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 출판사서평
북한 현대사의 모든 것,
70여 년의 사건과 사실을 생생하게 읽는다!
"1945년 해방부터 2016년 제5차 핵실험까지
북한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교육, 군사 등을 한눈에 보다"
우리에게 북한은 무엇인가? 원수인가, 동포인가? 그런데 보수 정부 10년의 언행을 보면 북한을 원수로 보는 것 같다. 대북 전단 살포를 금지하면 대화하겠다는 북한의 요구를 묵살하고 대결 국면으로 가더니, 북한이 2016년 1월 제4차 핵실험을 하고 장거리로켓을 발사하자 개성공단마저 중단시켰다. 보수 정부는 대화하자고 말로는 했지만 대화를 위해 북한이 요구한 어느 것 하나도 들어주지 않았다. 그래놓고는 대화를 제의했는데 북한이 응하지 않았다고 한다. 남북한이 각각의 정부를 세운 이후 제2공화국 11개월과 김대중·노무현 정부 10년을 제외하고 60여 년 동안은 그런 식으로 북한을 대해왔다.
어떻게 하면 북한이 발가벗은 채 손들고 나오게 만들 것인지, 어떻게 하면 북한이 "한 번만 살려주십시오" 하도록 할 것인지 골몰해왔다. 가진 것 없이 자존심만 남은 북한은 "굶을지언정 무릎 꿇진 않겠다"는 태도를 견지해왔다. 그러니 남북의 역사는 대결의 역사가 주를 이룰 수밖에 없었다. 그런 대결의 역사가 실제로 시작된 것은 정부 수립 훨씬 이전인 1945년이다. 해방의 해(年)에 벌써 대결이 시작되었다. 처음엔 남북을 각각 점령한 미국과 소련이, 그 이후에는 남한과 북한이 서로 확연히 다른 길을 가게 되었다. 이념적으로 완전히 다른 당을 세워나가고, 찬탁과 반탁으로 나뉘면서 대결의 길을 가게 된 것이다. 그렇게 시작된 1945년이 이후 한반도의 상황을 대부분 규정해버렸다.
전북대학교 정치외교학과 안문석 교수가 원고지 5,500매 분량으로 북한 현대사를 전5권으로 집필했다. 국내 최초로 북한 현대사를 사건과 사실과 기록을 바탕으로 가장 객관적으로 집필한 것이다. 수많은 자료에서 사실(史實)을 찾아내서 기자의 눈과 학자의 눈으로 북한 현대사를 꿰뚫고 있다. 북한의 대표적인 역사서인 [조선통사], [조선전사] 등과 [김일성 선집], [김일성 저작 선집], [인민의 지도자], [김정일 위인상] 등 북한 자료의 진위를 정밀하게 파악하고 통찰력 있게 북한 현대사를 분석했다. 또한 남한의 학자들의 논문과 단행본, 조선인민군의 수기를 통해 균형 잡힌 시각과 안목으로 왜곡되고 잘못된 사실들을 바로잡기도 했다.
북한 현대사 70여 년을 탁월한 안목으로 꿰뚫다
[북한 현대사 산책] 제1권 - 해방과 김일성 체제 (1945~1949년)
북한의 1940년대는 김일성의 역사라 해도 좋을 만큼 그의 활약이 두드러졌다. 그는 민주기지론을 제기하고, 북한을 사회주의화한 뒤 남한으로 확산시키겠다는 계획을 갖고 있었다. 그는 정부 수립 이후 국토완정론을 제시하고, 이를 실현하려고 전쟁을 일으켰다. 1945년을 깊이 보면 아쉬움이 많다. 소련이 태평양전쟁에 뒤늦게 참전해 북한에 들어오게 된 것이 답답하고, 미군 대령 2명이 한반도 위에 그은 선 하나로 분단이 되었다는 것도 원통하다. 패전국 독일이 분단된 것처럼 패전국 일본이 분할 점령되었어야 했는데, 한반도가 나뉘었다는 것도 분한 일이다. 하지만 1940년대 한국 현대사의 아픈 점은 남북한의 핵심 인물들이 통일의 기회를 마련하지 못하고 오히려 분단을 도모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좌우 합작을 이루고 통일임시정부를 마련하는 길을 찾기 위해 노력한 사람들이 있었다. 여운형과 김구다. 하지만 힘이 없었다. 먹을 것이 많은 데로 몰리는 것이 정치의 생리 아닌가. 이들 곁엔 먹을 것이 많지 않았다. 결국 둘 다 권총을 맞고 한국 현대사의 뒤안길로 처연히 사라져갔다. 하긴 이들보다 먼저 간 이가 있었다. 현준혁이다. 누구보다 철저한 공산주의자였던 그도 민족주의자 조만식과 협력하다가 총을 맞았다.
[북한 현대사 산책] 제2권 - 전쟁과 사회주의 건설 (1950~1959년)
북한의 1950년대는 전쟁, 김일성 권력 공고화, 숙청, 종파투쟁, 독자성 추구의 역사였다. 하지만 민족의 단일성과 동질성이라는 측량하기 어려운 가치를 잃었고, 북한 사회의 다양성이라는 어느 것에 못지않은 가치도 상실했다. 1953년 휴전은 우여곡절의 과정을 거쳐 이루어졌다. 이승만은 반대하고, 김일성과 중국인민지원군 사령관 펑더화이, 유엔군 사령관 마크 클라크가 협정에 서명했다. 한반도 통일 문제를 논의하기 위한 제네바 정치 회담은 당시 세계를 지휘하던 인물들이 모두 모였지만 아무런 소득 없이 막을 내렸다. 그렇게 굳어진 정전 체제가 지금도 한반도를 규정하고 있다. 한편 김일성 세력의 중공업 우선 정책에 대해 연안파와 소련파 가운데 반대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김일성 개인숭배에 대해서도 반감을 품은 세력들도 있었다. 북한의 1950년대 후반은 김일성 세력이 이들 반대파에 대한 제거 과정의 시기이기도 했다. 1961년 제4차 당대회에서 김일성 세력이 승리를 선언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북한 현대사 산책] 제3권 - 주체사상과 후계체제 (1960~1979년)
북한의 1960∼1970년대는 전제정치 체제와 세습 체제를 완성하는 시기였다. 1960년대에는 김일성 유일사상 체계와 김일성 유일지도 체계를 세웠고, 1970년대 중반에는 김일성이 주장하는 여러 혁명 이론과 대중지도 방법 등이 보태져 ''김일성주의''가 되었다. 김일성 유일체제 형성 과정은 김정일 후계체제 구축 과정과 동전의 양면이었다. 유일체제를 만들어가면서 김정일 후계체제를 구축해갔다. 그래서 김정일은 김일성 유일체제 형성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아버지를 세우는 것은 곧 자신을 세우는 것이었다. 갑산파를 비롯한 유일체제 반대 세력에 대한 숙청을 주도한 것도 김정일이었다. 김일성 개인숭배 작업을 지휘한 것도 김정일이었다. 1960년대 중후반에는 동남아시아와 아프리카의 많은 나라와 수교를 확대하면서 비동맹 외교에 적극성을 보였다. 하지만 깊이와 폭에서 한계가 많았다. 북한의 관심은 북한식의 사회주의 체제를 세우는 데에만 있었다. 그것이 북한의 현실이었다. 그 핵심에는 물론 김일성이 있었다. 김일성 주변에는 가산제 국가 체제하에서 권력과 부를 분여받은 항일빨치산 세력들이 있었다. 이들에게는 김일성 유일체제가 바람직했고, 김정일의 권력 승계도 나쁘지 않았다.
[북한 현대사 산책] 제4권 - 김정일과 고난의 행군 (1980~1999년)
북한의 1980∼1990년대는 권력 이양기이면서 체제 위기의 시기였다. 1980년 김정일이 대중에게 공개되면서 후계자로 확정되어 군권과 국가기관을 장악했다. 김일성의 권력은 김정일로 서서히 옮아갔다. 김정일은 국가기관을 중심으로 권력을 이어받으면서 1983년에는 중국을 방문해 중국의 지도부와 대면 교류도 시작했다. 1990년에는 국방위원회 제1부위원장에 선출되고, 1991년에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에 올라 군권을 장악했다. 1990년대의 북한 경제는 훨씬 어려워졌다. 1990년대 중반에는 특히 식량난이 극심했다. 배급 체계는 붕괴되고 주민들은 식량을 구하기 위해 장마당으로, 산으로, 심지어는 중국으로 가야 했다. 굶어죽는 사람도 많았다. 북한 당국은 ''고난의 행군''을 외치며 주민들의 희생과 악전고투를 요구했지만, 당국의 장악력은 떨어지고 사회 이완 현상은 점점 심해졌다. 서구와 중국의 지원으로 위기를 겨우 넘길 수 있었다.
[북한 현대사 산책] 제5권 - 김정은과 북핵 위기 (2000~2016년)
북한의 2000∼2010년대는 변화의 시기였다. 실리사회주의를 추구하거나 남북 관계와 북미 관계에 진전도 있었다. 2000년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남북정상회담으로 은둔의 세계에서 탈출했다. 그 자신도 그렇게 말했다. 분단 이후 첫 남북정상회담은 김정일을 은둔에서 벗어나게 했을 뿐만 아니라 중요한 합의도 이끌어냈다. 남과 북이 이야기하는 통일 방안이 유사한 점이 있음을 확인하고 그 방향에서 통일 논의를 해나가기로 한 것이다. 남북이, 그것도 남북의 정상이 통일 방안을 놓고 진지하게 논의한 것은 처음이고, 합의도 처음이다. 하지만 김정은 정권 이후 세 차례의 핵실험은 한반도를 전쟁의 공포로 몰아넣고 남북 관계를 경색시켰다. 2016년 북한은 ''자강력 제일주의''를 부쩍 강조했다. 자신의 능력을 최고의 가치로 여긴다는 것이다. 김정은이 생산 현장에서 이를 지속적으로 강조했다. 1960년대의 자력갱생과 같은 모토다. 자력갱생은 주민의 노력 동원에 이용되었고, 외부와의 교류를 방해했다. ''자강력 제일주의''도 같은 방향으로 흐를 가능성이 농후했다.
남북정상회담과 6·15 남북공동선언
2000년 6월 13일 평양 순안공항에는 레드카펫이 깔렸고, 조선인민군 의장대와 군악대가 줄지어 서 있었다. 남한의 공군 1호기가 공항에 도착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비행기에서 내리는 김대중 대통령을 맞았다. 둘은 손을 맞잡았다. 남북한의 정상이 처음으로 만나는 장면이었다. 두 정상은 조선인민군 의장대의 분열을 받으며 걸었다. 거리에는 50만 명의 주민이 나와 "만세"를 외치며 환영했다. 두 정상은 백화원 영빈관에서 남북정상회담을 했다. 이렇게 해서 분단 역사상 첫 남북정상의 공동선언인 ''6·15 남북공동선언''이 나오게 되었다.
공동선언은 1항에 통일 문제의 ''자주적 원칙''을 명기하고, 2항에 연합제와 ''낮은 단계의 연방제''의 공통성 인정, 그 방향에서 통일 지향, 3항에 이산가족과 비전향 장기수 문제 해결 명시, 4항에 제반 분야의 남북 교류와 협력, 5항에 조속한 당국 대화 개최를 담았다. 2000년 남북정상회담은 회담 개최 그 자체, 회담의 성과로 나온 남북 정상의 첫 공동선언, 공동선언 외에 합의된 부분, 회담 과정에서 나온 중대한 발언, 회담 이후의 합의 실행에 따른 남북 관계의 개선 등 남북 관계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결과물을 무수히 생산해냈다.
개성공단 착공
북한의 아시아태평양평화위원회와 현대아산은 2000년 8월 22일 ''개성공업지구 건설·운영에 관한 합의서''를 체결했다. 북한은 2002년 11월 13일 공단 조성 지역을 ''개성공업지구''로 지정하고, 11월 20일 ''개성공업지구법''을 제정해 공단 조성을 위한 제도적 장치를 마련했다. 2003년 6월 30일에 개성시 평화리에서 착공식을 갖고 개발공사를 시작했다. 북한이 개성공단 사업을 진행한 것은 그 의미가 매우 크다. 첫째, 남한의 기업을 받아들여 공동으로 대규모 사업을 진행한다는 것은 남한과의 지속적인 교류 협력을 의미한다. 둘째, 개성공단 사업은 북한이 ''양의 합 게임''에 대한 인식을 분명히 가졌음을 의미한다. 셋째, 군부의 반대를 무릅쓰고 사업을 진행한 것은 북한의 경제개발에 대한 의지와 온건파의 입지 강화를 보여준다. 개성공단은 북한과 남한에도 많은 편익을 가져다주는 사업이었다. 또한 남북한에 경제적 이익뿐만 아니라 남북한이 화해협력을 지속시키고 평화 분위기를 형성하고 장기적으로 통일의 단계로 나아가는 데 크게 기여할 수 있는 프로젝트였다.
제1차 핵실험
북한은 2006년 10월 9일 오전 10시 30분 지하 핵실험을 강행했다. 10월 8일은 김정일의 당 총비서 취임 9주년 기념일이고, 10월 10일은 당 창건 61주년 기념일이었다. 첫 번째 핵실험은 함경북도 길주군 풍계리의 산악지대에서 이루어졌다. 평양에서 동북 방면으로 약 385킬로미터 떨어진 지점이었다. 규모는 0.5~0.8킬로톤 정도의 폭발력이었다. 북한은 다음 날 외무성 성명을 통해 미국의 압살 정책 때문에 핵실험을 했지만, 협상할 용의는 있으며 미국이 계속 압력을 가중한다면 물리적 대응 조치를 하겠다고 주장했다.
중국은 강한 비난 성명을 냈고, 미국과 일본도 북한을 강력 규탄하면서 강도 높은 유엔 안보리 결의를 추진했다. 노무현 정부 내에서도 북한에 대한 강경 대응을 주장하는 입장이 강했다. 국방부는 군의 경계 태세를 강화하면서 개성공단과 금강산 관광에 대해 강력한 조치를 주장했다. 결국 북한과 미국은 2007년 2월 13일 금융 제재 해제, 6자회담 재개, 영변 핵시설 폐쇄, 국제원자력기구 요원 복귀, 중유 5만 톤 제공 등을 담은 ''2·13 합의''를 도출해냈다.
김정일 사망과 김정은 권력 승계 완료
조선중앙TV는 "위대한 영도자 김정일 동지께서 주체 100, 2011년 12월 17일 8시 30분에 현지 지도의 길에서 급병으로 서거하셨다"라고 김정일의 사망을 공식 발표했다. 직접적 사망 원인은 중증급성 심근경색이었다. 달리는 열차 안에서 심근경색이 발생하고 심장성 쇼크가 일어나 응급치료를 했지만, 숨을 거두었다. 조선중앙TV는 장송곡과 [김정일 장군의 노래] 같은 추모곡을 내보냈고, 시민들은 평양 시내 곳곳의 김정일 초상화와 동상에 모여들어 오열했다.
북한은 김정일 사망 이후 이틀 동안 김정은 중심으로 내부 체제를 정비했다. 김정은은 부문별 최고 수위를 차지해가면서 북한의 권력을 완전히 장악했다. 12월 30일에는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에 올랐다. 군 통수권을 확보하는 것이 급선무였고,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에 먼저 오른 것이다. 군 최고사령관에 오르면서 사실상 권력을 완전히 장악하게 된 것이다. 2012년 4월에는 당 제1비서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에 올랐다. 군 최고사령관 직책에 이어 당과 국가기구에서 최고 지위에 취임한 것이다.
태영호 공사 망명
2016년 8월 영국 주재 북한 대사관 공사 태영호가 남한으로 망명했다. 북한 외교관으로서는 1997년 8월 망명한 이집트 대사 장승길 다음으로 직위가 높은 망명객이었다. 태영호는 평양국제관계대학교를 졸업하고, 외무성 8국에서 일을 시작했다. 김정일의 덴마크어 통역 후보로 뽑혀 덴마크에서 유학해 1993년부터는 덴마크 대사관 서기관으로 근무했다. 1990년대 말 덴마크 주재 대사관이 철수해 스웨덴 주재 대사관으로 이동했다. 이후 귀국해 유럽연합 담당 과장이 되었다. 2001년 6월 벨기에에서 열린 북한-유럽연합 인권대화 당시 북한 대표단장을 맡기도 했다.
태영호가 망명한 것은 자녀 문제 때문인 것으로 전해졌다. 통일부는 그의 망명 이유에 대해 김정은 체제에 대한 염증, 대한민국 사회와 자유민주주의 체제에 대한 동경, 자녀 교육과 장래 문제 등을 거론했다. 그런데 그 가운데에서도 자녀 문제가 주요 사유였던 것으로 알려졌다. 북한이 해외 주재 외교관의 25세 이상 자녀에 대해 귀국령을 내렸고, 27세의 장남이 귀국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게다가 둘째 아들이 영국의 명문 임페리얼칼리지에 2017년에 입학해 수학과 컴퓨터공학을 전공할 계획이었다. 북한으로 들어가면 이런 교육이 단절되기 때문에 고민하던 끝에 망명을 결심했다는 것이다. 최근 태영호는 북한이 "2017년까지 6,7차 핵실험을 준비 중이며, 한국에서 대선이 치러지는 차원에서 핵실험이 실시될 것"이라는 정보를 공개하기도 했다.
▣ 작가 소개
저자 : 안문석
1965년 전라북도 진안에서 태어나 부산에서 중고등학교를 다녔고 서울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했다. 1993년 KBS 기자로 입사해 사회부, 통일부, 국제부, 정치부 등을 거쳤고 정치부 외교안보데스크로 외교·안보·북한 문제를 총괄했다. KBS 재직 중 영국으로 유학해 요크대학에서 정치학 석사학위를, 워릭대학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한반도 문제와 관련된 일을 하다가 공부의 필요성을 느꼈고 공부하다가 재미가 붙어 박사학위까지 받게 된 것이다. 한반도 문제와 국제정치를 깊이 파고 싶은 생각으로 대학으로 자리를 옮겨 2012년부터 전북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로 국제정치를 가르치고 있다. 동북아시아의 국제질서가 주요 관심사이고, 그 연장선상에서 북한을 포함한 동북아시아 주요 국가들의 외교정책을 관찰하고 있다. 북한의 대외관계, 북한의 내부 권력관계, 국제정치이론, 한국의 외교정책, 미국의 외교정책 등을 주제로 연구 작업을 계속하고 있다.
그동안 쓴 책으로는 『글로벌 정치의 이해』, 『오기섭 평전』, 『이제 만나러 갑니다』, 『김정은의 고민』, 『북한이 필요한 미국, 미국이 필요한 한국』, 『노무현 정부와 미국』 등이 있다. 「북미... 불신 구조의 형성 원인과 극복 방안」(『한국동북아논총』, 2016년 9월), 「A Nuclear South Korea?」(『International Journal』, 2014년 3월), 「How Stable is the New Kim Jong-un Regime: a Revolution in North Korea」(『Problems of Post-Communism』, 2013년 1월) 등 북한과 국제정치 관련 논문을 국내외 저널에 계속 발표하고 있다.
▣ 주요 목차
머리말
제1장 남북정상회담 - 2000~2001년
17년 만의 중국 방문
남북정상회담
6·15 남북공동선언
남북장관급회담
비전향 장기수 63명 북송
무산된 북미정상회담
유럽과의 수교 봇물
김정남의 일본 밀입국 시도
국가정보원장 임동원이 본 2000년
제2장 제2차 북핵 위기 - 2002~2003년
개성공단 착공
7·1 경제관리개선조치
시장의 합법화와 실리사회주의
내각 총리, 온건파 박봉주
북일정상회담
미국 특사 방북과 제2차 북핵 위기
북핵 해결을 위한 6자회담 64
성악가가 본 2003년
제3장 합의와 금융 제재 - 2004~2005년
세 번째 중국 방문
두 번째 북일정상회담
탈북자 468명 입국
핵무기 보유 선언
종합시장 통제
조용필의 평양 공연
9·19 공동성명
미국의 금융 제재
미국 학자가 관찰한 2005년
제4장 핵실험과 남북정상회담 - 2006~2007년
네 번째 중국 방문
대풍국제투자그룹 설립
제1차 핵실험
2·13 합의
첫 남북 합작 드라마 [사육신]
10·3 합의
두 번째 남북정상회담
스칼라피노 교수가 본 2006년
제5장 김정은의 등장 - 2008~2009년
금강산 관광객 피격 사망
김정일의 뇌졸중과 김정은 후계 내정
대남강경 노선
김정은 후계 확정
명실상부 최고 영도자
제2차 핵실험
원자바오 방북
남북정상회담 무산
실패한 화폐개혁
평양 주재 영국 대사가 본 2008년
제6장 김정일 사망 - 2010~2011년
종합시장 재개
천안함 사건과 연평도 사건
김정일·김정은의 김일성 유적지 순례
김정은 후계 공식화
우라늄 농축시설 공개
김정일 사망
정은 승계 완료
통일운동가가 본 2010년
제7장 김정은 체제 공식 출범 - 2012~2013년
2·29 합의와 장거리 로켓 발사
제4차 당대표자회
우리식 새로운 경제관리체계
무상의무교육 12년
제3차 핵실험
개성공단 가동 중단
핵·경제 병진 노선
박봉주 총리 재기용
장성택 처형
재미 목사가 본 2012년
제8장 김정은 우상화 - 2014~2015년
21세기의 위대한 태양, 김정은
3각의 권력 엘리트 체제 형성
남북고위급회담
일본과 납치자 재조사 합의
미녀응원단 불참
실세 3인방 인천아시안게임 참석
목함지뢰 도발과 4인 고위급회담
차관급 당국회담 결렬
강력한 군부 통제
일본 의원이 본 2014년
제9장 김정은 시대 선포 - 2016년
''자강력 제일주의'' 제창
제4차 핵실험과 미사일 발사
개성공단 폐쇄
해외식당 종업원 집단 탈북
36년 만의 당대회
사드 배치와 북한의 반발
태영호 공사 망명
제5차 핵실험
100세 할머니의 2016년
주
연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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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현대사의 모든 것,
70여 년의 사건과 사실을 생생하게 읽는다!
"1945년 해방부터 2016년 제5차 핵실험까지
북한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교육, 군사 등을 한눈에 보다"
우리에게 북한은 무엇인가? 원수인가, 동포인가? 그런데 보수 정부 10년의 언행을 보면 북한을 원수로 보는 것 같다. 대북 전단 살포를 금지하면 대화하겠다는 북한의 요구를 묵살하고 대결 국면으로 가더니, 북한이 2016년 1월 제4차 핵실험을 하고 장거리로켓을 발사하자 개성공단마저 중단시켰다. 보수 정부는 대화하자고 말로는 했지만 대화를 위해 북한이 요구한 어느 것 하나도 들어주지 않았다. 그래놓고는 대화를 제의했는데 북한이 응하지 않았다고 한다. 남북한이 각각의 정부를 세운 이후 제2공화국 11개월과 김대중·노무현 정부 10년을 제외하고 60여 년 동안은 그런 식으로 북한을 대해왔다.
어떻게 하면 북한이 발가벗은 채 손들고 나오게 만들 것인지, 어떻게 하면 북한이 "한 번만 살려주십시오" 하도록 할 것인지 골몰해왔다. 가진 것 없이 자존심만 남은 북한은 "굶을지언정 무릎 꿇진 않겠다"는 태도를 견지해왔다. 그러니 남북의 역사는 대결의 역사가 주를 이룰 수밖에 없었다. 그런 대결의 역사가 실제로 시작된 것은 정부 수립 훨씬 이전인 1945년이다. 해방의 해(年)에 벌써 대결이 시작되었다. 처음엔 남북을 각각 점령한 미국과 소련이, 그 이후에는 남한과 북한이 서로 확연히 다른 길을 가게 되었다. 이념적으로 완전히 다른 당을 세워나가고, 찬탁과 반탁으로 나뉘면서 대결의 길을 가게 된 것이다. 그렇게 시작된 1945년이 이후 한반도의 상황을 대부분 규정해버렸다.
전북대학교 정치외교학과 안문석 교수가 원고지 5,500매 분량으로 북한 현대사를 전5권으로 집필했다. 국내 최초로 북한 현대사를 사건과 사실과 기록을 바탕으로 가장 객관적으로 집필한 것이다. 수많은 자료에서 사실(史實)을 찾아내서 기자의 눈과 학자의 눈으로 북한 현대사를 꿰뚫고 있다. 북한의 대표적인 역사서인 [조선통사], [조선전사] 등과 [김일성 선집], [김일성 저작 선집], [인민의 지도자], [김정일 위인상] 등 북한 자료의 진위를 정밀하게 파악하고 통찰력 있게 북한 현대사를 분석했다. 또한 남한의 학자들의 논문과 단행본, 조선인민군의 수기를 통해 균형 잡힌 시각과 안목으로 왜곡되고 잘못된 사실들을 바로잡기도 했다.
북한 현대사 70여 년을 탁월한 안목으로 꿰뚫다
[북한 현대사 산책] 제1권 - 해방과 김일성 체제 (1945~1949년)
북한의 1940년대는 김일성의 역사라 해도 좋을 만큼 그의 활약이 두드러졌다. 그는 민주기지론을 제기하고, 북한을 사회주의화한 뒤 남한으로 확산시키겠다는 계획을 갖고 있었다. 그는 정부 수립 이후 국토완정론을 제시하고, 이를 실현하려고 전쟁을 일으켰다. 1945년을 깊이 보면 아쉬움이 많다. 소련이 태평양전쟁에 뒤늦게 참전해 북한에 들어오게 된 것이 답답하고, 미군 대령 2명이 한반도 위에 그은 선 하나로 분단이 되었다는 것도 원통하다. 패전국 독일이 분단된 것처럼 패전국 일본이 분할 점령되었어야 했는데, 한반도가 나뉘었다는 것도 분한 일이다. 하지만 1940년대 한국 현대사의 아픈 점은 남북한의 핵심 인물들이 통일의 기회를 마련하지 못하고 오히려 분단을 도모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좌우 합작을 이루고 통일임시정부를 마련하는 길을 찾기 위해 노력한 사람들이 있었다. 여운형과 김구다. 하지만 힘이 없었다. 먹을 것이 많은 데로 몰리는 것이 정치의 생리 아닌가. 이들 곁엔 먹을 것이 많지 않았다. 결국 둘 다 권총을 맞고 한국 현대사의 뒤안길로 처연히 사라져갔다. 하긴 이들보다 먼저 간 이가 있었다. 현준혁이다. 누구보다 철저한 공산주의자였던 그도 민족주의자 조만식과 협력하다가 총을 맞았다.
[북한 현대사 산책] 제2권 - 전쟁과 사회주의 건설 (1950~1959년)
북한의 1950년대는 전쟁, 김일성 권력 공고화, 숙청, 종파투쟁, 독자성 추구의 역사였다. 하지만 민족의 단일성과 동질성이라는 측량하기 어려운 가치를 잃었고, 북한 사회의 다양성이라는 어느 것에 못지않은 가치도 상실했다. 1953년 휴전은 우여곡절의 과정을 거쳐 이루어졌다. 이승만은 반대하고, 김일성과 중국인민지원군 사령관 펑더화이, 유엔군 사령관 마크 클라크가 협정에 서명했다. 한반도 통일 문제를 논의하기 위한 제네바 정치 회담은 당시 세계를 지휘하던 인물들이 모두 모였지만 아무런 소득 없이 막을 내렸다. 그렇게 굳어진 정전 체제가 지금도 한반도를 규정하고 있다. 한편 김일성 세력의 중공업 우선 정책에 대해 연안파와 소련파 가운데 반대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김일성 개인숭배에 대해서도 반감을 품은 세력들도 있었다. 북한의 1950년대 후반은 김일성 세력이 이들 반대파에 대한 제거 과정의 시기이기도 했다. 1961년 제4차 당대회에서 김일성 세력이 승리를 선언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북한 현대사 산책] 제3권 - 주체사상과 후계체제 (1960~1979년)
북한의 1960∼1970년대는 전제정치 체제와 세습 체제를 완성하는 시기였다. 1960년대에는 김일성 유일사상 체계와 김일성 유일지도 체계를 세웠고, 1970년대 중반에는 김일성이 주장하는 여러 혁명 이론과 대중지도 방법 등이 보태져 ''김일성주의''가 되었다. 김일성 유일체제 형성 과정은 김정일 후계체제 구축 과정과 동전의 양면이었다. 유일체제를 만들어가면서 김정일 후계체제를 구축해갔다. 그래서 김정일은 김일성 유일체제 형성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아버지를 세우는 것은 곧 자신을 세우는 것이었다. 갑산파를 비롯한 유일체제 반대 세력에 대한 숙청을 주도한 것도 김정일이었다. 김일성 개인숭배 작업을 지휘한 것도 김정일이었다. 1960년대 중후반에는 동남아시아와 아프리카의 많은 나라와 수교를 확대하면서 비동맹 외교에 적극성을 보였다. 하지만 깊이와 폭에서 한계가 많았다. 북한의 관심은 북한식의 사회주의 체제를 세우는 데에만 있었다. 그것이 북한의 현실이었다. 그 핵심에는 물론 김일성이 있었다. 김일성 주변에는 가산제 국가 체제하에서 권력과 부를 분여받은 항일빨치산 세력들이 있었다. 이들에게는 김일성 유일체제가 바람직했고, 김정일의 권력 승계도 나쁘지 않았다.
[북한 현대사 산책] 제4권 - 김정일과 고난의 행군 (1980~1999년)
북한의 1980∼1990년대는 권력 이양기이면서 체제 위기의 시기였다. 1980년 김정일이 대중에게 공개되면서 후계자로 확정되어 군권과 국가기관을 장악했다. 김일성의 권력은 김정일로 서서히 옮아갔다. 김정일은 국가기관을 중심으로 권력을 이어받으면서 1983년에는 중국을 방문해 중국의 지도부와 대면 교류도 시작했다. 1990년에는 국방위원회 제1부위원장에 선출되고, 1991년에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에 올라 군권을 장악했다. 1990년대의 북한 경제는 훨씬 어려워졌다. 1990년대 중반에는 특히 식량난이 극심했다. 배급 체계는 붕괴되고 주민들은 식량을 구하기 위해 장마당으로, 산으로, 심지어는 중국으로 가야 했다. 굶어죽는 사람도 많았다. 북한 당국은 ''고난의 행군''을 외치며 주민들의 희생과 악전고투를 요구했지만, 당국의 장악력은 떨어지고 사회 이완 현상은 점점 심해졌다. 서구와 중국의 지원으로 위기를 겨우 넘길 수 있었다.
[북한 현대사 산책] 제5권 - 김정은과 북핵 위기 (2000~2016년)
북한의 2000∼2010년대는 변화의 시기였다. 실리사회주의를 추구하거나 남북 관계와 북미 관계에 진전도 있었다. 2000년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남북정상회담으로 은둔의 세계에서 탈출했다. 그 자신도 그렇게 말했다. 분단 이후 첫 남북정상회담은 김정일을 은둔에서 벗어나게 했을 뿐만 아니라 중요한 합의도 이끌어냈다. 남과 북이 이야기하는 통일 방안이 유사한 점이 있음을 확인하고 그 방향에서 통일 논의를 해나가기로 한 것이다. 남북이, 그것도 남북의 정상이 통일 방안을 놓고 진지하게 논의한 것은 처음이고, 합의도 처음이다. 하지만 김정은 정권 이후 세 차례의 핵실험은 한반도를 전쟁의 공포로 몰아넣고 남북 관계를 경색시켰다. 2016년 북한은 ''자강력 제일주의''를 부쩍 강조했다. 자신의 능력을 최고의 가치로 여긴다는 것이다. 김정은이 생산 현장에서 이를 지속적으로 강조했다. 1960년대의 자력갱생과 같은 모토다. 자력갱생은 주민의 노력 동원에 이용되었고, 외부와의 교류를 방해했다. ''자강력 제일주의''도 같은 방향으로 흐를 가능성이 농후했다.
남북정상회담과 6·15 남북공동선언
2000년 6월 13일 평양 순안공항에는 레드카펫이 깔렸고, 조선인민군 의장대와 군악대가 줄지어 서 있었다. 남한의 공군 1호기가 공항에 도착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비행기에서 내리는 김대중 대통령을 맞았다. 둘은 손을 맞잡았다. 남북한의 정상이 처음으로 만나는 장면이었다. 두 정상은 조선인민군 의장대의 분열을 받으며 걸었다. 거리에는 50만 명의 주민이 나와 "만세"를 외치며 환영했다. 두 정상은 백화원 영빈관에서 남북정상회담을 했다. 이렇게 해서 분단 역사상 첫 남북정상의 공동선언인 ''6·15 남북공동선언''이 나오게 되었다.
공동선언은 1항에 통일 문제의 ''자주적 원칙''을 명기하고, 2항에 연합제와 ''낮은 단계의 연방제''의 공통성 인정, 그 방향에서 통일 지향, 3항에 이산가족과 비전향 장기수 문제 해결 명시, 4항에 제반 분야의 남북 교류와 협력, 5항에 조속한 당국 대화 개최를 담았다. 2000년 남북정상회담은 회담 개최 그 자체, 회담의 성과로 나온 남북 정상의 첫 공동선언, 공동선언 외에 합의된 부분, 회담 과정에서 나온 중대한 발언, 회담 이후의 합의 실행에 따른 남북 관계의 개선 등 남북 관계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결과물을 무수히 생산해냈다.
개성공단 착공
북한의 아시아태평양평화위원회와 현대아산은 2000년 8월 22일 ''개성공업지구 건설·운영에 관한 합의서''를 체결했다. 북한은 2002년 11월 13일 공단 조성 지역을 ''개성공업지구''로 지정하고, 11월 20일 ''개성공업지구법''을 제정해 공단 조성을 위한 제도적 장치를 마련했다. 2003년 6월 30일에 개성시 평화리에서 착공식을 갖고 개발공사를 시작했다. 북한이 개성공단 사업을 진행한 것은 그 의미가 매우 크다. 첫째, 남한의 기업을 받아들여 공동으로 대규모 사업을 진행한다는 것은 남한과의 지속적인 교류 협력을 의미한다. 둘째, 개성공단 사업은 북한이 ''양의 합 게임''에 대한 인식을 분명히 가졌음을 의미한다. 셋째, 군부의 반대를 무릅쓰고 사업을 진행한 것은 북한의 경제개발에 대한 의지와 온건파의 입지 강화를 보여준다. 개성공단은 북한과 남한에도 많은 편익을 가져다주는 사업이었다. 또한 남북한에 경제적 이익뿐만 아니라 남북한이 화해협력을 지속시키고 평화 분위기를 형성하고 장기적으로 통일의 단계로 나아가는 데 크게 기여할 수 있는 프로젝트였다.
제1차 핵실험
북한은 2006년 10월 9일 오전 10시 30분 지하 핵실험을 강행했다. 10월 8일은 김정일의 당 총비서 취임 9주년 기념일이고, 10월 10일은 당 창건 61주년 기념일이었다. 첫 번째 핵실험은 함경북도 길주군 풍계리의 산악지대에서 이루어졌다. 평양에서 동북 방면으로 약 385킬로미터 떨어진 지점이었다. 규모는 0.5~0.8킬로톤 정도의 폭발력이었다. 북한은 다음 날 외무성 성명을 통해 미국의 압살 정책 때문에 핵실험을 했지만, 협상할 용의는 있으며 미국이 계속 압력을 가중한다면 물리적 대응 조치를 하겠다고 주장했다.
중국은 강한 비난 성명을 냈고, 미국과 일본도 북한을 강력 규탄하면서 강도 높은 유엔 안보리 결의를 추진했다. 노무현 정부 내에서도 북한에 대한 강경 대응을 주장하는 입장이 강했다. 국방부는 군의 경계 태세를 강화하면서 개성공단과 금강산 관광에 대해 강력한 조치를 주장했다. 결국 북한과 미국은 2007년 2월 13일 금융 제재 해제, 6자회담 재개, 영변 핵시설 폐쇄, 국제원자력기구 요원 복귀, 중유 5만 톤 제공 등을 담은 ''2·13 합의''를 도출해냈다.
김정일 사망과 김정은 권력 승계 완료
조선중앙TV는 "위대한 영도자 김정일 동지께서 주체 100, 2011년 12월 17일 8시 30분에 현지 지도의 길에서 급병으로 서거하셨다"라고 김정일의 사망을 공식 발표했다. 직접적 사망 원인은 중증급성 심근경색이었다. 달리는 열차 안에서 심근경색이 발생하고 심장성 쇼크가 일어나 응급치료를 했지만, 숨을 거두었다. 조선중앙TV는 장송곡과 [김정일 장군의 노래] 같은 추모곡을 내보냈고, 시민들은 평양 시내 곳곳의 김정일 초상화와 동상에 모여들어 오열했다.
북한은 김정일 사망 이후 이틀 동안 김정은 중심으로 내부 체제를 정비했다. 김정은은 부문별 최고 수위를 차지해가면서 북한의 권력을 완전히 장악했다. 12월 30일에는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에 올랐다. 군 통수권을 확보하는 것이 급선무였고,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에 먼저 오른 것이다. 군 최고사령관에 오르면서 사실상 권력을 완전히 장악하게 된 것이다. 2012년 4월에는 당 제1비서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에 올랐다. 군 최고사령관 직책에 이어 당과 국가기구에서 최고 지위에 취임한 것이다.
태영호 공사 망명
2016년 8월 영국 주재 북한 대사관 공사 태영호가 남한으로 망명했다. 북한 외교관으로서는 1997년 8월 망명한 이집트 대사 장승길 다음으로 직위가 높은 망명객이었다. 태영호는 평양국제관계대학교를 졸업하고, 외무성 8국에서 일을 시작했다. 김정일의 덴마크어 통역 후보로 뽑혀 덴마크에서 유학해 1993년부터는 덴마크 대사관 서기관으로 근무했다. 1990년대 말 덴마크 주재 대사관이 철수해 스웨덴 주재 대사관으로 이동했다. 이후 귀국해 유럽연합 담당 과장이 되었다. 2001년 6월 벨기에에서 열린 북한-유럽연합 인권대화 당시 북한 대표단장을 맡기도 했다.
태영호가 망명한 것은 자녀 문제 때문인 것으로 전해졌다. 통일부는 그의 망명 이유에 대해 김정은 체제에 대한 염증, 대한민국 사회와 자유민주주의 체제에 대한 동경, 자녀 교육과 장래 문제 등을 거론했다. 그런데 그 가운데에서도 자녀 문제가 주요 사유였던 것으로 알려졌다. 북한이 해외 주재 외교관의 25세 이상 자녀에 대해 귀국령을 내렸고, 27세의 장남이 귀국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게다가 둘째 아들이 영국의 명문 임페리얼칼리지에 2017년에 입학해 수학과 컴퓨터공학을 전공할 계획이었다. 북한으로 들어가면 이런 교육이 단절되기 때문에 고민하던 끝에 망명을 결심했다는 것이다. 최근 태영호는 북한이 "2017년까지 6,7차 핵실험을 준비 중이며, 한국에서 대선이 치러지는 차원에서 핵실험이 실시될 것"이라는 정보를 공개하기도 했다.
▣ 작가 소개
저자 : 안문석
1965년 전라북도 진안에서 태어나 부산에서 중고등학교를 다녔고 서울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했다. 1993년 KBS 기자로 입사해 사회부, 통일부, 국제부, 정치부 등을 거쳤고 정치부 외교안보데스크로 외교·안보·북한 문제를 총괄했다. KBS 재직 중 영국으로 유학해 요크대학에서 정치학 석사학위를, 워릭대학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한반도 문제와 관련된 일을 하다가 공부의 필요성을 느꼈고 공부하다가 재미가 붙어 박사학위까지 받게 된 것이다. 한반도 문제와 국제정치를 깊이 파고 싶은 생각으로 대학으로 자리를 옮겨 2012년부터 전북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로 국제정치를 가르치고 있다. 동북아시아의 국제질서가 주요 관심사이고, 그 연장선상에서 북한을 포함한 동북아시아 주요 국가들의 외교정책을 관찰하고 있다. 북한의 대외관계, 북한의 내부 권력관계, 국제정치이론, 한국의 외교정책, 미국의 외교정책 등을 주제로 연구 작업을 계속하고 있다.
그동안 쓴 책으로는 『글로벌 정치의 이해』, 『오기섭 평전』, 『이제 만나러 갑니다』, 『김정은의 고민』, 『북한이 필요한 미국, 미국이 필요한 한국』, 『노무현 정부와 미국』 등이 있다. 「북미... 불신 구조의 형성 원인과 극복 방안」(『한국동북아논총』, 2016년 9월), 「A Nuclear South Korea?」(『International Journal』, 2014년 3월), 「How Stable is the New Kim Jong-un Regime: a Revolution in North Korea」(『Problems of Post-Communism』, 2013년 1월) 등 북한과 국제정치 관련 논문을 국내외 저널에 계속 발표하고 있다.
▣ 주요 목차
머리말
제1장 남북정상회담 - 2000~2001년
17년 만의 중국 방문
남북정상회담
6·15 남북공동선언
남북장관급회담
비전향 장기수 63명 북송
무산된 북미정상회담
유럽과의 수교 봇물
김정남의 일본 밀입국 시도
국가정보원장 임동원이 본 2000년
제2장 제2차 북핵 위기 - 2002~2003년
개성공단 착공
7·1 경제관리개선조치
시장의 합법화와 실리사회주의
내각 총리, 온건파 박봉주
북일정상회담
미국 특사 방북과 제2차 북핵 위기
북핵 해결을 위한 6자회담 64
성악가가 본 2003년
제3장 합의와 금융 제재 - 2004~2005년
세 번째 중국 방문
두 번째 북일정상회담
탈북자 468명 입국
핵무기 보유 선언
종합시장 통제
조용필의 평양 공연
9·19 공동성명
미국의 금융 제재
미국 학자가 관찰한 2005년
제4장 핵실험과 남북정상회담 - 2006~2007년
네 번째 중국 방문
대풍국제투자그룹 설립
제1차 핵실험
2·13 합의
첫 남북 합작 드라마 [사육신]
10·3 합의
두 번째 남북정상회담
스칼라피노 교수가 본 2006년
제5장 김정은의 등장 - 2008~2009년
금강산 관광객 피격 사망
김정일의 뇌졸중과 김정은 후계 내정
대남강경 노선
김정은 후계 확정
명실상부 최고 영도자
제2차 핵실험
원자바오 방북
남북정상회담 무산
실패한 화폐개혁
평양 주재 영국 대사가 본 2008년
제6장 김정일 사망 - 2010~2011년
종합시장 재개
천안함 사건과 연평도 사건
김정일·김정은의 김일성 유적지 순례
김정은 후계 공식화
우라늄 농축시설 공개
김정일 사망
정은 승계 완료
통일운동가가 본 2010년
제7장 김정은 체제 공식 출범 - 2012~2013년
2·29 합의와 장거리 로켓 발사
제4차 당대표자회
우리식 새로운 경제관리체계
무상의무교육 12년
제3차 핵실험
개성공단 가동 중단
핵·경제 병진 노선
박봉주 총리 재기용
장성택 처형
재미 목사가 본 2012년
제8장 김정은 우상화 - 2014~2015년
21세기의 위대한 태양, 김정은
3각의 권력 엘리트 체제 형성
남북고위급회담
일본과 납치자 재조사 합의
미녀응원단 불참
실세 3인방 인천아시안게임 참석
목함지뢰 도발과 4인 고위급회담
차관급 당국회담 결렬
강력한 군부 통제
일본 의원이 본 2014년
제9장 김정은 시대 선포 - 2016년
''자강력 제일주의'' 제창
제4차 핵실험과 미사일 발사
개성공단 폐쇄
해외식당 종업원 집단 탈북
36년 만의 당대회
사드 배치와 북한의 반발
태영호 공사 망명
제5차 핵실험
100세 할머니의 2016년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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