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 출판사서평
율곡과 선조가 겪었던 긴장에 ‘요순’이 등장하는 까닭은?
선조 초반의 정치상황은 어떠했는가? 명종의 죽음과 함께 선조가 등극했고, 윤원형으로 대표되던 외척 권신들이 몰락했다. 선조가 이황, 이항, 조식 등을 불러내면서 새로운 정치에 대한 기대 또한 높았다. 율곡은 경연에서 기회가 있을 때마다 선조에게 ‘좋은 정치’를 행할 것을 촉구하고 이를 실현하기 위한 개혁 방안을 올렸다.『경연일기』의 초반, 율곡의 충언과 비전에 대해 선조는 율곡이 올리는 옳지만 싫은 소리를 억누르지 않고 침묵으로나마 인정한다.
하지만 율곡의 기대와 달리 선조의 망설임은 더해가고 번번이 옛 규례를 고치기 어렵다는 핑계를 대거나, “나는 덕이 없는 데다 다스리기도 어려운 때를 만나 큰일을 하기 어렵다”는 말을 되풀이한다. 율곡은 선조의 이런 태도를 그냥 넘어가지 않았다. “주상께서는 ‘좋은 정치를 할 능력이 없다’고 하시나, 신은 믿지 아니합니다. 지금 전하께서 여색에 깊이 현혹되셨습니까. 음악을 좋아하십니까. 술을 즐기십니까. 말 타기와 사냥을 좋아하십니까.”라며 좋은 정치가 이뤄지지 못하는 것은 공부가 부족하고 의지가 없기 때문이라는 점을 적시하고, 스스로 능력이 부족하다면 능력 있는 신하를 기용하여 일을 맡기면 될 것이라고 선조를 다그친다.
선조가 20세가 되던 해(선조 4) 4월 율곡은 “이황이 죽고 중망이 노수신에게 쏠려 있으나, 상은 은총만 베풀 뿐 국사를 같이 다스릴 뜻은 없어, 수신의 의견을 대부분 채택하지 않았다.”고 아쉬워했다. 이듬해 8월 기대승이 벼슬을 버리고 낙향할 때도 “상이 중히 돌아보는 마음이 없어 고향으로 갔다”고 판단했다. 선조 8년 율곡은 “예전에 맹자가 제 선왕에게 ‘사방 국경 안이 다스려지지 않았으면 어찌 하겠습니까?’ 하고 묻자, 왕이 좌우를 돌아보고 다른 말을 하였는데 주자는 그가 큰일을 할 수 없다고 비판하였습니다.”라고 하며, “지금도 나라 안이 다스려지지 않았으니, 전하께서는 어찌하시렵니까?”라고 말했다. 제 선왕처럼 선조 역시 답하지 않았다.
선조와 사림의 갈등이 을사위훈 삭제 문제와 선조의 생부 덕흥군 추숭을 둘러싸고 깊어간다. 율곡은 덕흥군 추숭을 추진하던 임기가 사간원의 탄핵을 받았음에도 죄를 주지 않은 이유가, 선조가 사류를 싫어하였기 때문이라고 단정한다. 그리고 “주상의 마음이 이러하니, 어찌 치세를 바랄 도리가 있겠는가?”라고 실망한다. 실망은 정언지를 충청 감사에 임명할 때 또 이어졌다. 율곡은 선조가 무능한 정언지를 탁용하여 사류들이 시정의 잘잘못을 말하지 못하도록 길들이려는 처사로 보았다.
『경연일기』의 처음부터 끝까지 관통하는 율곡의 ‘직간’과 선조의 ‘침묵’이란 긴장 관계를 통상적인 정치영역에서 명령과 복종이란 위계적 종속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과연 율곡이 『경연일기』를 통해 전하고자 한 사상과 경세관은 무엇인가? 이 책을 번역하고 정본화를 시도한 오항녕 교수는 『경연일기』를 읽는 관전 포인트에 대해 첫째는 상하(上下)의 관계, 즉 권력 문제이고, 둘째는 그 권력을 통해서 사회의 삶을 어떻게 조직, 경영할 것인가 즉 경세론의 측면에서 일독하기를 권한다. 그는 “율곡이 ‘임금과 신하의 교류와 소통’을 강조한 핵심은 현실 정치권력에서 나타나는 비대칭적 위계를 ‘요순’이란 성인 모델을 통해 보편적 가치를 지닌 대칭성으로 바꾸고, 이를 경세론의 구체성 속에서 실현하는 방식”으로 설명한다. 다시 말해 율곡과 사림들은 인(仁)이라는 보편적 가치를 왕에게 요구하며 기대하는 것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떠나겠다고 협박(?)을 하고, 선조는 이를 강제적인 명령과 복종으로 억누르지 않고 침묵으로나마 지지하는 양상을 보인다는 것이다. 가칭 ‘요순담론’이라는 이 기본틀이 오항녕 교수는 이때에 만들어지고 조선 후기 사회를 이끌어간 동력의 하나라고 한다. 그리고 그 공간이 경연이었다.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당시 조정의 풍토. 텔레비전을 보면 국무위원들은 열심히 대통령의 말을 받아 적는데 막상 뉴스를 통해 확인하는 대통령의 말에는 받아 적을 만한 내용이 거의 없는 현재의 정치. 오항녕 교수는 정말 율곡 때와 대비된다며 이 대비야말로 역사학의 과제라 한다.
율곡의 경세론, 소통,화합,민생을 위한 정치란 무엇인가
율곡이 실현하고자 한 요순 방식의 ‘교류와 소통’이 어떻게 민생을 위한 경세론으로 이어지는지 『경연일기』는 펼쳐낸다. 퇴계 이황에게 삶의 화두이자 과제는 조광조 등 사화(士禍)를 당한 명현들의 복권이었다. 사화의 시대를 살면서 젊은 사림을 키우고 시대를 견딜 학문을 이룩하는 데 진력하였다. ‘요순 담론’은 정암 조광조 이래 조정이 구현해야 할 모범으로 열망했지만 조선의 현실에서 구현할 제도적 방법을 기획하기에는 때가 이르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율곡에 와서는 달랐다. 율곡의 화두는 사림 정치를 통해 사회의 삶을 어떻게 나아지게 할 것인가? 즉 경세론에 가 있었다. 실제 율곡의 『경연일기』는 경전 공부보다는 국가 정책, 인재 등용, 시사에 따른 정치적 판단 등 정치활동의 내용들로 가득 채워져 있다.
경세론의 출발은 간단했다. “군주는 다 가졌으므로 가지면 안 된다.”였다. 1573년(선조 6) 율곡은 “요즘 대간에서 계달하는 것이 궁중이나 내수사의 일에 관한 사안이면 주상께서 고집스레 거부하시므로 신하들이 전하께서 사심이 있느냐 의심하게 되니 어디서 본답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선조 7년의 ‘황랍 사건’도 마찬가지의 문제였다. 율곡은 이 무렵 향약 실시를 거두게 한다. 물론 율곡도 향약이 만민을 바르게 하는 법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백성을 기르는 것을 먼저 할 것이고, 백성을 가르치는 것은 뒤에 해야 할 것이라고 판단했다. 급한 민생의 고통을 풀어야 향약이 가능하다고 보았던 것이다. 이때 율곡의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폐해는 공납제의 문란이었다. 선조 7년 2월 율곡은 “조종의 법을 모조리 변경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공안(貢案) 같은 것은 연산군이 첨가하여 제정한 것이요 조종의 법이 아닙니다. 신이 개혁하기를 좋아하는 것이 아니고, 민폐를 구제하자는 것입니다.”라며 공납문제의 대변통의 논의를 꺼낸다. 단순이 공물을 줄이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세제 전반을 뜯어고치는 것이 율곡의 착상이었다. 이 문제는 후일 대동법으로 이어진다.
율곡의 『경연일기』에는 지방제도 개혁 논의, 군역의 폐해에 따른 군적 정리 문제 등 국가 운영과 관련한 정책의 설정과 그 타당성에 대한 검토가 어떻게 행해지고, 의사결정이 이루어졌는지 그 내용이 고스란히 담겨 조선 정치의 생생한 현장을 체험해볼 수 있는 좋은 텍스트라 할 수 있는 것이다.
100여명에 대한 신랄하면서도 엄격한 인물평, 율곡이 생각한 좋은 위정자의 모습은 무엇인가?
율곡이 일기를 쓴 이 시기는 조선 역사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사건과 인물이 출현한 때이다. 사화를 거치며 사림이 본격적으로 정계에 진출했으며, 동서분당의 기미가 시작되는 등 향후 조선 정치의 향방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시기였다. 한국사 통틀어 역사의 무대에 이만큼의 인물이 대거 등장한 시기가 있을까? 율곡은『경연일기』에 23명의 인물에 대한 졸기(卒記, 압축적인 전기)를 남겼다. 그리고 일기와 근안(謹按, 본문 번역어 ‘율곡 생각’) 곳곳에 100여명에 가까운 인물평을 적고 있는데, 신랄하면서도 엄격한 이들에 대한 기록은 당시의 정치상황을 일목요연하게 살펴볼 수 있게 하며 율곡의 인간관과 정치관도 이해할 수 있게 한다.
퇴계 이황이 조정의 부름에 끝내 응하지 않은 것에 대해 아쉬운 마음이 있었으나 그의 선비로서의 처신과 학문의 깊이를 높이 평가하며, 특히 조광조와 이황을 비교하여 “이황은 당세 유학의 종주로 조광조 뒤로는 그에 비할 사람이 없었다. 이황의 재주와 국량은 조광조를 따르지 못하나, 의리를 깊이 연구하여 정미한 경지에 이른 것은 조광조가 그를 따르지 못할 것이다.”라고 하여, 학문의 경지에서는 이황이 조광조보다 낫다고 하였다. 한편 조광조의 추증에 부쳐서는, 조광조가 중종반정으로 출사하게 된 과정과 이후 기묘사화로 축출되기까지의 과정을 서술하고는, 뒤이어 조광조가 경세제민의 재주를 가졌으나 학문이 미처 대성하기 전에 갑자기 요로에 올라 뜻을 이루지 못한 것을 아쉬워하였다. 그러나 율곡은 조선에서 성리의 학문이 있는 줄을 알게 된 것은 모두 조광조의 힘이라고 치하하였다. 한편 문묘에 종사되기도 한 이언적에 대해서는 을사사화 때 직언으로 사림을 구원하지 못한 일을 두고 절개가 없는 인물이라고 혹평하였다.
그렇다면, 함께 조정에서 활동한 현직 동료에 대한 율곡의 생각은 어땠을까? 기대승의 졸기 중 일부를 보면 “학문은 변론이 박식하고 원대했지만 마음을 다잡고 실천하는 공부가 없었다. 또 남을 이기기를 좋아하는 병통이 있어 남이 자기에게 순종하는 것을 좋아하는 까닭에 지조 있는 선비는 어울리지 않았고 아첨하는 사람이 많이 따랐다.” 유희춘에 대해서는 “박람강기하여 책이나 역사를 읽으면 다 외웠다. 그러나 경세의 재주와 곧은 말을 하는 절조가 부족하여 언제나 경연에서는 문장 이야기뿐이었고, 현실의 폐단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언급하지 못하니, 식자들이 부족하다 생각하였다.”했다. 노수신은 당시 19년이라는 오랜 귀양살이에서 풀려나 선조를 잘 보좌하여 새 시대를 여는 데 중심 역할을 할 것이라 율곡은 생각했다. 하지만 오랜 귀양살이 끝에 노수신의 기개는 꺾였고, 불만한 정치는 하나도 없이 그저 자리나 보전하는 데 그쳐 율곡의 실망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대신은 도리로써 임금을 섬기다가 할 수 없으면 그만두는 것이다. 노수신이 시폐를 구제할 재주가 없으면 자신과 능력의 분수를 생각하여 함부로 정승자리에 있지 말아야 할 것이고, 만약 그런 재주가 있다면 정성껏 주상을 인도하여 그 말을 써 주지 않은 연후에 사퇴하는 것이 옳다. 지금 우두커니 정승의 지위에 않아 건의하는 것도 없이 다만 병으로 사퇴하는 것만 능사로 삼다가 상이 간절히 묻는데도 한 가지 방책도 아뢰지 못하였다. 아 애석하다! 수신의 맑은 명성과 중망으로도 시무에 통달하지 못하고 마침내 녹봉만 먹는 것을 면치 못하였다.”
율곡은 나랏일을 맡은 관리라면, 자신의 직분에 맞게 ‘해야 할 말’을 에두르지 않고, 바로 해야 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덕목이라고 보았다.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면서 할 말을 하지 않는 것은 직무유기와 다름없으니, 그런 사람은 벼슬자리에 있을 자격이 없다고 본 것이다. 또한 사람에게는 재능과 기개가 매우 중요하지만, 그것과 아울러 반드시 갖춰야 할 것은 상대를 포용할 수 있는 아량임을 정철이나 이준경, 기대승 등의 사례 등을 통해 곳곳에서 드러내고 있다. 아무리 뛰어난 능력도 상대와 조화를 이루지 못하면, 결국 쓰일 수 없다고 본 것이다. 이와 같은 율곡의 생각은 그가 동과 서로 분열된 두 세력을 화합시키고자 노력한 것과도 관련이 있을 것이다.
동과 서의 구분이 나랏일과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애초 심의겸과 김효원의 사소한 감정 다툼으로 시작된 갈등이 선조 8, 9년(1575, 1576년)에 이르면, 조정에서 두 사람의 갈등을 해결할 방안으로 둘을 외직 발령 내는 상황이 벌어진다. 하지만 두 세력 간 갈등은 오히려 점점 심해져 선조 11년(1598년)이 되면 심의겸의 무리를 서西라 하고, 김효원의 무리를 동東라 지목하면서 조정 신하들이 완전히 분열하게 된다. 이때에 정철은 서라고 지목을 받았고, 이발은 동편을 주도하게 되었다. 이이가 매번 정철과 이발에게 “자네들 두 사람이 화합하여 한마음으로 조화시키면 사림이 무사할 것이다.” 하고 간절히 말하여, 정철과 이발이 서로 교류하며 화평할 논의를 시작하였으나, 일 만들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이수의 옥사’ 등을 일으켜 두 세력 간의 골을 더욱 깊게 만들어 화합은커녕 이제는 상대를 소인小人이라 칭하기에 이르렀다. 나랏일의 처리에서 이제 공론公論은 사라지고, 인물 개개인의 자질도 분별할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율곡 생각(謹按), 조정에서는 식견이 중요하다. 식견이 없으면 현인이라도 일을 그르친다. 지금 사류의 싸움은 모두 사안을 이해하지 못한 데서 나왔다. (중략) 동에 붙은 자들이 날로 일어나 새로운 논의를 다투어 내놓았고, 서인에게 버림받은 적이 있는 유속 구신이 이윽고 요직에 있으면서 권세를 부리고 감정을 풀고자 논의를 준절하게 하여 스스로 동인에게 충성을 보이려 하였다. 하지만 서인은 아무리 착한 선비라도 도우 등용되지 못하였다. 청명이 있는 선비들이 도리어 속류와 하나가 되어 청탁(淸濁)이 혼잡해졌으므로 분별할 수 없게 되었다.”
당시 율곡은 관직에서 잠시 물러나 있을 때인데, 조정이 동과 서로 나뉘는 것을 보고는 두 세력을 화합시키는 역할을 자처하였으나, ‘백인걸의 상소 대필 사건’ 등에 얽히며 오히려 공격을 당하게 된다. 율곡은 서인이 굳이 ‘심의겸이 옳고 김효원이 그르다’고 하는 것, 동인이 굳이 ‘김효원이 옳고 심의겸이 그르다’라고 하는 것은 같은 경우일 뿐이며, 더구나 ‘두 사람의 시비를 분간하는 것이 나라의 안위와는 아무 상관없는 일’이라 하여 현실을 개탄하였다. 결국 이런 무의미한 다툼은 ‘혼란한 틈에서 우세한 세력에게 빌붙어 권세를 잡은 자들이 나랏일을 망치는’ 결과를 낳을 뿐인데, 율곡은 끝내 두 세력이 화합할 수 없는 지경이 되어버린 현실을 어찌할 수 없다는 것만 갈수록 실감하게 되었다.
난세에 읽는 정치학, 율곡의 경연일기에서 ‘좋은 정치’를 생각하다
어느 시대나 시대가 처한 문제의 정도만 다를 뿐, 시대마다 난세라고 일컬을 만한 문제는 언제나 있어왔다. 그런데 우리가 역사를 읽으며 놀라는 사실은 각각의 처한 문제의 겉모양은 다르지만, 그 본질적인 내용은 같다는 점을 깨닫게 된다는 점이다. 지금으로부터 수백 년 전 학자이자 경세가로 활동한 율곡이 끊임없이 고민했던 문제는 어떻게 하면 ‘좋은 정치’를 통해 ‘치세治世’를 이룰까였다. 민생의 고통이 무엇인가에 주목하고, 그것의 해결을 위한 방안 마련에 골몰하였으며, 분열된 위정자 집단의 화해를 촉구하였다. 물론 그의 요구와 노력이 결실을 맺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그런 노력 자체가 의미 없는 것이 되지는 않는다.
또한 당시 선조가 비록 율곡을 비롯한 대신들과의 논의를 실천으로 옮기는 데까지 이르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그들의 언로마저 막지는 않았다는 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소통의 공간이자 함께 공부하고 미래를 구상하는 자리였던 경연을 게을리 하지 않았으며, 듣기 싫은 소리이지만 묵묵히 신하들의 이야기를 들었던 선조의 태도 또한 우리가 눈여겨볼 대목이다. 더욱이 조선이라는 사회는 그와 같은 소통의 장, 그리고 국가 정치에 대한 감시의 기능을 제도적으로 보장했다는 것이다.
“경연은 바로 국왕과 신하가 책도 읽고 토론도 하는. 실제로 임금이 신하에게 배우는 자리였다. 공직자들이 모이는 자리이니만큼 중요한 국가 정책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지기도 하였다. 이를 담당하는 부서는 집현전?홍문관으로, 이들은 춘추관의 사관, 사간원?사헌부의 언관과 함께 조선의 문치주의를 이끌었던 트로이카였다. 경연은 소통의 공간이고, 소통의 결여는 결국 자신의 어리석음으로 귀결된다. 경연을 게을리한 군주가 폭군(연산군)이거나 혼군(광해군)이었던 사실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 머리말 중에서
율곡의 시대는 마치 우리 시대를 비추는 거울과 같다. 그래서인지 그의 말은 과거의 화석화된 언어로 읽히지 않는다. 많은 사람들이 불화의 시대, 불통의 시대, 어지러운 시대라고 하는 지금, 율곡의 『경연일기』에서 하나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 작가 소개
저 : 율곡 이이
李珥, 석담, 숙헌
율곡 이이는 강원도 강릉 북평촌 오죽헌에서 아버지 찰방 원수와 어머니 신사임당 사이에서 태어났다. 자는 숙헌이고 호는 석담, 율곡, 우재 등이며 본관은 덕수이다. 율곡이라는 호는 그의 고향인 경기도 파주의 밤골 율곡에서 따온 것이다. 13세인 명종 3년 진사시에 합격했으나 16세에 어머니 상을 당해 3년상을 마치고 금강산에 들어가 공부했다. 21세가 되어 과거시험에 장원급제했고 23세가 되어서는 도산으로 내려가 퇴계 이황을 만났으며 그해 겨울 별시에 등시하고 명종 19년 생원시, 문과에 모두 장원으로 급제해 ''구도장원공''이라고 칭송되었다.
호조좌랑을 시작으로 예조좌랑, 정언, 이조좌랑, 지평 등을 지내고 선조 1년에는 천추사 서장관으로 명나라를 다녀왔으며 부교리로서 춘추관 기사관을 겸해 『명종실록』편찬에도 참여했다. 그 뒤에 청주목사, 직제학, 동부승지, 벙조참지, 대사간 등을 지낸 뒤 사직했다가 다시 대사헌, 예문관 제학을 겸임하고 동지중추부사, 대제학을 지냈다. 1583년 동인의 탄핵을 받고 사직했다가 판돈령 부사, 이조판서에 올라 선조 17년에 운명하기 전가지 동서 분당의 화해를 위해 노력했다. 그는 평소에 ''기발이승''을 주장해 퇴계의 ''이기호발''과 달리 했으며, 10만 군대 양성 및 대동법과 사창의 실시 등을 주장했다. 저서로는 『성학집요』, 『격몽요결』, 『동호문답』, 『경연일기』 등이 있다.
▣ 주요 목차
치세로 가는 길_ 머리말
외척의 몰락_ 명종 20년(1565, 을축년)
사림의 정치 바로잡기_ 명종 21년(1566, 병인년)
다음 임금은 누구입니까_ 명종 22년(1567, 정묘년)
선조의 시대가 열리다_ 선조 즉위년(1567, 정묘년)
인순왕후 수렴청정을 거두다_ 선조 1년(1568, 무진년)
정치를 하려면 때를 알아야 합니다_ 선조 2년(1569, 기사년)
을사사화를 바로잡다_ 선조 3년(1570, 경오년)
한심한 재상 위태로운 나라_ 선조 4년(1571, 신미년)
대신은 바른말을 하지 않고 나라의 기강은 해이해지니_ 선조 5년(1572, 임신년)
정치를 잘하려는 뜻이 있습니까_ 선조 6년(1573, 계유년)
좋은 정치를 하려거든 공부해야 합니다_ 선조 7년(1574, 갑술년)
김효원 편 심의겸 편_ 선조 8년(1575, 을해년)
사림 끝내 갈라서다_ 선조 9년(1576, 병자년)
을사위훈을 삭제하다_ 선조 10년(1577, 정축년)
동인과 서인으로 나누어지다_ 선조 11년(1578, 무인년)
누가 쓴 상소인가_ 선조 12년(1579, 기묘년)
묵은 폐단을 버려야만 나아갈 수 있습니다_ 선조 13년(1580, 경진년)
인재가 없는 시대는 없습니다_ 선조 14년(1581, 신사년)
≪경연일기 깊이 읽기≫
상복논쟁: 흰 갓 검은 갓이 왜 그리 중요한가
노수신과 숙흥야매잠
퇴계 이황의 독서당 동창생들
사림과 유속의 구분
세대차이로 본 성리학 이황과 이이
조광조, 그리고 기묘사화의 조짐
율곡의 만언소: 만언봉사
공안 개정이 필요했던 이유
황랍사건이 내포한 시대상
가슴속에 맹자를 담은 사람들
군적정리
옮긴이 해제
부록 선조?이이의 세계도|이이가 쓴 인물 졸기
찾아보기
율곡과 선조가 겪었던 긴장에 ‘요순’이 등장하는 까닭은?
선조 초반의 정치상황은 어떠했는가? 명종의 죽음과 함께 선조가 등극했고, 윤원형으로 대표되던 외척 권신들이 몰락했다. 선조가 이황, 이항, 조식 등을 불러내면서 새로운 정치에 대한 기대 또한 높았다. 율곡은 경연에서 기회가 있을 때마다 선조에게 ‘좋은 정치’를 행할 것을 촉구하고 이를 실현하기 위한 개혁 방안을 올렸다.『경연일기』의 초반, 율곡의 충언과 비전에 대해 선조는 율곡이 올리는 옳지만 싫은 소리를 억누르지 않고 침묵으로나마 인정한다.
하지만 율곡의 기대와 달리 선조의 망설임은 더해가고 번번이 옛 규례를 고치기 어렵다는 핑계를 대거나, “나는 덕이 없는 데다 다스리기도 어려운 때를 만나 큰일을 하기 어렵다”는 말을 되풀이한다. 율곡은 선조의 이런 태도를 그냥 넘어가지 않았다. “주상께서는 ‘좋은 정치를 할 능력이 없다’고 하시나, 신은 믿지 아니합니다. 지금 전하께서 여색에 깊이 현혹되셨습니까. 음악을 좋아하십니까. 술을 즐기십니까. 말 타기와 사냥을 좋아하십니까.”라며 좋은 정치가 이뤄지지 못하는 것은 공부가 부족하고 의지가 없기 때문이라는 점을 적시하고, 스스로 능력이 부족하다면 능력 있는 신하를 기용하여 일을 맡기면 될 것이라고 선조를 다그친다.
선조가 20세가 되던 해(선조 4) 4월 율곡은 “이황이 죽고 중망이 노수신에게 쏠려 있으나, 상은 은총만 베풀 뿐 국사를 같이 다스릴 뜻은 없어, 수신의 의견을 대부분 채택하지 않았다.”고 아쉬워했다. 이듬해 8월 기대승이 벼슬을 버리고 낙향할 때도 “상이 중히 돌아보는 마음이 없어 고향으로 갔다”고 판단했다. 선조 8년 율곡은 “예전에 맹자가 제 선왕에게 ‘사방 국경 안이 다스려지지 않았으면 어찌 하겠습니까?’ 하고 묻자, 왕이 좌우를 돌아보고 다른 말을 하였는데 주자는 그가 큰일을 할 수 없다고 비판하였습니다.”라고 하며, “지금도 나라 안이 다스려지지 않았으니, 전하께서는 어찌하시렵니까?”라고 말했다. 제 선왕처럼 선조 역시 답하지 않았다.
선조와 사림의 갈등이 을사위훈 삭제 문제와 선조의 생부 덕흥군 추숭을 둘러싸고 깊어간다. 율곡은 덕흥군 추숭을 추진하던 임기가 사간원의 탄핵을 받았음에도 죄를 주지 않은 이유가, 선조가 사류를 싫어하였기 때문이라고 단정한다. 그리고 “주상의 마음이 이러하니, 어찌 치세를 바랄 도리가 있겠는가?”라고 실망한다. 실망은 정언지를 충청 감사에 임명할 때 또 이어졌다. 율곡은 선조가 무능한 정언지를 탁용하여 사류들이 시정의 잘잘못을 말하지 못하도록 길들이려는 처사로 보았다.
『경연일기』의 처음부터 끝까지 관통하는 율곡의 ‘직간’과 선조의 ‘침묵’이란 긴장 관계를 통상적인 정치영역에서 명령과 복종이란 위계적 종속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과연 율곡이 『경연일기』를 통해 전하고자 한 사상과 경세관은 무엇인가? 이 책을 번역하고 정본화를 시도한 오항녕 교수는 『경연일기』를 읽는 관전 포인트에 대해 첫째는 상하(上下)의 관계, 즉 권력 문제이고, 둘째는 그 권력을 통해서 사회의 삶을 어떻게 조직, 경영할 것인가 즉 경세론의 측면에서 일독하기를 권한다. 그는 “율곡이 ‘임금과 신하의 교류와 소통’을 강조한 핵심은 현실 정치권력에서 나타나는 비대칭적 위계를 ‘요순’이란 성인 모델을 통해 보편적 가치를 지닌 대칭성으로 바꾸고, 이를 경세론의 구체성 속에서 실현하는 방식”으로 설명한다. 다시 말해 율곡과 사림들은 인(仁)이라는 보편적 가치를 왕에게 요구하며 기대하는 것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떠나겠다고 협박(?)을 하고, 선조는 이를 강제적인 명령과 복종으로 억누르지 않고 침묵으로나마 지지하는 양상을 보인다는 것이다. 가칭 ‘요순담론’이라는 이 기본틀이 오항녕 교수는 이때에 만들어지고 조선 후기 사회를 이끌어간 동력의 하나라고 한다. 그리고 그 공간이 경연이었다.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당시 조정의 풍토. 텔레비전을 보면 국무위원들은 열심히 대통령의 말을 받아 적는데 막상 뉴스를 통해 확인하는 대통령의 말에는 받아 적을 만한 내용이 거의 없는 현재의 정치. 오항녕 교수는 정말 율곡 때와 대비된다며 이 대비야말로 역사학의 과제라 한다.
율곡의 경세론, 소통,화합,민생을 위한 정치란 무엇인가
율곡이 실현하고자 한 요순 방식의 ‘교류와 소통’이 어떻게 민생을 위한 경세론으로 이어지는지 『경연일기』는 펼쳐낸다. 퇴계 이황에게 삶의 화두이자 과제는 조광조 등 사화(士禍)를 당한 명현들의 복권이었다. 사화의 시대를 살면서 젊은 사림을 키우고 시대를 견딜 학문을 이룩하는 데 진력하였다. ‘요순 담론’은 정암 조광조 이래 조정이 구현해야 할 모범으로 열망했지만 조선의 현실에서 구현할 제도적 방법을 기획하기에는 때가 이르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율곡에 와서는 달랐다. 율곡의 화두는 사림 정치를 통해 사회의 삶을 어떻게 나아지게 할 것인가? 즉 경세론에 가 있었다. 실제 율곡의 『경연일기』는 경전 공부보다는 국가 정책, 인재 등용, 시사에 따른 정치적 판단 등 정치활동의 내용들로 가득 채워져 있다.
경세론의 출발은 간단했다. “군주는 다 가졌으므로 가지면 안 된다.”였다. 1573년(선조 6) 율곡은 “요즘 대간에서 계달하는 것이 궁중이나 내수사의 일에 관한 사안이면 주상께서 고집스레 거부하시므로 신하들이 전하께서 사심이 있느냐 의심하게 되니 어디서 본답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선조 7년의 ‘황랍 사건’도 마찬가지의 문제였다. 율곡은 이 무렵 향약 실시를 거두게 한다. 물론 율곡도 향약이 만민을 바르게 하는 법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백성을 기르는 것을 먼저 할 것이고, 백성을 가르치는 것은 뒤에 해야 할 것이라고 판단했다. 급한 민생의 고통을 풀어야 향약이 가능하다고 보았던 것이다. 이때 율곡의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폐해는 공납제의 문란이었다. 선조 7년 2월 율곡은 “조종의 법을 모조리 변경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공안(貢案) 같은 것은 연산군이 첨가하여 제정한 것이요 조종의 법이 아닙니다. 신이 개혁하기를 좋아하는 것이 아니고, 민폐를 구제하자는 것입니다.”라며 공납문제의 대변통의 논의를 꺼낸다. 단순이 공물을 줄이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세제 전반을 뜯어고치는 것이 율곡의 착상이었다. 이 문제는 후일 대동법으로 이어진다.
율곡의 『경연일기』에는 지방제도 개혁 논의, 군역의 폐해에 따른 군적 정리 문제 등 국가 운영과 관련한 정책의 설정과 그 타당성에 대한 검토가 어떻게 행해지고, 의사결정이 이루어졌는지 그 내용이 고스란히 담겨 조선 정치의 생생한 현장을 체험해볼 수 있는 좋은 텍스트라 할 수 있는 것이다.
100여명에 대한 신랄하면서도 엄격한 인물평, 율곡이 생각한 좋은 위정자의 모습은 무엇인가?
율곡이 일기를 쓴 이 시기는 조선 역사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사건과 인물이 출현한 때이다. 사화를 거치며 사림이 본격적으로 정계에 진출했으며, 동서분당의 기미가 시작되는 등 향후 조선 정치의 향방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시기였다. 한국사 통틀어 역사의 무대에 이만큼의 인물이 대거 등장한 시기가 있을까? 율곡은『경연일기』에 23명의 인물에 대한 졸기(卒記, 압축적인 전기)를 남겼다. 그리고 일기와 근안(謹按, 본문 번역어 ‘율곡 생각’) 곳곳에 100여명에 가까운 인물평을 적고 있는데, 신랄하면서도 엄격한 이들에 대한 기록은 당시의 정치상황을 일목요연하게 살펴볼 수 있게 하며 율곡의 인간관과 정치관도 이해할 수 있게 한다.
퇴계 이황이 조정의 부름에 끝내 응하지 않은 것에 대해 아쉬운 마음이 있었으나 그의 선비로서의 처신과 학문의 깊이를 높이 평가하며, 특히 조광조와 이황을 비교하여 “이황은 당세 유학의 종주로 조광조 뒤로는 그에 비할 사람이 없었다. 이황의 재주와 국량은 조광조를 따르지 못하나, 의리를 깊이 연구하여 정미한 경지에 이른 것은 조광조가 그를 따르지 못할 것이다.”라고 하여, 학문의 경지에서는 이황이 조광조보다 낫다고 하였다. 한편 조광조의 추증에 부쳐서는, 조광조가 중종반정으로 출사하게 된 과정과 이후 기묘사화로 축출되기까지의 과정을 서술하고는, 뒤이어 조광조가 경세제민의 재주를 가졌으나 학문이 미처 대성하기 전에 갑자기 요로에 올라 뜻을 이루지 못한 것을 아쉬워하였다. 그러나 율곡은 조선에서 성리의 학문이 있는 줄을 알게 된 것은 모두 조광조의 힘이라고 치하하였다. 한편 문묘에 종사되기도 한 이언적에 대해서는 을사사화 때 직언으로 사림을 구원하지 못한 일을 두고 절개가 없는 인물이라고 혹평하였다.
그렇다면, 함께 조정에서 활동한 현직 동료에 대한 율곡의 생각은 어땠을까? 기대승의 졸기 중 일부를 보면 “학문은 변론이 박식하고 원대했지만 마음을 다잡고 실천하는 공부가 없었다. 또 남을 이기기를 좋아하는 병통이 있어 남이 자기에게 순종하는 것을 좋아하는 까닭에 지조 있는 선비는 어울리지 않았고 아첨하는 사람이 많이 따랐다.” 유희춘에 대해서는 “박람강기하여 책이나 역사를 읽으면 다 외웠다. 그러나 경세의 재주와 곧은 말을 하는 절조가 부족하여 언제나 경연에서는 문장 이야기뿐이었고, 현실의 폐단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언급하지 못하니, 식자들이 부족하다 생각하였다.”했다. 노수신은 당시 19년이라는 오랜 귀양살이에서 풀려나 선조를 잘 보좌하여 새 시대를 여는 데 중심 역할을 할 것이라 율곡은 생각했다. 하지만 오랜 귀양살이 끝에 노수신의 기개는 꺾였고, 불만한 정치는 하나도 없이 그저 자리나 보전하는 데 그쳐 율곡의 실망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대신은 도리로써 임금을 섬기다가 할 수 없으면 그만두는 것이다. 노수신이 시폐를 구제할 재주가 없으면 자신과 능력의 분수를 생각하여 함부로 정승자리에 있지 말아야 할 것이고, 만약 그런 재주가 있다면 정성껏 주상을 인도하여 그 말을 써 주지 않은 연후에 사퇴하는 것이 옳다. 지금 우두커니 정승의 지위에 않아 건의하는 것도 없이 다만 병으로 사퇴하는 것만 능사로 삼다가 상이 간절히 묻는데도 한 가지 방책도 아뢰지 못하였다. 아 애석하다! 수신의 맑은 명성과 중망으로도 시무에 통달하지 못하고 마침내 녹봉만 먹는 것을 면치 못하였다.”
율곡은 나랏일을 맡은 관리라면, 자신의 직분에 맞게 ‘해야 할 말’을 에두르지 않고, 바로 해야 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덕목이라고 보았다.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면서 할 말을 하지 않는 것은 직무유기와 다름없으니, 그런 사람은 벼슬자리에 있을 자격이 없다고 본 것이다. 또한 사람에게는 재능과 기개가 매우 중요하지만, 그것과 아울러 반드시 갖춰야 할 것은 상대를 포용할 수 있는 아량임을 정철이나 이준경, 기대승 등의 사례 등을 통해 곳곳에서 드러내고 있다. 아무리 뛰어난 능력도 상대와 조화를 이루지 못하면, 결국 쓰일 수 없다고 본 것이다. 이와 같은 율곡의 생각은 그가 동과 서로 분열된 두 세력을 화합시키고자 노력한 것과도 관련이 있을 것이다.
동과 서의 구분이 나랏일과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애초 심의겸과 김효원의 사소한 감정 다툼으로 시작된 갈등이 선조 8, 9년(1575, 1576년)에 이르면, 조정에서 두 사람의 갈등을 해결할 방안으로 둘을 외직 발령 내는 상황이 벌어진다. 하지만 두 세력 간 갈등은 오히려 점점 심해져 선조 11년(1598년)이 되면 심의겸의 무리를 서西라 하고, 김효원의 무리를 동東라 지목하면서 조정 신하들이 완전히 분열하게 된다. 이때에 정철은 서라고 지목을 받았고, 이발은 동편을 주도하게 되었다. 이이가 매번 정철과 이발에게 “자네들 두 사람이 화합하여 한마음으로 조화시키면 사림이 무사할 것이다.” 하고 간절히 말하여, 정철과 이발이 서로 교류하며 화평할 논의를 시작하였으나, 일 만들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이수의 옥사’ 등을 일으켜 두 세력 간의 골을 더욱 깊게 만들어 화합은커녕 이제는 상대를 소인小人이라 칭하기에 이르렀다. 나랏일의 처리에서 이제 공론公論은 사라지고, 인물 개개인의 자질도 분별할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율곡 생각(謹按), 조정에서는 식견이 중요하다. 식견이 없으면 현인이라도 일을 그르친다. 지금 사류의 싸움은 모두 사안을 이해하지 못한 데서 나왔다. (중략) 동에 붙은 자들이 날로 일어나 새로운 논의를 다투어 내놓았고, 서인에게 버림받은 적이 있는 유속 구신이 이윽고 요직에 있으면서 권세를 부리고 감정을 풀고자 논의를 준절하게 하여 스스로 동인에게 충성을 보이려 하였다. 하지만 서인은 아무리 착한 선비라도 도우 등용되지 못하였다. 청명이 있는 선비들이 도리어 속류와 하나가 되어 청탁(淸濁)이 혼잡해졌으므로 분별할 수 없게 되었다.”
당시 율곡은 관직에서 잠시 물러나 있을 때인데, 조정이 동과 서로 나뉘는 것을 보고는 두 세력을 화합시키는 역할을 자처하였으나, ‘백인걸의 상소 대필 사건’ 등에 얽히며 오히려 공격을 당하게 된다. 율곡은 서인이 굳이 ‘심의겸이 옳고 김효원이 그르다’고 하는 것, 동인이 굳이 ‘김효원이 옳고 심의겸이 그르다’라고 하는 것은 같은 경우일 뿐이며, 더구나 ‘두 사람의 시비를 분간하는 것이 나라의 안위와는 아무 상관없는 일’이라 하여 현실을 개탄하였다. 결국 이런 무의미한 다툼은 ‘혼란한 틈에서 우세한 세력에게 빌붙어 권세를 잡은 자들이 나랏일을 망치는’ 결과를 낳을 뿐인데, 율곡은 끝내 두 세력이 화합할 수 없는 지경이 되어버린 현실을 어찌할 수 없다는 것만 갈수록 실감하게 되었다.
난세에 읽는 정치학, 율곡의 경연일기에서 ‘좋은 정치’를 생각하다
어느 시대나 시대가 처한 문제의 정도만 다를 뿐, 시대마다 난세라고 일컬을 만한 문제는 언제나 있어왔다. 그런데 우리가 역사를 읽으며 놀라는 사실은 각각의 처한 문제의 겉모양은 다르지만, 그 본질적인 내용은 같다는 점을 깨닫게 된다는 점이다. 지금으로부터 수백 년 전 학자이자 경세가로 활동한 율곡이 끊임없이 고민했던 문제는 어떻게 하면 ‘좋은 정치’를 통해 ‘치세治世’를 이룰까였다. 민생의 고통이 무엇인가에 주목하고, 그것의 해결을 위한 방안 마련에 골몰하였으며, 분열된 위정자 집단의 화해를 촉구하였다. 물론 그의 요구와 노력이 결실을 맺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그런 노력 자체가 의미 없는 것이 되지는 않는다.
또한 당시 선조가 비록 율곡을 비롯한 대신들과의 논의를 실천으로 옮기는 데까지 이르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그들의 언로마저 막지는 않았다는 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소통의 공간이자 함께 공부하고 미래를 구상하는 자리였던 경연을 게을리 하지 않았으며, 듣기 싫은 소리이지만 묵묵히 신하들의 이야기를 들었던 선조의 태도 또한 우리가 눈여겨볼 대목이다. 더욱이 조선이라는 사회는 그와 같은 소통의 장, 그리고 국가 정치에 대한 감시의 기능을 제도적으로 보장했다는 것이다.
“경연은 바로 국왕과 신하가 책도 읽고 토론도 하는. 실제로 임금이 신하에게 배우는 자리였다. 공직자들이 모이는 자리이니만큼 중요한 국가 정책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지기도 하였다. 이를 담당하는 부서는 집현전?홍문관으로, 이들은 춘추관의 사관, 사간원?사헌부의 언관과 함께 조선의 문치주의를 이끌었던 트로이카였다. 경연은 소통의 공간이고, 소통의 결여는 결국 자신의 어리석음으로 귀결된다. 경연을 게을리한 군주가 폭군(연산군)이거나 혼군(광해군)이었던 사실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 머리말 중에서
율곡의 시대는 마치 우리 시대를 비추는 거울과 같다. 그래서인지 그의 말은 과거의 화석화된 언어로 읽히지 않는다. 많은 사람들이 불화의 시대, 불통의 시대, 어지러운 시대라고 하는 지금, 율곡의 『경연일기』에서 하나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 작가 소개
저 : 율곡 이이
李珥, 석담, 숙헌
율곡 이이는 강원도 강릉 북평촌 오죽헌에서 아버지 찰방 원수와 어머니 신사임당 사이에서 태어났다. 자는 숙헌이고 호는 석담, 율곡, 우재 등이며 본관은 덕수이다. 율곡이라는 호는 그의 고향인 경기도 파주의 밤골 율곡에서 따온 것이다. 13세인 명종 3년 진사시에 합격했으나 16세에 어머니 상을 당해 3년상을 마치고 금강산에 들어가 공부했다. 21세가 되어 과거시험에 장원급제했고 23세가 되어서는 도산으로 내려가 퇴계 이황을 만났으며 그해 겨울 별시에 등시하고 명종 19년 생원시, 문과에 모두 장원으로 급제해 ''구도장원공''이라고 칭송되었다.
호조좌랑을 시작으로 예조좌랑, 정언, 이조좌랑, 지평 등을 지내고 선조 1년에는 천추사 서장관으로 명나라를 다녀왔으며 부교리로서 춘추관 기사관을 겸해 『명종실록』편찬에도 참여했다. 그 뒤에 청주목사, 직제학, 동부승지, 벙조참지, 대사간 등을 지낸 뒤 사직했다가 다시 대사헌, 예문관 제학을 겸임하고 동지중추부사, 대제학을 지냈다. 1583년 동인의 탄핵을 받고 사직했다가 판돈령 부사, 이조판서에 올라 선조 17년에 운명하기 전가지 동서 분당의 화해를 위해 노력했다. 그는 평소에 ''기발이승''을 주장해 퇴계의 ''이기호발''과 달리 했으며, 10만 군대 양성 및 대동법과 사창의 실시 등을 주장했다. 저서로는 『성학집요』, 『격몽요결』, 『동호문답』, 『경연일기』 등이 있다.
▣ 주요 목차
치세로 가는 길_ 머리말
외척의 몰락_ 명종 20년(1565, 을축년)
사림의 정치 바로잡기_ 명종 21년(1566, 병인년)
다음 임금은 누구입니까_ 명종 22년(1567, 정묘년)
선조의 시대가 열리다_ 선조 즉위년(1567, 정묘년)
인순왕후 수렴청정을 거두다_ 선조 1년(1568, 무진년)
정치를 하려면 때를 알아야 합니다_ 선조 2년(1569, 기사년)
을사사화를 바로잡다_ 선조 3년(1570, 경오년)
한심한 재상 위태로운 나라_ 선조 4년(1571, 신미년)
대신은 바른말을 하지 않고 나라의 기강은 해이해지니_ 선조 5년(1572, 임신년)
정치를 잘하려는 뜻이 있습니까_ 선조 6년(1573, 계유년)
좋은 정치를 하려거든 공부해야 합니다_ 선조 7년(1574, 갑술년)
김효원 편 심의겸 편_ 선조 8년(1575, 을해년)
사림 끝내 갈라서다_ 선조 9년(1576, 병자년)
을사위훈을 삭제하다_ 선조 10년(1577, 정축년)
동인과 서인으로 나누어지다_ 선조 11년(1578, 무인년)
누가 쓴 상소인가_ 선조 12년(1579, 기묘년)
묵은 폐단을 버려야만 나아갈 수 있습니다_ 선조 13년(1580, 경진년)
인재가 없는 시대는 없습니다_ 선조 14년(1581, 신사년)
≪경연일기 깊이 읽기≫
상복논쟁: 흰 갓 검은 갓이 왜 그리 중요한가
노수신과 숙흥야매잠
퇴계 이황의 독서당 동창생들
사림과 유속의 구분
세대차이로 본 성리학 이황과 이이
조광조, 그리고 기묘사화의 조짐
율곡의 만언소: 만언봉사
공안 개정이 필요했던 이유
황랍사건이 내포한 시대상
가슴속에 맹자를 담은 사람들
군적정리
옮긴이 해제
부록 선조?이이의 세계도|이이가 쓴 인물 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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