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 출판사서평
나와 다른 세계, 나와 다른 상대를 향한 ‘혐오’의 시대
그러나 파리의 노숙자와 헌법재판관의 만남은
노숙자의 삶도 우리와 다르지 않음을 보여준다
그에게도 이름이 있고, 사연이 있고, 빛나는 순간들이 있었음을
노숙자 장-마리와 헌법재판소장 장-루이 드브레가 함께 있으면 사람들은 수군거린다. “어? 저기 노숙자랑 같이 있는 사람 장-루이 드브레 아니야?” 경찰들은 헌법재판소장이 노숙자와 함께 있는 것을 보고 다가와 묻기도 한다. “별일 없으신가요?” 사람들은 장-마리가 다가가면 바쁜 척을 하려고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가, 그를 지나치면 바로 휴대폰을 주머니에 집어넣기도 한다. 구걸하는 장-마리를 멸시하는 시선으로 바라보고 ‘보도에 죽치고 앉아 있는 똥덩어리 같은 것’으로 치부한다. 그러나 노숙자도 이름이 있고, 사연이 있다. 그들의 삶 곳곳에도 빛나는 순간들이 있으며, 그들도 우정을 나눈다. 다만 그들은 다른 삶을 선택할 수 있는 기회가 왔을 때, 삶에 대응하는 방법에 무지했거나, 선택권이 없었는지도 모른다.
어떤 이들에게 우리는 보이지 않는 사람이다. 이른바 양심이 있다는 이들에게 우리는 공격적인 사람이다. 그래서인지 우리를 경멸하거나 증오한다. 그렇지만 개중에는 편견 없이 우리를 도와주려 하는 이들과의 좋은 만남이 있었다. - 200쪽
우리는 건전한 패거리였고, 다 함께 나누고 사는 그런 사이였다. 우리 중에 누구 하나가 생일을 맞으면 그 사람은 구걸을 해서도, 호객을 위해 분위기를 띄우는 역할을 해서도 안 되었다. 우리가 그 사람 몫까지 담당했다. 그에게 먹을거리와 담배, 창녀를 구할 수 있는 돈을 주었으며, 때때로 근처에 작은 여관방이라도 구해줄 수 있는 돈이 모이면 그렇게 했다. 유쾌했다. 진정한 친구 녀석들과 함께해서 행복했다 - 105쪽.
구걸의 달인, 거리가 좋아서 거리에서 빠져나오지 못한다
마흔일곱, 20년 경력의 노숙자 장-마리. 지금은 목 좋은 곳을 찾아 자리를 옮기기도 하고 단골도 있는, 은방울꽃이 잘 나가는 시기에는 꽃을 값싸게 사서 이윤을 남기며 팔기도 하는 구걸의 전문가라고 할 수 있을 정도지만, 자신이 구걸을 업으로 삼게 될 줄은 상상도 못했다.
내가 이렇게 된 것은 당연히 내 책임이다. 내 인생은 시작부터 좋지 않았다. 변명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냥 그랬다는 뜻이다. - 21쪽
숱한 불행과 방황 끝에 결국 구걸은 그의 직업이 되었다. 술꾼이나 행인의 분풀이 대상이 되어 걷어차이거나, 다짜고짜 보호 시설로 보내버리는 경찰을 피해 늘 경계태세를 유지해야 하지만 거리는 그의 터전이다. 그는 거리에서 어떤 방법으로 순례자들에게 다가가야 하는지 조금씩 배웠고, 돈을 줄 사람과 주지 않을 사람을 구분하는 방법을 익혔다. 쇼핑하는 사람들에게 주차단속이 뜰 것 같으면 미리 알려주고, 자전거도 봐주면서, 점잖은 구걸인으로 샹젤리제 거리에서는 잘 알려지게 되었다, 스스로 구걸 분야의 프로라고 말하는 그에게 구걸은 여러 직업 중의 하나이다. 오가는 행인들을 ‘순례자’라고 부르는 장-마리는 거리에서 돈을 벌고 사랑을 하고 친구들을 사귄다. 자살하려는 남자를 다독여 그가 갑자기 말없이 가버릴 때까지 같이 구걸을 하기도 하고,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나 혼자서 말없이 구걸하는 사람에게 ‘선장’이라는 별명을 지어주고 먼저 다가가 먹을 걸 나누기도 한다. 같이 구걸하던 친구의 갑작스러운 죽음에 괴로워하기도 한다. 장-마리가 길게든 짧게든 함께한 ‘구걸 친구들’의 다양한 거리 인생 앞에서 노숙자라면 대개 어떠할 것이라는 편견이 무색해진다.
거리는 정말 힘든 곳이다. 거리에서 먹고살 돈을 벌고, 주도권을 잡고, 내 자리를 차지하려고 나를 밀어내거나 쫓아내려는 사람들에 맞서고, 추위에 견디고 비를 맞아야 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일하는 게 더 낫지”와 같은 지적을 듣거나, 사람들이 은근히 보내는 경멸적인 시선을 받아들이기는 더더욱 어렵다. 그렇지만 이곳이 나의 세상이고, 나의 세계다. - 158쪽
거리에서 만나는 우리의 민낯_ 편견, 혐오, 무례, 차별
장-마리는 거리에서 수많은 사람을 본다. 드러그스토어 앞이 주 활동무대이기 때문에 유명인사들도 많이 보고, 인심 후한 인사들도 많이 본다. 한 번은 모로코의 공주가 일주일 내내 오면서 날마다 100유로씩을 준 일도 있다.
그러나 거리의 일상은 힘들다. 행인들의 모욕, 욕설, 경멸하는 눈초리와 맞서야 한다. 사람들은 노숙자들을 ‘보도에서 죽치고 앉아 있는 똥 덩어리 같은 것’이라고 욕하며 정말 그런 존재로 치부한다. 장-마리가 다가서면 사람들은 바쁜 척을 하려고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가 그를 지나치고 나서 주머니에 도로 집어넣는다. 그를 보고는 다른 쪽 길로 건너가기도 하고, 기침을 하기도 하고, 그를 피하려고 더 빨리 걷기도 한다. 때로는 멀리 있는 누군가를 찾는 시늉을 하기도 하고, 신문 첫 장을 읽는 척하기도 한다. 그들은 자기들의 쇼가 들키지 않을 거라고 생각할 테지만, 그 모든 행동들을 장-마리는 알고 있다.
정치인들, 또는 내 친구들이 정치인이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은 때로는 너무 심하다 싶을 정도로 자기들 하고 싶은 대로 행동하며 산다. 이들은 보통 인심이 후하지는 않다. 어떤 정치인은 항상 노숙자들과 거리를 둔 채 경멸의 시선으로 그들을 쳐다보며, 절대 동전 하나도 건네주려 하지 않는다.
내가 가장 끔찍하게 여겼던 사람은 알랭 들롱이었다. 잘난 척하고 차갑기 그지없는 사람이었다. 우리에게 못되게 말하기도 했으며, 멀리 쫓아버리기도 했다. 내가 그에게 다가가려고 하면, 그는 이렇게 말했다. “네가 뭘 원하는지 알아.
하지만 난 아무것도 주지 않을 거야.” 그러고선 떠나버렸다. - 140쪽
그녀는 거리에서의 삶이 가끔은 정말 힘들다고 했다. 이미 여러 차례 공격을 당하기도 했다. 남자 새끼들은 그녀가 오럴 섹스를 해주거나, 그녀를 만지게 놔두어야만 돈을 주려고 했다. 세실은 창녀가 아니었는데도 말이다. -206쪽
노숙자들을 피하고 조심해야 할 대상으로 보는 것은 그곳에 사는 사람들뿐만이 아니다. 여행객들도 마찬가지다. 노숙자들에게 파리의 8월은 버림과 무관심의 시간이다. 그들이 알고 지내던 이들은 휴가를 가서 없고, 대신 그들을 믿지 못하고 경계하며 무서워하는 관광객들로 거리가 붐빈다. 여행객들은 노숙자들이 가방이나 돈을 훔칠까 봐 걱정하며 경계하지만, 사실 그들 입장에서 이런 관광객들은 보통 단체로 몰려다니기 때문에 별 기대가 없다. 그런데도 그들은 노숙자들이 다가가면 단체로 적의를 내보인다. 특히 중국인 단체 관광객들은 노숙자들이 파리 거리의 무슨 독특한 이미지라도 되는 듯이 사진을 연신 찍어대면서도 노숙자들에게 아무것도 주지 않는다. 웃음도 동전도.
우리 세계에 존재하는 부정적인 면은 다른 세계에서 더 강하게 드러난다. 노숙자들 중에서도 흑인이거나 유색 인종인 경우 피부색에 관한 안 좋은 말을 듣는다. 거리에서는 자주 인종차별주의자들을 만난다. 어떤 사람은 대놓고 프랑스 사람한테만 돈을 주겠다고 하기도 하고, 노숙자들은 불가리아나 루마니아에서 왔다고 보이지 않게 조심한다. 소매치기범으로 오해받지 않기 위해서.
다른 세계를 보다
빈대가 줄지어 기어다니고 침대 메트리스에도 곰팡이가 핀 방에서도 지내보았지만, 장-마리에게 가장 끔찍한 곳은 폐쇄된 지하철 역사다. 폐쇄된 지하철 역사에 사는 인물들에게는 그들만의 특유한 습관이 있어서 이를 방해해서는 안 된다는 것도 알게 되고, 혼란스러워 보이는 와중에도 그 혼란이 도를 넘지 않게 관리하는 깡패 집단이 있다는 것도 알게 된다. 그러나 지하철의 폐쇄된 역사에는 절대 익숙해질 수가 없다. 달걀이 썩는 듯한 오물 냄새가 피부에 달라붙어 물건들 속에까지 배어들었고, 어찌나 냄새가 지독했던지 때때로 이 냄새 때문에 가슴이 아파 쓰려오기까지 했다. 그는 절대 그 냄새에 익숙해질 수가 없었다. 우글거리는 쥐들 역시 마찬가지다. 그곳의 쥐들은 엄청나게 뚱뚱해서 고양이인가 하는 착각이 들 정도다. 그런 쥐들이 사방에서 우글거리며 발 주위를 왔다 갔다 한다. 쥐들을 쫓으려고 방망이까지 가지고 다니지만, 쥐들이 발을 갉아먹는 건 아닌지 마음을 놓을 수가 없다. 가끔 토요일 밤이 되면 젊은이들이 그룹을 지어 사냥을 하러 온다. 이런 젊은이들은 모험거리를 찾아 지하철 터널이나 폐쇄된 지하철 역사, 또는 하수구를 돌아다니는데 조심해야 한다. 술에 취해 건달 같이 행동하면서 이유 없이 부랑자들을 때리려고 하기 때문이다. 지하철 폐역사에서 사는 사람들은 쉬운 먹잇감이다.
장-마리가 다시 지하철 폐역사로 가는 일은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그의 활동 무대는 거리다. 20년 동안 그는 동전 몇 개를 얻기 위해 종이컵을 내밀며 길에서 구걸하며 살았다. 그런 그가 오늘날 이 거리가 얼마나 많이 변했는지를 말한다. 모든 것이 자극적이고 민감해졌다. 이제 거리는 전과 같지 않다. 모든 것이 이전보다 더 힘들고 더 공격적으로 변했다. 사람들은 옛날보다 자주 노숙자들에게 욕설을 퍼붓는다. 사람들은 정말 시간이 없고 전보다 두려움이 많아진 듯 항상 뛰어다닌다.
거리의 변화는 거리에서 구걸하는 사람들에게서 더 두드러진다. 점점 젊은 여성들이 많아지고 있다. 그들은 거리에서 지내는 게 더 힘들다. 남자들은 동전 몇 푼 주면서 대가를 요구하기도 하고, 남자들보다 때리기가 쉽기 때문에 폭력에 더 잘 노출된다. 젊은이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는데 술을 마시고 거칠게 행동한다. 몇 년 전부터는 집시들이 와서 조직적으로 활동한다. 여자아이들과 꼬마아이들이 사람들을 둘러싸고 혼을 빼놓으면 그중 하나가 지갑을 슬쩍 빼가는 일은 흔하다. 저녁이 되면 차가 와서 아이들을 데려가는데, 할당량을 못 채우면 거리에 남아서 마저 일을 해야 한다. 가짜 파킨슨 환자들, 다리가 하나밖에 없는 사람들도 많아졌다. 팔다리가 하나 없다거나 다리가 잘린 사람들은 구걸하기 위해 일부러 절단 수술을 하는 경우도 있다. 또 몇몇 거리에서는 구걸하는 사람들이 번 돈을 뜯어내려 하는 깡패 조직들도 있다. 점점 험악해지고 있다. 거리 역시 우리가 사는 사회와 마찬가지로 경쟁과 대립이 존재하고, 점점 더 배려심이 없어지고 난폭해지며, 새로운 세대가 이전 세대를 쫓아내고 있다.
결국 직원이 여럿 있으면 구걸로도 큰돈을 만질 수 있는 것이다. 꽤 수익이 많을 것이다. 깡패들은 바로 이 점을 간파하고 있었다. 그래서 이런 일이 수입이 좋은 직업이 되어버렸다. 나에게 구걸이란 살기 위해 필요한 수단이다. 반면에 그들에게는 돈을 많이 굴릴 수 있는 하나의 수단인 것이다. - 214쪽 펼처보기
▣ 작가 소개
저자 : 장-마리 루골, 장-루이 드브레
20년이 넘도록 거리에서 생활하는 장-마리 루골, 어느 저녁,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구걸’하던 중 한 남자에게 자전거를 지켜주겠노라 제안한다. 그런데 자전거를 타고 나타났던 이 사람은 다름 아닌 헌법재판소장 장-루이 드브레였다. 이 우연한 만남을 계기로 프랑스 헌법재판소장과 부랑자 사이에 돈독한 신뢰가 싹트기 시작했고 드브레의 도움을 받아 마침내 그는 자신의 이야기를 써보기로 마음먹는다.
마흔일곱 살의 이 ‘어린아이 같은 부랑자’는 사람들의 환심에 연연하지 않은 채, 거리의 삶을 소소하게 증언한다. 파리 19구에서 보냈던 어린 시절에서부터 고급스러운 마르베프 거리에 이르기까지 장-마리 루골은 힘겨운 시간을 버텨야 했다. 혼란스러웠던 청년기, 처음으로 ‘구걸’하던 시절, 사랑과 우정, 그리고 그가 버렸던, 혹은 떠나야했던 자식들…… 불법 점거지, 커다랗게 아가리를 벌이며 사람들을 빨아들이는 지하철 입구, 또는 공원과 손바닥만한 여인숙 방 한 칸의 기억과 함께 우리는 소외된 자들의 모진 일상으로 빠져든다. 보통은 우리가 피하려 했던 사람들이다. 그런데 폭력, 두려움, 빈곤의 한복판에 내동댕이쳐진 이네들은 어려운 일상에... 대처할 뿐 아니라, 협동심, 우정 역시 소중하게 여긴다. 우리도 이 여정에 잠겨볼 수 있을 것이다.
역자 : 신소영
파리 10대학 공연예술학과 마스터II를 졸업했으며, 공연 및 다큐멘터리 관련 콘텐츠 코디네이터로 활동해왔다. 현재 번역 에이전시 엔터스코리아에서 출판기획 및 전문 번역가로 활동 중이다. 옮긴 책으로는 《현재의 예술: 대화로 읽는 태양극단 이야기》, 《배우의 철학》 등이 있다.
▣ 주요 목차
여는 글
1 혼란스러웠던 어린 시절
2 아버지의 귀환
3 가출하다
4 피갈과 마르코
5 다시 노숙자로 돌아가다
6 일을 찾다
7 다시 거리로 돌아오다
8 만남
9 샹젤리제의 드러그스토어
10 희망이 다시 찾아오다
11 구걸 친구들
12 신을 믿다
13 정치
14 자원봉사자님, 고맙습니다
15 가혹한 짭새, 괜찮은 짭새
16 이제 노숙자가 아닌데도 거리가 좋다
17 변하는 거리
18 내일의 불안함
닫는 글
나와 다른 세계, 나와 다른 상대를 향한 ‘혐오’의 시대
그러나 파리의 노숙자와 헌법재판관의 만남은
노숙자의 삶도 우리와 다르지 않음을 보여준다
그에게도 이름이 있고, 사연이 있고, 빛나는 순간들이 있었음을
노숙자 장-마리와 헌법재판소장 장-루이 드브레가 함께 있으면 사람들은 수군거린다. “어? 저기 노숙자랑 같이 있는 사람 장-루이 드브레 아니야?” 경찰들은 헌법재판소장이 노숙자와 함께 있는 것을 보고 다가와 묻기도 한다. “별일 없으신가요?” 사람들은 장-마리가 다가가면 바쁜 척을 하려고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가, 그를 지나치면 바로 휴대폰을 주머니에 집어넣기도 한다. 구걸하는 장-마리를 멸시하는 시선으로 바라보고 ‘보도에 죽치고 앉아 있는 똥덩어리 같은 것’으로 치부한다. 그러나 노숙자도 이름이 있고, 사연이 있다. 그들의 삶 곳곳에도 빛나는 순간들이 있으며, 그들도 우정을 나눈다. 다만 그들은 다른 삶을 선택할 수 있는 기회가 왔을 때, 삶에 대응하는 방법에 무지했거나, 선택권이 없었는지도 모른다.
어떤 이들에게 우리는 보이지 않는 사람이다. 이른바 양심이 있다는 이들에게 우리는 공격적인 사람이다. 그래서인지 우리를 경멸하거나 증오한다. 그렇지만 개중에는 편견 없이 우리를 도와주려 하는 이들과의 좋은 만남이 있었다. - 200쪽
우리는 건전한 패거리였고, 다 함께 나누고 사는 그런 사이였다. 우리 중에 누구 하나가 생일을 맞으면 그 사람은 구걸을 해서도, 호객을 위해 분위기를 띄우는 역할을 해서도 안 되었다. 우리가 그 사람 몫까지 담당했다. 그에게 먹을거리와 담배, 창녀를 구할 수 있는 돈을 주었으며, 때때로 근처에 작은 여관방이라도 구해줄 수 있는 돈이 모이면 그렇게 했다. 유쾌했다. 진정한 친구 녀석들과 함께해서 행복했다 - 105쪽.
구걸의 달인, 거리가 좋아서 거리에서 빠져나오지 못한다
마흔일곱, 20년 경력의 노숙자 장-마리. 지금은 목 좋은 곳을 찾아 자리를 옮기기도 하고 단골도 있는, 은방울꽃이 잘 나가는 시기에는 꽃을 값싸게 사서 이윤을 남기며 팔기도 하는 구걸의 전문가라고 할 수 있을 정도지만, 자신이 구걸을 업으로 삼게 될 줄은 상상도 못했다.
내가 이렇게 된 것은 당연히 내 책임이다. 내 인생은 시작부터 좋지 않았다. 변명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냥 그랬다는 뜻이다. - 21쪽
숱한 불행과 방황 끝에 결국 구걸은 그의 직업이 되었다. 술꾼이나 행인의 분풀이 대상이 되어 걷어차이거나, 다짜고짜 보호 시설로 보내버리는 경찰을 피해 늘 경계태세를 유지해야 하지만 거리는 그의 터전이다. 그는 거리에서 어떤 방법으로 순례자들에게 다가가야 하는지 조금씩 배웠고, 돈을 줄 사람과 주지 않을 사람을 구분하는 방법을 익혔다. 쇼핑하는 사람들에게 주차단속이 뜰 것 같으면 미리 알려주고, 자전거도 봐주면서, 점잖은 구걸인으로 샹젤리제 거리에서는 잘 알려지게 되었다, 스스로 구걸 분야의 프로라고 말하는 그에게 구걸은 여러 직업 중의 하나이다. 오가는 행인들을 ‘순례자’라고 부르는 장-마리는 거리에서 돈을 벌고 사랑을 하고 친구들을 사귄다. 자살하려는 남자를 다독여 그가 갑자기 말없이 가버릴 때까지 같이 구걸을 하기도 하고,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나 혼자서 말없이 구걸하는 사람에게 ‘선장’이라는 별명을 지어주고 먼저 다가가 먹을 걸 나누기도 한다. 같이 구걸하던 친구의 갑작스러운 죽음에 괴로워하기도 한다. 장-마리가 길게든 짧게든 함께한 ‘구걸 친구들’의 다양한 거리 인생 앞에서 노숙자라면 대개 어떠할 것이라는 편견이 무색해진다.
거리는 정말 힘든 곳이다. 거리에서 먹고살 돈을 벌고, 주도권을 잡고, 내 자리를 차지하려고 나를 밀어내거나 쫓아내려는 사람들에 맞서고, 추위에 견디고 비를 맞아야 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일하는 게 더 낫지”와 같은 지적을 듣거나, 사람들이 은근히 보내는 경멸적인 시선을 받아들이기는 더더욱 어렵다. 그렇지만 이곳이 나의 세상이고, 나의 세계다. - 158쪽
거리에서 만나는 우리의 민낯_ 편견, 혐오, 무례, 차별
장-마리는 거리에서 수많은 사람을 본다. 드러그스토어 앞이 주 활동무대이기 때문에 유명인사들도 많이 보고, 인심 후한 인사들도 많이 본다. 한 번은 모로코의 공주가 일주일 내내 오면서 날마다 100유로씩을 준 일도 있다.
그러나 거리의 일상은 힘들다. 행인들의 모욕, 욕설, 경멸하는 눈초리와 맞서야 한다. 사람들은 노숙자들을 ‘보도에서 죽치고 앉아 있는 똥 덩어리 같은 것’이라고 욕하며 정말 그런 존재로 치부한다. 장-마리가 다가서면 사람들은 바쁜 척을 하려고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가 그를 지나치고 나서 주머니에 도로 집어넣는다. 그를 보고는 다른 쪽 길로 건너가기도 하고, 기침을 하기도 하고, 그를 피하려고 더 빨리 걷기도 한다. 때로는 멀리 있는 누군가를 찾는 시늉을 하기도 하고, 신문 첫 장을 읽는 척하기도 한다. 그들은 자기들의 쇼가 들키지 않을 거라고 생각할 테지만, 그 모든 행동들을 장-마리는 알고 있다.
정치인들, 또는 내 친구들이 정치인이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은 때로는 너무 심하다 싶을 정도로 자기들 하고 싶은 대로 행동하며 산다. 이들은 보통 인심이 후하지는 않다. 어떤 정치인은 항상 노숙자들과 거리를 둔 채 경멸의 시선으로 그들을 쳐다보며, 절대 동전 하나도 건네주려 하지 않는다.
내가 가장 끔찍하게 여겼던 사람은 알랭 들롱이었다. 잘난 척하고 차갑기 그지없는 사람이었다. 우리에게 못되게 말하기도 했으며, 멀리 쫓아버리기도 했다. 내가 그에게 다가가려고 하면, 그는 이렇게 말했다. “네가 뭘 원하는지 알아.
하지만 난 아무것도 주지 않을 거야.” 그러고선 떠나버렸다. - 140쪽
그녀는 거리에서의 삶이 가끔은 정말 힘들다고 했다. 이미 여러 차례 공격을 당하기도 했다. 남자 새끼들은 그녀가 오럴 섹스를 해주거나, 그녀를 만지게 놔두어야만 돈을 주려고 했다. 세실은 창녀가 아니었는데도 말이다. -206쪽
노숙자들을 피하고 조심해야 할 대상으로 보는 것은 그곳에 사는 사람들뿐만이 아니다. 여행객들도 마찬가지다. 노숙자들에게 파리의 8월은 버림과 무관심의 시간이다. 그들이 알고 지내던 이들은 휴가를 가서 없고, 대신 그들을 믿지 못하고 경계하며 무서워하는 관광객들로 거리가 붐빈다. 여행객들은 노숙자들이 가방이나 돈을 훔칠까 봐 걱정하며 경계하지만, 사실 그들 입장에서 이런 관광객들은 보통 단체로 몰려다니기 때문에 별 기대가 없다. 그런데도 그들은 노숙자들이 다가가면 단체로 적의를 내보인다. 특히 중국인 단체 관광객들은 노숙자들이 파리 거리의 무슨 독특한 이미지라도 되는 듯이 사진을 연신 찍어대면서도 노숙자들에게 아무것도 주지 않는다. 웃음도 동전도.
우리 세계에 존재하는 부정적인 면은 다른 세계에서 더 강하게 드러난다. 노숙자들 중에서도 흑인이거나 유색 인종인 경우 피부색에 관한 안 좋은 말을 듣는다. 거리에서는 자주 인종차별주의자들을 만난다. 어떤 사람은 대놓고 프랑스 사람한테만 돈을 주겠다고 하기도 하고, 노숙자들은 불가리아나 루마니아에서 왔다고 보이지 않게 조심한다. 소매치기범으로 오해받지 않기 위해서.
다른 세계를 보다
빈대가 줄지어 기어다니고 침대 메트리스에도 곰팡이가 핀 방에서도 지내보았지만, 장-마리에게 가장 끔찍한 곳은 폐쇄된 지하철 역사다. 폐쇄된 지하철 역사에 사는 인물들에게는 그들만의 특유한 습관이 있어서 이를 방해해서는 안 된다는 것도 알게 되고, 혼란스러워 보이는 와중에도 그 혼란이 도를 넘지 않게 관리하는 깡패 집단이 있다는 것도 알게 된다. 그러나 지하철의 폐쇄된 역사에는 절대 익숙해질 수가 없다. 달걀이 썩는 듯한 오물 냄새가 피부에 달라붙어 물건들 속에까지 배어들었고, 어찌나 냄새가 지독했던지 때때로 이 냄새 때문에 가슴이 아파 쓰려오기까지 했다. 그는 절대 그 냄새에 익숙해질 수가 없었다. 우글거리는 쥐들 역시 마찬가지다. 그곳의 쥐들은 엄청나게 뚱뚱해서 고양이인가 하는 착각이 들 정도다. 그런 쥐들이 사방에서 우글거리며 발 주위를 왔다 갔다 한다. 쥐들을 쫓으려고 방망이까지 가지고 다니지만, 쥐들이 발을 갉아먹는 건 아닌지 마음을 놓을 수가 없다. 가끔 토요일 밤이 되면 젊은이들이 그룹을 지어 사냥을 하러 온다. 이런 젊은이들은 모험거리를 찾아 지하철 터널이나 폐쇄된 지하철 역사, 또는 하수구를 돌아다니는데 조심해야 한다. 술에 취해 건달 같이 행동하면서 이유 없이 부랑자들을 때리려고 하기 때문이다. 지하철 폐역사에서 사는 사람들은 쉬운 먹잇감이다.
장-마리가 다시 지하철 폐역사로 가는 일은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그의 활동 무대는 거리다. 20년 동안 그는 동전 몇 개를 얻기 위해 종이컵을 내밀며 길에서 구걸하며 살았다. 그런 그가 오늘날 이 거리가 얼마나 많이 변했는지를 말한다. 모든 것이 자극적이고 민감해졌다. 이제 거리는 전과 같지 않다. 모든 것이 이전보다 더 힘들고 더 공격적으로 변했다. 사람들은 옛날보다 자주 노숙자들에게 욕설을 퍼붓는다. 사람들은 정말 시간이 없고 전보다 두려움이 많아진 듯 항상 뛰어다닌다.
거리의 변화는 거리에서 구걸하는 사람들에게서 더 두드러진다. 점점 젊은 여성들이 많아지고 있다. 그들은 거리에서 지내는 게 더 힘들다. 남자들은 동전 몇 푼 주면서 대가를 요구하기도 하고, 남자들보다 때리기가 쉽기 때문에 폭력에 더 잘 노출된다. 젊은이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는데 술을 마시고 거칠게 행동한다. 몇 년 전부터는 집시들이 와서 조직적으로 활동한다. 여자아이들과 꼬마아이들이 사람들을 둘러싸고 혼을 빼놓으면 그중 하나가 지갑을 슬쩍 빼가는 일은 흔하다. 저녁이 되면 차가 와서 아이들을 데려가는데, 할당량을 못 채우면 거리에 남아서 마저 일을 해야 한다. 가짜 파킨슨 환자들, 다리가 하나밖에 없는 사람들도 많아졌다. 팔다리가 하나 없다거나 다리가 잘린 사람들은 구걸하기 위해 일부러 절단 수술을 하는 경우도 있다. 또 몇몇 거리에서는 구걸하는 사람들이 번 돈을 뜯어내려 하는 깡패 조직들도 있다. 점점 험악해지고 있다. 거리 역시 우리가 사는 사회와 마찬가지로 경쟁과 대립이 존재하고, 점점 더 배려심이 없어지고 난폭해지며, 새로운 세대가 이전 세대를 쫓아내고 있다.
결국 직원이 여럿 있으면 구걸로도 큰돈을 만질 수 있는 것이다. 꽤 수익이 많을 것이다. 깡패들은 바로 이 점을 간파하고 있었다. 그래서 이런 일이 수입이 좋은 직업이 되어버렸다. 나에게 구걸이란 살기 위해 필요한 수단이다. 반면에 그들에게는 돈을 많이 굴릴 수 있는 하나의 수단인 것이다. - 214쪽 펼처보기
▣ 작가 소개
저자 : 장-마리 루골, 장-루이 드브레
20년이 넘도록 거리에서 생활하는 장-마리 루골, 어느 저녁,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구걸’하던 중 한 남자에게 자전거를 지켜주겠노라 제안한다. 그런데 자전거를 타고 나타났던 이 사람은 다름 아닌 헌법재판소장 장-루이 드브레였다. 이 우연한 만남을 계기로 프랑스 헌법재판소장과 부랑자 사이에 돈독한 신뢰가 싹트기 시작했고 드브레의 도움을 받아 마침내 그는 자신의 이야기를 써보기로 마음먹는다.
마흔일곱 살의 이 ‘어린아이 같은 부랑자’는 사람들의 환심에 연연하지 않은 채, 거리의 삶을 소소하게 증언한다. 파리 19구에서 보냈던 어린 시절에서부터 고급스러운 마르베프 거리에 이르기까지 장-마리 루골은 힘겨운 시간을 버텨야 했다. 혼란스러웠던 청년기, 처음으로 ‘구걸’하던 시절, 사랑과 우정, 그리고 그가 버렸던, 혹은 떠나야했던 자식들…… 불법 점거지, 커다랗게 아가리를 벌이며 사람들을 빨아들이는 지하철 입구, 또는 공원과 손바닥만한 여인숙 방 한 칸의 기억과 함께 우리는 소외된 자들의 모진 일상으로 빠져든다. 보통은 우리가 피하려 했던 사람들이다. 그런데 폭력, 두려움, 빈곤의 한복판에 내동댕이쳐진 이네들은 어려운 일상에... 대처할 뿐 아니라, 협동심, 우정 역시 소중하게 여긴다. 우리도 이 여정에 잠겨볼 수 있을 것이다.
역자 : 신소영
파리 10대학 공연예술학과 마스터II를 졸업했으며, 공연 및 다큐멘터리 관련 콘텐츠 코디네이터로 활동해왔다. 현재 번역 에이전시 엔터스코리아에서 출판기획 및 전문 번역가로 활동 중이다. 옮긴 책으로는 《현재의 예술: 대화로 읽는 태양극단 이야기》, 《배우의 철학》 등이 있다.
▣ 주요 목차
여는 글
1 혼란스러웠던 어린 시절
2 아버지의 귀환
3 가출하다
4 피갈과 마르코
5 다시 노숙자로 돌아가다
6 일을 찾다
7 다시 거리로 돌아오다
8 만남
9 샹젤리제의 드러그스토어
10 희망이 다시 찾아오다
11 구걸 친구들
12 신을 믿다
13 정치
14 자원봉사자님, 고맙습니다
15 가혹한 짭새, 괜찮은 짭새
16 이제 노숙자가 아닌데도 거리가 좋다
17 변하는 거리
18 내일의 불안함
닫는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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