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어떤 경우, 모호함에서 명확함이 나올 수가 있다. 이 책의 경우다. 최소 스무 살의 혼자 사는 여자라는 것 외에는 아무 정보가 없는 주인공에게 느닷없이 공룡이 찾아온다. 거리낌 없이 눌러앉아 주인공의 일상을 휘저어놓는 공룡에 대한 정보도 아무 것도 없다. 이 모호하고 어리둥절한 정황을 작가는 유머로 끌고 간다. 공룡의 식탐은 어마어마하고, 잘 때는 코 골고 방귀 뀌는 게 장난이 아니다. 영화 보면서는 어찌나 생뚱맞은 반응을 보이는지 창피해 죽을 지경이다. 바이킹을 열 번도 더 타재서 나는 토할 것만 같다 ... 혹시 아이 키우는 이야기일까?
그러나 아니다. 주인공의‘너 누구니?’하는 질문에 모든 전모가 환히 밝혀진다. ‘그제야 기억 속 친구가 보인다. 우리는 짧은 시간을 함께 보냈고, 나만 어른이 되었다.’라는 글에서. 유머러스하지만 무채색에 가까운 일상을 완전히 뒤집는 무지갯빛 추상 그림에서. 열다섯 살, 배낭과 모자와 목에 두른 스카프라는 나들이 차림, 멸종된 공룡 ... 한순간에 명확해진다. 이것은 어떤 것들이 거의 멸종 수준으로 암흑 속으로 잠겨간 ‘그때의 시간’에 관한 이야기라는 것이.
이 책은 그냥 기억에 관한 작품으로도 손색이 없다. ‘나는 무엇을 기억하고 무엇을 잊으며 살아가고 있는 걸까?’라는 질문은 세계 어느 나라 독자에게든 깊은 반향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그런데 우리에게만 있는 어떤 공감대까지 불러일으킬 수 있을까? 아마 그럴 수 있을 것이다. 어느 시대, 어느 사회, 어떤 사람들에게도 그들만의 공룡이 없었던 적이 없으니까. 기억해줘서 고맙다며 오랜만의 여행을 마치고 가벼운 발걸음으로 돌아가는 공룡의 뒷모습을 보고 싶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없을 테니까.
- 추천자: 김서정(동화작가, 아동문학평론가)
▣ 출판사서평
우리는 무엇을 기억하고, 무엇을 잊으며 살아가는 걸까?
『너였구나』는 지지난해 『달려라 오토바이』로 우직한 삶의 풍경 한 조각을 독자에게 건넨 바 있는 작가 전미화의 신작 그림책이다. 그는 『씩씩해요』『미영이』, 2015년 볼로냐 올해의 일러스트레이터에 선정된 『빗방울이 후두둑』까지 멈추지 않고 꾸준히 그림책을 지으며 자신만의 세계를 만들어 왔다. 담백한 묘사와 가뿐한 보폭, 요란하게 꾸미지 않아 담담한 목소리로 전하는 이야기들은 쇠공처럼 묵직하게 독자의 가슴을 두드리곤 했다.
이번 이야기 『너였구나』는 선 굵은 전작들에 비해 섬세한 연출과 몽환적인 분위기가 돋보이는 작품이다. 부드러운 붓선과 유머러스한 문장, 군데군데 사용된 캔디 컬러들이 두 주인공이 함께 보내는 시간들을 특별한 색깔로 채워 간다. 공룡과 함께 보내는 시간은 생각보다 즐겁고, 공룡이 늘 매고 다니는 유행이 지난 스카프도 어딘지 낯익은 느낌이다.
그리운 것들로부터 시작되는 여행
“있잖아, 우리 마을 공룡들은 언제든 여행을 떠날 수 있게 준비해 둬. …여행의 시작은 기억이야.” 나지막한 공룡의 목소리를 들으며 나의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공룡이 찾아오기 얼마 전 우연히 발견한 사진 한 장. 짧은 시간을 함께 보냈지만 친구는 어른이 되지 못하고 사진으로만 남았다. 빛이 바랜 사진 귀퉁이에 찍힌 숫자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부드러운 바람이 불던 날이었다. “아, 너였구나.”
나는 눈을 감고 그때의 시간을 기억해 본다. 여행을 끝낸 공룡이 돌아간 뒤, 내 방에는 또 한 장의 사진이 놓였다. 아마도 공룡은 또다시 가방을 꾸린 채 여행을 기다리고, 나의 삶도 이전과 같이 계속될 것이다.
독자는 이제 작가가 건넨 구슬 하나씩을 받아들고 저마다의 기억을 소환하게 된다. 각자의 그리운 것들을 떠올리며 잠시만 눈을 감아 보아도 좋을 것이다. 『너였구나』라는 문장 뒤의 느낌표는 구슬의 여행이라 불러도 좋을 둥그런 연쇄가 우리의 허전한 삶을 지탱한다는 깨달음일지도 모른다.
▣ 작가 소개
글그림 : 전미화
한국일러스트레이션학교(hills)에서 그림책을 공부했다. 쓰고 그린 책으로 『눈썹 올라간 철이』, 『씩씩해요』, 『달려라 오토바이』, 『미영이』 등이 있다. ‘2015 볼로냐 올해의 일러스트레이터’에 선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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