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군 명군 폭군 (2016.11)

고객평점
저자강붕
출판사항왕의서재, 발행일:2016/11/03
형태사항p.519 B5판:24
매장위치사회과학부(B1) , 재고문의 : 051-816-9500
ISBN9791186615188 [소득공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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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

▣ 출판사서평

▷ 안으로 황권을 강화했다는 업적에 관해

한무제 원수 원년(BC. 112)에 [회남자]의 저자인 회남왕 유안이 모반죄로 고발돼 자살하고 만다. 한데 이 사건의 성격에 관한 의견은 분분하다. 진실은 뭘까?
유안의 모반 사건은 원통한 일이다. 사건을 일으킨 장본인은 따로 있었으니 바로 한무제인 것. 유안은 단지 희생양이었다. 『사기』에는 유안의 심성을 알아볼 수 있는 글이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회남왕 유안은 사람됨이 독서와 거문고 연주를 좋아하고 활을 쏘며 사냥하거나 말 타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또한, 음덕을 행해 백성을 어루만지고 위로하며 자기 이름이 천하에 퍼뜨리려고 했다.

이렇게 심성이 착하고 백성을 사랑한 제후왕은 왜 비참한 말로를 맞이해야 했을까? 제후왕으로서 격조가 드높고 평가가 후한 것은 당시에 반드시 좋은 일만은 아니었다. 쉽게 황제의 질투를 일으키고 중앙정부를 불안하게 할 요소로 작동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한무제의 질투심을 가볍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 한무제가 질투를 일으킨 것은 유안 한 사람뿐만이 아니었다.
한무제의 이복형인 유덕은 당시 하간왕으로 봉해졌는데, 이 유덕 또한 평판이 아주 좋았다. 문화 사업에 큰 관심을 가지고, 진시황의 분서갱유 이후에 단절된 유학의 경전을 새로 정리하는 큰 공로를 세웠다. 그러나 유덕은 이 때문에 한무제에게 질투를 받았다.
한번은 한무제가 유덕을 만난 자리에서 이렇게 말했다. “탕湯은 70리의 땅에서 왕자가 됐고, 문왕文王은 백 리의 땅에서 왕자가 됐다.” 이 말은 한무제가 유덕에게 백성에게 인의를 베풀고 나중에 백성의 인기를 얻으면 내 황위까지 넘볼 것이냐는 뜻이었다. 이 말을 들은 유덕은 다시는 문화 사업을 하지 않고 백성에게 인의를 베풀지 않았으며 주색에 빠져서 미친 사람처럼 살다가 죽었다고 한다.
위기후 두영과 무안군 전분은 모두 한무제 초기에 승상 직을 맡은 인물들인데, 회남왕 유안처럼 문객을 양성하는 것을 좋아해 주위에 인재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그 세력이 강대해지자 한무제는 큰 위협을 느끼고 안정감을 찾지 못했다. 이 때문에 한무제는 이를 갈 정도로 몹시 분개했으며. 앞으로 그들을 어떻게 처리할지 고심했다. 위청과 곽거병 같은 대장군은 한무제 곁에서 늘 그런 모습을 보아온 터라 자신들에게 화근이 될 문객을 양성하지 않았다. 한무제는 유안을 비롯한 제후들과 승상뿐만 아니라 당시 대표적 유협이던 곽해 같은 유협들까지도 황권을 강화하는 데 장애가 된다는 판단에 무차별하게 제거했다.
유학자들과 이를 연구하는 학자들 사이에서 한무제를 위대한 영웅으로 떠받는 데 주저할 사람은 없다. 바로 한무제가 즉위 초에 저명한 유학자인 동중서의 의견에 따라 기타 학파의 학설을 버리고, 오직 유학의 학설만을 따랐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무제 시대에 통치 사상의 하나로 선택돼 발전한 유학을 두고 세 사학자는 견해를 서로 달리했다.
사마천은 먼저 한무제가 유가의 표준을 따른 군주가 아니라고 판단했다. 그는 “지금 천자(한무제)가 즉위하자마자 더욱 공손히 귀신에게 지내고 받들었다.”고 교묘하게 써내려갔다. 더불어 『사기』〈봉선서〉에도 한무제가 신선과 미신을 신봉했다는 사적을 많이 기록했다.
『사기』〈유림열전〉에서 사마천은 이상하게도 오직 관직명만을 나열했을 뿐이다. 일종의 우려였다. 그는 아마도 “유학이 권력의 유혹에 빠져있을 때도 순수하고 올바른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을까, 그리고 유학자로서 자기 소신을 유지할 수 있을까?”를 고민했을 것이다.
사마천은 『사기』의 다른 곳에서 “진정한 유학자는 어떻게 자기 인생의 고난을 극복하고, 유학의 가치관은 어땠는가?”에 관해 기술했다. 바로 『사기』의 〈공자세가〉다. 사마천의 붓 아래에 공자는 자기만의 사상을 전파하려고 천하를 주유하며 온갖 풍상고초를 겪었고, 어떤 통치자를 맞닥뜨리거나 어떤 시련이 닥쳐도 자기 소신을 꺾지 않고 자기가 생각하는 이상을 실현하고자 매진했다. 그 제자들도 비록 서로 다른 성격과 처세관을 지녔지만 하나의 공통점이 있었으니, 그것은 세속의 공명, 벼슬, 그리고 재물 앞에서 자기 소신을 꺾지 않는 것이었다. 이것이 『사기』에서 묘사된 진정한 유학자들의 모습이다. 이런 유학자들의 표준에서 당시 승상이었던 공손홍을 재보면 그는 바른 학문과 양심을 지니지 못했고, 단지 권력에 눈이 어두워 힘껏 아부해 운이 좋게 벼락출세한 사례에 해당한다.
반고는 사마천과 완전히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정통적인 유가 학자로서 한무제를 치켜세웠고, 유학을 수호하려는 견해를 밝혔다. 반고는 “효무제孝武帝(한무제)는 즉위하자마자 탁월하게 백가百家를 폐출하고, 육경六經을 드러냈다.”고 찬미하며, 한무제를 유학을 보호하는 영명한 군주로 그렸다.
사마광의 태도는 두 사학자와 또 달랐다. 사마광은 『자치통감』에서 동중서를 한무제 시대에 등장하는 첫 번째 인물로 안배한 뒤 동중서의 입을 빌려 유학의 정치강령을 수립하고, 그 뒤에 한무제가 저지른 행동은 유학의 표준에 맞지 않는다는 것을 강조하려 했다. 한마디로 한무제가 유가의 관념에 부합하는 군주가 아니라는 것에 방점을 찍었던 것이다. 사마광은 그저 한무제를 유학을 정치무대나 역사무대로 끌어올린 인도자 정도로 인식했다.
한편 한무제 통치하의 승상은 무능한 인물 일색이었는데, 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한무제는 공손홍, 석경같이 황권에 절대복종하는 귀속된 승상을 필요로 했다. 이들은 유사시에는 희생양이나 정적의 희생물이 됐다. 한무제에게 승상은 황권 강화를 위해 미리 계획된 과정 일부에 불과했을 뿐이다.

▷ 사방의 오랑캐를 복종시켰다는 업적에 관해

『한서』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서쪽으로 안식국에 이르렀고, 동쪽으로 갈석산까지 이르렀는데, 그곳에 낙랑과 현토군을 설치했다. 북쪽으로 흉노를 만 리 밖으로 내쫓고, 그곳에 영루와 요새를 만들었다. 그리고 남해에 8개의 군을 만들었다.”
안식국은 오늘날의 이란으로, 한무제는 서역을 관통해 많은 문물과 문화가 한나라에 전해지게 했다. 여기까지의 업적만 보더라도 한무제가 중국 역사상 무척 뛰어난 군주라는 것을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러나 한무제가 사방으로 영토를 확장하는 과정에서 국내 경제와 백성의 생활은 크게 황폐해졌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전쟁에는 사람은 물론이고 양식과 군수품도 필요하다. 이 모든 것은 최후에 백성이 부담해야 했다.
흉노와의 전쟁은 한무제 시기에 가장 주요한 대외 활동이었는데, 사마천, 반고, 사마광의 관점과 입장은 사뭇 다르다. 사마천은 『사기』〈흉노열전〉의 결론 부분에 아주 저명한 평론을 남겼다.

지금 흉노 문제를 토론하는 사람은 한때의 방편에 맞추어 천자에 게 자기주장이 채택되게끔 노력하고, 다만 한때의 이해에만 사로잡혀 피차의 올바른 정세를 파악하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장수들은 중국의 광대한 것을 믿고 기세를 올렸고, 천자는 그들의 영향을 받아 방침을 결정해서 크고 깊은 공업을 이룰 수가 없었다.

사마천은 당시 신하들이 한무제에게 잘 보이고, 제 부귀공명을 위해서 정책을 만들고, 장수들은 대국이라는 자만심에 들떠서 무력으로만 흉노 문제를 해결하려고 해서 최후에 “크고 깊은 공업을 이룰 수 없었다”고 비판했다.
사마광은 화친정책으로 흉노에게 농락당하는 것을 반대하고, 일정한 무력을 가지고 그들을 상대해야 한다고 봤다. 다만 국내 백성의 생활을 희생하면서까지 대외전쟁을 감행하는 것을 찬성하지 않았다.
사마광이 살던 송(宋)대 신종을 대표로 몇 대까지의 황제들은 옛 한나라와 당나라 영토를 수복하려고 부단히 애를 썼다. 신종은 사마광이 쓴 『자치통감』의 서명을 지어준 황제인데, 사마광은 부러 한무제를 무력을 남용해 전쟁을 일삼았던 반면교사의 전형으로 삼았던 것이다.
반고는 사마천, 사마광과 다르게 한무제의 대외개척을 칭찬했다. 그는 『한서』〈흉노전〉 끝에 제 견해를 장황하게 피력했다. 반고는 흉노 문제는 각 시대에 따라 각기 다른 해결책을 가져야 한다고 했으며 화친으로 장기간의 평화를 추구하는 것은 대단히 유치하다고 봤다. 반고는 한나라가 빈번히 흉노의 감언이설에 속아 믿을 수 없는 화친조약에만 의존한다고 했다. 그래서 한무제의 적극적인 흉노에 대한 공격을 크게 칭송한 것이다.
한무제의 한나라가 사방으로 출격한 데 또 하나의 대표인 예가 장건의 서역 개척이다. 사마천은 한무제의 허영심이 촉발한 서역 사신의 파견이나 접대 등에 관해서는 비판적 태도를 견지했다. 많은 사람이 장건과 같은 사신이 되길 원했던 것은 모두 부귀공명을 원했기 때문이다. 일단 사신이 되면 많은 재물을 가지고 다니며 오랑캐에게 이를 뿌리면서 부를 과시하고 또한 사적으로 재물을 헐값에 팔아 이익을 챙길 수 있었다는 것이다.
사마천은 이들을 “망령되게 말하고, 품행이 나쁜 무리”라고 평가절하했다. 실제 사신은 외국과 교류한다는 명목으로 백성의 고혈이나 마찬가지인 재물을 물 쓰듯 하고, 좀도둑처럼 자기들 이익만 챙기는 데 급급했다. 거기에 한무제의 허영심이 더해져 국고를 탕진하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사마광은 『자치통감』에서 서역 문제를 처리할 때 『사기』와 『한서』 기록을 위주로 그대로 수록하고 별도로 평론을 가하지 않았다. 무슨 까닭일까? 사마광은 한무제가 사방의 오랑캐를 정벌하고 영토를 확장하는 것 자체를 부정적으로 보았다. 사마광은 안으로 궁실을 사치스럽게 꾸미고, 밖으로 사방의 오랑캐를 정벌함을 일삼았으며, 신선과 괴이한 것을 믿고 현혹하며 순행과 유람이 한도가 없어서 백성으로 하여금 피폐해 일어나 도적이 되게 했으니, 진시황과 다른 것이 별로 없었다고 평했던 것이다.

▷ 미신과 신선을 숭배하고 만년에 종래 정책을 철회한 것에 관해

『사기』〈봉선서〉에 최후의 말은 이렇다. “천자는 갈수록 방사들의 괴이한 말에 염증을 느꼈으나, 그들의 농락이 끊이지 않아 신선을 만나기를 바랐다. 그 후 방사들의 신선에 대한 담론은 갈수록 많아졌으나, 그 결과가 어떠했을지는 눈에 보이는 듯하다.”
사마천은 한무제 시대에 살아서 매우 조심스럽게 당시 부정적인 측면을 들춰냈다. 글을 쓸 때는 매우 신중했고 직접 표현하기보다 에둘러 숨겨서 표현하는 기법을 썼다. 그러나 신선을 찾고 불로장생을 추구하는 일에 대해서는 아주 명백하게 반대했다
반면 반고는 한무제가 신선을 찾는 일을 황당하고 가소로운 것으로 치부하지 말라고 강조했다. 그는 한무제의 행위가 하늘과 소통해 한나라의 안전을 장구하게 보전하려는 것이 목적이라고 봤다. 한편, 한무제가 미신을 믿고 신선을 찾은 일에 대해서 사마광은 다른 의견을 피력했다. 사마광이 살았던 시대는 한무제와 1천여 년간의 시차가 난다. 시대와 사상에 거대한 변화가 있었다. 한무제 시대의 시 시비비는 그와 무관하다. 그는 한무제의 경험에서 교훈을 찾아 현재의 통치자를 도우려고 했다. 사마광이 한무제가 만년에 스스로 반성할 때 전문적으로 한무제가 미신을 믿고, 신선을 찾으려고 했던 것을 매우 후회한다고 기술했다. 그래서 만년에 한무제는 방사들을 전부 파면시켰다고 했다. 그러고 나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기술했다. “지난 시절 어리석고 미혹해 방사들에게 속았다. 천하에 어찌 선인이 있겠는가? 다 요망할 뿐이다.”(『자치통감』 권 22).
한무제는 태자인 유거가 일으킨 난(무고지화)을 수습하고는 만년에 자신을 책망하는 조서를 발표한다. 흉노를 공격하고 서역 제국을 경영하려고 백성에게 부과한 물적?정신적 피해를 반성한다는 것이 하나요, 이전에 수행한 전쟁이 최종적으로는 승리를 장식했지만, 결과적으로 인력과 물자를 엄청나게 손해 보았다는 것이 또 하나였다. 가혹하게 세금을 거두는 일을 반성하고 앞으로 농업생산에 전념하자는 것이 마지막 내용이었다.
세 사학자의 붓에서 살펴본 한무제의 면모는 각기 다르다. 사마천은 자신이 살았던 시대와 한무제의 통치 기간이 거의 일치해 친히 목격한 것을 서술했다. 반고의 경우에는 한무제가 죽은 지 120년이 지나 장차 서한西漢이 멸망하고, 동한東漢이 일어나 다시 한실漢室을 부흥復興하
사마광은 한무제가 죽은 지 1천여 년이 지난 송대宋代에 와서 썼다. 사마광은 한무제 시대와 너무 차이가 나서 마치 다른 산 위에 서서 조망하듯이 기술했다.
이 세 사학자와 한무제 간의 거리는 큰 차이가 있다. 그들이 한무제를 바라보는 시각과 관심 또한 큰 차이가 있다. 21세기의 역사무대에서 다시 한무제 시대를 회고하면 당연히 우리만의 입장과 관념이 생길 것이다. 역사에서 왜 한무제 시대를 살펴보고 또 반복해서 해석해야 할까? 그것은 바로 다른 시대에 다른 관념과 사명으로 지난 역사를 새롭게 해석해야 하기 때문이다. 역사란 마치 어린 처녀를 어떻게 분장하느냐와 같기 때문이다.

▣ 작가 소개

저자 : 강붕
姜鵬
1978년생, 한족漢族, 절강浙江 영해寧海 사람이다. 역사학 박사로 현재 복단대학復旦大學 역사과에서 강의를 하고, 중국고대학술사, 사상문화사 연구에 전념하고 있다. 대표저술로 『북송경연여송학적흥기北宋經筵與宋學的興起』, 『난설적설유공안難說的說儒公案』, 『삼국전사三?前史: 일개괴뢰적역량一?傀儡的力量』 등이 있다. 2012년에 중국 CCTV 백가강단百家講壇 프로그램에 최연소 청년 학자로 출연해 『한무제적삼장면공?武帝的三?面孔』을 주제로 강연을 펼치며 사회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켰다. 장래가 매우 촉망되는 역사학자로 중국 학계와 세간의 주목을 받고 있다.

역자 : 김영진
金英鎭
동국대학교 중문과 및 동 교육대학원 한문교육과를 졸업하고, 중국 사천대학교 중문과 고전문헌학 전공으로 문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동국대, 광운대, 한성대, 강남대 강사 및 한신대 연구교수, 동방대학원 겸임교수 등을 역임했다. 대표저술로 『치도治道』, 『한 권으로 읽는 도교道敎』, 『중국어 이야기』, 『중국인을 위한 한국어 첫걸음』, 『청소년 명심보감』, 『청소년 논어』 등 다수가 있다. 현재 동양 고전번역과 중국문화사, 중국어 연구에 종사하고 있다.

▣ 주요 목차

저자 서언
무엇 때문에 한무제는 세 얼굴의 제왕으로 그려지나? 4

제1강 제왕帝王의 면모 25
한무제漢武帝에 관한 서로 다른 평가 / 하나의 스토리, 세 가지 견해
『사기』, 『한서』 그리고 『자치통감』과 한무제 / 왜 한무제인가?

제2강 제후諸侯를 정리하다 43
분봉과 군현제의 모순 / 7국의 난이 한무제의 통치에 남긴 영향
한무제 통치 초기, 제후국에 관한 처리 / 회남왕淮南王 모반 사건

제3강 회남淮南의 원통한 사건 61
유안劉安의 모반 / 앞뒤가 안 맞는 하나의 내막 / 유안의 모반 동기
『자치통감』의 건원 6년 / 유안을 타격한 진짜 이유

제4강 대협大俠의 죽음 83
『자치통감』에 있는 하나의 기현상 / 유협 무리와 그 특징
한무제 안중의 곽해 / 역사가들의 유협에 대한 다른 의견

제5강 오직 유술儒術을 숭상하다(독존유술) 101
한 가지 상식에 관한 논쟁 / 통치 사상과 궁정정치
유학과 황로학파의 첫 번째 교전 / 한무제가 친정親政한 후의 선택
세 역사학자의 ‘독존유술獨尊儒術’에 대한 의견

제6강 진짜와 거짓 유학 117
격식에 구애받지 않는 인재 선발 / 한무제가 공손홍을 임용한 이유
진짜와 거짓 유학 / 세 사학자의 다른 견해

제7강 승상의 운명 133
공손하公孫夏, 승상을 거절하다 / 석경石經과 원봉元封 연간에 발생한 유민
유민 사건의 책임 / 세 사학자의 다른 표현 / 한무제 통치하의 승상

제8강 장탕張湯의 승진과 좌천 149
도굴사건이 부른 정치투쟁 / 장탕과 장청적의 죽음 / 장탕의 정해진 배역
장탕과 한무제 / 황권의 도구, 혹리

제9강 혹리, 요직을 차지하다 167
피비린내 나는 태평성대 / 혹리酷吏 풍조의 출현 / 혹리들의 특징
순리循吏의 공석 / 내정과 외교

제10강 사방으로 출격하다 185
한무제 때의 급격한 변화 / 한무제 초기의 대외활동 / 한무제의 영토 확장
한무제 업적에 관한 세 사학자의 다른 견해

제11강 마읍馬邑의 계책이 실패하다 203
평성平城의 포위와 한나라의 굴욕 / 마읍馬邑의 계략 / 왕회王恢의 죽음
누가 총사령관이었던가?

제12강 위청과 곽거병의 전공과 업적 215
위청衛靑의 전기 / 대장군의 탄생 / 표기장군驃騎將軍 / 장군 별의 추락

제13강 외숙과 생질의 색다른 취향 231
위청과 곽거병의 성격 차이 / 위청과 곽거병의 공통점 / 위청과 곽거병이 중용된 이유

제14강 제후로 봉해지지 못한 이광李廣 245
‘비장군飛將軍’ 이광 / 이광의 죽음 / 이광과 위청의 비교
이광이 제후로 봉해지기 어려웠던 까닭

제15강 서역에 사신을 보내다 261
머나먼 서역 / 장건張騫, 서역에 사신으로 가다
서역에 다시 사신으로 가다 / 한무제의 서역 경영 / 역사가들의 다른 평론

제16강 한혈보마汗血寶馬를 얻다 277
신마神馬가 서북쪽으로부터 오리라 / 사신을 보내 말을 구하다
이사貳師 장군 / 다시 대완을 정벌하다 / 사학자들의 대완 정벌 평가

제17강 재정위기 293
재정상태가 급격하게 나빠지다 / 재정정책의 선회
정책이 시행된 후 / 사학가들의 다른 서술

제18강 복식卜式, 한무제의 꼭두각시 309
복식卜式, 한무제를 지지하다 / 총애를 잃다
복식과 한무제 관계에 대한 세 가지 서술 / 한무제, 공사公私 재정을 혼동하다

제19강 사공史公, 굴욕적인 형벌을 받다 325
이릉 사건과 사마천의 형벌 / 이릉 사건이 『사기』 편찬에 준 영향
세 역사서에 묘사된 이릉 사건의 차별점 / 세 역사가의 견해를 어떻게 생각하나?

제20강 인재의 모집과 등용 341
‘골계滑稽’ 동방삭東方朔 / 동방삭과 한무제의 용인 책략 / 세 역사서에 기록된 동방삭 / 한무제가 등용한 사람들 / 사마천의 직접 체험담 / 사마광, 두 측면에서 관찰하고 생각하다

제21강 신선을 찾아 나서다 359
이소군李少君 이야기 / 한무제의 방사方士들 / 세 사학자의 다른 견해 /

제22강 봉선封禪의 전주 375
상서로운 조짐이 잇달아 출현하다 / 연호年號의 탄생 / 상서로운 징조와 봉선
사마상여司馬相如의 유서遺書 / 세 사학자의 평론

제23강 봉선대전封禪大典 389
진시황과 한무제가 거행한 봉선封禪 의식 / 황제黃帝가 신선이 된 전설 / 태산에서 봉선 의식을 거행하다 / 사마담司馬談의 죽음 / 세 사학자의 다른 서술

제24강 무고巫蠱의 화가 일어나다 407
무당의 활약 / 진황후陳皇后 사건 / 두 공손씨公孫氏의 죽음 / 이들 사건의 본질에 대한 세 사학자의 다른 견해

제25강 부자지간 421
유거劉据의 탄생 / 한무제와 위자부 / 한무제와 유거 / ‘요모문堯母門’ 사건
세 사학자의 다른 서술

제26강 예견된 분쟁 437
부자지간의 틈 / 강충江充의 모함 / 태자, 반란을 일으키다 / 세 사학자의 다른 기록

제27강 사마천, 절필絶筆하다 449
무고지화의 후속 / 사공史公의 절필絶筆 / 『자치통감』의 단서
『한서』의 특징 / 무고의 사건에 대한 총 결말

제28장 자신을 책망하는 조서詔書 465
한무제 만년에 닥친 문제 / 윤대輪臺에서 자기 죄를 책망하다 태자를 잘못 판결한 것을 시정하다 / 국책의 개정과 태자 사건의 관계 역사학자들의 다른 분석

제29강 임종 때 어린 자식을 부탁하다 481
새로운 태자 / 유불릉을 태자로 선택한 이유 / 태자의 생모를 죽이다
고명대신顧命大臣 / 사학자들의 평가

제30강 공적과 과실에 대한 시비是非 495
무엇 때문에 한무제는 세 가지 면모를 가졌다고 하는가? / 한무제의 내정內政 성적
한무제가 중국 판도에 끼친 공헌 / 세 사학자에 비친 미신과 신선 숭배

역자의 글 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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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 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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