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 출판사서평
코트라 그리고 낯선 땅으로
40년이 넘는 세월 동안 50여 나라, 60여 도시를 오가며 대한민국의 수출을 위해 분투한 사람이 있다. 아무것도 없는 가난한 나라에서 태어나 살아남기 위해서는 거친 땅, 남의 땅, 낯선 땅으로 나아가는 것 말고 다른 방법은 없었다. 그 땀과 눈물의 시간은 숱한 성공과 실패, 희망과 좌절의 이야기로 남았다.
코트라는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무역투자 공기업이다. 저자가 코트라에서 무역인의 삶을 시작한 것이 1964년의 일이다. 코트라의 설립연도가 마침 1962년이니 저자와 코트라와의 만남, 무역업으로의 투신은 운명과도 같은 일이었다. 저자는 코트라의 초창기 모습을 기억하는 몇 안 되는 사람이며, 한국의 수출입국(輸出立國) 시기를 기억하는 이제 몇 안 남은 사람이기도 하다.
산업화 시기 대한민국 무역인의 삶은 영광스럽기 이전에 고달팠다. 그것은 아무것도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그러니까 무에서 유를 창출하는 일이었다. 피부색도, 쓰는 말도, 문화와 관습도 다른 사람들과 애써 관계를 맺고 우리가 갓 만들어낸 조악한 품질의 물건을 사달라며 매달리는 일이었다.
낯선 땅에서 일하는 것은 죽을 만큼 힘든 일이었다. 대만에서 근무할 때는 산업스파이로 몰리기도 했고 아프리카로 출장을 갔을 때는 노상강도를 당하기도 했다. 소련 전투기가 우리 여객기를 격추했을 때는 혈혈단신으로 핀란드 주재 소련 대사관에 들어갔던 적도 있다. 아버님의 부음을 머나먼 북유럽의 땅에서 들었을 때의 심정은 뭐라고 표현하지 못하겠다. 익숙한 땅을 버리고 낯선 땅으로 향하는 것은 그렇게 낯선 위험을 감수하는 일이었다. _13쪽
어떤 때는 나 자신보다 낮은 거래처에게도 몸을 낮춰야 했다. 그들을 끌어안기 위해 전력을 다하지 않으면 바다 건너 먼 해외의 거래처를 놓치기 쉽다. 이 때문에 나는 낮이나 밤이나 가리지 않고 끊임없이 내게 부과된 의무를 하나의 위협으로 보고 항상 긴장과 근심 속에 살았다. …… 내가 잠시라도 판단을 잘못 내린다면 거래처는 끊기고 삶은 나를 고달프고 막다른 곳으로 끌고 가리라고 항상 걱정했다. 나는 수출로 돈을 버는 작은 기업의 고문에 불과했지만 그 기업의 사장보다 더 긴장했다. 나는 항상 무섭고 불안한 삶 속에서 살았다. _312쪽
1960~1970년대는 우리가 한창 산업화를 달성하기 위해 노력하던 시기였다. 흔히 ‘월화수목금금금’으로 비유하는 근면성실의 시기이기도 했다. 그런 상황에서 야근은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지구 반대편의 바이어와 언제나 통화가 가능해야 하는 코트라맨이 밤에 잠을 자고 있어서는 안 되었다. 얼마나 많은 야근의 밤을 보냈을까. 아직 풋내기 무역인이었던 시절 저자는 늦은 밤 불시에 코트라를 찾은 박정희 대통령과 조우한 적도 있었다. 그때 그 시절 우리 무역인에게 휴가나 휴식은 사치였다.
코트라 남대문 본사에서 내가 근무하던 3층 홍보부 창문은 이런저런 일을 혼자 수행하느라고 언제나 늦은 밤까지 불이 켜져 있었다. 당시에는 자정부터 다음 날 새벽 네 시까지 야간 통행금지가 있던 시절이었다. 그런데도 코트라 홍보부의 창문은 항시 환하니 사람들이 의아한 나머지 길을 지나다가 사무실을 방문하는 일이 있었다. 심지어 1967년 늦가을에는 대통령의 방문을 맞이했던 적도 있다. 어느 날 늦은 밤 열한 시쯤 나 홀로 야근하고 있었다. 그런데 박정희 대통령이 아무런 예고 없이 코트라 건물 3층의 홍보부 사무실 복도에 나타났다. 경호원인 듯한 사람과 회사 당직 수위와 함께였다. _193쪽
나는 항상 무역관을 지켜야 했고 국내 손님들의 방문 활동을 지원해야 했다. 경쟁국에 비해 불리한 환경이었지만 나는 주어진 여건하에서 항상 각오를 새로이 하며 임무를 무사히 마칠 수 있는 것을 다행으로 여겼다. 그랬기에 정기휴가나 일시적인 휴식도 마음껏 가질 수 없었다. _314쪽
냉전의 시대 동유럽에서 무역관계를 구축하다
우리가 한창 산업화할 때 전 세계는 동서냉전으로 신음하던 중이었다. 냉전은 세계를 무대로 뛰는 무역인들에게 큰 변수였고 북유럽과 서유럽에서 오래 근무한 저자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저자의 교역대상 리스트에는 동유럽 사회주의권과의 관계 맺기가 오랜 숙제로 남아 있었다. 긴 세월 절치부심하던 그는 1983년 마침내 국내 최초로 불가리아의 국영 무역기관과 합작사업 계약을 맺었다. 저자의 업적은 시대를 적어도 10년은 앞서나간 역사적인 쾌거였다. 하지만 동유럽과 어렵사리 맺은 무역관계는 어이없게도 당시 우리의 국내정치적 요인으로 좌초되고 말았다.
나는 2년여 동안 프랑스와 불가리아를 여러 차례 오갔다. 각고의 노력 끝에 마침내 디네브를 통해 불가리아 불가쿠프와 한국 국제상사 간에 신발류 부품의 합작공장 설립에 관한 의정서를 교환하게 되었다. 소피아에서 불가쿠프와 국제상사가 합작으로 공장을 세우기 위한 정식계약을 체결하기로 합의했다. …… 나는 여러 달 동안 쌓인 피로가 그제야 풀리는 듯했으나 이 사업이 공산권과의 최초의 시범적인 사업일 뿐만 아니라 국제적인 이념대립도 극복하지 않으면 안 되는 대의명분 때문에 일순간도 긴장을 풀 수 없었다. 하지만 그 계약은 당시에는 성공적으로 이뤄졌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불행하게도 우리 쪽에서 국제상사가 돌연히 해체되면서 중단하지 않을 수 없었다. _117~118쪽
국내 최초로 미국산품전시회를 기획하다
수출을 하는 만큼 수입도 하는 것이 무역과 통상의 기본이다. 물건을 팔기만 살 뿐 사지는 않는 나라를 좋아할 상대국은 없다. 1987년 무역적자로 고생하던 미국이 한국을 상대로 그랬다. 당시 한국은 미국을 상대로 상당한 규모의 무역흑자를 기록하고 있었고 양국 사이의 무역불균형을 시정하겠다는 미국의 통상압력은 거셌다.
당시 저자는 20년이 넘는 경력의 무역인이자 코트라 해외협력사업부장으로서 국내 최초로 이른바 ‘미국산품특별전시회’를 제안했다. 그것은 한마디로 말해 나랏돈을 써서 ‘미국 상품을 알리고 사주는 운동’을 하자는 기획이었다. 1990년대까지도 ‘외국담배는 사지도 팔지도 맙시다’라는 식의 구호가 횡행하던 우리나라에서 이미 1980년대에 이런 주장을 내놓은 것은 가히 파격적인 일이었다. 청와대에서, 재계에서, 심지어 코트라 안에까지도 저자의 제안에 반발이 일었지만 그는 뚝심을 가지고 밀어붙였다. 저자의 노력과 헌신으로 미국산품전시회는 성공적으로 개최되었고, 미국의 통상압력은 잦아들었으며, 그 뒤에 우리의 대미수출에는 아무런 어려움이 없었다. 한미 양국의 무역갈등을 해결한 공로로 저자에게 주한 미국 대사관이 수여한 감사패는 그 과정에서 얻은 덤이었다.
당시 국내에서는 반미시위가 심심치 않게 일어나고 있었다. 그래서 곧이곧대로 미국산 상품의 수입을 늘리기 위한 전시회를 연다고 하면 반대여론이 일어날 우려가 있었다. 그래서 전시회 명칭에서 ‘수입’이란 표현을 제외하고 포괄적인 의미로 미국산품특별전시회(U.S. Products Show)로 정했다. …… 당시 한국은 일본과의 무역에서 적자가 극심한 상황으로 강력하게 시장다변화를 추진하던 실정이었다. 미국산품특별전시회는 일본으로 치우친 수입처를 전환해 수입 다변화를 위한 획기적인 조처로 타당한 전략이라고 강조해 일부의 반발과 오해를 무마시켰다. 동시에 미국의 통상압력에 대응하기 위해 앞뒤를 가리지 않고 취해야 할 이열치열(以熱治熱)의 방법이라고 역설하자 회의 참석자들은 모두 웃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 전시회의 본뜻을 이해하게 된 무역업계와 일반 국민들도 크게 환영하고 나섰다. _41~42쪽
코트라맨은 무역일꾼 이상의 존재
흔히 코트라맨은 수출 전문가나 무역 전문가로만 생각한다. 하지만 한국의 외교공관이 없는 나라에서 코트라맨은 외교관이나 정보요원의 역할을 대신하기도 한다. 특히 우리와 외교관계가 험악한 나라에서는 민간인 신분이기에 공무원보다 운신의 폭이 넒은 경우도 있었다.
가령 1978년 우리 대한항공 여객기가 소련 상공에서 격추되었을 때가 그랬다. 우리 여객기가 항로를 이탈해 소련 영공에 들어가자 소련 공군이 바로 격추해버린 사건이었다. 소련 땅으로 떨어진 여객기의 승객들 생사를 확인해야 하는데 냉전 시기 한국은 소련과 외교관계가 없었다. 외교관들을 대신해 당시 코트라 핀란드 무역관장이었던 저자가 나섰다. 저자는 핀란드 주재 소련 대사관을 방문해 생존한 승객 숫자와 국내로의 송환 날짜를 알아내는 등의 개가를 올렸다.
이때 한국은 소련과 외교관계가 수립되지 않았고 더구나 냉전시대여서 소련은 물론 동유럽의 어느 나라와도 접촉할 수 없었다. 우리는 겨우 미국과 영국, 일본 대사관을 통해 간접적으로 KAL기 추락 상황이나 탑승객의 생사 여부를 파악하려고 했으나 거의 불가능해 전전긍긍했다. …… 그때 내가 한 가지 꾀를 생각해냈다. 핀란드의 주요 기업 중에서 소련과 무역하는 기관이나 업체를 부리나케 찾아 나섰다. 그렇게 여객기가 추락한 지 하루 만에 우리에게서 어망을 수입하고 소련과는 구상무역을 크게 하는 K사의 중역 한 사람을 찾아갔다. _147 ~148쪽
코트라 해외주재원과 그 가족의 삶
요즘 많은 젊은이들이 외국기업에서 일하고 해외에 나가 일하는 것을 선망한다. 외국에서 일한다고 하면 좋은 보수나 복지여건, 쾌적한 사무실과 숙소가 떠오르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1970년대 가난한 나라 출신으로 해외에서 주재하는 것은 지금처럼 부럽거나 낭만적인 일이 아니었다. 그것은 힘들고 위험하며 때로는 눈앞이 막막해지는 일이었다. 수출입국의 사명감 하나로 뛰었고 때로는 무역일꾼 이상의 임무를 수행했지만, 코트라맨들을 위한 나라의 지원은 형편없이 모자랐다. 가난한 조국을 위해 외국에서 돈을 벌어오는 일을 맡았던 코트라맨들에게 어쩌면 이는 당연한 숙명이었는지도 모른다.
지금도 코트라맨으로 첫 해외 근무를 나가던 때가 생각난다. 지금으로부터 40년도 훨씬 전의 일이다. 코트라 주재원으로 대만으로 처음 발령이 난 상황이었다. 대만에 멀쩡한 우리 무역관이 있어 편하게 나가는 길이 아니라 내가 직접 무역관을 창설하려고 나가는 길이었다. 당시 대만 타이베이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런 곳에 생때같은 처자식을 데리고 부임하는 심정은 막막하기만 했다. _14쪽
핀란드어에 불통인 아이들은 학교에서 따돌림당했고 그 사실을 안 아내의 눈에는 언제나 눈물이 고여 있었다. 하는 수 없이 서울의 집에서 빼낸 전세금을 환전한 뒤 우선 딸만이라도 외국인 자녀 전용인 아메리칸 스쿨에 입학시켰다. 딸이 다니는 외국인 학교의 연간 학비는 무려 1만 달러에 달했다. _28쪽
설상가상으로 생활고에 지쳐 있던 우리 가족에게 천재지변이 닥치기도 했다. 대만에서는 태풍과 폭우 그리고 지진이 매우 흔하다. 그런 폭우에 대만 타이베이 무역관을 창설할 때 거처로 썼던 조그마한 단독주택이 물에 잠기고 말았다. 한밤중에 일어난 재난에 속수무책으로 당한 우리 가족은 가구와 옷 등 모든 세간을 버리고 헤엄치듯 집 밖으로 뛰쳐나왔다. …… 그 뒤 우리는 다시 옷을 사고 세간을 장만해 타이베이 외곽의 작은 공동주택으로 이사했다. 물난리를 수습하느라고 들어간 비용은 이곳저곳에서 빌려 썼는데, 1974년 3월 대만에서 임기를 마치는 날이 되어서야 겨우 갚을 수 있었다. 그런 이유로 한국으로 돌아올 때 우리 가족은 거의 빈손이었다. _227~228쪽
그래도 한번 무역인은 영원한 무역인
누구의 인생에나 성공과 실패, 희망과 좌절이 있다. 무역인으로 반평생을 살며 전 세계를 누빈 저자도 마찬가지다. 국내 최초로 이룬 업적도 많지만 잘 진행되다가 안타까운 이유로 무산된 경우도 많았다. 하지만 한번 무역인은 영원한 무역인인 것일까? 정년퇴직으로 코트라를 떠난 뒤에도 저자는 10년 넘게 중소기업에서 수출담당 고문으로 일하며 우리나라의 수출을 도왔다. 그러면서도 보수는 실비변상 수준으로만 받았으니 사실상의 봉사, 요즘 말로는 재능기부에 가까운 일이었다.
회사를 찾은 바이어와 상담하는 중에 그로부터 구매 잠재력이 엿보이면 예정에 없는 점심이나 저녁식사 자리를 만들었다. 거기에 더해 나의 승용차로 바이어의 방한 중 일정을 도와주기도 했다. 하지만 그로부터 주문이나 그 밖의 보상을 바라지는 않았다. 그래도 바이어를 떠나보내고 난 뒤 혹시 정식 주문 소식이 들리지는 않을까 마음을 졸였는데 수출 현장에서 직접 활동한 사람이라면 나의 심정을 잘 이해할 것이다. _276쪽
나는 한때 30여 년간 재직했던 수출진흥 전문기관인 코트라에서 정년퇴직한 뒤 다양한 분야의 여러 수출업체를 위해 자원봉사했다. 그런 차원에서 이 회사에서는 정식 고문으로 취임해 처음으로 수출의 총책임을 맡게 된 것이지만, 내가 받은 보수는 실비 외에는 전적으로 무료봉사였다. _277쪽
이제 여든 살이 넘은 노년의 저자는 코트라 후배들, 무역인 후배들을 위한 당부의 말도 잊지 않는다. 별다른 자원이 없는, 삼면이 바다인 나라가 부(富)를 얻는 길은 해외로 진출하는 것뿐임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과거에 저자가 그랬듯이 그 후배들도 미래에 또 다른 희망과 좌절을 헤쳐 나갈 것이다. 오늘도 세계 곳곳의 낯선 땅에서 고군분투하고 있을 후배들에게 저자는 그 자체로 든든한 모범이 되고 따뜻한 응원의 메시지가 된다.
코트라가 걸어온 길은 곧 수출 한국이 걸어온 길이었다. 그때 나는 그 힘겹고 기나긴 여정에 나의 작은 힘을 보탤 기회가 있었다는 점이 지금 와서 돌이켜보니 너무나도 다행스럽다. 지금도 전 세계 여기저기서 코트라 후배들이 수출 한국을 위해 구슬땀을 흘리고 있을 것이다. 지금 나는 그들에게 힘내라는 응원의 메시지만을 전하고 싶다. _323쪽
▣ 작가 소개
저자 : 김진숙
1936년에 태어나 군산고등학교와 중앙대학교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했다. 1961년 공군본부 군수국에서 영어 번역관으로 일하다가 1964년 코트라에 입사했다. 코트라에서 30여 년간 일하며 대만 타이베이 무역관을 창설하고 핀란드, 프랑스, 스웨덴에서 무역관장을, 본사에서 해외협력사업부장 등의 보직을 수행하다가 1994년에 정년퇴직했다.
코트라에서 재직하는 동안 1970년대 초에는 우리 수출산업과 상품의 대외홍보전략 개발을 맡아 성공적으로 수행했다. 냉전시대였던 1978년에는 소련과 구상무역을 하기 위해 소련 대사관과 정기적으로 접촉했으며 1983년에는 최초로 불가리아 국영 무역기관과 합작사업 계약을 체결했다. 이런 실적으로 정부가 산업발전에 기여한 공로자에게 수여하는 산업포장 등 다수의 표창을 받았다.
특히 1987년에는 미국과의 무역수지 흑자와 관련해 미국의 거센 통상압력에 대처하기 위해 미국산품특별전시회(U.S. Products Show)를 기획했다. 이 일은 미국 정부, 기업, 언론 등에서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고 주한 미국 대사관으로부터 감사패를 받았다.
1996년부터 (주)금양시스템 창호사업을 운영하다가 정리했다. 1999년부터 2007년까지 가... 죽의류 생산수출업체인 (주)투나인의 고문과 남성의류 생산수출업체인 (주)홍민의 고문을 역임했으며 그 뒤에 서울특별시 관광협회 부회장을 지냈다.
▣ 주요 목차
지은이의 말
프롤로그: 낯선 땅으로
1부 하늘은 세계 어디를 가도 푸르렀다
1장 덧없이 더해가는 노년의 아픔
2장 잊을 수 없이 자주 떠오르는 핀란드에서 살던 시절
3장 한 잔의 술, 스납 야화
4장 어두웠던 소련인들, 밝은 러시아인들
5장 비행기 안 어미젖을 찾아 칭얼대던 해외 입양아들
6장 마케팅 총알과 수출 홍보
7장 대만의 선진적인 중소기업 수출정책 조사와 내가 겪은 수난
2부 노년의 삶과 나
1장 현해탄을 넘으며 비탄에 잠겼던 일
2장 우리의 수출업체 임직원과 사구포 김 사장
3장 보고서로 밤새운 춘장대, 그곳은 언제나 아쉬움만 불러오고
4장 한 중소 수출기업에서의 봉사와 어느 날의 침묵
5장 백합화의 추억과 친절의 교훈
6장 노년의 핀란드 자연인과 외로운 해녀
7장 회상
에필로그: 미래 수출 역군을 위한 조언
코트라 그리고 낯선 땅으로
40년이 넘는 세월 동안 50여 나라, 60여 도시를 오가며 대한민국의 수출을 위해 분투한 사람이 있다. 아무것도 없는 가난한 나라에서 태어나 살아남기 위해서는 거친 땅, 남의 땅, 낯선 땅으로 나아가는 것 말고 다른 방법은 없었다. 그 땀과 눈물의 시간은 숱한 성공과 실패, 희망과 좌절의 이야기로 남았다.
코트라는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무역투자 공기업이다. 저자가 코트라에서 무역인의 삶을 시작한 것이 1964년의 일이다. 코트라의 설립연도가 마침 1962년이니 저자와 코트라와의 만남, 무역업으로의 투신은 운명과도 같은 일이었다. 저자는 코트라의 초창기 모습을 기억하는 몇 안 되는 사람이며, 한국의 수출입국(輸出立國) 시기를 기억하는 이제 몇 안 남은 사람이기도 하다.
산업화 시기 대한민국 무역인의 삶은 영광스럽기 이전에 고달팠다. 그것은 아무것도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그러니까 무에서 유를 창출하는 일이었다. 피부색도, 쓰는 말도, 문화와 관습도 다른 사람들과 애써 관계를 맺고 우리가 갓 만들어낸 조악한 품질의 물건을 사달라며 매달리는 일이었다.
낯선 땅에서 일하는 것은 죽을 만큼 힘든 일이었다. 대만에서 근무할 때는 산업스파이로 몰리기도 했고 아프리카로 출장을 갔을 때는 노상강도를 당하기도 했다. 소련 전투기가 우리 여객기를 격추했을 때는 혈혈단신으로 핀란드 주재 소련 대사관에 들어갔던 적도 있다. 아버님의 부음을 머나먼 북유럽의 땅에서 들었을 때의 심정은 뭐라고 표현하지 못하겠다. 익숙한 땅을 버리고 낯선 땅으로 향하는 것은 그렇게 낯선 위험을 감수하는 일이었다. _13쪽
어떤 때는 나 자신보다 낮은 거래처에게도 몸을 낮춰야 했다. 그들을 끌어안기 위해 전력을 다하지 않으면 바다 건너 먼 해외의 거래처를 놓치기 쉽다. 이 때문에 나는 낮이나 밤이나 가리지 않고 끊임없이 내게 부과된 의무를 하나의 위협으로 보고 항상 긴장과 근심 속에 살았다. …… 내가 잠시라도 판단을 잘못 내린다면 거래처는 끊기고 삶은 나를 고달프고 막다른 곳으로 끌고 가리라고 항상 걱정했다. 나는 수출로 돈을 버는 작은 기업의 고문에 불과했지만 그 기업의 사장보다 더 긴장했다. 나는 항상 무섭고 불안한 삶 속에서 살았다. _312쪽
1960~1970년대는 우리가 한창 산업화를 달성하기 위해 노력하던 시기였다. 흔히 ‘월화수목금금금’으로 비유하는 근면성실의 시기이기도 했다. 그런 상황에서 야근은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지구 반대편의 바이어와 언제나 통화가 가능해야 하는 코트라맨이 밤에 잠을 자고 있어서는 안 되었다. 얼마나 많은 야근의 밤을 보냈을까. 아직 풋내기 무역인이었던 시절 저자는 늦은 밤 불시에 코트라를 찾은 박정희 대통령과 조우한 적도 있었다. 그때 그 시절 우리 무역인에게 휴가나 휴식은 사치였다.
코트라 남대문 본사에서 내가 근무하던 3층 홍보부 창문은 이런저런 일을 혼자 수행하느라고 언제나 늦은 밤까지 불이 켜져 있었다. 당시에는 자정부터 다음 날 새벽 네 시까지 야간 통행금지가 있던 시절이었다. 그런데도 코트라 홍보부의 창문은 항시 환하니 사람들이 의아한 나머지 길을 지나다가 사무실을 방문하는 일이 있었다. 심지어 1967년 늦가을에는 대통령의 방문을 맞이했던 적도 있다. 어느 날 늦은 밤 열한 시쯤 나 홀로 야근하고 있었다. 그런데 박정희 대통령이 아무런 예고 없이 코트라 건물 3층의 홍보부 사무실 복도에 나타났다. 경호원인 듯한 사람과 회사 당직 수위와 함께였다. _193쪽
나는 항상 무역관을 지켜야 했고 국내 손님들의 방문 활동을 지원해야 했다. 경쟁국에 비해 불리한 환경이었지만 나는 주어진 여건하에서 항상 각오를 새로이 하며 임무를 무사히 마칠 수 있는 것을 다행으로 여겼다. 그랬기에 정기휴가나 일시적인 휴식도 마음껏 가질 수 없었다. _314쪽
냉전의 시대 동유럽에서 무역관계를 구축하다
우리가 한창 산업화할 때 전 세계는 동서냉전으로 신음하던 중이었다. 냉전은 세계를 무대로 뛰는 무역인들에게 큰 변수였고 북유럽과 서유럽에서 오래 근무한 저자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저자의 교역대상 리스트에는 동유럽 사회주의권과의 관계 맺기가 오랜 숙제로 남아 있었다. 긴 세월 절치부심하던 그는 1983년 마침내 국내 최초로 불가리아의 국영 무역기관과 합작사업 계약을 맺었다. 저자의 업적은 시대를 적어도 10년은 앞서나간 역사적인 쾌거였다. 하지만 동유럽과 어렵사리 맺은 무역관계는 어이없게도 당시 우리의 국내정치적 요인으로 좌초되고 말았다.
나는 2년여 동안 프랑스와 불가리아를 여러 차례 오갔다. 각고의 노력 끝에 마침내 디네브를 통해 불가리아 불가쿠프와 한국 국제상사 간에 신발류 부품의 합작공장 설립에 관한 의정서를 교환하게 되었다. 소피아에서 불가쿠프와 국제상사가 합작으로 공장을 세우기 위한 정식계약을 체결하기로 합의했다. …… 나는 여러 달 동안 쌓인 피로가 그제야 풀리는 듯했으나 이 사업이 공산권과의 최초의 시범적인 사업일 뿐만 아니라 국제적인 이념대립도 극복하지 않으면 안 되는 대의명분 때문에 일순간도 긴장을 풀 수 없었다. 하지만 그 계약은 당시에는 성공적으로 이뤄졌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불행하게도 우리 쪽에서 국제상사가 돌연히 해체되면서 중단하지 않을 수 없었다. _117~118쪽
국내 최초로 미국산품전시회를 기획하다
수출을 하는 만큼 수입도 하는 것이 무역과 통상의 기본이다. 물건을 팔기만 살 뿐 사지는 않는 나라를 좋아할 상대국은 없다. 1987년 무역적자로 고생하던 미국이 한국을 상대로 그랬다. 당시 한국은 미국을 상대로 상당한 규모의 무역흑자를 기록하고 있었고 양국 사이의 무역불균형을 시정하겠다는 미국의 통상압력은 거셌다.
당시 저자는 20년이 넘는 경력의 무역인이자 코트라 해외협력사업부장으로서 국내 최초로 이른바 ‘미국산품특별전시회’를 제안했다. 그것은 한마디로 말해 나랏돈을 써서 ‘미국 상품을 알리고 사주는 운동’을 하자는 기획이었다. 1990년대까지도 ‘외국담배는 사지도 팔지도 맙시다’라는 식의 구호가 횡행하던 우리나라에서 이미 1980년대에 이런 주장을 내놓은 것은 가히 파격적인 일이었다. 청와대에서, 재계에서, 심지어 코트라 안에까지도 저자의 제안에 반발이 일었지만 그는 뚝심을 가지고 밀어붙였다. 저자의 노력과 헌신으로 미국산품전시회는 성공적으로 개최되었고, 미국의 통상압력은 잦아들었으며, 그 뒤에 우리의 대미수출에는 아무런 어려움이 없었다. 한미 양국의 무역갈등을 해결한 공로로 저자에게 주한 미국 대사관이 수여한 감사패는 그 과정에서 얻은 덤이었다.
당시 국내에서는 반미시위가 심심치 않게 일어나고 있었다. 그래서 곧이곧대로 미국산 상품의 수입을 늘리기 위한 전시회를 연다고 하면 반대여론이 일어날 우려가 있었다. 그래서 전시회 명칭에서 ‘수입’이란 표현을 제외하고 포괄적인 의미로 미국산품특별전시회(U.S. Products Show)로 정했다. …… 당시 한국은 일본과의 무역에서 적자가 극심한 상황으로 강력하게 시장다변화를 추진하던 실정이었다. 미국산품특별전시회는 일본으로 치우친 수입처를 전환해 수입 다변화를 위한 획기적인 조처로 타당한 전략이라고 강조해 일부의 반발과 오해를 무마시켰다. 동시에 미국의 통상압력에 대응하기 위해 앞뒤를 가리지 않고 취해야 할 이열치열(以熱治熱)의 방법이라고 역설하자 회의 참석자들은 모두 웃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 전시회의 본뜻을 이해하게 된 무역업계와 일반 국민들도 크게 환영하고 나섰다. _41~42쪽
코트라맨은 무역일꾼 이상의 존재
흔히 코트라맨은 수출 전문가나 무역 전문가로만 생각한다. 하지만 한국의 외교공관이 없는 나라에서 코트라맨은 외교관이나 정보요원의 역할을 대신하기도 한다. 특히 우리와 외교관계가 험악한 나라에서는 민간인 신분이기에 공무원보다 운신의 폭이 넒은 경우도 있었다.
가령 1978년 우리 대한항공 여객기가 소련 상공에서 격추되었을 때가 그랬다. 우리 여객기가 항로를 이탈해 소련 영공에 들어가자 소련 공군이 바로 격추해버린 사건이었다. 소련 땅으로 떨어진 여객기의 승객들 생사를 확인해야 하는데 냉전 시기 한국은 소련과 외교관계가 없었다. 외교관들을 대신해 당시 코트라 핀란드 무역관장이었던 저자가 나섰다. 저자는 핀란드 주재 소련 대사관을 방문해 생존한 승객 숫자와 국내로의 송환 날짜를 알아내는 등의 개가를 올렸다.
이때 한국은 소련과 외교관계가 수립되지 않았고 더구나 냉전시대여서 소련은 물론 동유럽의 어느 나라와도 접촉할 수 없었다. 우리는 겨우 미국과 영국, 일본 대사관을 통해 간접적으로 KAL기 추락 상황이나 탑승객의 생사 여부를 파악하려고 했으나 거의 불가능해 전전긍긍했다. …… 그때 내가 한 가지 꾀를 생각해냈다. 핀란드의 주요 기업 중에서 소련과 무역하는 기관이나 업체를 부리나케 찾아 나섰다. 그렇게 여객기가 추락한 지 하루 만에 우리에게서 어망을 수입하고 소련과는 구상무역을 크게 하는 K사의 중역 한 사람을 찾아갔다. _147 ~148쪽
코트라 해외주재원과 그 가족의 삶
요즘 많은 젊은이들이 외국기업에서 일하고 해외에 나가 일하는 것을 선망한다. 외국에서 일한다고 하면 좋은 보수나 복지여건, 쾌적한 사무실과 숙소가 떠오르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1970년대 가난한 나라 출신으로 해외에서 주재하는 것은 지금처럼 부럽거나 낭만적인 일이 아니었다. 그것은 힘들고 위험하며 때로는 눈앞이 막막해지는 일이었다. 수출입국의 사명감 하나로 뛰었고 때로는 무역일꾼 이상의 임무를 수행했지만, 코트라맨들을 위한 나라의 지원은 형편없이 모자랐다. 가난한 조국을 위해 외국에서 돈을 벌어오는 일을 맡았던 코트라맨들에게 어쩌면 이는 당연한 숙명이었는지도 모른다.
지금도 코트라맨으로 첫 해외 근무를 나가던 때가 생각난다. 지금으로부터 40년도 훨씬 전의 일이다. 코트라 주재원으로 대만으로 처음 발령이 난 상황이었다. 대만에 멀쩡한 우리 무역관이 있어 편하게 나가는 길이 아니라 내가 직접 무역관을 창설하려고 나가는 길이었다. 당시 대만 타이베이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런 곳에 생때같은 처자식을 데리고 부임하는 심정은 막막하기만 했다. _14쪽
핀란드어에 불통인 아이들은 학교에서 따돌림당했고 그 사실을 안 아내의 눈에는 언제나 눈물이 고여 있었다. 하는 수 없이 서울의 집에서 빼낸 전세금을 환전한 뒤 우선 딸만이라도 외국인 자녀 전용인 아메리칸 스쿨에 입학시켰다. 딸이 다니는 외국인 학교의 연간 학비는 무려 1만 달러에 달했다. _28쪽
설상가상으로 생활고에 지쳐 있던 우리 가족에게 천재지변이 닥치기도 했다. 대만에서는 태풍과 폭우 그리고 지진이 매우 흔하다. 그런 폭우에 대만 타이베이 무역관을 창설할 때 거처로 썼던 조그마한 단독주택이 물에 잠기고 말았다. 한밤중에 일어난 재난에 속수무책으로 당한 우리 가족은 가구와 옷 등 모든 세간을 버리고 헤엄치듯 집 밖으로 뛰쳐나왔다. …… 그 뒤 우리는 다시 옷을 사고 세간을 장만해 타이베이 외곽의 작은 공동주택으로 이사했다. 물난리를 수습하느라고 들어간 비용은 이곳저곳에서 빌려 썼는데, 1974년 3월 대만에서 임기를 마치는 날이 되어서야 겨우 갚을 수 있었다. 그런 이유로 한국으로 돌아올 때 우리 가족은 거의 빈손이었다. _227~228쪽
그래도 한번 무역인은 영원한 무역인
누구의 인생에나 성공과 실패, 희망과 좌절이 있다. 무역인으로 반평생을 살며 전 세계를 누빈 저자도 마찬가지다. 국내 최초로 이룬 업적도 많지만 잘 진행되다가 안타까운 이유로 무산된 경우도 많았다. 하지만 한번 무역인은 영원한 무역인인 것일까? 정년퇴직으로 코트라를 떠난 뒤에도 저자는 10년 넘게 중소기업에서 수출담당 고문으로 일하며 우리나라의 수출을 도왔다. 그러면서도 보수는 실비변상 수준으로만 받았으니 사실상의 봉사, 요즘 말로는 재능기부에 가까운 일이었다.
회사를 찾은 바이어와 상담하는 중에 그로부터 구매 잠재력이 엿보이면 예정에 없는 점심이나 저녁식사 자리를 만들었다. 거기에 더해 나의 승용차로 바이어의 방한 중 일정을 도와주기도 했다. 하지만 그로부터 주문이나 그 밖의 보상을 바라지는 않았다. 그래도 바이어를 떠나보내고 난 뒤 혹시 정식 주문 소식이 들리지는 않을까 마음을 졸였는데 수출 현장에서 직접 활동한 사람이라면 나의 심정을 잘 이해할 것이다. _276쪽
나는 한때 30여 년간 재직했던 수출진흥 전문기관인 코트라에서 정년퇴직한 뒤 다양한 분야의 여러 수출업체를 위해 자원봉사했다. 그런 차원에서 이 회사에서는 정식 고문으로 취임해 처음으로 수출의 총책임을 맡게 된 것이지만, 내가 받은 보수는 실비 외에는 전적으로 무료봉사였다. _277쪽
이제 여든 살이 넘은 노년의 저자는 코트라 후배들, 무역인 후배들을 위한 당부의 말도 잊지 않는다. 별다른 자원이 없는, 삼면이 바다인 나라가 부(富)를 얻는 길은 해외로 진출하는 것뿐임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과거에 저자가 그랬듯이 그 후배들도 미래에 또 다른 희망과 좌절을 헤쳐 나갈 것이다. 오늘도 세계 곳곳의 낯선 땅에서 고군분투하고 있을 후배들에게 저자는 그 자체로 든든한 모범이 되고 따뜻한 응원의 메시지가 된다.
코트라가 걸어온 길은 곧 수출 한국이 걸어온 길이었다. 그때 나는 그 힘겹고 기나긴 여정에 나의 작은 힘을 보탤 기회가 있었다는 점이 지금 와서 돌이켜보니 너무나도 다행스럽다. 지금도 전 세계 여기저기서 코트라 후배들이 수출 한국을 위해 구슬땀을 흘리고 있을 것이다. 지금 나는 그들에게 힘내라는 응원의 메시지만을 전하고 싶다. _323쪽
▣ 작가 소개
저자 : 김진숙
1936년에 태어나 군산고등학교와 중앙대학교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했다. 1961년 공군본부 군수국에서 영어 번역관으로 일하다가 1964년 코트라에 입사했다. 코트라에서 30여 년간 일하며 대만 타이베이 무역관을 창설하고 핀란드, 프랑스, 스웨덴에서 무역관장을, 본사에서 해외협력사업부장 등의 보직을 수행하다가 1994년에 정년퇴직했다.
코트라에서 재직하는 동안 1970년대 초에는 우리 수출산업과 상품의 대외홍보전략 개발을 맡아 성공적으로 수행했다. 냉전시대였던 1978년에는 소련과 구상무역을 하기 위해 소련 대사관과 정기적으로 접촉했으며 1983년에는 최초로 불가리아 국영 무역기관과 합작사업 계약을 체결했다. 이런 실적으로 정부가 산업발전에 기여한 공로자에게 수여하는 산업포장 등 다수의 표창을 받았다.
특히 1987년에는 미국과의 무역수지 흑자와 관련해 미국의 거센 통상압력에 대처하기 위해 미국산품특별전시회(U.S. Products Show)를 기획했다. 이 일은 미국 정부, 기업, 언론 등에서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고 주한 미국 대사관으로부터 감사패를 받았다.
1996년부터 (주)금양시스템 창호사업을 운영하다가 정리했다. 1999년부터 2007년까지 가... 죽의류 생산수출업체인 (주)투나인의 고문과 남성의류 생산수출업체인 (주)홍민의 고문을 역임했으며 그 뒤에 서울특별시 관광협회 부회장을 지냈다.
▣ 주요 목차
지은이의 말
프롤로그: 낯선 땅으로
1부 하늘은 세계 어디를 가도 푸르렀다
1장 덧없이 더해가는 노년의 아픔
2장 잊을 수 없이 자주 떠오르는 핀란드에서 살던 시절
3장 한 잔의 술, 스납 야화
4장 어두웠던 소련인들, 밝은 러시아인들
5장 비행기 안 어미젖을 찾아 칭얼대던 해외 입양아들
6장 마케팅 총알과 수출 홍보
7장 대만의 선진적인 중소기업 수출정책 조사와 내가 겪은 수난
2부 노년의 삶과 나
1장 현해탄을 넘으며 비탄에 잠겼던 일
2장 우리의 수출업체 임직원과 사구포 김 사장
3장 보고서로 밤새운 춘장대, 그곳은 언제나 아쉬움만 불러오고
4장 한 중소 수출기업에서의 봉사와 어느 날의 침묵
5장 백합화의 추억과 친절의 교훈
6장 노년의 핀란드 자연인과 외로운 해녀
7장 회상
에필로그: 미래 수출 역군을 위한 조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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