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 출판사서평
‘오픈예일코스openyalecourses’
웹사이트(http://oyc.yale.edu)와 YouTube, iTunes를 통해 전 세계 누구나 무료로 수강할 수 있는 예일 대학의 지식 공유 프로젝트로, 예일 대학이 자랑하는 세계적 석학들의 입문 강좌로 이루어져 있다. 이 프로젝트의 목적은 배우고자 하는 모든 이에게 평등한 배움의 장을 제공하는 것이다. 책으로 만나는 ‘오픈예일코스’ 시리즈는 강의 내용을 한층 더 풍부하고 일목요연하게 정리하여 각 분야의 필수 지식을 전달한다. 첫 책 『정치의 도덕적 기초』에 이어 『정치 철학』(스티븐 스미스 지음, 오숙은 옮김), 『구약 읽기』(크리스틴 헤이즈 지음, 김민웅 옮김), 『신약 읽기』(데일 마틴 지음, 김민웅 옮김), 『문학 이론』(폴 프라이 지음, 정영목 옮김)이 2017년에 차례로 출간될 예정이다.
권력 독점을 치료하는 해독제, 민주주의
“……확실성은 아름답지만, 불확실성은 더욱 아름답다.”
이언 샤피로는 1996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폴란드 시인 비스와바 쉼보르스카의 말로 이 책의 문을 연다. 민주주의는 ‘불확실성’을 안고 가는 체제이며, 이 점이야말로 민주주의의 최대 장점이다. 주세페 디 팔마와 아담 프셰보르스키 같은 민주주의 이론가들의 견해를 빌려, 저자는 “경쟁에서 패배한 사람들이 총을 들거나 정치체제에서 소외되지 않고 정치 과정에 참여하도록 동기를 부여하는 것은 미래에 대한 제도화된 불확실성”(274쪽)이라고 밝힌다. 정권을 언제든지 교체하고 대체할 수 있도록 제도적으로 보장하고 있다는 점, 이것이 바로 민주주의 체제에서 정치권력에게 주어진 정당성의 근간이다.
정당한 정치체제에는 반드시 부패와 부정직을 폭로하는 메커니즘이 있어야 한다. 민주주의가 현재의 여타 대안들보다 나은 이유는 바로 이런 메커니즘을 제도화하여, 정치적 야심가들에게 어두운 구석에 빛을 비추고 서로의 실책과 속임수를 폭로할 동기를 부여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민주주의는 (권력을 유지해야 한다는 명령에 인질로 잡히기 십상인) 권력 독점을 치료하는 중요한 해독제다.(262쪽)
남아프리카공화국 출신의 정치철학자이자 당대 최고의 민주주의 이론가 중 하나인 이언 샤피로는 학계의 통념과 달리 참여와 대표성이 아니라 지배권의 제한 가능성에서 민주주의의 가치를 추구한다. 이 책에서 샤피로는 통치 행위의 조건인 ‘정치적 정당성political legitimacy’의 원천이 무엇이냐를 두고 공리주의, 마르크스주의, 사회계약론, 반계몽주의, 민주주의 이론가들이 수세기 동안 벌여온 치열한 논쟁을 되짚어가며, 성숙하고 정의로운 민주주의의 가능성을 모색한다. 그가 보기에 이런 지적 전통을 관통하는 핵심 사상은 계몽주의다. 이에 따르면 근현대 정치사상은 ‘초기 계몽주의―반계몽주의―성숙한 계몽주의’의 방향으로 진화했다. 벤담의 공리주의(‘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 원칙)로 대표되는 초기 계몽주의는 절대적 진리 개념과 과학에 근거한 토대적 확실성에 집착했다. 이런 계몽주의의 확신은 결국 오류로 판명나지만, 오류 가능성을 인정하는 기반 위에서 진리 추구와 개인 권리라는 두 핵심 가치를 조화시키려는 성숙한 계몽주의로 계승되며, 이 성숙한 계몽주의의 가치를 가장 잘 구현하는 정치 이론이 곧 민주주의인 것이다.
이 책은 계몽주의, 반계몽주의, 성숙한 계몽주의로 이어지는 사상적 흐름에서 정치 체제의 정당성을 논한다. 계몽주의 기획이 한물갔다고들 하지만, 저자는 계몽주의의 핵심인 진리 추구와 개인 자유가 여전히 중요하다고 말한다. 공리주의, 마르크스주의, 사회계약론에서 계몽주의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는 지적은 흥미롭다.
저자는 각각의 사상이 세상을 설명하고 변화시키는 데 실패했지만 그 속에 담긴 핵심은 버리지 말아야 한다며, 반계몽주의 사조의 공격에도 여전히 살아남은 두 가치, 즉 진리 추구와 개인 자유를 구현하는 최선의 체제는 민주주의라고 주장한다.
_노승영(역자)
‘정치적 정당성’의 주요 사상들
― 공리주의, 마르크스주의, 사회계약론, 반계몽주의
‘우리가 정부에 충성을 다해야 할 때는 언제이고, 거역해야 할 때는 언제인가?’라는 오래된 정치적 딜레마는 소크라테스, 마르틴 루터, 토머스 모어까지 거슬러올라가며, 현대에도 체코의 바츨라프 하벨, 남아공의 넬슨 만델라, 미얀마의 아웅 산 수 치에게서 여전히 그 영향력을 확인할 수 있다. 이들이 도덕적 영웅인 이유는 그릇된 정치적 권위에 맞섰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한나 아렌트가 ‘악의 평범성’의 사례로 규정했던 아돌프 아이히만은 그릇된 정치권력에 기계적으로 복종한 도덕적 악인이다.
아이히만의 사례에서 보듯, 모든 정부의 정당한 권위에는 반드시 한계가 있어야 한다. 하지만 어떤 한계를 어떻게 부여할 것인가? 우리의 충성을 요구하는 법과 국가의 통치 행위가 그럴 자격이 있는지는 누가 어떤 기준으로 판단해야 하는가? 저자는 이 물음에 답하고자 근대 이후 서구에서 제시된 주요한 정치적 정당성 이론들을 살펴본다.
공리주의: 벤담의 ‘행복 원칙’과 밀의 ‘위해 원칙’
첫번째는 제러미 벤담으로 대표되는 공리주의다. 공리주의는 ‘정부의 정당성은 행복을 극대화하려는 정부의 의지와 능력에 달려 있다’라는 주장으로 수렴된다. 무엇이 행복인가, 누구의 행복을 따질 것인가, 행복을 어떻게 측정할 것인가 등은 각 공리주의 학파를 구분하는 논점이다.(2~3장) 세부적으로 다양한 이견이 존재하지만, 공리주의자들은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추구해야 한다는 벤담의 금언을 잣대로 정부를 평가해야 한다는 데 대체로 동의한다.
하지만 벤담식의 고전 공리주의는 개인 권리에 무관심하다는 한계를 지닌다. 이를테면 최대 행복을 위해 개인을 희생시킬 수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해 신고전파 경제학자인 파레토는 “개인 간 비교를 이용하는 최대 행복 원칙이 (가령 노예가 잃는 행복보다 노예 소유주가 얻는 행복이 더 크다면) 노예제를 지지하거나, 절도를 부도덕한 행위로 금지하지 못하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62쪽)며 개인 간 공리 비교를 폐기했다. 이를 보완하고자 역시 신고전 공리주의에 속하는 존 스튜어트 밀은, 사회가 개인의 자유를 침해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타인에게 가해지는 위해를 막기 위해 필요한 때뿐이라는 ‘위해 원칙’을 제시한다. 하지만 밀의 원칙은 모든 행위가 의도치 않게 제삼자에게 해로운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점을 간과하고 있다. 어떤 행위가 타인에게 해로울 수 있는가 여부는 결국 해석과 판단의 문제가 되며, 이는 벤담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사회적 공리라는 이름으로 개인 자유를 희생시킬 백지 위임장을 국가에 제공하는 셈이 된다. 20세기에도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공리주의는 나치즘과 파시즘, 베트남전쟁 같은 당대의 중대한 도덕적 사안에 대해 침묵했다는 비난에서도 자유롭지 못하다.
마르크스주의: 착취 없는 세상이라는 이상
두번째로 마르크스주의는 착취 개념을 기준으로 정치적 정당성을 판단한다.(4장)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착취의 정의, 착취와 노동·경제체제·정치체제의 관계, 착취 근절을 위한 정치기구의 역할 등을 놓고 근본적 차이를 보인다. 마르크스주의 관점에서는, 역사상 모든 정치체제가 어떤 식으로든 착취를 승인했지만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는 착취 없는 세상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이런 마르크스주의 이론은 자본주의의 규범적 속성을 이해하고 여러 자본주의 체제의 상대적 정당성을 구분하는 데 유용하다.
하지만 마르크스주의 전통에서도 착취를 판단하고 측정하는 문제는 일관성이 없고 자의적이다. 즉 어떤 경우에서도 도덕적 자의성에 대한 존 롤스의 논증(162쪽 이하)에 취약하다. 누가 착취를 판단하고 측정할 것인지, 착취 최소화가 효율성 같은 여타 가치와 얼마나 상반관계를 이루어야 하는지를 누가 결정할 것인가, 이런 문제와 관련하여 누가 의사 결정권자에게 책임을 부여할 것인지 등에 대해서도 아무런 설명이 없다. 게다가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민주주의 절차에 진지하게 주목한 적이 없고, 그들의 유토피아 세상에서는 민주주의 절차가 불필요해진다고 밝힐 따름이다. 전 세계에 존재하는 사회주의 및 공산주의 국가들의 비민주적이고 권위주의적인 체제 현실도 분명 부인할 수 없는 경험적 사실이다.
사회계약론: 근대의 ‘합의’ 개념과 롤스의 ‘정의론正義論’
세번째는 사회계약론 전통이다.(5장) 근대적 형태의 사회계약론은 토머스 홉스의 『리바이어던』(1651)과 존 로크의 『통치론』(1680년대)에서 출발한다. 사회계약론자들이 보기에 국가의 정당성은 합의 개념에 뿌리를 둔다. 피통치자의 동의가 국가 정당성의 근원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국가가 국민은 합의를 구현하면 국민은 국가에 충성할 의무가 있지만, 국가가 국민의 합의를 저버리면 국민은 저항할 자유(심지어는 의무)가 있다.
현대에 와서 공리주의가 한계에 부딪치자 사회계약론 전통이 부활하는데, 이를 대표하는 것이 존 롤스의 ‘정의론’이다. 롤스는 도덕적 견해차가 인간 사회에 내재한다는 시각에서 출발한다. 한 사람에게 좋은 것이 다른 사람에게 좋지 않을 수 있듯 도덕적 판단은 자의적이라는 것이다. 또한 본성의 결과든 양육의 결과든, 개인의 능력 차이도 도덕적으로 자의적이다. 어떤 유전자를 타고나는지, 어떤 환경에서 태어나는지는 어디까지나 운에 달린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사람들의 차이는 도덕적으로 자의적이기에 사회에서의 혜택과 부담의 분배와 무관해야 한다고 롤스는 주장한다. 이에 따라 그가 정치적 정당성의 기초로 제시하는 것은 ‘중첩적 합의’ 개념이다.(159쪽 이하) 사람들은 동의에 필요한 논리에는 결코 동의하지 않으면서도 그 결과에 동의할 수 있다. 중첩적 합의의 장점은 궁극적 진리라는 문제와 정치적 신념의 정당화라는 문제에 대해 “형이상학적이지 않은 정치적인” 접근법을 취하여, 국가가 특정한 견해를 선택하고 승인할 때 누가 이익을 보고 누가 불이익을 입는지에 초점을 맞춘다는 것이다. 포괄성을 극대화하는 롤스의 원칙은 분배 문제에서 “사회의 최소 수혜자에게 최대 이득이 되도록 재화를 분배해야 한다”(167쪽)는 논리로 이어진다. 하지만 중첩적 합의라는 접근법은 롤스가 주장하는 결과를 가져다주지 못한다. 중첩적 합의에 포함되는 견해들이 미신에 바탕을 둘 수도 있고, 과학적으로 정당한 견해들이 배제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또한 전 국민 건강보험, 낙태 권리 등 현재 미국에서 벌어지는 논쟁들만 생각해봐도 개인의 권리와 책임의 적절한 범위에 대한 중첩적 합의에 이르는 데는 뚜렷한 한계가 있음을 알 수 있다. 롤스의 정의 이론은 마르크스주의 전통이 세계주의적이듯, 전 지구적 차원에나 적용되는 이상적인 논리라는 비판을 받는다.
반反계몽주의: 버크의 전통주의에서 로티의 탈근대주의까지
공리주의, 마르크스주의, 사회계약론이 형성되는 데는 계몽주의가 결정적 역할을 했다. 계몽주의는 과학적 원리를 토대로 사회생활을 합리화하려는 철학 운동이며, ‘개인 권리’로 표현되는 인간 자유의 이상을 추구한다. 하지만 이런 계몽주의를 비판하는 사상적 흐름도 분명히 존재한다. 반계몽주의는 에드먼드 버크 같은 전통주의자에서 현대의 탈근대주의 및 공동체주의 이론가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6장) 이들은 과학적 노선으로 정치를 합리화한다는 목표에 대해, 또한 개인 권리로 구현된 자유가 가장 중요한 정치적 가치라는 관념에 대해 회의적이다. 그 대신 관습에 규범적 무게를 부여하며, 개인의 삶을 형성하고 의미를 부여하는 공동체적 가치를 잣대로 정치기구의 정당성을 평가하려 한다.
리처드 로티를 비롯한 탈근대주의자들은 토대적 확실성에 대한 초기 계몽주의의 강박을 비판하는 데 그치지 않고 과학이 의견이나 규약, 미신이나 전통보다 더 믿을 만하게 진리를 추구할 수 있으며 그래야 한다는 개념을 너무 성급하게 폐기해버렸다. 로티는 진리를 사회적 합의와 연대라는 관점에서 정의하고, 합리성을 대화적 합의의 결과로 정의한다. 또한 철학을 해석학으로 대체해야 한다고 주장하여 상대주의라는 비난에 직면하기도 했다. “토대론을 거부한 탈근대주의에 대한 올바른 최종 평결은 초기 계몽주의의 지나친 오만에 대한 과잉 반응이라는 것이다.”(210쪽)
공리주의, 마르크스주의, 사회계약론에 심각한 문제가 있더라도 정치에서 계몽주의 기획을 전적으로 거부하기는 불가능하며 또 바람직하지도 않다. 이들 사상은 포괄적인 정치적 원칙으로는 실패했으되 정치적 정당성의 근원에 대한 통찰을 담고 있다. 특히 저자는 반계몽주의적 비판에 취약한 초기 계몽주의와 그렇지 않은 성숙한 계몽주의를 구분한다. 계몽주의가 토대적 확실성에 집착한다고 비판할 수는 있지만 현대적 사고와 실천의 기본인 가류주의fallibilism(오류 가능주의)적 과학관은 이런 비판에서 자유로우며, 개인 권리 개념에 어떤 난점이 있더라도 이 개념 없이 정치적 정당성 이론을 전개할 수는 없다.
‘성숙한 계몽주의’의 가치를 구현하는 민주주의
그렇다면 성숙한 계몽주의의 가치를 가장 잘 구현하는 정치 이론은 무엇일까? 바로 민주주의다.(7장) 민주주의 전통의 기원은 고대로 거슬러올라가지만, 민주주의의 근대적 정식화는 장자크 루소의 『사회계약론』(1762)에서 비롯한다. 민주주의자들은 정부의 결정에 영향을 받는 사람들이 결정 과정에서 유의미한 역할을 할 때, 또한 현재의 정부에 반대하고 그것을 다른 대안으로 대체할 수 있는 유의미한 기회가 있을 때에만 정부가 정당하다고 주장한다. 정부와 야당을 어떻게 조직해야 하는가, 누구에게 투표권이 있는가, 표를 어떻게 계산해야 하는가, 필요하다면 민주적 다수의 결정에 어떤 한계를 두어야 하는가 등의 구체적 사안에 대해서는 이견이 분분하지만, 민주주의자들은 민주적 절차야말로 정치적 정당성의 가장 훌륭한 근원이라는 데 의견이 일치한다. 이때 권력을 놓고 벌이는 경쟁은 불가피하다.
새뮤얼 헌팅턴 같은 현대의 슘페터주의자들이 ‘어떤 나라를 민주국가로 부르려면 정부가 두 번 이상 선거에서 패배하여 권력을 내놓았어야 한다’라고 주장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이것은 까다로운 기준이어서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미국은 1840년까지 이 기준을 충족하지 못했으며 일본과 인도는 20세기에 들어서고도 상당 기간 동안, 1980년대 이후의 공산주의 출신 국가와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에서 등장한 이른바 제3의 물결 민주주의도 대부분 민주국가에 들지 못했다. 또한 경쟁이라는 요건 때문에 민주주의에서는 반대할 권리가 필수 불가결하다.(262~263쪽)
오래전부터 민주주의는 개인 권리에 적대적이라는 비난에 시달렸다. 민주주의는 다수의 횡포로 이어질 수 있을 뿐 아니라, 전략적으로 유리한 소수의 횡포로도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7장 2절 ‘민주주의와 권리’) 하지만 다수결 원칙은 사상의 경쟁을 촉진하고, 경쟁을 통해 현 상태를 제도적 절차에 따라 무너뜨릴 가능성이 영구적으로 존재한다는 점에서 오히려 정치적 안정에 이바지할 수 있다.
민주주의 이론의 가장 큰 골칫거리는 권리의 주체가 누구인가라는 문제다. 가령 누구에게 시민권이나 투표권을 부여할 것인가? 민주주의의 원류라고 하는 고대 그리스만 해도 여성과 노예에게는 시민권이 없었다. 현대 미국에서도 흑인에 대한 참정권 제한이 버젓이 존재했다. 하지만 오늘날 민주주의 이론에는 이 문제에 대처할 독특한 메커니즘이 있다. 바로 ‘영향받는 이해 당사자’의 인과적 원칙이다. 즉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결정에 대해서는 그들에게 발언권을 주어야 한다는 점이 민주주의적 정당성의 기반이라는 것이다. 넬슨 만델라가 1963년 아파르트헤이트 정책하의 남아프리카공화국 법정에서 반역 혐의에 대한 판결을 앞두고 “나도 우리 민족의 어느 누구도 제정 과정에서 발언권을 부여받지 못한 법률”에 구속되어서는 안 된다고 진술한 것은 이 때문이다.(283쪽)
공적 삶에서 논쟁이 중요하다는 밀의 주장은 옳았으나, 밀은 과학 발전으로 인해 논란이 줄어들 가능성을 과대평가했으며, 민주주의 제도가 자신이 예찬하는 활발한 토론을 촉진할 가능성을 과소평가했다. 탄탄한 반대 제도를 갖춘 민주주의 경쟁의 역동적 성격에 밀이 옹호한 사상 및 토론의 관용적 자유를 결합하는 것이야말로 활발한 토론을 달성할 최선의 방책이다. 물론 현대 민주주의에서 관찰되는 실제 정치 논쟁은 이에 너무도 미흡한데, 주된 이유는 논쟁 과정이 자본의 개입으로 더렵혀졌기 때문이다. 현 세대의 민주주의 개혁가에게 중요한 과제는 자본의 영향을 줄여 실제 민주주의 논쟁이 밀과 듀이의 구상처럼 진리가 규제적 이상으로 작동하는 규율된 토론에 가깝게 바뀌도록 방법을 찾는 것이다.
정치에 있어 민주주의가 진리의 적이라는 두려움이 터무니없는 것으로 드러났듯, 절대주의적 진리관이 성숙한 계몽주의의 가류주의에 밀려 폐기되고 경쟁 민주주의의 장점이 현재의 대안에 비추어 평가되면서, 민주주의가 개인 권리를 위협한다는 주장 또한 과장된 것으로 드러났다. 밀과 토크빌의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역사는 민주국가가 개인 권리와 시민의 자유를 비민주국가보다 더 존중한다는 사실을 입증한다. 민주주의적 정치제도가 결여된 나라에 사는 사람들은 권위주의적 정치제도를 감내해야 한다.
민주주의 전통에서는 과학을 통해 진리를 추구하려는 계몽주의적 천착과 개인 권리의 존중 사이의 잠재적 긴장을 해소하는 유용한 자원을 찾을 수 있다. 진리 추구와 개인 권리라는 두 가치를 구현하는 데는 민주주의 지지자들이 제도화하려 하는 권력관계의 구조화된 불안정성이 유용하다. 민주주의는 현재의 편제에서 불이익을 받는 사람들이 편제의 결함을 제기하고, 어떻게 해서 진리가 호도되는지 밝히고, 편제를 바꾸고자 노력하는 데 필요한 동기와 자원을 모두 가지고 있는 체제다.
민주주의는 ‘영향받는 이해 당사자’ 원칙에 부합하도록 의사결정을 압박하고 반대의 기회를 열어줌으로써, 지배를 최소화하여 발전할 수 있다. 민주주의적 권력 경쟁은 이를 위한 최선의 방법이다. 정치적 주장과 그 반대 주장의 진실성을 공론장에서 검증하도록 보장하고, 인간 자유에의 염원을 가장 잘 구현하는 개인 권리를 보호하고자 한다면, 현재 민주주의보다 더 나은 대안적 정치체제는 존재하지 않는다.
▣ 작가 소개
저자 : 이언 샤피로
남아프리카공화국 출신의 정치철학자로 예일 대학 정치학과 교수이다. 1956년 요하네스버그에서 태어나 16세 때 영국으로 이주해 브리스틀 대학에서 철학과 정치학을 공부한다. 이어 예일 대학 정치학과에 들어가 미국 정치학계의 거장이자 20세기 최고의 민주주의, 다원주의 이론가로 불리는 로버트 달의 제자가 된다. 1983년 「자유주의적 정치사상에서 권리의 진화」라는 박사학위 논문으로 미국정치학회에서 수여하는 레오 스트라우스 상을 수상한다. 1984년부터 예일 대학에서 가르치기 시작해 1992년 정교수, 2005년 스털링 명예교수에 오른다.
샤피로의 주된 관심사는 민주주의와 부의 분배 문제다. 특히 학계의 통념과 달리 참여와 대표성이 아니라 지배의 제한 가능성에서 민주주의의 가치를 추구한다. 그의 『민주적 정의』(1999)는 롤스의 『정의론』 이후 가장 중요한 사회학 저작 중 하나로 평가된다. 『정치의 도덕적 기초』(2003)는 수십년간 예일 대학 대표 명강으로 손꼽히던 샤피로의 정치학 수업 내용을 총정리한 책이다. 그밖의 저서로 『합리적 선택 이론의 병리』(1996. 도널드 그린과 공저), 『인문과학의 현실도피』(2005), 『민주주의 이론의 실세... 계』(2010)가 있고 미국정치·법철학회 연감 『노모스NOMOS』를 8년간 편집하기도 했다.
역자 : 노승영
서울대 영문과를 졸업하고 서울대 대학원 인지과학 협동과정을 수료했다. 컴퓨터 회사에서 번역프로그램을 만들었고 환경 단체에서 일했다. 역서로 피터 싱어 『이렇게 살아가도 괜찮은가』, 잭 골드스톤 『혁명』, 리처드 토이 『수사학』, 토머스 캐스카트 『누구를 구할 것인가?』, 팀 버케드 『새의 감각』, 대니얼 데닛 『직관펌프, 생각을 열다』, 잭 이브라힘 외 『테러리스트의 아들』, 이반 일리치 『그림자 노동』, 조너선 실버타운 『늙는다는 건 우주의 일』, 앤 이니스 대그 『동물에게 배우는 노년의 삶』, 재런 러니어 『미래는 누구의 것인가』 등이 있다.
▣ 주요 목차
서문
머리말
1장 계몽주의 정치학
2장 고전 공리주의
3장 권리와 공리의 종합
4장 마르크스주의
5장 사회계약론
6장 반계몽주의 정치학
7장 민주주의
8장 성숙한 계몽주의에서의 민주주의
주|옮긴이의 말|찾아보기
‘오픈예일코스openyalecourses’
웹사이트(http://oyc.yale.edu)와 YouTube, iTunes를 통해 전 세계 누구나 무료로 수강할 수 있는 예일 대학의 지식 공유 프로젝트로, 예일 대학이 자랑하는 세계적 석학들의 입문 강좌로 이루어져 있다. 이 프로젝트의 목적은 배우고자 하는 모든 이에게 평등한 배움의 장을 제공하는 것이다. 책으로 만나는 ‘오픈예일코스’ 시리즈는 강의 내용을 한층 더 풍부하고 일목요연하게 정리하여 각 분야의 필수 지식을 전달한다. 첫 책 『정치의 도덕적 기초』에 이어 『정치 철학』(스티븐 스미스 지음, 오숙은 옮김), 『구약 읽기』(크리스틴 헤이즈 지음, 김민웅 옮김), 『신약 읽기』(데일 마틴 지음, 김민웅 옮김), 『문학 이론』(폴 프라이 지음, 정영목 옮김)이 2017년에 차례로 출간될 예정이다.
권력 독점을 치료하는 해독제, 민주주의
“……확실성은 아름답지만, 불확실성은 더욱 아름답다.”
이언 샤피로는 1996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폴란드 시인 비스와바 쉼보르스카의 말로 이 책의 문을 연다. 민주주의는 ‘불확실성’을 안고 가는 체제이며, 이 점이야말로 민주주의의 최대 장점이다. 주세페 디 팔마와 아담 프셰보르스키 같은 민주주의 이론가들의 견해를 빌려, 저자는 “경쟁에서 패배한 사람들이 총을 들거나 정치체제에서 소외되지 않고 정치 과정에 참여하도록 동기를 부여하는 것은 미래에 대한 제도화된 불확실성”(274쪽)이라고 밝힌다. 정권을 언제든지 교체하고 대체할 수 있도록 제도적으로 보장하고 있다는 점, 이것이 바로 민주주의 체제에서 정치권력에게 주어진 정당성의 근간이다.
정당한 정치체제에는 반드시 부패와 부정직을 폭로하는 메커니즘이 있어야 한다. 민주주의가 현재의 여타 대안들보다 나은 이유는 바로 이런 메커니즘을 제도화하여, 정치적 야심가들에게 어두운 구석에 빛을 비추고 서로의 실책과 속임수를 폭로할 동기를 부여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민주주의는 (권력을 유지해야 한다는 명령에 인질로 잡히기 십상인) 권력 독점을 치료하는 중요한 해독제다.(262쪽)
남아프리카공화국 출신의 정치철학자이자 당대 최고의 민주주의 이론가 중 하나인 이언 샤피로는 학계의 통념과 달리 참여와 대표성이 아니라 지배권의 제한 가능성에서 민주주의의 가치를 추구한다. 이 책에서 샤피로는 통치 행위의 조건인 ‘정치적 정당성political legitimacy’의 원천이 무엇이냐를 두고 공리주의, 마르크스주의, 사회계약론, 반계몽주의, 민주주의 이론가들이 수세기 동안 벌여온 치열한 논쟁을 되짚어가며, 성숙하고 정의로운 민주주의의 가능성을 모색한다. 그가 보기에 이런 지적 전통을 관통하는 핵심 사상은 계몽주의다. 이에 따르면 근현대 정치사상은 ‘초기 계몽주의―반계몽주의―성숙한 계몽주의’의 방향으로 진화했다. 벤담의 공리주의(‘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 원칙)로 대표되는 초기 계몽주의는 절대적 진리 개념과 과학에 근거한 토대적 확실성에 집착했다. 이런 계몽주의의 확신은 결국 오류로 판명나지만, 오류 가능성을 인정하는 기반 위에서 진리 추구와 개인 권리라는 두 핵심 가치를 조화시키려는 성숙한 계몽주의로 계승되며, 이 성숙한 계몽주의의 가치를 가장 잘 구현하는 정치 이론이 곧 민주주의인 것이다.
이 책은 계몽주의, 반계몽주의, 성숙한 계몽주의로 이어지는 사상적 흐름에서 정치 체제의 정당성을 논한다. 계몽주의 기획이 한물갔다고들 하지만, 저자는 계몽주의의 핵심인 진리 추구와 개인 자유가 여전히 중요하다고 말한다. 공리주의, 마르크스주의, 사회계약론에서 계몽주의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는 지적은 흥미롭다.
저자는 각각의 사상이 세상을 설명하고 변화시키는 데 실패했지만 그 속에 담긴 핵심은 버리지 말아야 한다며, 반계몽주의 사조의 공격에도 여전히 살아남은 두 가치, 즉 진리 추구와 개인 자유를 구현하는 최선의 체제는 민주주의라고 주장한다.
_노승영(역자)
‘정치적 정당성’의 주요 사상들
― 공리주의, 마르크스주의, 사회계약론, 반계몽주의
‘우리가 정부에 충성을 다해야 할 때는 언제이고, 거역해야 할 때는 언제인가?’라는 오래된 정치적 딜레마는 소크라테스, 마르틴 루터, 토머스 모어까지 거슬러올라가며, 현대에도 체코의 바츨라프 하벨, 남아공의 넬슨 만델라, 미얀마의 아웅 산 수 치에게서 여전히 그 영향력을 확인할 수 있다. 이들이 도덕적 영웅인 이유는 그릇된 정치적 권위에 맞섰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한나 아렌트가 ‘악의 평범성’의 사례로 규정했던 아돌프 아이히만은 그릇된 정치권력에 기계적으로 복종한 도덕적 악인이다.
아이히만의 사례에서 보듯, 모든 정부의 정당한 권위에는 반드시 한계가 있어야 한다. 하지만 어떤 한계를 어떻게 부여할 것인가? 우리의 충성을 요구하는 법과 국가의 통치 행위가 그럴 자격이 있는지는 누가 어떤 기준으로 판단해야 하는가? 저자는 이 물음에 답하고자 근대 이후 서구에서 제시된 주요한 정치적 정당성 이론들을 살펴본다.
공리주의: 벤담의 ‘행복 원칙’과 밀의 ‘위해 원칙’
첫번째는 제러미 벤담으로 대표되는 공리주의다. 공리주의는 ‘정부의 정당성은 행복을 극대화하려는 정부의 의지와 능력에 달려 있다’라는 주장으로 수렴된다. 무엇이 행복인가, 누구의 행복을 따질 것인가, 행복을 어떻게 측정할 것인가 등은 각 공리주의 학파를 구분하는 논점이다.(2~3장) 세부적으로 다양한 이견이 존재하지만, 공리주의자들은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추구해야 한다는 벤담의 금언을 잣대로 정부를 평가해야 한다는 데 대체로 동의한다.
하지만 벤담식의 고전 공리주의는 개인 권리에 무관심하다는 한계를 지닌다. 이를테면 최대 행복을 위해 개인을 희생시킬 수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해 신고전파 경제학자인 파레토는 “개인 간 비교를 이용하는 최대 행복 원칙이 (가령 노예가 잃는 행복보다 노예 소유주가 얻는 행복이 더 크다면) 노예제를 지지하거나, 절도를 부도덕한 행위로 금지하지 못하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62쪽)며 개인 간 공리 비교를 폐기했다. 이를 보완하고자 역시 신고전 공리주의에 속하는 존 스튜어트 밀은, 사회가 개인의 자유를 침해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타인에게 가해지는 위해를 막기 위해 필요한 때뿐이라는 ‘위해 원칙’을 제시한다. 하지만 밀의 원칙은 모든 행위가 의도치 않게 제삼자에게 해로운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점을 간과하고 있다. 어떤 행위가 타인에게 해로울 수 있는가 여부는 결국 해석과 판단의 문제가 되며, 이는 벤담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사회적 공리라는 이름으로 개인 자유를 희생시킬 백지 위임장을 국가에 제공하는 셈이 된다. 20세기에도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공리주의는 나치즘과 파시즘, 베트남전쟁 같은 당대의 중대한 도덕적 사안에 대해 침묵했다는 비난에서도 자유롭지 못하다.
마르크스주의: 착취 없는 세상이라는 이상
두번째로 마르크스주의는 착취 개념을 기준으로 정치적 정당성을 판단한다.(4장)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착취의 정의, 착취와 노동·경제체제·정치체제의 관계, 착취 근절을 위한 정치기구의 역할 등을 놓고 근본적 차이를 보인다. 마르크스주의 관점에서는, 역사상 모든 정치체제가 어떤 식으로든 착취를 승인했지만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는 착취 없는 세상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이런 마르크스주의 이론은 자본주의의 규범적 속성을 이해하고 여러 자본주의 체제의 상대적 정당성을 구분하는 데 유용하다.
하지만 마르크스주의 전통에서도 착취를 판단하고 측정하는 문제는 일관성이 없고 자의적이다. 즉 어떤 경우에서도 도덕적 자의성에 대한 존 롤스의 논증(162쪽 이하)에 취약하다. 누가 착취를 판단하고 측정할 것인지, 착취 최소화가 효율성 같은 여타 가치와 얼마나 상반관계를 이루어야 하는지를 누가 결정할 것인가, 이런 문제와 관련하여 누가 의사 결정권자에게 책임을 부여할 것인지 등에 대해서도 아무런 설명이 없다. 게다가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민주주의 절차에 진지하게 주목한 적이 없고, 그들의 유토피아 세상에서는 민주주의 절차가 불필요해진다고 밝힐 따름이다. 전 세계에 존재하는 사회주의 및 공산주의 국가들의 비민주적이고 권위주의적인 체제 현실도 분명 부인할 수 없는 경험적 사실이다.
사회계약론: 근대의 ‘합의’ 개념과 롤스의 ‘정의론正義論’
세번째는 사회계약론 전통이다.(5장) 근대적 형태의 사회계약론은 토머스 홉스의 『리바이어던』(1651)과 존 로크의 『통치론』(1680년대)에서 출발한다. 사회계약론자들이 보기에 국가의 정당성은 합의 개념에 뿌리를 둔다. 피통치자의 동의가 국가 정당성의 근원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국가가 국민은 합의를 구현하면 국민은 국가에 충성할 의무가 있지만, 국가가 국민의 합의를 저버리면 국민은 저항할 자유(심지어는 의무)가 있다.
현대에 와서 공리주의가 한계에 부딪치자 사회계약론 전통이 부활하는데, 이를 대표하는 것이 존 롤스의 ‘정의론’이다. 롤스는 도덕적 견해차가 인간 사회에 내재한다는 시각에서 출발한다. 한 사람에게 좋은 것이 다른 사람에게 좋지 않을 수 있듯 도덕적 판단은 자의적이라는 것이다. 또한 본성의 결과든 양육의 결과든, 개인의 능력 차이도 도덕적으로 자의적이다. 어떤 유전자를 타고나는지, 어떤 환경에서 태어나는지는 어디까지나 운에 달린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사람들의 차이는 도덕적으로 자의적이기에 사회에서의 혜택과 부담의 분배와 무관해야 한다고 롤스는 주장한다. 이에 따라 그가 정치적 정당성의 기초로 제시하는 것은 ‘중첩적 합의’ 개념이다.(159쪽 이하) 사람들은 동의에 필요한 논리에는 결코 동의하지 않으면서도 그 결과에 동의할 수 있다. 중첩적 합의의 장점은 궁극적 진리라는 문제와 정치적 신념의 정당화라는 문제에 대해 “형이상학적이지 않은 정치적인” 접근법을 취하여, 국가가 특정한 견해를 선택하고 승인할 때 누가 이익을 보고 누가 불이익을 입는지에 초점을 맞춘다는 것이다. 포괄성을 극대화하는 롤스의 원칙은 분배 문제에서 “사회의 최소 수혜자에게 최대 이득이 되도록 재화를 분배해야 한다”(167쪽)는 논리로 이어진다. 하지만 중첩적 합의라는 접근법은 롤스가 주장하는 결과를 가져다주지 못한다. 중첩적 합의에 포함되는 견해들이 미신에 바탕을 둘 수도 있고, 과학적으로 정당한 견해들이 배제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또한 전 국민 건강보험, 낙태 권리 등 현재 미국에서 벌어지는 논쟁들만 생각해봐도 개인의 권리와 책임의 적절한 범위에 대한 중첩적 합의에 이르는 데는 뚜렷한 한계가 있음을 알 수 있다. 롤스의 정의 이론은 마르크스주의 전통이 세계주의적이듯, 전 지구적 차원에나 적용되는 이상적인 논리라는 비판을 받는다.
반反계몽주의: 버크의 전통주의에서 로티의 탈근대주의까지
공리주의, 마르크스주의, 사회계약론이 형성되는 데는 계몽주의가 결정적 역할을 했다. 계몽주의는 과학적 원리를 토대로 사회생활을 합리화하려는 철학 운동이며, ‘개인 권리’로 표현되는 인간 자유의 이상을 추구한다. 하지만 이런 계몽주의를 비판하는 사상적 흐름도 분명히 존재한다. 반계몽주의는 에드먼드 버크 같은 전통주의자에서 현대의 탈근대주의 및 공동체주의 이론가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6장) 이들은 과학적 노선으로 정치를 합리화한다는 목표에 대해, 또한 개인 권리로 구현된 자유가 가장 중요한 정치적 가치라는 관념에 대해 회의적이다. 그 대신 관습에 규범적 무게를 부여하며, 개인의 삶을 형성하고 의미를 부여하는 공동체적 가치를 잣대로 정치기구의 정당성을 평가하려 한다.
리처드 로티를 비롯한 탈근대주의자들은 토대적 확실성에 대한 초기 계몽주의의 강박을 비판하는 데 그치지 않고 과학이 의견이나 규약, 미신이나 전통보다 더 믿을 만하게 진리를 추구할 수 있으며 그래야 한다는 개념을 너무 성급하게 폐기해버렸다. 로티는 진리를 사회적 합의와 연대라는 관점에서 정의하고, 합리성을 대화적 합의의 결과로 정의한다. 또한 철학을 해석학으로 대체해야 한다고 주장하여 상대주의라는 비난에 직면하기도 했다. “토대론을 거부한 탈근대주의에 대한 올바른 최종 평결은 초기 계몽주의의 지나친 오만에 대한 과잉 반응이라는 것이다.”(210쪽)
공리주의, 마르크스주의, 사회계약론에 심각한 문제가 있더라도 정치에서 계몽주의 기획을 전적으로 거부하기는 불가능하며 또 바람직하지도 않다. 이들 사상은 포괄적인 정치적 원칙으로는 실패했으되 정치적 정당성의 근원에 대한 통찰을 담고 있다. 특히 저자는 반계몽주의적 비판에 취약한 초기 계몽주의와 그렇지 않은 성숙한 계몽주의를 구분한다. 계몽주의가 토대적 확실성에 집착한다고 비판할 수는 있지만 현대적 사고와 실천의 기본인 가류주의fallibilism(오류 가능주의)적 과학관은 이런 비판에서 자유로우며, 개인 권리 개념에 어떤 난점이 있더라도 이 개념 없이 정치적 정당성 이론을 전개할 수는 없다.
‘성숙한 계몽주의’의 가치를 구현하는 민주주의
그렇다면 성숙한 계몽주의의 가치를 가장 잘 구현하는 정치 이론은 무엇일까? 바로 민주주의다.(7장) 민주주의 전통의 기원은 고대로 거슬러올라가지만, 민주주의의 근대적 정식화는 장자크 루소의 『사회계약론』(1762)에서 비롯한다. 민주주의자들은 정부의 결정에 영향을 받는 사람들이 결정 과정에서 유의미한 역할을 할 때, 또한 현재의 정부에 반대하고 그것을 다른 대안으로 대체할 수 있는 유의미한 기회가 있을 때에만 정부가 정당하다고 주장한다. 정부와 야당을 어떻게 조직해야 하는가, 누구에게 투표권이 있는가, 표를 어떻게 계산해야 하는가, 필요하다면 민주적 다수의 결정에 어떤 한계를 두어야 하는가 등의 구체적 사안에 대해서는 이견이 분분하지만, 민주주의자들은 민주적 절차야말로 정치적 정당성의 가장 훌륭한 근원이라는 데 의견이 일치한다. 이때 권력을 놓고 벌이는 경쟁은 불가피하다.
새뮤얼 헌팅턴 같은 현대의 슘페터주의자들이 ‘어떤 나라를 민주국가로 부르려면 정부가 두 번 이상 선거에서 패배하여 권력을 내놓았어야 한다’라고 주장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이것은 까다로운 기준이어서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미국은 1840년까지 이 기준을 충족하지 못했으며 일본과 인도는 20세기에 들어서고도 상당 기간 동안, 1980년대 이후의 공산주의 출신 국가와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에서 등장한 이른바 제3의 물결 민주주의도 대부분 민주국가에 들지 못했다. 또한 경쟁이라는 요건 때문에 민주주의에서는 반대할 권리가 필수 불가결하다.(262~263쪽)
오래전부터 민주주의는 개인 권리에 적대적이라는 비난에 시달렸다. 민주주의는 다수의 횡포로 이어질 수 있을 뿐 아니라, 전략적으로 유리한 소수의 횡포로도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7장 2절 ‘민주주의와 권리’) 하지만 다수결 원칙은 사상의 경쟁을 촉진하고, 경쟁을 통해 현 상태를 제도적 절차에 따라 무너뜨릴 가능성이 영구적으로 존재한다는 점에서 오히려 정치적 안정에 이바지할 수 있다.
민주주의 이론의 가장 큰 골칫거리는 권리의 주체가 누구인가라는 문제다. 가령 누구에게 시민권이나 투표권을 부여할 것인가? 민주주의의 원류라고 하는 고대 그리스만 해도 여성과 노예에게는 시민권이 없었다. 현대 미국에서도 흑인에 대한 참정권 제한이 버젓이 존재했다. 하지만 오늘날 민주주의 이론에는 이 문제에 대처할 독특한 메커니즘이 있다. 바로 ‘영향받는 이해 당사자’의 인과적 원칙이다. 즉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결정에 대해서는 그들에게 발언권을 주어야 한다는 점이 민주주의적 정당성의 기반이라는 것이다. 넬슨 만델라가 1963년 아파르트헤이트 정책하의 남아프리카공화국 법정에서 반역 혐의에 대한 판결을 앞두고 “나도 우리 민족의 어느 누구도 제정 과정에서 발언권을 부여받지 못한 법률”에 구속되어서는 안 된다고 진술한 것은 이 때문이다.(283쪽)
공적 삶에서 논쟁이 중요하다는 밀의 주장은 옳았으나, 밀은 과학 발전으로 인해 논란이 줄어들 가능성을 과대평가했으며, 민주주의 제도가 자신이 예찬하는 활발한 토론을 촉진할 가능성을 과소평가했다. 탄탄한 반대 제도를 갖춘 민주주의 경쟁의 역동적 성격에 밀이 옹호한 사상 및 토론의 관용적 자유를 결합하는 것이야말로 활발한 토론을 달성할 최선의 방책이다. 물론 현대 민주주의에서 관찰되는 실제 정치 논쟁은 이에 너무도 미흡한데, 주된 이유는 논쟁 과정이 자본의 개입으로 더렵혀졌기 때문이다. 현 세대의 민주주의 개혁가에게 중요한 과제는 자본의 영향을 줄여 실제 민주주의 논쟁이 밀과 듀이의 구상처럼 진리가 규제적 이상으로 작동하는 규율된 토론에 가깝게 바뀌도록 방법을 찾는 것이다.
정치에 있어 민주주의가 진리의 적이라는 두려움이 터무니없는 것으로 드러났듯, 절대주의적 진리관이 성숙한 계몽주의의 가류주의에 밀려 폐기되고 경쟁 민주주의의 장점이 현재의 대안에 비추어 평가되면서, 민주주의가 개인 권리를 위협한다는 주장 또한 과장된 것으로 드러났다. 밀과 토크빌의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역사는 민주국가가 개인 권리와 시민의 자유를 비민주국가보다 더 존중한다는 사실을 입증한다. 민주주의적 정치제도가 결여된 나라에 사는 사람들은 권위주의적 정치제도를 감내해야 한다.
민주주의 전통에서는 과학을 통해 진리를 추구하려는 계몽주의적 천착과 개인 권리의 존중 사이의 잠재적 긴장을 해소하는 유용한 자원을 찾을 수 있다. 진리 추구와 개인 권리라는 두 가치를 구현하는 데는 민주주의 지지자들이 제도화하려 하는 권력관계의 구조화된 불안정성이 유용하다. 민주주의는 현재의 편제에서 불이익을 받는 사람들이 편제의 결함을 제기하고, 어떻게 해서 진리가 호도되는지 밝히고, 편제를 바꾸고자 노력하는 데 필요한 동기와 자원을 모두 가지고 있는 체제다.
민주주의는 ‘영향받는 이해 당사자’ 원칙에 부합하도록 의사결정을 압박하고 반대의 기회를 열어줌으로써, 지배를 최소화하여 발전할 수 있다. 민주주의적 권력 경쟁은 이를 위한 최선의 방법이다. 정치적 주장과 그 반대 주장의 진실성을 공론장에서 검증하도록 보장하고, 인간 자유에의 염원을 가장 잘 구현하는 개인 권리를 보호하고자 한다면, 현재 민주주의보다 더 나은 대안적 정치체제는 존재하지 않는다.
▣ 작가 소개
저자 : 이언 샤피로
남아프리카공화국 출신의 정치철학자로 예일 대학 정치학과 교수이다. 1956년 요하네스버그에서 태어나 16세 때 영국으로 이주해 브리스틀 대학에서 철학과 정치학을 공부한다. 이어 예일 대학 정치학과에 들어가 미국 정치학계의 거장이자 20세기 최고의 민주주의, 다원주의 이론가로 불리는 로버트 달의 제자가 된다. 1983년 「자유주의적 정치사상에서 권리의 진화」라는 박사학위 논문으로 미국정치학회에서 수여하는 레오 스트라우스 상을 수상한다. 1984년부터 예일 대학에서 가르치기 시작해 1992년 정교수, 2005년 스털링 명예교수에 오른다.
샤피로의 주된 관심사는 민주주의와 부의 분배 문제다. 특히 학계의 통념과 달리 참여와 대표성이 아니라 지배의 제한 가능성에서 민주주의의 가치를 추구한다. 그의 『민주적 정의』(1999)는 롤스의 『정의론』 이후 가장 중요한 사회학 저작 중 하나로 평가된다. 『정치의 도덕적 기초』(2003)는 수십년간 예일 대학 대표 명강으로 손꼽히던 샤피로의 정치학 수업 내용을 총정리한 책이다. 그밖의 저서로 『합리적 선택 이론의 병리』(1996. 도널드 그린과 공저), 『인문과학의 현실도피』(2005), 『민주주의 이론의 실세... 계』(2010)가 있고 미국정치·법철학회 연감 『노모스NOMOS』를 8년간 편집하기도 했다.
역자 : 노승영
서울대 영문과를 졸업하고 서울대 대학원 인지과학 협동과정을 수료했다. 컴퓨터 회사에서 번역프로그램을 만들었고 환경 단체에서 일했다. 역서로 피터 싱어 『이렇게 살아가도 괜찮은가』, 잭 골드스톤 『혁명』, 리처드 토이 『수사학』, 토머스 캐스카트 『누구를 구할 것인가?』, 팀 버케드 『새의 감각』, 대니얼 데닛 『직관펌프, 생각을 열다』, 잭 이브라힘 외 『테러리스트의 아들』, 이반 일리치 『그림자 노동』, 조너선 실버타운 『늙는다는 건 우주의 일』, 앤 이니스 대그 『동물에게 배우는 노년의 삶』, 재런 러니어 『미래는 누구의 것인가』 등이 있다.
▣ 주요 목차
서문
머리말
1장 계몽주의 정치학
2장 고전 공리주의
3장 권리와 공리의 종합
4장 마르크스주의
5장 사회계약론
6장 반계몽주의 정치학
7장 민주주의
8장 성숙한 계몽주의에서의 민주주의
주|옮긴이의 말|찾아보기
01. 반품기한
- 단순 변심인 경우 : 상품 수령 후 7일 이내 신청
- 상품 불량/오배송인 경우 : 상품 수령 후 3개월 이내, 혹은 그 사실을 알게 된 이후 30일 이내 반품 신청 가능
02. 반품 배송비
반품사유 | 반품 배송비 부담자 |
---|---|
단순변심 | 고객 부담이며, 최초 배송비를 포함해 왕복 배송비가 발생합니다. 또한, 도서/산간지역이거나 설치 상품을 반품하는 경우에는 배송비가 추가될 수 있습니다. |
고객 부담이 아닙니다. |
03. 배송상태에 따른 환불안내
진행 상태 | 결제완료 | 상품준비중 | 배송지시/배송중/배송완료 |
---|---|---|---|
어떤 상태 | 주문 내역 확인 전 | 상품 발송 준비 중 | 상품이 택배사로 이미 발송 됨 |
환불 | 즉시환불 | 구매취소 의사전달 → 발송중지 → 환불 | 반품회수 → 반품상품 확인 → 환불 |
04. 취소방법
- 결제완료 또는 배송상품은 1:1 문의에 취소신청해 주셔야 합니다.
- 특정 상품의 경우 취소 수수료가 부과될 수 있습니다.
05. 환불시점
결제수단 | 환불시점 | 환불방법 |
---|---|---|
신용카드 | 취소완료 후, 3~5일 내 카드사 승인취소(영업일 기준) | 신용카드 승인취소 |
계좌이체 |
실시간 계좌이체 또는 무통장입금 취소완료 후, 입력하신 환불계좌로 1~2일 내 환불금액 입금(영업일 기준) |
계좌입금 |
휴대폰 결제 |
당일 구매내역 취소시 취소 완료 후, 6시간 이내 승인취소 전월 구매내역 취소시 취소 완료 후, 1~2일 내 환불계좌로 입금(영업일 기준) |
당일취소 : 휴대폰 결제 승인취소 익월취소 : 계좌입금 |
포인트 | 취소 완료 후, 당일 포인트 적립 | 환불 포인트 적립 |
06. 취소반품 불가 사유
- 단순변심으로 인한 반품 시, 배송 완료 후 7일이 지나면 취소/반품 신청이 접수되지 않습니다.
- 주문/제작 상품의 경우, 상품의 제작이 이미 진행된 경우에는 취소가 불가합니다.
- 구성품을 분실하였거나 취급 부주의로 인한 파손/고장/오염된 경우에는 취소/반품이 제한됩니다.
- 제조사의 사정 (신모델 출시 등) 및 부품 가격변동 등에 의해 가격이 변동될 수 있으며, 이로 인한 반품 및 가격보상은 불가합니다.
- 뷰티 상품 이용 시 트러블(알러지, 붉은 반점, 가려움, 따가움)이 발생하는 경우 진료 확인서 및 소견서 등을 증빙하면 환불이 가능하지만 이 경우, 제반 비용은 고객님께서 부담하셔야 합니다.
- 각 상품별로 아래와 같은 사유로 취소/반품이 제한 될 수 있습니다.
상품군 | 취소/반품 불가사유 |
---|---|
의류/잡화/수입명품 | 상품의 택(TAG) 제거/라벨 및 상품 훼손으로 상품의 가치가 현저히 감소된 경우 |
계절상품/식품/화장품 | 고객님의 사용, 시간경과, 일부 소비에 의하여 상품의 가치가 현저히 감소한 경우 |
가전/설치상품 | 전자제품 특성 상, 정품 스티커가 제거되었거나 설치 또는 사용 이후에 단순변심인 경우, 액정화면이 부착된 상품의 전원을 켠 경우 (상품불량으로 인한 교환/반품은 AS센터의 불량 판정을 받아야 합니다.) |
자동차용품 | 상품을 개봉하여 장착한 이후 단순변심의 경우 |
CD/DVD/GAME/BOOK등 | 복제가 가능한 상품의 포장 등을 훼손한 경우 |
상품의 시리얼 넘버 유출로 내장된 소프트웨어의 가치가 감소한 경우 | |
노트북, 테스크탑 PC 등 | 홀로그램 등을 분리, 분실, 훼손하여 상품의 가치가 현저히 감소하여 재판매가 불가할 경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