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 출판사서평
모두들 민주주의에 굶주려 있다
행동하는 철학자 고쿠분 고이치로, 철학에 묻다
민주주의, 무엇이 문제인가?
주권자를 무시하는 정책이 행정에 의해 결정되고 있다
2013년 5월, 일본 도쿄 도 고다이라 시에서 주민투표가 실시되었다. 고다이라 시는 50년 전에 수립된 도로 건설 계획을 작금에 와서 실행하려고 하면서 주민의 의사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이에 주민들이 그 계획을 재검토해달라고 요구하면서 주민의 의사를 묻는 주민투표를 직접 청구하여 실현시킨 것이다. 하지만 주민의 관여를 원치 않던 고다이라 시의 시장은 주민투표조례안이 시의회에서 이미 통과된 후에 별도의 조례 수정안을 상정했다. 그것은 투표율 50% 미만의 경우 투표를 무효로 간주하며 개표도 할 수 없게 하는 것으로, 이를 주민투표 한 달 전에 통과시켜 버렸다. 정작 시장 자신이 재선된 시장선거의 투표율이 37%였던 것을 감안하면, 투표율 50%의 성립요건은 투표를 무효화하려는 행정의 술책이었음이 틀림없다. 결국 투표율 35.17%로 투표는 무효 처리되고 개표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주민투표의 결과는 영구히 알 수 없게 되었고 행정의 정책 결정에 주민의 의사는 전혀 반영되지 않았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2010년 새해 벽두에 도쿄 도는 도로 건설을 위한 주민설명회를 개최했다. 고다이라 시에 거주하는 철학자 고쿠분 고이치로(다카사키 경제대학 교수, 『인간은 언제부터 지루했을까』의 저자)가 우연히 이 설명회에 참석했다가 마치 머리를 얻어맞은 것 같은 충격을 받게 되었다. 도쿄 도 직원은 도로의 필요성을 설명하는 비디오를 보여준 후 질의응답 시간이 되었지만 질문은 1인 1회로 한정하고 질문에 대한 답변은 불성실하게 했다. 재질문도 금지되었다. 즉 일방적으로 설명만 할 뿐이었고 주민의 의견수렴이나 주민과 대화할 생각은 전혀 없다는 입장이었다.
고쿠분 씨는 행정이 일단 정책을 결정하면 주민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주권자를 무시하는 정책이 행정에 의해 결정되고 있는데도 이런 사회가 어떻게 민주주의 사회라고 불리는 것일까? 분명 이런 식으로 일을 해도 민주주의라고 표방할 수 있는 이론적인 속임수가 있다. 그 속임수를 파고들어가지 않으면 이 행정의 횡포를 근본적으로 뒤엎을 수 없다. 고쿠분 씨는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주민투표운동에 참여하는 한편 철학자의 눈으로 이 문제를 분석하게 되었다.
‘반대’만 외치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함께 만드는 제안형 운동으로
먼저 고다이라 시의 주민투표운동에 대해 살펴보자. ‘고다이라 도시계획도로에 주민의 의사를 반영시키는 모임’과 ‘도토리회’는 고다이라 시 중앙공원의 잡목림을 관통하는 도로계획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이 잡목림을 지키기 위해 2008년부터 그곳에서 ‘달밤의 환등회(幻燈會)’를 개최하거나 여름철새·겨울철새를 조사해서 ‘모두의 도토리숲 지도’를 만드는 등 잡목림과 친해질 수 있는 활동을 활발히 전개했다. 주민 직접청구에 의한 투표(‘주민참여에 의해 계획안을 재검토해야 한다’와 ‘계획안의 재검토는 필요 없다’의 두 가지 선택지 중 택일하는 투표)를 하기 위해 서명을 모으고 규정수를 훨씬 상회하는 명단을 제출해 조례안을 만들고 시장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주민투표 시행을 이끌어내었다. 심포지엄을 열어 철학자 고쿠분 씨를 비롯한 일본을 대표하는 인류학자, 사회학자, 예술가 등 각계 인사들이 참여해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가두선전, SNS, 언론 홍보활동을 통해 고다이라 잡목림을 지키기 위한 주민운동은 전국적인 이슈로 발전하기까지 했다. ‘숲의 철학 강의’, 현지를 걷는 모임, 각종 이벤트는 주민투표 이후에도 계속 진행되고 있다.
의회제 민주주의에 있는 단순하지만 중대한 결함
그렇다면 주민투표 이외에 민의를 행정에 반영시키는 방법은 없었을까. 이 책의 저자는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이하, [허핑턴 포스트 재팬] 인용).
“없습니다. 행정 결정에 주민들이 공식적으로 관여하는 제도라고 하는 것은 정말 한정되어 있고 주민투표는 마지막 수단입니다. 게다가 이 주민투표도 법적 구속력은 없어요. 우리는 민주주의 사회에서 살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 허용되는 것은 몇 년에 한 번 국회에 국회의원을 보내는 것, 즉 입법부에 약간 관여하고 있는 것뿐입니다. 실제로 일을 결정하는 것은 행정인데, 행정 결정에 거의 접근할 수 없습니다.”
현재 민주주의의 배경에는 철학이 긴 시간을 들여 만들어 온 이론이 있다. “하지만 의회제 민주주의에 단순한 결함이 있다”라고 고쿠분 씨는 철학자의 눈으로 분석한다.
“지금까지의 정치 이론은 어떻게 하면 의회, 즉 입법부가 민의를 충분히 반영할 수 있을지에 대해 계속 생각해 왔습니다. 그 전제는 의회야말로 일을 결정하는 기관이라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실제로는 행정이 일을 결정하고 있으니까 주민이 행정의 결정과정에 관여하지 않으면 의미가 없습니다. 그런데 행정은 단순한 집행기관이라는 명분이 있기 때문에 주민이 행정의 결정과정에 관여하지 않아도 민주주의를 표방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주권자인 우리가 실제로 주권을 행사하는 것은 몇 년에 한 번 국회의원을 뽑는 일이다. 그렇다면 현재의 민주주의에서 국민은 아주 가끔 부분적으로 입법권에만 관여하고 있을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을 민주주의라고 말하는 것은, 근대의 정치이론 또는 민주주의 이론에 입법부야말로 통치에 관계되는 모든 것을 결정하는 최종적인 결정기관이라고 하는 전제가 있기 때문이다. 즉, 근대의 정치이론은 주권을 입법권으로 정의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국민이 입법부에 어떤 형태로든 관여하고 있다면 그것이 아무리 불충분할지라도 그 사회는 ‘민주주의 사회’라고 불리게 되는 것이다. 저자는 이 전제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한다. 동시에 행정은 단순한 집행기관에 지나지 않는다는 전제에 근본적인 결함이 있다. 왜냐하면 실제로 통치에 관계된 많은 것들 또는 거의 모든 것을 결정하는 것은 행정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국민은 행정에 관여할 수 없다는 것 또한 문제다. 이래서는 도저히 민주주의라고 말할 수 없을 것 같지 않은가.
어떻게 새로운 민주주의를 상상해 나갈 것인가?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 전제에 커다란, 그러나 정말로 단순한 결함이 있는 정치이론을 바탕으로 어떻게 새로운 민주주의를 상상해 나갈 것인가?
이 책의 주장은 단순하다. 입법권만이 아닌 행정권에도 국민이 공적으로 관여할 수 있는 제도를 갖추어 가는 것이다. 이로써 근대정치철학이 만들어 온 정치이론의 결함을 보완할 수가 있다. 주권자인 국민이 실제로 일을 결정하는 행정기관에 접근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행정권에 국민이 공적으로 관여할 수 있는 제도로는 어떤 것을 생각할 수 있을까?
이 책이 제안하는 제도의 하나는 주민투표다. 주민투표는 행정기관이 결정한 정책에 대해 주민이 명확한 의사를 표명하는 수단으로서 유효하다. 지금 현재로서는 법적인 구속력은 없지만 의회와 행정이 그 결과를 완전히 무시하기는 어려우며 상당한 효과를 지닌다.
다음으로 심의회 등 자문기관의 개혁을 들 수 있다. 자문기관은 정치가와 관공서가 어떤 안건에 대해 전문가를 모으고 거기에서 심의된 내용을 기초로 정책결정을 행하는 조직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그곳에 출석하는 자문위원의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도 결론이 보인다고 한다. 따라서 그 조직 구성에는 어떤 형태로든 제한이 가해지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이것은 문제의 성격에 따라 개별 사안을 구체적으로 판단해야 하지만, 주민이나 국민이 반드시 일정 수 참여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이 자문기관을 발전시킨 제도로서 주민과 행정 쌍방이 참여하는 워크숍을 생각할 수 있다. 행정이 결정하고 주민에게 설명하는 것이 아닌 행정과 주민이 함께 생각하는 것이다. 단, 여기에는 조건이 있다. 논의를 잘 진행할 전문가가 필요하다. 이에 조력자(facilitator)로 불리는 전문기능을 가진 사람에게 참여를 요청한다. 주민참여를 위해서는 이러한 전문가가 필요하다. 그것이 제3자 기관에 의해 제공된다면, 주민의 정치참여는 현실로 된다.
마지막으로 공론수렴제도를 들 수 있다. 현재 행정이 무엇을 하려고 할 때에는 공지기간을 설정하고 광범위한 의견을 공모하는 것이 의무화되어 있다. 그러나 어떤 의견이 다수를 차지하더라도 당초의 행정결정이 뒤집어지는 일은 없고 “폭넓은 의견을 모았다”라는 변명을 위한 수단으로 전락했다는 지적이 많다. 특정의견이 일정 수 또는 일정 비율을 차지한 경우에는 해당사안의 재검토를 의무화하는 등, 공론수렴을 유명무실화하지 않는 제도가 요구되고 있다.
의회제 민주주의는 여러 가지 문제가 있다. 그렇지만 의회제도 그 자체를 근본부터 바꾸는 것은 어렵다. 하지만 거기에 다양한 제도를 도입해서 의회제 민주주의를 보완해가는 방법이라면 실현은 어렵지 않다. 제도를 조금씩 늘려가면서 끊임없이 민주주의를 강화시켜 나갈 수 있다. 물론 이제까지 열거한 제도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이후 다양한 제도가 고안될 필요가 있다.
‘다가올 민주주의’란 실천을 요구하는 명령
『다가올 민주주의』는 현재의 민주주의를 돌아보고 이후의 새로운 민주주의를 생각하는, 행동하는 철학자의 실천적 구상이다. 또한 민주주의가 이루어지지 않은 사회를 민주주의 사회라고 부르게 된 근본 원인인 근대정치철학의 단순하고 중대한 결함을 밝혀내 “이 문제에 대답할 수 없다면 내가 하고 있는 학문은 거짓이다”라고 선언한 철학자의 고뇌가 담긴 희망의 메시지이다. 20세기 프랑스의 철학자 자크 데리다는 “지금은 민주주의라는 이름값을 하는 민주주의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민주주의의 실현을 지향하지 않으면 안 된다. 민주주의는 지금도 여전히 다가올 것으로 남아 있다”라고 말했다. 요컨대 민주주의는 항상 실현 직전에 있고, 충분하지 않은 것으로 계속 남아 있다는 것이다. 좀 더 강하게 말하면 민주주의는 항상 다가올 것으로 남아 있으니까 실현되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민주주의를 오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 ‘다가올 민주주의’란 실천을 요구하는 명령이다. 민주주의가 다가올 수 있게 하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 작가 소개
저자 : 고쿠분 고이치로
1974년에 일본 지바 현(千葉縣)에서 태어났다. 도쿄대학 대학원 총합문화연구과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다카사키(高崎) 경제대학 경제학부 준교수로 재직하며 철학을 가르치고 있다.
주요 연구 주제는 스피노자를 비롯한 17세기 철학과 들뢰즈, 푸코, 데리다를 중심으로 한 프랑스 현대사상이다. ‘즐겁고도 진지한’ 공부와 사회운동을 목표로 신문, 텔레비전, 잡지를 통해 적극적으로 발언하는 ‘행동파 철학자’로 활동하고 있다. 저서로는 『스피노자의 방법』, 『인간은 언제부터 지루했을까』(원제: 한가함과 지루함의 윤리학), 『고쿠분 고이치로의 들뢰즈 제대로 읽기』(원제: 들뢰즈의 철학원리), 『철학 선생님과 인생을 이야기하자!』 등이 있다.
역자 : 김윤숙
중앙대학교 경영대를 졸업하고 일본에 건너가 7년 동안 거주하였다. 2010년 한국방송통신대학교에서 교육학을 전공한 후 광주에서 아동복지교사로 지역아동센터에 근무하며 번역 일을 병행하고 있다. 한국번역가협회와 일본(주)바벨 공동주최 ‘국제신인번역’ 장려상(일한부문)을 수상한 바 있다.
▣ 주요 목차
한국어판 서문
글을 시작하며
의회제 민주주의의 결함
입법부가 모든 것을 결정한다는 원칙
행정권에 전혀 관여할 수 없는 현실
행정권에 공적으로 관여할 수 있는 제도란?
철학 하는 사람으로서의 책임
1장 고다이라 시 도로 건설 문제와 주민투표
주민이 오가며 쉴 수 있는 잡목림 숲
머리를 얻어맞은 것 같은 체험
왜 이것을 민주주의라고 우기는 것일까?
반세기 전에 만들어진 도로계획
도로 건설의 이유를 필사적으로 모색하다
“우리는 이제 늙었습니다”
활동을 가로막는, 우뚝 솟은 거대한 벽
마침내 주민투표청구를 결단하다
규정수를 훨씬 초과한 서명
도쿄 최초 주민직접청구에 의한 주민투표조례
놀라운 태도 변화와 투표율 50퍼센트 수정안
투표율 35.17퍼센트로 무효 처리
투표율 50퍼센트 성립요건은 왜 문제인가?
모든 것을 내다보고 한 사업인가신청
2장 주민참여의 가능성과 과제
주민참여에 대한 행정의 강렬한 거부반응
반대를 들이밀지 않는 주민운동
행정이 완고해질 수밖에 없는 이유
주민 측에도 있는 주민운동 알레르기
문제의 해결만을 지향하는 운동
여당 사람들일지라도 함께한다고?
도구로서의 정치가
긍정적 비전이 없으면 오래가지 못한다
철저한 공부로 이론을 탄탄하게
언론과 좋은 관계를 유지해 여론을 형성
머리가 아닌 몸으로 느껴 움직이기 시작하는 운동
인터넷의 위력은 절대적
모두들 민주주의에 굶주려 있다
왜 ‘참여형 민주주의’가 정착되지 않는 것인가?
굶주림과 참을성이 표리일체
실망에 대한 불안은 극복할 수 있다
마음을 움직이는 말
멋진 포스터를 만든 이유
다 함께 정치를 이야기한다는 생각
3장 주권과 입법권의 문제
: 고다이라 시 328번 도로 문제에서 근대정치철학으로
주민뿐만 아니라 의회도 개입하지 않은 도로계획
정치의 문제를 파고들면 ‘적 아니면 동지’
‘다원성이야말로 정치의 조건’
다수와 하나를 연결하는 무리한 행위
‘권위’에 의한 지배는 점점 약해져
통치를 정통화하는 개념으로서의 ‘주권’
‘법’에 의한 지배라고 하는 결정적 선택
홉스의 사회계약론에 있어서의 ‘주권’
주권을 입법권으로 단순화한 루소
의회제 민주주의의 과제
진짜 문제는 무엇이었나?
행정이 전부 결정해도 민주주의라고 불리는 사회
주권이라고 하는 이상(理想)은 불가능한 과제
신체는 두뇌가 말하는 것을 듣지 않는다
4장 민주주의와 제도
: 몇 가지 제안
근본부터 바꾸는 것의 문제점
‘제도가 많을수록 사람은 자유로워진다’
왜 의회의 개선에만 관심을 두는 것일까?
강화재를 더해 간다는 발상
주민의 직접청구에 의한 주민투표
놀랄 만큼 높은 장애물
서명 수를 충족해도 의회가 부결하면 그만
요점은 투표 실시가 필연인가 아닌가 하는 것
아비코 시의 훌륭한 제도설계
외국인과 아이들에게도 투표자격을
의회제 민주주의라는 이름의 반민주주의
주민투표제도에 관한 네 가지 제안
심의회 구성원 선출을 규칙으로 정해야
대화와 토론은 저절로 생기지 않는다
주민참여 워크숍에서 조력자의 역할
포동포동한 체형이 유리
‘이것은 내 아이디어야’라고 느끼는 프로젝트
의도적인 방식을 피하지 않는 것
워크숍에 대한 제안
공론수렴제도의 활용
각각의 쟁점에 맞는 제도를
보증서를 써주는 것 같은 중요한 기능
세심한 주의가 필요한 정치적 결정
5장 다가올 민주주의
: 자크 데리다의 말과 사상
‘민주적이지 않다’와 ‘민주주의가 아니다’의 차이
‘현실감각’에서 멀어져서는 안 된다
민주주의는 실현되고 끝나는 것이 아니다
민주주의는 계속 지향되어야 한다
주민투표와 데리다의 사상
부록 1. 후추카이도 도로 및 6개 도시의 교통량에 대하여
부록 2. 주민직접청구에 의한 주민투표조례연표
글을 마치며
모두들 민주주의에 굶주려 있다
행동하는 철학자 고쿠분 고이치로, 철학에 묻다
민주주의, 무엇이 문제인가?
주권자를 무시하는 정책이 행정에 의해 결정되고 있다
2013년 5월, 일본 도쿄 도 고다이라 시에서 주민투표가 실시되었다. 고다이라 시는 50년 전에 수립된 도로 건설 계획을 작금에 와서 실행하려고 하면서 주민의 의사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이에 주민들이 그 계획을 재검토해달라고 요구하면서 주민의 의사를 묻는 주민투표를 직접 청구하여 실현시킨 것이다. 하지만 주민의 관여를 원치 않던 고다이라 시의 시장은 주민투표조례안이 시의회에서 이미 통과된 후에 별도의 조례 수정안을 상정했다. 그것은 투표율 50% 미만의 경우 투표를 무효로 간주하며 개표도 할 수 없게 하는 것으로, 이를 주민투표 한 달 전에 통과시켜 버렸다. 정작 시장 자신이 재선된 시장선거의 투표율이 37%였던 것을 감안하면, 투표율 50%의 성립요건은 투표를 무효화하려는 행정의 술책이었음이 틀림없다. 결국 투표율 35.17%로 투표는 무효 처리되고 개표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주민투표의 결과는 영구히 알 수 없게 되었고 행정의 정책 결정에 주민의 의사는 전혀 반영되지 않았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2010년 새해 벽두에 도쿄 도는 도로 건설을 위한 주민설명회를 개최했다. 고다이라 시에 거주하는 철학자 고쿠분 고이치로(다카사키 경제대학 교수, 『인간은 언제부터 지루했을까』의 저자)가 우연히 이 설명회에 참석했다가 마치 머리를 얻어맞은 것 같은 충격을 받게 되었다. 도쿄 도 직원은 도로의 필요성을 설명하는 비디오를 보여준 후 질의응답 시간이 되었지만 질문은 1인 1회로 한정하고 질문에 대한 답변은 불성실하게 했다. 재질문도 금지되었다. 즉 일방적으로 설명만 할 뿐이었고 주민의 의견수렴이나 주민과 대화할 생각은 전혀 없다는 입장이었다.
고쿠분 씨는 행정이 일단 정책을 결정하면 주민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주권자를 무시하는 정책이 행정에 의해 결정되고 있는데도 이런 사회가 어떻게 민주주의 사회라고 불리는 것일까? 분명 이런 식으로 일을 해도 민주주의라고 표방할 수 있는 이론적인 속임수가 있다. 그 속임수를 파고들어가지 않으면 이 행정의 횡포를 근본적으로 뒤엎을 수 없다. 고쿠분 씨는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주민투표운동에 참여하는 한편 철학자의 눈으로 이 문제를 분석하게 되었다.
‘반대’만 외치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함께 만드는 제안형 운동으로
먼저 고다이라 시의 주민투표운동에 대해 살펴보자. ‘고다이라 도시계획도로에 주민의 의사를 반영시키는 모임’과 ‘도토리회’는 고다이라 시 중앙공원의 잡목림을 관통하는 도로계획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이 잡목림을 지키기 위해 2008년부터 그곳에서 ‘달밤의 환등회(幻燈會)’를 개최하거나 여름철새·겨울철새를 조사해서 ‘모두의 도토리숲 지도’를 만드는 등 잡목림과 친해질 수 있는 활동을 활발히 전개했다. 주민 직접청구에 의한 투표(‘주민참여에 의해 계획안을 재검토해야 한다’와 ‘계획안의 재검토는 필요 없다’의 두 가지 선택지 중 택일하는 투표)를 하기 위해 서명을 모으고 규정수를 훨씬 상회하는 명단을 제출해 조례안을 만들고 시장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주민투표 시행을 이끌어내었다. 심포지엄을 열어 철학자 고쿠분 씨를 비롯한 일본을 대표하는 인류학자, 사회학자, 예술가 등 각계 인사들이 참여해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가두선전, SNS, 언론 홍보활동을 통해 고다이라 잡목림을 지키기 위한 주민운동은 전국적인 이슈로 발전하기까지 했다. ‘숲의 철학 강의’, 현지를 걷는 모임, 각종 이벤트는 주민투표 이후에도 계속 진행되고 있다.
의회제 민주주의에 있는 단순하지만 중대한 결함
그렇다면 주민투표 이외에 민의를 행정에 반영시키는 방법은 없었을까. 이 책의 저자는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이하, [허핑턴 포스트 재팬] 인용).
“없습니다. 행정 결정에 주민들이 공식적으로 관여하는 제도라고 하는 것은 정말 한정되어 있고 주민투표는 마지막 수단입니다. 게다가 이 주민투표도 법적 구속력은 없어요. 우리는 민주주의 사회에서 살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 허용되는 것은 몇 년에 한 번 국회에 국회의원을 보내는 것, 즉 입법부에 약간 관여하고 있는 것뿐입니다. 실제로 일을 결정하는 것은 행정인데, 행정 결정에 거의 접근할 수 없습니다.”
현재 민주주의의 배경에는 철학이 긴 시간을 들여 만들어 온 이론이 있다. “하지만 의회제 민주주의에 단순한 결함이 있다”라고 고쿠분 씨는 철학자의 눈으로 분석한다.
“지금까지의 정치 이론은 어떻게 하면 의회, 즉 입법부가 민의를 충분히 반영할 수 있을지에 대해 계속 생각해 왔습니다. 그 전제는 의회야말로 일을 결정하는 기관이라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실제로는 행정이 일을 결정하고 있으니까 주민이 행정의 결정과정에 관여하지 않으면 의미가 없습니다. 그런데 행정은 단순한 집행기관이라는 명분이 있기 때문에 주민이 행정의 결정과정에 관여하지 않아도 민주주의를 표방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주권자인 우리가 실제로 주권을 행사하는 것은 몇 년에 한 번 국회의원을 뽑는 일이다. 그렇다면 현재의 민주주의에서 국민은 아주 가끔 부분적으로 입법권에만 관여하고 있을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을 민주주의라고 말하는 것은, 근대의 정치이론 또는 민주주의 이론에 입법부야말로 통치에 관계되는 모든 것을 결정하는 최종적인 결정기관이라고 하는 전제가 있기 때문이다. 즉, 근대의 정치이론은 주권을 입법권으로 정의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국민이 입법부에 어떤 형태로든 관여하고 있다면 그것이 아무리 불충분할지라도 그 사회는 ‘민주주의 사회’라고 불리게 되는 것이다. 저자는 이 전제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한다. 동시에 행정은 단순한 집행기관에 지나지 않는다는 전제에 근본적인 결함이 있다. 왜냐하면 실제로 통치에 관계된 많은 것들 또는 거의 모든 것을 결정하는 것은 행정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국민은 행정에 관여할 수 없다는 것 또한 문제다. 이래서는 도저히 민주주의라고 말할 수 없을 것 같지 않은가.
어떻게 새로운 민주주의를 상상해 나갈 것인가?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 전제에 커다란, 그러나 정말로 단순한 결함이 있는 정치이론을 바탕으로 어떻게 새로운 민주주의를 상상해 나갈 것인가?
이 책의 주장은 단순하다. 입법권만이 아닌 행정권에도 국민이 공적으로 관여할 수 있는 제도를 갖추어 가는 것이다. 이로써 근대정치철학이 만들어 온 정치이론의 결함을 보완할 수가 있다. 주권자인 국민이 실제로 일을 결정하는 행정기관에 접근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행정권에 국민이 공적으로 관여할 수 있는 제도로는 어떤 것을 생각할 수 있을까?
이 책이 제안하는 제도의 하나는 주민투표다. 주민투표는 행정기관이 결정한 정책에 대해 주민이 명확한 의사를 표명하는 수단으로서 유효하다. 지금 현재로서는 법적인 구속력은 없지만 의회와 행정이 그 결과를 완전히 무시하기는 어려우며 상당한 효과를 지닌다.
다음으로 심의회 등 자문기관의 개혁을 들 수 있다. 자문기관은 정치가와 관공서가 어떤 안건에 대해 전문가를 모으고 거기에서 심의된 내용을 기초로 정책결정을 행하는 조직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그곳에 출석하는 자문위원의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도 결론이 보인다고 한다. 따라서 그 조직 구성에는 어떤 형태로든 제한이 가해지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이것은 문제의 성격에 따라 개별 사안을 구체적으로 판단해야 하지만, 주민이나 국민이 반드시 일정 수 참여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이 자문기관을 발전시킨 제도로서 주민과 행정 쌍방이 참여하는 워크숍을 생각할 수 있다. 행정이 결정하고 주민에게 설명하는 것이 아닌 행정과 주민이 함께 생각하는 것이다. 단, 여기에는 조건이 있다. 논의를 잘 진행할 전문가가 필요하다. 이에 조력자(facilitator)로 불리는 전문기능을 가진 사람에게 참여를 요청한다. 주민참여를 위해서는 이러한 전문가가 필요하다. 그것이 제3자 기관에 의해 제공된다면, 주민의 정치참여는 현실로 된다.
마지막으로 공론수렴제도를 들 수 있다. 현재 행정이 무엇을 하려고 할 때에는 공지기간을 설정하고 광범위한 의견을 공모하는 것이 의무화되어 있다. 그러나 어떤 의견이 다수를 차지하더라도 당초의 행정결정이 뒤집어지는 일은 없고 “폭넓은 의견을 모았다”라는 변명을 위한 수단으로 전락했다는 지적이 많다. 특정의견이 일정 수 또는 일정 비율을 차지한 경우에는 해당사안의 재검토를 의무화하는 등, 공론수렴을 유명무실화하지 않는 제도가 요구되고 있다.
의회제 민주주의는 여러 가지 문제가 있다. 그렇지만 의회제도 그 자체를 근본부터 바꾸는 것은 어렵다. 하지만 거기에 다양한 제도를 도입해서 의회제 민주주의를 보완해가는 방법이라면 실현은 어렵지 않다. 제도를 조금씩 늘려가면서 끊임없이 민주주의를 강화시켜 나갈 수 있다. 물론 이제까지 열거한 제도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이후 다양한 제도가 고안될 필요가 있다.
‘다가올 민주주의’란 실천을 요구하는 명령
『다가올 민주주의』는 현재의 민주주의를 돌아보고 이후의 새로운 민주주의를 생각하는, 행동하는 철학자의 실천적 구상이다. 또한 민주주의가 이루어지지 않은 사회를 민주주의 사회라고 부르게 된 근본 원인인 근대정치철학의 단순하고 중대한 결함을 밝혀내 “이 문제에 대답할 수 없다면 내가 하고 있는 학문은 거짓이다”라고 선언한 철학자의 고뇌가 담긴 희망의 메시지이다. 20세기 프랑스의 철학자 자크 데리다는 “지금은 민주주의라는 이름값을 하는 민주주의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민주주의의 실현을 지향하지 않으면 안 된다. 민주주의는 지금도 여전히 다가올 것으로 남아 있다”라고 말했다. 요컨대 민주주의는 항상 실현 직전에 있고, 충분하지 않은 것으로 계속 남아 있다는 것이다. 좀 더 강하게 말하면 민주주의는 항상 다가올 것으로 남아 있으니까 실현되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민주주의를 오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 ‘다가올 민주주의’란 실천을 요구하는 명령이다. 민주주의가 다가올 수 있게 하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 작가 소개
저자 : 고쿠분 고이치로
1974년에 일본 지바 현(千葉縣)에서 태어났다. 도쿄대학 대학원 총합문화연구과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다카사키(高崎) 경제대학 경제학부 준교수로 재직하며 철학을 가르치고 있다.
주요 연구 주제는 스피노자를 비롯한 17세기 철학과 들뢰즈, 푸코, 데리다를 중심으로 한 프랑스 현대사상이다. ‘즐겁고도 진지한’ 공부와 사회운동을 목표로 신문, 텔레비전, 잡지를 통해 적극적으로 발언하는 ‘행동파 철학자’로 활동하고 있다. 저서로는 『스피노자의 방법』, 『인간은 언제부터 지루했을까』(원제: 한가함과 지루함의 윤리학), 『고쿠분 고이치로의 들뢰즈 제대로 읽기』(원제: 들뢰즈의 철학원리), 『철학 선생님과 인생을 이야기하자!』 등이 있다.
역자 : 김윤숙
중앙대학교 경영대를 졸업하고 일본에 건너가 7년 동안 거주하였다. 2010년 한국방송통신대학교에서 교육학을 전공한 후 광주에서 아동복지교사로 지역아동센터에 근무하며 번역 일을 병행하고 있다. 한국번역가협회와 일본(주)바벨 공동주최 ‘국제신인번역’ 장려상(일한부문)을 수상한 바 있다.
▣ 주요 목차
한국어판 서문
글을 시작하며
의회제 민주주의의 결함
입법부가 모든 것을 결정한다는 원칙
행정권에 전혀 관여할 수 없는 현실
행정권에 공적으로 관여할 수 있는 제도란?
철학 하는 사람으로서의 책임
1장 고다이라 시 도로 건설 문제와 주민투표
주민이 오가며 쉴 수 있는 잡목림 숲
머리를 얻어맞은 것 같은 체험
왜 이것을 민주주의라고 우기는 것일까?
반세기 전에 만들어진 도로계획
도로 건설의 이유를 필사적으로 모색하다
“우리는 이제 늙었습니다”
활동을 가로막는, 우뚝 솟은 거대한 벽
마침내 주민투표청구를 결단하다
규정수를 훨씬 초과한 서명
도쿄 최초 주민직접청구에 의한 주민투표조례
놀라운 태도 변화와 투표율 50퍼센트 수정안
투표율 35.17퍼센트로 무효 처리
투표율 50퍼센트 성립요건은 왜 문제인가?
모든 것을 내다보고 한 사업인가신청
2장 주민참여의 가능성과 과제
주민참여에 대한 행정의 강렬한 거부반응
반대를 들이밀지 않는 주민운동
행정이 완고해질 수밖에 없는 이유
주민 측에도 있는 주민운동 알레르기
문제의 해결만을 지향하는 운동
여당 사람들일지라도 함께한다고?
도구로서의 정치가
긍정적 비전이 없으면 오래가지 못한다
철저한 공부로 이론을 탄탄하게
언론과 좋은 관계를 유지해 여론을 형성
머리가 아닌 몸으로 느껴 움직이기 시작하는 운동
인터넷의 위력은 절대적
모두들 민주주의에 굶주려 있다
왜 ‘참여형 민주주의’가 정착되지 않는 것인가?
굶주림과 참을성이 표리일체
실망에 대한 불안은 극복할 수 있다
마음을 움직이는 말
멋진 포스터를 만든 이유
다 함께 정치를 이야기한다는 생각
3장 주권과 입법권의 문제
: 고다이라 시 328번 도로 문제에서 근대정치철학으로
주민뿐만 아니라 의회도 개입하지 않은 도로계획
정치의 문제를 파고들면 ‘적 아니면 동지’
‘다원성이야말로 정치의 조건’
다수와 하나를 연결하는 무리한 행위
‘권위’에 의한 지배는 점점 약해져
통치를 정통화하는 개념으로서의 ‘주권’
‘법’에 의한 지배라고 하는 결정적 선택
홉스의 사회계약론에 있어서의 ‘주권’
주권을 입법권으로 단순화한 루소
의회제 민주주의의 과제
진짜 문제는 무엇이었나?
행정이 전부 결정해도 민주주의라고 불리는 사회
주권이라고 하는 이상(理想)은 불가능한 과제
신체는 두뇌가 말하는 것을 듣지 않는다
4장 민주주의와 제도
: 몇 가지 제안
근본부터 바꾸는 것의 문제점
‘제도가 많을수록 사람은 자유로워진다’
왜 의회의 개선에만 관심을 두는 것일까?
강화재를 더해 간다는 발상
주민의 직접청구에 의한 주민투표
놀랄 만큼 높은 장애물
서명 수를 충족해도 의회가 부결하면 그만
요점은 투표 실시가 필연인가 아닌가 하는 것
아비코 시의 훌륭한 제도설계
외국인과 아이들에게도 투표자격을
의회제 민주주의라는 이름의 반민주주의
주민투표제도에 관한 네 가지 제안
심의회 구성원 선출을 규칙으로 정해야
대화와 토론은 저절로 생기지 않는다
주민참여 워크숍에서 조력자의 역할
포동포동한 체형이 유리
‘이것은 내 아이디어야’라고 느끼는 프로젝트
의도적인 방식을 피하지 않는 것
워크숍에 대한 제안
공론수렴제도의 활용
각각의 쟁점에 맞는 제도를
보증서를 써주는 것 같은 중요한 기능
세심한 주의가 필요한 정치적 결정
5장 다가올 민주주의
: 자크 데리다의 말과 사상
‘민주적이지 않다’와 ‘민주주의가 아니다’의 차이
‘현실감각’에서 멀어져서는 안 된다
민주주의는 실현되고 끝나는 것이 아니다
민주주의는 계속 지향되어야 한다
주민투표와 데리다의 사상
부록 1. 후추카이도 도로 및 6개 도시의 교통량에 대하여
부록 2. 주민직접청구에 의한 주민투표조례연표
글을 마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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