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 출판사서평
예견됐던 국정 농단 사태,
왜 막지 못했을까?
지난 12월 9일, 박근혜 대통령 탄핵소추안이 국회에서 가결되었다. 사상 초유의 국정 농단 사태에 국민들은 “이게 나라냐”라며 분노했고, 주말마다 촛불을 들고 광화문으로 모였다. 국민의 뜻을 외면할 수 없었던 국회는 탄핵 소추안을 통과시켰고, 이제 공은 헌법재판소로 넘어갔다. 헌재의 최종 판결이 나기까지 대통령 권한대행이 대리 업무를 본다고는 하지만, 당분간 정상적 국정 운영이 어려워졌다. 어쩌다가 이렇게 됐을까? 최순실 게이트는 박근혜 대통령이 당선되기 전인 2007년 이미 한나라당 경선 과정에서, 또 2012년 일부 야권에 의해 그 가능성이 여러 차례 경고되었던 사안이다. 그런 여과 체제가 작동했음에도 박근혜 후보가 결국 대권을 차지했다는 것은, 우리의 체제 자체에 문제가 있다는 뜻이다.
저자는 이렇게 총체적 난국에 빠진 한국 사회와 정치 상황의 원인을 ‘냉소주의’에서 찾는다. 우선 박근혜 정권이 탄생할 수 있었던 이유는 국민들이 정치에 대해 가졌던 냉소주의 때문이다. 정치 지향에 대한 냉소와 정치 역시 하나의 상품으로 소비하는 소비주의로 인해 진보 정치가 외면받게 되었고, 이를 발판으로 보수 정권이 대선에서 이길 수 있었다. 한편 박근혜 정권이 실패하게 된 원인 역시 권력 자체의 냉소적 정치의식 때문인데, 그 대표적 예가 세월호 사건 이후 정부가 보여준 대처 방식이다. 박근혜 정부는 구난 작업에서의 무능과 실패를 반성하고 제대로 된 안전 대책과 정책을 내놓기는커녕 난데없는 ‘해경 해체’라는 처방 아닌 처방과 카메라 앞에서 눈물을 흘리는 작위적 연출 등 문제의 근원 해결이 아닌 정치적 리스크를 줄이는 데에만 골몰했는데, 이는 바로 권력 자체가 냉소적 정서를 바탕으로 움직이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냉소주의의 근원, 열등감
그렇다면 이러한 냉소주의는 무엇 때문에 생겨나게 되었는가? 그 근원은 다름 아닌 ‘열등감’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다수의 사람이 함께 살아가는 사회에서는 필연적으로 잘난 사람과 그만큼 잘나지 못한 사람이 나뉘게 마련이다. 부자가 있는가 하면 가난한 사람이 있고, 명문대생이 있는가 하면 이른바 ‘지잡대생’도 있으며, 대기업에 다니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취직조차 어려운 사람이 있다. 무한경쟁 사회에서 이러한 우열은 점점 극단화되었고, 인터넷의 발달은 그로 인한 열등감을 더욱 일상적으로 만들었다. 시쳇말로 ‘엄친아’라 불리는 잘난 사람들은 과거 같으면 멀리서 풍문으로만 듣거나, 주변에 있다 해도 소수였을 것이다. 그러나 인터넷은 다수의 사람이 실시간으로 교류할 수 있게 해주었고, 그곳에서 우리는 나의 능력을 넘어서는 사람을 수없이 마주치게 되었다. 이는 다시 우리가 인터넷을 할 때 자기를 전시하게 되는 이유가 된다. 모든 것이 기록으로 남는 인터넷에서는 필연적으로 남의 평가 대상이 되리라는 것을 전제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끊임없이 남들과 비교되는 상황에서는 나의 합리성과 열등하지 않음을 증명해야 하는데, 이는 ‘소비주의’의 형태로 발현된다. 이러한 효율적 소비주의야말로 냉소적 세계관 위에 성립되는 것이다. 현대 사회에서 소비자는 물건을 살 때 언제나 이 상품에 이 가격이 합당한지, 혹은 지금 내가 하는 행동이 효율적인지 의심을 한다. 한마디로 우리의 일상은 ‘속지 않겠다’는 냉소적 결의로 차 있다. 만약 누군가 어떤 물건을 터무니없이 비싼 값에 산다면, 그 사람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열등한’ 사람이 되고 만다. 이러한 소비주의는 비단 재화를 구매할 때뿐 아니라, 나아가 우리가 살아가는 데 선택을 해야 하는 순간마다 작동한다. 선거에서 일정한 노선이나 이념에 따라 투표를 하는 것이 아닌 나에게 가장 많은 이득을 줄 후보를 찍는 것이 그러한 예다.
효율성의 관점에서 바라본 세월호 사건
효율성 제일주의로 인해 벌어진 비극이 바로 세월호 참사다. 모두가 알다시피 세월호는 더 많은 이윤을 남기기 위해 배의 안정성을 희생하는 방식으로 운영됐다. 만일의 상황에 대비해 비용을 들이는 것을 우리는 비효율적이라고 여긴다. 여기서도 효율성의 논리가 작동하는 것이다. 저자는 또한 사고 수습 과정에서 또 다른 차원의 효율성이 작용했음을 지적하는데, 바로 인명 구조의 외주화이다. 즉, 국가가 비용을 줄이기 위해 인명 구조 업무를 외부 업체에 맡김으로써 국가의 기본적 권리이자 의무를 스스로 포기했다는 것이다.
글로벌 경제라는 관점에서 뒤처지지 않아야 한다는 체제적 열등감으로 인한 위기의식이 국제구난협회 정회원 자격을 가진 업체가 탄생하는 배경이 됐고, 자신감을 잃은 국가가 당연히 맡았어야 할 구조 작업을 시장에 떠넘기면서 시장화된 형태의 사고 뒷수습에만 체제의 관심이 쏠리게 됐으며, 결국 ‘인명의 구조’는 온데간데없고 오직 돈을 어떻게 할 것인가의 문제만 남게 된 것 아니냐는 생각을 해볼 수 있다. (본문 79~80쪽)
이런 관점에서 보면 세월호는 체제의 위기라기보다는, 체제가 ‘효율성’이란 이름 아래 돌아간 결과였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참사를 다시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는 근본적으로 ‘효율성의 신화’를 깰 필요가 있다.
‘판단 중지’가 가져오는 결과
열등감은 결코 유쾌한 감정이 아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열등감을 벗어나기 위한 여러 시도를 한다. 가장 흔한 방법은 자기 자신을 냉소적인 사람으로 규정하면서 타인의 능력을 평가하는 자신의 ‘공정한 잣대’를 전시하는 것이다. 또 다른 방법은 잘난 사람에게 ‘열광’하면서 그들과 대비되는 ‘못난’ 존재들에 대해 적대적 태도로 일관하는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나’는 ‘잘난 사람들의 하나’가 될 수 있다. 이러한 열광을 유지하기 위해 우리는 때로 열광의 대상에 대해 객관적으로 판단하기를 포기하기도 한다. 게임 커뮤니티 내에서 벌어지는 상황을 보자.
게이머 커뮤니티도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므로 시사와 관련한 여러 논쟁을 벌이는 경우가 있을 수밖에 없는데, 그럴 때마다 게임을 잘하는 사람의 의견에 일부 사람들이 무비판적으로 따라가는 현상이 일어났다. (……) 이 게임 고수의 지지자들을 앞서 말한 부류로 나눈다면 ‘열광하는 자들’로 규정할 수 있을 텐데, 이 열광의 정체는 앞서 살펴본 열등감의 문법에서 고스란히 드러나는 ‘능력’에 대한 환호이면서 동시에 ‘사회적 의견’이라는 것에 대한 냉소다. ‘게임 고수’와 한편이 되느냐 ‘사회적 의견’에 대한 생각의 차이를 따지느냐에서 전자를 선택한 것이기 때문이다. 즉, 여기서 사회적 의견에 대한 열광하는 자들의 태도는 ‘판단 중지’라고 요약할 수 있다. 열광을 유지하기 위해 어떤 문제에 대한 판단을 중지한 것이다. (본문 85~86쪽)
이러한 냉소적 판단 중지는 정치적 판단을 내릴 때도 흔히 작동한다. 2011년 통합진보당 창당이 그 대표적 예다. 서로 다른 노선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교섭단체 구성’이라는 당장의 정치적 이득을 위해 그 사이에 존재하는 이견을 어떻게 풀어갈지에 대해서는 ‘판단 중지’를 선택한 것이 종국에 진보 정치가 갈 길을 잃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고 저자는 말한다.
전 세계적 현상으로 나타나는 냉소주의
2016년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한 두 가지 사건이 있었다. 먼저 영국의 유럽연합 탈퇴. 그리고 미국 대선에서 트럼프 당선. 저자는 이 두 사건 역시 냉소주의의 결과로 분석한다. 브렉시트의 경우 유럽연합 탈퇴를 강력히 주장했던 정치인들이 정작 탈퇴 가결 이후 당황한 나머지 제대로 된 대처를 하지 못한 데서 그들의 주장이 당장의 정치적 이익을 위한 것이었음이 명백히 드러났다. 즉, 실제 브렉시트에 대한 실질적 전망 없이 보수적 유권자를 끌어들이기 위해 달콤한 말을 쏟아냈다는 것이다.
도널드 트럼프의 미 대통령 당선도 전 세계에 브렉시트 못지않은 충격을 줬다. 애초에 공화당에서조차 제대로 된 대접을 받지 못했던 트럼프가 대권까지 차지한 것은 냉소주의 없이는 설명이 불가능하다. 명분만 내세우고 자신들의 잇속만을 챙기는 기성 정치인을 찍느니 차라리 속 시원히 ‘일자리를 다시 빼앗아 오겠다’고 말하는 트럼프를 찍겠다는 것이다. 여기서 볼 수 있는 것은 유권자들이 더 이상 기존의 좌우관념에 따라 투표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도널드 트럼프와 버니 샌더스의 등장은 단순한 극우와 극좌의 싸움으로만 묘사 할 수 없다. ‘백인 남성들의 분노’라는 설명도 상황을 모두 드러내기에는 부족하다. 오히려 이것은 기득권 정치에 냉소주의가 반응하는 두 가지 양상이 고스란히 나타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이 두 가지 양상은 명확히 분리된 독립된 정치 기획에 의한 것이라기보다는, 더 큰 묶음으로서의 냉소주의에 좌우되며 ‘속아 넘어가는 것을 즐기는’ 사람들이 흔히 그러듯 ‘진정한 무엇은 없다’와 ‘진정한 무엇은 있다’의 사이를 오가는 대중의 현재를 그대로 반영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본문 243~244쪽)
냉소의 정치를 벗어나
앞으로 나아가기 위하여
이러한 현상은 우리나라에서도 마찬가지다. 앞서도 말했듯, 우리는 투표를 할 때조차 소비주의적 관점에서 후보를 정한다. 최근 선거들에 등장한 공약들을 보면 더 이상 보수와 진보를 논하는 것이 의미 없는 경우가 많아졌다.
남은 건 어떤 인상뿐이다. 선거전에서 진보 정당 몫의 표를 흡수해야 할 필요가 있을 때에는 실제 제 1야당이 충분히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급진적인 구호까지 내세우는 데 망설임이 없고, 이 때문에 중도층을 잃었다는 비판이 나오면 다시 거리낄 것 없이 중도적 태도로 복귀하는 데 한 점의 의심도 갖지 않는다. 정치 세력이 그들 스스로 주장하는 이념과 가치에 동의하는 더 많은 대중을 조직하기보다, 더 많은 대중이 원하는 쪽으로 자신의 존재 의의를 바꾸는 데 익숙해지고 있다. (본문 218쪽)
이런 상황에서 보수와 진보의 경계는 모호해졌고, 정당들은 명확한 정치적 지향을 잃고 ‘보따리장수’로 전락한 지 오래다. 저자는 이런 상황에서 빠져나가기 위해 지금까지 이야기한 열등의식, 냉소주의, 소비주의라는 세 가지 차원에서 화해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이것이 ‘극복’이 아닌 ‘화해’가 되어야 하는 이유는 우리가 이 세 개념으로부터 자유롭지 않고, 그것과 완전히 결별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열등의식과 화해하기 위해서는 경쟁에서 지더라도 기회를 얻을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야 하며, 이것은 주체들의 연대에서 시작할 수 있다. 또 냉소주의에 대해서는 이를 인정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소비주의를 넘어서기 위해서는 소비자들에게 생산자의 존재를 생각하도록 해야 한다. 그것은 소비자이면서 동시에 노동자인 자신을 자각하는 데서 시작한다.
이러한 화해를 통해 정치적 냉소주의를 무력화할 때 현재 우리가 직면한 문제를 풀어낼 수 있다. 단순히 현재의 정권을 정상으로 돌려놓는 데 그친다면, 언제든 제2, 제3의 최순실 게이트가 다시 발생할 가능성이 있다. 당위와 명분의 정치를 되찾을 때 소비의 대상에 머무르고 있는 정치를 구해낼 수 있다는 것이 저자의 결론이다.
▣ 작가 소개
저자 : 김민하
1982년 경기도 수원에서 출생했다. 온라인상에서 ‘이상한 모자’라는 필명으로 알려져 있으며 홈페이지 [혁명은 언제나 시기상조]를 운영하고 있다. 인터넷으로 『딴지일보』를 접하면서 정치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2002년 민주노동당에 입당했다. 이후 덤프연대와 민주노동당 상근자로 활동했다. 2008년 민주노동당을 탈당하고 진보신당에 입당한 뒤 2011~2012년 진보신당 기획실 국장으로 일했다. 현재 매체 비평지 『미디어스』에서 기자로 일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레닌을 사랑한 오타쿠』, 『돼지의 왕』이 있고, 『지금, 여기의 극우주의』, 『우파의 불만』, 『트위터, 그 140자 평등주의』 등의 책에 공저자로 참여했다.
▣ 주요 목차
1_우리 삶 전체를 지배하는 열등감
열등감의 퍼레이드
모든 것의 인플레, 팬플레이션
과시적 소비와 ‘현명한’ 소비
가격 대 성능비
재구매 의사 있음
‘잡캐’에 대한 무시
하나만 잘해도 돼
생애주기별 열등감의 악순환
해피아의 기원
체제적 열등감을 극복하기 위한 시도
동전의 양면
세월호 참사는 위기가 아니었다
2_인터넷 시대의 새로운 현상들
열등감을 극복하는 법
PC통신에서 인터넷 시대로
누구나 논객이 될 수 있는 인터넷 게시판
개인의 입장을 전시하는 곳, 블로그
감정의 전장, 트위터와 페이스북
쿨게이들의 ‘진짜 의도’
대중적 불만의 폭발, 사이버 민중주의
게임 감각과 현실세계
3_냉소주의로 전화하는 열등감
냉소주의의 두 가지 양상
오디션 프로그램이 유행하는 이유
속아 넘어가는 것을 즐겨라
진정성을 둘러싼 이분 구도
‘기레기’에 대한 불신
소비자라는 절대적 지위
갑질 논란, 소비자와 서비스 노동자의 대립
저항의 논리, 통치의 논리
4_냉소주의가 지배하는 한국 정치
정치의 두 가지 얼굴
[나는 꼼수다]가 묻는 것
안철수 바람과 호남 정치
“이 친구가 아직도 정치를 몰라!”
정치가 승리하기 위해 필요한 것
정치적 보따리장수들
우파와 반反우파
제3정당론과 진보 정치
5_탈출구는 무엇인가
트럼프와 샌더스가 공유하는 것
극우 정치의 발호
브렉시트가 보여주는 것
표현의 자유와 정치적 올바름
미러링과 정상적 존재의 추구
냉소주의의 문법
열등의식과의 화해
냉소주의와의 화해
소비주의와의 화해
정치적 냉소가 지배한 박근혜 정권
당위와 명분의 정치를 복원하기 위하여
예견됐던 국정 농단 사태,
왜 막지 못했을까?
지난 12월 9일, 박근혜 대통령 탄핵소추안이 국회에서 가결되었다. 사상 초유의 국정 농단 사태에 국민들은 “이게 나라냐”라며 분노했고, 주말마다 촛불을 들고 광화문으로 모였다. 국민의 뜻을 외면할 수 없었던 국회는 탄핵 소추안을 통과시켰고, 이제 공은 헌법재판소로 넘어갔다. 헌재의 최종 판결이 나기까지 대통령 권한대행이 대리 업무를 본다고는 하지만, 당분간 정상적 국정 운영이 어려워졌다. 어쩌다가 이렇게 됐을까? 최순실 게이트는 박근혜 대통령이 당선되기 전인 2007년 이미 한나라당 경선 과정에서, 또 2012년 일부 야권에 의해 그 가능성이 여러 차례 경고되었던 사안이다. 그런 여과 체제가 작동했음에도 박근혜 후보가 결국 대권을 차지했다는 것은, 우리의 체제 자체에 문제가 있다는 뜻이다.
저자는 이렇게 총체적 난국에 빠진 한국 사회와 정치 상황의 원인을 ‘냉소주의’에서 찾는다. 우선 박근혜 정권이 탄생할 수 있었던 이유는 국민들이 정치에 대해 가졌던 냉소주의 때문이다. 정치 지향에 대한 냉소와 정치 역시 하나의 상품으로 소비하는 소비주의로 인해 진보 정치가 외면받게 되었고, 이를 발판으로 보수 정권이 대선에서 이길 수 있었다. 한편 박근혜 정권이 실패하게 된 원인 역시 권력 자체의 냉소적 정치의식 때문인데, 그 대표적 예가 세월호 사건 이후 정부가 보여준 대처 방식이다. 박근혜 정부는 구난 작업에서의 무능과 실패를 반성하고 제대로 된 안전 대책과 정책을 내놓기는커녕 난데없는 ‘해경 해체’라는 처방 아닌 처방과 카메라 앞에서 눈물을 흘리는 작위적 연출 등 문제의 근원 해결이 아닌 정치적 리스크를 줄이는 데에만 골몰했는데, 이는 바로 권력 자체가 냉소적 정서를 바탕으로 움직이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냉소주의의 근원, 열등감
그렇다면 이러한 냉소주의는 무엇 때문에 생겨나게 되었는가? 그 근원은 다름 아닌 ‘열등감’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다수의 사람이 함께 살아가는 사회에서는 필연적으로 잘난 사람과 그만큼 잘나지 못한 사람이 나뉘게 마련이다. 부자가 있는가 하면 가난한 사람이 있고, 명문대생이 있는가 하면 이른바 ‘지잡대생’도 있으며, 대기업에 다니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취직조차 어려운 사람이 있다. 무한경쟁 사회에서 이러한 우열은 점점 극단화되었고, 인터넷의 발달은 그로 인한 열등감을 더욱 일상적으로 만들었다. 시쳇말로 ‘엄친아’라 불리는 잘난 사람들은 과거 같으면 멀리서 풍문으로만 듣거나, 주변에 있다 해도 소수였을 것이다. 그러나 인터넷은 다수의 사람이 실시간으로 교류할 수 있게 해주었고, 그곳에서 우리는 나의 능력을 넘어서는 사람을 수없이 마주치게 되었다. 이는 다시 우리가 인터넷을 할 때 자기를 전시하게 되는 이유가 된다. 모든 것이 기록으로 남는 인터넷에서는 필연적으로 남의 평가 대상이 되리라는 것을 전제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끊임없이 남들과 비교되는 상황에서는 나의 합리성과 열등하지 않음을 증명해야 하는데, 이는 ‘소비주의’의 형태로 발현된다. 이러한 효율적 소비주의야말로 냉소적 세계관 위에 성립되는 것이다. 현대 사회에서 소비자는 물건을 살 때 언제나 이 상품에 이 가격이 합당한지, 혹은 지금 내가 하는 행동이 효율적인지 의심을 한다. 한마디로 우리의 일상은 ‘속지 않겠다’는 냉소적 결의로 차 있다. 만약 누군가 어떤 물건을 터무니없이 비싼 값에 산다면, 그 사람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열등한’ 사람이 되고 만다. 이러한 소비주의는 비단 재화를 구매할 때뿐 아니라, 나아가 우리가 살아가는 데 선택을 해야 하는 순간마다 작동한다. 선거에서 일정한 노선이나 이념에 따라 투표를 하는 것이 아닌 나에게 가장 많은 이득을 줄 후보를 찍는 것이 그러한 예다.
효율성의 관점에서 바라본 세월호 사건
효율성 제일주의로 인해 벌어진 비극이 바로 세월호 참사다. 모두가 알다시피 세월호는 더 많은 이윤을 남기기 위해 배의 안정성을 희생하는 방식으로 운영됐다. 만일의 상황에 대비해 비용을 들이는 것을 우리는 비효율적이라고 여긴다. 여기서도 효율성의 논리가 작동하는 것이다. 저자는 또한 사고 수습 과정에서 또 다른 차원의 효율성이 작용했음을 지적하는데, 바로 인명 구조의 외주화이다. 즉, 국가가 비용을 줄이기 위해 인명 구조 업무를 외부 업체에 맡김으로써 국가의 기본적 권리이자 의무를 스스로 포기했다는 것이다.
글로벌 경제라는 관점에서 뒤처지지 않아야 한다는 체제적 열등감으로 인한 위기의식이 국제구난협회 정회원 자격을 가진 업체가 탄생하는 배경이 됐고, 자신감을 잃은 국가가 당연히 맡았어야 할 구조 작업을 시장에 떠넘기면서 시장화된 형태의 사고 뒷수습에만 체제의 관심이 쏠리게 됐으며, 결국 ‘인명의 구조’는 온데간데없고 오직 돈을 어떻게 할 것인가의 문제만 남게 된 것 아니냐는 생각을 해볼 수 있다. (본문 79~80쪽)
이런 관점에서 보면 세월호는 체제의 위기라기보다는, 체제가 ‘효율성’이란 이름 아래 돌아간 결과였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참사를 다시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는 근본적으로 ‘효율성의 신화’를 깰 필요가 있다.
‘판단 중지’가 가져오는 결과
열등감은 결코 유쾌한 감정이 아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열등감을 벗어나기 위한 여러 시도를 한다. 가장 흔한 방법은 자기 자신을 냉소적인 사람으로 규정하면서 타인의 능력을 평가하는 자신의 ‘공정한 잣대’를 전시하는 것이다. 또 다른 방법은 잘난 사람에게 ‘열광’하면서 그들과 대비되는 ‘못난’ 존재들에 대해 적대적 태도로 일관하는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나’는 ‘잘난 사람들의 하나’가 될 수 있다. 이러한 열광을 유지하기 위해 우리는 때로 열광의 대상에 대해 객관적으로 판단하기를 포기하기도 한다. 게임 커뮤니티 내에서 벌어지는 상황을 보자.
게이머 커뮤니티도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므로 시사와 관련한 여러 논쟁을 벌이는 경우가 있을 수밖에 없는데, 그럴 때마다 게임을 잘하는 사람의 의견에 일부 사람들이 무비판적으로 따라가는 현상이 일어났다. (……) 이 게임 고수의 지지자들을 앞서 말한 부류로 나눈다면 ‘열광하는 자들’로 규정할 수 있을 텐데, 이 열광의 정체는 앞서 살펴본 열등감의 문법에서 고스란히 드러나는 ‘능력’에 대한 환호이면서 동시에 ‘사회적 의견’이라는 것에 대한 냉소다. ‘게임 고수’와 한편이 되느냐 ‘사회적 의견’에 대한 생각의 차이를 따지느냐에서 전자를 선택한 것이기 때문이다. 즉, 여기서 사회적 의견에 대한 열광하는 자들의 태도는 ‘판단 중지’라고 요약할 수 있다. 열광을 유지하기 위해 어떤 문제에 대한 판단을 중지한 것이다. (본문 85~86쪽)
이러한 냉소적 판단 중지는 정치적 판단을 내릴 때도 흔히 작동한다. 2011년 통합진보당 창당이 그 대표적 예다. 서로 다른 노선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교섭단체 구성’이라는 당장의 정치적 이득을 위해 그 사이에 존재하는 이견을 어떻게 풀어갈지에 대해서는 ‘판단 중지’를 선택한 것이 종국에 진보 정치가 갈 길을 잃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고 저자는 말한다.
전 세계적 현상으로 나타나는 냉소주의
2016년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한 두 가지 사건이 있었다. 먼저 영국의 유럽연합 탈퇴. 그리고 미국 대선에서 트럼프 당선. 저자는 이 두 사건 역시 냉소주의의 결과로 분석한다. 브렉시트의 경우 유럽연합 탈퇴를 강력히 주장했던 정치인들이 정작 탈퇴 가결 이후 당황한 나머지 제대로 된 대처를 하지 못한 데서 그들의 주장이 당장의 정치적 이익을 위한 것이었음이 명백히 드러났다. 즉, 실제 브렉시트에 대한 실질적 전망 없이 보수적 유권자를 끌어들이기 위해 달콤한 말을 쏟아냈다는 것이다.
도널드 트럼프의 미 대통령 당선도 전 세계에 브렉시트 못지않은 충격을 줬다. 애초에 공화당에서조차 제대로 된 대접을 받지 못했던 트럼프가 대권까지 차지한 것은 냉소주의 없이는 설명이 불가능하다. 명분만 내세우고 자신들의 잇속만을 챙기는 기성 정치인을 찍느니 차라리 속 시원히 ‘일자리를 다시 빼앗아 오겠다’고 말하는 트럼프를 찍겠다는 것이다. 여기서 볼 수 있는 것은 유권자들이 더 이상 기존의 좌우관념에 따라 투표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도널드 트럼프와 버니 샌더스의 등장은 단순한 극우와 극좌의 싸움으로만 묘사 할 수 없다. ‘백인 남성들의 분노’라는 설명도 상황을 모두 드러내기에는 부족하다. 오히려 이것은 기득권 정치에 냉소주의가 반응하는 두 가지 양상이 고스란히 나타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이 두 가지 양상은 명확히 분리된 독립된 정치 기획에 의한 것이라기보다는, 더 큰 묶음으로서의 냉소주의에 좌우되며 ‘속아 넘어가는 것을 즐기는’ 사람들이 흔히 그러듯 ‘진정한 무엇은 없다’와 ‘진정한 무엇은 있다’의 사이를 오가는 대중의 현재를 그대로 반영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본문 243~244쪽)
냉소의 정치를 벗어나
앞으로 나아가기 위하여
이러한 현상은 우리나라에서도 마찬가지다. 앞서도 말했듯, 우리는 투표를 할 때조차 소비주의적 관점에서 후보를 정한다. 최근 선거들에 등장한 공약들을 보면 더 이상 보수와 진보를 논하는 것이 의미 없는 경우가 많아졌다.
남은 건 어떤 인상뿐이다. 선거전에서 진보 정당 몫의 표를 흡수해야 할 필요가 있을 때에는 실제 제 1야당이 충분히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급진적인 구호까지 내세우는 데 망설임이 없고, 이 때문에 중도층을 잃었다는 비판이 나오면 다시 거리낄 것 없이 중도적 태도로 복귀하는 데 한 점의 의심도 갖지 않는다. 정치 세력이 그들 스스로 주장하는 이념과 가치에 동의하는 더 많은 대중을 조직하기보다, 더 많은 대중이 원하는 쪽으로 자신의 존재 의의를 바꾸는 데 익숙해지고 있다. (본문 218쪽)
이런 상황에서 보수와 진보의 경계는 모호해졌고, 정당들은 명확한 정치적 지향을 잃고 ‘보따리장수’로 전락한 지 오래다. 저자는 이런 상황에서 빠져나가기 위해 지금까지 이야기한 열등의식, 냉소주의, 소비주의라는 세 가지 차원에서 화해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이것이 ‘극복’이 아닌 ‘화해’가 되어야 하는 이유는 우리가 이 세 개념으로부터 자유롭지 않고, 그것과 완전히 결별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열등의식과 화해하기 위해서는 경쟁에서 지더라도 기회를 얻을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야 하며, 이것은 주체들의 연대에서 시작할 수 있다. 또 냉소주의에 대해서는 이를 인정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소비주의를 넘어서기 위해서는 소비자들에게 생산자의 존재를 생각하도록 해야 한다. 그것은 소비자이면서 동시에 노동자인 자신을 자각하는 데서 시작한다.
이러한 화해를 통해 정치적 냉소주의를 무력화할 때 현재 우리가 직면한 문제를 풀어낼 수 있다. 단순히 현재의 정권을 정상으로 돌려놓는 데 그친다면, 언제든 제2, 제3의 최순실 게이트가 다시 발생할 가능성이 있다. 당위와 명분의 정치를 되찾을 때 소비의 대상에 머무르고 있는 정치를 구해낼 수 있다는 것이 저자의 결론이다.
▣ 작가 소개
저자 : 김민하
1982년 경기도 수원에서 출생했다. 온라인상에서 ‘이상한 모자’라는 필명으로 알려져 있으며 홈페이지 [혁명은 언제나 시기상조]를 운영하고 있다. 인터넷으로 『딴지일보』를 접하면서 정치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2002년 민주노동당에 입당했다. 이후 덤프연대와 민주노동당 상근자로 활동했다. 2008년 민주노동당을 탈당하고 진보신당에 입당한 뒤 2011~2012년 진보신당 기획실 국장으로 일했다. 현재 매체 비평지 『미디어스』에서 기자로 일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레닌을 사랑한 오타쿠』, 『돼지의 왕』이 있고, 『지금, 여기의 극우주의』, 『우파의 불만』, 『트위터, 그 140자 평등주의』 등의 책에 공저자로 참여했다.
▣ 주요 목차
1_우리 삶 전체를 지배하는 열등감
열등감의 퍼레이드
모든 것의 인플레, 팬플레이션
과시적 소비와 ‘현명한’ 소비
가격 대 성능비
재구매 의사 있음
‘잡캐’에 대한 무시
하나만 잘해도 돼
생애주기별 열등감의 악순환
해피아의 기원
체제적 열등감을 극복하기 위한 시도
동전의 양면
세월호 참사는 위기가 아니었다
2_인터넷 시대의 새로운 현상들
열등감을 극복하는 법
PC통신에서 인터넷 시대로
누구나 논객이 될 수 있는 인터넷 게시판
개인의 입장을 전시하는 곳, 블로그
감정의 전장, 트위터와 페이스북
쿨게이들의 ‘진짜 의도’
대중적 불만의 폭발, 사이버 민중주의
게임 감각과 현실세계
3_냉소주의로 전화하는 열등감
냉소주의의 두 가지 양상
오디션 프로그램이 유행하는 이유
속아 넘어가는 것을 즐겨라
진정성을 둘러싼 이분 구도
‘기레기’에 대한 불신
소비자라는 절대적 지위
갑질 논란, 소비자와 서비스 노동자의 대립
저항의 논리, 통치의 논리
4_냉소주의가 지배하는 한국 정치
정치의 두 가지 얼굴
[나는 꼼수다]가 묻는 것
안철수 바람과 호남 정치
“이 친구가 아직도 정치를 몰라!”
정치가 승리하기 위해 필요한 것
정치적 보따리장수들
우파와 반反우파
제3정당론과 진보 정치
5_탈출구는 무엇인가
트럼프와 샌더스가 공유하는 것
극우 정치의 발호
브렉시트가 보여주는 것
표현의 자유와 정치적 올바름
미러링과 정상적 존재의 추구
냉소주의의 문법
열등의식과의 화해
냉소주의와의 화해
소비주의와의 화해
정치적 냉소가 지배한 박근혜 정권
당위와 명분의 정치를 복원하기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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