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 출판사서평
왜 다시 바울인가?
바울은 기독교사에서 늘 혁신의 아이콘이었다. 서양 중세 사상의 핵심 인물인 아우구스티누스는 바울에 기대 자신의 신학을 정립했고, 종교개혁 지도자 마르틴 루터는 바울의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서 새로운 사상의 돌파구를 찾았다. 20세기 들어 신학자 카를 바르트는 계몽주의와 합리주의에 물든 서양 지성계 앞에 『로마서 주석』을 내놓으며 자유주의 신학과 결별했다. 20세기 후반에는 알랭 바디우, 조르조 아감벤, 슬라보예 지젝 등 종교와 대결했던 좌파 철학자들이 바울을 다시 소환해 재조명했다. 그들은 저마다의 전복적 사유의 틀에 바울을 끌어와 전유하려 했다.
이처럼 바울은 지난 2천년 동안 각기 다른 입장에 따라 다양하게 해석되고 전유되어왔다. 초기 기독교 및 신약성서를 주로 연구해온 저자 김학철(연세대 교수)은 이 책 『아무것도 아닌 것들의 기쁨』에서 바울에 대한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논의를 지양하고, 고대 지중해 세계의 도시들을 누비며 기독교의 초석을 놓은 ‘역사적 바울’에게로 돌아간다. 신약성서를 구성하는 27편 가운데 바울의 이름으로 쓰인 서신이 무려 13편이다. 바울이 헬라어(그리스어)로 남긴 편지들은 로마 제국이 지배하던 1세기 지중해 세계(그레코-로만 세계)라는 매우 특정한 상황에서 특정한 문제를 다룬 것이다. 따라서 바울이 어떤 상황에서 어떤 의도로 그 편지들을 썼는지 알아야만 바울을 제대로 해석할 수 있고, ‘지금 여기’의 삶으로 끌어와 우리 시대의 지혜로 삼을 수 있다.
기독교의 실질적 창시자, 바울
바울은 한 개인의 전향이 세계사의 흐름을 바꾼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 극적인 전환의 순간이 기독교의 탄생으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예수와 거의 동시대를 살았던 바울은 소아시아 다소(지금의 터키 남부) 출신의 디아스포라 유대인으로, ‘역사적 예수’를 직접 대면하지는 못했다. 바울은 예수와 격렬히 대립했던 바리새파에 속해 있었으며, 예수 사후 예수의 제자들이 이끌던 예수 운동을 억압하는 데 앞장섰다. 그러다 예수 공동체를 진압하기 위해 다마스쿠스로 가던 길에 부활한 예수를 만난 뒤, 예수 운동의 박해자에서 열렬한 전도자로 극적인 ‘전향’을 한다. 그때 바울은 예수로부터 ‘이방인을 위한 사도’가 되라는 명령을 받는다.
‘전향’ 후 바울은 지중해 세계를 누비며 전도에 나선다. 오늘날의 그리스와 터키 지역이 주된 활동 무대였고 유대인뿐 아니라 비유대인들도 폭넓게 아울렀다. 예루살렘과 팔레스타인의 유대인 사회 중심으로 전도하던 다른 예수 제자들과는 사뭇 다른 행보였다. 바울은 주요 도시마다 예수를 믿고 따르는 신앙의 공동체 에클레시아(교회)를 세웠고, 자신이 만든 교회가 어느 정도 성숙하면 그곳에 적절한 지도자를 내세운 다음 다른 곳을 전도하기 위해 떠났다.
바울은 각지의 주요 교회들에 편지를 보내 자신의 복음을 전했고, 이 편지들이 초기 기독교 교리의 근간을 이루게 된다. 실제로 그 분량이나 영향력 면에서 바울을 능가하는 신약성서의 저자는 없다. 복음, 교회, 역사, 율법, 구원, 제의, 심판 등과 관련된 기독교 교리는 바울 서신을 기초로 만들어졌다.
살아서 급진적 사랑을 실천하고 가르칠 때는 사방에서 견제를 받았지만, 죽은 뒤 바울의 글과 생애는 신속히 신화화되었다. 1세기 후반 바울 추종자들이 그의 이름을 빌려 ‘제2바울서신’을 남겼을 만큼 그는 권위 있는 인물로 추앙받았다. 오늘날까지 전해지는 바울의 편지는 13편이며 모두 정경正經에 포함되었다. 그중 『로마서』 『고린도전서』 『고린도후서』 『갈라디아서』 『빌립보서』 『데살로니가전서』 『빌레몬서』 7편은 이른바 ‘진정 서신’으로 바울의 저작이다. 반면 『에베소서』 『골로새서』 『데살로니가후서』 『디모데전서』 『디모데후서』 『디도서』 6편은 ‘제2바울서신’으로 분류된다. ‘진정 서신’의 바울은 신앙과 사회에 대해 매우 급진적인 가르침을 펴는 ‘급진적인 바울’이다. 반면 ‘제2바울서신’은 기존 체제와 질서에 편승하는 ‘보수적인’, 심지어 ‘반동적인’ 모습까지 보인다. 하지만 이 모든 서신이 정경에 포함될 만큼 후대에 미친 바울의 영향력은 절대적이었다.
이방인을 위한 사도
바울이 ‘이방인’, 즉 비유대인을 폭넓게 전도할 수 있었던 데에는 그의 출신과 다중언어 사용이 큰 역할을 했다. 바울은 당시 문화와 학문의 도시로 유명했던 다소 출신이면서 동시에 로마의 시민권자였다. 팔레스타인 땅을 떠나 로마 제국 전역에 흩어져 살던 다른 많은 디아스포라 유대인처럼 바울에게는 지중해 세계의 공용어이던 헬라어가 모국어나 다름없었다. 또한 예루살렘에 유학해 랍비 가말리엘 문하에서 수학했던 바울은 히브리어 성서도 읽을 줄 알았고, 팔레스타인의 일상어였던 아람어도 자유롭게 구사했다. 게다가 로마 제국의 라틴어도 어느 정도는 알았을 것이다.
선교 과정에서 바울은 동족인 유대인들에게, 심지어 예수를 따르는 동료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에게까지 견제와 배척을 받았다. 바울이 비유대인과 유대인이 함께 모이는 공동체를 조직하면서 유대 전통과 관습에서 탈피한 듯 보였기에, 보수적인 유대인들은 바울의 선교를 탐탁지 않게 여겼다.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예수의 제자들조차 여전히 유대 전통과 관습, 율법을 고수하고 있었다. 특히 비유대인이 그리스도인이 되고자 한다면 ‘할례’를 받고 진정한 유대인이 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반면 유대 지역에 머물지 않고 지중해 세계 전역에서 전도하던 바울은 유대인과 비유대인 사이를 갈라놓는 유대 전통을 새롭게 해석해야 하는 시대가 왔다고 생각했다. 그는 유대인의 선민의식을 철폐하고, 기존의 율법, 할례 의식, 언약 백성은 이제 무의미하다고 선언했다.
예수가 하느님의 육화肉化라면, 바울은 예수의 현현으로 불리기를 원했다. 그는 예수처럼 돌아다녔다. 예수는 당대의 저명한 유대인 랍비들처럼 한곳에 머물며 제자들이 찾아오기를 기다리지 않았다. 바울은 약 2만 킬로미터를 이동했는데, 예수가 농촌을 중심으로 움직였던 데 반해 바울은 로마 제국의 주요 도시들을 찾아다녔다. 이는 로마의 정복 방식을 모방한 것이었다. 로마 제국은 지역의 핵심 도시를 정복하여, 그 도시가 거느리는 부속 도시들을 손쉽게 손아귀에 넣는 전략을 택했는데, 바울도 지역의 핵심 도시에 예수 공동체를 세우고 그곳을 주변 지역 선교의 거점으로 삼았다. 이를 위해 그는 줄곧 여행했고 전도하는 곳마다 사람들을 모아 신앙의 공동체 ‘에클레시아’를 세웠다.
연대와 평등의 전위적인 공동체, 에클레시아
오늘날 ‘교회’로 번역되는 헬라어 ‘에클레시아’는 본래 고대 그리스의 도시국가에서 온전한 시민권을 가진 시민들이 중요한 의사결정을 할 때 모이는 자발적 모임이었다. 집회와 결사의 자유를 허락하지 않았던 로마 제국 입장에서 이 에클레시아는 정치적 비밀결사로 비칠 수 있어 요주의 대상이었다. 바울이 말하는 에클레시아는 이와 같이 특정 지역에 모이는 특정 모임을 지칭하는 동시에, 예수를 통해 전해진 하느님의 복음을 믿고 따르는 모임을 의미했다.
바울의 에클레시아는 일차적으로 유대인만이 언약 백성이라는 특권 의식을 뛰어넘은 것이었다. 옛날 하느님이 모세를 중재자로 삼아 이집트를 탈출한 히브리인들을 언약 백성인 ‘이스라엘’로 불렀듯, 바울은 이제 하느님이 예수를 중재자로 삼아 예수의 십자가에 나타난 하느님의 뜻을 믿고 따르는 새로운 백성, 곧 ‘새 이스라엘’을 부른다고 믿었다. 그것이 바울의 에클레시아에 담긴 근본 의미였다.
바울의 에클레시아는 당시 고대 사회의 현실을 감안할 때 놀라우리만치 전위적인 공동체였다. 계급과 인종, 남녀의 차별이 없는 유사 가족의 공동체, 연대와 평등의 공동체가 에클레시아였다. 오늘날 교회에서 서로를 형제와 자매로 부르는 전통도 이때 시작되었다.
이런 평등의 정신이 잘 드러나는 편지가 『빌레몬서』다. 한 지역의 교회 지도자인 빌레몬에게 보내는 편지인 『빌레몬서』에서 바울은 한때 빌레몬의 노예였던 오네시모를 돌려보낼 테니 그를 “사랑받는 형제”로 받아들일 것을 빌레몬에게 요청한다. “그는 더이상 종이 아닙니다. 종 이상입니다. 곧 사랑받는 형제입니다. ……그대가 나를 동역자로 여긴다면 나를 맞듯 그를 맞아주십시오.” 이는 사실상 오네시모를 노예 신분에서 해방시켜 달라는 요청이며, 실제로 『골로새서』를 보면 오네시모가 바울의 동역자로 활동하는 모습이 보인다. 주인-노예 관계에서 형제 관계로의 이런 전환은 당시 가부장적 계급사회에서는 혁명적인 일이며, 바울의 에클레시아가 계급사회를 넘어서는 동기애同氣愛의 공동체임을 잘 보여준다.
바울은 흔히 가부장주의를 확고히 한 인물이자 여성 차별주의자로 간주되지만 실상 바울의 에클레시아는 남녀가 함께 참여했고 여성이 주도적인 역할을 하는 경우도 많았다. 당시 로마 제국의 가부장적 정치 및 종교 질서에서 이는 아주 예외적인 일이었다. 대표적인 여성 지도자는 ‘뵈뵈’다. 『로마서』에서 바울은 뵈뵈를 추천하며 “우리의 자매”이자 고린도 남동쪽 항구도시 겐그리아 교회의 “일꾼(디아코노스)”이라고 소개한다. ‘디아코노스’는 초기 교회에서 지도자를 가리키는 공식 칭호였다. 바울도 여러 교회에서 자신이 한 사역을 ‘디아코노스’의 역할로 규정하곤 했다. 또한 바울과 함께 일하기도 했고 로마에서 교회 모임을 이끌던 브리스가와 아굴라 부부의 경우 바울은 대체로 남편인 아굴라보다 아내인 브리스가를 먼저 언급하며 그녀가 교회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했음을 암시했다. 바울은 이들을 비롯해 초기 예수 운동에서 리더십을 발휘했던 여성들을 아무런 거리낌 없이 인정하고 함께 일했다.
연대와 평등의 공동체라는 바울의 신념은 다음과 같은 선언에서 잘 나타난다. “유대 사람도 그리스 사람도 없으며, 종도 자유인도 없으며, 남자와 여자가 없습니다. 여러분 모두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기 때문입니다.”(『갈라디아서』 3:28)
바울의 에클레시아는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통해 스스로를 구분짓는 한편, 그 안에서는 여성들이 지도력을 발휘하고, 종과 노예가 자유인처럼 행동할 뿐 아니라 간혹 해방되기도 했다. 바깥 사회에서처럼 부자와 지체 높은 사람이 명예를 얻고 존경을 받는 것이 아니라 ‘아무것도 아닌 것들’이 존중받는 공동체였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에서 비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을 택하셨으니 곧 잘났다고 하는 것들을 없애시려고 아무것도 아닌 것들을 택하셨습니다.(『고린도전서』 1:28)
▣ 작가 소개
저 : 김학철
연세대학교에서 학사를 마치고, 같은 대학 대학원에 진학했다. 그곳에서 신약성서를 사회학적으로 읽는 법을 배웠다. 사도행전의 바울을 지식사회학으로 분석하여 석사학위(Th. M.)를, 1세기 로마 제국의 통치 선전의 배경에서 마태복음서를 사회정치학적으로 해석하여 박사학위(Ph. D.)를 받았다. 이후 장로회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에서 목사후보생(M. Div.) 과정을 거쳤다.
그간 마태복음서와 관련된 여러 논문과 『손으로 읽는 신약성서』, 『복음서의 교회정치학』(공역), 『예수의 비유』(공역), 『사도 바울』, 『성서, 그토록 오래된 새로운 이야기』등의 저·역서를 펴냈다. 연세대학교 연합신학대학원 신약학 겸임교수를 지낸 후 현재는 연세대학교 학부대학 조교수로 가르친다.
▣ 주요 목차
머리말: 바울, 희망의 행로
1장 길 위의 사도
1. 고대 지중해 세계의 디아스포라 바울
2. 예수 운동을 박해한 ‘바리새인’ 바울
3. 바울의 급격한 전향
4. 예수의 사도 혹은 세상의 쓰레기와 찌꺼기
5. 하늘 시민권자 바울과 해체하는 중심
2장 바울의 복음
1. ‘좋은 소식들’
2. 인간 삶의 고통과 한계
3.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
3장 ‘교회’라는 전위대
1. 유사 가족 ‘에클레시아’
2. 평등과 연대의 공동체
3. 성만찬과 일상의 구원
4장 복음과 에클레시아의 윤리
1. 가부장제를 벗어난 성평등
2. 다문화를 넘어선 사랑의 윤리
3. 적대에 맞선 정의
맺음말: 바울의 유산과 현대
왜 다시 바울인가?
바울은 기독교사에서 늘 혁신의 아이콘이었다. 서양 중세 사상의 핵심 인물인 아우구스티누스는 바울에 기대 자신의 신학을 정립했고, 종교개혁 지도자 마르틴 루터는 바울의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서 새로운 사상의 돌파구를 찾았다. 20세기 들어 신학자 카를 바르트는 계몽주의와 합리주의에 물든 서양 지성계 앞에 『로마서 주석』을 내놓으며 자유주의 신학과 결별했다. 20세기 후반에는 알랭 바디우, 조르조 아감벤, 슬라보예 지젝 등 종교와 대결했던 좌파 철학자들이 바울을 다시 소환해 재조명했다. 그들은 저마다의 전복적 사유의 틀에 바울을 끌어와 전유하려 했다.
이처럼 바울은 지난 2천년 동안 각기 다른 입장에 따라 다양하게 해석되고 전유되어왔다. 초기 기독교 및 신약성서를 주로 연구해온 저자 김학철(연세대 교수)은 이 책 『아무것도 아닌 것들의 기쁨』에서 바울에 대한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논의를 지양하고, 고대 지중해 세계의 도시들을 누비며 기독교의 초석을 놓은 ‘역사적 바울’에게로 돌아간다. 신약성서를 구성하는 27편 가운데 바울의 이름으로 쓰인 서신이 무려 13편이다. 바울이 헬라어(그리스어)로 남긴 편지들은 로마 제국이 지배하던 1세기 지중해 세계(그레코-로만 세계)라는 매우 특정한 상황에서 특정한 문제를 다룬 것이다. 따라서 바울이 어떤 상황에서 어떤 의도로 그 편지들을 썼는지 알아야만 바울을 제대로 해석할 수 있고, ‘지금 여기’의 삶으로 끌어와 우리 시대의 지혜로 삼을 수 있다.
기독교의 실질적 창시자, 바울
바울은 한 개인의 전향이 세계사의 흐름을 바꾼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 극적인 전환의 순간이 기독교의 탄생으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예수와 거의 동시대를 살았던 바울은 소아시아 다소(지금의 터키 남부) 출신의 디아스포라 유대인으로, ‘역사적 예수’를 직접 대면하지는 못했다. 바울은 예수와 격렬히 대립했던 바리새파에 속해 있었으며, 예수 사후 예수의 제자들이 이끌던 예수 운동을 억압하는 데 앞장섰다. 그러다 예수 공동체를 진압하기 위해 다마스쿠스로 가던 길에 부활한 예수를 만난 뒤, 예수 운동의 박해자에서 열렬한 전도자로 극적인 ‘전향’을 한다. 그때 바울은 예수로부터 ‘이방인을 위한 사도’가 되라는 명령을 받는다.
‘전향’ 후 바울은 지중해 세계를 누비며 전도에 나선다. 오늘날의 그리스와 터키 지역이 주된 활동 무대였고 유대인뿐 아니라 비유대인들도 폭넓게 아울렀다. 예루살렘과 팔레스타인의 유대인 사회 중심으로 전도하던 다른 예수 제자들과는 사뭇 다른 행보였다. 바울은 주요 도시마다 예수를 믿고 따르는 신앙의 공동체 에클레시아(교회)를 세웠고, 자신이 만든 교회가 어느 정도 성숙하면 그곳에 적절한 지도자를 내세운 다음 다른 곳을 전도하기 위해 떠났다.
바울은 각지의 주요 교회들에 편지를 보내 자신의 복음을 전했고, 이 편지들이 초기 기독교 교리의 근간을 이루게 된다. 실제로 그 분량이나 영향력 면에서 바울을 능가하는 신약성서의 저자는 없다. 복음, 교회, 역사, 율법, 구원, 제의, 심판 등과 관련된 기독교 교리는 바울 서신을 기초로 만들어졌다.
살아서 급진적 사랑을 실천하고 가르칠 때는 사방에서 견제를 받았지만, 죽은 뒤 바울의 글과 생애는 신속히 신화화되었다. 1세기 후반 바울 추종자들이 그의 이름을 빌려 ‘제2바울서신’을 남겼을 만큼 그는 권위 있는 인물로 추앙받았다. 오늘날까지 전해지는 바울의 편지는 13편이며 모두 정경正經에 포함되었다. 그중 『로마서』 『고린도전서』 『고린도후서』 『갈라디아서』 『빌립보서』 『데살로니가전서』 『빌레몬서』 7편은 이른바 ‘진정 서신’으로 바울의 저작이다. 반면 『에베소서』 『골로새서』 『데살로니가후서』 『디모데전서』 『디모데후서』 『디도서』 6편은 ‘제2바울서신’으로 분류된다. ‘진정 서신’의 바울은 신앙과 사회에 대해 매우 급진적인 가르침을 펴는 ‘급진적인 바울’이다. 반면 ‘제2바울서신’은 기존 체제와 질서에 편승하는 ‘보수적인’, 심지어 ‘반동적인’ 모습까지 보인다. 하지만 이 모든 서신이 정경에 포함될 만큼 후대에 미친 바울의 영향력은 절대적이었다.
이방인을 위한 사도
바울이 ‘이방인’, 즉 비유대인을 폭넓게 전도할 수 있었던 데에는 그의 출신과 다중언어 사용이 큰 역할을 했다. 바울은 당시 문화와 학문의 도시로 유명했던 다소 출신이면서 동시에 로마의 시민권자였다. 팔레스타인 땅을 떠나 로마 제국 전역에 흩어져 살던 다른 많은 디아스포라 유대인처럼 바울에게는 지중해 세계의 공용어이던 헬라어가 모국어나 다름없었다. 또한 예루살렘에 유학해 랍비 가말리엘 문하에서 수학했던 바울은 히브리어 성서도 읽을 줄 알았고, 팔레스타인의 일상어였던 아람어도 자유롭게 구사했다. 게다가 로마 제국의 라틴어도 어느 정도는 알았을 것이다.
선교 과정에서 바울은 동족인 유대인들에게, 심지어 예수를 따르는 동료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에게까지 견제와 배척을 받았다. 바울이 비유대인과 유대인이 함께 모이는 공동체를 조직하면서 유대 전통과 관습에서 탈피한 듯 보였기에, 보수적인 유대인들은 바울의 선교를 탐탁지 않게 여겼다.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예수의 제자들조차 여전히 유대 전통과 관습, 율법을 고수하고 있었다. 특히 비유대인이 그리스도인이 되고자 한다면 ‘할례’를 받고 진정한 유대인이 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반면 유대 지역에 머물지 않고 지중해 세계 전역에서 전도하던 바울은 유대인과 비유대인 사이를 갈라놓는 유대 전통을 새롭게 해석해야 하는 시대가 왔다고 생각했다. 그는 유대인의 선민의식을 철폐하고, 기존의 율법, 할례 의식, 언약 백성은 이제 무의미하다고 선언했다.
예수가 하느님의 육화肉化라면, 바울은 예수의 현현으로 불리기를 원했다. 그는 예수처럼 돌아다녔다. 예수는 당대의 저명한 유대인 랍비들처럼 한곳에 머물며 제자들이 찾아오기를 기다리지 않았다. 바울은 약 2만 킬로미터를 이동했는데, 예수가 농촌을 중심으로 움직였던 데 반해 바울은 로마 제국의 주요 도시들을 찾아다녔다. 이는 로마의 정복 방식을 모방한 것이었다. 로마 제국은 지역의 핵심 도시를 정복하여, 그 도시가 거느리는 부속 도시들을 손쉽게 손아귀에 넣는 전략을 택했는데, 바울도 지역의 핵심 도시에 예수 공동체를 세우고 그곳을 주변 지역 선교의 거점으로 삼았다. 이를 위해 그는 줄곧 여행했고 전도하는 곳마다 사람들을 모아 신앙의 공동체 ‘에클레시아’를 세웠다.
연대와 평등의 전위적인 공동체, 에클레시아
오늘날 ‘교회’로 번역되는 헬라어 ‘에클레시아’는 본래 고대 그리스의 도시국가에서 온전한 시민권을 가진 시민들이 중요한 의사결정을 할 때 모이는 자발적 모임이었다. 집회와 결사의 자유를 허락하지 않았던 로마 제국 입장에서 이 에클레시아는 정치적 비밀결사로 비칠 수 있어 요주의 대상이었다. 바울이 말하는 에클레시아는 이와 같이 특정 지역에 모이는 특정 모임을 지칭하는 동시에, 예수를 통해 전해진 하느님의 복음을 믿고 따르는 모임을 의미했다.
바울의 에클레시아는 일차적으로 유대인만이 언약 백성이라는 특권 의식을 뛰어넘은 것이었다. 옛날 하느님이 모세를 중재자로 삼아 이집트를 탈출한 히브리인들을 언약 백성인 ‘이스라엘’로 불렀듯, 바울은 이제 하느님이 예수를 중재자로 삼아 예수의 십자가에 나타난 하느님의 뜻을 믿고 따르는 새로운 백성, 곧 ‘새 이스라엘’을 부른다고 믿었다. 그것이 바울의 에클레시아에 담긴 근본 의미였다.
바울의 에클레시아는 당시 고대 사회의 현실을 감안할 때 놀라우리만치 전위적인 공동체였다. 계급과 인종, 남녀의 차별이 없는 유사 가족의 공동체, 연대와 평등의 공동체가 에클레시아였다. 오늘날 교회에서 서로를 형제와 자매로 부르는 전통도 이때 시작되었다.
이런 평등의 정신이 잘 드러나는 편지가 『빌레몬서』다. 한 지역의 교회 지도자인 빌레몬에게 보내는 편지인 『빌레몬서』에서 바울은 한때 빌레몬의 노예였던 오네시모를 돌려보낼 테니 그를 “사랑받는 형제”로 받아들일 것을 빌레몬에게 요청한다. “그는 더이상 종이 아닙니다. 종 이상입니다. 곧 사랑받는 형제입니다. ……그대가 나를 동역자로 여긴다면 나를 맞듯 그를 맞아주십시오.” 이는 사실상 오네시모를 노예 신분에서 해방시켜 달라는 요청이며, 실제로 『골로새서』를 보면 오네시모가 바울의 동역자로 활동하는 모습이 보인다. 주인-노예 관계에서 형제 관계로의 이런 전환은 당시 가부장적 계급사회에서는 혁명적인 일이며, 바울의 에클레시아가 계급사회를 넘어서는 동기애同氣愛의 공동체임을 잘 보여준다.
바울은 흔히 가부장주의를 확고히 한 인물이자 여성 차별주의자로 간주되지만 실상 바울의 에클레시아는 남녀가 함께 참여했고 여성이 주도적인 역할을 하는 경우도 많았다. 당시 로마 제국의 가부장적 정치 및 종교 질서에서 이는 아주 예외적인 일이었다. 대표적인 여성 지도자는 ‘뵈뵈’다. 『로마서』에서 바울은 뵈뵈를 추천하며 “우리의 자매”이자 고린도 남동쪽 항구도시 겐그리아 교회의 “일꾼(디아코노스)”이라고 소개한다. ‘디아코노스’는 초기 교회에서 지도자를 가리키는 공식 칭호였다. 바울도 여러 교회에서 자신이 한 사역을 ‘디아코노스’의 역할로 규정하곤 했다. 또한 바울과 함께 일하기도 했고 로마에서 교회 모임을 이끌던 브리스가와 아굴라 부부의 경우 바울은 대체로 남편인 아굴라보다 아내인 브리스가를 먼저 언급하며 그녀가 교회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했음을 암시했다. 바울은 이들을 비롯해 초기 예수 운동에서 리더십을 발휘했던 여성들을 아무런 거리낌 없이 인정하고 함께 일했다.
연대와 평등의 공동체라는 바울의 신념은 다음과 같은 선언에서 잘 나타난다. “유대 사람도 그리스 사람도 없으며, 종도 자유인도 없으며, 남자와 여자가 없습니다. 여러분 모두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기 때문입니다.”(『갈라디아서』 3:28)
바울의 에클레시아는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통해 스스로를 구분짓는 한편, 그 안에서는 여성들이 지도력을 발휘하고, 종과 노예가 자유인처럼 행동할 뿐 아니라 간혹 해방되기도 했다. 바깥 사회에서처럼 부자와 지체 높은 사람이 명예를 얻고 존경을 받는 것이 아니라 ‘아무것도 아닌 것들’이 존중받는 공동체였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에서 비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을 택하셨으니 곧 잘났다고 하는 것들을 없애시려고 아무것도 아닌 것들을 택하셨습니다.(『고린도전서』 1:28)
▣ 작가 소개
저 : 김학철
연세대학교에서 학사를 마치고, 같은 대학 대학원에 진학했다. 그곳에서 신약성서를 사회학적으로 읽는 법을 배웠다. 사도행전의 바울을 지식사회학으로 분석하여 석사학위(Th. M.)를, 1세기 로마 제국의 통치 선전의 배경에서 마태복음서를 사회정치학적으로 해석하여 박사학위(Ph. D.)를 받았다. 이후 장로회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에서 목사후보생(M. Div.) 과정을 거쳤다.
그간 마태복음서와 관련된 여러 논문과 『손으로 읽는 신약성서』, 『복음서의 교회정치학』(공역), 『예수의 비유』(공역), 『사도 바울』, 『성서, 그토록 오래된 새로운 이야기』등의 저·역서를 펴냈다. 연세대학교 연합신학대학원 신약학 겸임교수를 지낸 후 현재는 연세대학교 학부대학 조교수로 가르친다.
▣ 주요 목차
머리말: 바울, 희망의 행로
1장 길 위의 사도
1. 고대 지중해 세계의 디아스포라 바울
2. 예수 운동을 박해한 ‘바리새인’ 바울
3. 바울의 급격한 전향
4. 예수의 사도 혹은 세상의 쓰레기와 찌꺼기
5. 하늘 시민권자 바울과 해체하는 중심
2장 바울의 복음
1. ‘좋은 소식들’
2. 인간 삶의 고통과 한계
3.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
3장 ‘교회’라는 전위대
1. 유사 가족 ‘에클레시아’
2. 평등과 연대의 공동체
3. 성만찬과 일상의 구원
4장 복음과 에클레시아의 윤리
1. 가부장제를 벗어난 성평등
2. 다문화를 넘어선 사랑의 윤리
3. 적대에 맞선 정의
맺음말: 바울의 유산과 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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