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 출판사서평
후쿠시마 제1원전 폭발사고 5주년,
3.1과 3.11을 잇는 상상력을 제안하다
식민지지배와 후쿠시마 원전사고를 연결시키는
역사적, 예술적 상상력을 통해 연대의 힘을 이끌어내다
『다시 후쿠시마를 마주한다는 것』은 2013년 봄부터 2014년 여름까지 약 1년 4개월에 걸쳐 일본 6개 지역을 순회한 정주하 작가의 사진전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의 전시 현장에 서 펼쳐진 대화의 기록이다. 이후에도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넘어서서 대화를 이어가기 위해 내미는 손이며, 미지의 독자를 향해 바다에 흘려보내는 유리병 편지이다.
한국의 사진작가 정주하가 후쿠시마 원전사고 이후 진행해온 작업의 결과물(‘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연작)을 일본 순회하며 전시하게 된 것은 ‘정주하 사진전 실행위원회’라는 이름으로 한국과 일본의 여러 연구자와 예술가들이 모여 뜻을 같이했기 때문이다. 서경식과 한홍구, 다카하시 데쓰야는 특히 이 작업의 준비과정부터 함께하며 작품들에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라는 문제적인 제목을 붙이기도 했다. 이 사진 작업과 전시라는 일련의 과정은 제목이 암시하는 대로, 후쿠시마를 공간적, 시간적 경계를 넘어 사유해야 한다는 의지로 이루어졌다. 좌담 역시 처음부터 사진전과 함께 기획된 것으로 예술이 촉발한 어떤 문제의식을, 혹은 어떤 상상력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고자 하는 의지를 담고 있다. 어찌 보면 사진 작업의 준비부터 전시, 좌담, 그리고 그 결과물의 출판까지가 커다란 하나의 공동작업이라고 볼 수 있다.
사진전을 주최하고 좌담에 참여한 이들은 재일조선인 지식인이자 작가 서경식, 사진작가 정주가, 역사학자 한홍구, 철학자 다카하시 데쓰야, 그 밖에도 일본과 한국의 저명한 연구자, 사진작가, PD, 시인, 소설가 등이다.(아래 지은이 정보 참조) 후쿠시마 출신의 철학자와 작가, 또 오키나와에서 활동하는 사진작가, 비평가, 또 재일조선인 연구자, 작가 등이 만나 각자 자기가 선 자리에서, 약자의 피해를 부인하고 망각하는 가해자의 폭력에 어떻게 맞서야 하며, 좁은 시야에 갇혀 있는 우리의 상상력을 어떻게 펼쳐나가야 할지에 대해 진심 어린 대화를 나눈 것이다.
참여자들뿐 아니라 사진전이 열린 장소들도 무척 의미심장하다. 원전사고의 현장인 후쿠시마는 물론이고, [원폭도]뿐 아니라 관동대지진 당시 난징대학살을 기리는 ‘통한의 비’가 전시되어 있는 사이타마의 마루키미술관, 오키나와의 사키마미술관, 또 전몰 미술학도의 유작을 모아 전시하는 나가노의 시나노데생관, 교토의 국제평화뮤지엄 등의 장소 한 곳 한 곳이 역사와 예술의 관계에 대해 큰 물음을 던지고 있는 곳이다.
또 책에는 이들 패널들 사이의 이야기뿐 아니라 그 자리에 모인 청중들과의 밀도 있는 대화도 포함되어 있다. 젊은 세대와 기성 세대, 한국과 일본, 그리고 일본 안에서도 여러 지역 주민들 사이의 인식의 차이와 그러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어떤 연대의 지점을 찾기 위한 치열한 대화가 펼쳐진다.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원전 문제에 식민지주의 비판이라는 관점을 도입하다
방사능의 불안은 사라지지 않는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원폭, 체르노빌 원전 사고를 경험한 인간에게 방사능 누출의 공포는 당연한 것이다. 이런 불안을 외면하고 은폐하는 것은 원전으로 이익을 보는 세력(원전 마피아)이 바라는 바이자, 눈앞의 이익을 위해 모든 감각을 차단하는 근시안적인 태도가 세상을 지배하도록 내버려두는 일이다. 망각과 부인을 조장하는 세력에 저항하기 위해 개개인은 무엇을 해야 하고,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이에 대한 답을 찾으려면 먼저 과거의 가해와 피해가 종결된 것이 아님을 인식해야 한다.
이 책(혹은 사진 촬영과 전시 좌담을 비롯한 일련의 과정)의 가장 중요한 문제의식은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라는 전시 제목(이자 연작의 제목)에서 생생히 드러난다. 후쿠시마의 아픔에 일제시기 식민지치하 시인의 시선을 겹쳐놓은 이 제목은 예민하고도 거대한 질문을 던진다. 후쿠시마와 식민지 조선, 후쿠시마와 오키나와는 어떻게 연결되는가? 이들의 피해를 같은 것이라 말할 수 있나? 이 문제들은 후쿠시마만의 문제, 식민지 조선만의 문제, 오키나와만의 문제가 아닌가? 이들은, 그리고 우리는 왜 만나야 하나?
이런 논의의 과정에서 후쿠시마의 조선인 학교, 후쿠시마의 거대한 철탑을 세우는 데 투입된 식민지 조선인들의 노동 등 한 번도 조명받지 못한 역사적 사실들이 거론되고, 그를 둘러싼 개인적 경험들이 환기되기도 한다. 또 일견 전혀 무관한 경험으로 보이는, 원전의 직접 피해지역인 후쿠시마와 미군기지 문제에 맞서는 오키나와의 경험은 짧게는 2차대전 이후, 길게는 메이지유신 이후 ‘부국강병’을 내세우는 거대한 흐름의 반대편에서 서로 맞닿는다. 후쿠시마 원전사고를 그들만의 일, 지나간 일로 치부하지 못하게 하는 강력한 역사적 비유가 성립되는 것이다.
재해가 있고 원전사고가 있었는데, 명백하게 일본 국민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즉 일본이 근대 역사를 통해 다른 나라를 침략하고, 다른 나라를 식민지지배하고, 패전 후 소위 말하는 ‘전후 부흥’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온 국책의 결과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것을 자신들의 이야기, 일본 내부의 일로만 치부하는 것은 문제가 아닌가, 나아가 위험한 것이 아닌가 하는 마음입니다.-서경식(85)
방사능 재해는 일본이 국책으로 도쿄전력과 함께 전 세계에 끼친 가해입니다. 전 세계의 바다를 더럽혔습니다. 공기도 더럽혔습니다. 그래서 사실은 전 세계를 향해 사죄하고, 두 번 다시 하지 않겠다고 약속하고, 그 약속을 지켜야 하는, 그런 사안입니다. 그런데 일본에서는 일본 국민의 피해만을 이야기하고 있고, 게다가 일본 국민의 피해조차 제대로 다루지 않은 채 시간이 지나고 있습니다. 때문에 이 사고를 시간적으로 공간적으로 더욱 넓게, 국경을 넘어 바라보는 것이 필요하지 않나 생각했습니다.-서경식(86)
그곳(다카다마킨잔)은 일본에서도 굴지의 금광이었는데 후쿠시마 현의 거의 정중앙에 있습니다. 지금은 갱도로 들어가 내부를 견학하도록 되어 있는데요. 그곳에서도 전쟁 때에 조선인들이 강제노동을 했습니다. 다카다마킨잔에 대해서는 학교에서 배운 기억이 있는데 거의 잊어버렸습니다. 조선인 강제연행, 강제노동이 있었다는 사실은 전혀 몰랐고요. 이것도 원전사고가 없었다면 모르고 지나갔을 역사인 것입니다.-다카하시 데쓰야 (148)
이상화의 시는 일본 제국주의에 의해 식민지지배를 당하고 다양한 고난을 강요당한 조선민족 사람들의 생각을 매우 아름다운 시문에 담아 표현했다고 봅니다. 이 시를 통해 조선민족 사람들이 후쿠시마의 고난을 상상하게 하는 것이지요. 동시에 저희 같은 일본인에게는 후쿠시마의 ‘재앙(disaster)’이 단순한 재앙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과거에 우리가, 우리 일본이 ‘빼앗아 버린 조선의 들판’과 그곳에 살았던 사람들의 고난을 어디까지 상상할 수 있겠는가 하는 물음을 던지고 있다는 사실도 점점 깨닫게 되었습니다.-다카하시 데쓰야(149)
실은 후쿠시마 현에는 전시에 채굴되던 우라늄광산도 있습니다. 왜 우라늄을 전시 중에 채굴했냐면, 일본도 원폭 개발을 하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전시 중에는 몇몇 나라가 경쟁적으로 원폭 개발을 하고 있었고, 일본이 손을 댄 것은 미국보다 앞섭니다. 다만 폭탄을 만들기에 충분한 양질의 우라늄광산이 발견되지 않았고, 농축 기술도 뒤떨어져 미국에 뒤진 것이지요. 가장 유력한 우라늄광산으로 지정된 광산이 후쿠시마 현에 있었다는 사실도 묻혀진 역사로, 3·11 후에 마침내 상기하게 된 세계사의 단면이라고 생각합니다.-하야오 다카노리(163)
일본이 군사력으로 영토를 확대하려 한 역사적 과정을 떠받치고 있던 국가적인 욕망이나 사상은 1945년 패전으로도 완전히 끝나지 않았고, 후쿠시마의 원전사고를 경험한 지금도 끝나지 않았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국가의 권력자들, 자기가 지배세력이라고 생각하는 자들이 지금 어떤 생각을 하는가 하는 관점에서 보면 후쿠시마와 오키나와에 공통점이 있다고 생각합니다.-가마쿠라 히데야(187)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라는 제목에 대해 누가 누구에게 하는 말인가 고민했습니다. 이곳 오키나와에서 전시를 하니 우리에게 하는 말일까요? 그렇다면 ‘우리’란 누구인가요? 그리고 누가 건네는 말인가요? 이것은 조선의 해방을 바라던 조선 시인의 말이고, 이것을 다시 사진전의 제목으로 선택한 것은 현재 조선반도에서 살고 있는 한국 분이고, 그것을 재일조선인 서경식 선생이 조직화해서 일본의 가마쿠라 PD가 방송을 만들고, 오키나와의 사키마 관장이 이곳에서 함께 하자고 했지요. 여러 가지 생각이 담겨 있겠지요. 저는 사진을 보고 후쿠시마 분들과 만나고 싶다고 생각했습니다. 오키나와인과 조선인과의 관계를 만들어야 하고, 오키나와와 후쿠시마의 관계를 만들어야 하고, 후쿠시마와 조선과의 관계를 만들어야 하고, 후쿠시마토 이외의 야마토와의 관계를 만들어야 합니다. 또 오키나와에 있는 일본인과의 관계도요.-치넨 우시(202)
일본의 식민지주의, 또는 식민지지배는 진정 끝난 것인가요? 저는 끝나지 않았다고 실감합니다. 여러분도 사회적 문제와 관련하여, 비슷하게 실감하는 경우가 있지 않으신가요? 저는 조선학교의 무상화 제외라는 역사적 사건에 반대하기 위해, 79명의 시인들을 모아 문집을 내고, 저희 나름대로 문부성이나 정부에 항의를 계속했습니다. 무상화 제외는 2010년 2월 하순에 떠오른 사건입니다. 기묘하게도 2011년 3월보다 1년 정도 전이어서, 이미 거기서 대규모의 인재가 발생한 것입니다. 무상화 제외는 원전사고에도 필적할 만한 ‘법의 파괴’랄까요, 헌법이 보장하는 교육을 받을 권리, 또는 60년간 줄곧 각자의 삶의 터전에서 교육 받고, 생활해온 사람들의 일상을 조금도 상상하지 않고 통째로 파괴하려 했다는 의미에서, 그야말로 방사능 오염과 나란히 논할 수 있는 사건이었다고 생각합니다.-가와즈 기요에(266)
방사능 오염은 현의 경계에서 멈춰주지 않습니다. 미야기 현의 남부나 군마 현의 북부, 혹은 치바 현까지 심하게 오염된 곳이 있는데, 근거도 없이 왠지 치바에 있는 것만으로 ‘후쿠시마는 남의 일’이라는 심리가 되고, 국가는 후쿠시마 현 사람이 아니면 피난 보조금도 주지 않는 언어도단의 정책을 시행해도 ‘아, 그런가?’ 하는 식으로 지나쳐버리게 됩니다. 그런 ‘상상의 경계선’이 우리를 성찰이나 연대로부터 멀어지게 합니다.
이것은 후쿠시마와 도쿄, 도쿄와 오키나와 사이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요, 아까 젊은 분이 차별, 식민지주의라고 말씀하셨는데, 일본과 외국 사이에도, 한국와 일본, 한국와 중국, 유럽과의 사이에도 보이지 않는 무수히 많은 경계선이 놓여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보지 않는 것을 보고, 보이지 않는 경계선을 극복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도전입니다. 그렇게 할 수 없다면 성찰도 연대도 불가능합니다.-서경식(289~290)
피해자와 가해자의 가장 큰 차이는, 피해자는 피해를 강요당하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지만, 가해자는 가해를 잊고 지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가해 사실을 잊어도 아무 문제 없이 살 수 있어요. 선택할 수 없었던 것은 마찬가지라고 하더라도 거기에 큰 차이가 있습니다.-안자코 유카(312)
시간적으로 공간적으로 경계를 넘어서는 상상력은 예술을 통해서 가능하다
인간의 척도를 넘어서는 원폭의 피해를 상상하기 위해 식민지지배를 비롯한 여러 역사적 사건들과 개인적 경험을 환기하는 것은 꼭 필요한 일이지만, 그것이 쉬운 일일 리는 없다. 다양한 국적, 성별, 연령, 배경을 지닌 이 책의 참여자들은 그것이 예술을 통해서 가능하다는 믿음을 공유하는 이들이다. 그래서 이 책의 중심에 사진작품, 사진예술이 놓인 이유는 편의적인 것이 아니라 필연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책에는 정주하 작가의 사진뿐 아니라 식민지지배를 겪은 이상화 시인의 시, 아우슈비츠에서 유대인 학살을 겪은 이탈리아인 작가 프리모 레비의 시, 원자폭탄 투하를 경험한 일본 소설가 하라 다미키의 일화와 작품, 그밖에도 일본에서 화가를 꿈꾸다 전쟁에 징집되어 전사한 젊은 미술학도의 그림 등이 함께 이야기된다.
그렇게 함으로써 이 책은 거대한 폭력 앞에서 고통을 겪는 사람들을 위해 실질적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 같은 예술이, 눈에 보이지 않는 시간과 공간의 경계를 뛰어넘는 공감과 연대를 가능하게 하는 디딤돌이 된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한다.
프리모 레비는 본인이 아우슈비츠를 경험했을 뿐만 아니라, 2000년 전 화석을 보며 홀로코스트와 연결짓고, 홀로코스트를 히로시마와 연결지을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 같은 상상력의 확대 속에서 고통을 함께 나누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지상의 유력자들이여, 새로운 독의 주인이여.’라고 말합니다. 이들은 핵무기 소유자들이지요. 그리고 ‘하늘의 재앙만으로도 충분하다.’라고도 합니다. 말 그대로 지진, 쓰나미만으로도 이미 차고 넘친다, 왜 그 이상의 짓을 하는가 묻는 것입니다. 프리모 레비는 이번 일이 있기 훨씬 전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만, 그의 상상력은 오늘날의 후쿠시마에까지 미치고 있는 것 같습니다.-서경식(99)
마지막으로 한마디 덧붙이자면, 역시 저에게는 매우 그리운 풍경이라는 것입니다. 사진집의 표지에 있는 들판이 그 전형입니다만, 논 가운데 신사 건물이 있는 경치, 바다가 보이는 언덕 위에 달그림자 떠오르는 경치 등은 모두 제가 어렸을 적에 종일 뛰어놀다가 슬슬 집으로 돌아갈까 하던 때에 보았던 광경입니다. 그래서 그리운 것이지요. 매우 아름답게 찍어주셨지만 거기에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라는 제목이 중첩되면, 대체 이것은 무엇인가 하는 지점에서부터 저의 탐구가 시작됩니다. 제게는 매우 그립고 친숙하고 마음을 안정시켜주던 고향이 뭔가 꺼림칙한 곳으로 바뀌었다고 할까요. 불편하거나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되어버린 경험입니다.-다카하시 데쓰야(161~162)
고작 70년 전 식민지지배의 역사조차 은폐되고 있고, 이를 기억하려는 시도는 반일이라든지 자학이라는 식으로 내몰리고 있습니다. 보다 짧은 척도, 보다 좁은 시야로 들어가자 선동하고 있는 것이지요. 게다가 매우 중요한 점은 ‘전쟁 때 우리를 속고 있었다.’고 더 이상 핑계댈 수 없게 되었다는 점입니다. 지금도 계속해서 속고 있는 모습을 지금도 우리 눈앞에서 지켜보게 되었으니까요. 앞장서서 속으려는 사람들을 똑똑히 보고 있고요.
그렇기 때문에 이 순간에 무엇인가를 저지하는 힘을 갖지 못하더라도, 저지할 수 있는 상상력을 가져야 한다고 호소하는 것이 바로 예술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일반 사람들에 대한 경종이기도 하지만, 일본에서 문화와 관련된 일에 종사하는 사람들-글을 쓰는 사람, 예술가, 음악가-에 대해서도 매우 엄혹한 경좀임을 받아들여야 합니다.-서경식(164)
그(정주하)의 사진들에는 파괴된 풍경이 아닌, 다양한 역사를 축적해온 인간의 삶이 그대로 비춰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은 한 명도 없어요. 한 사람도 그곳에 살 수 없으니까요. 바로 이 사실의 중대함을 전하고 있습니다.-사키마 미치오(167)
조금 허무주의 같지만, 제가 아는 바로는 예술은 유사 이래 인간의 행동을 순화하거나 바꾸는 일을 해내지 못했습니다. 저 역시 바라는 것이 오직 한 가지인데요, 예술이란 이름으로 혹은 ‘순수한 예술’이란 이름으로,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에 일는 많은 비겁한 일들에 대해서 눈을 감고 사는 것만은 피하고 싶다는 것이 솔직한 제 심정입니다.-정주하(185)
알고서도 보려 하지 않는 사람들을 붙잡아 되돌리는 힘이 예술에 있습니다. 예술에 그런 힘이 있다기보다는 예술이 그런 역할을 해주지 않는다면 달리 무엇이 할 수 있겠는가 하는 마음입니다. 고통스러운 학살이나 국가폭력이 있었다는 사실과 마치 무관한 것처럼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우리가 어떻게 그 의미를 전달할까요? 이 같은 노력 하나하나가 다양한 곳에서 각자의 고통을 어떻게 사람들에게 전할 수 있을까를 모색할 수 있었으면 합니다.-한홍구(216)
‘전몰’이라는 단어를 떼어내고, ‘위령’이라는 단어를 떼어내고, 저 그림이 놓여 있다고 합시다. 실로 평화로운 그림들이지요. 가장 사랑하는 부인을 그리고, 가장 사랑하는 애인을 그리고, 고향의 풍경을 그리고, 평소 존경하고 사랑하는 아버지나 어머니를 그렸지요. 얼마나 평화로운지 마치 가족사진을 보는 듯한 그림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전몰한 젊은이의 그림이라는 제목이 붙는 순간, 단순한 평온, 단순한 정숙, 단순한 안온이 아닌 또 다른 공기를 느끼지 않을 수 없지요.-구보시마 세이치로(226)
특히 현대시라든지 현대미술과 같이 ‘현대’라는 이름이 붙는 예술은 현대성을 주제로 하기 때문에, 현재진행형으로 무엇이 문제인지를 끊임없이 찾아야 합니다. 지금은 정말 위태로운 시대지요. 단순한 ‘부인’은 ‘인정하지 않음’이라서, 오늘날의 문제를 잘 찾지 않으면 분명 앞이 완전히 보이지 않는 암흑이 나타날 테니까요. 진정 우리는, 발을 내디딜 수 없는 불안에 내몰리고 있다는 사실을 표현해야 해요. 그것도 아름다움을 통해서 호소해야 합니다.-가와즈 기요에(288)
아우슈비츠 이후에, 그것도 독일어로 아우슈비츠의 경험을 전하는 엄청난 시를 쓴 시인이 있습니다. 파울 첼란은 이 문제에 대해 고통스러워하면서도 훌륭한 시를 남겼습니다. 그를 통해 아우슈비츠의 경험에 대해 우리가 사고할 수 있게 된 면도 있어요. 그렇기 때문에 정주하 선생의 사진을 보고 저도 ‘아름답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이 후쿠시마의 현실을 전하는 데에 반드시 방해가 되는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예술 작품을 통해서가 아니면 계승할 수 없는 기억이 있는 것 같아요.-다카하시 데쓰야(307)
‘상상하는 것’은 인간에게 주어진 가장 큰 힘의 하나입니다. 분명히 완전히 같은 경험을 하지 않는다면 온전히 그 사람의 마음을 알지는 못해요. 예를 들어 우리는 팔이 잘려나간 경험은 없지만, 작은 상처를 입은 경험을 가지고, 도끼로 팔을 잘렸다면 얼마나 아플지 상상할 수는 있습니다. 피해와 가해의 관계에 대해서도 같지 않을까요? 피해자에 관해서 피해 실태를 전부 아는 것이 아니라, 여러 형태로 상상해 보는 것이 연결하고자 하는 첫걸음이라고 생각합니다.-안자코 유카(322)
시간과 공간을 넘어 어떻게 연대할 것인가
종합하자면 이 책은 후쿠시마 원전사고 5주년을 맞아, 3·11을 더 잘 기억하고 기념하기 위한 것이다. 다시는 이런 고통이 반복되지 않도록 구조를 바꾸기 위해서는 타자의 고통에 대한 상상력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런 상상력을 바탕으로 권력이 그어놓은 다양한 허구적인 경계선을 극복하고 지리적, 역사적으로 서로 다른 입장에 처한 사람들 간의 연대를 모색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 고통을 당한 피해자들이 먼저 문제를 확장하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또 개인이 선택한 것은 아니지만 지리적으로 역사적으로 가해 세력에 속하게 된 사람들이 피해자에 더 많이 공감하고 연대할수록, 위험 수위에 달한 현재의 상황에 맞설 수 있다고 강조하기도 한다.
전시와 좌담에 참여한 다양한 패널과 청중들은 개개인이 처한 한계와 약함을 인정하고, 문제의식을 공유하며, 각자의 자리에서 어떻게 연대할 것인가를 모색했다. 그 기록은 더 깊은 성찰과, 더 넓은 공감을 얻기 위하여 일본에서 책으로 출간된 데 이어, 한국어로도 번역되었다. 현장에 함께하지는 못했지만 그곳에서 시작된 연대의 움직임을 한국 독자들에게까지 확장하고자 한다. 동아시아의 평화, 전 세계의 평화는 결코 개별적인 일이 아니다.
우리는 이번 재해로 많은 것을 생각하게 되었고, 아까도 말한 것처럼 ‘나락’의 밑바닥에서 조선뿐 아니라 중국 등을 포함한 동아시아 사람들에게 준 고통, 슬픔, 굴욕감을 겨우 알 수 있는 상황에 처했다고 생각합니다. 너무 늦었다고 해도 앞으로 분발하겠습니다. 사죄를 하고 안 하고의 문제가 아닙니다.-사사키 다카시(88)
상상 속의 경계선 구분으로 위험을 ‘남의 일’로 만들어서 현상을 그대로 유지하려고 하는 이런 발상이 아직도 일본에 남아 있습니다. 이것을 한국, 중국으로 확대시켜도 같은 구조가 보입니다. 한국은 원전 의존도가 높고 게다가 위험한 원전을 가동하고 있지만, 일본 사람들은 그것을 한국의 일로만 보고 있습니다. 한국에서는 일본의 후쿠시마에서 사고가 나도 ‘일본에서 일어난 일이고 우리는 안심해도 된다.’는 식으로 보려 합니다. 즉 우리의 척도를 넘어서는 원자력 재해의 실태가 기만적인 상상의 경계선이라는 발상에 의해 감추어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서경식(91~92)
나이를 먹으면 스스로의 약함을 받아들이는 것이 중요합니다. ‘약자’ 입장이 되면, 사회의 비인간성이 보여요. 그래서 ‘약하다, 강하다’로 사람을 판단하고 구분하는 일 자체가 옳지 않습니다. 약자 입장에서 보면 한 명 한 명이 둘도 없이 소중한 사람이니까, 자신이 아무리 약하고 힘이 없어도 진심으로 자기 자신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도 모두 소중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강해지지 않으면 안 된다, 똑바로 하지 않으면 안 된다, 힘을 키워야 한다는 풍조가 있는데 이는 잘못된 것입니다. 우리는 오히려 그러한 틀 자체를 뛰어넘어야 해요. 그리고 이는 국가와 국가 사이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국가와 국가가 싸워서 약한 나라를 쳐부수지요. 그렇게 되면 내몰린 쪽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으니, 마침내 무기를 들고 반격에 나서든지 핵무장을 하든지 합니다. 그러면 강한 나라는 합세해서 약한 나라를 쳐부수지요. 이렇게 가면 언제까지라도 평화는 오지 않습니다.
자신의 약함을 알고, 그런 약한 자신을 진정으로 수용하고 그리고 우선 자기 주변에 있는 약한 사람들을 중심으로, 약한 사람들이 진정으로 잘 살 수 있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서로 연대해 가는 것이 행복입니다. 현재 일본은 이와 반대로 가고 있고, 엄청난 불의가 지배하는 사회입니다. 그래서 매우 위험한 지점까지 왔어요. 이 위험에서 벗어나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당장 원전을 멈추는 일입니다.-쇼지 쓰토무(121~122)
첫 번째 별은 빈센트 반 고흐의 별입니다. 이것은 시각적인 별입니다. 두 번째는 윤동주라는 시인의 별입니다. 일본에서 대학을 다녔던 식민지시대의 저항 시인입니다. 이 별은 양심의 별이라고 생각합니다. 세 번째로 전 세계 사람들이 사랑하는 생텍쥐페리의 별은 상상력의 별입니다. 다른 하나는 어느 나라의 군대에나 있는 장군들의 별, 폭력의 별입니다. 다음으로는 여기 계신 서경식 선생의 형님들도 오래 계셨던 한국의 감옥에서 붙여주는 별이 있습니다. 한국에서는 감옥에 갔던 것을 ‘별을 하나 달았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실천으로서의 별입니다. 그리고 제 마음 속에 또 하나의 별이 떠올랐습니다. 그것은 후쿠시마의 별입니다. 그 별은 죽음의 별입니다. 저의 고향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파란 별로 다시 태어난다는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별을 ‘영혼의 불’이라고 부릅니다.
사진 속의 별을 보며 저는 저것이 ‘영혼의 별’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절망을 길게 경험하면 그 속에서 희망의 빛을 발견할 수 있다, 별을 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여기서 또 하나의 별을 품고 돌아가겠습니다. 후쿠시마의 별입니다.-서해성(207~208)
식민지주의라든지 제국이라는 중심이 있고, 주변화된 부분끼리는 문화적으로도 분단되어 있습니다. 서로 만남을 갖거나 대화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오히려 서로 적대하는 듯한 역사를 더듬고 있습니다. 후쿠시마 사람들이 지금은 피해자이지만 그 안에는 가해적 요소도 있어서 그런 이중성을 띠면서 살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우리들이 분단된 상태인 채로 저항하기는 어렵습니다. 이를 잘 알기 때문에 상대(정치권력)는 분단을 이어가게 하려는 것이지요. 이를 뛰어넘기 위해서는 물론 정치적으로도, 사회운동으로도 지혜를 모아야 하지만, 더 넓은 ‘상상력’이라든지 보다 긴 ‘척도’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야말로 보이지 않는 저 너머까지 미치는 ‘척도’입니다.-서경식 (210~211)
매우 불합리한 일이지만 주변화되고 고립된 측에서 손을 내밀고 말을 걸고 진로를 제시해야 합니다. 이쪽으로 가면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요. 전 세계에서 많은 마이너리티가 그런 일을 해온 것입니다. 일본이나 동아시아의 마이너리티만이 아니고요. 그들은 머조리티를 구하기 위해 스스로를 희생해서 손을 내밀었습니다.
머조리티가 그것을 요구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여러분이 그것을 해야 한다.’고 요구하면 단호히 거절해야 하지만, 우리 쪽은 그렇게 해왔고 앞으로도 그렇게 해야 합니다. 그 싸움은 눈앞에 보이는 정치적 투쟁임과 동시에, 지금 말한 것과 같은 긴 척도, 넓은 시야를 확보하는 예술적 투쟁이기도 합니다. 즉 머조리티들이 갇혀 있는 시야를 넓혀주는 일도 해야 한다는 것이죠.-서경식(212)
우리를 만나게 하는 것은 우리의 공통된 적입니다. 그것은 원전이고, 기지이고, 전쟁이라는 위협이고, 헌법 개악의 위협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식으로 우리가 만나는 것이 유쾌한 일은 아닙니다만, 우리가 만날 수 없다면 이길 수도 없습니다.-서경식(213)
고통의 하나하나는 모두 성격이 다릅니다. 손가락 하나가 상처를 입어도 칼로 베인 상처와 기름에 덴 화상은 다릅니다. 또 상처를 낸 것이 유리인지 칼인지 종이인지에 따라서도 아픔의 질이 전혀 다릅니다. 하지만 아픔을 느낀 사람만이 다른 사람의 아픔을 공유할 수 있습니다. ‘저게 뭐가 아프지? 내가 더 아프다.’라는 장면도 있을 수 있고, ‘나는 아픔을 느꼈기 때문에 너의 아픔을 안다.’는 것도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한홍구(214)
다만 지식만으로는 안 되기 때문에, 지난번에도 이야기한 것처럼 상상력을 가지고 자신의 경험과 타자의 경험을 이어가는 작업을 해야 합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각자가 각자의 장소에서 해나갈 수밖에 없는데, 우선은 역사를 알고 자신의 경험과 타자의 경험을 연결하는 노력을 하는 것부터, 우선 이렇게 답하겠습니다.-다카하시 데쓰야(322)
▣ 작가 소개
서경식
1951년 일본 교토에서 재일조선인 2세로 태어나 와세다대학 문학부 프랑스문학과를 졸업했다. 현재 도쿄케이자이대학 현대법학부 교수로 재직 중이다. 저서 중 『소년의 눈물』로 1995년 일본 에세이스트클럽상을 받았고 『시대의 증언자 쁘리모 레비를 찾아서』로 마르코폴로상을 받았다. 그 외에 저서로 『나의 서양미술 순례』, 『사라지지 않는 사람들』, 『디아스포라 기행』, 『만남』, 『역사의 증인 재일조선인』, 『후쿠시마 이후의 삶』, 『나의 조선미술 순례』, 『시의 힘』, 『내 서재 속 고전』등이 있다.
정주하
1958년 인천에서 태어나 독일 쾰른대학에서 학사 및 석사학위를 받았고 현재 백제예술대학 사진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독일 벨레펠트의 포토포럼, 크레펠트의 갈레리파브릭히더, 서울 예술의전당, 선재미술관, 한미사진미술관, 미국 시카고의 현대사진미술관, 휴스턴의 윌리엄스타워갤러리, 그리고 일본 사이타마의 근대미술관 등 여러 곳에서 개인전 및 그룹전을 가진 바 있다. 프랑스 파리 국립도서관, 한국 국립현대미술관, 한미사진미술관, 전북도립미술관 등에 작품이 소장되어 있으며 사진집으로는 『땅의 소리』, 『불안, 불―... 안』, 『서쪽바다』,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등이 있다.
한홍구
1959년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대학교 국사학과와 동대학원을 졸업하고, 미국 워싱턴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성공회대 교양학부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국가정보원 과거사건 진실 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 민간위원을 역임했으며 평화박물관 건립추진위원회 상임이사, 양심에 따른 병역 거부권 실현과 대체복무제도 개선을 위한 연대회의 공동집행위원장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 저서로 『대한민국사』 1~4권, 『한홍구의 현대사 다시읽기』,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습니다』(공저), 『하나의 대한민국, 두 개의 현실』(공저) 『지금 이 순간의 역사』, 『특강』, 『총을 들지 않는 사람들』(공저), 『직설』(공저), 『유신』 등이 있다.
다카하시 데쓰야
1956년 후쿠시마 현 출생. 도쿄대학 대학원 종합문화연구과 교수. 20세기 서구 철학을 연구하고 프랑스 철학자 자크 데리다 연구로도 알려졌다. 저서로는 『전후 책임론』, 『야스쿠니 문제』, 『국가와 희생』, 『희생의 시스템 후쿠시마·오키나와』, 『오키나와의 미군기지 ‘현외 이설’을 생각한다』, 『단절의 세기 증언의 시대: 전쟁의 기억을 둘러싼 대화』(공저), 『후쿠시마 이후의 삶』(공저) 등이 있다.
사사키 다카시
1939년 홋카이도 오비히로 출생. 스페인사상가. 세이센여자대학 등에서 교편을 잡은 후, 정년 전에 퇴직하여 고향인 후쿠오카현 미나미소마시 하라마치구로 귀향했다. 2011년 동일본대지진 후의 후쿠시마 제1원전 사고에 의해 한때 자택이 피난지역으로 지정되었지만(현재는 해제되었다), 피난가지 않고 자택에 머물며 치매를 앓는 부인과 생활하며 일상을 블로그를 통해 발신하고 있다. 저서로는 『원전의 재앙 속에서 살다』 등이 있다.
쇼지 쓰토무
1932년 출생. 일본그리스도교단 목사, 일본그리스도교협의회(NCC) 총 간사 등을 역임. 1970~1980년대 한국 민주화운동을 지원. 고려박물관 초대 이사장을 거쳐 현재는 이사를 맡고 있다. 저서로는 『납치문제를 다시 생각한다』(공저) 등이 있다.
하야오 다카노리
1973년 후쿠시마 현 출생. 도쿄게이자이대학 준교수. 2011년 3월 11일 센다이 시에서 재해를 입고, 직후 오사카로 피난, 현재는 고후 시에 살고 있다. 피해자의 피난, 보양, 이주를 지원하는 ‘3·11전국협의회’ 공동대표. 저서로는 『유대와 이스라엘 사이: 민족/국민의 아포리아』, 『중학생의 질문 상자 국가란 무엇인가?: 함께 생각해보고 싶은 ‘나와 국가’의 관계』, 역서로는 『디아스포라의 힘』(공역), 『홀로코스트에서 가자로: 팔레스티나의 정치경제학』(공역) 등이 있다.
히가 도요미쓰
1950년 오키나와 현 출생. 오키나와를 중심으로 활동하는 사진가. 주된 사진전, 작품으로 ‘시마쿠토바로 이야기하는 전세戰世’, ‘나나무이’(2005), 도쿄국립근대미술관 ‘오키나와 프리즘 1872~2008’ 전(2008), 후쿠시마 아시아미술관 ‘제4회 후쿠시마 아시아미술 트리엔날레’(2009), 사키마미술관 ‘뼈로부터의 전세’(2010), 사키마미술관 ‘기억과 초상 오키나와와 한국 사진교류전’(2015) 외. 사진집으로는 『빨간 여주』, 『빛나는 나나무이의 신들』, 『포토 도큐먼트 뼈의 전세』 등이 있다.
가마쿠라 히데야
1962년 나가노 현 출생. NHK 프로듀서. NHK스페셜 ‘조문상의 유서/싱가폴 BC급 전범 재판’(1991), NHK스페셜 ‘기시 노부스케와 안보 개정/감춰진 개헌 구상’(1995), NHK스페셜'' ‘러시아: 작은 사람들의 기억’(2000), ETV특집 ‘아우슈비츠 증언자는 왜 자살했는가: 작가 프리모 레비로의 여행’(2003), 마음의 시대 ‘후쿠시마를 걸으며: 나에게 있어서 3·11’(2011) 외 다수의 작품을 연출했다. 저서로는 『노모한 숨겨진 ‘전쟁’』, 『크로스 로드 오키나와: 세계에서 본 오키나와, 오키나와에서 본 세계』 등이 있다.
구보시마 세이치로
1941년 도쿄 출생. 전쟁의 혼란기에 아버지 미즈카미 쓰토무와 이별, 1977년에 재회. 1979년에 나가노현에 요절한 화가의 작품을 중심으로 전시하는 시나노데생관을 설립. 1997년에는 전몰 미술학도들의 유작이 된 회화, 작품, 미술도구, 편지 등을 전시하는 무언관을 개관. 저서로는 『아버지에게 보내는 편지』, 『시나노데생관 일기』, 『나의 사랑하는 요절 화가들』, 『무언관: 전몰 미술학도 「기도하는 그림」』 등이 있다.
가와즈 기요에
1961년 도쿄 출생. 시인. 시집으로 『언니의 붓끝』, 『여름의 끝』, 『아리아, 이 밤의 나체를 위하여』, 『학교 가는 언덕길』 등이 있다. 평론집으로는 『루리안: 타자와 함께 있는 시』, 『어둠보다 검은 빛의 노래를 15인의 시수들』, 『파레시아: 지진 후, 시란 무엇인가』 등이 있다. 2010년 『조선학교 무상화 제외 반대 선집』을 발행했다.
안자코 유카
1966년 출생. 리쓰메이칸대학 문학부 교수. 전공은 조선 근현대사, 국제관계사, 일한관계사. 주요 논문으로 「조선에서의 총동원 체재의 구조」 『이와나미강좌 동아시아 근현대사 제6권』, 『도록 식민지조선에 살다: 한국 민족문제연구소 소장자료』, 『「한류」의 안과 밖-한국 문화의 힘과 동아시아 융합 반응』 등이 있다.
치넨 우시
1966년 오키나와 현 출생. 작가. 저서로 『우시가 간다: 식민지주의를 탐험하고 나를 찾는 여행』, 『외면의 폭력: 지넨 우시 정치발언집』, 공저로 『투쟁하는 경계: 복귀 후 세대의 오키나와로부터의 보고』, 『오키나와, 탈식민지의 태동』 등이 있다. 펼처보기 닫기
역자 : 형진의
현재 한남대학교 교양융복합대학 조교수로 재직 중이다. 한남대학교와 동 대학원 일어일문학과를 졸업하고, 일본 히토쓰바시대학 대학원 언어사회연구과에서 석사와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전공은 일본어학, 언어사회학, 저서로는 『일본어 논술문』(공저), 역서로는『역사의 증인 재일조선인』, 『원전의 재앙 속에서 살다』, 『언어, 헤게모니, 권력』(공역) 등이 있다.
▣ 주요 목차
한국어판을 펴내며 서경식
한국어판을 펴내며 정주하
사진의 아름다움이 이야기하는 것
자신의 약함을 수용하는 것
예술의 힘이란 무엇인가
‘고통의 연대’의 가능성
예술의 힘과 그 역할을 둘러싸고
‘상상의 경계선’을 극복한다
식민지주의라는 시각
미나미소마 일기
원전=사진론:사진가 정주하가 제기하는 핵 시대의 표상과 사고
일본어판 편집 후기
옮긴이 후기
후쿠시마 제1원전 폭발사고 5주년,
3.1과 3.11을 잇는 상상력을 제안하다
식민지지배와 후쿠시마 원전사고를 연결시키는
역사적, 예술적 상상력을 통해 연대의 힘을 이끌어내다
『다시 후쿠시마를 마주한다는 것』은 2013년 봄부터 2014년 여름까지 약 1년 4개월에 걸쳐 일본 6개 지역을 순회한 정주하 작가의 사진전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의 전시 현장에 서 펼쳐진 대화의 기록이다. 이후에도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넘어서서 대화를 이어가기 위해 내미는 손이며, 미지의 독자를 향해 바다에 흘려보내는 유리병 편지이다.
한국의 사진작가 정주하가 후쿠시마 원전사고 이후 진행해온 작업의 결과물(‘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연작)을 일본 순회하며 전시하게 된 것은 ‘정주하 사진전 실행위원회’라는 이름으로 한국과 일본의 여러 연구자와 예술가들이 모여 뜻을 같이했기 때문이다. 서경식과 한홍구, 다카하시 데쓰야는 특히 이 작업의 준비과정부터 함께하며 작품들에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라는 문제적인 제목을 붙이기도 했다. 이 사진 작업과 전시라는 일련의 과정은 제목이 암시하는 대로, 후쿠시마를 공간적, 시간적 경계를 넘어 사유해야 한다는 의지로 이루어졌다. 좌담 역시 처음부터 사진전과 함께 기획된 것으로 예술이 촉발한 어떤 문제의식을, 혹은 어떤 상상력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고자 하는 의지를 담고 있다. 어찌 보면 사진 작업의 준비부터 전시, 좌담, 그리고 그 결과물의 출판까지가 커다란 하나의 공동작업이라고 볼 수 있다.
사진전을 주최하고 좌담에 참여한 이들은 재일조선인 지식인이자 작가 서경식, 사진작가 정주가, 역사학자 한홍구, 철학자 다카하시 데쓰야, 그 밖에도 일본과 한국의 저명한 연구자, 사진작가, PD, 시인, 소설가 등이다.(아래 지은이 정보 참조) 후쿠시마 출신의 철학자와 작가, 또 오키나와에서 활동하는 사진작가, 비평가, 또 재일조선인 연구자, 작가 등이 만나 각자 자기가 선 자리에서, 약자의 피해를 부인하고 망각하는 가해자의 폭력에 어떻게 맞서야 하며, 좁은 시야에 갇혀 있는 우리의 상상력을 어떻게 펼쳐나가야 할지에 대해 진심 어린 대화를 나눈 것이다.
참여자들뿐 아니라 사진전이 열린 장소들도 무척 의미심장하다. 원전사고의 현장인 후쿠시마는 물론이고, [원폭도]뿐 아니라 관동대지진 당시 난징대학살을 기리는 ‘통한의 비’가 전시되어 있는 사이타마의 마루키미술관, 오키나와의 사키마미술관, 또 전몰 미술학도의 유작을 모아 전시하는 나가노의 시나노데생관, 교토의 국제평화뮤지엄 등의 장소 한 곳 한 곳이 역사와 예술의 관계에 대해 큰 물음을 던지고 있는 곳이다.
또 책에는 이들 패널들 사이의 이야기뿐 아니라 그 자리에 모인 청중들과의 밀도 있는 대화도 포함되어 있다. 젊은 세대와 기성 세대, 한국과 일본, 그리고 일본 안에서도 여러 지역 주민들 사이의 인식의 차이와 그러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어떤 연대의 지점을 찾기 위한 치열한 대화가 펼쳐진다.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원전 문제에 식민지주의 비판이라는 관점을 도입하다
방사능의 불안은 사라지지 않는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원폭, 체르노빌 원전 사고를 경험한 인간에게 방사능 누출의 공포는 당연한 것이다. 이런 불안을 외면하고 은폐하는 것은 원전으로 이익을 보는 세력(원전 마피아)이 바라는 바이자, 눈앞의 이익을 위해 모든 감각을 차단하는 근시안적인 태도가 세상을 지배하도록 내버려두는 일이다. 망각과 부인을 조장하는 세력에 저항하기 위해 개개인은 무엇을 해야 하고,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이에 대한 답을 찾으려면 먼저 과거의 가해와 피해가 종결된 것이 아님을 인식해야 한다.
이 책(혹은 사진 촬영과 전시 좌담을 비롯한 일련의 과정)의 가장 중요한 문제의식은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라는 전시 제목(이자 연작의 제목)에서 생생히 드러난다. 후쿠시마의 아픔에 일제시기 식민지치하 시인의 시선을 겹쳐놓은 이 제목은 예민하고도 거대한 질문을 던진다. 후쿠시마와 식민지 조선, 후쿠시마와 오키나와는 어떻게 연결되는가? 이들의 피해를 같은 것이라 말할 수 있나? 이 문제들은 후쿠시마만의 문제, 식민지 조선만의 문제, 오키나와만의 문제가 아닌가? 이들은, 그리고 우리는 왜 만나야 하나?
이런 논의의 과정에서 후쿠시마의 조선인 학교, 후쿠시마의 거대한 철탑을 세우는 데 투입된 식민지 조선인들의 노동 등 한 번도 조명받지 못한 역사적 사실들이 거론되고, 그를 둘러싼 개인적 경험들이 환기되기도 한다. 또 일견 전혀 무관한 경험으로 보이는, 원전의 직접 피해지역인 후쿠시마와 미군기지 문제에 맞서는 오키나와의 경험은 짧게는 2차대전 이후, 길게는 메이지유신 이후 ‘부국강병’을 내세우는 거대한 흐름의 반대편에서 서로 맞닿는다. 후쿠시마 원전사고를 그들만의 일, 지나간 일로 치부하지 못하게 하는 강력한 역사적 비유가 성립되는 것이다.
재해가 있고 원전사고가 있었는데, 명백하게 일본 국민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즉 일본이 근대 역사를 통해 다른 나라를 침략하고, 다른 나라를 식민지지배하고, 패전 후 소위 말하는 ‘전후 부흥’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온 국책의 결과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것을 자신들의 이야기, 일본 내부의 일로만 치부하는 것은 문제가 아닌가, 나아가 위험한 것이 아닌가 하는 마음입니다.-서경식(85)
방사능 재해는 일본이 국책으로 도쿄전력과 함께 전 세계에 끼친 가해입니다. 전 세계의 바다를 더럽혔습니다. 공기도 더럽혔습니다. 그래서 사실은 전 세계를 향해 사죄하고, 두 번 다시 하지 않겠다고 약속하고, 그 약속을 지켜야 하는, 그런 사안입니다. 그런데 일본에서는 일본 국민의 피해만을 이야기하고 있고, 게다가 일본 국민의 피해조차 제대로 다루지 않은 채 시간이 지나고 있습니다. 때문에 이 사고를 시간적으로 공간적으로 더욱 넓게, 국경을 넘어 바라보는 것이 필요하지 않나 생각했습니다.-서경식(86)
그곳(다카다마킨잔)은 일본에서도 굴지의 금광이었는데 후쿠시마 현의 거의 정중앙에 있습니다. 지금은 갱도로 들어가 내부를 견학하도록 되어 있는데요. 그곳에서도 전쟁 때에 조선인들이 강제노동을 했습니다. 다카다마킨잔에 대해서는 학교에서 배운 기억이 있는데 거의 잊어버렸습니다. 조선인 강제연행, 강제노동이 있었다는 사실은 전혀 몰랐고요. 이것도 원전사고가 없었다면 모르고 지나갔을 역사인 것입니다.-다카하시 데쓰야 (148)
이상화의 시는 일본 제국주의에 의해 식민지지배를 당하고 다양한 고난을 강요당한 조선민족 사람들의 생각을 매우 아름다운 시문에 담아 표현했다고 봅니다. 이 시를 통해 조선민족 사람들이 후쿠시마의 고난을 상상하게 하는 것이지요. 동시에 저희 같은 일본인에게는 후쿠시마의 ‘재앙(disaster)’이 단순한 재앙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과거에 우리가, 우리 일본이 ‘빼앗아 버린 조선의 들판’과 그곳에 살았던 사람들의 고난을 어디까지 상상할 수 있겠는가 하는 물음을 던지고 있다는 사실도 점점 깨닫게 되었습니다.-다카하시 데쓰야(149)
실은 후쿠시마 현에는 전시에 채굴되던 우라늄광산도 있습니다. 왜 우라늄을 전시 중에 채굴했냐면, 일본도 원폭 개발을 하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전시 중에는 몇몇 나라가 경쟁적으로 원폭 개발을 하고 있었고, 일본이 손을 댄 것은 미국보다 앞섭니다. 다만 폭탄을 만들기에 충분한 양질의 우라늄광산이 발견되지 않았고, 농축 기술도 뒤떨어져 미국에 뒤진 것이지요. 가장 유력한 우라늄광산으로 지정된 광산이 후쿠시마 현에 있었다는 사실도 묻혀진 역사로, 3·11 후에 마침내 상기하게 된 세계사의 단면이라고 생각합니다.-하야오 다카노리(163)
일본이 군사력으로 영토를 확대하려 한 역사적 과정을 떠받치고 있던 국가적인 욕망이나 사상은 1945년 패전으로도 완전히 끝나지 않았고, 후쿠시마의 원전사고를 경험한 지금도 끝나지 않았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국가의 권력자들, 자기가 지배세력이라고 생각하는 자들이 지금 어떤 생각을 하는가 하는 관점에서 보면 후쿠시마와 오키나와에 공통점이 있다고 생각합니다.-가마쿠라 히데야(187)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라는 제목에 대해 누가 누구에게 하는 말인가 고민했습니다. 이곳 오키나와에서 전시를 하니 우리에게 하는 말일까요? 그렇다면 ‘우리’란 누구인가요? 그리고 누가 건네는 말인가요? 이것은 조선의 해방을 바라던 조선 시인의 말이고, 이것을 다시 사진전의 제목으로 선택한 것은 현재 조선반도에서 살고 있는 한국 분이고, 그것을 재일조선인 서경식 선생이 조직화해서 일본의 가마쿠라 PD가 방송을 만들고, 오키나와의 사키마 관장이 이곳에서 함께 하자고 했지요. 여러 가지 생각이 담겨 있겠지요. 저는 사진을 보고 후쿠시마 분들과 만나고 싶다고 생각했습니다. 오키나와인과 조선인과의 관계를 만들어야 하고, 오키나와와 후쿠시마의 관계를 만들어야 하고, 후쿠시마와 조선과의 관계를 만들어야 하고, 후쿠시마토 이외의 야마토와의 관계를 만들어야 합니다. 또 오키나와에 있는 일본인과의 관계도요.-치넨 우시(202)
일본의 식민지주의, 또는 식민지지배는 진정 끝난 것인가요? 저는 끝나지 않았다고 실감합니다. 여러분도 사회적 문제와 관련하여, 비슷하게 실감하는 경우가 있지 않으신가요? 저는 조선학교의 무상화 제외라는 역사적 사건에 반대하기 위해, 79명의 시인들을 모아 문집을 내고, 저희 나름대로 문부성이나 정부에 항의를 계속했습니다. 무상화 제외는 2010년 2월 하순에 떠오른 사건입니다. 기묘하게도 2011년 3월보다 1년 정도 전이어서, 이미 거기서 대규모의 인재가 발생한 것입니다. 무상화 제외는 원전사고에도 필적할 만한 ‘법의 파괴’랄까요, 헌법이 보장하는 교육을 받을 권리, 또는 60년간 줄곧 각자의 삶의 터전에서 교육 받고, 생활해온 사람들의 일상을 조금도 상상하지 않고 통째로 파괴하려 했다는 의미에서, 그야말로 방사능 오염과 나란히 논할 수 있는 사건이었다고 생각합니다.-가와즈 기요에(266)
방사능 오염은 현의 경계에서 멈춰주지 않습니다. 미야기 현의 남부나 군마 현의 북부, 혹은 치바 현까지 심하게 오염된 곳이 있는데, 근거도 없이 왠지 치바에 있는 것만으로 ‘후쿠시마는 남의 일’이라는 심리가 되고, 국가는 후쿠시마 현 사람이 아니면 피난 보조금도 주지 않는 언어도단의 정책을 시행해도 ‘아, 그런가?’ 하는 식으로 지나쳐버리게 됩니다. 그런 ‘상상의 경계선’이 우리를 성찰이나 연대로부터 멀어지게 합니다.
이것은 후쿠시마와 도쿄, 도쿄와 오키나와 사이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요, 아까 젊은 분이 차별, 식민지주의라고 말씀하셨는데, 일본과 외국 사이에도, 한국와 일본, 한국와 중국, 유럽과의 사이에도 보이지 않는 무수히 많은 경계선이 놓여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보지 않는 것을 보고, 보이지 않는 경계선을 극복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도전입니다. 그렇게 할 수 없다면 성찰도 연대도 불가능합니다.-서경식(289~290)
피해자와 가해자의 가장 큰 차이는, 피해자는 피해를 강요당하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지만, 가해자는 가해를 잊고 지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가해 사실을 잊어도 아무 문제 없이 살 수 있어요. 선택할 수 없었던 것은 마찬가지라고 하더라도 거기에 큰 차이가 있습니다.-안자코 유카(312)
시간적으로 공간적으로 경계를 넘어서는 상상력은 예술을 통해서 가능하다
인간의 척도를 넘어서는 원폭의 피해를 상상하기 위해 식민지지배를 비롯한 여러 역사적 사건들과 개인적 경험을 환기하는 것은 꼭 필요한 일이지만, 그것이 쉬운 일일 리는 없다. 다양한 국적, 성별, 연령, 배경을 지닌 이 책의 참여자들은 그것이 예술을 통해서 가능하다는 믿음을 공유하는 이들이다. 그래서 이 책의 중심에 사진작품, 사진예술이 놓인 이유는 편의적인 것이 아니라 필연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책에는 정주하 작가의 사진뿐 아니라 식민지지배를 겪은 이상화 시인의 시, 아우슈비츠에서 유대인 학살을 겪은 이탈리아인 작가 프리모 레비의 시, 원자폭탄 투하를 경험한 일본 소설가 하라 다미키의 일화와 작품, 그밖에도 일본에서 화가를 꿈꾸다 전쟁에 징집되어 전사한 젊은 미술학도의 그림 등이 함께 이야기된다.
그렇게 함으로써 이 책은 거대한 폭력 앞에서 고통을 겪는 사람들을 위해 실질적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 같은 예술이, 눈에 보이지 않는 시간과 공간의 경계를 뛰어넘는 공감과 연대를 가능하게 하는 디딤돌이 된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한다.
프리모 레비는 본인이 아우슈비츠를 경험했을 뿐만 아니라, 2000년 전 화석을 보며 홀로코스트와 연결짓고, 홀로코스트를 히로시마와 연결지을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 같은 상상력의 확대 속에서 고통을 함께 나누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지상의 유력자들이여, 새로운 독의 주인이여.’라고 말합니다. 이들은 핵무기 소유자들이지요. 그리고 ‘하늘의 재앙만으로도 충분하다.’라고도 합니다. 말 그대로 지진, 쓰나미만으로도 이미 차고 넘친다, 왜 그 이상의 짓을 하는가 묻는 것입니다. 프리모 레비는 이번 일이 있기 훨씬 전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만, 그의 상상력은 오늘날의 후쿠시마에까지 미치고 있는 것 같습니다.-서경식(99)
마지막으로 한마디 덧붙이자면, 역시 저에게는 매우 그리운 풍경이라는 것입니다. 사진집의 표지에 있는 들판이 그 전형입니다만, 논 가운데 신사 건물이 있는 경치, 바다가 보이는 언덕 위에 달그림자 떠오르는 경치 등은 모두 제가 어렸을 적에 종일 뛰어놀다가 슬슬 집으로 돌아갈까 하던 때에 보았던 광경입니다. 그래서 그리운 것이지요. 매우 아름답게 찍어주셨지만 거기에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라는 제목이 중첩되면, 대체 이것은 무엇인가 하는 지점에서부터 저의 탐구가 시작됩니다. 제게는 매우 그립고 친숙하고 마음을 안정시켜주던 고향이 뭔가 꺼림칙한 곳으로 바뀌었다고 할까요. 불편하거나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되어버린 경험입니다.-다카하시 데쓰야(161~162)
고작 70년 전 식민지지배의 역사조차 은폐되고 있고, 이를 기억하려는 시도는 반일이라든지 자학이라는 식으로 내몰리고 있습니다. 보다 짧은 척도, 보다 좁은 시야로 들어가자 선동하고 있는 것이지요. 게다가 매우 중요한 점은 ‘전쟁 때 우리를 속고 있었다.’고 더 이상 핑계댈 수 없게 되었다는 점입니다. 지금도 계속해서 속고 있는 모습을 지금도 우리 눈앞에서 지켜보게 되었으니까요. 앞장서서 속으려는 사람들을 똑똑히 보고 있고요.
그렇기 때문에 이 순간에 무엇인가를 저지하는 힘을 갖지 못하더라도, 저지할 수 있는 상상력을 가져야 한다고 호소하는 것이 바로 예술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일반 사람들에 대한 경종이기도 하지만, 일본에서 문화와 관련된 일에 종사하는 사람들-글을 쓰는 사람, 예술가, 음악가-에 대해서도 매우 엄혹한 경좀임을 받아들여야 합니다.-서경식(164)
그(정주하)의 사진들에는 파괴된 풍경이 아닌, 다양한 역사를 축적해온 인간의 삶이 그대로 비춰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은 한 명도 없어요. 한 사람도 그곳에 살 수 없으니까요. 바로 이 사실의 중대함을 전하고 있습니다.-사키마 미치오(167)
조금 허무주의 같지만, 제가 아는 바로는 예술은 유사 이래 인간의 행동을 순화하거나 바꾸는 일을 해내지 못했습니다. 저 역시 바라는 것이 오직 한 가지인데요, 예술이란 이름으로 혹은 ‘순수한 예술’이란 이름으로,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에 일는 많은 비겁한 일들에 대해서 눈을 감고 사는 것만은 피하고 싶다는 것이 솔직한 제 심정입니다.-정주하(185)
알고서도 보려 하지 않는 사람들을 붙잡아 되돌리는 힘이 예술에 있습니다. 예술에 그런 힘이 있다기보다는 예술이 그런 역할을 해주지 않는다면 달리 무엇이 할 수 있겠는가 하는 마음입니다. 고통스러운 학살이나 국가폭력이 있었다는 사실과 마치 무관한 것처럼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우리가 어떻게 그 의미를 전달할까요? 이 같은 노력 하나하나가 다양한 곳에서 각자의 고통을 어떻게 사람들에게 전할 수 있을까를 모색할 수 있었으면 합니다.-한홍구(216)
‘전몰’이라는 단어를 떼어내고, ‘위령’이라는 단어를 떼어내고, 저 그림이 놓여 있다고 합시다. 실로 평화로운 그림들이지요. 가장 사랑하는 부인을 그리고, 가장 사랑하는 애인을 그리고, 고향의 풍경을 그리고, 평소 존경하고 사랑하는 아버지나 어머니를 그렸지요. 얼마나 평화로운지 마치 가족사진을 보는 듯한 그림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전몰한 젊은이의 그림이라는 제목이 붙는 순간, 단순한 평온, 단순한 정숙, 단순한 안온이 아닌 또 다른 공기를 느끼지 않을 수 없지요.-구보시마 세이치로(226)
특히 현대시라든지 현대미술과 같이 ‘현대’라는 이름이 붙는 예술은 현대성을 주제로 하기 때문에, 현재진행형으로 무엇이 문제인지를 끊임없이 찾아야 합니다. 지금은 정말 위태로운 시대지요. 단순한 ‘부인’은 ‘인정하지 않음’이라서, 오늘날의 문제를 잘 찾지 않으면 분명 앞이 완전히 보이지 않는 암흑이 나타날 테니까요. 진정 우리는, 발을 내디딜 수 없는 불안에 내몰리고 있다는 사실을 표현해야 해요. 그것도 아름다움을 통해서 호소해야 합니다.-가와즈 기요에(288)
아우슈비츠 이후에, 그것도 독일어로 아우슈비츠의 경험을 전하는 엄청난 시를 쓴 시인이 있습니다. 파울 첼란은 이 문제에 대해 고통스러워하면서도 훌륭한 시를 남겼습니다. 그를 통해 아우슈비츠의 경험에 대해 우리가 사고할 수 있게 된 면도 있어요. 그렇기 때문에 정주하 선생의 사진을 보고 저도 ‘아름답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이 후쿠시마의 현실을 전하는 데에 반드시 방해가 되는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예술 작품을 통해서가 아니면 계승할 수 없는 기억이 있는 것 같아요.-다카하시 데쓰야(307)
‘상상하는 것’은 인간에게 주어진 가장 큰 힘의 하나입니다. 분명히 완전히 같은 경험을 하지 않는다면 온전히 그 사람의 마음을 알지는 못해요. 예를 들어 우리는 팔이 잘려나간 경험은 없지만, 작은 상처를 입은 경험을 가지고, 도끼로 팔을 잘렸다면 얼마나 아플지 상상할 수는 있습니다. 피해와 가해의 관계에 대해서도 같지 않을까요? 피해자에 관해서 피해 실태를 전부 아는 것이 아니라, 여러 형태로 상상해 보는 것이 연결하고자 하는 첫걸음이라고 생각합니다.-안자코 유카(322)
시간과 공간을 넘어 어떻게 연대할 것인가
종합하자면 이 책은 후쿠시마 원전사고 5주년을 맞아, 3·11을 더 잘 기억하고 기념하기 위한 것이다. 다시는 이런 고통이 반복되지 않도록 구조를 바꾸기 위해서는 타자의 고통에 대한 상상력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런 상상력을 바탕으로 권력이 그어놓은 다양한 허구적인 경계선을 극복하고 지리적, 역사적으로 서로 다른 입장에 처한 사람들 간의 연대를 모색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 고통을 당한 피해자들이 먼저 문제를 확장하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또 개인이 선택한 것은 아니지만 지리적으로 역사적으로 가해 세력에 속하게 된 사람들이 피해자에 더 많이 공감하고 연대할수록, 위험 수위에 달한 현재의 상황에 맞설 수 있다고 강조하기도 한다.
전시와 좌담에 참여한 다양한 패널과 청중들은 개개인이 처한 한계와 약함을 인정하고, 문제의식을 공유하며, 각자의 자리에서 어떻게 연대할 것인가를 모색했다. 그 기록은 더 깊은 성찰과, 더 넓은 공감을 얻기 위하여 일본에서 책으로 출간된 데 이어, 한국어로도 번역되었다. 현장에 함께하지는 못했지만 그곳에서 시작된 연대의 움직임을 한국 독자들에게까지 확장하고자 한다. 동아시아의 평화, 전 세계의 평화는 결코 개별적인 일이 아니다.
우리는 이번 재해로 많은 것을 생각하게 되었고, 아까도 말한 것처럼 ‘나락’의 밑바닥에서 조선뿐 아니라 중국 등을 포함한 동아시아 사람들에게 준 고통, 슬픔, 굴욕감을 겨우 알 수 있는 상황에 처했다고 생각합니다. 너무 늦었다고 해도 앞으로 분발하겠습니다. 사죄를 하고 안 하고의 문제가 아닙니다.-사사키 다카시(88)
상상 속의 경계선 구분으로 위험을 ‘남의 일’로 만들어서 현상을 그대로 유지하려고 하는 이런 발상이 아직도 일본에 남아 있습니다. 이것을 한국, 중국으로 확대시켜도 같은 구조가 보입니다. 한국은 원전 의존도가 높고 게다가 위험한 원전을 가동하고 있지만, 일본 사람들은 그것을 한국의 일로만 보고 있습니다. 한국에서는 일본의 후쿠시마에서 사고가 나도 ‘일본에서 일어난 일이고 우리는 안심해도 된다.’는 식으로 보려 합니다. 즉 우리의 척도를 넘어서는 원자력 재해의 실태가 기만적인 상상의 경계선이라는 발상에 의해 감추어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서경식(91~92)
나이를 먹으면 스스로의 약함을 받아들이는 것이 중요합니다. ‘약자’ 입장이 되면, 사회의 비인간성이 보여요. 그래서 ‘약하다, 강하다’로 사람을 판단하고 구분하는 일 자체가 옳지 않습니다. 약자 입장에서 보면 한 명 한 명이 둘도 없이 소중한 사람이니까, 자신이 아무리 약하고 힘이 없어도 진심으로 자기 자신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도 모두 소중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강해지지 않으면 안 된다, 똑바로 하지 않으면 안 된다, 힘을 키워야 한다는 풍조가 있는데 이는 잘못된 것입니다. 우리는 오히려 그러한 틀 자체를 뛰어넘어야 해요. 그리고 이는 국가와 국가 사이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국가와 국가가 싸워서 약한 나라를 쳐부수지요. 그렇게 되면 내몰린 쪽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으니, 마침내 무기를 들고 반격에 나서든지 핵무장을 하든지 합니다. 그러면 강한 나라는 합세해서 약한 나라를 쳐부수지요. 이렇게 가면 언제까지라도 평화는 오지 않습니다.
자신의 약함을 알고, 그런 약한 자신을 진정으로 수용하고 그리고 우선 자기 주변에 있는 약한 사람들을 중심으로, 약한 사람들이 진정으로 잘 살 수 있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서로 연대해 가는 것이 행복입니다. 현재 일본은 이와 반대로 가고 있고, 엄청난 불의가 지배하는 사회입니다. 그래서 매우 위험한 지점까지 왔어요. 이 위험에서 벗어나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당장 원전을 멈추는 일입니다.-쇼지 쓰토무(121~122)
첫 번째 별은 빈센트 반 고흐의 별입니다. 이것은 시각적인 별입니다. 두 번째는 윤동주라는 시인의 별입니다. 일본에서 대학을 다녔던 식민지시대의 저항 시인입니다. 이 별은 양심의 별이라고 생각합니다. 세 번째로 전 세계 사람들이 사랑하는 생텍쥐페리의 별은 상상력의 별입니다. 다른 하나는 어느 나라의 군대에나 있는 장군들의 별, 폭력의 별입니다. 다음으로는 여기 계신 서경식 선생의 형님들도 오래 계셨던 한국의 감옥에서 붙여주는 별이 있습니다. 한국에서는 감옥에 갔던 것을 ‘별을 하나 달았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실천으로서의 별입니다. 그리고 제 마음 속에 또 하나의 별이 떠올랐습니다. 그것은 후쿠시마의 별입니다. 그 별은 죽음의 별입니다. 저의 고향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파란 별로 다시 태어난다는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별을 ‘영혼의 불’이라고 부릅니다.
사진 속의 별을 보며 저는 저것이 ‘영혼의 별’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절망을 길게 경험하면 그 속에서 희망의 빛을 발견할 수 있다, 별을 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여기서 또 하나의 별을 품고 돌아가겠습니다. 후쿠시마의 별입니다.-서해성(207~208)
식민지주의라든지 제국이라는 중심이 있고, 주변화된 부분끼리는 문화적으로도 분단되어 있습니다. 서로 만남을 갖거나 대화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오히려 서로 적대하는 듯한 역사를 더듬고 있습니다. 후쿠시마 사람들이 지금은 피해자이지만 그 안에는 가해적 요소도 있어서 그런 이중성을 띠면서 살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우리들이 분단된 상태인 채로 저항하기는 어렵습니다. 이를 잘 알기 때문에 상대(정치권력)는 분단을 이어가게 하려는 것이지요. 이를 뛰어넘기 위해서는 물론 정치적으로도, 사회운동으로도 지혜를 모아야 하지만, 더 넓은 ‘상상력’이라든지 보다 긴 ‘척도’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야말로 보이지 않는 저 너머까지 미치는 ‘척도’입니다.-서경식 (210~211)
매우 불합리한 일이지만 주변화되고 고립된 측에서 손을 내밀고 말을 걸고 진로를 제시해야 합니다. 이쪽으로 가면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요. 전 세계에서 많은 마이너리티가 그런 일을 해온 것입니다. 일본이나 동아시아의 마이너리티만이 아니고요. 그들은 머조리티를 구하기 위해 스스로를 희생해서 손을 내밀었습니다.
머조리티가 그것을 요구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여러분이 그것을 해야 한다.’고 요구하면 단호히 거절해야 하지만, 우리 쪽은 그렇게 해왔고 앞으로도 그렇게 해야 합니다. 그 싸움은 눈앞에 보이는 정치적 투쟁임과 동시에, 지금 말한 것과 같은 긴 척도, 넓은 시야를 확보하는 예술적 투쟁이기도 합니다. 즉 머조리티들이 갇혀 있는 시야를 넓혀주는 일도 해야 한다는 것이죠.-서경식(212)
우리를 만나게 하는 것은 우리의 공통된 적입니다. 그것은 원전이고, 기지이고, 전쟁이라는 위협이고, 헌법 개악의 위협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식으로 우리가 만나는 것이 유쾌한 일은 아닙니다만, 우리가 만날 수 없다면 이길 수도 없습니다.-서경식(213)
고통의 하나하나는 모두 성격이 다릅니다. 손가락 하나가 상처를 입어도 칼로 베인 상처와 기름에 덴 화상은 다릅니다. 또 상처를 낸 것이 유리인지 칼인지 종이인지에 따라서도 아픔의 질이 전혀 다릅니다. 하지만 아픔을 느낀 사람만이 다른 사람의 아픔을 공유할 수 있습니다. ‘저게 뭐가 아프지? 내가 더 아프다.’라는 장면도 있을 수 있고, ‘나는 아픔을 느꼈기 때문에 너의 아픔을 안다.’는 것도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한홍구(214)
다만 지식만으로는 안 되기 때문에, 지난번에도 이야기한 것처럼 상상력을 가지고 자신의 경험과 타자의 경험을 이어가는 작업을 해야 합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각자가 각자의 장소에서 해나갈 수밖에 없는데, 우선은 역사를 알고 자신의 경험과 타자의 경험을 연결하는 노력을 하는 것부터, 우선 이렇게 답하겠습니다.-다카하시 데쓰야(322)
▣ 작가 소개
서경식
1951년 일본 교토에서 재일조선인 2세로 태어나 와세다대학 문학부 프랑스문학과를 졸업했다. 현재 도쿄케이자이대학 현대법학부 교수로 재직 중이다. 저서 중 『소년의 눈물』로 1995년 일본 에세이스트클럽상을 받았고 『시대의 증언자 쁘리모 레비를 찾아서』로 마르코폴로상을 받았다. 그 외에 저서로 『나의 서양미술 순례』, 『사라지지 않는 사람들』, 『디아스포라 기행』, 『만남』, 『역사의 증인 재일조선인』, 『후쿠시마 이후의 삶』, 『나의 조선미술 순례』, 『시의 힘』, 『내 서재 속 고전』등이 있다.
정주하
1958년 인천에서 태어나 독일 쾰른대학에서 학사 및 석사학위를 받았고 현재 백제예술대학 사진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독일 벨레펠트의 포토포럼, 크레펠트의 갈레리파브릭히더, 서울 예술의전당, 선재미술관, 한미사진미술관, 미국 시카고의 현대사진미술관, 휴스턴의 윌리엄스타워갤러리, 그리고 일본 사이타마의 근대미술관 등 여러 곳에서 개인전 및 그룹전을 가진 바 있다. 프랑스 파리 국립도서관, 한국 국립현대미술관, 한미사진미술관, 전북도립미술관 등에 작품이 소장되어 있으며 사진집으로는 『땅의 소리』, 『불안, 불―... 안』, 『서쪽바다』,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등이 있다.
한홍구
1959년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대학교 국사학과와 동대학원을 졸업하고, 미국 워싱턴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성공회대 교양학부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국가정보원 과거사건 진실 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 민간위원을 역임했으며 평화박물관 건립추진위원회 상임이사, 양심에 따른 병역 거부권 실현과 대체복무제도 개선을 위한 연대회의 공동집행위원장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 저서로 『대한민국사』 1~4권, 『한홍구의 현대사 다시읽기』,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습니다』(공저), 『하나의 대한민국, 두 개의 현실』(공저) 『지금 이 순간의 역사』, 『특강』, 『총을 들지 않는 사람들』(공저), 『직설』(공저), 『유신』 등이 있다.
다카하시 데쓰야
1956년 후쿠시마 현 출생. 도쿄대학 대학원 종합문화연구과 교수. 20세기 서구 철학을 연구하고 프랑스 철학자 자크 데리다 연구로도 알려졌다. 저서로는 『전후 책임론』, 『야스쿠니 문제』, 『국가와 희생』, 『희생의 시스템 후쿠시마·오키나와』, 『오키나와의 미군기지 ‘현외 이설’을 생각한다』, 『단절의 세기 증언의 시대: 전쟁의 기억을 둘러싼 대화』(공저), 『후쿠시마 이후의 삶』(공저) 등이 있다.
사사키 다카시
1939년 홋카이도 오비히로 출생. 스페인사상가. 세이센여자대학 등에서 교편을 잡은 후, 정년 전에 퇴직하여 고향인 후쿠오카현 미나미소마시 하라마치구로 귀향했다. 2011년 동일본대지진 후의 후쿠시마 제1원전 사고에 의해 한때 자택이 피난지역으로 지정되었지만(현재는 해제되었다), 피난가지 않고 자택에 머물며 치매를 앓는 부인과 생활하며 일상을 블로그를 통해 발신하고 있다. 저서로는 『원전의 재앙 속에서 살다』 등이 있다.
쇼지 쓰토무
1932년 출생. 일본그리스도교단 목사, 일본그리스도교협의회(NCC) 총 간사 등을 역임. 1970~1980년대 한국 민주화운동을 지원. 고려박물관 초대 이사장을 거쳐 현재는 이사를 맡고 있다. 저서로는 『납치문제를 다시 생각한다』(공저) 등이 있다.
하야오 다카노리
1973년 후쿠시마 현 출생. 도쿄게이자이대학 준교수. 2011년 3월 11일 센다이 시에서 재해를 입고, 직후 오사카로 피난, 현재는 고후 시에 살고 있다. 피해자의 피난, 보양, 이주를 지원하는 ‘3·11전국협의회’ 공동대표. 저서로는 『유대와 이스라엘 사이: 민족/국민의 아포리아』, 『중학생의 질문 상자 국가란 무엇인가?: 함께 생각해보고 싶은 ‘나와 국가’의 관계』, 역서로는 『디아스포라의 힘』(공역), 『홀로코스트에서 가자로: 팔레스티나의 정치경제학』(공역) 등이 있다.
히가 도요미쓰
1950년 오키나와 현 출생. 오키나와를 중심으로 활동하는 사진가. 주된 사진전, 작품으로 ‘시마쿠토바로 이야기하는 전세戰世’, ‘나나무이’(2005), 도쿄국립근대미술관 ‘오키나와 프리즘 1872~2008’ 전(2008), 후쿠시마 아시아미술관 ‘제4회 후쿠시마 아시아미술 트리엔날레’(2009), 사키마미술관 ‘뼈로부터의 전세’(2010), 사키마미술관 ‘기억과 초상 오키나와와 한국 사진교류전’(2015) 외. 사진집으로는 『빨간 여주』, 『빛나는 나나무이의 신들』, 『포토 도큐먼트 뼈의 전세』 등이 있다.
가마쿠라 히데야
1962년 나가노 현 출생. NHK 프로듀서. NHK스페셜 ‘조문상의 유서/싱가폴 BC급 전범 재판’(1991), NHK스페셜 ‘기시 노부스케와 안보 개정/감춰진 개헌 구상’(1995), NHK스페셜'' ‘러시아: 작은 사람들의 기억’(2000), ETV특집 ‘아우슈비츠 증언자는 왜 자살했는가: 작가 프리모 레비로의 여행’(2003), 마음의 시대 ‘후쿠시마를 걸으며: 나에게 있어서 3·11’(2011) 외 다수의 작품을 연출했다. 저서로는 『노모한 숨겨진 ‘전쟁’』, 『크로스 로드 오키나와: 세계에서 본 오키나와, 오키나와에서 본 세계』 등이 있다.
구보시마 세이치로
1941년 도쿄 출생. 전쟁의 혼란기에 아버지 미즈카미 쓰토무와 이별, 1977년에 재회. 1979년에 나가노현에 요절한 화가의 작품을 중심으로 전시하는 시나노데생관을 설립. 1997년에는 전몰 미술학도들의 유작이 된 회화, 작품, 미술도구, 편지 등을 전시하는 무언관을 개관. 저서로는 『아버지에게 보내는 편지』, 『시나노데생관 일기』, 『나의 사랑하는 요절 화가들』, 『무언관: 전몰 미술학도 「기도하는 그림」』 등이 있다.
가와즈 기요에
1961년 도쿄 출생. 시인. 시집으로 『언니의 붓끝』, 『여름의 끝』, 『아리아, 이 밤의 나체를 위하여』, 『학교 가는 언덕길』 등이 있다. 평론집으로는 『루리안: 타자와 함께 있는 시』, 『어둠보다 검은 빛의 노래를 15인의 시수들』, 『파레시아: 지진 후, 시란 무엇인가』 등이 있다. 2010년 『조선학교 무상화 제외 반대 선집』을 발행했다.
안자코 유카
1966년 출생. 리쓰메이칸대학 문학부 교수. 전공은 조선 근현대사, 국제관계사, 일한관계사. 주요 논문으로 「조선에서의 총동원 체재의 구조」 『이와나미강좌 동아시아 근현대사 제6권』, 『도록 식민지조선에 살다: 한국 민족문제연구소 소장자료』, 『「한류」의 안과 밖-한국 문화의 힘과 동아시아 융합 반응』 등이 있다.
치넨 우시
1966년 오키나와 현 출생. 작가. 저서로 『우시가 간다: 식민지주의를 탐험하고 나를 찾는 여행』, 『외면의 폭력: 지넨 우시 정치발언집』, 공저로 『투쟁하는 경계: 복귀 후 세대의 오키나와로부터의 보고』, 『오키나와, 탈식민지의 태동』 등이 있다. 펼처보기 닫기
역자 : 형진의
현재 한남대학교 교양융복합대학 조교수로 재직 중이다. 한남대학교와 동 대학원 일어일문학과를 졸업하고, 일본 히토쓰바시대학 대학원 언어사회연구과에서 석사와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전공은 일본어학, 언어사회학, 저서로는 『일본어 논술문』(공저), 역서로는『역사의 증인 재일조선인』, 『원전의 재앙 속에서 살다』, 『언어, 헤게모니, 권력』(공역) 등이 있다.
▣ 주요 목차
한국어판을 펴내며 서경식
한국어판을 펴내며 정주하
사진의 아름다움이 이야기하는 것
자신의 약함을 수용하는 것
예술의 힘이란 무엇인가
‘고통의 연대’의 가능성
예술의 힘과 그 역할을 둘러싸고
‘상상의 경계선’을 극복한다
식민지주의라는 시각
미나미소마 일기
원전=사진론:사진가 정주하가 제기하는 핵 시대의 표상과 사고
일본어판 편집 후기
옮긴이 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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