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 출판사서평
29개 국어에 통달한 언어의 천재, 천재 사학자가 혼자 29개 언어로 된
사서들을 전부 독파한 후 각 사서들의 내용을 교차 체크하고
각 언어의 변천과정을 면밀히 추적한 결과 밝혀낸 놀라운 비밀;
칭기스 칸은 고구려 발해
왕가의 후손이었다.
우리가 상식적으로 “몽골인” 출신으로 “세계정복자”라고 알고 있는 칭기스 칸의 선조는 “고구려(高句麗) 주몽(朱蒙)의 후손 발해(渤海) 왕족이었다”는 내용의 놀라운 책이 나왔다.
지금부터 약 800년 전에 칭기스 칸(1162?~1227년)의 선조와 그 자신의 행적에 관해 기록한 사서 《몽골비사(元朝秘史)》가 있다. 이 사서는 그 첫줄에서 “칭기스칸의 뿌리는 높은 하늘이 점지하여 태어난 부르테 치노(蒼狼, 푸른 이리)”라고 했다.
그런데 서울대 외교학과를 졸업하고, 유네스코한국위원회, 외무부 유엔국 유네스코담당 자문관, 유엔난민고등판무관실(UNHCR) 체첸전쟁 현장주재관을 거쳐, 미국에서 법학박사(JD)를 딴 후, 미국로펌에서 변호사로 근무했고, 귀국 후에는 고구려 발해학회 회원으로도 참가한 저자는 한·몽 수교가 이루어진 직후부터 몽골어를 배우기 시작하면서 독학 교재로 쓴 《몽골비사(元朝秘史)》를 처음 접하게 되면서부터 한 가지 의문을 가지기 시작했다. 이 사서의 제목은 왜 그저 《몽골사》나 《칭기스칸사》가 아니라, 《-비밀스러운(숨겨진)=秘-》이라는 수식어가 들어가 있는가? 하는 물음이다.
저자는 그후 내내 자신의 머리를 떠나지 않는 이 물음을 끈질기게 추궁했다. 그 결과 “부르테 치노”는 우리가 상식적으로 알고 있는, 오늘날 몽골족의 선조라고 하는 그 전설적 “푸른 이리”와는 전혀 다른 말로, 그것은 고구려-말갈어 “부여대씨랑(夫餘-大氏-郞, *부려-테치-농)”이라는 말임을 알게 되었다. “치노(氏郞, 씨랑)”라는 말은 오늘날 씨족의 “종친회장” 격으로 고구려 시대에 쓰이기 시작하여 원(元, 1271~1368년)나라, 북원(北元, 1368~1388년)과 그 뒤에도 몽골어로 “지농”이라는 말로 계승되었다.
이 때문에 본격적 연구를 한 결과, 저자는 세계정복자 칭기스칸의 뿌리가 사실은 1045년에 쓰인 《무경총요(武經總要)》가 “부여별류(夫餘別類)”로 기록한 발해고왕(渤海高王) 대조영(大祚榮) 가계의 인물임을 알게 되었다. 저자는 세계정복자 칭기스 칸이 발해 초대왕이자 진국왕(震國王)인 대조영(大祚榮)의 가계 출신이며, 좀 더 구체적으로 칭기스 칸은 그 아우 반안군왕(盤安郡王) 대야발(大野勃)의 제 19대손임을 실증적으로 밝혔다.
저자는 또 학자들이 “철인”, “(쇠를 다루는)대장장이” 등으로 잘못 풀이해 온 “칭기스 칸”의 어릴 적 이름 “테무진(鐵木眞)”은 사실은 “테무진” 자신이 “부여별종(夫餘別種)” 가계인 주몽(朱蒙)의 손자로 고구려 3대왕이 된 “무쿠리(無恤, 무휼)”, 다른 이름으로 “마크리(莫來, 막래)”였던 “대무신(大武神)” 왕(王), 달리 “대해주류왕(大解朱留王)”의 후손임을 가리키는 이름이라고 밝혔다.
테무진의 왕호인 “칭기스 칸(Chinghiz Khan/Ghenghiz Khan)”을 라시드 웃딘(Rashid alDin)이 1310년 경에 쓴 《집사(集史)》와, 지난 세기 미국학자 해롤드 램(Harold Lamb) 등은 “왕중의 왕”이라는 뜻으로 잘못 풀이하고 있다. 그러나 저자는 이 왕호가 사실은 대조영과 그 아버지 걸걸중상(乞乞仲象)이 쓴 고구려-말갈어(靺鞨語) “진국왕(震國王)”의 투르크어 식 소리 “팅기즈 칸(Tinggiz Khan)”이 바뀐 말임을 밝힌다. 칭기스 칸의 손자로 원(元)나라를 세운 쿠빌라이 칸을 1266년경 만났다고 전하는 마르코 폴로(Marco Polo, 1254~1324년)의 《동방견문록》에서, 폴로는 칭기스 칸의 이름을 25번이나 언급하면서 24번이나 그의 이름을 “칭기 칸(Chinghi Kane)”이라고 부르는데, 이 말은 바로 “진국왕(震國王)”의 당시 소리 “친구이 칸(Chinghui Kan)”과 같다는 사실이 저자의 주장을 뒷받침한다.
또 1330년에 함둘라 카즈비니(Hamdallah Qazvini)가 쓴 《선별된 역사(Tarikh-i Gojide)》는 테무진이 나기 전까지는 그 이름조차도 없던 땅을 테무진이 통일하고는 자신이 창출한 나라 이름을 “몽골”이라고 이름 지었다고 한다. 일부 몽골학자들은 이것이 송(宋)나라 팽대아(彭大雅)가 칭기스 칸 시대의 몽골을 방문하고 1237년에 쓴 《흑달사략(黑事略)》에 근거하여 “멍거(銀)”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저자는 이 “몽골”은 사실은 칭기스 칸의 선조의 나라인 “말갈(靺鞨, 勿吉)”, 곧 조선시대의 학자가 “마읍(馬邑)”이라고도 본 “말[키우는] 고을(馬忽)”에 어원을 둔 말이라고 한다. 저자에 따르면, 고구려(高句麗)는 수도 평양성(平壤城) 등 오늘날 성시(城市)를 말하는 여러 개의 “고을=구려(句麗)”와 “일곱 개의 말 골(말갈)”로 이루어져 커진(高) 나라 “커구려(高句麗)”였기 때문이다.
결국 테무진은 자신의 이름 “테무진/대무신(大武神)”과 왕호 “칭기스 칸/진국왕(震國王)”, 그리고 자기 나라 이름을 “몽골 / 몰골 / 말골(靺鞨)”이라고 붙임으로써 자신이 고구려(高句麗) 왕족의 후손이자, 발해(渤海) “진국왕(震國王)”의 후손이요, “말갈국왕”, 곧 새로운 “발해국왕”임을 선언한 것이다.
이러한 놀라운 결론을 얻는 과정에서 저자는 “세계정복자” 칭기스칸 일가의 후손 “칸(황제)”들이 자신들의 조상에 관해 세계 곳곳에서 남긴 《황금의 책(Altan Daftar)》에 해당하는 책들을 분석했다. 그 결과 그는 칭기스 칸의 뿌리가 바로 고구려(高句麗) 시조 주몽(朱蒙)의 후손인 발해 왕족 대조영 가문임을 밝힌다. 《황금의 책》은 약 705년 전 일칸국 황제 가잔 칸의 명으로 《집사》를 쓴 라시드 웃딘이 “칸(황제)의 재고에는 항상 대 아미르들이 지키고 있어서... 황족이 아닌 외부인들은 절대로 보도록 허락되지 않는 책이 한 권 있다”고 한 전설적인 책이다. 이 《황금의 책》은 왜 철저하게 외부인으로부터 차단되어 있었던가?
그것은 바로 칸(황제) 가문의 “족보”였기 때문이다. 저자는 이러한 물음에 대한 해답을 구하는 과정에서 《신·구 당서》, 《삼국사기》, 《고려사》 등 한문으로 된 고대 동방사서는 물론, 《집사》, 《사국사》, 《투르크의 계보》, 《칭기스의 서》 등 페르시아, 중세 투르크어, 타타르어로 된 서방 사서, 《몽골비사》, 《셀렝게 부랴트종족의 역사》 등 중세 몽골어와 부랴트어 등으로 쓰인 사서를 중심으로 최대 무려 29개 국어로 쓰인 사서들과 사료들을 서로 비교, 대조하고, 그 텍스트를 해독하여, 숨겨진 우리 역사의 비밀을 하나하나 밝혔다.
발해 멸망에 관해서는 거란의 정복설, 백두산 폭발에 의한 멸망설 등이 있다. 그러나 그 뒤 발해인들이 어디로 갔는지에 관해서는 우리는 잘 모르고 있었다. 그런데 발해 왕가는 결코 사라진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왕건의 고려와 금나라, 또 오늘날 우리가 “몽골제국”으로 알고 있는 나라로 이어진 것이었다. 이 제국은 오늘날 몽골이라고 부르는 땅과 카자흐스탄, 키르기즈스탄, 우즈베키스탄, 투르크메니스탄 등 중앙아시아는 물론, 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 등 서남아시아, 이란, 이라크, 시리아, 이집트의 반대편 홍해의 아라비아 반도, 러시아, 동구 및 오스트리아, 독일 변경까지 뻗어나간 방대한 세계제국이었다. 한 마디로 영국, 프랑스, 이태리, 스페인 등 서구 몇 나라만 뺀 당시의 “전세계”이다. 그렇다면 지난 1995년 21세기의 새로운 “밀레니엄(천년)”의 도래를 앞두고 미국의 워싱턴 포스트지가 20세기까지 지난 천 년간의 역사 속에서 최고의 인물로 선정한 사람이 바로 칭기스칸이었다는 것도 놀랄 일은 아니다.
칭기스 칸이 탄생한 지 850년이 더 지난 오늘날까지 누구도 그 위대한 인물의 “뿌리”를 알 수 없었다. 그런데 저자는 국내외 저명한 사학자, 교수, 전문가들 가운데 그 누구도 혼자서는 결코 해낼 수 없었던 고대와 중세, 근세에 걸쳐 기록된 동·서방의 여러 가지 어렵고도 다양한 언어로 된 사서들을 해독해 내고, 이를 바탕으로 천재적인 추론과 법학도 다운 논리정연한 추리를 통해 칭기스 칸의 뿌리를 꼼꼼하게 한 세대 한 세대 차근차근 밝히고 있다. 그 결과 나온 것이 바로 이 《고구려-발해인 칭기스칸》이다. 이 책은 668년 고구려가 망한 이래 지난 1300년간의 “세계사를 다시 쓰게 할” 놀랍고도 치밀한 연구 결과물이다.
또 하나 주목할 점은 “고구려는 우리요, 말갈은 우리와 관계없는 퉁구스 종족이다” 고 보는 일부 우리 국사학자들과 러시아, 중국 등 주류학자들의 견해와는 달리, 저자는 놀랍게도 “고구려와 말갈은 다 같이 고구려 왕족으로 주몽의 후예”임을 밝히고 있다는 점이다. 이로 보아 이 글은 이러한 새 학설을 애써 무시하려는 국내외 전문가, 교수들의 냉담한 반응에 직면하나, 아니면 발해왕조의 민족적 성격에 관해 그들 사이에 큰 논쟁을 불러일으킬 것으로 보인다.
또 한 가지 중요한 것이 있다. 저자는 사라진 고구려가 발해-고려-금나라-원나라-청나라로 이어졌다는 엄청난 역사적 진실도 밝힌다. 저자는 《집사》에 “모든 콩그라트 종족의 시조”로 기록된 “황금항아리(Bastu-i jarrin)”가 몽골인들이 금(金)나라 황제를 부르는 “황금의 칸(Altan Khan)”이며, 그가 바로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에 나오는 “금행(金幸, *황금의 칸)”임을 밝힌다. “황금항아리”는 칭기스 칸의 부인 부르테 우진(Bu''te Kujin)의 가계로 《집사》에 기록된 콩그라트(Qongrat) 종족, 또 원(元)나라 제2황후들의 가계인 예키라스(Yikiras) 종족, 그리고 칭기스 칸의 직계 선조 가문인 코를라스(Korulas) 종족 등 콩그라트 주요 3지파의 공통선조이다.
또 한 가지, 우리 일부 학자들은 금나라와 청나라 황실이 신라왕족 김씨(金氏)의 후손이라고 잘못 보아왔다. 이와는 달리, 《지봉유설(芝峰類說, 1614년)》은 “후금(後金)”, 곧 청(淸)나라의 태조인 아이신교로누르하치(愛新覺羅努爾哈赤建)의 가문이 “전조(前朝)”, 곧 우리 고려(高麗)의 “왕씨(王氏)의 후손(裔)”이라고 했다. 신라 김씨가 아니라 고려 왕건의 후손이 청나라 황실이라는 이야기이다. 그런데 마침 청나라 건륭제(乾隆帝)의 명으로 지은 《만주원류고, 1778년》에서 청황실은 스스로가 발해 말갈의 대씨(大氏)와 금나라 왕가 “왕씨(王氏)”인 완안씨(完顔氏)의 후손이라고 자처한다. 저자에 따르면, 두 기록은 결국 같은 말이라는 이야기이다.
결국 저자는 “고려(高麗) 공비(?妃)의 아들 영락(永樂) 황제의 명(明)나라를 빼더라도, 고구려(高句麗)와 발해(渤海)는 놀랍게도 고려(高麗), 금(金), 원(元), 청(淸)나라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한 마디로 당(唐), 송(宋) 이래 이 두 왕조를 제외하고 지난 1000년간의 이른바 “중국왕조”들 모두가 우리 “조선민족의 왕조들”이었다는 이야기이다. 우리의 상식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가를 실감나게 하는 연구결과이다.
되돌아보면, 지난 2004년의 중국의 "동북공정"이라는 충격적 사건 이래, 우리 정부는 국가적 정책으로 엄청난 재원을 동원하여, 수백 명의 직원과 연구원을 채용하여 “동북아역사재단”이라는 기관을 만들고, 이를 통해 이른바 “동북공정”에 대처해 왔다. 그러나 그 연구결과는 대개 고구려 발해가 중원의 역사적 왕조와는 별개의 독립된 국가라는 정도의 외곽만 두드리는 정도였다. 그러나 이제 한 외로운 연구가의 분투로 이를 둘러싼 한판 승부는 완전히 끝난 것으로 보인다. 아니 오히려 이제 “역(逆)동북공정” 또는 “대륙공정”이라는 열화가 일어날지도 모른다. 하여튼 역사의 진실게임의 결과는 이제 명백해 보인다.
끝으로 저자는 자신의 연구결과를 통해 오늘날 형체도 없는 “코리안 웨이브(Korean Waves)”를 자랑삼아 떠들면서도 방향 없이 흘러가는 우리의 정치, 경제, 사회의 현실을 지적하면서, 나침반 없이 우왕좌왕하는 우리가 잊어버린 우리 역사의 진실을 다시 찾고, 이를 돌아봄으로써 장차 세계 속에서 우리가 나아가야 할 미래의 방향에 관해 새로운 청사진을 그리도록 우리에게 촉구한다. 과연 역사는 되풀이될 것인가?
▣ 작가 소개
저자 : 전원철
저자 전원철은 중앙아시아 및 북방민족 사학가 / 고구려 발해학회 회원이다. 서울대학교 외교학과를 졸업하고, 아이오와대학교 로스쿨 법학박사(JD) 학위 취득, 뉴욕주립대학교 법학박사후과정(LLM)을 밟고, 미국로펌(변호사)에서 근무했다. 유엔난민고등판무관실(UNHCR) 체첸전쟁 현장주재관, 외무부 유엔국인권사회과 유네스코담당 자문관, 유네스코한국위원회에 근무, 공군학사장교를 역임했다. 저서로는『고구려-발해족장(渤海族帳)의 칭기스 칸(2011.7.)』,『고구려-발해왕족의 후손 칭기스 칸(2015.5.)』등이 있다.
▣ 주요 목차
서 문
1. 아르카나 쿤으로 들어간 키얀 일행과 콩그라트 종족의시조 “황금항아리” 사이의 관계
2. 제2권이 밝히는 역사적 대드라마의 줄거리
I. 아르카나 쿤을 먼저 뛰쳐나온 “콩그라트”와 나중에 탈출한 “모골” 종족의 두 다른 이야기
1. 콩그라트 종족의 시조 황금항아리의 정체는 야발의 4대손 금행(今幸)
2. 집사 황금항아리의 3아들과 금행의 아들 금사 함보 3형제 이름의 검증
3. 이제 이해되는 금(金) 태조(太祖)의 “여진-발해 본 동일가(女直渤海本同一家)” 설의 참뜻
4. 발해 야발의 4대손 금행에서 나온 “만세일계”의 고구려, 발해, 금金나라, 원元나라, 그리고 청淸나라 황가
II. 황금항아리 금행金幸이 아르카나 쿤을 뛰쳐나온 때는 해동성국(海東盛國)을 이룩한 발해 선왕(宣王) 때
1. 발해 제2대 무왕 때 발해-당·신라 전쟁으로 상실한 발해의 한강 이북 영토
2. 야발의 현손 발해 제10대 선왕(宣王) 대인수(大仁秀)의 발해 실지 수복 결단과 성공
3. 선왕(宣王) 때 콩그라트 종족의 아르카나 쿤 대출정으로발해 남쪽 주군을 수복한 일
4. 황금항아리 금행은 고려세계(高麗世系)의 고려 태조 왕건의 외할아버지인 “서해용왕(西海龍王)” “두은점(豆恩) 각간(角干)”
5. 콩그라트 종족의 대출정으로 발해 남쪽 주군을 수복한 해는 826년
6. 대출정으로 회복한 발해 영토의 범위는 개성 옆 평산까지의 땅
7. 콩그라트의 도시조 금행은 코르라스 계 칭기스 칸의 15대 선조이자, 예키라스 계 아골타의 8대 선조
III. “조신(女眞) 땅” “완안부”로 들어간 금행의 아들 금시조 함보(普)와 야라(耶懶)로들어간 칭기스 칸의 14대조 보활리(保活里)
1. 금행과 그 아들 금시조 함보(普) 등이 “신라인”이라는 학계와 대중의 철저한 오해
2. 금시조 함보의 형 아고래(阿古)와 아들 “콩그라트”는 “평산파(平山派) 대(大)큰(今) 씨”
IV. 금시조 함보와 아우 보활리가 들어간 조신(女眞) “완안부(完顔部)”는 사실은 발해 땅 “반안군(盤安郡)”
1. 쿠바이시레 함보가 정착한 발해 반안군(盤安郡)의 “클씨네부(紇石烈部)”는 오늘날 삼수(三水) 갑산(甲山)
2. 투스부다우 보활리가 간 “야라(耶懶)”는 “고려나(高麗那)”라는 말로 오늘날 함흥 땅
V. 함보 일행이 “완안부”, 곧 발해 “반안군(盤安郡)”으로 들어간 두 까닭
1. 신라의 발해 수복령 “패서도(황해도)” 교란
2. 발해의 잦은 왕권 교체로 인한 “반안군(盤安郡)”내의 2종족 분규
3. 몽골비사 “알란 고와” 이야기의 지리적 배경의 진실은 우리 땅
VI. 평주에 남은 함보의 형 “아고래”와 야라로 간 보활리의 손자들이 궁예의 고구려에서 겪은 왕건의 궁정혁명
1. 서해용왕 금행의 평주에서 궁예의 고구려로 간 아고래의 손자 “칼지다이(阿志泰, 아지태)”와 보활리의 손자 “바르가 바아타르 타이상 노욘(渤海 莫賀大相郞)”
2. 알란 코와의 할아버지 때 모든 콩그라트의 왕 “칼지다이 칸(Kaljiday Khan)”이 궁예의 권신 “아지태(阿志泰)”임을 보여주는 고려사가) 궁예(弓裔)의 권신 “칼지타이(阿志泰)”와 왕건王建 사이의 악인연
3. 보활리 손자 “바르가 바아타르 타이상 노욘”은 칸(궁예)의 셋째 아들 부르테 치노를 데리고 “베데(北狄, 몽골 부족)”로 온 장본인
4. “발해 대상 랑”이 부르테 치노를 데리고 떠난 까닭을 알려주는 “카라 바다 기슭의 전쟁”은 왕건의 궁정혁명
5. 왕건의 궁정혁명으로 발해로 피신한 뒤 발해의 멸망으로또 다시 서북으로 간 콩그라트와 코르라스 지파
VII. 발해 멸망으로 아르카나 쿤 탈출 후 “발해 막하돌 대상 랑”이 창설한 “부랴트” 곧 ‘부여씨’ 3종족과 아들 “코리 메르겐고려 말갈”이 창설한 코리-부랴트구려부여씨 종족
1. “발해 막하돌 대상 랑”은 칭기스 칸의 선조의 부락인 “코리-부랴트고려부여 종족” 등 부랴트(부여씨 3종족의 시조 “쿠케 보카” 곧 ‘걸가 보고’
2. “바르가 바아타르 타이상 노욘”은 칭기스 칸의 10대조 알란 고와의 코리-부랴트 종족의 기원
3. 부랴트 3종족의 시조 “발해 막하돌”의 “황금의 계보”는 발해 제2왕계의 시조 대야발의 9대째 후손 계보로 칭기스 칸 선조의 계보
4. 알란 고와의 외가와 친가 사이의 친족관계는 금행의 후손으로 8촌과 6촌 종형제자매 사이
VIII. 칭기스 칸의 코리-투마드, 곧 코르라스 부 알란 고와에서 테무진까지 10선조 이야기
1. 코리-부랴트 족장 코리 메르겐의 딸로 칭기스 칸의 10대 선조인 알란 고와 곧 아란阿蘭 걸가乞哥
2. 알란 고와의 3째 아들로 칭기스 칸의 가계 “보르지긴 씨”의 시조인 “보돈차르 뭉칵” 곧 “보잔자르 칸”
3. 테무진의 8대조 “카비치 바아타르” 곧 ‘걸가씨 막하돌’ “부카(Buqa)” 곧 ‘보고寶庫’
4. 테무진의 7대조 메넨 토돈
5. 테무진의 6대조 카이도 8형제를 잘라이르 종족이 참살한 이야기
6. 테무진의 5대조 “바이 싱코르 독신”과 두 형제 차라카 링쿰솔고 님금과 차오진조선
7. 칭기스 칸의 4대 선조 “툼비나 칸”은 모든 콩그라트인의 권좌를 수복한 “자일간 칸” 곧 ‘솔곤조선칸’과 동시대인
8. 칭기스 칸의 증조로 금나라 예키라스役拏氏 역라씨의 “알탄 칸金汗”에게 도전한 용감한 “카불 칸”
9. 테무진의 할아버지 “바르탄 바아타르”는 곧 ‘바랴(부여)땅 막하돌’
10. 바르탄 바아타르의 형 “오킨 바르칵”을 살해한 “알탄 칸”
11. 테무진의 아버지 예수게이 바아타르
12. 콩그라트 종족의 “아르슬란 칸” 곧 ‘아리씨랑阿里氏郞’이 고종사촌 오킨 바르칵의 죽음에 대한 복수로 공격한 금나라 북경
13. 암바가이 칸이 지명한 코탈라 칸과 예수게이의 타타르 종족에 대한 복수
IX. 세계정복자 칭기스 칸, “테무진”새로운 “대무신” 왕의 탄생
1. 테무진(鐵木)의 뜻은 “철인(鐵人)”이 아닌 “대무신(大武神)”왕
2. 칭기스 칸의 뜻은 “팅기스 칸” 곧 “진국왕(震國王)”
3. 테무진 칭기스 칸(震國王)이 세운 몽골은 “말갈(靺鞨)”, 곧 발해를 계승한 나라
X. 결론: 세계정복자 고구려-발해인 칭기스 칸과 우리의 미래
참고문헌 목록
29개 국어에 통달한 언어의 천재, 천재 사학자가 혼자 29개 언어로 된
사서들을 전부 독파한 후 각 사서들의 내용을 교차 체크하고
각 언어의 변천과정을 면밀히 추적한 결과 밝혀낸 놀라운 비밀;
칭기스 칸은 고구려 발해
왕가의 후손이었다.
우리가 상식적으로 “몽골인” 출신으로 “세계정복자”라고 알고 있는 칭기스 칸의 선조는 “고구려(高句麗) 주몽(朱蒙)의 후손 발해(渤海) 왕족이었다”는 내용의 놀라운 책이 나왔다.
지금부터 약 800년 전에 칭기스 칸(1162?~1227년)의 선조와 그 자신의 행적에 관해 기록한 사서 《몽골비사(元朝秘史)》가 있다. 이 사서는 그 첫줄에서 “칭기스칸의 뿌리는 높은 하늘이 점지하여 태어난 부르테 치노(蒼狼, 푸른 이리)”라고 했다.
그런데 서울대 외교학과를 졸업하고, 유네스코한국위원회, 외무부 유엔국 유네스코담당 자문관, 유엔난민고등판무관실(UNHCR) 체첸전쟁 현장주재관을 거쳐, 미국에서 법학박사(JD)를 딴 후, 미국로펌에서 변호사로 근무했고, 귀국 후에는 고구려 발해학회 회원으로도 참가한 저자는 한·몽 수교가 이루어진 직후부터 몽골어를 배우기 시작하면서 독학 교재로 쓴 《몽골비사(元朝秘史)》를 처음 접하게 되면서부터 한 가지 의문을 가지기 시작했다. 이 사서의 제목은 왜 그저 《몽골사》나 《칭기스칸사》가 아니라, 《-비밀스러운(숨겨진)=秘-》이라는 수식어가 들어가 있는가? 하는 물음이다.
저자는 그후 내내 자신의 머리를 떠나지 않는 이 물음을 끈질기게 추궁했다. 그 결과 “부르테 치노”는 우리가 상식적으로 알고 있는, 오늘날 몽골족의 선조라고 하는 그 전설적 “푸른 이리”와는 전혀 다른 말로, 그것은 고구려-말갈어 “부여대씨랑(夫餘-大氏-郞, *부려-테치-농)”이라는 말임을 알게 되었다. “치노(氏郞, 씨랑)”라는 말은 오늘날 씨족의 “종친회장” 격으로 고구려 시대에 쓰이기 시작하여 원(元, 1271~1368년)나라, 북원(北元, 1368~1388년)과 그 뒤에도 몽골어로 “지농”이라는 말로 계승되었다.
이 때문에 본격적 연구를 한 결과, 저자는 세계정복자 칭기스칸의 뿌리가 사실은 1045년에 쓰인 《무경총요(武經總要)》가 “부여별류(夫餘別類)”로 기록한 발해고왕(渤海高王) 대조영(大祚榮) 가계의 인물임을 알게 되었다. 저자는 세계정복자 칭기스 칸이 발해 초대왕이자 진국왕(震國王)인 대조영(大祚榮)의 가계 출신이며, 좀 더 구체적으로 칭기스 칸은 그 아우 반안군왕(盤安郡王) 대야발(大野勃)의 제 19대손임을 실증적으로 밝혔다.
저자는 또 학자들이 “철인”, “(쇠를 다루는)대장장이” 등으로 잘못 풀이해 온 “칭기스 칸”의 어릴 적 이름 “테무진(鐵木眞)”은 사실은 “테무진” 자신이 “부여별종(夫餘別種)” 가계인 주몽(朱蒙)의 손자로 고구려 3대왕이 된 “무쿠리(無恤, 무휼)”, 다른 이름으로 “마크리(莫來, 막래)”였던 “대무신(大武神)” 왕(王), 달리 “대해주류왕(大解朱留王)”의 후손임을 가리키는 이름이라고 밝혔다.
테무진의 왕호인 “칭기스 칸(Chinghiz Khan/Ghenghiz Khan)”을 라시드 웃딘(Rashid alDin)이 1310년 경에 쓴 《집사(集史)》와, 지난 세기 미국학자 해롤드 램(Harold Lamb) 등은 “왕중의 왕”이라는 뜻으로 잘못 풀이하고 있다. 그러나 저자는 이 왕호가 사실은 대조영과 그 아버지 걸걸중상(乞乞仲象)이 쓴 고구려-말갈어(靺鞨語) “진국왕(震國王)”의 투르크어 식 소리 “팅기즈 칸(Tinggiz Khan)”이 바뀐 말임을 밝힌다. 칭기스 칸의 손자로 원(元)나라를 세운 쿠빌라이 칸을 1266년경 만났다고 전하는 마르코 폴로(Marco Polo, 1254~1324년)의 《동방견문록》에서, 폴로는 칭기스 칸의 이름을 25번이나 언급하면서 24번이나 그의 이름을 “칭기 칸(Chinghi Kane)”이라고 부르는데, 이 말은 바로 “진국왕(震國王)”의 당시 소리 “친구이 칸(Chinghui Kan)”과 같다는 사실이 저자의 주장을 뒷받침한다.
또 1330년에 함둘라 카즈비니(Hamdallah Qazvini)가 쓴 《선별된 역사(Tarikh-i Gojide)》는 테무진이 나기 전까지는 그 이름조차도 없던 땅을 테무진이 통일하고는 자신이 창출한 나라 이름을 “몽골”이라고 이름 지었다고 한다. 일부 몽골학자들은 이것이 송(宋)나라 팽대아(彭大雅)가 칭기스 칸 시대의 몽골을 방문하고 1237년에 쓴 《흑달사략(黑事略)》에 근거하여 “멍거(銀)”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저자는 이 “몽골”은 사실은 칭기스 칸의 선조의 나라인 “말갈(靺鞨, 勿吉)”, 곧 조선시대의 학자가 “마읍(馬邑)”이라고도 본 “말[키우는] 고을(馬忽)”에 어원을 둔 말이라고 한다. 저자에 따르면, 고구려(高句麗)는 수도 평양성(平壤城) 등 오늘날 성시(城市)를 말하는 여러 개의 “고을=구려(句麗)”와 “일곱 개의 말 골(말갈)”로 이루어져 커진(高) 나라 “커구려(高句麗)”였기 때문이다.
결국 테무진은 자신의 이름 “테무진/대무신(大武神)”과 왕호 “칭기스 칸/진국왕(震國王)”, 그리고 자기 나라 이름을 “몽골 / 몰골 / 말골(靺鞨)”이라고 붙임으로써 자신이 고구려(高句麗) 왕족의 후손이자, 발해(渤海) “진국왕(震國王)”의 후손이요, “말갈국왕”, 곧 새로운 “발해국왕”임을 선언한 것이다.
이러한 놀라운 결론을 얻는 과정에서 저자는 “세계정복자” 칭기스칸 일가의 후손 “칸(황제)”들이 자신들의 조상에 관해 세계 곳곳에서 남긴 《황금의 책(Altan Daftar)》에 해당하는 책들을 분석했다. 그 결과 그는 칭기스 칸의 뿌리가 바로 고구려(高句麗) 시조 주몽(朱蒙)의 후손인 발해 왕족 대조영 가문임을 밝힌다. 《황금의 책》은 약 705년 전 일칸국 황제 가잔 칸의 명으로 《집사》를 쓴 라시드 웃딘이 “칸(황제)의 재고에는 항상 대 아미르들이 지키고 있어서... 황족이 아닌 외부인들은 절대로 보도록 허락되지 않는 책이 한 권 있다”고 한 전설적인 책이다. 이 《황금의 책》은 왜 철저하게 외부인으로부터 차단되어 있었던가?
그것은 바로 칸(황제) 가문의 “족보”였기 때문이다. 저자는 이러한 물음에 대한 해답을 구하는 과정에서 《신·구 당서》, 《삼국사기》, 《고려사》 등 한문으로 된 고대 동방사서는 물론, 《집사》, 《사국사》, 《투르크의 계보》, 《칭기스의 서》 등 페르시아, 중세 투르크어, 타타르어로 된 서방 사서, 《몽골비사》, 《셀렝게 부랴트종족의 역사》 등 중세 몽골어와 부랴트어 등으로 쓰인 사서를 중심으로 최대 무려 29개 국어로 쓰인 사서들과 사료들을 서로 비교, 대조하고, 그 텍스트를 해독하여, 숨겨진 우리 역사의 비밀을 하나하나 밝혔다.
발해 멸망에 관해서는 거란의 정복설, 백두산 폭발에 의한 멸망설 등이 있다. 그러나 그 뒤 발해인들이 어디로 갔는지에 관해서는 우리는 잘 모르고 있었다. 그런데 발해 왕가는 결코 사라진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왕건의 고려와 금나라, 또 오늘날 우리가 “몽골제국”으로 알고 있는 나라로 이어진 것이었다. 이 제국은 오늘날 몽골이라고 부르는 땅과 카자흐스탄, 키르기즈스탄, 우즈베키스탄, 투르크메니스탄 등 중앙아시아는 물론, 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 등 서남아시아, 이란, 이라크, 시리아, 이집트의 반대편 홍해의 아라비아 반도, 러시아, 동구 및 오스트리아, 독일 변경까지 뻗어나간 방대한 세계제국이었다. 한 마디로 영국, 프랑스, 이태리, 스페인 등 서구 몇 나라만 뺀 당시의 “전세계”이다. 그렇다면 지난 1995년 21세기의 새로운 “밀레니엄(천년)”의 도래를 앞두고 미국의 워싱턴 포스트지가 20세기까지 지난 천 년간의 역사 속에서 최고의 인물로 선정한 사람이 바로 칭기스칸이었다는 것도 놀랄 일은 아니다.
칭기스 칸이 탄생한 지 850년이 더 지난 오늘날까지 누구도 그 위대한 인물의 “뿌리”를 알 수 없었다. 그런데 저자는 국내외 저명한 사학자, 교수, 전문가들 가운데 그 누구도 혼자서는 결코 해낼 수 없었던 고대와 중세, 근세에 걸쳐 기록된 동·서방의 여러 가지 어렵고도 다양한 언어로 된 사서들을 해독해 내고, 이를 바탕으로 천재적인 추론과 법학도 다운 논리정연한 추리를 통해 칭기스 칸의 뿌리를 꼼꼼하게 한 세대 한 세대 차근차근 밝히고 있다. 그 결과 나온 것이 바로 이 《고구려-발해인 칭기스칸》이다. 이 책은 668년 고구려가 망한 이래 지난 1300년간의 “세계사를 다시 쓰게 할” 놀랍고도 치밀한 연구 결과물이다.
또 하나 주목할 점은 “고구려는 우리요, 말갈은 우리와 관계없는 퉁구스 종족이다” 고 보는 일부 우리 국사학자들과 러시아, 중국 등 주류학자들의 견해와는 달리, 저자는 놀랍게도 “고구려와 말갈은 다 같이 고구려 왕족으로 주몽의 후예”임을 밝히고 있다는 점이다. 이로 보아 이 글은 이러한 새 학설을 애써 무시하려는 국내외 전문가, 교수들의 냉담한 반응에 직면하나, 아니면 발해왕조의 민족적 성격에 관해 그들 사이에 큰 논쟁을 불러일으킬 것으로 보인다.
또 한 가지 중요한 것이 있다. 저자는 사라진 고구려가 발해-고려-금나라-원나라-청나라로 이어졌다는 엄청난 역사적 진실도 밝힌다. 저자는 《집사》에 “모든 콩그라트 종족의 시조”로 기록된 “황금항아리(Bastu-i jarrin)”가 몽골인들이 금(金)나라 황제를 부르는 “황금의 칸(Altan Khan)”이며, 그가 바로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에 나오는 “금행(金幸, *황금의 칸)”임을 밝힌다. “황금항아리”는 칭기스 칸의 부인 부르테 우진(Bu''te Kujin)의 가계로 《집사》에 기록된 콩그라트(Qongrat) 종족, 또 원(元)나라 제2황후들의 가계인 예키라스(Yikiras) 종족, 그리고 칭기스 칸의 직계 선조 가문인 코를라스(Korulas) 종족 등 콩그라트 주요 3지파의 공통선조이다.
또 한 가지, 우리 일부 학자들은 금나라와 청나라 황실이 신라왕족 김씨(金氏)의 후손이라고 잘못 보아왔다. 이와는 달리, 《지봉유설(芝峰類說, 1614년)》은 “후금(後金)”, 곧 청(淸)나라의 태조인 아이신교로누르하치(愛新覺羅努爾哈赤建)의 가문이 “전조(前朝)”, 곧 우리 고려(高麗)의 “왕씨(王氏)의 후손(裔)”이라고 했다. 신라 김씨가 아니라 고려 왕건의 후손이 청나라 황실이라는 이야기이다. 그런데 마침 청나라 건륭제(乾隆帝)의 명으로 지은 《만주원류고, 1778년》에서 청황실은 스스로가 발해 말갈의 대씨(大氏)와 금나라 왕가 “왕씨(王氏)”인 완안씨(完顔氏)의 후손이라고 자처한다. 저자에 따르면, 두 기록은 결국 같은 말이라는 이야기이다.
결국 저자는 “고려(高麗) 공비(?妃)의 아들 영락(永樂) 황제의 명(明)나라를 빼더라도, 고구려(高句麗)와 발해(渤海)는 놀랍게도 고려(高麗), 금(金), 원(元), 청(淸)나라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한 마디로 당(唐), 송(宋) 이래 이 두 왕조를 제외하고 지난 1000년간의 이른바 “중국왕조”들 모두가 우리 “조선민족의 왕조들”이었다는 이야기이다. 우리의 상식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가를 실감나게 하는 연구결과이다.
되돌아보면, 지난 2004년의 중국의 "동북공정"이라는 충격적 사건 이래, 우리 정부는 국가적 정책으로 엄청난 재원을 동원하여, 수백 명의 직원과 연구원을 채용하여 “동북아역사재단”이라는 기관을 만들고, 이를 통해 이른바 “동북공정”에 대처해 왔다. 그러나 그 연구결과는 대개 고구려 발해가 중원의 역사적 왕조와는 별개의 독립된 국가라는 정도의 외곽만 두드리는 정도였다. 그러나 이제 한 외로운 연구가의 분투로 이를 둘러싼 한판 승부는 완전히 끝난 것으로 보인다. 아니 오히려 이제 “역(逆)동북공정” 또는 “대륙공정”이라는 열화가 일어날지도 모른다. 하여튼 역사의 진실게임의 결과는 이제 명백해 보인다.
끝으로 저자는 자신의 연구결과를 통해 오늘날 형체도 없는 “코리안 웨이브(Korean Waves)”를 자랑삼아 떠들면서도 방향 없이 흘러가는 우리의 정치, 경제, 사회의 현실을 지적하면서, 나침반 없이 우왕좌왕하는 우리가 잊어버린 우리 역사의 진실을 다시 찾고, 이를 돌아봄으로써 장차 세계 속에서 우리가 나아가야 할 미래의 방향에 관해 새로운 청사진을 그리도록 우리에게 촉구한다. 과연 역사는 되풀이될 것인가?
▣ 작가 소개
저자 : 전원철
저자 전원철은 중앙아시아 및 북방민족 사학가 / 고구려 발해학회 회원이다. 서울대학교 외교학과를 졸업하고, 아이오와대학교 로스쿨 법학박사(JD) 학위 취득, 뉴욕주립대학교 법학박사후과정(LLM)을 밟고, 미국로펌(변호사)에서 근무했다. 유엔난민고등판무관실(UNHCR) 체첸전쟁 현장주재관, 외무부 유엔국인권사회과 유네스코담당 자문관, 유네스코한국위원회에 근무, 공군학사장교를 역임했다. 저서로는『고구려-발해족장(渤海族帳)의 칭기스 칸(2011.7.)』,『고구려-발해왕족의 후손 칭기스 칸(2015.5.)』등이 있다.
▣ 주요 목차
서 문
1. 아르카나 쿤으로 들어간 키얀 일행과 콩그라트 종족의시조 “황금항아리” 사이의 관계
2. 제2권이 밝히는 역사적 대드라마의 줄거리
I. 아르카나 쿤을 먼저 뛰쳐나온 “콩그라트”와 나중에 탈출한 “모골” 종족의 두 다른 이야기
1. 콩그라트 종족의 시조 황금항아리의 정체는 야발의 4대손 금행(今幸)
2. 집사 황금항아리의 3아들과 금행의 아들 금사 함보 3형제 이름의 검증
3. 이제 이해되는 금(金) 태조(太祖)의 “여진-발해 본 동일가(女直渤海本同一家)” 설의 참뜻
4. 발해 야발의 4대손 금행에서 나온 “만세일계”의 고구려, 발해, 금金나라, 원元나라, 그리고 청淸나라 황가
II. 황금항아리 금행金幸이 아르카나 쿤을 뛰쳐나온 때는 해동성국(海東盛國)을 이룩한 발해 선왕(宣王) 때
1. 발해 제2대 무왕 때 발해-당·신라 전쟁으로 상실한 발해의 한강 이북 영토
2. 야발의 현손 발해 제10대 선왕(宣王) 대인수(大仁秀)의 발해 실지 수복 결단과 성공
3. 선왕(宣王) 때 콩그라트 종족의 아르카나 쿤 대출정으로발해 남쪽 주군을 수복한 일
4. 황금항아리 금행은 고려세계(高麗世系)의 고려 태조 왕건의 외할아버지인 “서해용왕(西海龍王)” “두은점(豆恩) 각간(角干)”
5. 콩그라트 종족의 대출정으로 발해 남쪽 주군을 수복한 해는 826년
6. 대출정으로 회복한 발해 영토의 범위는 개성 옆 평산까지의 땅
7. 콩그라트의 도시조 금행은 코르라스 계 칭기스 칸의 15대 선조이자, 예키라스 계 아골타의 8대 선조
III. “조신(女眞) 땅” “완안부”로 들어간 금행의 아들 금시조 함보(普)와 야라(耶懶)로들어간 칭기스 칸의 14대조 보활리(保活里)
1. 금행과 그 아들 금시조 함보(普) 등이 “신라인”이라는 학계와 대중의 철저한 오해
2. 금시조 함보의 형 아고래(阿古)와 아들 “콩그라트”는 “평산파(平山派) 대(大)큰(今) 씨”
IV. 금시조 함보와 아우 보활리가 들어간 조신(女眞) “완안부(完顔部)”는 사실은 발해 땅 “반안군(盤安郡)”
1. 쿠바이시레 함보가 정착한 발해 반안군(盤安郡)의 “클씨네부(紇石烈部)”는 오늘날 삼수(三水) 갑산(甲山)
2. 투스부다우 보활리가 간 “야라(耶懶)”는 “고려나(高麗那)”라는 말로 오늘날 함흥 땅
V. 함보 일행이 “완안부”, 곧 발해 “반안군(盤安郡)”으로 들어간 두 까닭
1. 신라의 발해 수복령 “패서도(황해도)” 교란
2. 발해의 잦은 왕권 교체로 인한 “반안군(盤安郡)”내의 2종족 분규
3. 몽골비사 “알란 고와” 이야기의 지리적 배경의 진실은 우리 땅
VI. 평주에 남은 함보의 형 “아고래”와 야라로 간 보활리의 손자들이 궁예의 고구려에서 겪은 왕건의 궁정혁명
1. 서해용왕 금행의 평주에서 궁예의 고구려로 간 아고래의 손자 “칼지다이(阿志泰, 아지태)”와 보활리의 손자 “바르가 바아타르 타이상 노욘(渤海 莫賀大相郞)”
2. 알란 코와의 할아버지 때 모든 콩그라트의 왕 “칼지다이 칸(Kaljiday Khan)”이 궁예의 권신 “아지태(阿志泰)”임을 보여주는 고려사가) 궁예(弓裔)의 권신 “칼지타이(阿志泰)”와 왕건王建 사이의 악인연
3. 보활리 손자 “바르가 바아타르 타이상 노욘”은 칸(궁예)의 셋째 아들 부르테 치노를 데리고 “베데(北狄, 몽골 부족)”로 온 장본인
4. “발해 대상 랑”이 부르테 치노를 데리고 떠난 까닭을 알려주는 “카라 바다 기슭의 전쟁”은 왕건의 궁정혁명
5. 왕건의 궁정혁명으로 발해로 피신한 뒤 발해의 멸망으로또 다시 서북으로 간 콩그라트와 코르라스 지파
VII. 발해 멸망으로 아르카나 쿤 탈출 후 “발해 막하돌 대상 랑”이 창설한 “부랴트” 곧 ‘부여씨’ 3종족과 아들 “코리 메르겐고려 말갈”이 창설한 코리-부랴트구려부여씨 종족
1. “발해 막하돌 대상 랑”은 칭기스 칸의 선조의 부락인 “코리-부랴트고려부여 종족” 등 부랴트(부여씨 3종족의 시조 “쿠케 보카” 곧 ‘걸가 보고’
2. “바르가 바아타르 타이상 노욘”은 칭기스 칸의 10대조 알란 고와의 코리-부랴트 종족의 기원
3. 부랴트 3종족의 시조 “발해 막하돌”의 “황금의 계보”는 발해 제2왕계의 시조 대야발의 9대째 후손 계보로 칭기스 칸 선조의 계보
4. 알란 고와의 외가와 친가 사이의 친족관계는 금행의 후손으로 8촌과 6촌 종형제자매 사이
VIII. 칭기스 칸의 코리-투마드, 곧 코르라스 부 알란 고와에서 테무진까지 10선조 이야기
1. 코리-부랴트 족장 코리 메르겐의 딸로 칭기스 칸의 10대 선조인 알란 고와 곧 아란阿蘭 걸가乞哥
2. 알란 고와의 3째 아들로 칭기스 칸의 가계 “보르지긴 씨”의 시조인 “보돈차르 뭉칵” 곧 “보잔자르 칸”
3. 테무진의 8대조 “카비치 바아타르” 곧 ‘걸가씨 막하돌’ “부카(Buqa)” 곧 ‘보고寶庫’
4. 테무진의 7대조 메넨 토돈
5. 테무진의 6대조 카이도 8형제를 잘라이르 종족이 참살한 이야기
6. 테무진의 5대조 “바이 싱코르 독신”과 두 형제 차라카 링쿰솔고 님금과 차오진조선
7. 칭기스 칸의 4대 선조 “툼비나 칸”은 모든 콩그라트인의 권좌를 수복한 “자일간 칸” 곧 ‘솔곤조선칸’과 동시대인
8. 칭기스 칸의 증조로 금나라 예키라스役拏氏 역라씨의 “알탄 칸金汗”에게 도전한 용감한 “카불 칸”
9. 테무진의 할아버지 “바르탄 바아타르”는 곧 ‘바랴(부여)땅 막하돌’
10. 바르탄 바아타르의 형 “오킨 바르칵”을 살해한 “알탄 칸”
11. 테무진의 아버지 예수게이 바아타르
12. 콩그라트 종족의 “아르슬란 칸” 곧 ‘아리씨랑阿里氏郞’이 고종사촌 오킨 바르칵의 죽음에 대한 복수로 공격한 금나라 북경
13. 암바가이 칸이 지명한 코탈라 칸과 예수게이의 타타르 종족에 대한 복수
IX. 세계정복자 칭기스 칸, “테무진”새로운 “대무신” 왕의 탄생
1. 테무진(鐵木)의 뜻은 “철인(鐵人)”이 아닌 “대무신(大武神)”왕
2. 칭기스 칸의 뜻은 “팅기스 칸” 곧 “진국왕(震國王)”
3. 테무진 칭기스 칸(震國王)이 세운 몽골은 “말갈(靺鞨)”, 곧 발해를 계승한 나라
X. 결론: 세계정복자 고구려-발해인 칭기스 칸과 우리의 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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