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 출판사서평
우리 선조들의 최치원 사랑과 그의 영정에 숨어있는 이야기를 담은 책 『최치원을 추억하다』( 손상국 지음 / 신아출판사 발행) 가 발간되었다. 이 책 속에는 최치원이라는 씨앗이 어떻게 꽃 피우고 향기를 펼쳤는지, 그리고 그가 남기고 간 향기에 이끌려 오랜 세월 그를 그리워했던 사람들의 이야기가 오롯이 담겼다.
최치원은 신라의 대문장가이자 학자로 당대 최고의 천재였다. 그는 열두 살에 당나라로 유학을 떠나 열여덟 살에 당나라의 진사시에 급제했다. 황소의 난이 일어났을 때는 ‘토황소격문’을 지어 중국사회를 깜짝 놀라게 했다. 그는 당나라의 관리로서 탁월한 능력을 인정받았지만 고국 신라에 돌아와 크게 쓰이지 못했다.
최치원은 당나라에서 배운 지식과 관리생활을 하며 겪은 견문을 바탕으로 신라사회를 개혁하려 했으나 진골 귀족들의 반대로 뜻을 이룰 수 없었다. 그래서 외직을 자청해 처음으로 부임해왔던 곳이 지금의 전라북도 정읍시 칠보면 일대인 태산군이다. 그는 태산의 태수로 있으면서 백성들을 위한 정책을 시행하고, 백성이 나라의 근본이라는 유교의 정신을 이곳에 심었다. 그가 꿈꾸던 세상은 백성들이 간절히 바라던 세상이었다. 이러한 그였기에 그는 우리 역사상 백성들에게 가장 사랑 받는 인물이 되었다. 그가 스쳐지나간 곳마다 전설이 서렸고, 그의 이야기는 존경을 넘어 신이한 존재로까지 회자되었다. 현재 그를 향사하는 서원과 사당만 해도 전국에 스무 곳이 넘는다.
저자는 방송사 PD로 일하면서 칠보의 무성서원에서 1960년대에 사라진 최치원 구본영정에 대한 사연을 접하고 본격적인 취재를 시작했다.
무성서원에서는 사당으로는 최초로 1784년(정조 8)에 최치원의 영정을 봉안했다. 이 영정은 본래 지리산 쌍계사에 있었는데 하동의 유림들이 “동방 유학의 종장을 불가에서 모시는 것은 불가하다”하여 강제로 빼앗아서 최씨 후손가에 맡겼다가 무성서원으로 오게 되었다. 그런데 어느 날 이 영정이 갑자기 사라져버렸다. 이 영정뿐만이 아니라 1831년에 모사했던 영정도 함께 사라졌다. 그 이후 이 영정들을 되찾기 위한 눈물겨운 노력이 있었다. 그 노력의 결과 사라진 두 축의 영정 중 1831년 본이 정읍시립박물관에 내려올 수 있었다. 그렇지만 쌍계사본 원본 영정의 행방은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이 책 속에는 무성서원에서 최치원의 영정이 사라지게 된 과정과 잃어버린 영정을 찾기 위한 노력이 소상히 적혀있다.
최치원과 인연이 깊었던 쌍계사의 이야기도 흥미롭다. 쌍계사는 하동의 유림들에게 두 차례나 영정을 빼앗기고도 계속해서 최치원의 영정을 그려 봉안해온 사찰. 최치원과 맺었던 인연을 소중하게 여겼던 심지 깊은 쌍계사의 이야기가 감동적이다.
해인사본 최치원 영정에 대해 새롭게 조명한 내용도 관심을 끈다. 최치원 영정을 이야기 할 때 흔히 쌍계사본과 해인사본이 있다고 하는데 우리가 알고 있는 사실과는 차이가 있다고 저자는 적고 있다.
이 책은 최치원 영정에 관한 이야기이지만 많은 사람들이 오랜 세월 왜 그토록 그를 그리워하며 존경해왔는지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한다. 우리 선조들은 최치원이 이루고자 했던 세상을 함께 꿈꾸며 그를 그리워하고 있었다.
『최치원을 추억하다』를 펼치면 최치원과 관련된 풍부한 사진과 해설이 수록 되었으며 일반인도 쉽게 읽을 수 있도록 쓴 간결한 문장으로 구성되어 있어 재미있는 소설을 읽듯이 술술 읽혀진다.
최치원을 모신 서원과 사우가 전국에서 가장 많은 지역이 전라북도이다. 그 수는 무려 8곳에 이른다. 그 중 군산시 옥구향교 인근에 4개의 사당이 밀집되어 있다.
역사 기록으로 본다면 최치원이 전라북도와 맺은 인연은 태산군 태수로 왔던 것이 전부라 할 수 있다. 그런데도 이 지역에 이렇게 많은 사당이 분포해 있는 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또 군산 지역에 서려있는 최치원 탄생설화는 무엇인가. 이러한 것들이 몹시 궁금했지만 아직 그 궁금증을 다 풀지는 못하고 있다.
여기에 쓴 글은 최치원에 대해 그 동안 궁금증을 갖고 있었던 것 중의 하나, 최치원의 초상화를 중심으로 쓴 글이다. 방송 프로그램을 제작하면서 알게 된 초상화에 얽힌 사연들을 보완해서 글로 썼다. 나름 열심히 자료를 찾아 충실히 기록하려 노력했지만 부족한 부분이 많다.
특히 최치원의 해인사본 초상화에 대해서는 아쉬움이 크다. 우리가 최치원의 초상화를 말할 때 일반적으로 쌍계사본과 해인사본이 있다고 한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지금까지 알려져 있는 사실과는 꽤 큰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 부분에 대해 명쾌하게 밝혀내지 못해 무척 아쉽다.
최치원의 초상화에 대해 글을 쓰면서 새삼 무성서원에서 사라진 쌍계사본 영정 원본을 찾는 일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것은 전국의 사당에 봉안되어 있는 최치원 영정의 얼굴 모습이 각기 다르게 표현되어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는 표준으로 정할 영정이 없어서 생긴 현상들이다.
쌍계사본 영정 원본을 찾는다면 이 영정이 현존하는 최치원 초상화 중에서는 가장 오래된 초상화가 될 것이고, 이 초상화가 표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더군다나 이 초상화는 쌍계사에서 계속 봉안해 오면서 이모해 왔기 때문에 다른 초상화에 비해 최치원의 실제 모습에 가장 가깝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
그리고 현재의 무성서원본에서 느낄 수 있듯 무성서원에 봉안했던 최치원 초상화는 다른 곳의 초상화와 비교해 볼 때 그림의 품격이 다르다. 현재의 영정은 1831년본을 이모했고, 1831년본은 쌍계사본 원본을 개모했기 때문에 원본도 품격에서는 크게 다르지 않으리라고 본다.
아무튼 이 영정을 찾게 된다면 귀중한 우리 문화재가 하나 더 느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최치원은 천 년 전의 인물이지만 시대의 선각자였다. 그가 꿈꾸던 세상은 자신이 살던 시대에는 실현되지 못했지만, 고려와 조선에서 많은 부분이 실행에 옮겨졌다. 고려시대에는 골품제가 폐지되고 능력에 따라 관리를 등용하는 과거제도가 실시되었고, 조선시대에는 유교적 이상사회를 만들기 위한 국가적 노력이 경주되었다.
오늘날에도 최치원은 우리에게 큰 울림을 준다. 그는 우리 문화의 우수성을 융합의 정신에서 찾았다. 그는 우리 고유의 사상 속에는 다른 사상이나 종교를 수용하는 융합의 정신이 있다고 보았다. 최치원은 종교나 사상을 갈등의 대상이 아니라 융합의 대상으로 보았고, 이렇게 융합하는 힘이 우리 문화의 원동력이라고 보았다. 이러한 그의 시각은 종교 간의 갈등이 세계적인 문제가 되고 있는 현 시점에 커다란 해결점을 시사해준다.
이렇게 큰 인물을 태산의 백성들이 목민관으로 맞이했던 것은 대단한 행운이었다. 이는 우도할계, 곧 닭을 잡는 데 소 잡는 칼을 쓴 격이었지만 백성들 입장에서 이런 행운이 어디 있겠는가.
그렇지만 나는 태산의 이름 없는 백성들을 칭찬해주고 싶다. 태산의 백성들은 최치원이라는 위인이 주고 간 가르침을 잊지 않고, 천 년 이라는 오랜 세월 동안 그 가르침을 이어가기 위해 노력했다. 이 얼마나 훌륭한 일인가. 그래서 나는 이 글을 쓰면서 태산의 후예들, 고현내에 살았던 분들이 참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최치원과 맺은 인연을 소중히 여기며 계속해서 최치원의 초상화를 그려 봉안해온 쌍계사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앞서 무성서원에서 잃어버렸던 1831년 개모본 최치원 영정을 국립중앙박물관 수장고에서 찾았다고 했는데, 그 이후 어떻게 되었는지 언급하지 하지 못했다. 이 영정은 현재 정읍시립박물관에서 보관하고 있다. 장기대여 방식을 해법으로 제시한 국립중앙박물관의 제안을 정읍시가 수용한 결과이다. 이렇게나마 초상화의 소유권 문제가 원만히 해결되어 다행스럽게 생각한다.
아울러 이번 기회에 국립중앙박물관에 고마운 마음을 전하고 싶다. 국립중앙박물관이 아니었다면 1831년 개모본 영정을 완벽하게 보존할 수 없었을 것이다. 어쩌면 이 영정을 다시 볼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이런 측면에서 나는 국립중앙박물관이 몹시 고맙다.
▣ 작가 소개
저자 : 손상국
연세대를 졸업하고, 교육방송과 JTV에서 PD로 일했다. 전라북도의 역사문화를 다룬 ‘전북의 발견’이라는 프로그램을 수년 간 연출했다. 2014년에는 독회를 만들어, 최남선이 1925년 호남 일대를 여행하면서 시대일보에 연재 했던 우리 국토에 대한 예찬의 글『심춘순례』를 쉽게 풀어 출간했다.
▣ 주요 목차
시작에 앞서 005
1.난새가 날아들다 013
고현내/ 성황산/
고운 최치원/ 태산에 온 뜻/
생사당/ 불우헌 정극인/ 옛사람 풍류
2.태산에 깃들다 057
태산사/ 송세림/ 왕도정치를 꿈꾸며/
무성서원/ 낙안향교의 통문/
영정을 뫼시다/ 타령지소/
무성서원의 위기/ 병오창의/
꼿꼿한 선비정신/ 석지 채용신
3.잃어버린 영정을 찾아서 109
시산 김환재/ 옛 영정을 보존한 것은/
사라진 영정에 대한 기록/ 한 장의 신문 스크랩/
1831년 개모본 영정/ 사라진 쌍계사본 영정
4.쌍계사의 기적 137
진감선사비/ 최치원과 쌍계사/
인연의 끈/ 다시 인연의 끈을 잇다/
영정을 덧칠하다/ 인연이 이어져온 것은
5.최치원을 그리워하다 165
해인사/ 해인사의 최치원 초상/
해인사본 최치원 초상화/ 최치원 영정의 뿌리/
사당을 뫼신 것은/ 유별난 최치원 사랑
맺는 글
우리 선조들의 최치원 사랑과 그의 영정에 숨어있는 이야기를 담은 책 『최치원을 추억하다』( 손상국 지음 / 신아출판사 발행) 가 발간되었다. 이 책 속에는 최치원이라는 씨앗이 어떻게 꽃 피우고 향기를 펼쳤는지, 그리고 그가 남기고 간 향기에 이끌려 오랜 세월 그를 그리워했던 사람들의 이야기가 오롯이 담겼다.
최치원은 신라의 대문장가이자 학자로 당대 최고의 천재였다. 그는 열두 살에 당나라로 유학을 떠나 열여덟 살에 당나라의 진사시에 급제했다. 황소의 난이 일어났을 때는 ‘토황소격문’을 지어 중국사회를 깜짝 놀라게 했다. 그는 당나라의 관리로서 탁월한 능력을 인정받았지만 고국 신라에 돌아와 크게 쓰이지 못했다.
최치원은 당나라에서 배운 지식과 관리생활을 하며 겪은 견문을 바탕으로 신라사회를 개혁하려 했으나 진골 귀족들의 반대로 뜻을 이룰 수 없었다. 그래서 외직을 자청해 처음으로 부임해왔던 곳이 지금의 전라북도 정읍시 칠보면 일대인 태산군이다. 그는 태산의 태수로 있으면서 백성들을 위한 정책을 시행하고, 백성이 나라의 근본이라는 유교의 정신을 이곳에 심었다. 그가 꿈꾸던 세상은 백성들이 간절히 바라던 세상이었다. 이러한 그였기에 그는 우리 역사상 백성들에게 가장 사랑 받는 인물이 되었다. 그가 스쳐지나간 곳마다 전설이 서렸고, 그의 이야기는 존경을 넘어 신이한 존재로까지 회자되었다. 현재 그를 향사하는 서원과 사당만 해도 전국에 스무 곳이 넘는다.
저자는 방송사 PD로 일하면서 칠보의 무성서원에서 1960년대에 사라진 최치원 구본영정에 대한 사연을 접하고 본격적인 취재를 시작했다.
무성서원에서는 사당으로는 최초로 1784년(정조 8)에 최치원의 영정을 봉안했다. 이 영정은 본래 지리산 쌍계사에 있었는데 하동의 유림들이 “동방 유학의 종장을 불가에서 모시는 것은 불가하다”하여 강제로 빼앗아서 최씨 후손가에 맡겼다가 무성서원으로 오게 되었다. 그런데 어느 날 이 영정이 갑자기 사라져버렸다. 이 영정뿐만이 아니라 1831년에 모사했던 영정도 함께 사라졌다. 그 이후 이 영정들을 되찾기 위한 눈물겨운 노력이 있었다. 그 노력의 결과 사라진 두 축의 영정 중 1831년 본이 정읍시립박물관에 내려올 수 있었다. 그렇지만 쌍계사본 원본 영정의 행방은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이 책 속에는 무성서원에서 최치원의 영정이 사라지게 된 과정과 잃어버린 영정을 찾기 위한 노력이 소상히 적혀있다.
최치원과 인연이 깊었던 쌍계사의 이야기도 흥미롭다. 쌍계사는 하동의 유림들에게 두 차례나 영정을 빼앗기고도 계속해서 최치원의 영정을 그려 봉안해온 사찰. 최치원과 맺었던 인연을 소중하게 여겼던 심지 깊은 쌍계사의 이야기가 감동적이다.
해인사본 최치원 영정에 대해 새롭게 조명한 내용도 관심을 끈다. 최치원 영정을 이야기 할 때 흔히 쌍계사본과 해인사본이 있다고 하는데 우리가 알고 있는 사실과는 차이가 있다고 저자는 적고 있다.
이 책은 최치원 영정에 관한 이야기이지만 많은 사람들이 오랜 세월 왜 그토록 그를 그리워하며 존경해왔는지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한다. 우리 선조들은 최치원이 이루고자 했던 세상을 함께 꿈꾸며 그를 그리워하고 있었다.
『최치원을 추억하다』를 펼치면 최치원과 관련된 풍부한 사진과 해설이 수록 되었으며 일반인도 쉽게 읽을 수 있도록 쓴 간결한 문장으로 구성되어 있어 재미있는 소설을 읽듯이 술술 읽혀진다.
최치원을 모신 서원과 사우가 전국에서 가장 많은 지역이 전라북도이다. 그 수는 무려 8곳에 이른다. 그 중 군산시 옥구향교 인근에 4개의 사당이 밀집되어 있다.
역사 기록으로 본다면 최치원이 전라북도와 맺은 인연은 태산군 태수로 왔던 것이 전부라 할 수 있다. 그런데도 이 지역에 이렇게 많은 사당이 분포해 있는 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또 군산 지역에 서려있는 최치원 탄생설화는 무엇인가. 이러한 것들이 몹시 궁금했지만 아직 그 궁금증을 다 풀지는 못하고 있다.
여기에 쓴 글은 최치원에 대해 그 동안 궁금증을 갖고 있었던 것 중의 하나, 최치원의 초상화를 중심으로 쓴 글이다. 방송 프로그램을 제작하면서 알게 된 초상화에 얽힌 사연들을 보완해서 글로 썼다. 나름 열심히 자료를 찾아 충실히 기록하려 노력했지만 부족한 부분이 많다.
특히 최치원의 해인사본 초상화에 대해서는 아쉬움이 크다. 우리가 최치원의 초상화를 말할 때 일반적으로 쌍계사본과 해인사본이 있다고 한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지금까지 알려져 있는 사실과는 꽤 큰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 부분에 대해 명쾌하게 밝혀내지 못해 무척 아쉽다.
최치원의 초상화에 대해 글을 쓰면서 새삼 무성서원에서 사라진 쌍계사본 영정 원본을 찾는 일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것은 전국의 사당에 봉안되어 있는 최치원 영정의 얼굴 모습이 각기 다르게 표현되어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는 표준으로 정할 영정이 없어서 생긴 현상들이다.
쌍계사본 영정 원본을 찾는다면 이 영정이 현존하는 최치원 초상화 중에서는 가장 오래된 초상화가 될 것이고, 이 초상화가 표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더군다나 이 초상화는 쌍계사에서 계속 봉안해 오면서 이모해 왔기 때문에 다른 초상화에 비해 최치원의 실제 모습에 가장 가깝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
그리고 현재의 무성서원본에서 느낄 수 있듯 무성서원에 봉안했던 최치원 초상화는 다른 곳의 초상화와 비교해 볼 때 그림의 품격이 다르다. 현재의 영정은 1831년본을 이모했고, 1831년본은 쌍계사본 원본을 개모했기 때문에 원본도 품격에서는 크게 다르지 않으리라고 본다.
아무튼 이 영정을 찾게 된다면 귀중한 우리 문화재가 하나 더 느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최치원은 천 년 전의 인물이지만 시대의 선각자였다. 그가 꿈꾸던 세상은 자신이 살던 시대에는 실현되지 못했지만, 고려와 조선에서 많은 부분이 실행에 옮겨졌다. 고려시대에는 골품제가 폐지되고 능력에 따라 관리를 등용하는 과거제도가 실시되었고, 조선시대에는 유교적 이상사회를 만들기 위한 국가적 노력이 경주되었다.
오늘날에도 최치원은 우리에게 큰 울림을 준다. 그는 우리 문화의 우수성을 융합의 정신에서 찾았다. 그는 우리 고유의 사상 속에는 다른 사상이나 종교를 수용하는 융합의 정신이 있다고 보았다. 최치원은 종교나 사상을 갈등의 대상이 아니라 융합의 대상으로 보았고, 이렇게 융합하는 힘이 우리 문화의 원동력이라고 보았다. 이러한 그의 시각은 종교 간의 갈등이 세계적인 문제가 되고 있는 현 시점에 커다란 해결점을 시사해준다.
이렇게 큰 인물을 태산의 백성들이 목민관으로 맞이했던 것은 대단한 행운이었다. 이는 우도할계, 곧 닭을 잡는 데 소 잡는 칼을 쓴 격이었지만 백성들 입장에서 이런 행운이 어디 있겠는가.
그렇지만 나는 태산의 이름 없는 백성들을 칭찬해주고 싶다. 태산의 백성들은 최치원이라는 위인이 주고 간 가르침을 잊지 않고, 천 년 이라는 오랜 세월 동안 그 가르침을 이어가기 위해 노력했다. 이 얼마나 훌륭한 일인가. 그래서 나는 이 글을 쓰면서 태산의 후예들, 고현내에 살았던 분들이 참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최치원과 맺은 인연을 소중히 여기며 계속해서 최치원의 초상화를 그려 봉안해온 쌍계사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앞서 무성서원에서 잃어버렸던 1831년 개모본 최치원 영정을 국립중앙박물관 수장고에서 찾았다고 했는데, 그 이후 어떻게 되었는지 언급하지 하지 못했다. 이 영정은 현재 정읍시립박물관에서 보관하고 있다. 장기대여 방식을 해법으로 제시한 국립중앙박물관의 제안을 정읍시가 수용한 결과이다. 이렇게나마 초상화의 소유권 문제가 원만히 해결되어 다행스럽게 생각한다.
아울러 이번 기회에 국립중앙박물관에 고마운 마음을 전하고 싶다. 국립중앙박물관이 아니었다면 1831년 개모본 영정을 완벽하게 보존할 수 없었을 것이다. 어쩌면 이 영정을 다시 볼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이런 측면에서 나는 국립중앙박물관이 몹시 고맙다.
▣ 작가 소개
저자 : 손상국
연세대를 졸업하고, 교육방송과 JTV에서 PD로 일했다. 전라북도의 역사문화를 다룬 ‘전북의 발견’이라는 프로그램을 수년 간 연출했다. 2014년에는 독회를 만들어, 최남선이 1925년 호남 일대를 여행하면서 시대일보에 연재 했던 우리 국토에 대한 예찬의 글『심춘순례』를 쉽게 풀어 출간했다.
▣ 주요 목차
시작에 앞서 005
1.난새가 날아들다 013
고현내/ 성황산/
고운 최치원/ 태산에 온 뜻/
생사당/ 불우헌 정극인/ 옛사람 풍류
2.태산에 깃들다 057
태산사/ 송세림/ 왕도정치를 꿈꾸며/
무성서원/ 낙안향교의 통문/
영정을 뫼시다/ 타령지소/
무성서원의 위기/ 병오창의/
꼿꼿한 선비정신/ 석지 채용신
3.잃어버린 영정을 찾아서 109
시산 김환재/ 옛 영정을 보존한 것은/
사라진 영정에 대한 기록/ 한 장의 신문 스크랩/
1831년 개모본 영정/ 사라진 쌍계사본 영정
4.쌍계사의 기적 137
진감선사비/ 최치원과 쌍계사/
인연의 끈/ 다시 인연의 끈을 잇다/
영정을 덧칠하다/ 인연이 이어져온 것은
5.최치원을 그리워하다 165
해인사/ 해인사의 최치원 초상/
해인사본 최치원 초상화/ 최치원 영정의 뿌리/
사당을 뫼신 것은/ 유별난 최치원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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