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 출판사서평
보다 인간적인 세상을 꿈꾸며
파시즘에 맞서 싸웠던 벤야민가의 다섯 인물들
그리고 그들 삶을 관통하는 20세기 독일의 뼈아픈 역사
미완의 유작 《아케이드 프로젝트》와 ‘아우라’ 개념으로 오늘날 철학, 미학, 정치학 등의 학계뿐 아니라 작가, 감독, 음악인 등 예술가들에게도 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 사상가 발터 벤야민. 한나 아렌트가 “시인이 아니면서도 시적으로 생각했다”고 감탄했고 테오도르 아도르노가 “마법사” 같다고 했을 정도로 독창적인 언어 사용을 펼쳐 보였고, 정치적으로 첨예한 사유를 보여주었지만 하필이면 20세기 독일에 유대인으로 태어난 탓에 그 천재성을 꽃피워보지 못하고 스러져간 비운의 인물이다. 그런데 그의 가문에는 발터 벤야민 외에도 20세기 독일의 굴곡진 역사를 극적으로 살아낸 인물들이 있다. 공산주의자 의사로 활동하다 나치의 강제수용소에서 학살당한 게오르크(발터의 남동생), 사회학자로서 소외된 여성과 아동의 현실 개선에 몰두했던 도라(발터의 여동생), 동독 법무부 장관으로서 파시즘 청산에 헌신한 힐데(발터의 제수), 평생 가족사와 싸웠고 법학자로서 동독 현실사회주의의 실패 원인을 찾기 위해 고투했던 미하엘(발터의 조카) 등이 그들이다.
빌리 브란트의 연설문 작성자로 활동하기도 했던 독일의 저널리스트 우베-카르스텐 헤예가 쓴 이 책 《벤야민, 세기의 가문》은 1892년 발터 벤야민의 출생에서부터 2000년 미하엘 벤야민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한 세기에 걸친 벤야민 일가의 궤적을 추적한다. 나치의 파시즘과 민족주의적 광기에 벼랑 끝으로 내몰린 상황에서도, 보다 인간적인 세상을 꿈꾸며 저항 정신을 잃지 않았던 그들의 이야기에는 오늘 우리의 무기력한 절망을 묵직하게 뒤흔드는 힘이 있다. 또한 2차 세계대전 이후 동독과 서독으로 나뉘어 사회주의와 자본주의라는 서로 다른 체제 속에서 파시즘과 지난한 싸움을 계속했고 통일 후에는 신나치 극우 단체들 때문에 새로운 문제에 봉착한 독일의 뼈아픈 경험담은 분단과 과거사 청산 문제가 여전히 현재진행형인 지금의 한국 사회에 유효한 사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이 책은 상처와 과오로 얼룩진 역사를 다시 성찰하는 일의 의미를, 당시 살아 숨 쉬었던 희생자 한 사람, 한 사람의 이름을 기억해내고 그들이 어디서 어떤 삶을 살았는지를 복기함으로써 “망각에 대해 봉기”하는 것의 의미를 생각하게 한다. 포르부 시에 있는 발터 벤야민 기념비에는 그의 논문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에 나오는 다음의 문장이 새겨져 있다고 한다. “이름 없는 사람들의 기억은 유명한 사람들의 기억보다 존중받기 어렵다. 그러나 역사의 구조는 이름 없는 자들의 기억에 바쳐진다.”
세기 전환기에 태어나 역사의 폭풍 속에 내던져진
발터 벤야민과 두 동생, 게오르크와 도라
발터(1892~1940)와 게오르크(1895~1942)와 도라(1901~1946) 삼남매는 베를린의 대부르주아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들의 아버지 에밀 벤야민은 미술품과 골동품 업계에 종사한 부유한 상인이었다. 유복하고 호화로운 환경에서 성장한 덕분에 “가난한 사람은 거지들뿐”인 줄 알고 성장한 삼남매의 삶은 1차 세계대전을 계기로 변한다. 그들은 전쟁의 참상과 전후 독일의 모습을 목격하면서 사회 현실과 정치에 눈뜨게 된다.
“나는 어떤 희망도 품을 수 없는 몹시 위험한 순간에 맞서
존재론적 판단으로 저항한다”
《1900년경 베를린의 유년 시절》에서 “아침에 어머니가 하드롤 빵에 나이프로 버터를 바를 때” 나는 소리에 대한 기억을 서술하던 부잣집 도련님 발터 벤야민이 정치에 눈뜬 것은 튀링겐 주의 기숙학교에서 구스타프 비네켄의 교육 이념을 접하면서였다. 그곳에서 교육과 문화 혁신을 위한 “청년운동의 선구자”로 활동한 그는 1차대전 무렵 비네켄 그룹의 전쟁 열광에 동조하지 못하고 결별한다. 그는 천생 글쟁이여서 언어의 힘으로 세상과 맞섰다. 프랑스로 망명한 1933년 이후에는 병약해지고 끼니도 제대로 이을 수 없는 궁핍한 생활이 계속되었는데도 돈이 생기면 대부분 연구를 위한 책과 잡지를 사는 데 써버렸다. 나치의 파리 침공 이후 스페인으로 망명하기 위해 힘겹게 피레네 산맥을 넘을 때도 “목숨보다 더 소중”하게 품고 있었던 것은 다름 아닌 원고가 든 가방이었다. 그렇게 절박하게 쓰였기 때문일까. 그의 역사철학 테제, 에세이, 모스크바 일기는 그의 사후에도 살아남아 68세대 저항운동의 이론적 토대가 되었고 사람들을 길거리로 나가게 만들었다.
“노동 때문이기도 하지만, 잠을 거의 못 자고 제대로 먹지도 못해.
물론 중요한 건 견디는 것이겠지”
형 발터와 달리 게오르크는 처음에는 열렬한 전쟁 지지자였다. 그러나 전쟁터에서 인명 살상과 독가스 살포의 광기를 목도하고는 1918년에 전선에서 돌아온 뒤에는 사회주의자가 된다. 마침 베를린은 1년 전 러시아에서 일어난 10월혁명과 패망의 영향으로 혁명의 소용돌이에 휩싸여 있었다. 공산당에 가입한 게오르크는 베를린에서 가장 가난한 동네인 베딩 지구에서 학교 보건의사이자 소아과 의사로 일하기 시작하고, 그곳에서 ‘성자 게오르크’라고 불릴 만큼 헌신적으로 활동한다. 1933년 3월, 나치가 권력을 잡고 국회의사당 화재 사건으로 공산주의자와 사민주의자들을 잡아들이기 시작했을 때 게오르크 역시 체포된다. 그해 크리스마스에 잠시 석방되지만 공산당 활동을 멈추지 않았다는 이유로 다시 수감되고, 결국 1942년 오스트리아 마우트하우젠 수용소에서 전류가 흐르는 철조망으로 내몰려 살해된다.
이 책 《벤야민, 세기의 가문》에는 게오르크가 아내 힐데와 주고받은 편지들이 실려 있다. 그 편지들 속에서 그는 수용소 생활이 아무리 참혹해도 세상을 바꾸려는 신념을 잃지 않고 아들 미하엘과 아내를 비롯해 주변 사람들에 대한 보살핌을 멈추지 않는다. 자신이 수용소에서 살아 나갈 수 없음을 예감하고 쓴 편지에서는 두려움을 이겨내고 담담하게 남겨질 사람들의 안위만을 걱정하는 그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당신은 이제 우리 아이와 함께,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친구들과 친척들과 함께 완전히 홀로서기 할 방법을 찾아야만 해. 이제 우리가 지난한 문제와 대결해야 한다는 걸 받아들여. 지금부터 내 생각은 하지 말고 당신 혼자서 모든 일에 최종 결정을 내려야 해. 그럴 수밖에 없어. 우리 귀여운 아들 미샤는 서서히 아빠를 잊게 될 거야. 난 우리 아들이 빨리 나를 잊기를 바라. (…) 나의 가장 큰 안식처인 사랑하는 힐데, 난 당신이 운명에 정복당하지 않을 거라 믿어!”
“건강이 좋아져 다시 공부를 할 수 있으면 좋겠다.
지금부터 천천히 준비해서 전쟁이 끝난 뒤 미국에서 일할 수 있기를 바란다”
대학을 나온 여성이 아직 드물던 시절, 도라는 계몽된 부모님 덕분에 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하고 박사학위까지 받을 수 있었다. 게오르크의 진료실에서 영양실조에 시달리는 길거리 아이들과 자주 마주쳤던 도라의 박사논문 주제는 ‘자녀 양육을 중심으로 베를린 기성복 제조 노동자들이 처한 사회적 상황’이었다. 그녀는 노동시간이 일정하지 않고 환기가 제대로 되지 않는 가내수공업 환경이 아이의 성장에 좋지 않다는 것을 간파하고 탁아소와 유치원 설립을 제안하는가 하면, 가내수공업이 생계를 위해 아이들을 노동으로 내몰기 때문에 아동노동을 장려하는 것이나 다름없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또한 출산 후 갓난아기가 젖을 뗄 때까지 어머니들이 휴직할 수 있도록 모성보험을 개발할 것을 제안한다. 그녀의 박사논문을 보면, 지금으로부터 90년 전에 그녀가 얼마나 진보적인 생각을 했는지 알게 된다. 그러나 그녀 역시 1933년 이후 학자로서의 삶을 포기하고 망명길에 오른다. 그리고 병마와 생활고에 시달리다가, 전쟁이 끝나면 미국에 가서 연구 활동을 계속하고 싶다는 희망을 뒤로 한 채 1946년 스위스에서 유방암으로 세상을 뜬다.
20세기 유럽을 파괴한 파시즘에 현실사회주의로 맞섰던
힐데와 미하엘 모자母子
우베-카르스텐 헤예가 《벤야민, 세기의 가문》에서 가장 흥미를 갖고 서술하는 인물은 도라의 친구이자 게오르크의 아내인 ‘아리아인’ 힐데 벤야민(1902~1989)이다. 그녀는 동독의 여성 법무부 장관으로서 현실사회주의 실현과 파시즘 청산에 헌신했지만, 냉전 시대의 프로파간다 전쟁 속에서 서독 언론에 의해 “붉은 힐데”, “피의 단두대”라고 불리며 나치 가담자들을 무자비하게 처형한 잔혹한 인물로 각인되었다. 우베-카르스텐 헤예는 이러한 오인을 바로잡고 그녀의 업적을 정당하게 평가하려 한다. 그리고 어머니에 대한 가혹한 평가에 맞서 싸우며, 마찬가지로 현실사회주의 실현을 위해 분투하고 그 실패 원인을 찾아 고심했던 미하엘의 삶을 통해 분단 전후 독일의 혼란을 보여준다.
“우리는 지난 12년을 이것을 위해 싸웠다. 이제 시작이다”
처녀 적 성이 ‘랑게’인 힐데는 대학에서 금녀의 영역이었던 법학을 전공한 1세대 여성이었다. 친구 도라의 집을 방문했다가 만난 게오르크와 사랑에 빠져 결혼을 하고 베딩 지구에 변호사 사무실을 개업하고 아이를 낳았던 그녀의 삶은 1933년 나치 집권이라는 역사적 사건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어떻게 달라졌을까.
1933년부터 1945년 종전까지 그녀의 삶은 지옥이나 다름없었다. 남편 게오르크는 유대인에 공산주의자라는 이유로 체포되어 강제수용소에서 살해되었고, 아들 미하엘은 나치의 인종법에 의해 ‘혼혈’로 분류되었다. 그녀는 여자 혼자 힘으로 아들을 보호하고 양육하면서, 게오르크는 물론이고 발터와 도라 그리고 수많은 유대인 친구들의 죽음을 속절없이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그러므로 나치 집권 12년이 막을 내린 후 힐데가, 그들이 못다 이룬 꿈, 모든 인류가 평등한 이상 사회 건설의 꿈을 자신의 임무로 받아들였던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종전 후 베를린이 4개국에 의해 분할 점령되자 힐데는 친정 가족과 헤어져 소련 점령 지역으로 이주한다. 그리고 나치 가담 전력이 없는 재판관들로 지방법원을 꾸리는 일을 맡아, 폭격으로 폐허가 된 도시를 동분서주하게 된다. 이후 여성 검사장이자 소련 점령 지역의 사법부 차장을 거쳐 동독 법무부 장관으로 복무하는 동안 그녀는 평생을 한결같이, 사법 개혁을 통해 나치 파시즘을 극복하기 위해 투쟁한다. 그녀에게 동독은 “히틀러 독일에 대한 반파시즘적 답변”이었기 때문이다.
“어떤 사회가 한 세대도 지나기 전에 파시즘을 극복할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놀라운 일일 것이다”
게오르크와 힐데의 아들 미하엘(1932~2000)은 태어나자마자 나치에 ‘일급 혼혈 유대인’으로 분류되어 공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자랐다. 그러나 그에게는 용감한 아버지와 강인한 어머니가 있었다. 이 책 《벤야민, 세기의 가문》에는 강제수용소에서 게오르크가 아들 미하엘에게 보낸 편지들, 힐데와 게오르크가 미하엘의 성장과 양육 문제에 대해 고민하며 주고받은 편지들이 실려 있다. 그 편지들을 보면, 나치가 집권했던 그 12년간이 어린아이에게 얼마나 잔혹했는지, 그럼에도 힐데와 게오르크가 그에게 얼마나 큰 사랑을 쏟았는지 알 수 있다. 종전 후 힐데를 따라 동독에서 성장한 미하엘은 레닌그라드에서 대학 생활을 하고 어머니와 마찬가지로 법률가가 되었고, 모스크바에 연구소를 설립해 ‘국가 지도력의 과학적 구성’이라는 과제에 몰두했다. 그러나 살아생전에 소련의 종말과 동독의 몰락을 목도할 수밖에 없었던 그는 이후 생애 마지막까지, 현실사회주의가 왜 실패했는지, 그럼에도 동독이 남겨준 것은 무엇인지 답을 구하기 위해 고투했다.
“벤야민가에 대한 글을 쓴다는 것은 피의 20세기에 발을 담그는 것을 의미한다. 나는 독일에서의 그들의 삶에 대해, 그들의 성공과 실패가 교차되는 전기를 쓰려고 한다. 그들은 그들이 속해 있던 세상보다 더 합리적이고 인간적인 세상을 원했다. 그들은 정치적으로 좌파가 되었고 나치의 인종차별에 저항했다. 세기 전환기에 태어난 그들은 출생신분과 훗날 얻은 신념으로 인해 거역할 수 없는 운명을 떠안으려 했다.”
(‘들어가는 말’에서) 펼처보기
▣ 작가 소개
저자 : 우베-카르텐 헤예
Uwe-Karseten Heye
1940년에 베를린에서 태어났다. 가수였던 아버지 볼프강 헤예가 징집되자 어머니와 누나와 함께 어머니의 고향인 단치히(지금의 폴란드 그단스크)로 이주했다. 하지만 아버지가 탈영을 시도했다가 붙잡히는 바람에 온 가족이 위험에 처하게 되고, 그때부터 로스토크와 함부르크 등지로 옮겨 다니며 성장했다.
마인츠에서 저널리스트로 사회생활을 시작한 우베-카르스텐 헤예는 빌리 브란트의 연설문 작성자, 게르하르트 슈뢰더 정부의 대변인으로도 활동했고, 독일 공영방송 ARD와 ZDF에서 작가로도 일했다.
그의 가족들이 겪은 도피 생활과 전후 시대에 대한 회상록인 전작 《행운에서 그림자만Vom Gluck nur ein Schatten》은 〈운명의 세월들〉이란 제목으로 영화화되기도 했다.
역자 : 박현용
한양대학교 독어독문학과를 졸업하고 독일 뮌스터 대학에서 수학한 뒤, 한양대학교 대학원에서 프리드리히 슐레겔에 대한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한양대학교에서 독일 문학과 유럽 문화에 대한 강의를 하며 번역 작업을 하고 있다. 옮긴 책으로 《책에 쓰지 않은 이야기: 빅토르 프랑클 회상록》, 《사월의 마녀》, 《축구의 미학》, 《이스탄불은 한편의 동화였다》 등이 있다.
▣ 주요 목차
들어가는 말 | 1. 1900년경의 유년 시절 | 2. 벤야민 일가 | 3. 도라는 어디에… | 4. 망명 시절 | 5. 1940년, 국경에서의 마지막 밤 | 6. 운명에 정복당하지 않은 여인 | 7. 인간이 만든 지옥 | 8. 수용소에서 온 아버지의 편지 | 9. 담장 뒤에서 | 10. 법의 이름으로 | 11. 어머니와 아들 | 12. 두 개의 독일 | 13. 제5의 독일에서 | 14. 이루어진 것은 아직 아무것도 없다 | 나가는 말 | 참고문헌 | 옮긴이의 말 | 인명 찾아보기
보다 인간적인 세상을 꿈꾸며
파시즘에 맞서 싸웠던 벤야민가의 다섯 인물들
그리고 그들 삶을 관통하는 20세기 독일의 뼈아픈 역사
미완의 유작 《아케이드 프로젝트》와 ‘아우라’ 개념으로 오늘날 철학, 미학, 정치학 등의 학계뿐 아니라 작가, 감독, 음악인 등 예술가들에게도 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 사상가 발터 벤야민. 한나 아렌트가 “시인이 아니면서도 시적으로 생각했다”고 감탄했고 테오도르 아도르노가 “마법사” 같다고 했을 정도로 독창적인 언어 사용을 펼쳐 보였고, 정치적으로 첨예한 사유를 보여주었지만 하필이면 20세기 독일에 유대인으로 태어난 탓에 그 천재성을 꽃피워보지 못하고 스러져간 비운의 인물이다. 그런데 그의 가문에는 발터 벤야민 외에도 20세기 독일의 굴곡진 역사를 극적으로 살아낸 인물들이 있다. 공산주의자 의사로 활동하다 나치의 강제수용소에서 학살당한 게오르크(발터의 남동생), 사회학자로서 소외된 여성과 아동의 현실 개선에 몰두했던 도라(발터의 여동생), 동독 법무부 장관으로서 파시즘 청산에 헌신한 힐데(발터의 제수), 평생 가족사와 싸웠고 법학자로서 동독 현실사회주의의 실패 원인을 찾기 위해 고투했던 미하엘(발터의 조카) 등이 그들이다.
빌리 브란트의 연설문 작성자로 활동하기도 했던 독일의 저널리스트 우베-카르스텐 헤예가 쓴 이 책 《벤야민, 세기의 가문》은 1892년 발터 벤야민의 출생에서부터 2000년 미하엘 벤야민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한 세기에 걸친 벤야민 일가의 궤적을 추적한다. 나치의 파시즘과 민족주의적 광기에 벼랑 끝으로 내몰린 상황에서도, 보다 인간적인 세상을 꿈꾸며 저항 정신을 잃지 않았던 그들의 이야기에는 오늘 우리의 무기력한 절망을 묵직하게 뒤흔드는 힘이 있다. 또한 2차 세계대전 이후 동독과 서독으로 나뉘어 사회주의와 자본주의라는 서로 다른 체제 속에서 파시즘과 지난한 싸움을 계속했고 통일 후에는 신나치 극우 단체들 때문에 새로운 문제에 봉착한 독일의 뼈아픈 경험담은 분단과 과거사 청산 문제가 여전히 현재진행형인 지금의 한국 사회에 유효한 사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이 책은 상처와 과오로 얼룩진 역사를 다시 성찰하는 일의 의미를, 당시 살아 숨 쉬었던 희생자 한 사람, 한 사람의 이름을 기억해내고 그들이 어디서 어떤 삶을 살았는지를 복기함으로써 “망각에 대해 봉기”하는 것의 의미를 생각하게 한다. 포르부 시에 있는 발터 벤야민 기념비에는 그의 논문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에 나오는 다음의 문장이 새겨져 있다고 한다. “이름 없는 사람들의 기억은 유명한 사람들의 기억보다 존중받기 어렵다. 그러나 역사의 구조는 이름 없는 자들의 기억에 바쳐진다.”
세기 전환기에 태어나 역사의 폭풍 속에 내던져진
발터 벤야민과 두 동생, 게오르크와 도라
발터(1892~1940)와 게오르크(1895~1942)와 도라(1901~1946) 삼남매는 베를린의 대부르주아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들의 아버지 에밀 벤야민은 미술품과 골동품 업계에 종사한 부유한 상인이었다. 유복하고 호화로운 환경에서 성장한 덕분에 “가난한 사람은 거지들뿐”인 줄 알고 성장한 삼남매의 삶은 1차 세계대전을 계기로 변한다. 그들은 전쟁의 참상과 전후 독일의 모습을 목격하면서 사회 현실과 정치에 눈뜨게 된다.
“나는 어떤 희망도 품을 수 없는 몹시 위험한 순간에 맞서
존재론적 판단으로 저항한다”
《1900년경 베를린의 유년 시절》에서 “아침에 어머니가 하드롤 빵에 나이프로 버터를 바를 때” 나는 소리에 대한 기억을 서술하던 부잣집 도련님 발터 벤야민이 정치에 눈뜬 것은 튀링겐 주의 기숙학교에서 구스타프 비네켄의 교육 이념을 접하면서였다. 그곳에서 교육과 문화 혁신을 위한 “청년운동의 선구자”로 활동한 그는 1차대전 무렵 비네켄 그룹의 전쟁 열광에 동조하지 못하고 결별한다. 그는 천생 글쟁이여서 언어의 힘으로 세상과 맞섰다. 프랑스로 망명한 1933년 이후에는 병약해지고 끼니도 제대로 이을 수 없는 궁핍한 생활이 계속되었는데도 돈이 생기면 대부분 연구를 위한 책과 잡지를 사는 데 써버렸다. 나치의 파리 침공 이후 스페인으로 망명하기 위해 힘겹게 피레네 산맥을 넘을 때도 “목숨보다 더 소중”하게 품고 있었던 것은 다름 아닌 원고가 든 가방이었다. 그렇게 절박하게 쓰였기 때문일까. 그의 역사철학 테제, 에세이, 모스크바 일기는 그의 사후에도 살아남아 68세대 저항운동의 이론적 토대가 되었고 사람들을 길거리로 나가게 만들었다.
“노동 때문이기도 하지만, 잠을 거의 못 자고 제대로 먹지도 못해.
물론 중요한 건 견디는 것이겠지”
형 발터와 달리 게오르크는 처음에는 열렬한 전쟁 지지자였다. 그러나 전쟁터에서 인명 살상과 독가스 살포의 광기를 목도하고는 1918년에 전선에서 돌아온 뒤에는 사회주의자가 된다. 마침 베를린은 1년 전 러시아에서 일어난 10월혁명과 패망의 영향으로 혁명의 소용돌이에 휩싸여 있었다. 공산당에 가입한 게오르크는 베를린에서 가장 가난한 동네인 베딩 지구에서 학교 보건의사이자 소아과 의사로 일하기 시작하고, 그곳에서 ‘성자 게오르크’라고 불릴 만큼 헌신적으로 활동한다. 1933년 3월, 나치가 권력을 잡고 국회의사당 화재 사건으로 공산주의자와 사민주의자들을 잡아들이기 시작했을 때 게오르크 역시 체포된다. 그해 크리스마스에 잠시 석방되지만 공산당 활동을 멈추지 않았다는 이유로 다시 수감되고, 결국 1942년 오스트리아 마우트하우젠 수용소에서 전류가 흐르는 철조망으로 내몰려 살해된다.
이 책 《벤야민, 세기의 가문》에는 게오르크가 아내 힐데와 주고받은 편지들이 실려 있다. 그 편지들 속에서 그는 수용소 생활이 아무리 참혹해도 세상을 바꾸려는 신념을 잃지 않고 아들 미하엘과 아내를 비롯해 주변 사람들에 대한 보살핌을 멈추지 않는다. 자신이 수용소에서 살아 나갈 수 없음을 예감하고 쓴 편지에서는 두려움을 이겨내고 담담하게 남겨질 사람들의 안위만을 걱정하는 그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당신은 이제 우리 아이와 함께,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친구들과 친척들과 함께 완전히 홀로서기 할 방법을 찾아야만 해. 이제 우리가 지난한 문제와 대결해야 한다는 걸 받아들여. 지금부터 내 생각은 하지 말고 당신 혼자서 모든 일에 최종 결정을 내려야 해. 그럴 수밖에 없어. 우리 귀여운 아들 미샤는 서서히 아빠를 잊게 될 거야. 난 우리 아들이 빨리 나를 잊기를 바라. (…) 나의 가장 큰 안식처인 사랑하는 힐데, 난 당신이 운명에 정복당하지 않을 거라 믿어!”
“건강이 좋아져 다시 공부를 할 수 있으면 좋겠다.
지금부터 천천히 준비해서 전쟁이 끝난 뒤 미국에서 일할 수 있기를 바란다”
대학을 나온 여성이 아직 드물던 시절, 도라는 계몽된 부모님 덕분에 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하고 박사학위까지 받을 수 있었다. 게오르크의 진료실에서 영양실조에 시달리는 길거리 아이들과 자주 마주쳤던 도라의 박사논문 주제는 ‘자녀 양육을 중심으로 베를린 기성복 제조 노동자들이 처한 사회적 상황’이었다. 그녀는 노동시간이 일정하지 않고 환기가 제대로 되지 않는 가내수공업 환경이 아이의 성장에 좋지 않다는 것을 간파하고 탁아소와 유치원 설립을 제안하는가 하면, 가내수공업이 생계를 위해 아이들을 노동으로 내몰기 때문에 아동노동을 장려하는 것이나 다름없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또한 출산 후 갓난아기가 젖을 뗄 때까지 어머니들이 휴직할 수 있도록 모성보험을 개발할 것을 제안한다. 그녀의 박사논문을 보면, 지금으로부터 90년 전에 그녀가 얼마나 진보적인 생각을 했는지 알게 된다. 그러나 그녀 역시 1933년 이후 학자로서의 삶을 포기하고 망명길에 오른다. 그리고 병마와 생활고에 시달리다가, 전쟁이 끝나면 미국에 가서 연구 활동을 계속하고 싶다는 희망을 뒤로 한 채 1946년 스위스에서 유방암으로 세상을 뜬다.
20세기 유럽을 파괴한 파시즘에 현실사회주의로 맞섰던
힐데와 미하엘 모자母子
우베-카르스텐 헤예가 《벤야민, 세기의 가문》에서 가장 흥미를 갖고 서술하는 인물은 도라의 친구이자 게오르크의 아내인 ‘아리아인’ 힐데 벤야민(1902~1989)이다. 그녀는 동독의 여성 법무부 장관으로서 현실사회주의 실현과 파시즘 청산에 헌신했지만, 냉전 시대의 프로파간다 전쟁 속에서 서독 언론에 의해 “붉은 힐데”, “피의 단두대”라고 불리며 나치 가담자들을 무자비하게 처형한 잔혹한 인물로 각인되었다. 우베-카르스텐 헤예는 이러한 오인을 바로잡고 그녀의 업적을 정당하게 평가하려 한다. 그리고 어머니에 대한 가혹한 평가에 맞서 싸우며, 마찬가지로 현실사회주의 실현을 위해 분투하고 그 실패 원인을 찾아 고심했던 미하엘의 삶을 통해 분단 전후 독일의 혼란을 보여준다.
“우리는 지난 12년을 이것을 위해 싸웠다. 이제 시작이다”
처녀 적 성이 ‘랑게’인 힐데는 대학에서 금녀의 영역이었던 법학을 전공한 1세대 여성이었다. 친구 도라의 집을 방문했다가 만난 게오르크와 사랑에 빠져 결혼을 하고 베딩 지구에 변호사 사무실을 개업하고 아이를 낳았던 그녀의 삶은 1933년 나치 집권이라는 역사적 사건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어떻게 달라졌을까.
1933년부터 1945년 종전까지 그녀의 삶은 지옥이나 다름없었다. 남편 게오르크는 유대인에 공산주의자라는 이유로 체포되어 강제수용소에서 살해되었고, 아들 미하엘은 나치의 인종법에 의해 ‘혼혈’로 분류되었다. 그녀는 여자 혼자 힘으로 아들을 보호하고 양육하면서, 게오르크는 물론이고 발터와 도라 그리고 수많은 유대인 친구들의 죽음을 속절없이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그러므로 나치 집권 12년이 막을 내린 후 힐데가, 그들이 못다 이룬 꿈, 모든 인류가 평등한 이상 사회 건설의 꿈을 자신의 임무로 받아들였던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종전 후 베를린이 4개국에 의해 분할 점령되자 힐데는 친정 가족과 헤어져 소련 점령 지역으로 이주한다. 그리고 나치 가담 전력이 없는 재판관들로 지방법원을 꾸리는 일을 맡아, 폭격으로 폐허가 된 도시를 동분서주하게 된다. 이후 여성 검사장이자 소련 점령 지역의 사법부 차장을 거쳐 동독 법무부 장관으로 복무하는 동안 그녀는 평생을 한결같이, 사법 개혁을 통해 나치 파시즘을 극복하기 위해 투쟁한다. 그녀에게 동독은 “히틀러 독일에 대한 반파시즘적 답변”이었기 때문이다.
“어떤 사회가 한 세대도 지나기 전에 파시즘을 극복할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놀라운 일일 것이다”
게오르크와 힐데의 아들 미하엘(1932~2000)은 태어나자마자 나치에 ‘일급 혼혈 유대인’으로 분류되어 공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자랐다. 그러나 그에게는 용감한 아버지와 강인한 어머니가 있었다. 이 책 《벤야민, 세기의 가문》에는 강제수용소에서 게오르크가 아들 미하엘에게 보낸 편지들, 힐데와 게오르크가 미하엘의 성장과 양육 문제에 대해 고민하며 주고받은 편지들이 실려 있다. 그 편지들을 보면, 나치가 집권했던 그 12년간이 어린아이에게 얼마나 잔혹했는지, 그럼에도 힐데와 게오르크가 그에게 얼마나 큰 사랑을 쏟았는지 알 수 있다. 종전 후 힐데를 따라 동독에서 성장한 미하엘은 레닌그라드에서 대학 생활을 하고 어머니와 마찬가지로 법률가가 되었고, 모스크바에 연구소를 설립해 ‘국가 지도력의 과학적 구성’이라는 과제에 몰두했다. 그러나 살아생전에 소련의 종말과 동독의 몰락을 목도할 수밖에 없었던 그는 이후 생애 마지막까지, 현실사회주의가 왜 실패했는지, 그럼에도 동독이 남겨준 것은 무엇인지 답을 구하기 위해 고투했다.
“벤야민가에 대한 글을 쓴다는 것은 피의 20세기에 발을 담그는 것을 의미한다. 나는 독일에서의 그들의 삶에 대해, 그들의 성공과 실패가 교차되는 전기를 쓰려고 한다. 그들은 그들이 속해 있던 세상보다 더 합리적이고 인간적인 세상을 원했다. 그들은 정치적으로 좌파가 되었고 나치의 인종차별에 저항했다. 세기 전환기에 태어난 그들은 출생신분과 훗날 얻은 신념으로 인해 거역할 수 없는 운명을 떠안으려 했다.”
(‘들어가는 말’에서) 펼처보기
▣ 작가 소개
저자 : 우베-카르텐 헤예
Uwe-Karseten Heye
1940년에 베를린에서 태어났다. 가수였던 아버지 볼프강 헤예가 징집되자 어머니와 누나와 함께 어머니의 고향인 단치히(지금의 폴란드 그단스크)로 이주했다. 하지만 아버지가 탈영을 시도했다가 붙잡히는 바람에 온 가족이 위험에 처하게 되고, 그때부터 로스토크와 함부르크 등지로 옮겨 다니며 성장했다.
마인츠에서 저널리스트로 사회생활을 시작한 우베-카르스텐 헤예는 빌리 브란트의 연설문 작성자, 게르하르트 슈뢰더 정부의 대변인으로도 활동했고, 독일 공영방송 ARD와 ZDF에서 작가로도 일했다.
그의 가족들이 겪은 도피 생활과 전후 시대에 대한 회상록인 전작 《행운에서 그림자만Vom Gluck nur ein Schatten》은 〈운명의 세월들〉이란 제목으로 영화화되기도 했다.
역자 : 박현용
한양대학교 독어독문학과를 졸업하고 독일 뮌스터 대학에서 수학한 뒤, 한양대학교 대학원에서 프리드리히 슐레겔에 대한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한양대학교에서 독일 문학과 유럽 문화에 대한 강의를 하며 번역 작업을 하고 있다. 옮긴 책으로 《책에 쓰지 않은 이야기: 빅토르 프랑클 회상록》, 《사월의 마녀》, 《축구의 미학》, 《이스탄불은 한편의 동화였다》 등이 있다.
▣ 주요 목차
들어가는 말 | 1. 1900년경의 유년 시절 | 2. 벤야민 일가 | 3. 도라는 어디에… | 4. 망명 시절 | 5. 1940년, 국경에서의 마지막 밤 | 6. 운명에 정복당하지 않은 여인 | 7. 인간이 만든 지옥 | 8. 수용소에서 온 아버지의 편지 | 9. 담장 뒤에서 | 10. 법의 이름으로 | 11. 어머니와 아들 | 12. 두 개의 독일 | 13. 제5의 독일에서 | 14. 이루어진 것은 아직 아무것도 없다 | 나가는 말 | 참고문헌 | 옮긴이의 말 | 인명 찾아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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