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 출판사서평
밥 딜런, 2016년 노벨문학상 수상!
그가 쓴 단 하나의 픽션
1966년 25세의 청년 밥 딜런을 만나다!
“한 번만 읽고 덮을 수 있는 책이 아니다. 읽을 때마다 매번 새로운 착상이
우리에게 침입하는 걸 발견하게 될 것이다.
밥 딜런만의 불꽃 튀는 한 세계를 품고 있는 책.” | 록 매거진
“청년 시절의 밥 딜런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이 책 역시 분명 마음에 들 것이다.” | 시카고 선타임스
“사실 인생은 읽을거리에 지나지 않는다
& 담배에 불을 붙일 무엇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바보! 그래서 네가 혁명을 하려는 거구나”
비트 제너레이션의 아이콘이자 반문화와 저항의 상징으로 자리매김했던
1966년, 스물다섯 살 청년 밥 딜런의 정신의 지도
+
밥 딜런을 ‘거리의 음유시인’이게 한 수많은 노랫말이 탄생하기까지
그의 머릿속 생각을 여과 없이 옮겨놓은
상상의 보고이자 수많은 페르소나의 각축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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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식의 흐름 기법으로 써내려간 시적 산문과 가사의 실험적 조합
= 밥 딜런 소설 『타란툴라』
2016년 국내외를 막론하고 가장 놀라웠던 문화계 뉴스 중 하나를 꼽는다면 단연 ‘가수’ 밥 딜런의 노벨문학상 수상이 아닐까.
전년도의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에 이어 2년 연속 ‘의외성’의 면모를 보여준 노벨문학상위원회의 행보는 ‘파격’이라 일컬어지고, 국내외 일각에서는 ‘문학’에 대한 배반이라는 의견과 ‘문학’의 범주 자체에 대한 근본적 고민과 재정의가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대등하게 등장하며 한동안 활발한 논의가 이어졌다. 하지만 밥 딜런의 노벨문학상 수상을 둘러싸고 벌어진 이러한 일련의 논의와 관계없이, 그가 50여 년 간 40여 장의 앨범을 통해 발표해온 400여 편의 노랫말이 문학의 반열에 오른 건 이미 오래전의 일이었다. 1970년대부터 영미문학계에서는 그의 노랫말을 텍스트로 삼은 학위 논문이 발표되기 시작했고, 문학계 일부에서도 그의 노랫말을 시로 인정하는 움직임이 일었다. 현재는 영미권뿐만 아니라 한국의 대학 강의에서도 밥 딜런의 노랫말을 문학 텍스트로 활용함은 물론, 다른 작가들과 동등하게 그 이름을 문학의 영역에서 거론하고 있는 상황이다. 노벨문학상 선정위원회가 내세운 이유 역시 “미국 음악의 전통 안에서 새로운 시적 표현을 창조해냈다”로, 가수가 아닌 ‘시인’으로서 밥 딜런의 공로를 인정했다.
‘사건’이라면 사건이었고 ‘현상’이라면 현상이었을 밥 딜런의 노벨문학상 수상은 한마디로 ‘밥 딜런 문학 세계’에 대한 궁극의 ‘발견’이라고도 요약할 수 있다. 그리고 이처럼 밥 딜런 문학 세계의 발견이라고 요약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이유가 바로 그의 소설 『타란툴라(Tarantula)』다. 시적 산문과 노랫말이 조합된 형식으로 인해 ‘실험 소설’이라 일컬어지는 그의 첫 ‘문학 작품’ 『타란툴라』는 1964년부터 66년 사이에 쓰여진 것으로 알려져 있고, 당초 1966년 가을 출간될 예정이었으나 예기치 못한 사고로 인해 그로부터 5년 뒤인 1971년에 비로소 출간된다.
1971년 초판 출간 당시 “윌리엄 버로스의 『벌거벗은 점심(The Naked Lunch))』과 유일하게 비견할 만한 책”(뉴욕 타임스)이라 평가받으며 화제의 중심에 섰던 ‘실험 소설’ 『타란툴라』는 그의 자서전 『연대기: 제1권(Chronicles: Volume One)』을 제외하고 그가 출판을 염두에 두고 본격 집필했던 유일한 작품으로, 그에게 노벨문학상을 안겨준 노랫말 텍스트들과는 또다른 측면에서 그의 작가적 면모를 확인케 하는 텍스트인 셈이다.
1966년 ‘전성기’와 ‘은둔’ 사이, 여기 ‘밥 딜런’이 있었다
“여기 ‘타란툴라’가 있다Here Lies Tarantula”
1971년 맥밀런 출판사의 편집자였던 로버트 마켈이 밥 딜런의 첫 책이자 첫 소설 『타란툴라』의 초판 1쇄를 펴내며 썼던 ‘편집자 서문’의 제목이다. (국내에는 “바람만이 아는 대답”이라는 제목으로 번역 출간된 그의 자서전이자 ‘두번째 책’인 『연대기: 제1권』은 미국에서 2004년에 나왔다.) 이는 다분히 독자들의 기다림과 그로 인한 초조함을 의식한, 흡사 모종의 선언 같은 제목이었다. 원래 계획대로였다면 『타란툴라』는 1966년에 나왔어야 하는 책이었기 때문이다. 그해 가을 그의 책이 나온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그 사실만으로도 미국 대중문화계에서는 커다란 화제가 되었다.
1966년 가을, 우리는 밥 딜런의 ‘첫번째 책을 출간할 예정이었다. 다른 출판사들이 부러워할 만했다. “그 책 많이 팔릴 겁니다.” 밥 딜런이 저자라는 사실 말고는 그 책에 대해 아는 바가 없을 텐데 그렇게들 말했다. 밥 딜런은 아주 특별한 이름이었으니까. “아닌 게 아니라 존 레넌의 책이 얼마나 많이 팔렸는지 봐요. 밥 딜런이라면 그보다 두 배, 어쩌면 그 이상 팔릴 겁니다.” 책의 내용은 아무래도 상관없었던 것이다. _ 「초판 서문」 중에서
로버트 마켈의 회상이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그해 가을 유럽 투어에서 돌아온 밥 딜런은 집 근처에서 오토바이 사고를 당해 부상을 입고, 한동안 일체의 외부 활동을 중단한 채 칩거에 들어간다. 마지막 “몇 군데 수정하는 일”만 남겨두었던 소설 작업도 그대로 중단된 채 출간은 잠정적 유보 상태를 맞이한다. 출판사에서 대대적인 마케팅을 위해 준비해두었던, 그의 얼굴 사진이 인쇄된 버튼 배지와 쇼핑백을 창고에서 훔쳐다 파는 사람들이 나타났고, 출간 전 리뷰를 받기 위해 일부 인사들에게 사전 배포되었던 교정쇄는 해적본의 해적본으로 거듭나며 불티나게 팔려나간다. 대중의 이런 기다림을 충분히 읽고도 남았을 출판사였지만, 마지막 수정을 남겨두었던 저자의 의사를 존중해, 출간을 강행하는 일은 하지 않았다. 그렇게 5년 뒤인 1971년 밥 딜런의 소설 『타란툴라』는 드디어 마지막 저자 교정을 마치고, 독자들에게 첫선을 보인다.
이처럼 마지막 수정을 남겨두었던 1966년부터 1971년 마침내 초판이 출간되기까지 5년의 시차가 있었고, 실제로 『타란툴라』 집필을 시작한 시기는 그로부터도 2~3년 전, 즉 1964년 전후로 추측된다. 이 시기를 전후한 밥 딜런의 행보를 살펴보는 것은 『타란툴라』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배경이 된다.
1963년 5월, 2집 [자유분방한 밥 딜런(The Freewheelin'' Bob Dylan)]을 발표한 스물두 살의 청년 밥 딜런은 이미 저항적인 노래를 작곡하는 싱어송라이터로 미국 전역에 널리 이름을 알린 상태였다. 비틀스의 전 기타리스트 조지 해리슨은 이 앨범에 대해 “가사의 내용과 딜런의 태도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독창적이고 훌륭하다”고 평하기도 했다. 미국인들은 아직 젖살도 빠지지 않은 청년이 다듬어지지 않은 거친 목소리로 저항과 반항의 메시지를 내뱉는 모습에 반했다. 특히 5월, [에드 설리번 쇼]에 출연하게 된 딜런이 리허설이 진행되는 동안 실무 책임자가 그의 노래 [존 버치 편집증 토킹 블루스(Talkin’ John Birch Paranoid Blues)]가 반 사회주의 단체에 불쾌감을 준다는 얘기를 하자 방송국의 검열을 따르지 않고 뛰쳐나간 사건은 사회저항적인 청년으로서의 상징성을 극대화한 사건이었다. 딜런은 이 시기 포크계의 여왕이라고 불리던 존 바에즈(Joan Baez)와 만나 연인이 되고 민권 운동에서 함께 노래하며 저항가수로서 두드러지게 활동한다. 이러한 흐름은 1964년 1월에 발표한 3집 [시대는 변하고 있다(The Times They Are A-Changin'')]에서도 이어진다. 이 시기 딜런은 수많은 곡을 통해 이미 포크 운동의 주역으로 여겨졌고, ‘시대의 양심’ ‘세대를 대변하는 목소리’ ‘젊은이의 대변인’등 수많은 칭호를 달고 다니는 상태였다. 딜런은 수많은 대중들에 의해 둘러싸여 어떤 칭호와 규정들이 자신을 잠식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는 뉴욕으로 향했을 때 바라던 대로 중심에 있었지만, 그 때문에 옴짝달싹할 수가 없었다. 딜런은 민권 운동이 자신을 제약하고 조종한다고 느낀다. 케네디가 암살당한 직후 딜런은 국가비상사태위원회가 수여하는 톰 페인 상(Tom Paine Award)을 받았으나, 시상식에서 위원회의 역할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며 위원회 구성원들을 구세대 대머리 종자들로 묘사하고 자신을 포함한 모든 남자들에게서 케네디를 암살한 리 하비 오즈월드를 본다고 주장해서 큰 논란을 빚는다. 또 딜런은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무수히 쏟아지는 똑같은 질문들(어떤-저항의-메시지를-담고-있나요?)에 진저리를 치며 비아냥거리거나 반항적인 반응으로 일관한다.
기자 ''세찬 비가 쏟아질 거예요(Hard Rain’s A-Gonna Fall)’라는 노래 말인데요,
핵전쟁에 대한 당신의 감정을 표현해주시면 좋겠습니다.
딜런 아뇨, 이건 핵전쟁 노래가 아니에요.
기자 누군가는 그렇게 생각했어요.
딜런 핵전쟁 노래가 아니라고요. 그냥 폭우예요, 핵을 묘사한 게 아니고요. 폭우라고요.
기자 당신이 쓴 모든 노래는 실화보다 더 사실 같아서 핵전쟁 얘기를 한 겁니다.
무슨 얘긴지 아시겠어요?
딜런 시사적인 건 흥미가 없어요. 시사적인 노래는 쓰지도 않는다구요.
시사적이라는 말도 좋아하지 않고요. 내말은, 실화에 관한 노래가 아니라는 거죠.
1964년 6월, 딜런은 [밥 딜런의 또다른 면(Another Side of Bob Dylan)]을 발표하며 실질적으로 정치적인 포크송을 노래하던 시기와 선을 긋는다. 수록곡인 [그대여, 나는 아니야(It Ain''t Me Babe)]는 러브송의 외피를 입고 있지만, 실은 정치적 대변인의 역할을 거부한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이와 동시에 저항 가수로서의 노선을 걷고자 했던 존 바에즈와도 결별한다. 1960년대 중반, 딜런의 겉모습은 크게 달라진다. 그야말로 수수한 차림의 포크 싱어송라이터에서 포크록스타로 위치를 선회한 모습이었다. 딜런은 늘 입던 청바지와 작업복 셔츠를 집어던지고 화려한 옷을 입기 시작했다. 낮이나 밤이나 선글라스로 눈을 가리고 다녔으며, 비틀스가 유행시킨 ‘Beatle boots’를 신고 다녔다. 인터뷰에도 적극적으로 응했지만 삐딱한 태도는 여전했다. 진행자가 텔레비전 쇼에 출연한 딜런에게 제작중이라는 영화에 대해 묻자, 그는 카우보이 공포 영화가 만들어질 것이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당신이 카우보이 역을 맡았느냐고 묻자 딜런은 이렇게 대답했다. “아뇨, 나는 우리 엄마를 연기했는데요.”
1965년 3월에는 다섯번째 앨범 [모두 가지고 돌아오다(Bringing It All Back Home)]를 발표했다. 이 앨범은 처음으로 일렉트릭 악기를 사용해 녹음한 딜런의 또다른 음악적 도약이었다. 앨범 앞면에는 밴드와 함께 연주한 로큰롤이 실려 있었고, 뒷면에는 어쿠스틱 악기로 연주한 포크곡이 실려 있었다. 팬들은 앨범 앞면 수록곡에 대해 포크의 진정성을 잃어버렸다고 비난했다. 이것은 딜런이 앞으로 듣게 될 비난과 야유의 시작에 불과했다. 딜런은 이 해 5월에 영국 투어를 마치고 돌아온 이후 로큰롤 밴드와 함께 [구르는 돌처럼(Like a Rolling Stone)]을 녹음했고, 7월에 포크송 축제인 뉴포트 포크 페스티벌(Newport Folk Festival)에 참여해 이 노래를 부른다. 밴드와 함께 다음 달 발표할 앨범인 [다시 찾은 61번 고속도로(Highway 61 Revisited)]에 수록될 세 곡 또한 일렉트릭 사운드로 연주한다. 그리고 현장에서 역대 최악의 비난과 야유를 듣는다. 일렉트릭 기타를 들고 노래하는 딜런은 포크팬들과 포크 운동 리더들에게 변절자, 배신자의 모습으로 비춰졌고, 포크만의 순수성과 진정성을 훼손하는 것으로 보였다. 심지어 피트 시거는 도끼로 딜런의 마이크 케이블을 끊어버리겠다고 소리쳤다. 딜런은 관중들의 야유 때문에 15분 만에 무대에서 내려갔다. 이후 ‘부-’하는 소리(야유 소리)는 그의 1966년 월드 투어까지 따라왔다. 딜런은 1부에서는 어쿠스틱 공연을 하고, 2부에서는 더 밴드(The Band) 멤버들과 로큰롤 공연을 하는 식의 절충적인 대안을 선택했지만 일렉트릭 악기들이 나올 때마다 관객들의 비난은 어김없이 등장했다. 관객들이 보길 원하는 딜런의 모습은 오직 한 가지였다. 어쿠스틱 기타를 들고 소박한 모습으로 연주할 것. 저항의 노래를 부를 것. 한 영상에서 딜런은 농담조로 이렇게 중얼거린다. ‘진짜 딜런은 아프다고 해야겠어.’ 1966년 5월, 명반 [블론드 온 블론드(Blonde on Blonde)]를 발표하고 2개월 뒤, 유럽 투어를 마치고 돌아온 직후. 딜런은 우드스톡에 있는 집 근처에서 오토바이 사고를 당한다. 그리고 12개월간 철저히 은둔하며 모습을 감춘다. 이 은둔 기간 동안 딜런은 연인이었던 세라 로운즈와 비밀리에 결혼을 한다. 그 사실을 아는 사람은 몇 명 없었다. 그동안 딜런이 ‘빅 핑크’라는 지하 연주실에서 더 밴드 멤버들과 새로운 음악 실험을 하고 무수한 창작곡을 썼다는 것도. 당시 연주한 테이프는 팬들 사이에서 해적판으로 불법 유통되었다. 어쨌거나 딜런은 대중으로부터 멀리 물러났고, 몇몇 출연을 제외하면 오토바이 사고 이후 8년가량 투어를 진행하지 않았다. 그러나 앨범은 쉬지 않고 발표했다. 대중들로부터의 비난과 압박감이 그의 창조력을 완전히 짓누를 수는 없었던 것이다.
이처럼 시기적으로 그의 포크록 3부작이라 불리는 [모두 가지고 돌아오다(Bringing It All Back Home](1965), [다시 찾은 61번 고속도로(Highway 61 Revisited)](1965), [블론드 온 블론드(Blonde on Blonde)](1966)의 작업 시기와 집필 시기가 겹치는 『타란툴라』에는, ‘반문화와 저항의 상징’으로 평가되던 자신을 향한 외부의 시선과 그 어느 것으로도 규정되기를 거부하던 내면의 지향 사이에서 자신만의 세계를 끊임없이 다시 허물었다 다시 구축해가던 그의 정체성의 역동적인 길항 작용이 곳곳에 드러나 있어서, 그의 창작 과정에 관심 있는 이들에게 『타란툴라』는 갈증을 해소시킬 수 있는 통로도 될 것이다.
“세상은 잠시도 멈추지 않았다 - 다만 폭발했을 뿐”
- 그러나 『타란툴라』는 변하지 않았다
- 50여 년을 뛰어넘어 오늘도 여전히 유효한 보편의 잠언과 통찰들
소설 『타란툴라』는 밥 딜런을 ‘거리의 음유시인’이게 한 수많은 노랫말이 탄생하기까지 그의 머릿속 생각을 여과 없이 옮겨놓은 상상의 보고이자 수많은 페르소나의 각축장이며, 베트남 전쟁과 인권운동, 창조적 갈등의 소용돌이 속에서 환상을 보는 초현실주의적 서사시의 콜라주이다. 그의 노랫말이 정교하게 세공된 다이아몬드라면 『타란툴라』는 세공 이전의 원석인 셈이다.
『타란툴라』는 처음과 중간과 결말이 있는 소설이 아니다. 처음에는 혼란스러울지 몰라도 나중에는 묘한 매력을 느끼게 하는 책이다. 아티스트의 코드를 가진 이들에게 많은 영감을 줄 것이다. 문학은 무엇일까? 나는 노벨상위원회의 결정에 대한 밥 딜런의 반응도 문학적이고, 노벨상위원회의 결정도 문학적인 결정이었다고 생각한다. _ 「옮긴이의 말」 중에서
밥은 이해하기 힘든 방식으로 작업하며, 언제나 훌쩍 앞서 있었다. 과거의 그가 『타란툴라』에 쓴 내용이 많은 부분이 지금은 그때와 달리 이해하기에 그리 어려워 보이지 않는다. 사람은 변하며 감정도 변한다. 그러나 『타란툴라』는 변하지 않았다. 이제 밥이 이 책의 출간을 원하여 여기 이렇게 책을 내놓는다. 이것은 밥 딜런의 첫번째 책이다. 그가 스물다섯 살 때 쓴 그대로이며―바로 이렇게―이제 여러분도 그것을 알게 될 것이다. _ 「초판 서문」 중에서
“사람은 변하며 감정도 변한다. 그러나 『타란툴라』는 변하지 않았다.”라고 기록한, 초판 서문 편집자의 서술은 45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여전히 유효하다. 50여 년 전에 쓰인 작품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반전?평화?젊음?사랑?음악 등을 주제로 대중문화와 사회 전반을 향해 던지는 밥 딜런의 시선에는 ‘지금 여기’를 환기하는 잠언과 통찰이 가득하다. 1966년 25세 청년 밥 딜런의 눈에 비친 현실과 21세기의 현실이 전혀 어색하지 않게 겹쳐지며 서로를 환기한다. ‘문학’이라는 영역이 지닌 ‘보편의 힘’을 확인하게 되는 지점이다.
▣ 작가 소개
저 : Bob Dylan
밥 딜런의 발자취는 거대하다. 그 이름은 마치 선대의 성인(聖人)처럼 하나의 위엄으로 우리를 억누른다. 딜런과 그의 음악을 피해 가는 것은 ‘록 역사에 대한 접근’을 포기하는 것과 같다. 그를 아는 것은 납세와 같은 신성한 의무에 다름 아니다. 미국의 음악계와 학계에서 ‘딜런 읽기’는 실제로 교양필수 과정으로 인식되어 있다. 그는 록의 40년 역사에서 엘비스 프레슬리(Elvis Presley), 비틀스(The Beatles) 그리고 롤링 스톤즈(Rolling Stones)와 함께 최정상의 위치를 점한다. 그러나 이들 ‘전설의 빅 4’ 가운데에서도 딜런이 남긴 궤적은 차별화 아닌 특화(特化)되어 역사를 장식한다.
얼핏 그의 위상은 ‘실적주의’로 따질 때 매우 허약해 보인다. 엘비스, 비틀스, 롤링 스톤즈는 그 화려한 전설에 걸맞게 무수한 히트곡을 쏟아냈다. 넘버 원 히트곡만 치더라도 엘비스는 18곡(통산 2위), 비틀스는 20곡(1위), 스톤즈는 8곡(11위)이나 된다. 하지만 딜런은 그 흔한 차트 1위곡 하나가 없다. ‘Like a rolling stone’과 ‘Rainy day woman #12 & 35’ 등 두 곡이 2위에 오른 것이 고작이다. 차트 톱 10을 기록한 곡을 다 합쳐봐야 4곡에 불과할 뿐이다. 그에게 대중성이란 어휘는 어울리지 않는다. 상업적이란 말과는 아예 인연이 없다. 이렇듯 실적이 미미한 데도 록의 역사는 마치 신주 모시듯 그를 전설적 존재로 떠받드는 이유는 무엇일까? 비틀스, 스톤즈, 엘비스는 차트 정복 외에도 또 다른 공통점이 있다. 비록 그 가지는 다를지언정 ‘록의 스타일 확립’ 이라는 몸체는 유사하다는 것이다.
비틀스는 록의 예술적 지반을 확대했고, 스톤즈는 록에 헌신하며 형식미를 완성했고, 엘비스는 록의 정체성을 부여했다고들 한다. 분명히 딜런도 몸체에 자리한다. 깃털은 결코 아니다. 그러나 타(他) 3인의 몸체가 외양이라면 그는 ‘내면’ 이라고 할 수 있다. 바로 노랫말이요, 메시지다. 왜 이것이 중요한가? 음악은 사운드와 형식만으로 이미 메시지가 아닌가? 하지만 그것은 그렇게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로큰롤이 폭발하여 확산되던 시점인 1950년대, 즉 엘비스가 활약하던 당시에 로큰롤은 메시지가 없었다. 1960년대 들어서 비틀스가 미국을 급습해 록의 르네상스를 일궈내고 있던 때까지도 록은 의미있는 가사와 격리된 상태였다. 그래서 의식계층으로부터 멸시를 당했다. 그 때 밥 딜런이 있었다. 비틀스는 누구보다 먼저 딜런의 위력을 절감했다. 그의 포크 사운드와 메시지를 귀담아 듣고 그것을 자신들의 음악에 적극 수용한다. 1965년말 < Rubber Soul > 앨범의 수록곡인 ‘In my life’, ‘Girl’, ‘Norwegian wood’ 등에서 ‘톤 다운’ 을 드러내며 메시지를 잠복시킨 것은 전적으로 딜런의 영향 때문이었다.
밥 딜런은 실로 대중 음악의 지성사(知性史)를 이룬다. 타임(Time)지의 제이 칵스는 1989년 기사에서 다음과 같이 묻는다. “존 업다이크의 소설과 밥 딜런의 앨범 가운데 어느 것이 미국인들의 삶에 보다 자극을 주었는가? 존 업다이크 쪽에 표를 던진 사람이라면 이 기사를 여기까지 읽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의 가사는 그러나 때론 메시지의 파악이 어려운 ‘난해한 현대시’ 와 같다. 밑줄 긋고 열심히 분석해도 도대체 명쾌하지가 않다. 1960년대 중반 < Another side of Bob Dylan >, < Bring it all black home >, < Highway 61 revisited >가 연속 발표되었을 때, 미국 각 대학의 영문과에 ‘밥 딜런 시분석’ 강좌 개설이 유행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우리의 팝팬들에게 딜런이 상대적으로 소원한 이유가 여기에 있을 것이다. 미국인들에게도 이 정도인데 영어의 벽에 막혀 있는 우리가 어찌 그를 쉽게 수용할 수 있었겠는가. 때문인지 음반마저 제대로 소개되지 않았다. 초기곡으로 알려진 것은 그나마 메시지가 확연한 ‘Blowin’ in the wind’정도였다. 하지만 그것도 1970년대 중반의 금지곡 태풍으로 반전(反戰) 노래라는 낙인이 찍히면서 방송과 판매가 금지되었다. 그 외 우리 팝 인구에 회자된 노래로 ‘One more cup of coffee’나 ‘Knockin’ on heaven’s door’가 있다. 그러나 그의 대표곡 반열에도 오르지 못하는 ‘One more cup of coffee’가 통한 것은 단지 낭만적 제목과 함께 친숙한 선율 때문이었을 뿐, 딜런의 음악 세계에 대한 천착의 결과물은 전혀 아니었다. ‘Knockin’ on heaven’s door’ 인기의 영예도 실은 건스 앤 로지스가 더 누렸다.
극소수의 곡을 제외하고 밥 딜런은 우리에게 인기가 없었다. 비틀스, 스톤즈, 엘비스에 비한다면 엄청난 ‘부당 대우’였다. 언어 장벽과 무관한 음악 스타일 측면에서도 우리의 ‘홀대’ 는 마찬가지였다. 멜로디가 그럴싸한 곡이 있더라도 풍기는 내음이 지극히 ‘미국적’ 이었기에 우리의 청취 감성은 딜런을 꺼리곤 했다. 그의 음악 세계라 할 포크, 컨트리, 블루스는 미국 전통과 긴밀한 함수 관계를 지닌다. 선율과 사운드의 영국적인 맛에 길들여진 우리로서는 그의 음악에 잠기기가 쉽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 사이에 우린 어느덧 딜런과 크게 멀어져버렸다. 록의 흐름을 거슬러 올라가다가 꼭 딜런에서 막힌다. 신세대 가운데 더러는 우리의 팝 수용 문화에서 딜런 공백이 가져온 취약성을 맹렬히 질타하기도 한다. 우리 기준에서의 ‘팝 음악 여과’는 바람직하고 필요하다. 그러나 의역은 정확한 직역이 기초돼야 올바르다. 미국의 해석을 전제한 뒤라야 우리식 필터링의 의의가 배가된다.
그 직역의 첫 번째 대상이 바로 밥 딜런이다. 밥 딜런이 미국의 현대 음악사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이유는 그의 음악몸체가 곧 시대와 세대의 흐름을 떠안고 있기 때문이다. 딜런의 음악이 변화하는 과정과 그것을 있게 한 배경, 또한 그것을 주도해간 그의 자세는 ‘음악외적 환경’과 긴밀한 관계가 있다. 먼저 포크 록(Folk-Rock)이다. 그가 1960년대 초반 저항적인 모던 포크로 베이비 붐 세대를 견인했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없다. 통기타만으로 연주되는 단순한 구조이지만 그것의 포획력은 비틀스가 사정권에 들어올 만큼 대단한 것이었다. 비틀스가 베이비 붐 세대를 발현시켰다면 그는 그들의 의식화를 유도했다. 그러나 딜런은 케네디의 피살에 자극받으면서 스스로 ‘위기감’ 을 불어넣는다. 이미 비틀스가 세대의 청취 볼륨을 증폭시킨 마당에 포크의 음량 가지고 과연 세대를 관통할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1971년 그는 이렇게 술회한 바 있다. “그들(비틀스)은 아무도 하지 않은 것을 하고 있었다. 그들의 코드는 정말 도에 지나친 것이었지만 하모니가 그것을 타당하게끔 했다. 그러나 맹세하건데 난 정말 그들에게 빠졌다. 모두들 그들이 어린 10대를 위한 광대이며 곧 사라질 것이라고들 했다. 그러나 내겐 명확했다. 그들이 지속력을 갖고 있다는 사실이. 난 그들이 음악이 가야할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 내 머리 속에는 비틀스가 전부였다.” 그는 일렉트릭 기타를 잡아야 했다. 그것이 포크 록이었다. 포크의 순정파들로부터 배신자라는 질타는 불 보듯 뻔했다. 그가 뉴포트 포크 페스티벌에서 알 쿠퍼(Al Kooper), 마이크 블룸필드(Mike Boomfield)가 참여한 버터필드 블루스 밴드(Butterfield Blues Band)와 함께 전기 기타 연주를 했을 때 관중들은 “이건 포크 공연이야 나가!”라고 야유하며 돌과 계란 세례를 퍼부었다. 무대에서 내쫓긴 그는 통기타를 들고 되돌아왔지만 의미심장한 ‘It’s all over now’, ‘Baby blue’를 부르며 포크 관객들에게 아듀를 고했다. 껄끄러운 통과의례를 거친 뒤 밥 딜런의 포크 록은 ’Like a rolling stone’의 빅히트와 함께 만개했다. 이젠 막을 자도 없어졌다. 포크 록은 당시에 막대한 영향력을 발휘했다. ‘존 레논과 밥 딜런을 결합해야 한다’는 것을 인식한 그룹 버즈(Byrds)는 ‘Mr. Tambourine man’으로 인기 가도를 질주했다. 그러나 그 곡은 딜런의 작품이었다.
버즈 뿐만 아니라 당시 포크 록계열 뮤지션치고 딜런의 곡을 손대보지 않은 사람은 없었다. 단숨에 포크 록은 1960년대 록의 주류로 부상했다. 1960년대 중.후반을 강타한 싸이키델릭 록(제퍼슨 에어플레인, 그레이트풀 데드)도 실상 포크 록에 영향받은 흐름이었다. 그럼 어째서 포크 록은 1960년대 청춘들을 사로잡아 그들의 의식을 대변할 수 있었을까? 비틀스가 딜런에게 배우고, 딜런이 비틀스로부터 영감을 얻은 ‘포크와 록의 결합’ 은 시대성 견인을 가능케 한 절묘한 무브먼트였다. 록은 생태적으로 거리의 청춘에 의해 확립된 ‘하위문화적 표현’이다. 따라서 하이 클래스나 인텔리겐차와는 일정한 거리를 둔다. 또한 포크는 저항성을 견지하는 민중 음악이지만 음악의 주체나 주소비자층은 학생과 지식인 세력이다. 성질상 엇비슷하면서도 걸어온 길이나 ‘계급성’은 엄연히 다른 것이다. 밥 딜런이 포크 오리지널로부터 급격히 퇴각하여 록으로 전향한 것은 단지 추세의 편승이 아닌 완전함을 향한 ‘하층문화의 긴급 수혈’로 보인다. 이를테면 ‘위’의 고매한 문제의식과 ‘아래’의 근원적 반항을 한고리로 엮는 것이다. 그러면서 저항 영역의 지반 확대와 수요자의 확충을 기할 가능성은 올라가게 된다.
지식인만이 아닌 1960년대 젊은이들의 ‘계층포괄적 무브먼트’ 는 포크 록과 이 점에 있어 밀접한 관계를 맺는다. 1960년대 중후반을 물들인 ‘히피보헤미안’ 물결도 딜런과 떼어낼 수 없는 흐름. 1960년대 록 역사에서 두 번째로 중요한 부분이다. ‘Like a rolling stone’은 포크 지식인의 소리라기보다 보헤미안적 정서의 노출로 파악해야 한다. 당시 딜런은 가치의 상대성을 신뢰하고 제도에 흡수되기룰 거부하는 이른바 비트(Beat) 사상에 빠져 있었다. 그가 진보적 시인인 알렌 긴스버그(Allen Ginsberg)와 교류하며 ‘개인 혁명’에 골똘해 있을 때가 바로 이 무렵이다. 비트는 이후 히피의 융기에 주요 인자가 되는데, 1960년대 중반 딜런의 음악을 가로지르는 것이 바로 이 ‘히피 보헤미안 정서’라 할 수 있다. 스스로 록 세계로 옮아가고 방랑적 지향을 설파한 것은 기존과 기성의 틀 깨기에 목말라 있던 베이비 붐 세대들에게 영도자가 제공한 ‘산교육’과 다름없었다. 따라서 밥 딜런은 그에게 등을 돌린 포크 근본주의자들의 수보다 휠씬 더 많은 록팬을 거뜬히 확보하게 된다. 음악적으로 딜런의 창작성이 이 때만큼 가공의 위력을 떨친 적도 없다. < Highway 61 Revisited >와 < Blonde On Blonde > 앨범은 포크의 엄숙주의에서 해방되어 록과의 결합으로 자유분방한 이미지를 포획한 결과였다. 그리고 그 음악은 ‘남을 위해’ 이데올로기에 봉사한 결과가 아니라 자신의 즐거움이 가져온 산물이기도 했다. 그가 포크의 프로테스트로부터 이탈한 것은 바로 ‘자유’와 등식화되는 ‘예술성’을 찾기 위한 노력이었다.
그는 저항성 대신 예술성을 얻었다. 개인적 경사도 겹쳤다. 사적으로 사라 로운즈와의 결혼은 그의 창작력 한층 북돋아주었으며 그 충만한 행복감은 그대로 < Blonde On Blonde > 앨범에 나타났다. 이 앨범의 탁월한 질감은 상당부분 사라와의 결혼이 낳은 것이라는 게 평자들의 일치된 시각이다. 나중 사라와의 파경 또한 그에게 또 하나의 명반 < Blood On The Tracks >를 안겨준다. 히피의 낭만적인 집단주의와 곧바로 이어진 이피(Yippie)의 전투성이 극에 달할 무렵 그가 뉴욕의 외곽 빅 핑크(Big Pink) 지하실에서 한가로이 더 밴드(The Band)의 멤버들과 자유 세션을 즐기고 있었다는 사실은 아이러니컬하다. 불의의 오토바이 사고가 가져온 행보이기도 했지만 그가 의도적으로 은둔을 택한 것은 분명했다. 세상이 소란함으로 가득할 때 그는 정반대로 정적을 취한 것이다, 그는 자신이 물꼬를 터준 미국 사회의 격랑이 결국 아무런 소득도 없을 것으로 예측했는지도 모른다. 세대의 공동체 지향은 지극히 ‘비이성적’으로 비춰졌을 테고 오히려 그는 그럴수록 자신에게 돌아와 근본을 탐구하는 것이 올바른 행위라고 여겼던 것 같다. 그러한 심저(心底)가 < John wesley Harding >과 < Nashiville Skyline >의 골간에 자리한다. 이 작품들에서 그는 ‘뜻밖에’ 재래식 컨트리 음악을 선보였다. 두 앨범은 모두 내쉬빌에서 녹음되었고 < Nashiville Skyline >의 경우 딜런은 컨트리 음악의 거성 자니 캐시(Johnny Cash)와 듀오로 ‘Girl from the north country’에서 다정히 호흡을 맞추기도 했다. 이 앨범에서 톱 10 히트곡 ‘Lay lady lay’가 나왔다. 이 곡을 비롯해 대부분의 수록곡에서 딜런의 보컬은 예의 날카로움이 거세된 채 한결 부드러워졌고 가사도 접근이 비교적 용이해지는 등 멜로딕한 무드가 전체를 지배했다. 다시 세상은 소용돌이에서 호수의 조용함으로 돌아왔다. 그것이 1970년대 초반의 분위기였다. 딜런이 씨앗을 뿌린 ‘컨트리 록’ 은 1970년대 내내 주요 장르 중 하나로 맹위를 떨쳤다.
딜런은 언제나 흐름의 주역이었다. 나중 음반화된 더 밴드와의 세션 앨범 < Basement Tapes >가 록 역사에서 ‘특혜’를 받는 것도 이러한 배경 속에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1970년대 들어서 그는 ‘대중적’ 관점에서 뿌리에 대한 천착에 박차를 가했다. 예전에 그는 ‘좋은 사람만 따르면’ 된다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사람이 많이 따를수록 좋다’는 쪽으로 입장을 정리했다. 그가 1970년 < Self Portrait > 앨범에서 ‘Moon river’를 포함한 팝 스탠다드 넘버들을 노래한 것은 이러한 사고와 맥락이 닿아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대부분의 비평가들이 눈을 흘겼다. 레코드 월드(Record World)지는 이 앨범을 두고 “혁명은 끝났다. 밥 딜런이 ‘미스터 존스’에게 ‘Blue moon’을 불러주고 있다”며 혹평했다.(미스터 존스는 딜런이 < Highway 61 Revisited >의 ‘Ballad of thin man’에서 “여기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아, 존스 씨?”라고 했던 가공의 인물로 ‘제도권 인사’를 상징한다.) 빌보드 차트3위에 오르는 성공을 거두었지만 이처럼 평단의 이해를 구하는 데는 실패했다. 그러나 < Self Portrait >앨범을 상업적 표현으로 볼 수는 없다. 비판의 칼을 휘두르는 비평가들도 그렇게 생각하진 않는다. 근본을 탐구하는 방법론의 연장선에서 파악하는 것이 보다 정확하다. 딜런이 1970년대 후반부에 기독교에 귀의한 것도 비슷한 문맥으로 풀어야 할 것이다. 사실 신(神)에의 의지가 엿보인 < Show Train Coming >, < Saved >, < Shot Of Love > 등 3장의 종교풍 음반은 ‘사고의 깊이’가 두드러졌지만 ‘변신’이라는 부정적 의미에 가치가 함몰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1970년대 딜런을 ‘혼미의 거듭’으로 규정한다. 표면적으로는 그렇다. 그러나 그것을 뒤집어보면 그는 자신의 사고와 감정에 충실했다는 얘기가 된다. 이것이야말로 아티스트의 본령이다. 밥 딜런은 언제나 음악을 통해 세상과 삶의 근본 원리를 탐구하고자 했다.
1980년대의 밥 딜런은 1970년대의 습기를 벗고 ‘열기’를 회복한다. 정치적 시각도 이입한 < Infidels >, < Empire Burlesque > 그리고 1989년에 나온 < Oh Mercy >는 이전의 앨범들과 명백한 분리선을 긋는다. 날카로운 보컬은 오히려 1960년대의 모습에 더 가깝다. 그는 1980년대 중반 라이브 에이드(Live Aid), 아파르트헤이트에 반대하는 아티스트의 모임(Sun City) 등 일련의 자선행사에 얼굴을 내밀어 저항 전선에 복귀했다. 한 무대에서 그는 U2의 보노(Bono)와 함께 ‘Blowin’ in the wind’를 부르기도 했다. 딜런의 1980년대 앨범들에는 당시의 보수적이고 위압적 풍토를 거부하는 저항성이 숨쉰다. 그는 시대의 주류 한복판에는 없었지만 ‘시대의 공기’와 늘 함께 호흡했다. 그 공기를 어떤 때는 앞장 서 조성하고 어떤 때는 그것을 피해갔다. 밥 딜런의 한 면만을 바라보게 되면 그의 진면목을 알 수 없다. 그가 서 있던 ‘양쪽’ 자리를 다 관찰해야만 그 ‘드라마틱한 록 역사의 굴곡’ 을 읽을 수 있다. 록의 역사는 실로 위와 아래, 진보와 보수, 주류와 비주류, 기존과 대안이 끊임없이 부침을 되풀이 해왔다. 밥 딜런이 밟아온 길은 그것의 축소판이었다. 그러나 어떤 시점에서라도 - 가령 프로테스트의 깃발을 울렸을 때나, 대중성에 기웃거렸을 때나 - 딜런이 주변의 압박에 수동적으로 임한 적은 없다. 남이 시켜서 일렉트릭의 세계로 떠밀려 간 것이 아니었고, 의도적으로 신비를 축적하기 위해 은둔했던 것도 아니다. 그의 터전은 언제나 자신의 의지가 지배하는 세계였다. 비평가들이 밥 딜런을 전설로 숭앙하는 것은 그가 대중 음악계에서는 보기 드문 ‘음악의 주체’이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이야말로 음악인의 최고 영예인 ‘아티스트’란 소리를 들어 마땅했다. 그는 록에 언어를 불어넣었다. 포크와 컨트리를 록의 영역으로 끌어들였다. 시대와 맞서기도 했고 자신의 예술성에 천착하기도 했다. 그러한 업적과 성과의 편린들이 모여 그의 ‘광활한 아티스트의 세계를 축조하고 있다. 밥 딜런은 역사의 수혜와 위협 속에서 ‘인간’을 살려냈다. 음악인으로서 인간의 몸체는 다름 아닌 자유일 것이다. 밥 딜런의 위대함이 바로 여기에 있다.
역 : 공진호
뉴욕 시립대학CUNY에서 영문학과 창작을 전공하였다. 하퍼 리의 『파수꾼』 얄마르 쇠데르베리의 『닥터 글라스』 샤를 보들레르의 『악의 꽃』 『에드거 앨런 포우 시선: 꿈속의 꿈』 『아틸라 요제프 시선: 일곱 번째 사람』을 비롯해 F. 스콧 피츠제럴드의 『밤은 부드러워』 윌리엄 포크너의 『소리와 분노』 허먼 멜빌의 『필경사 바틀비』 이디스 그로스먼의 『번역 예찬』 등 다수의 번역서를 냈다. 뉴욕에 거주하며 번역과 창작을 하고 있다.
▣ 주요 목차
초판 서문 | 여기 ‘타란툴라’가 있다 | 009
권총, 매의 입술책 & 벌 받지 않은 떠버리 | 015
길쭉하고 키 큰 외부인과 이상한 술을 마시다 | 031
(마녀처럼 무의미한) | 034
플레인 비 플랫 조의 발라드 | 036
음속 장벽 깨기 | 039
뚝 떨어진 기온 | 041
플랫피크의 전주곡 | 043
거룻배의 마리아 | 050
무비 스타의 입속 모래 | 052
미친 사람 구역을 줄로 차단하기 | 056
출판되지 않은 마리아를 찾아가다 | 059
사슬 고리 40개 (詩) | 061
사랑으로 목이 메어 | 066
경마 | 071
호주머니 가득한 악당 | 074
무용無用 씨가 노동에 작별을 고하고 레코드 취입을 하다 | 076
호랑이 형제에게 주는 조언 | 078
불결한 감방에서 폭동을 구경하기 또는 (감옥에는 주방이 없다) | 080
절망 & 마리아는 어디에도 없다 | 083
아서왕의 방랑자 집단 속 남부 연방 밀정 | 086
키스하는 기타들 & 당대의 난관 | 090
떠돌이 노동자 모델에게 주는 조언 | 098
패자는 빈손이라는 냉혹한 현실 | 100
마리아의 친구에게 사랑을 고백하다 | 105
젊은 탈영병인 심부름꾼에게 보내는 편지 | 108
엽총의 맛 | 111
메이 웨스트의 스톰프 춤 (우화) | 114
캄캄한 밤의 굉음 | 118
적대적인 캄캄한 밤의 굉음 | 121
무책임한 캄캄한 밤의 굉음 | 124
강렬한 캄캄한 밤의 굉음 | 126
누군가의 캄캄한 밤의 굉음 | 128
캄캄한 밤의 굉음처럼 보인다 | 131
꿀꺽꿀꺽?단숨에 쭉 내 부름을 들어봐요 요들레이호 | 134
천국, 사회의 밑바닥, 덧없이 마리아 | 136
평화주의자의 펀치 | 138
신성한 목쉰 목소리 & 짤랑짤랑 아침 | 141
프로파간다 과목, 낙제 | 145
일요일의 원숭이 | 148
카우보이 에인절 블루스 | 158
지하의 향수병 & 블론드 왈츠 | 165
격노한 사이먼의 고약한 유머 | 171
사시이지만 매우 훌륭한 피아노 연주자를 발견했다 | 175
기물 파괴꾼들이 물펌프 손잡이를 가져갔다 (오페라) | 180
기계장치 속의 보안관 | 188
마리아의 변속기 속 가짜 속눈썹 | 194
알 아라프 & 촉성재배 위원회 | 198
옮긴이의 말 | 돈 룩 백 | 209
밥 딜런 연보 | 229
밥 딜런, 2016년 노벨문학상 수상!
그가 쓴 단 하나의 픽션
1966년 25세의 청년 밥 딜런을 만나다!
“한 번만 읽고 덮을 수 있는 책이 아니다. 읽을 때마다 매번 새로운 착상이
우리에게 침입하는 걸 발견하게 될 것이다.
밥 딜런만의 불꽃 튀는 한 세계를 품고 있는 책.” | 록 매거진
“청년 시절의 밥 딜런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이 책 역시 분명 마음에 들 것이다.” | 시카고 선타임스
“사실 인생은 읽을거리에 지나지 않는다
& 담배에 불을 붙일 무엇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바보! 그래서 네가 혁명을 하려는 거구나”
비트 제너레이션의 아이콘이자 반문화와 저항의 상징으로 자리매김했던
1966년, 스물다섯 살 청년 밥 딜런의 정신의 지도
+
밥 딜런을 ‘거리의 음유시인’이게 한 수많은 노랫말이 탄생하기까지
그의 머릿속 생각을 여과 없이 옮겨놓은
상상의 보고이자 수많은 페르소나의 각축장
+
의식의 흐름 기법으로 써내려간 시적 산문과 가사의 실험적 조합
= 밥 딜런 소설 『타란툴라』
2016년 국내외를 막론하고 가장 놀라웠던 문화계 뉴스 중 하나를 꼽는다면 단연 ‘가수’ 밥 딜런의 노벨문학상 수상이 아닐까.
전년도의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에 이어 2년 연속 ‘의외성’의 면모를 보여준 노벨문학상위원회의 행보는 ‘파격’이라 일컬어지고, 국내외 일각에서는 ‘문학’에 대한 배반이라는 의견과 ‘문학’의 범주 자체에 대한 근본적 고민과 재정의가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대등하게 등장하며 한동안 활발한 논의가 이어졌다. 하지만 밥 딜런의 노벨문학상 수상을 둘러싸고 벌어진 이러한 일련의 논의와 관계없이, 그가 50여 년 간 40여 장의 앨범을 통해 발표해온 400여 편의 노랫말이 문학의 반열에 오른 건 이미 오래전의 일이었다. 1970년대부터 영미문학계에서는 그의 노랫말을 텍스트로 삼은 학위 논문이 발표되기 시작했고, 문학계 일부에서도 그의 노랫말을 시로 인정하는 움직임이 일었다. 현재는 영미권뿐만 아니라 한국의 대학 강의에서도 밥 딜런의 노랫말을 문학 텍스트로 활용함은 물론, 다른 작가들과 동등하게 그 이름을 문학의 영역에서 거론하고 있는 상황이다. 노벨문학상 선정위원회가 내세운 이유 역시 “미국 음악의 전통 안에서 새로운 시적 표현을 창조해냈다”로, 가수가 아닌 ‘시인’으로서 밥 딜런의 공로를 인정했다.
‘사건’이라면 사건이었고 ‘현상’이라면 현상이었을 밥 딜런의 노벨문학상 수상은 한마디로 ‘밥 딜런 문학 세계’에 대한 궁극의 ‘발견’이라고도 요약할 수 있다. 그리고 이처럼 밥 딜런 문학 세계의 발견이라고 요약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이유가 바로 그의 소설 『타란툴라(Tarantula)』다. 시적 산문과 노랫말이 조합된 형식으로 인해 ‘실험 소설’이라 일컬어지는 그의 첫 ‘문학 작품’ 『타란툴라』는 1964년부터 66년 사이에 쓰여진 것으로 알려져 있고, 당초 1966년 가을 출간될 예정이었으나 예기치 못한 사고로 인해 그로부터 5년 뒤인 1971년에 비로소 출간된다.
1971년 초판 출간 당시 “윌리엄 버로스의 『벌거벗은 점심(The Naked Lunch))』과 유일하게 비견할 만한 책”(뉴욕 타임스)이라 평가받으며 화제의 중심에 섰던 ‘실험 소설’ 『타란툴라』는 그의 자서전 『연대기: 제1권(Chronicles: Volume One)』을 제외하고 그가 출판을 염두에 두고 본격 집필했던 유일한 작품으로, 그에게 노벨문학상을 안겨준 노랫말 텍스트들과는 또다른 측면에서 그의 작가적 면모를 확인케 하는 텍스트인 셈이다.
1966년 ‘전성기’와 ‘은둔’ 사이, 여기 ‘밥 딜런’이 있었다
“여기 ‘타란툴라’가 있다Here Lies Tarantula”
1971년 맥밀런 출판사의 편집자였던 로버트 마켈이 밥 딜런의 첫 책이자 첫 소설 『타란툴라』의 초판 1쇄를 펴내며 썼던 ‘편집자 서문’의 제목이다. (국내에는 “바람만이 아는 대답”이라는 제목으로 번역 출간된 그의 자서전이자 ‘두번째 책’인 『연대기: 제1권』은 미국에서 2004년에 나왔다.) 이는 다분히 독자들의 기다림과 그로 인한 초조함을 의식한, 흡사 모종의 선언 같은 제목이었다. 원래 계획대로였다면 『타란툴라』는 1966년에 나왔어야 하는 책이었기 때문이다. 그해 가을 그의 책이 나온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그 사실만으로도 미국 대중문화계에서는 커다란 화제가 되었다.
1966년 가을, 우리는 밥 딜런의 ‘첫번째 책을 출간할 예정이었다. 다른 출판사들이 부러워할 만했다. “그 책 많이 팔릴 겁니다.” 밥 딜런이 저자라는 사실 말고는 그 책에 대해 아는 바가 없을 텐데 그렇게들 말했다. 밥 딜런은 아주 특별한 이름이었으니까. “아닌 게 아니라 존 레넌의 책이 얼마나 많이 팔렸는지 봐요. 밥 딜런이라면 그보다 두 배, 어쩌면 그 이상 팔릴 겁니다.” 책의 내용은 아무래도 상관없었던 것이다. _ 「초판 서문」 중에서
로버트 마켈의 회상이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그해 가을 유럽 투어에서 돌아온 밥 딜런은 집 근처에서 오토바이 사고를 당해 부상을 입고, 한동안 일체의 외부 활동을 중단한 채 칩거에 들어간다. 마지막 “몇 군데 수정하는 일”만 남겨두었던 소설 작업도 그대로 중단된 채 출간은 잠정적 유보 상태를 맞이한다. 출판사에서 대대적인 마케팅을 위해 준비해두었던, 그의 얼굴 사진이 인쇄된 버튼 배지와 쇼핑백을 창고에서 훔쳐다 파는 사람들이 나타났고, 출간 전 리뷰를 받기 위해 일부 인사들에게 사전 배포되었던 교정쇄는 해적본의 해적본으로 거듭나며 불티나게 팔려나간다. 대중의 이런 기다림을 충분히 읽고도 남았을 출판사였지만, 마지막 수정을 남겨두었던 저자의 의사를 존중해, 출간을 강행하는 일은 하지 않았다. 그렇게 5년 뒤인 1971년 밥 딜런의 소설 『타란툴라』는 드디어 마지막 저자 교정을 마치고, 독자들에게 첫선을 보인다.
이처럼 마지막 수정을 남겨두었던 1966년부터 1971년 마침내 초판이 출간되기까지 5년의 시차가 있었고, 실제로 『타란툴라』 집필을 시작한 시기는 그로부터도 2~3년 전, 즉 1964년 전후로 추측된다. 이 시기를 전후한 밥 딜런의 행보를 살펴보는 것은 『타란툴라』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배경이 된다.
1963년 5월, 2집 [자유분방한 밥 딜런(The Freewheelin'' Bob Dylan)]을 발표한 스물두 살의 청년 밥 딜런은 이미 저항적인 노래를 작곡하는 싱어송라이터로 미국 전역에 널리 이름을 알린 상태였다. 비틀스의 전 기타리스트 조지 해리슨은 이 앨범에 대해 “가사의 내용과 딜런의 태도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독창적이고 훌륭하다”고 평하기도 했다. 미국인들은 아직 젖살도 빠지지 않은 청년이 다듬어지지 않은 거친 목소리로 저항과 반항의 메시지를 내뱉는 모습에 반했다. 특히 5월, [에드 설리번 쇼]에 출연하게 된 딜런이 리허설이 진행되는 동안 실무 책임자가 그의 노래 [존 버치 편집증 토킹 블루스(Talkin’ John Birch Paranoid Blues)]가 반 사회주의 단체에 불쾌감을 준다는 얘기를 하자 방송국의 검열을 따르지 않고 뛰쳐나간 사건은 사회저항적인 청년으로서의 상징성을 극대화한 사건이었다. 딜런은 이 시기 포크계의 여왕이라고 불리던 존 바에즈(Joan Baez)와 만나 연인이 되고 민권 운동에서 함께 노래하며 저항가수로서 두드러지게 활동한다. 이러한 흐름은 1964년 1월에 발표한 3집 [시대는 변하고 있다(The Times They Are A-Changin'')]에서도 이어진다. 이 시기 딜런은 수많은 곡을 통해 이미 포크 운동의 주역으로 여겨졌고, ‘시대의 양심’ ‘세대를 대변하는 목소리’ ‘젊은이의 대변인’등 수많은 칭호를 달고 다니는 상태였다. 딜런은 수많은 대중들에 의해 둘러싸여 어떤 칭호와 규정들이 자신을 잠식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는 뉴욕으로 향했을 때 바라던 대로 중심에 있었지만, 그 때문에 옴짝달싹할 수가 없었다. 딜런은 민권 운동이 자신을 제약하고 조종한다고 느낀다. 케네디가 암살당한 직후 딜런은 국가비상사태위원회가 수여하는 톰 페인 상(Tom Paine Award)을 받았으나, 시상식에서 위원회의 역할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며 위원회 구성원들을 구세대 대머리 종자들로 묘사하고 자신을 포함한 모든 남자들에게서 케네디를 암살한 리 하비 오즈월드를 본다고 주장해서 큰 논란을 빚는다. 또 딜런은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무수히 쏟아지는 똑같은 질문들(어떤-저항의-메시지를-담고-있나요?)에 진저리를 치며 비아냥거리거나 반항적인 반응으로 일관한다.
기자 ''세찬 비가 쏟아질 거예요(Hard Rain’s A-Gonna Fall)’라는 노래 말인데요,
핵전쟁에 대한 당신의 감정을 표현해주시면 좋겠습니다.
딜런 아뇨, 이건 핵전쟁 노래가 아니에요.
기자 누군가는 그렇게 생각했어요.
딜런 핵전쟁 노래가 아니라고요. 그냥 폭우예요, 핵을 묘사한 게 아니고요. 폭우라고요.
기자 당신이 쓴 모든 노래는 실화보다 더 사실 같아서 핵전쟁 얘기를 한 겁니다.
무슨 얘긴지 아시겠어요?
딜런 시사적인 건 흥미가 없어요. 시사적인 노래는 쓰지도 않는다구요.
시사적이라는 말도 좋아하지 않고요. 내말은, 실화에 관한 노래가 아니라는 거죠.
1964년 6월, 딜런은 [밥 딜런의 또다른 면(Another Side of Bob Dylan)]을 발표하며 실질적으로 정치적인 포크송을 노래하던 시기와 선을 긋는다. 수록곡인 [그대여, 나는 아니야(It Ain''t Me Babe)]는 러브송의 외피를 입고 있지만, 실은 정치적 대변인의 역할을 거부한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이와 동시에 저항 가수로서의 노선을 걷고자 했던 존 바에즈와도 결별한다. 1960년대 중반, 딜런의 겉모습은 크게 달라진다. 그야말로 수수한 차림의 포크 싱어송라이터에서 포크록스타로 위치를 선회한 모습이었다. 딜런은 늘 입던 청바지와 작업복 셔츠를 집어던지고 화려한 옷을 입기 시작했다. 낮이나 밤이나 선글라스로 눈을 가리고 다녔으며, 비틀스가 유행시킨 ‘Beatle boots’를 신고 다녔다. 인터뷰에도 적극적으로 응했지만 삐딱한 태도는 여전했다. 진행자가 텔레비전 쇼에 출연한 딜런에게 제작중이라는 영화에 대해 묻자, 그는 카우보이 공포 영화가 만들어질 것이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당신이 카우보이 역을 맡았느냐고 묻자 딜런은 이렇게 대답했다. “아뇨, 나는 우리 엄마를 연기했는데요.”
1965년 3월에는 다섯번째 앨범 [모두 가지고 돌아오다(Bringing It All Back Home)]를 발표했다. 이 앨범은 처음으로 일렉트릭 악기를 사용해 녹음한 딜런의 또다른 음악적 도약이었다. 앨범 앞면에는 밴드와 함께 연주한 로큰롤이 실려 있었고, 뒷면에는 어쿠스틱 악기로 연주한 포크곡이 실려 있었다. 팬들은 앨범 앞면 수록곡에 대해 포크의 진정성을 잃어버렸다고 비난했다. 이것은 딜런이 앞으로 듣게 될 비난과 야유의 시작에 불과했다. 딜런은 이 해 5월에 영국 투어를 마치고 돌아온 이후 로큰롤 밴드와 함께 [구르는 돌처럼(Like a Rolling Stone)]을 녹음했고, 7월에 포크송 축제인 뉴포트 포크 페스티벌(Newport Folk Festival)에 참여해 이 노래를 부른다. 밴드와 함께 다음 달 발표할 앨범인 [다시 찾은 61번 고속도로(Highway 61 Revisited)]에 수록될 세 곡 또한 일렉트릭 사운드로 연주한다. 그리고 현장에서 역대 최악의 비난과 야유를 듣는다. 일렉트릭 기타를 들고 노래하는 딜런은 포크팬들과 포크 운동 리더들에게 변절자, 배신자의 모습으로 비춰졌고, 포크만의 순수성과 진정성을 훼손하는 것으로 보였다. 심지어 피트 시거는 도끼로 딜런의 마이크 케이블을 끊어버리겠다고 소리쳤다. 딜런은 관중들의 야유 때문에 15분 만에 무대에서 내려갔다. 이후 ‘부-’하는 소리(야유 소리)는 그의 1966년 월드 투어까지 따라왔다. 딜런은 1부에서는 어쿠스틱 공연을 하고, 2부에서는 더 밴드(The Band) 멤버들과 로큰롤 공연을 하는 식의 절충적인 대안을 선택했지만 일렉트릭 악기들이 나올 때마다 관객들의 비난은 어김없이 등장했다. 관객들이 보길 원하는 딜런의 모습은 오직 한 가지였다. 어쿠스틱 기타를 들고 소박한 모습으로 연주할 것. 저항의 노래를 부를 것. 한 영상에서 딜런은 농담조로 이렇게 중얼거린다. ‘진짜 딜런은 아프다고 해야겠어.’ 1966년 5월, 명반 [블론드 온 블론드(Blonde on Blonde)]를 발표하고 2개월 뒤, 유럽 투어를 마치고 돌아온 직후. 딜런은 우드스톡에 있는 집 근처에서 오토바이 사고를 당한다. 그리고 12개월간 철저히 은둔하며 모습을 감춘다. 이 은둔 기간 동안 딜런은 연인이었던 세라 로운즈와 비밀리에 결혼을 한다. 그 사실을 아는 사람은 몇 명 없었다. 그동안 딜런이 ‘빅 핑크’라는 지하 연주실에서 더 밴드 멤버들과 새로운 음악 실험을 하고 무수한 창작곡을 썼다는 것도. 당시 연주한 테이프는 팬들 사이에서 해적판으로 불법 유통되었다. 어쨌거나 딜런은 대중으로부터 멀리 물러났고, 몇몇 출연을 제외하면 오토바이 사고 이후 8년가량 투어를 진행하지 않았다. 그러나 앨범은 쉬지 않고 발표했다. 대중들로부터의 비난과 압박감이 그의 창조력을 완전히 짓누를 수는 없었던 것이다.
이처럼 시기적으로 그의 포크록 3부작이라 불리는 [모두 가지고 돌아오다(Bringing It All Back Home](1965), [다시 찾은 61번 고속도로(Highway 61 Revisited)](1965), [블론드 온 블론드(Blonde on Blonde)](1966)의 작업 시기와 집필 시기가 겹치는 『타란툴라』에는, ‘반문화와 저항의 상징’으로 평가되던 자신을 향한 외부의 시선과 그 어느 것으로도 규정되기를 거부하던 내면의 지향 사이에서 자신만의 세계를 끊임없이 다시 허물었다 다시 구축해가던 그의 정체성의 역동적인 길항 작용이 곳곳에 드러나 있어서, 그의 창작 과정에 관심 있는 이들에게 『타란툴라』는 갈증을 해소시킬 수 있는 통로도 될 것이다.
“세상은 잠시도 멈추지 않았다 - 다만 폭발했을 뿐”
- 그러나 『타란툴라』는 변하지 않았다
- 50여 년을 뛰어넘어 오늘도 여전히 유효한 보편의 잠언과 통찰들
소설 『타란툴라』는 밥 딜런을 ‘거리의 음유시인’이게 한 수많은 노랫말이 탄생하기까지 그의 머릿속 생각을 여과 없이 옮겨놓은 상상의 보고이자 수많은 페르소나의 각축장이며, 베트남 전쟁과 인권운동, 창조적 갈등의 소용돌이 속에서 환상을 보는 초현실주의적 서사시의 콜라주이다. 그의 노랫말이 정교하게 세공된 다이아몬드라면 『타란툴라』는 세공 이전의 원석인 셈이다.
『타란툴라』는 처음과 중간과 결말이 있는 소설이 아니다. 처음에는 혼란스러울지 몰라도 나중에는 묘한 매력을 느끼게 하는 책이다. 아티스트의 코드를 가진 이들에게 많은 영감을 줄 것이다. 문학은 무엇일까? 나는 노벨상위원회의 결정에 대한 밥 딜런의 반응도 문학적이고, 노벨상위원회의 결정도 문학적인 결정이었다고 생각한다. _ 「옮긴이의 말」 중에서
밥은 이해하기 힘든 방식으로 작업하며, 언제나 훌쩍 앞서 있었다. 과거의 그가 『타란툴라』에 쓴 내용이 많은 부분이 지금은 그때와 달리 이해하기에 그리 어려워 보이지 않는다. 사람은 변하며 감정도 변한다. 그러나 『타란툴라』는 변하지 않았다. 이제 밥이 이 책의 출간을 원하여 여기 이렇게 책을 내놓는다. 이것은 밥 딜런의 첫번째 책이다. 그가 스물다섯 살 때 쓴 그대로이며―바로 이렇게―이제 여러분도 그것을 알게 될 것이다. _ 「초판 서문」 중에서
“사람은 변하며 감정도 변한다. 그러나 『타란툴라』는 변하지 않았다.”라고 기록한, 초판 서문 편집자의 서술은 45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여전히 유효하다. 50여 년 전에 쓰인 작품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반전?평화?젊음?사랑?음악 등을 주제로 대중문화와 사회 전반을 향해 던지는 밥 딜런의 시선에는 ‘지금 여기’를 환기하는 잠언과 통찰이 가득하다. 1966년 25세 청년 밥 딜런의 눈에 비친 현실과 21세기의 현실이 전혀 어색하지 않게 겹쳐지며 서로를 환기한다. ‘문학’이라는 영역이 지닌 ‘보편의 힘’을 확인하게 되는 지점이다.
▣ 작가 소개
저 : Bob Dylan
밥 딜런의 발자취는 거대하다. 그 이름은 마치 선대의 성인(聖人)처럼 하나의 위엄으로 우리를 억누른다. 딜런과 그의 음악을 피해 가는 것은 ‘록 역사에 대한 접근’을 포기하는 것과 같다. 그를 아는 것은 납세와 같은 신성한 의무에 다름 아니다. 미국의 음악계와 학계에서 ‘딜런 읽기’는 실제로 교양필수 과정으로 인식되어 있다. 그는 록의 40년 역사에서 엘비스 프레슬리(Elvis Presley), 비틀스(The Beatles) 그리고 롤링 스톤즈(Rolling Stones)와 함께 최정상의 위치를 점한다. 그러나 이들 ‘전설의 빅 4’ 가운데에서도 딜런이 남긴 궤적은 차별화 아닌 특화(特化)되어 역사를 장식한다.
얼핏 그의 위상은 ‘실적주의’로 따질 때 매우 허약해 보인다. 엘비스, 비틀스, 롤링 스톤즈는 그 화려한 전설에 걸맞게 무수한 히트곡을 쏟아냈다. 넘버 원 히트곡만 치더라도 엘비스는 18곡(통산 2위), 비틀스는 20곡(1위), 스톤즈는 8곡(11위)이나 된다. 하지만 딜런은 그 흔한 차트 1위곡 하나가 없다. ‘Like a rolling stone’과 ‘Rainy day woman #12 & 35’ 등 두 곡이 2위에 오른 것이 고작이다. 차트 톱 10을 기록한 곡을 다 합쳐봐야 4곡에 불과할 뿐이다. 그에게 대중성이란 어휘는 어울리지 않는다. 상업적이란 말과는 아예 인연이 없다. 이렇듯 실적이 미미한 데도 록의 역사는 마치 신주 모시듯 그를 전설적 존재로 떠받드는 이유는 무엇일까? 비틀스, 스톤즈, 엘비스는 차트 정복 외에도 또 다른 공통점이 있다. 비록 그 가지는 다를지언정 ‘록의 스타일 확립’ 이라는 몸체는 유사하다는 것이다.
비틀스는 록의 예술적 지반을 확대했고, 스톤즈는 록에 헌신하며 형식미를 완성했고, 엘비스는 록의 정체성을 부여했다고들 한다. 분명히 딜런도 몸체에 자리한다. 깃털은 결코 아니다. 그러나 타(他) 3인의 몸체가 외양이라면 그는 ‘내면’ 이라고 할 수 있다. 바로 노랫말이요, 메시지다. 왜 이것이 중요한가? 음악은 사운드와 형식만으로 이미 메시지가 아닌가? 하지만 그것은 그렇게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로큰롤이 폭발하여 확산되던 시점인 1950년대, 즉 엘비스가 활약하던 당시에 로큰롤은 메시지가 없었다. 1960년대 들어서 비틀스가 미국을 급습해 록의 르네상스를 일궈내고 있던 때까지도 록은 의미있는 가사와 격리된 상태였다. 그래서 의식계층으로부터 멸시를 당했다. 그 때 밥 딜런이 있었다. 비틀스는 누구보다 먼저 딜런의 위력을 절감했다. 그의 포크 사운드와 메시지를 귀담아 듣고 그것을 자신들의 음악에 적극 수용한다. 1965년말 < Rubber Soul > 앨범의 수록곡인 ‘In my life’, ‘Girl’, ‘Norwegian wood’ 등에서 ‘톤 다운’ 을 드러내며 메시지를 잠복시킨 것은 전적으로 딜런의 영향 때문이었다.
밥 딜런은 실로 대중 음악의 지성사(知性史)를 이룬다. 타임(Time)지의 제이 칵스는 1989년 기사에서 다음과 같이 묻는다. “존 업다이크의 소설과 밥 딜런의 앨범 가운데 어느 것이 미국인들의 삶에 보다 자극을 주었는가? 존 업다이크 쪽에 표를 던진 사람이라면 이 기사를 여기까지 읽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의 가사는 그러나 때론 메시지의 파악이 어려운 ‘난해한 현대시’ 와 같다. 밑줄 긋고 열심히 분석해도 도대체 명쾌하지가 않다. 1960년대 중반 < Another side of Bob Dylan >, < Bring it all black home >, < Highway 61 revisited >가 연속 발표되었을 때, 미국 각 대학의 영문과에 ‘밥 딜런 시분석’ 강좌 개설이 유행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우리의 팝팬들에게 딜런이 상대적으로 소원한 이유가 여기에 있을 것이다. 미국인들에게도 이 정도인데 영어의 벽에 막혀 있는 우리가 어찌 그를 쉽게 수용할 수 있었겠는가. 때문인지 음반마저 제대로 소개되지 않았다. 초기곡으로 알려진 것은 그나마 메시지가 확연한 ‘Blowin’ in the wind’정도였다. 하지만 그것도 1970년대 중반의 금지곡 태풍으로 반전(反戰) 노래라는 낙인이 찍히면서 방송과 판매가 금지되었다. 그 외 우리 팝 인구에 회자된 노래로 ‘One more cup of coffee’나 ‘Knockin’ on heaven’s door’가 있다. 그러나 그의 대표곡 반열에도 오르지 못하는 ‘One more cup of coffee’가 통한 것은 단지 낭만적 제목과 함께 친숙한 선율 때문이었을 뿐, 딜런의 음악 세계에 대한 천착의 결과물은 전혀 아니었다. ‘Knockin’ on heaven’s door’ 인기의 영예도 실은 건스 앤 로지스가 더 누렸다.
극소수의 곡을 제외하고 밥 딜런은 우리에게 인기가 없었다. 비틀스, 스톤즈, 엘비스에 비한다면 엄청난 ‘부당 대우’였다. 언어 장벽과 무관한 음악 스타일 측면에서도 우리의 ‘홀대’ 는 마찬가지였다. 멜로디가 그럴싸한 곡이 있더라도 풍기는 내음이 지극히 ‘미국적’ 이었기에 우리의 청취 감성은 딜런을 꺼리곤 했다. 그의 음악 세계라 할 포크, 컨트리, 블루스는 미국 전통과 긴밀한 함수 관계를 지닌다. 선율과 사운드의 영국적인 맛에 길들여진 우리로서는 그의 음악에 잠기기가 쉽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 사이에 우린 어느덧 딜런과 크게 멀어져버렸다. 록의 흐름을 거슬러 올라가다가 꼭 딜런에서 막힌다. 신세대 가운데 더러는 우리의 팝 수용 문화에서 딜런 공백이 가져온 취약성을 맹렬히 질타하기도 한다. 우리 기준에서의 ‘팝 음악 여과’는 바람직하고 필요하다. 그러나 의역은 정확한 직역이 기초돼야 올바르다. 미국의 해석을 전제한 뒤라야 우리식 필터링의 의의가 배가된다.
그 직역의 첫 번째 대상이 바로 밥 딜런이다. 밥 딜런이 미국의 현대 음악사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이유는 그의 음악몸체가 곧 시대와 세대의 흐름을 떠안고 있기 때문이다. 딜런의 음악이 변화하는 과정과 그것을 있게 한 배경, 또한 그것을 주도해간 그의 자세는 ‘음악외적 환경’과 긴밀한 관계가 있다. 먼저 포크 록(Folk-Rock)이다. 그가 1960년대 초반 저항적인 모던 포크로 베이비 붐 세대를 견인했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없다. 통기타만으로 연주되는 단순한 구조이지만 그것의 포획력은 비틀스가 사정권에 들어올 만큼 대단한 것이었다. 비틀스가 베이비 붐 세대를 발현시켰다면 그는 그들의 의식화를 유도했다. 그러나 딜런은 케네디의 피살에 자극받으면서 스스로 ‘위기감’ 을 불어넣는다. 이미 비틀스가 세대의 청취 볼륨을 증폭시킨 마당에 포크의 음량 가지고 과연 세대를 관통할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1971년 그는 이렇게 술회한 바 있다. “그들(비틀스)은 아무도 하지 않은 것을 하고 있었다. 그들의 코드는 정말 도에 지나친 것이었지만 하모니가 그것을 타당하게끔 했다. 그러나 맹세하건데 난 정말 그들에게 빠졌다. 모두들 그들이 어린 10대를 위한 광대이며 곧 사라질 것이라고들 했다. 그러나 내겐 명확했다. 그들이 지속력을 갖고 있다는 사실이. 난 그들이 음악이 가야할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 내 머리 속에는 비틀스가 전부였다.” 그는 일렉트릭 기타를 잡아야 했다. 그것이 포크 록이었다. 포크의 순정파들로부터 배신자라는 질타는 불 보듯 뻔했다. 그가 뉴포트 포크 페스티벌에서 알 쿠퍼(Al Kooper), 마이크 블룸필드(Mike Boomfield)가 참여한 버터필드 블루스 밴드(Butterfield Blues Band)와 함께 전기 기타 연주를 했을 때 관중들은 “이건 포크 공연이야 나가!”라고 야유하며 돌과 계란 세례를 퍼부었다. 무대에서 내쫓긴 그는 통기타를 들고 되돌아왔지만 의미심장한 ‘It’s all over now’, ‘Baby blue’를 부르며 포크 관객들에게 아듀를 고했다. 껄끄러운 통과의례를 거친 뒤 밥 딜런의 포크 록은 ’Like a rolling stone’의 빅히트와 함께 만개했다. 이젠 막을 자도 없어졌다. 포크 록은 당시에 막대한 영향력을 발휘했다. ‘존 레논과 밥 딜런을 결합해야 한다’는 것을 인식한 그룹 버즈(Byrds)는 ‘Mr. Tambourine man’으로 인기 가도를 질주했다. 그러나 그 곡은 딜런의 작품이었다.
버즈 뿐만 아니라 당시 포크 록계열 뮤지션치고 딜런의 곡을 손대보지 않은 사람은 없었다. 단숨에 포크 록은 1960년대 록의 주류로 부상했다. 1960년대 중.후반을 강타한 싸이키델릭 록(제퍼슨 에어플레인, 그레이트풀 데드)도 실상 포크 록에 영향받은 흐름이었다. 그럼 어째서 포크 록은 1960년대 청춘들을 사로잡아 그들의 의식을 대변할 수 있었을까? 비틀스가 딜런에게 배우고, 딜런이 비틀스로부터 영감을 얻은 ‘포크와 록의 결합’ 은 시대성 견인을 가능케 한 절묘한 무브먼트였다. 록은 생태적으로 거리의 청춘에 의해 확립된 ‘하위문화적 표현’이다. 따라서 하이 클래스나 인텔리겐차와는 일정한 거리를 둔다. 또한 포크는 저항성을 견지하는 민중 음악이지만 음악의 주체나 주소비자층은 학생과 지식인 세력이다. 성질상 엇비슷하면서도 걸어온 길이나 ‘계급성’은 엄연히 다른 것이다. 밥 딜런이 포크 오리지널로부터 급격히 퇴각하여 록으로 전향한 것은 단지 추세의 편승이 아닌 완전함을 향한 ‘하층문화의 긴급 수혈’로 보인다. 이를테면 ‘위’의 고매한 문제의식과 ‘아래’의 근원적 반항을 한고리로 엮는 것이다. 그러면서 저항 영역의 지반 확대와 수요자의 확충을 기할 가능성은 올라가게 된다.
지식인만이 아닌 1960년대 젊은이들의 ‘계층포괄적 무브먼트’ 는 포크 록과 이 점에 있어 밀접한 관계를 맺는다. 1960년대 중후반을 물들인 ‘히피보헤미안’ 물결도 딜런과 떼어낼 수 없는 흐름. 1960년대 록 역사에서 두 번째로 중요한 부분이다. ‘Like a rolling stone’은 포크 지식인의 소리라기보다 보헤미안적 정서의 노출로 파악해야 한다. 당시 딜런은 가치의 상대성을 신뢰하고 제도에 흡수되기룰 거부하는 이른바 비트(Beat) 사상에 빠져 있었다. 그가 진보적 시인인 알렌 긴스버그(Allen Ginsberg)와 교류하며 ‘개인 혁명’에 골똘해 있을 때가 바로 이 무렵이다. 비트는 이후 히피의 융기에 주요 인자가 되는데, 1960년대 중반 딜런의 음악을 가로지르는 것이 바로 이 ‘히피 보헤미안 정서’라 할 수 있다. 스스로 록 세계로 옮아가고 방랑적 지향을 설파한 것은 기존과 기성의 틀 깨기에 목말라 있던 베이비 붐 세대들에게 영도자가 제공한 ‘산교육’과 다름없었다. 따라서 밥 딜런은 그에게 등을 돌린 포크 근본주의자들의 수보다 휠씬 더 많은 록팬을 거뜬히 확보하게 된다. 음악적으로 딜런의 창작성이 이 때만큼 가공의 위력을 떨친 적도 없다. < Highway 61 Revisited >와 < Blonde On Blonde > 앨범은 포크의 엄숙주의에서 해방되어 록과의 결합으로 자유분방한 이미지를 포획한 결과였다. 그리고 그 음악은 ‘남을 위해’ 이데올로기에 봉사한 결과가 아니라 자신의 즐거움이 가져온 산물이기도 했다. 그가 포크의 프로테스트로부터 이탈한 것은 바로 ‘자유’와 등식화되는 ‘예술성’을 찾기 위한 노력이었다.
그는 저항성 대신 예술성을 얻었다. 개인적 경사도 겹쳤다. 사적으로 사라 로운즈와의 결혼은 그의 창작력 한층 북돋아주었으며 그 충만한 행복감은 그대로 < Blonde On Blonde > 앨범에 나타났다. 이 앨범의 탁월한 질감은 상당부분 사라와의 결혼이 낳은 것이라는 게 평자들의 일치된 시각이다. 나중 사라와의 파경 또한 그에게 또 하나의 명반 < Blood On The Tracks >를 안겨준다. 히피의 낭만적인 집단주의와 곧바로 이어진 이피(Yippie)의 전투성이 극에 달할 무렵 그가 뉴욕의 외곽 빅 핑크(Big Pink) 지하실에서 한가로이 더 밴드(The Band)의 멤버들과 자유 세션을 즐기고 있었다는 사실은 아이러니컬하다. 불의의 오토바이 사고가 가져온 행보이기도 했지만 그가 의도적으로 은둔을 택한 것은 분명했다. 세상이 소란함으로 가득할 때 그는 정반대로 정적을 취한 것이다, 그는 자신이 물꼬를 터준 미국 사회의 격랑이 결국 아무런 소득도 없을 것으로 예측했는지도 모른다. 세대의 공동체 지향은 지극히 ‘비이성적’으로 비춰졌을 테고 오히려 그는 그럴수록 자신에게 돌아와 근본을 탐구하는 것이 올바른 행위라고 여겼던 것 같다. 그러한 심저(心底)가 < John wesley Harding >과 < Nashiville Skyline >의 골간에 자리한다. 이 작품들에서 그는 ‘뜻밖에’ 재래식 컨트리 음악을 선보였다. 두 앨범은 모두 내쉬빌에서 녹음되었고 < Nashiville Skyline >의 경우 딜런은 컨트리 음악의 거성 자니 캐시(Johnny Cash)와 듀오로 ‘Girl from the north country’에서 다정히 호흡을 맞추기도 했다. 이 앨범에서 톱 10 히트곡 ‘Lay lady lay’가 나왔다. 이 곡을 비롯해 대부분의 수록곡에서 딜런의 보컬은 예의 날카로움이 거세된 채 한결 부드러워졌고 가사도 접근이 비교적 용이해지는 등 멜로딕한 무드가 전체를 지배했다. 다시 세상은 소용돌이에서 호수의 조용함으로 돌아왔다. 그것이 1970년대 초반의 분위기였다. 딜런이 씨앗을 뿌린 ‘컨트리 록’ 은 1970년대 내내 주요 장르 중 하나로 맹위를 떨쳤다.
딜런은 언제나 흐름의 주역이었다. 나중 음반화된 더 밴드와의 세션 앨범 < Basement Tapes >가 록 역사에서 ‘특혜’를 받는 것도 이러한 배경 속에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1970년대 들어서 그는 ‘대중적’ 관점에서 뿌리에 대한 천착에 박차를 가했다. 예전에 그는 ‘좋은 사람만 따르면’ 된다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사람이 많이 따를수록 좋다’는 쪽으로 입장을 정리했다. 그가 1970년 < Self Portrait > 앨범에서 ‘Moon river’를 포함한 팝 스탠다드 넘버들을 노래한 것은 이러한 사고와 맥락이 닿아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대부분의 비평가들이 눈을 흘겼다. 레코드 월드(Record World)지는 이 앨범을 두고 “혁명은 끝났다. 밥 딜런이 ‘미스터 존스’에게 ‘Blue moon’을 불러주고 있다”며 혹평했다.(미스터 존스는 딜런이 < Highway 61 Revisited >의 ‘Ballad of thin man’에서 “여기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아, 존스 씨?”라고 했던 가공의 인물로 ‘제도권 인사’를 상징한다.) 빌보드 차트3위에 오르는 성공을 거두었지만 이처럼 평단의 이해를 구하는 데는 실패했다. 그러나 < Self Portrait >앨범을 상업적 표현으로 볼 수는 없다. 비판의 칼을 휘두르는 비평가들도 그렇게 생각하진 않는다. 근본을 탐구하는 방법론의 연장선에서 파악하는 것이 보다 정확하다. 딜런이 1970년대 후반부에 기독교에 귀의한 것도 비슷한 문맥으로 풀어야 할 것이다. 사실 신(神)에의 의지가 엿보인 < Show Train Coming >, < Saved >, < Shot Of Love > 등 3장의 종교풍 음반은 ‘사고의 깊이’가 두드러졌지만 ‘변신’이라는 부정적 의미에 가치가 함몰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1970년대 딜런을 ‘혼미의 거듭’으로 규정한다. 표면적으로는 그렇다. 그러나 그것을 뒤집어보면 그는 자신의 사고와 감정에 충실했다는 얘기가 된다. 이것이야말로 아티스트의 본령이다. 밥 딜런은 언제나 음악을 통해 세상과 삶의 근본 원리를 탐구하고자 했다.
1980년대의 밥 딜런은 1970년대의 습기를 벗고 ‘열기’를 회복한다. 정치적 시각도 이입한 < Infidels >, < Empire Burlesque > 그리고 1989년에 나온 < Oh Mercy >는 이전의 앨범들과 명백한 분리선을 긋는다. 날카로운 보컬은 오히려 1960년대의 모습에 더 가깝다. 그는 1980년대 중반 라이브 에이드(Live Aid), 아파르트헤이트에 반대하는 아티스트의 모임(Sun City) 등 일련의 자선행사에 얼굴을 내밀어 저항 전선에 복귀했다. 한 무대에서 그는 U2의 보노(Bono)와 함께 ‘Blowin’ in the wind’를 부르기도 했다. 딜런의 1980년대 앨범들에는 당시의 보수적이고 위압적 풍토를 거부하는 저항성이 숨쉰다. 그는 시대의 주류 한복판에는 없었지만 ‘시대의 공기’와 늘 함께 호흡했다. 그 공기를 어떤 때는 앞장 서 조성하고 어떤 때는 그것을 피해갔다. 밥 딜런의 한 면만을 바라보게 되면 그의 진면목을 알 수 없다. 그가 서 있던 ‘양쪽’ 자리를 다 관찰해야만 그 ‘드라마틱한 록 역사의 굴곡’ 을 읽을 수 있다. 록의 역사는 실로 위와 아래, 진보와 보수, 주류와 비주류, 기존과 대안이 끊임없이 부침을 되풀이 해왔다. 밥 딜런이 밟아온 길은 그것의 축소판이었다. 그러나 어떤 시점에서라도 - 가령 프로테스트의 깃발을 울렸을 때나, 대중성에 기웃거렸을 때나 - 딜런이 주변의 압박에 수동적으로 임한 적은 없다. 남이 시켜서 일렉트릭의 세계로 떠밀려 간 것이 아니었고, 의도적으로 신비를 축적하기 위해 은둔했던 것도 아니다. 그의 터전은 언제나 자신의 의지가 지배하는 세계였다. 비평가들이 밥 딜런을 전설로 숭앙하는 것은 그가 대중 음악계에서는 보기 드문 ‘음악의 주체’이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이야말로 음악인의 최고 영예인 ‘아티스트’란 소리를 들어 마땅했다. 그는 록에 언어를 불어넣었다. 포크와 컨트리를 록의 영역으로 끌어들였다. 시대와 맞서기도 했고 자신의 예술성에 천착하기도 했다. 그러한 업적과 성과의 편린들이 모여 그의 ‘광활한 아티스트의 세계를 축조하고 있다. 밥 딜런은 역사의 수혜와 위협 속에서 ‘인간’을 살려냈다. 음악인으로서 인간의 몸체는 다름 아닌 자유일 것이다. 밥 딜런의 위대함이 바로 여기에 있다.
역 : 공진호
뉴욕 시립대학CUNY에서 영문학과 창작을 전공하였다. 하퍼 리의 『파수꾼』 얄마르 쇠데르베리의 『닥터 글라스』 샤를 보들레르의 『악의 꽃』 『에드거 앨런 포우 시선: 꿈속의 꿈』 『아틸라 요제프 시선: 일곱 번째 사람』을 비롯해 F. 스콧 피츠제럴드의 『밤은 부드러워』 윌리엄 포크너의 『소리와 분노』 허먼 멜빌의 『필경사 바틀비』 이디스 그로스먼의 『번역 예찬』 등 다수의 번역서를 냈다. 뉴욕에 거주하며 번역과 창작을 하고 있다.
▣ 주요 목차
초판 서문 | 여기 ‘타란툴라’가 있다 | 009
권총, 매의 입술책 & 벌 받지 않은 떠버리 | 015
길쭉하고 키 큰 외부인과 이상한 술을 마시다 | 031
(마녀처럼 무의미한) | 034
플레인 비 플랫 조의 발라드 | 036
음속 장벽 깨기 | 039
뚝 떨어진 기온 | 041
플랫피크의 전주곡 | 043
거룻배의 마리아 | 050
무비 스타의 입속 모래 | 052
미친 사람 구역을 줄로 차단하기 | 056
출판되지 않은 마리아를 찾아가다 | 059
사슬 고리 40개 (詩) | 061
사랑으로 목이 메어 | 066
경마 | 071
호주머니 가득한 악당 | 074
무용無用 씨가 노동에 작별을 고하고 레코드 취입을 하다 | 076
호랑이 형제에게 주는 조언 | 078
불결한 감방에서 폭동을 구경하기 또는 (감옥에는 주방이 없다) | 080
절망 & 마리아는 어디에도 없다 | 083
아서왕의 방랑자 집단 속 남부 연방 밀정 | 086
키스하는 기타들 & 당대의 난관 | 090
떠돌이 노동자 모델에게 주는 조언 | 098
패자는 빈손이라는 냉혹한 현실 | 100
마리아의 친구에게 사랑을 고백하다 | 105
젊은 탈영병인 심부름꾼에게 보내는 편지 | 108
엽총의 맛 | 111
메이 웨스트의 스톰프 춤 (우화) | 114
캄캄한 밤의 굉음 | 118
적대적인 캄캄한 밤의 굉음 | 121
무책임한 캄캄한 밤의 굉음 | 124
강렬한 캄캄한 밤의 굉음 | 126
누군가의 캄캄한 밤의 굉음 | 128
캄캄한 밤의 굉음처럼 보인다 | 131
꿀꺽꿀꺽?단숨에 쭉 내 부름을 들어봐요 요들레이호 | 134
천국, 사회의 밑바닥, 덧없이 마리아 | 136
평화주의자의 펀치 | 138
신성한 목쉰 목소리 & 짤랑짤랑 아침 | 141
프로파간다 과목, 낙제 | 145
일요일의 원숭이 | 148
카우보이 에인절 블루스 | 158
지하의 향수병 & 블론드 왈츠 | 165
격노한 사이먼의 고약한 유머 | 171
사시이지만 매우 훌륭한 피아노 연주자를 발견했다 | 175
기물 파괴꾼들이 물펌프 손잡이를 가져갔다 (오페라) | 180
기계장치 속의 보안관 | 188
마리아의 변속기 속 가짜 속눈썹 | 194
알 아라프 & 촉성재배 위원회 | 198
옮긴이의 말 | 돈 룩 백 | 209
밥 딜런 연보 | 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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