제는 한 사람의 일생을 온전하게 이해해 보려는 기대와 관심으로 진화하였습니다. 우리들은 대학에 들어가 좀 더 공부를 하고 나서 헬렌 아주머니 헬렌 할머니가 남긴 글을 함께 읽고 번역해 보려는 희망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우리들은 초기 헬렌 켈러의 편지까지 번역하여 덧붙이게 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자서전에 대한 당시의 사회적 논란이 단순한 진위 문제를 넘어선다는 점을 어렴풋하게나마 느낄 수 있어서입니다. 인간의 언어 발달 신체적 감각과 언어 발달의 관계와 같은 주제들은 지금도 많은 학자들이 씨름하고 있는 연구 문제라는 것이 약간 이해되기도 하였습니다. 헬렌 켈러의 경험과 얘기가 인간의 언어 습득과 언어 발달을 연구하고 이해하는 데에 중요한 사례가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그것입니다.
영어 공부라는 소박한 목표에서 출발한 우리들의 번역은 한 인간에 대한 동정에서 공감으로 또 공감에서 이해로 그리고 우리들 자신에 성찰과 질문으로 이어진 힘들고 긴 공부의 과정이었습니다. 100년 전쯤 헬렌 켈러가 살았던 역사와 문화에 대한 이해도 부족하고 또 고풍스러운 영어 문투에도 익숙하지 않아서 번역에 어려움이 컸습니다. 훗날 우리들이 좀 더 성장하여 다시 번역을 해보면 좋겠다는 생각도 해 보았습니다.
우리들은 영어 공부를 이끌어 주신 선생님께 그리고 끈기를 갖고 격려하고 배려하며 함께 공부했던 서로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표하고 싶습니다. 우리가 함께 배꼽을 쥐며 웃었던 구절이 생각납니다. 어린 헬렌이 바다에 빠져 실컷 바닷물을 들이키고 겨우 구제되어 나와 하는 말 “도대체 바닷물에 소금을 집어넣은 사람이 누구에요?”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교육학과 교수
우용제
■ 의 역사적 배경과 문학적 위상
농맹아의 교육
이 책이 세상에 나올 당시에 미국 사회가 사회 구성원으로서 장애인을 대하는 시각은 노골적이었다. 당시 미국에도 물론 농아나 맹아를 위한 학교들이 있었지만 이들은 오로지 직업교육에 중점을 두면서 장애인들이 자신들이 할 수 있는 기술을 배워서 졸업 후에 생계를 유지할 수 있게 만드는 데에만 초점을 맞추었다. 이에 비하면 헬렌 켈러가 받은 교육은 기적 그 자체였다. 그러나 한편으로 분명히 계속되고 있던 한 줄기 전통의 연장선이기도 했다.
미국 최초의 맹아학교는 1832년 보스턴에서 문을 연 퍼킨스 학교였다. 새뮤얼 그리들리 하우 교장은 맹아들의 자립생활과 점자교재를 사용한 읽기 능력 습득을 강조했다. 1837년에 그는 유아 때부터 농맹아였던 7살의 로라 브리지먼에게 읽기를 가르쳤다. 처음에는 점자를 사용했고 다음에는 손바닥에 알파벳을 써 주는 지문자 방식을 사용했다. 이 일로 브리지먼과 하우 교장은 단번에 유명인사가 되었다.
앤 설리번 선생님도 켈러의 손바닥에 알파벳을 써 주는 방법을 썼지만 단어마다 따로따로 쓰지 않고 문장 전체를 써 주었다. 설리번 선생님은 켈러도 정상 아이들과 똑같은 언어습득 능력을 가지고 있고 따라서 정상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반복과 모방’을 통해 언어를 익힐 수 있다고 굳게 믿었다. 당시에 켈러의 나이는 과학자들이 대부분 언어습득의 한계시점이라고 규정하는 만 7살 무렵이었다. 그렇지만 아직 경계선을 넘지 않았기 때문에 켈러 역시 아직은 언어습득이 가능한 시점이라는 게 현대 언어학의 결론인 것 같다. 따라서 설리번 선생님이 몇 달 뒤에 왔더라면 켈러는 말하는 방법을 영영 배우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켈러가 어렸을 때는 많은 맹인용 점자법이 여기저기 생겨나 경쟁하고 있었다. 6개의 점을 사용하는 브라유 점자법이 미국 표준으로 공인된 건 1932년에야 비로소 가능했다. 많은 점자법을 배웠던 켈러는 브라유 점자법의 초창기 옹호론자로서 브라유 점자법이 공인되는 데 도움이 되었다.
농아교육은 수화를 두고 벌어진 논쟁 때문에 더디게 발전하였다. 초창기 수화를 지지했던 토머스 갤러뎃은 1817년에 코네티컷 주 하트퍼드에 코네티컷 농아학교를 세웠다. 수화는 미국에서 오랫동안 사랑받고 발전되었다. 하지만 알렉산더 그레이엄 벨 등 몇몇 영향력 있는 사람들이 수화는 농아들에게 ‘외국어’나 마찬가지라고 하면서 이들도 (외국어가 아닌) 영어를 직접 배워야 한다는 주장을 폈다. 1880년에는 ‘구화법(독순술)’ 지지자들이 이미 대세를 장악했고 이에 따라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열린 ‘국제농아교사대회’의 대의원들은 농아 교육에서 수화 사용을 금지하는 내용의 결의안을 채택했다. 결의안은 이후에도 수화에 의한 교육을 완전히 막지는 못했지만 수화에 대한 사람들의 태도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고 따라서 그 사용범위를 위축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오늘날 대부분의 교육자들은 장애아동들도 또래의 정상 학생들과 함께 교육해야 한다는 데 동의하지만 농아를 옹호하는 사람들은 이 방식이 해로울 수 있음을 지적한다. 농아에게 강제로 말로 의사소통하는 법을 배우도록 하면서 아이들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언어인 수화를 사용하지 못하게 하는 건 그들의 교육적 사회적 발달 과정을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퇴보시킬 수 있다. 켈러가 영웅으로 받들었던 알렉산더 그레이엄 벨은 오늘날 구화법(독순술)을 지지했던 사실때문에 농아들한테 엄청난 비난을 받고 있다.
농맹아동들의 교육은 여전히 복잡하고 어려운 과제이다. 손바닥 지문자나 촉화법(타도마 법) 브라유 점자법 등 켈러가 배웠던 방법들도 여전히 농맹아의 교육에 널리 사용되고 있다. 한편 오늘날의 농맹아동들은 촉각수화나 hands-on 또는 signing같은 수화와 손가락 브 라유 점자법등 켈러가 몰랐던 커뮤니케이션 기법도 배우고 있다.
변화하는 여성의 역할
헬렌 켈러는 생애의 대부분을 20세기에 살았지만 켈러가 태어난 가족은 여성의 역할을 엄격하게 제한하는 계층에 속해 있었고 당시의 사회 분위기 또한 마찬가지였다. 켈러 가족과 같은 미국 남부의 백인 상위 중산층 가족의 여성들은 바깥 일이나 정치 참여를 못하게 하거나 금지당했다. 여성들의 활동공간은 고작 집과 가족이었다. 설령 교육을 받더라도 지적 능력을 기르거나 미래의 사회생활을 준비하는 과정이 아니었다. 그저 ‘가정의 천사’라는 역할을 위해 우아함을 갈고 닦는 과정이었다. 경건하고 순결하며 순종하는 역할뿐이었다.
그러나 헬렌 켈러가 태어났을 때는 남부경제가 이미 남북전쟁으로 파괴된 상황이었다. 남부의 아름다운 여인상은 여전히 이상형이었지만 현실적으로는 점점 타당성이 없는 가치로 전락하고 있었다. 한때 부자였던 켈러의 아버지도 가족의 생계 유지를 위해 악전고투하면서 종종 빚에 허덕이기도 했다. 심지어 아버지는 돈을 벌기 위해 켈러를 프릭 쇼(아주 별난 사람이나 동물을 동원하는 쇼)에 출연시킬 생각까지 했었다.
이렇듯 켈러는 여성들에게 상황의 변화에 따른 자립성을 요구하면서도(자립성은 켈러 자신이 원하기도 했다) 낡은 이상형을 여전히 고집하는 세상에서 성장했다. 켈러의 얘기를 책으로 읽거나 켈러를 만난 많은 사람들은 그녀를 기적 자체라고 존경했을 뿐만 아니라 미덕과 순결과 정숙함의 상징 사회로부터 오염되거나 더렵혀지지 않은 순수한 영혼이라고 찬양했다. 그러나 자신들이 예찬했던 ‘내일의 성자’가 정작 산아제한이나 여성의 선거권에 대해 직설적으로 발언하니까 불쾌히 여겼다. 이 책에서 우리는 급변하는 세상 양쪽의 경계선 위에서 줄타기를 하면서 몸의 균형을 가까스로 유지하는 여성상을 볼 수 있다.
자서전 교양소설 그리고 감성소설
헬렌 켈러는 지독한 독서광이었다. 그녀는 성경 고전문학 영국과 유럽 문학의 걸작들 그리고 당대의 영국 및 미국의 시에 정통했고 우화나 동화를 비롯한 아동용 문예물들을 좋아했다. 특히 해피엔딩의 책들을 사랑했다.
〈내 삶의 이야기〉가 어떤 유형의 책인지 분류하는 일은 켈러의 다양한 취향때문에 쉬운 작업이 아니다. 이 책은 분명 자신의 삶을 진솔하게 털어놓은 자서전이다. 동시에 우리의 영웅인 어린 소녀가 어른으로 성장해가면서 온갖 시련과 고통을 극복하고 마침내 자신의 정체성을 발견하는 과정을 그린 교양소설이나 성인 동화이기도 하다. 찰스 디킨스의 〈데이비드 코퍼필드〉나 〈위대한 유산〉은 켈러가 아주 좋아했던 프랜시스 호지슨 버넷의 동화 〈소공자〉와 마찬가지로 확실히 교양소설로 분류할 수 있다. 또한 감성소설의 요소도 어느 정도 가지고 있다. 세상 속에서 운명을 개척하면서 부딪히는 갖가지 장애와 자신이 여자이므로 세상의 보호를 받을 거라는 헛된 망상을 극복하고 마침내 자신의 정체성과 만나게 되는 젊은 여성의 얘기는 감성소설에서도 가끔 다루는 소재이다. 또한 사회 속에서 여성의 역할이 어때야 하는지의 문제 역시 감성소설이 정면으로 다루는 주제 중의 하나이다.
▣ 작가 소개
저 : 헬렌 켈러
Helen Adams Keller
보지도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장애를 이겨낸 미국의 사회사업가 작가다. 1880년 6월 27일 미국 앨라배마 주의 터스컴비아에 있는 비교적 풍족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19개월 만에 열병을 앓고 난 후 시력과 모두 청력을 잃었다. 일곱 살 때인 1987년 가정교사 앤 설리번을 만나 사물에 이름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것을 통해 헬렌에게 새로운 세계가 열리게 되었다. 설리반은 10살 이후 남동생과 함께 고아원에서 학대와 고통 속에서 성장했다. 뿐만 아니라 불결하고 빈약한 환경에서 남동생을 떠나 보내야만 했고 그녀 본인은 눈병에 걸려 실명 직전까지 간 적이 있었다. 설리반은 겨우 20살이었지만 헬렌 켈러의 고통을 이해해줄 수 있는 인내심과 신앙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다. 설리반이 없었더라면 아마 위대한 사회사업가 헬렌 켈러는 존재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어린 나이에 삼중 장애를 가지고 있었던 헬렌은 난폭하고 거칠었으나 장애의 고통을 잘 이해해주는 훌륭한 스승 설리반 덕분에 그녀는 지적으로 큰 성장을 거둘 수 있었다. 그 해 7월부터 점자 공부를 시작한 헬렌 켈러는 1890년에는 보스턴의 농아 학교 플러 선생님으로부터 발성법을 배워 말을 할 수 있게 되었다.
1899년 하버드 부속 래드클리프 대학에 입학하였고 마침내 1904년 일반인도 입학하기 어렵다는 하버드 대학을 졸업할 수 있었다. 바로 그 해 센트 힐 박람회에서 헬렌 켈러의 날이 제정되어 헬렌은 처음으로 강연을 하였다. 그 후 그녀는 처음으로 전세계의 장애인들을 위한 활동을 펼치게 되었으며 사람들에게 큰 희망과 복음을 심어 주었다. 그녀는 미국 본토가 아닌 해외에서도 강연 여행에 나섰으며 생전에 한국을 방문한 적도 있다(1937년). 1942년에는 제 2차 세계대전의 부상병 구제 운동을 전개하였다. 1952년에는 프랑스의 레지옹도뇌르 훈장을 수상하였고 1964년에는 미국의 최고 훈장인 자유의 메달을 수여 받았다. 그녀는 풍부하고 섬세한 감수성을 지닌 뛰어난 문필가이기도 했다. 1968년 88세를 일기로 코네티컷에 있는 자택에서 영면했다.
그녀의 저서로는 『신앙의 권유』 『나의 종교』 『암흑 속에서 벗어나』 『나의 생애』 『사흘만 볼 수 있다면』 등이 있다. 『사흘만 볼 수 있다면』은 헬렌 켈러가 22세에 쓴 아름다운 자서전 『내가 살아온 이야기』와 50대에 이른 그녀가 자신의 눈이 뜨여 3일간 세상을 볼 수 있게 되는 상황을 가정하고 쓴 『사흘만 볼 수 있다면』을 완역한 책이다. 53세에 쓴 수필 『사흘만 볼 수 있다면』은 리더스 다이제스트』에서 20세기 최고의 수필로 선정한 작품이기도 하다. 시력과 청력 대신 풍부하고 예민한 감수성을 지니고 있었던 헬렌 켈러의 작품은 정밀하고 섬세한 묘사가 특징적이다.
역자 : WE GROUP
WE GROUP은 어린 시절부터 오랫동안 자연스럽게 영어를 즐겨온 친구들로 구성된 10대 번역 모임이다. 함께 동화책도 읽고 영어 동화 구연대회를 통해 실력을 쌓아온 친구들로 미국과 캐나다를 여행하면서 미국 문화를 직접 경험하기도 하고 미국 동부 IVY LEAGUE 대학들을 방문하는 등 다양한 문화 체험을 함께하면서 오랜 시간 동안 공부를 하고 있다.
미국 여행을 하면서 선택한 책들을 읽고 우리 글로 번역하는 작업을 함께하자는 ‘WELCOME ENGLISH 영어학원’ 김인혜 원장의 제안을 받아들여 시간을 쪼개 땀흘려 가며 훌륭하게 번역 작업을 하고 있다. 미국의 청소년들의 생각과 고민들이 WE GROUP만의 언어와 감성으로 표현되어 책으로 나오고 있다. 함께한 작업이라서 의미있었다.
감수 : 스티븐 전
서울대 법학과를 졸업하고 ‘희주번역’을 운영하고 있다. 《유럽 지역 중소기업 경영 컨설팅 핸드북》 《블루 젤리》 《EU 산하 동구권의 시장경제 체제 편입을 위한 제도 연구》 등을 비롯해 인문사회 분야 자료를 다수 번역했으며 이 책의 감수를 맡았다.
▣ 주요 목차
머리말 내 삶의 이야기:발견 여행
추천하는 글 인간 이해와 자기 이해를 위한 공부_우용제
〈내 삶의 이야기〉의 역사적 배경과 문학적 위상
〈내 삶의 이야기〉의 시대적 배경
내 삶의 이야기
편지 모음(1887~1901)
도움말
평론 초록
토론 주제 모음
옮긴이의 글_김인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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